브렉시트 국민투표, 그 의의와 전망—1달 경과 기념

영국에서 자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BREXIT: Britain + Exit)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있은지도 이제 꼬박 한달이 지났다. 지난 한달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당초 예상을 뒤엎고 ‘탈퇴’로 결론이 나자 세계의 외환・금융시장이 크게 출렁였고, 투표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퇴를 선언한 데이비드 캐머런을 대신해 테리사 메이 내무장관이 신임 총리로 빠르게 임명되었다. 그러는 사이 프랑스의 해안도시 니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끔찍한 테러가 일어났는가 하면, 터키에서는 군부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그밖에 남중국해를 두고 벌어진 중국과 주변국들 간의 갈등이나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미국의 대선 등은, 우리로 하여금 한달 전 영국에서 벌어진 국민투표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다. 아니,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브렉시트의 의미를 차분히 곱씹어보기에 제격인지 모른다. 지난 6월 23일(현지시간)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투표 결과가 갖는 ‘고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국민투표를 전후해서 쏟아진 브렉시트에 대한 분석들은 주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즉 브렉시트가 현실화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것이다. 쉽게 예상 가능하듯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면 영국은 당장 유럽 안팎의 기존 교역국들과 통상관계를 새로 수립해야 하며, 영국 국민은 이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과정은 어떤 정해진 시나리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기에, 여기엔 불확실성도 따른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경제적 성과의 후퇴로 귀결될 것이다. 때마침 지난 19일 국제통화기금(IMF)은 영국의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1.3%로 예측하기도 했다. 이것은 직전 전망치(4월)보다 무려 0.9%포인트 낮은 수치다.

영국의 EU탈퇴시 영국의 GDP 감소 예상치(자료: LG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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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위 표에 나타나는 수치들이 아무리 스펙타클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결국 실현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전망’일 뿐이다. 여기엔 수많은 ‘가정들’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브렉시트가 현실화되었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번에 투표한 영국 유권자의 51.9%가 브렉시트에 찬성하더라는 것뿐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영국 의회에서 결정될 사항이며, 이번 국민투표 결과는 오직 그 결정과정에서 참조사항일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돌이켜봐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번 국민투표 결과 그 자체의 의미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고유의’ 의미는?

사실 이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분석들이 제출된 상태다. 대체로 그런 논의들은 광신적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의 부활, 민주주의의 한계 노정 내지는 후퇴, 범지구화의 종말, 기존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 등의 주제로 수렴되는 것 같다. 딱히 ‘좌파’에 속하지는 않더라도 분별 있는 논자라면 이러한 사태들의 ‘경제적 배경’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흔히 대처리즘 또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1980년대 이후 영국의 정책기조와 범지구화(globalisation)가 더 이상 경제성장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그나마 그간의 성장의 과실은 인구의 최상위 1%가 모조리 가져갔다는 등의 내용이다. 실제로 영국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따라 유럽연합이 출범한 이래 비교적 빠른—특히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경제성장을 달성해 왔지만 노동소득분배율은 계속 하락했다.

영국의 실질GDP 증가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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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노동소득분배율(자료: ONS. Bank of England에서 재인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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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분석도─그 자체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이번 국민투표 결과가 갖는 ‘고유의’ 의미를 드러내기엔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번 투표결과와 관계없이 원래부터 존재하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이번 투표결과의 찬반이 뒤바뀌었다고 해서, 곧 51.9%가 브렉시트 반대에 표를 던져 ‘브리메인’(BRIMAIN: Britain + Remain)으로 결과가 나왔다면, 당신은 신자유주의 범지구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겠는가?2 또는 사람들이 거기에 여전히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국에서 외국인 혐오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범지구화의 후퇴, 좀 더 구체적으로 세계교역의 둔화는 지난달 영국의 국민투표 훨씬 이전부터 우려의 대상이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올초부터 순수출이 매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10% 이상씩 줄어 경제당국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지금 전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민중이 신자유주의적 범지구화와 그에 따른 소득불평등 심화에 진저리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불만은 때로는 월스트리트 점령과 같은 대중의 집적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선 외국인이나 기타 약자에 대한 혐오, 허황된 민족주의적 동원 등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것은 꽤 일반적인 현상이며 거대 독점자본과 거기 결탁된 정치인들은 이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고 때로는 부추긴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주로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이번 국민투표의 본질이 이민문제라고 호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3 하지만 반대로, 그 이민문제란 사실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표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해서 만족할 일도 아니다. 이런 식의 ‘근본적 힘’으로의 환원은 이번 국민투표 및 그 결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민도 아니고 경제도 아니다? 정치제도의 정당성 위기

이민도 아니고 경제적 토대에서의 양극화와 대중의 삶의 기반 잠식도 아니라면, 브렉시트 사태의 의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번 브렉시트 사태의 ‘고유의’ 의미는 그것이 ‘국민투표’라는 정치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어떻게 봐도,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이민에 대한 우려가 사회 전반에 걸쳐 깊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의 극우 정치세력에 의해 조장되고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의해 사실상 방조되어 온 것일 뿐, 통계상으로는 영국의 유럽인 이민들은 영국경제의 성장에 해롭기보다는 이로웠다. 사실 노동력의 질도 영국인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부연하자면, 흔히 영국의 유럽이민에 대해 말할 때, 폴란드 등 동유럽 출신의 하층노동자를 떠올리지만, 사실 영국에 있는 유럽출신 이민들 중 상당수는 고학력의 엘리트들이다. 이 두 부류 공히, 영국으로 몰려듦으로써 자국의 경제발전은 거꾸로 저해되는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영국에서 이민자에 대한 통제가 강해지면, 그것은 그 이민의 출신국에 대해선 ‘기회’가 되기도 한다.4

미시적・부분적으로는 영국이 유럽연합 바깥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제주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통계자료는 그것이 전체적으로는 성립되지 않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브렉시트 찬성이라는 국민투표 결과는 적어도 영국의 자본가와 그 주변의 지배세력에게 바람직한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의 자본에도 해로운 결과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렇게 ‘자해적인’ 결과가 나오도록 방치했는가?

영국에서 출신국별 고용의 GDP 성장률 기여도(자료: OE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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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는 그 결과가 아주 정당한 과정, 지극히 민주적인 절차를 따랐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대의민주주의가 ‘대의’하는 것은 ‘민의’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것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소수의 자본가와 자산계급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일 뿐이다. 현대의 정치제도는 이러한 소수의 이해관계를 다수의 이해관계, 즉 ‘민의’인 듯이 포장하는 데 능하다. 선거라는 장치가 있지만, 여기서 대중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심각하게 제약되어 있고, 그마저도 대중매체를 통해 조작되기 일쑤다. 따라서 힘을 가진 이들은 민의를 따르는 체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킨다.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만 해도 그렇다. 극심한 경기침체와 양극화로 흉흉해진 민심이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 등으로 나타났고, 일부 소수파 극우 정치세력은 이를 이용하고 조장하면서 성장해 마침내 주요 정치세력을 위협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들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집권 토리당의 캐머런 총리는 브렉시트에 대한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언한다(2013.1). 그는 선거에서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고(2015.5) 유럽연합으로부터 영국의 특수한 지위를 약속받는(2016.2) 등 일정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나서야 국민투표 실시 일정을 공포했지만, 결과는 브렉시트 찬성! 즉 지배적인 정치세력과 그들이 대변하는 자본가들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자해적인 결과는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고 자랑하던 민주주의적 방식을 따른 것으로, 거대 자본과 정치권력들은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난감함이 이번 브렉시트 사태의 핵심이다.

향후 사태의 전개방향: 국민투표 이전으로 되돌리기

그렇다면 이번 브렉시트 사태에서 훼손된 정치제도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겉보기에 영국의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찬성 결정은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 그 정치적 형태로서의 유럽연합에 대한 거부가 표면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에서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영국 정도의 규모와 영향력이 있는 나라에서 이런 결과가 벌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추가탈퇴 움직임이 있을 것인가? 나아가 유로존 회원국이 탈퇴하는 일도 벌어질 것인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영국의 국민투표에서 충격을 이미 겪었으므로 유럽의 지배계급들은 ‘회원관리’에 더욱 철저를 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 추가탈퇴는 탈퇴 당사국과 유럽 전체에 현재의 경제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향후 영국과 유럽의 자유주의적 지배 엘리트들은 이번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를 가능한 한 무력화시키고 국민투표 이전으로 사태를 되돌리기 위해 힘쓸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번 영국민의 브렉시트 찬성 결정이 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정당성 훼손이다. 민주주의적 방법, 그것도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인 국민투표의 결과를 되돌릴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이, 대의 민주주의 안에서 어떻게 찾아질 수 있을까? 현재 영국과 유럽의 지배계급들은 바로 그러한 불가능한 수단을 만들어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있다. 그러나 벌써부터 일부 중도적인 성향의 싱크탱크에서는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더라도 최대한 탈퇴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일종의 로드맵으로 내놓고 있다. 메이 총리 취임 뒤에는 영-EU 간에도 국민투표 결과 발표 직후의 냉랭한 분위기—영국, 정확히는 이번 사태를 주도한 유럽의회의원 나이젤 패라지 등에 대한 ‘괘씸죄’, 다른 EU회원국의 추가탈퇴 방지 등을 위해 조성된—가 조금씩 가시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돈다. 앞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브렉시트를 무력화시키고, 유럽과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여론과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5

결론에 대신하여

정치제도의 정당성의 측면에서 브렉시트 사태의 의의를 찾는 이상의 설명은 비유물론적인, 정치 우위적인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의 공황에 이은 장기침체와 극심한 양극화가 몇몇 국지적인 소요를 낳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침내 정치제도 자체를 뒤흔드는 정도로까지 발달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좌파들에게 제기되는 하나의 어려움은, 그러한 정치제도의 위기가 좌파들의 정치적 실천 또는 대중의 현체제에 대한 불만이 적극적으로 표출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브렉시트에 대한 찬성-반대는 현체제에 대한 찬성-반대, 일반적으로 말하면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입장차를 반영할 수 없는 틀이었다. 어쩌면 바로 여기에서,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지도부가 처했던 난처함도 비롯된다. 국민투표 직후 코빈 지도부는 브렉시트 반대 입장을 좀 더 강하게 견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당내에서 받았다. 그러나 과연 브렉시트를 반대하는 것, 결과적으로 현재의 유럽연합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진보 좌파의 길인가?6

국민투표를 영국 국민들의 브렉시트 찬성 의사가 확인된 만큼 브렉시트의 실현을 위한 정치일정이 이제 하나씩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브렉시트는 영국과 유럽의 자본가들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지배계급들은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를 무력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을 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좌파들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현재 경제적 토대로부터 상부구조의 다양한 영역으로 번지는 위기 상황을 어떻게 진보적으로 이용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지금부터 한동안 영국(과 유럽)의 좌파들에게 제기될 핵심 문제일 것이고, 브렉시트 찬성-반대라는 꽉 조이는 틀에서 벗어난 이제부터가 진정한 ‘브렉시트 정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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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황 이후에 살짝 올라간 것은, 임금이 늘어서라기보다는 기업이윤, 자산소득 등이 줄어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런 소득들에 비해 임금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성격이 있다.

  2. 이것은 그저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최근의 세계무역 감퇴를 곧장 범지구화의 종언으로 해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브렉시트만 놓고 보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글로벌 경제침체와 관련된 것일뿐 아니라, 이를 통해 오히려 유럽 외 지역의 연결고리가 더 탄탄해질 수도 있다고 보는 게 현명한 태도다. 물론 그 ‘연결고리’의 성격이 결코 주변국들과 중심부의 민중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범지구화 찬양론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3. 그러나 이민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보는 게 극우세력만은 아니다. 중도적 자유주의 세력 또한 현재의 사태를 이민에 대한 관용이냐 불관용이냐라는 ‘도덕적’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동시에) 자유주의적 가치 아래 대중을 동원하고자 한다.

  4. 물론 유럽의 주변국들의 경제 및 사회의 발전이 중심국의 이주민 통제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5. 여기서, ‘늬들 사이좋게 지내’라는 대서양 반대쪽의 리버럴 지식인들의 ‘충고’가 연이어 나올 것이다.

  6. 그런 의미에서, 가장 진보적인 길은 애초부터 국민투표를 보이콧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어리석은 국민투표를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국민투표를 거부하기는커녕, 실제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영국의 대중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현대사회에서 대중은 선거와 같은 정치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적・정치적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이번 국민투표 결과는 이른바 대의 민주주의가 담보하는 이 ‘교육적’ 기능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시민들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자 임금삭감에 혈안이 된 정부

이번 정부 들어서 진행되는 일련의 움직임들을 보면, 이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임금을 어떻게든 줄여서 기업의 수익성을 높여주려고 혈안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정부의 책임 또한 방기하고 있다.

이를 간단한 그림으로 보자. 먼저 평균적인 사람의 수명이 70살이었다고 해보자. 이 경우 보통 태어나서 20살까지는 소비만 하고, 대략 20~60살에는 일을 하지만 동시에 이래저래 소비도 증가한다. 그러다 60살에 은퇴하고 소비만 하면서 10년쯤 살다가 죽는다. 아래 그림은 이를 단계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먼저 (가)와 같이 사람의 생애를 나누면, 보통의 사람들은 (나)와 같이 소비를 하는 반면, (다)와 같이 생산활동에 참여해 임금소득을 얻는다. 소득이 나이에 따라 증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는 ‘연공서열제’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듯, 사람들은 (라)에서 A로 표시한 파란색 부분의 잉여를 소비가 소득을 초과하는 부분에 배분할 것이고, 결국 평생을 놓고 보면 (소득)=(소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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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신이 미래에 벌 돈으로 유아/유년기에 필요로 하는 소비수요를 충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삶의 재생산은 가정을 단위로 이뤄지므로, 이 재생산은 세대간에 중첩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분석에서 아무런 어려움을 제기하지 않는다.

또 하나. 이제껏 우리나라에서 위와 같은 삶의 ‘정상적인’ 재생산이 가능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일단은 그랬다고 가정하자. 그래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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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단하다. 일단 앞서의 그림에서 마지막 것을 초기 상태로 두자. 최근 정부가 맹렬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임금피크제는, (마)에서 보듯이 애초에 노동자가 받기로 되어 있던 임금의 일부를 안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55살 먹은 노동자와 이제 갓 입사한 20대 노동자를 놓고 보면 전자의 임금이 터무니없이 높아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저 50대 노동자가 젊은 시절에 자신의 기여분(?)보다 덜 받았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연공서열제를 통해 기업은 노동자로부터 충성심을 얻고 노동자는 노후의 안정적 설계를 쉽게 할 수 있다. 어쨌든 임금피크제라는 것은 애초 노동자가 받기로 된 부분을 안 주겠다고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임금삭감은 노동력 재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할 것이다.

다음으로 (바)를 보자. 임금피크제로 우리 사회가 진통을 겪기 전에, 한동안 국민연금이 문제로 되었었다. 지금처럼 가다가는 조만간 재원이 고갈된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가 연금기금 기여금을 더 내든지 아니면 덜 받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 논란의 골자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연금문제의 핵심은, 애초 그 연금이 설계될 때 상정된 것보다 사람들이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국민연금은 적립식(funded system)이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생산가능인구 감소 따위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순전히 이것은 수명연장의 문제다. 즉 애초엔 수명이 70년이라고 상정해서 연금제도를 설계했으나 수명이 80년으로 늘어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 늘어난 기간 동안 소비액(위 그림 바에서 B 부분)을 위한 재원이 어디에서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가 연금기여금을 더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생애임금 총액 자체가 B만큼 늘어야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의 임금 삭감이다.

이 문제와 관련, 노동자의 수명연장에 비례해 임금을 올린다면 자본가의 이윤이 낮아질 수 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인가? 또한 예전 같으면 경제학자들이,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노동자의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진보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존 스튜어트 밀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가진 이론적 오류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이 그런 정책을 공공연히 내놓을 정도로 낮은 ‘문명’ 수준은 아니지 않은가.

(이에 대해선 다음 글 참조: 국민연금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끝으로 (사). 위의 두 그림에서 보듯이.. 임금피크제가 그 일부인 노동개혁이나 연금개혁은 모두 노동자의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 둘이 국지적인 성격의 임금삭감이라면, (사)는 생애 전체에 걸친, 일반적인 임금삭감 노력이다. 최저임금을 필요에 맞게 주지 않고, 특히 올해 최저임금 협상에서 문제되고 있듯이 법에 명시된 주휴수당 등을 노동자에게 주지 않으려 하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한다.

(참조: ‘주휴수당 논란’을 넘어)

이번 정부가 시행하는 임금피크제, 연금 ‘개혁’, 최저임금제 등은 모두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지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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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독립성의 두 가지 의미

요즘 중앙은행 독립성 가지고 말이 많다. 여기서 하나 재밌는 것은, 전통적으로는 ‘진보’에 속하는 이들이 이 독립성을 지키고자 했던 반면 요즘엔 오히려 진보진영의 인사들도 중앙은행 독립성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즉 요즘 같이 어려운 시기에 중앙은행은 ‘독립성’ 따위에 구애받지 말고 정부와 합심해 뭐라도 좀 해야 한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중앙은행의 독립성/중립성에 깃든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를 편의상 ‘내용적 독립성’과 ‘형식적/절차적 독립성’이라고 각각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진보진영이—특히 우리나라에서—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것은 지난 군사독재 시절 그것이 권력의 사금고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은행 고유의 통화신용정책이 권력자들의 입맛대로 구사된 결과, 어떤 이들은 이득을 보았겠지만 사회의 다른 모든 세력에겐 손해가 갔다. 말하자면 중앙은행이 형식적/절차적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그것을 통해 실행되는 정책들이 내용적 독립성/중립성도 견지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중앙은행의 독립/중립성이 세상만사와는 별개로 ‘마이웨이’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2007-08년의 위기와 그에 잇따른 장기침체에서 선진각국의 중앙은행이 해온 일을 떠올리면, 최근 10년간 중앙은행의 ‘세속화’는 그야말로 스펙타클했다. 흔히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절간’이라고 부른다. 하는 일이 별로 티도 안 나고, 구성원들도 조용조용하게 일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선진각국의 중앙은행들을 보면, 도탄에 빠진 나라를 보다 못해 스스로 떨쳐 일어나 의병장이 된 우리 역사속의 고승들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중앙은행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곧장 독립성 포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독립성이란 중앙은행의 일의 내용보다는 그 일과 관련된 의사결정의 방식과 절차에 일차적으로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서 어떤 특정한 경제주체에게 비대칭적인 이득이 가는 방식의 행위를 했다는 것, 즉 ‘내용적 독립/중립성’을 견지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중앙은행이 이러한 겉보기에 중립적이지 않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경제가 더 나빠져 모든 경제주체들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그와 같은 중앙은행의 행위를 기계적인 ‘독립성’이라는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부적절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발권력 동원이라는 행위를 어떤 경위에서 결정했는가다. 이를테면, 권력의 요구에 못이겨 결정한 것인가? 자본가들의 로비와 압력에 녹아들어간 것인가? 아니면, 한국은행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뒤 그 의결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책임감 있는 위원들의 수준 높은 토론을 거쳐 결정된 것인가? 다시 말해, ‘형식적/절차적 독립/중립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이냐는 것이다. 이번 정부의 국책은행 구제안에 한국은행이 참여하기로 한 결정은 그렇다면 어느 쪽이라고 해야 할까?

이상의 고찰은 비단 중앙은행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국가 일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군사독재정권의 권위주의적 개입에 대하여 국가의 불간섭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기도 하였지만, 작은 정부와 불개입주의를 신조로 삼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할 때에는 국민의 삶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정부를 희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개입주의’라는 겉모습만 보고서 군사독재 시절의 권위주의적 정부와 오늘날 진보진영이 옹호하는 민주공화적 정부를 등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두 개입주의적 국가를 구별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의사결정의 메커니즘, 그 민주성이라고 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내용적인 차원에서의 질적 차별성을 낳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요구되는 중앙은행의 중요한 덕목이 적극성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정책이 그 중립성을 훼손시킬 수도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은 공공복리의 증진을 위한 것이어야만 하지, 특정 세력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중앙은행이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앙은행 의사결정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요컨대, 오늘날 세계적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신용정책들이 ‘내용적 독립/중립성’을 포기한 듯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절차적 독립성’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중립성의 문제는 오히려 후자의 관점에서 재구성되고 반추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심각하게 제기하여야 한다: 이제까지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행한 (양적 완화(QE)를 포함한) 비전통적 통화신용정책들은 정말로 중립적이었는가? 그것들은 100% 공공선을 위한 것이었는가? 혹시 그것은 거대자본의 이해관계에만 특수하게 복무한 것은 아니던가? 등등. 선진국 진보진영 일각에서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와 같은 대안들이 나오고, 여기에 (운동가뿐 아니라) 진지한 경제학자들까지도 동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참고) 몇 년 된 기사이지만, 이상의 내용과 관련,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http://www.independent.co.uk/news/business/analysis-and-features/what-price-the-new-democracy-goldman-sachs-conquers-europe-62640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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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넘어: ‘사내유보금’ 논의의 일보 전진을 위한 노트

1. ‘사내유보금’을 둘러싼 논란이 첨예해지고 있는 가운데, 그것에 대한 ‘오해’도 다방면으로 커지고 있다. 사내유보금에 문제제기하면서 거기에 세금을 물리자거나 환수하자는 주장들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가해지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비판들이 너무 편협하고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밌는 점은, 사내유보금 문제제기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우파’들만 하는 게 아니라 진보진영에 속하는 적지 않은 세력들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쨌든 유감스럽고 슬픈 일이다. 조금 더 상대방을 이해하고, 유익한 방향으로 이 사회를 이끄는 데 기여하면 좋겠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문제제기의 골자는 (가) “기업들이 고용이나 배당도 안 하고 투자도 안 하면서 막대한 양의 사내유보금만 쌓고 있다”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분석에 따른 실천적 대안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리는데, (나)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매겨 기업이 임금이나 배당으로 더 많이 분배하도록 하거나 더 많이 투자하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 중 하나이고, (다) “막대한 사내유보금은 기업들이 그간 노동자들과 하청업체에 ‘제값’을 주지 않았음을 의미하므로 사내유보금을 환수해 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쓰자”라는 것이 다른 하나다.

이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의 골자는 “사내유보금의 개념도 모르는 소리”라는 거다. 마침 최근에 {조선일보}의 김기천 논설주간의 칼럼이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은 바 있는데, 그의 총평은 ‘조롱’에 가깝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시비는 대부분 재무제표에 대한 몰(沒)이해의 결과다.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고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 있다”거나 “사내유보금을 환수하면 민생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헛소리다. 사내유보금을 이유로 야당이 법인세 인상을 추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습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위 (가)~(다)에 사내유보금에 대한 일정한 ‘오해’가 담겨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 한다’라는 오랜 금언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또한 김 논설주간은 그 ‘오해’가 아주 대단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별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범하는 다른 종류의 오해(?)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 (가)~(다)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를 보자.

2. 먼저 사내유보금이란 간단히 말하면 매년 기업이 거두는 순이윤(총매출액에서 각종 비용과 세금, 배당금 등을 뺀 순수한 이윤)의 축적분 총량이다. 어떤 기업이 1천원의 초기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해 매년 20%의 이윤을 거둔다고 해보자.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50년 뒤 이 기업의 자본은 무려 9백10만원이 넘게 된다.

사내유보금

물론 이 돈은 보통 생산설비의 형태로 투자되어 있거나 각종 비용으로 지출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막대한 사내유보금이 쌓이고 있다”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면 (가)는 틀린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핵심은 사내유보금이 막대하다는 게 아니고, “기업이 고용, 배당, 투자에 소홀하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이 고용, 배당, 투자에 소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자체로 사내유보금 축적의 결과는 아닐지라도) 사내유보금과 무관한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 사내유보금은 축적된 이윤 총량으로서 저량(stock) 개념이지만, 매년 쌓이는 축적분에 주목하면 유량(flow)이기도 하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게 가능하다면, “기업들이 지금까지 쌓은 막대한 이윤(=사내유보금)의 대부분을 투자하고는 있긴 하지만, 최근들어 이윤은 많이 거두는데도 고용이나 배당, 투자에는 인색하다”라고 하는 진술도 100% 가능하다. 이상으로부터 (가)를 가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가) 기업들이 고용이나 배당도 안 하고 투자도 안 하면서 막대한 양의 사내유보금만 쌓고 있다.
(가’) 최근들어 이윤축적으로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기업들은 고용, 배당, 투자에는 소홀하다.

3. 기업들이 이윤을 거두면서 고용/배당/투자에 소홀한 것은—어떤 이들은 그게 뭐 잘못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충분히 사회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로서, 만약 기업을, 특히 현대의 대법인기업을 단순히 특정인의 소유물이기보다는 사회적 기관으로 본다면, 고용/배당/투자에 쓰지 않을 돈을 기업 안에 묵혀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요즘같은 불황기에는 더더욱 말이다. 기업들은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어 투자를 꺼리지만, 사회적으로 투자가 필요없는 상황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나)의 주장처럼 세금을 물려 내부유보의 비용을 높임으로써 기업들이 고용/배당/투자에 더 힘쓰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만약 기업이 노동자를 더 고용하거나 기존 노동자에게 임금을 더 주면—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이윤이 줄어들 것이고 그에 따라 사내유보금(총량)도 보다 천천히 증가할 것이며, 증가한 소득으로 개인들이 소비를 늘린다면 경기진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는 이도 저도 아니라면, 일정액이 넘는 이윤은 그냥 세금으로 국가에 넘길 수도 있겠다. 국가는 이를 재원으로 개별 기업이 감행하지 않는 사회적 투자를 함으로써 인적자원의 질을 높이고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낮춰 결국 기업경쟁력 향상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나)는 다음과 같이 교정하면 되겠다.

(나)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매겨 기업이 임금이나 배당으로 더 많이 분배하도록 하거나 더 많이 투자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 매년의 이윤 중 사내유보금으로 쌓이는 부분에 세금을 매겨 기업들이 임금/배당/투자를 늘리거나, 국가의 세수를 늘려 공공투자에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내유보금 총액이 아니라 매년의 증가분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고, 실제로 지금 시행중인 ‘기업소득환류세제’도 그렇게 설계돼 있다. 물론 세금을 물리는 데는 찬성해도 그 방식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법인세 인상이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로서 추후에 전문가들끼리 결정해도 될 사안이다.

4. 한편 어떤 이들은 현행 ‘기업소득환류세제’가 전체 사내유보금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데 불만을 갖기도 한다. 이런 이들은 사내유보금 총액 중 일부를 아예 ‘환수’하자고까지 주장한다. 바로 (다)의 주장이다. 그러면 여기엔 어떤 오해와 ‘몰이해’가 깃들어 있는가?

앞서 예로 든 그림을 다시 보자. 1960년에 한 자본가가 단돈(?) 1천원을 들여 세운 기업의 규모가 50년 뒤에 무려 9천1백배가 되었다. 마르크스(Karl Marx)에 따르면 이러한 축적분은 모두 노동자를 착취한 결과로서, 2010년에 기업이 보유한 9,100,438원 중에서 1천원을 뺀 나머지는 몽땅 노동자에게 돌려져야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런 주장을 적어도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거니와, (다)와 같은 ‘사내유보금 환수론’도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는 굉장히 ‘개량적인’ 문제제기다.

엄밀히 말해 ‘환수론’은, 기업이 지난 50년간 축적한 총이윤(=사내유보금) 9,100,438원이 ‘정상적인’ 착취에 입각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업의 것임을 순순히 인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노동자에게 마땅히 주었어야 할 임금을 주지 않고 거둔 것이라면, 노동자를 위한 작업안전을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을 아껴서 거둔 것이라면, 하청업체를 후려치고 소비자를 기만하면서 거둔 것이라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간 이런 ‘부당행위’를 통해 거둔 ‘부당이윤’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러한 ‘환수’가 지금 특히 문제로 되는 까닭은, 이상과 같은 그간 대기업들의 ‘부당행위’의 결과들이 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노동인구 절반에 육박하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꿈을 잃었다. ‘초일류’ 대기업에서 직업병으로 수십명이 죽어나가고, 용광로에 빠져 죽고, 지하작업작에 매몰돼 죽고, 떨어져 죽고, 기계에 끼어 죽는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고, 누군가 비용을 내야 한다. 누가 낼 것인가? 당신이 낼 것인가? 결국 ‘환수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환수’는 이미 현행법체계 아래서도 이뤄진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같은 것이 그런 성격이다. 그러니 핵심 쟁점은 ‘환수’ 자체가 적절하냐 여부라기보다는, 환수론자들이 제기하는 저임금 등이 환수의 ‘대상’이 되느냐 여부인 것이다. 자, 우유회사 몇몇이 담합해서 가격을 높여 부당이득을 취하면 아마 당신은 이를 환수의 대상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들이 공모해 노동자들을 값싸게 부려먹고 사지로 내몰면서 취한 이득은 ‘부당이득’인가? 이를 ‘환수’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법전에 의지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 사회의 양식 수준에 따라, 세력관계의 양상에 따라 결정될 따름이다.

사내유보금은 이미 투자되어 있는데, 이를 어떻게 환수하겠느냐고 대거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서 인용한 김기천 논설주간도 그 중 하나다. 나는 묻고 싶다. 그러면 내돈을 훔쳐간 사람이, 또는 빌려간 사람이 “그 돈은 이미 저 차를 사는 데 썼소. 저 차는 내 생활밑천이오”라면서 그의 앞마당에 주차된 포르쉐를 가리키면, 나는 돈을 돌려받길 포기해야 하는가? 공정위가 우유회사에 과징금을 물 때, 그런 사정을 참작하는 게 옳겠는가? 핵심은 ‘책임’이고 ‘비용지불’이다. 그러니 그간 ‘부당행위’로 덕을 본 주체들이 그 비용을 사내유보금으로 하든 다른 무엇으로 하든, 그 책임이행과 비용지불을 요구하는 측이 신경쓸 필요는 없다. 또한, 만약 ‘환수’라는 해법이 마음에 안 들면, 대안을 내놓으면 된다.

5. 이상을 정리하고 약간의 제언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내유보금에 대한 오해의 상당부분은 ‘축적된 총량’과 ‘신규 축적분’만 제대로 구별해도 풀린다.
둘째, ‘환수론’의 핵심은 사내유보금이 아니라 그간 기업들이 저지른 ‘부당행위’에 대한 책임이행과 비용지불을 기업이 해야한다는 데 있다.
셋째, 진짜 오해를 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절박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무시하려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넷째, 기업의 본질이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데 사내유보금은 괜찮은 ‘entry point’였지만, 본격적인 문제제기에는 사내유보금보다는 ‘이윤’이라는 좀 더 직접적인 형태에 대해 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6. 그밖에 몇 가지…

(1) 이상의 내용을 다음 글로 발표하기도 했다: ‘재벌 ‘사내유보금’ 754조…기업들 사회적 책무 져야’(한겨레, 2016년 6월 3일자).

(2) 위 글의 제목은 다소 misleading하다. 사내유보금 총액이 얼마냐는 것은 나한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와 관련, 흔히 800조원을 넘나든다고 하는 사내유보금을 두고 ‘막대하다’고 하지만, 나는 이 수치가 매우 과소추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총 국부가 1경이 넘어가는데, 기업이윤축적총량이 저것밖에 안 된다고? 훗. 아마 전경련 등은 속으로 좋아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사내유보금’ 문제제기의 의의와 효과는 제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문제삼는 진영은 그래서 여기 머물지 말고 ‘다음 스텝’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3) 역사적으로 보면, 사내유보금을 둘러싼 입장은 진보든 보수든 복잡미묘하게 변해왔다. 최근 나는 이에 대해 간략히 훑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겨레, 2016년 6월 6일자)

(4) 이제까지의 내용에서 드러나듯이, 흔히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노동/사회운동 진영이 ‘사내유보금’을 공략하는 것은 운동의 강성의 표현이 아니라 약화의 표현이다. 나름대로 대중적 소구력이 있는 사내유보금에 대한 문제제기로 역량을 결집해, 좀 더 본질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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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호] 정운영,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
정운영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은 언젠가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국민이 그들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사실 원하는 정부를 세우고 원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회를 ‘이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최초의 기본적 요구마저 쉽사리 수락되지 않는 현실의 온갖 갈등 때문에 그것을 이상적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습관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여기서 ‘원하는 정부’라는 뜻 안에는 유권자의 의사가 완벽하게 개진되고 전달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자유의 신장이라는 항목이 가장 중요한 몫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상, 정치, 문화 등 사회의 상부 구조에 속하는 여러 영역에서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제일차적 지표가 되어야 한다.

‘원하는 상품’의 의미 역시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의 질과 양이 사회 전체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소비재의 질에 대한 판단은 예컨대 추위를 가릴 서민의 집과 한가함을 달래기 위한 호화로운 별장 가운데 무엇을 먼저 지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벽돌을 찍느냐 아니면 대리석을 수입하느냐는 토론은 단순히 비용이나 효율성의 측면이 아닌 사회의 양식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와 직결된다.

소비재의 양이 결정되는 방법도 한 개인의 근면이나 한 개인의 자비심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불과 몇 장의 지폐를 봉급 봉투에 보태기 위해서 소리 지르고, 얻어터지고, 잡혀 다니고 그러다가 어떤 때는 목숨을, 단 하나뿐인 그 목숨을 잃기도 하는데, 어째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억원이 선거마당으로 풀려나가고, 수십억원이 나라 밖으로 도망나가고 수백억원의 돈이 성금이란 이름으로 호기롭게 한 사람의 주머니를 채워줄 수 있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는 사회 전체에 제기해야 한다.

자유의 보완 개념인 평등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인 생산물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서로 나누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사회의 양식 또는 공정한 분배를 사회의 정의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면, 원하는 정부와 원하는 상품에 대한 강조는 한마디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요컨대 자유가 숨쉬고 정의가 흐르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 바라고 세워야 할 사회이다. 그 과정을 당분간 ‘경제의 민주화’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로 자유를 신장시키는 정치 행위와 정의를 확보하려는 경제 행위가 전혀 별개의 사항이 아니다.

우선 사회의 재물이 몇몇 선택된 사람들에게 집중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치권력이 필요하며, 반대로 권력은 자신이 수행한 경호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독점된 이익의 일부를 떼어주도록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정경유착이니 국가독점 자본주의니 하는 어려운 이론을 끌어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축적된 재산을 그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기 위해서도, 합의된 본래의 궤도로부터의 이탈을 예방하고 바른 진행방향을 꾸준히 일깨우는 정치 세력의 존재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앞서 가고 있으나 정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현실을 잘못 진단한 실수이거나 사실의 한 면을 고의적으로 가리려는 음모일 수밖에 없다. 되풀이하자면 경제가 성장한 만큼 정치가 발전했다고 말하거나 정치가 낙후된 만큼 경제도 불안하다고 말해야 정확하게 그 뜻이 전달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전자의 주장에 흔쾌하게 찬표를 던질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수가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됨으로써 소수가 인간 이상답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추방된 니카라과의 독재자가 훔쳐 달아난 재산이 그 나라의 성장과 관계가 없었고, 폐위된 이디오피아의 황제가 마차 밖으로 뿌리고 다녔던 동전 역시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듯이, 정녕 경제에서의 성장이 정의라는 내실을 갖출 때에만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경제는 바로 이 점에서 실로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약속은 1961년 5월 총을 들고 한강을 넘어 온 사람들이 내건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그들이 하나의 밀알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금 먹지 말고 더 불려서 나누자는 논리를 폈을 때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그 밀알은 15곱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각성제를 먹고 제 살을 찔러가며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자유’와 밖으로 닫아건 방 속에서 불이 나면 고스란히 타죽을 수밖에 없는 ‘정의’가 절망과 기아선상을 대신했을 뿐이라면, 그 밀알을 키우는 데 쏟았던 우리의 노동과 애정은 도대체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역사가 가르치는 바가 그렇고 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도 그러하듯이, 비록 그 밀알이 1백50배로 켜져도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지 않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할 것 같다. 그러므로 경제의 민주화는 밀알을 키우는 노력을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 수확이 모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분배되도록 규제하는 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의 하나는 분배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향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가 성장의 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는 한쪽에서의 애걸과 다른 한쪽의 동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강인한 투쟁과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만이 국민이 원하는 소비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실로 확고한 것이라면, 그 소망을 성취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민주경제’ 건설의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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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구조의 개혁은 청년으로부터: 20대 총선 주요 원내정당의 청년공약을 보며

 

한국 사회에서 청년은 가장 취약한 계층이다. 그들은 보통 ‘(대)학생’이나 ‘알바생’으로 표상되고,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저임금 알바로 학비와 방세를 벌며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다. 하지만 그 ‘불안’은 청년기를 벗어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1997년 외환금융위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생물학적 노령화와 사회경제적 청년화

지난 20년간 지속된 경제위기 속에서, 청년층이 장년으로의 문턱을 넘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스무해 전 처음으로 투표권을 쥔 청년의 상당수는 4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비정규직이 일반화되고 주거가 월세화하면서 이 불안은 사회 전체의 정서로 자리잡았다. 바야흐로 모든 연령대가 ‘청년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나타나는 전(全)세대의 사회경제적 청년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헬조선론이나 수저계급론 같이 일부 청년의 온라인 은어들이 한국의 사회와 경제 전체를 요약하는 열쇠말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총선에서 각 당이 ‘청년공약’으로 내놓은 것들을 보면 위와 같은 변화가 잘 감지된다. 대학등록금이나 수혜층이 청년일 수밖에 없는 일부 정책을 제외하면, 이들을 굳이 청년층에 한정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취업경험이 없어 고용보험이나 국민연금의 ‘안전망’ 바깥에 있는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이 다수 제출되어 있지만, 고용・산재・의료・연금 등 4대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몰린 것은 청년층만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고용이나 주거와 관련해서 통상적으로 청년층의 어려움이라고 여겨지던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정부가 내놓을라치면, 늘 한쪽에서는 형식적으로는 청년층을 벗어난 이들이 ‘역차별’이라는 볼멘소리를 내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은 더 이상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저임금, 일자리에서의 차별, 주거난, 연애・결혼난(?) 등은 더 이상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한된 정부지원을 두고 이제 청년들은 다른 세대들과 경쟁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정부의 청년정책 수혜연령 상한을 29세에서 34세로 높이는 것─현재 모든 주요 정당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은 따라서 불가피한 고육지책이다.

청년정책을 보면 경제비전의 차이가 보인다

말하자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청년문제는 개인적·생애주기적이기보단 구조적·항구적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생물학적 청년들은 이렇게 일반화된 청년문제와 함께 그들 세대 고유의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청년정책’이라는 것도 이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고려해서 제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각 정당이 내놓고 있는 정책들을 뜯어보면, 전반적으로 새누리당은 청년문제를 개인적·생애주기적 차원에서, 그리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구조적·항구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음이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난다. 국민의당의 경우엔 몇몇 전향적인 인식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전자에 가깝다.

이런 차이는 일자리 정책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새누리당은 기존에 정부가 내놓았던 청년일자리사업을 지속・확대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작년에 주요 기업들의 ‘팔 비틀기’로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던 청년희망펀드를 통한 일자리 창출계획을 맨 앞에 두었다. 최근 청년희망펀드의 일자리 창출 실적이 미미하다는 언론의 보도에서도 확인되듯이(링크), 이런 정책은 구태의연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실업계 학생들에게 벤처학자금 수여와 졸업 후 벤처기업 취업을 연계하겠다는 계획이나 워킹홀리데이 등을 통한 해외취업 확대계획도 마찬가지다. 모든 청년들이 평생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청년일자리 정책에서 돋보이는 것은 노동시간 단축과 공공부문 확충을 통해 청년일자리를 대폭 늘리겠다고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결코 새로운 정책은 아니지만, 현재 OECD에서 최장을 자랑하는 노동시간을 전반적으로 줄이는 동시에 OECD 평균의 절반밖에 안 되는 공공부문을 확충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경제 전체의 구조와 체질을 바꾸겠다는 공언에 다름 아니다. 물론 공공부문 확충은 국가의 복지 기능 강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아주 원대할 뿐 아니라 실현이 쉽지 않은 정책이기도 하거니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정당이 이를 ‘청년일자리 정책’으로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양 당은 우리 경제와 사회의 미래인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경제의 구조를 바꿔나가겠다는 의지를 희미하게나마 내비친 셈이다.

위와 같은 인식이 희미하다고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두 정당은 노동시간 단축과 공공부문 확충으로 늘어날 일자리가 굳이 ‘청년’에게 가야 할 당위성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년의 범위를 29세까지로 하든 34세까지로 하든, 새로운 일자리의 수혜층을 이렇게 제한할 이유가 있는가? 이를테면 35세나 40세 되는 사람들은 안 되는가? 생물학적 연령대를 막론하고 인구의 다수가 ‘청년화’하고 있는 현재 한국에서, 연령대를 기준으로 한 ‘청년정책’은 자칫 ‘역차별’ 논란을 부를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바꿔나가겠다는 진취적인 기획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기획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중장년층과 노령층 등에게 어떠한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을 우리 경제와 사회를 바꿔나가는 공동주체로 세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덧붙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둘째, 이상의 두 가지 방식과 함께 청년고용할당제를 확대 적용한다는 안도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청년고용증대책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둘은 차원이 다소 다르다. 청년고용할당제란 공공기관(공기업 포함)에 매년 정원의 3%이상씩 청년(15~34세) 미취업자를 채용하도록 하는 제도로서, 두 정당은 이를 민간부문(300인 이상 대기업)에 확대 적용하면서 비율도 5%로 높이겠다는 안을 내놓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국민의당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 안은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합헌결정이 나기는 했지만 민간부문에까지 확대될 경우 연령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더욱 거세게 일어날 소지가 있다. 이것이 꼭 ‘위헌’까지는 아니라도 청년 외 연령층에서 일정한 ‘구축효과’를 내리라는 예측은 얼마든 가능한데, 그런 점에서 그것은 작년 하반기부터 올 초까지 문제되었던 정부의 청년고용증대-임금피크제 연계정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앞서 나는 후자의 정책이 불필요한 사회갈등을 유발하고 혜택이 청년층 모두에게 골고루 가지 않을 수 있으며 기존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강화할 수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링크). 청년고용할당제는 이러한 결점을 대체로 공유한다. 물론 청년고용할당제에도 이러저러한 미덕이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현재 재앙적인 청년고용 상황에 대한 책임을 재벌・대기업에 묻는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왕에 청년을 중심으로 한 경제구조 개편이라는 기획을 내세웠으니 이쪽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한다. 재벌・대기업에 대해서는 좀 더 효과적인 다른 종류의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몇 개의 일자리를 더 만들겠다’라는 식으로 정책목표를 제시한 것도 문제로 삼을 수 있다. 이를테면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 공공부문 확충과 함께 청년고용할당제를 확대 적용해 모두 70만 개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이런 정책제시방식이 갖는 ‘구태의연함’은 앞서의 ‘진취성’에 대비시킬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인간 최고 바둑기사를 꺾고 가까운 미래에 현재의 직업 상당수가 사라지리라는 잿빛 전망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는 지금, 이러한 정책제시방식은 오히려 청년일자리 공약 전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내는 것 같다.

청년이슈가 좀처럼 뜨지 않는 이유?

이상에서 원내의 주요정당들이 이번 총선을 위해 내놓은 청년정책을 일자리정책 위주로 평가했다. 여기 더해서 각 당은 세대적 의미의 ‘청년’을 겨냥한 다양한 정책들도 내놓고 있지만(교육이나 주거 등), ‘일자리’가 현대사회에서 갖는 의의를 생각하면 청년일자리정책은 청년정책의 알파요 오메가다. 지금처럼 경제가 어렵고 삶이 어려울 때는 더더욱 그렇다.

또한 위에서 제기한 ‘전연령층의 청년화’는, 그 화려했던 헬조선론・수저계급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올초부터 우리나라 주요 진보성향 언론들이 그렇게 열심히 다뤘는데도, 4년 전의 총선과 대선에 비해 이번 20대 총선에서 소위 ‘청년담론’이 뜨지 않는 것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설명해주는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엔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시급한 청년문제다’라는 문제제기가 통할 정도의 여유도 없다. 청년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런 현상은 청년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청년문제는 청년층에게 ‘돈 몇 푼’ 쥐어준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라 경제 자체를 뒤집어엎어야 진정한 접근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주요 야당들이 내놓은 ‘청년정책’에는 이러한 절박성에 대한 인식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나 있다. 우리가 만약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이런 의의를 각 당이 좀 더 명확히 표명하고 실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기도 하고 압박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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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민주당의 국민연금+공공임대주택 연계정책에 대해

국민연금을 공공임대주택(실제로는 어린이집에도 투자한다고 하는데, 이런 디테일은 좀 제껴두고)에 투자하자는 더민주당의 이번 총선 공약은 정말 절묘한 한 수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일정한 취약성이 있는 것 같은데..

먼저, 이 공약은 제1야당의 총선 첫 공약이라는 ‘상징성’을 살리기에 제격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공적 성격을 살리자는 취지, 특히 그 공적 성격을 주거공공성을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실현시키자는 것이니, 이것에 반대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군소리 정도야 좀 할 수 있겠지만) 곧 야당 지지자가 아니라는 뜻으로까지 보일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국민연금의 규모, 그리고 주거문제의 심각성을 떠올리면, 이번 정책의 상징성은 그 어떤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국민연금–공공임대주택 연계정책은 야당의 정체성을 매우 선명하고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 같다.

둘째, 이 정책을 공격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번 연계정책은 안 그래도 제각기 복잡한 국민연금과 주거공공성이라는 두 정책이슈를 연결시킨 것으로, 일반국민으로서는 세부적으로 들어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전문가들 중에서도 심층적으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이번 연계정책은, 말하자면 국민연금에 대한 특정한 입장과 주거공공성 확대에 대한 특정한 입장이 결합된 공약이다. 그런만큼 이 공약은 허점도 많다. 왜냐하면 국민연금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있고 주거공공성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 이번 연계정책에서 상정되는 각각에 대한 ‘입장’이 그 자체로 최선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거공공성을 반드시 이번 연계정책이 시사하는 대로, 즉 땅을 사서 거기에 집을 새로 짓는 방식으로 증진시킬 필요는 없고, 그런 방식은 이미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한물 간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과 주거공공성이라는 두 별개의 정책영역을 연결시켰다는 것 자체가, 위와 같은 허점에 대한 공격들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장치가 되는 것 같다. 오히려 정치한 비판들을 근시안적이고 속좁은 비난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는 것도 같다(물론 이 비판들이 실제로 근시안적이고 속좁은 것이란 얘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정치한 비판들은 ‘국민연금에 대한 올바른 접근’, ‘주거공공성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염두에 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연계정책은 두 영역을 동시에 아우르기에, 형식적으로 봤을 때 더 품이 넓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 이번 정책을 ‘국민연금 활용안’으로 내놓았다고 해보라. 다들 달려들어, ‘국민연금은 그렇게 활용하는 게 아니야’라고 대거리하지 않았겠는가.. ‘주거공공성 확대 정책’으로 내놓았어도 마찬가지.)

셋째, 위와 같은 성격은, 뒤집어 말하면, 국민연금과 주거공공성이라는 두 가지 까다롭고 논란 많은 부문에서 더민주당의 부담을 상당 정도로 완화시켜줄 것이다. 심지어 이제 더민주당은 이번 총선과 관련, 국민연금이나 주거공공성에 대한 공약을 더이상 내놓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넷째, 대선이 아닌 총선 공약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만에 하나 나중에 실현시키지 못해도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또는, 부담이 적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허황되게 생각하는 이런 연계정책을 내놓는 것인지도.

대체로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번 연계정책은 매우 강력하고 효과적인 정책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도 취약성이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먼저.. 이번 연계정책이 ‘김종인’의 카리스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김연명 교수 같은 분이 이 정책을 주창한 게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이다. 그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국민연금의 공공투자 주장을 해왔고, 더민주당(=민주당=새민련=열우당=국민회의 등)에서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 그런데 그간 왜 이 정책을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못했는가? 아니, 이렇게 생각해봐도 된다. 똑같은 정책을,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아닌 문재인 전대표께서 발표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쉽게 반박당하고, 기자들의 톤도 지금보다 훨씬 더 비판적이었을 것 같다. 아마 더민주당에서는 지레 겁을 먹고 ‘전면 재검토’ 선언까지 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김종인 카리스마에의 의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곱씹어볼 지점이다.

다음으로, 더민주당의 연계정책이 특정한 국민연금 정책과 특정한 공공주거정책을 결합한 것이라고 했고, 이로부터 뭔가 ‘신박한’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만약 여당에서 국민연금과 공공주거 양 분야에서 아주 정교하고 훌륭한 정책을 성공적으로 내놓는다면, 그래서 더민주와 새누리가 두 영역 각각에서 싸워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더민주의 이번 연계정책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그 모순성이 드러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국민연금 분야 내에서는, ‘국민연금기금의 공공성’ 모토가 그다지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공주거 내에서도 예컨대 ‘왜 집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지?’라는 문제제기 앞에서 별로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더민주의 연계정책에서 상정되는 공공주거정책이, 다른 공공주거정책들과 병렬되었을 때, 과연 전자를 최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논의과정을 거치게 되면, 결국 현재의 연계정책의 힘은 약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민주당에게 상황이 비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선빵’을 크게 날렸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상대가 나를 공격할 논리와 꺼리를 찾는 동안, 나는 그 다음 ‘한방’을 생각하고, 또 내놓으면 된다. 어찌 보면, 더민주당이 이제껏 안 됐던 게 이런거 아니었나..

[결론]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번 정책은–모든 정책이 어느 정도는 그렇듯–경제정책이라기보단 ‘정치적 정책’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걸 ‘경제적’으로 접근하는 게 얼마나 타당한지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김종인씨는 경제전문가라기보단, 경제를 정치를 위해 이용할 줄 하는 전문가랄까… 박근혜표 공약들에서 이미 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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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지침에서 드러나는 자본과 국가의 공모

다음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기관지 <질라라비>의 2016년 3월호 ‘특집’에 기고한 글이다. 솔직히 이 잡지가 매월 나온다는 것을 몰랐다. 많은 분들께서 정기구독도 해주시고, 철폐연대의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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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대지침에서 드러나는 자본과 국가의 공모
글쓴이: 김공회

‘양대지침’이란 해고요건과 취업규칙 변경요건을 완화시키는 내용을 담은 고용노동부의 두 가지 행정지침을 가리킨다. 정부는 이를 각각 ‘공정인사 지침’, ‘취업규칙 지침’이라고 이름 붙였다. 원래 이 요건들은 법률(근로기준법)이 규정하고 있다. 일각에서 이번 행정지침이 위법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게 그래서다. 현재 박근혜 정부가 공공・노동・금융・교육 등에 대한 4대 개혁을 국정운영의 중심에 두는 동시에 이 중에서 노동개혁을 가장 앞세우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동개혁’ 기치를 걸고 애초 정부는 근로기준법 등 5개 법률에 대한 개정을 추진했으나 국회에서 막혀 국회의 동의가 필요없는 양대지침을 먼저 내놓은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자신들의 ‘개혁’ 완수를 위해 앞으로도 법률 개정에 더 열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경제상황: 이제 기업과 정부가 답할 차례

이번 양대지침은 무엇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지속된 ‘노동자 쥐어짜기’의 연장선에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개방화・자유화에 따라 한층 격화된 경쟁에 내던져진 자본은 수익성 압박을 만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정교하게 노동자 계급을 밀어붙여 왔다. 지난 20년 동안 자본은 임금체계 개편과 해고요건 완화, 그리고 생산관계 내에서 노동자를 억압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조금씩 진행시켜 법적・제도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둬냈고, 이번 양대지침은 이러한 흐름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미 바짝 마른 걸레 신세가 된 노동자에게서 더 뽑아낼 것이 있을까? 1997년 외환・금융공황 이후 지속된 경제위기 국면에서 노동자와 서민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희생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 최고수준의 소득불평등과 그보다 더한 자산불평등에 대해서는 우파 성향 학자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는 실정이고,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2008~2012년)에는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실질임금이 줄어들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으며, 그 결과 매년 국내소비가 기대에 크게 못미쳐 경제성장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최근엔 수출마저 어려운 상황이니, 경제성장은 가계빚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노동자들을 헐벗기는 동안 기업들은 돈을 긁어모았다. 국민소득의 노동자-기업 간 분배를 보면, 1996년에서 2012년 사이에 13~15%포인트 가량이 기업 쪽으로 옮겨갔고, 몇몇 재벌대기업들의 수익은 사상 최대치를 매년 경신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엄청난 액수의 사내유보금을 축적했다. 사내유보금은 이를 규제하는 법규정이 사라진 2001년 이후 가파르게 증가해 작년 1분기말 기준 3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710조원에 이르고 있다. 사내유보금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리의 경우 그것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하청 계열기업에 대한 수탈을 강화한 결과물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업이 노동자와 대중을 수탈해 살이 찌기는 했지만 그것이 국민경제 전체의 성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지금 한국경제는 경제의 성장엔진이 멎었다고 할만큼 어려운 상황이니 말이다. 특히 그간 우리가 의존해왔던 세계시장이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대중은 헐벗어 내수가 죽었고, 그리하여 기업들도 몇몇 대기업을 빼면 모두 비실비실한 상태이다. 기업은 돈을 벌어도 투자하지 않으며, 그나마 잘 나간다는 대기업들도 총수의 사생활 문제로 시끄러운 에스케이(SK), 20대 새내기 직원에 희망퇴직을 강요한 두산, 각종 비리에 연루돼 휘청이는 포스코 등의 최근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의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정부는 어떠한가? 극도로 저하된 대중의 활력과 기업의 생산력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새로운 성장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2013년에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그러한 역할을 방기한 채 모든 경제이슈들을 정치쟁점화 하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복지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대중의 활력을 높이고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관리해야할 책임(복지국가), 총수 일가 중심인 재벌기업들의 지배구조를 혁파해 생산력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할 책임(경제민주화)을 완전히 놓아버렸다. 특히 경제침체의 비용이 국가로 집중되고 있는데도 증세 등 재정기반 확충에는 노력을 소홀히 한 덕분에, 정부의 부채만 치솟고 있다.

요컨대 지금 우리 경제의 생존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더 양보해달라’라는 요구보다는 ‘노동자가 그렇게 양보해 왔는데 왜 이 모양인가’라는 질문이 더 긴요하다. 기업의 활력을 저하시키는 원인은 강력한 노조나 높은 임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기업과 정부가 답할 차례다.

양대지침의 노림수: 경제위기 책임의 전가

사정이 이렇다 해도, 생산과정에서 주도권을 더 확실히 쥐고 노동자를 더 철저하게 통제하며 임금을 최대한 낮추는 것은 자본의 본성이다. 특히 양대지침은 노동자 계급 중에서 그간 상대적으로 ‘덜 공격받았던’ 부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

자본과 노동 간의 관계를 채용-고용-해고 등 세 단계로 나누어 보자.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말 노동자 대투쟁 이후 줄곧 자본은 각 단계에서 더 많은 자율권을 행사하고 노동자를 통제・억압하고자 진력을 다해왔다. 특히 채용 단계에서의 성과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미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은 물론 각종 변칙적인 채용관행이 우리 경제에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단 노동자를 채용한 뒤에는 각종 법률과 노사간 단체협약, 취업규칙 등에 의해 자본이 노동자를 다루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워지기 때문에, 채용 단계에서 정규직의 문턱을 높이는 것은 자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결과 전체 임금노동자 대비 비정규직의 비율이 한때 56.6%에 이를 정도로 높아졌고, 지금도 이 비율은 45%에 이르고 있다. 즉 [그림]에서 C~D 유형의 노동자가 전체 취업자의 절반인 것이다. 만약 여기에 사실상의 임노동자나 마찬가지인 일부 자영업자까지 포함시키면 위 수치는 크게 오를 것이다(지난해 기준 총 취업자 2천6백만명 가운데 고용원이 없는 영세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가 500만명에 이른다).

그림2

이에 비해 이번 양대지침은 채용 이후의 단계, 즉 고용과 해고 단계에서 자본의 입지를 넓혀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노동자의 상당수가 비정규직이고 정규직이라 해도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 등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사실상 근로기준법의 보호권 바깥에 있다. 따라서 양대지침은 [그림]의 A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로부터 기업이 거두는 이득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고령노동자 고용과 해고에 따른 비용을 크게 줄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에서는 징계해고와 정리해고만이 인정되기 때문에, 기업들이 노동자를 회사에서 내보내기 위해서는 거액의 ‘위로금’을 쥐어주고 ‘자진퇴직’의 형태를 취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일반해고’가 도입되면 누구든지 ‘저성과자’로 분류되면 해고될 수 있다. 이는 적법한 해고이므로 기업은 노동자에게 ‘위로금’을 줄 필요도 없다. 은수미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은 현재 명예・희망퇴직자가 한해 90만명이고 이들에게 나가는 ‘위로금’이 수십조원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또한 한국의 연공서열형 임금체계 하에서 고령자를 계속해서 고용하려면 젊은층에 비해 임금부담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으므로,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로 기업이 쉽게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노무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이해관계 말고도 양대지침은 노동자 계급의 최상층을 공격하는 ‘무기’라는 점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의도 있다. 특히 이번 양대지침이 정부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관철되지 않을 때조차도 정부는 일정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자 계급의 비협조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대지침의 직접 이해당사자인 자본은 뒤로 슬쩍 빠져있는 반면, 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노동자들과 직접 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애초 전경련의 ‘건의사항’ 중 하나였을 뿐인 이 문제를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정치쟁점으로 증폭시키고 임금체계 개편 등에 협조의사를 밝힌 바 있는 양대노총을 애써 자극하고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끌고간 데서 어떤 ‘정치적 의도’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저성과자와 임금피크제, 그리고 국가

그런데 대한민국 국가가 이번 양대지침을 통해 벗어던지고자 하는 책임은 비단 경제정책 실패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지금 한국경제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고, 여기엔 국가가 종전보다 더 적극적인 경제적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해야 할 책임을 이번 양대지침 발표를 통해 회피하고 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이 책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노동력 관리다. 이제껏 노동력은 대체로 개별 기업과 가계 단위에서 관리되어 왔다. 그러나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직원을 한번 채용하면 끝까지 데리고 가는 식의 기존 모형은 오늘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 양질의 인력육성 책임을 개별 가계에 맡기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비용도 크다. 그야말로 ‘요람’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그래서 안정적으로 사람을 키워내지 않으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대처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노동자를 그 적성에 맞게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하고, 부적절하게 배치되었을 때는 신속한 재배치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일하는 동안 노동자는 양육・노후・건강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최상의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유능하고 적극적인 국가를 요구한다.

사실 ‘저성과자’는 노동자 계급 입장에서도 문제다. 자본과 지배계급들은 노동자의 ‘저성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그를 ‘저성과자’라고 낙인찍지만, 좌파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사회와 경제체제의 문제이며, 자본주의 하에서 필연적인 ‘소외’의 문제이다. 따라서 어떤 노동자가 주어진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아 더 많은 소외를 겪고, 그래서 생산성이 떨어진다면, 노조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문제삼고 국가와 사회에 대해 그 해결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를 통해 도입하려고 한다는 ‘임금피크제’도 그렇다. 노동자 입장에서 연공서열제를 각별히 선호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노동력과 삶의 재생산이 한 개인과 가계에 맡겨져 있는 시스템에 적합한 임금체계일 뿐이다.

결국 이번 양대지침은 그 자체로만 보면 노동력 관리의 책임을 개별적인 가계・기업에서 국가로 돌리는 과정상의 한 절차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현재의 논의 속에서는 기업의 책임부담 완화만이 이야기될 뿐, 그에 따른 부담을 국가가 얼마나 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좀처럼 화제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종전에는 기업이 거액의 ‘위로금’을 주면서 자진 퇴직시켰던 노동자가 이번 양대지침 하에서 ‘일반해고’로 되었을 때, 기업은 ‘비용’을 아낄 수 있게 되겠지만 이 노동자는 이제 실업급여 수급대상자가 되기 때문에 국가의 부담이 급격히 커질 것이다. 기업밖 숙련・인력배치 프로그램도 더 강화되어야 하고 여기에도 큰 비용이 든다. 임금피크제도 마찬가지다. 그간 고령노동자의 고임금이 얼마간 떠맡았던 복지 기능을 국가가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이 문제의 원인은 인구 노령화다. 노동자의 임금은 생애 총액으로 보았을 때, 20~60세에 벌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만약 종전의 임금수준 산출의 기준이 평균수명 70세였고 이제 이 수명이 80세로 늘어났다면, 당연히 삶의 재생산 비용 총액이 커질 것이다. 과연 그 증가분을 누가 댈 것인가? 사실은 최근 이슈가 된 바 있는 국민연금 논란의 본질도 바로 이것이다. 보험요율을 올리거나 수급액을 낮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양대지침을 둘러싸고서는 노동자, 기업, 정부 중에서 무엇보다 기업과 정부 간의 이해관계 대립이 가장 두드러져야 마땅하다. 실제로 ‘IMF 체제’로 돌입한 직후인 1998년 3월 전경련은 ‘여성고용으로 인한 추가부담’이라는 표제 아래 산전후휴가, 생리휴가, 직장보육시설, 수유시간 등에 따른 노동시간 손실 등을 꼽으며, 이를 정부가 부담하지 않으면 고용과정에서 여성을 남성과 평등하게 취급할 수 없다고 당시 막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러한 이해관계 대립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것은, 현재의 보수정권과 자본가 계급 간에 일정한 ‘사전조율’이 세심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는 비단 이번 사안뿐 아니라 일반적인 차원에서 복지제도의 적극적 도입을 꺼리고 있고, 이에 필요한 증세에도 매우 소극적인 입장이다. 물론 증세가 이뤄진다면 그 형태가 어떻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자본에게 귀착될 것이니, 자본은 정부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이번 양대지침 사태를 통해 부르주아 정부와 자본 간의 끈끈한 유착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양자 모두에 대해 결연히 투쟁에 나서야 할 것이다. 특히 경제의 구조적 변화의 방향을 참조하면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더 커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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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의 ‘가불형’ 성장방식: 누구를 위한 경기활성화인가

정부가 오늘 올 들어 두 번째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이례적으로 ‘최근 경제동향과 대응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아마 연초부터 소비절벽, 주택과잉공급 우려에 이어 1월 수출마저 참담한 실적을 내자 애가 많이 탔던 것 같다. 총선도 총선이고, 무엇보다 설을 앞두고 뭔가 그럴싸한 ‘카드’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도 느꼈을 것 같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해 “내수회복세가 지속되고 고용률도 개선되고 있으나 대외여건 악화에 따른 수출부진이 성장을 제약”한다고 인식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재정과 정책금융을 조기집행하겠다는 애초 계획을 더 앞당기고 규모도 키우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작년에 크게 재미를 본 승용차 개별소비세 인하를 연장해 소비증진을 꾀하고 공공기관을 통한 설비투자를 확대하는 등 민간활력을 강화할 계획도 내놓았다.

재정 조기집행이야 어차피 정부의 권한이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상반기에 몰아서 쓸 수도 있는 문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작년부터 부쩍 정부가 ‘민간활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내놓는 소비증진책은 당장 반짝 성장을 가져오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경제를 탄탄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정부가 말하는 ‘소비진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1년 더 쓸 수 있는 휴대전화기, 5년 더 탈 수 있는 차를 버리고 지금 새것을 구매하라는 것 아닌가? 어차피 경기가 나아지고 소득여건이 좋아지면 언젠가 할 소비를 현재로 끌어오는 이런 ‘가불형’ 성장방식의 귀결을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정부 스스로도 작년 하반기에 무리하게 추진한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의 여파로 올초부터 ‘소비절벽’을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놓고 그 절벽을 정부는 또 한번의 ‘가불’로 건너뛰려 하고 있다..

위와 같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그저 ‘가불형 성장’이기만 한 게 아니다. 실질적인 소득 증가, 또는 소득 증가에 대한 확실한 전망도 없이 미래의 소비를 현재로 끌어오니 거기에 참여한 국민들은 빚의 올가미에 더 강하게 빠져들게 된다. (그들이 이 빚에 대해 나중에 불만이나 고통의 신음이라도 내면, 그들은 무분별하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은 경제 전체에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정서를 퍼뜨릴 것이고, 이것이 경제의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리하여 지표상으로는 경제성장이 달성되었으되 국민들은 더욱 궁핍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역설─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역설─이 발생한다.

국민들만 헐벗게 되는 게 아니다. 나름대로 허리띠 졸라매며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국민들을 꾀어내는 유인책이 바로 개별소비세 인하 등 세금 감면이기 때문에, 막상 소비가 늘어나도 정부로 들어가는 세금은 그만큼 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돈이 없어서 3~5세 아이들을 위한 누리과정을 못하겠다고 하는 정부가 취할 정책인가?

국민들도 헐벗게 되고 정부의 곳간도 비게 되는 위와 같은 ‘가불형’ 성장방식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오직 기업뿐이다. 예컨대 작년 하반기에 극심한 경기침체 상황을 타개하고자 정부는 승용차에 대한 개별소비세를 인하했고, 그 결과 국내의 5개 완성차 업체는 지난해 12월 17만5263대를 팔아치워 역대 최대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달엔 판매량이 10만6308대로 전달에 비해 무려 39.3% 급감했고, 이 수치가 나오자마자 발표된 정부의 자동차 개별소비세 인하 연장 방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과연 이 정부는 누구를 섬기는 정부인가?

십분 양보해 위와 같은 ‘가불형’ 성장방식이 불가피하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는 그 과정에서 기업이 벌어들인 추가적인 이윤 중 상당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든 공공적으로 쓸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한다. 같은 논리로, 작년에 담뱃세 인상 과정에서 담배 회사들이 큰 이익을 챙겼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은 그냥 unfair한 것이다. 이걸 바로잡는 게 ‘사회주의’인가? 그렇다면 심지어 미국도 이미 80년 전에 사회주의였다. 돌이켜보면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국 등 선진국에서 성행했던 최고세율 90% 이상의 소득세제도 당시 ‘전쟁특수’로 큰 이익을 보던 기업과 부자들의 ‘과도한’ 소득을 거둬들여 공적으로 쓰기 위한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소득저하와 고용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들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소비진작도 자연히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저 연말정산 등을 통한 알량한 눈속임 외에는 국민들의 주머니사정에는 무관심한 것 같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노동개혁’이라는 허울로 그들을 더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으니, 대체 어찌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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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선물] 당신이 신자유주의에 관해 알아야 할 13가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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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신이 신자유주의에 관해 알아야 할 13가지 것들

으악, 안 돼. 또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이라고? 이미 나온 것도 많은데, 그걸 다 종합하는 데다가 그 나름의 시각에서 새로운 것을 덧붙이고, 결국 예전 것을 명확히 하는 만큼 혼란도 더 키울 게 뻔한데? 하, 그것도 모자라,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011) 류의 대중적인 제목을 달았다니!

하지만 겉모습은 으레 사람을 속이기 쉽다. 이제부터 우리가 상당히 대중적이고 명확한 형태로 내놓을 이야기는 기존에 나온 것들을 반복연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 가지 점에서 깊이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나름대로 장기간에 걸친 학문적 천착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를 글로벌 위기(global crisis)의 견지에서 파악하고 또 제시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주거(housing)와 식수(water)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예증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경제와 사회의 작동에 대한 금융화의 영향에 관한 좀 더 폭넓은 연구의 맥락에서 접근될 것이다.

재미있나요? 재미있나요?? 재미있으면 500원! ㅎㅎ

위 글은 다음 링크에 있는 하나의 글의 첫 단락을 번역한 것입니다. 직접 링크를 타고 들어가셔서 논문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읽어보세요. 영어로 되어 있는데, 총46쪽(본문 35쪽)입니다. 설연휴 기간에 각잡고 읽어볼만하죠? ㅎㅎ

링크: http://www.ideaswebsite.org

(이곳은 작년에 <한겨레>가 주최하는 아시아미래포럼에 기조연설자로 한국에 오기도 했던 Jayati Ghosh가 이끄는 전세계 정치경제학 연구자들의 네트워크입니다. 오는 2월 22~24일에 저를 포함한 몇몇 한국사람들이 이 모임에서 여는 컨퍼런스에 참가합니다. IDEAs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한테 연락주세요!)

위 글은 제 지도교수이기도 한 영국 런던의 Ben Fine 선생께서 동료들과 쓰신 것입니다. 제 스승이라서가 아니라, 이분이 신자유주의에 관한 한 이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논의를 지금까지 보여주고 계신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냥 읽지만 마시고, 제가 첫 단락을 번역했으니, 누가 마저 이어서 번역해봐도 좋겠네요. :)

아 그리고, 위 글에 붙어있는 방대한 주석과 참고문헌들을 고려하면, 위 글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다양한 연구로 들어가는 하나의 좋은 ‘입구’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위 글은 두고두고 참고하심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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