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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경제’로서의 ‘코로나 경제’ : 문제와 대응책

지난주에 이에 대해 쓰기는 했는데, 좀 장황하기도 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본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경제를 전시 경제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그 심각성과 기간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아래 글은 코로나 국면이 1년은 지속될 것을 가정한다.

전시경제의 특징

전시경제의 특징은 생산과 분배, 소비라는 세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생산 면에서 전시경제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경제의 일부가 기능을 멈추는 동시에 평상시에는 (그렇게까지) 긴요하지 않았던 특정한 재화와 서비스 생산이 늘어야 하는 경제다. 그리하여 전시경제에서는 한편으론 생산이 줄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산이 급증하는 분야도 있다. 끝으로, 전쟁에 따라 국제교류가 위축될 가능성도 큰데, 이 또한 생산을 줄이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면서 경제의 구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분배 면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자본주의 경제에서 분배는 보통 생산의 결과다. 사람들은 다양한 자격으로 생산에 참여하고서 그 반대급부로 소득을 거둔다. 그런데 지금 생산의 한 영역이 멈추기도 하고 또 어떤 영역은 커지고 있다. 사람들의 소득 기반이 크게 흔들려, 어떤 이들은 종전과 같거나 심지어 많은 소득을 얻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소득을 전혀 얻지 못한다.

끝으로 소비다. 전쟁이 났다는 것은 사람들의 이른바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됐음을 의미한다. 소비에 ‘급’이 있다면, 필수적인 소비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경우에 따라선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지겠지만, 그런 범주를 벗어나는 소비활동은 위축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거다. 소비의 기반이 되는 소득을 일부라도 잃어버린 사람들은 필수적인 소비활동조차 못 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전시경제에서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소비가 크게 팽창한다. 군수물자에 대한 소비가 그것이다.

전시경제에서의 경제문제와 그 대응방법

이와 같은 전시경제에서 떠오르는 특유의 경제문제는 무엇인가? 먼저 소비 측면을 보자.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소비를 못 한다. 필수 소비에서조차 배제되면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전쟁통에는 폭동과 약탈이 만연하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전쟁에 적절히 대응하고 전쟁 이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소득기반을 잃은 국민들이 필수적인 소비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그것이 전시경제의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다.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생산된 필수품을 국가가 강제징발한 뒤 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배급)이다. 이 때문에 전시경제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계획경제 또는 명령경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런 방식을 본격적으로 실천하는 건 (부분적으로 그런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야 지금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바이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게 소득기반이 붕괴된 이들에게 소득을 국가가 나눠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긴급재난지원금’을 그런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소득이라는 게 한 번 쓰면 사라진다는 것이고, 필수품이라는 것도 주기적으로 계속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무슨 뜻인가? 위와 같은 지원금은 주기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정부는 재난지원금으로 약 10조원을 내놓겠다고 했다. 만약 그것이 적정한 금액이라면, 앞으로 10조원씩 10번을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이러한 지원금을 나눠주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사람이 죽을 것이다. 전장에서 총포에 죽는 사람보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전쟁 때문에 경제가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GDP가 절반이 되나? 아니다. 줄어든 생산물을 사람들이 모두 소비해줘야 그나마 절반이 되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소득이 없어서 기본적인 소비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실제 소비는 절반 이하로, 반의 반 정도로 떨어질 수도 있다. 지원금은 이러한 경제의 과도한 축소를 방지하는 의미도 있다.

이제 분배 측면을 보자. 다음과 같이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이 사람들에게 돈을 마구 나눠줘도 되나? 국가 재정 파탄나는 것 아닌가? 아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나눠준 돈은 거둬들이면 되니 말이다. 어떻게? 국가가 나눠준 재난지원금이 적절하게 소비에 쓰인다면 결국 필수품 생산자 손에 들어올테니, 이때 그걸 거둬들이면 된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전시경제에서 분배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지원금과 별도로, 현재의 분배 상태는 조정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제의 중요한 일부로서 함께 기능하던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하루 아침에 처지가 갈리게 되었을 때, 그 결과를 개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미리 계약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임대료와 이자를 주고받아야 한다? 포탄과 전차를 만드는 회사의 이윤은 회사의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고, 분배에 대한 폭넓은 조정이 전시경제에는 필요하다. 양차대전 당시 최고 한계소득세율이 100% 가까이 치솟았던 선례를 엄중히 참조해야 한다.

끝으로, 생산 면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전시경제의 필요에 맞게 기존 생산설비의 용도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 회사에선 전차를 만들고, 민간항공기 회사에서는 전투기를 만들어야 한다. 요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대표 기업인 GM과 GE에 대해 인공호흡기 만들라고 종용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둘째, 위와 같은 전환이 어려운 경우, 기존의 생산설비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그리하여 기업의 생산이 줄었다고 해서 섣부르게 문을 닫고 설비를 정리하는 것보다는 일정한 비용을 들이더라도 유지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적 기업의 사적 결정의 영역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이런 기업이 소수라면 그렇게 봐도 좋겠지만, 전시경제에서 이런 기업은 부지기수다. 생산설비의 유지 자체가 국민경제적 과제인 셈이다.

전시경제로서의 코로나경제

이상과 같은 전시경제 특유의 문제와 대응책은 코로나경제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이 필수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소득을 지급해야 하며, 지급된 돈은 적절하게 수거되어야 한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이러한 지급-수거 과정은 수차례 되풀이될 수도 있다. 이러한 돈의 목적은 필수소비보장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경기활성화가 아니다. 위에서 쓴대로 경제가 필요 이상으로 쪼그라드는 것을 방지한다는 의미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를 두고 ‘경기활성화’라고 하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코로나 지원금의 목적은 골목상권 활성화가 아니다. 전쟁이 났고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데, 사람들에게 돈 쥐어주면서 섣부르게 집밖으로 나오라고 할 수 있나?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지원금은 지역화폐보다는 전국화폐로 지급되는 게 기본이다.

생산과 분배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이다. 생산을 위해 필요한 두 요소, 즉 인적요소와 물적요소의 건강이 적절히 유지되어야 한다. 인적요소(인간)의 건강은 국가에 의한 주기적인 화폐 지급과 필수품에의 접근 보장을 통해 유지될 것이고, 물적요소(기계)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금융지원이 긴요할 것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소득의 기반이 흔들린 정도가 다를 것이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이득을 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공적인 조정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현실에 실제로 적용된다면, 이상의 사항들은 크게 변형되고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본이라는 게 있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을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코로나19(covid-19) 관련 글 모음 (to be updated)

** 2020년 3월부터 이른바 ‘코로나19 국면’에 대해 쓴 글들의 모음입니다. 대개 페이스북에 썼고요, 몇몇 긴 글들은 이 블로그에도 썼습니다. 앞으로 관련글을 더 쓰게 되면 목록을 업데이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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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시 경제’로서의 ‘코로나 경제’ : 문제와 대응책 / 2020.04.05.
http://socialandmaterial.net/?p=34462

**이 글은 다음 매체에도 실림.

15.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지급방침에 관하여: 과연 긴급재난지원금은 ‘하위 70%’에게 지급될 수 있을까 / 2020.04.03.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709505354845

14. (간단 메모) / 2020.04.03.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709334734845

13. 보편이냐 선별이냐? 아니죠. 선별의 방식이죠 / 2020.04.03.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708388089845

12. 원칙 2: 임대료 보전? 누구의 돈으로 누구를? / 2020.04.02.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703472744845

11. ‘코로나 경제’: 특징과 대응방향 / 2020.03.29.
http://socialandmaterial.net/?p=34446

10. (간단 메모) / 2020.03.27.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84119689845

9. ‘재난기본소득’ 이후: 임대료 제한 운동을 제안한다 / 2020.03.26.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77546794845

8. 원칙 / 2020.03.22.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64612364845

7. ‘재난기본소득’의 의의, 그리고 불가피성과 시급성 / 2020.03.19.
http://socialandmaterial.net/?p=34443

**이 글은 다음 매체에도 실림.

6. 단계적이고 과감한 접근 / 2020.03.14.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36088324845

5. 이른바 ‘재난기본소득’의 불가피성에 대하여 / 2020.03.10.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24170694845

4. 코로나와 포퓰리즘 / 2020.03.09.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21634789845

3. 서두르자 / 2020.03.08.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18393154845

2. 임대료 / 2020.03.05.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608096464845

1. 정치인과 마스크 / 2020.03.02.
https://www.facebook.com/ghgimm/posts/10157599451499845

 

‘코로나 경제’: 특징과 대응방향

지금 세계경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위기에 처했다. 19세기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는 주류경제학이 경제 위기에 대한 이론이 없다고 비판한 바 있는데, 이번에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도 일찍이 예상하지 못한 형태다.

보통 자본주의 경제에서 위기는 산업과 금융의 과열에서 비롯되곤 했다. 특히 금융의 과열은 경제 전체가 속으로 썩어들어가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일단 터지게 되면 경제의 충격적인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곤 한다. 상당한 규모의 기업이 도산하고 경제 곳곳과 긴밀히 연결된 금융기관이 쓰러지면, 그 파괴적 영향이 비정규 노동자 같은 힘없는 개개인은 물론이요 그 자체로는 꽤 건전한 중소/중견기업에까지 미치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대기업, 특히 금융기관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곤 한다. ‘대마불사’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경제 위기는 위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취한다. <킹덤>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역병이 그러했듯,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가면서 종국엔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숨통을 조여가는 식이다. 골목상권이 먼저 망했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여행/숙박업이 타격을 입었다. 가장 불안정한 처지의 노동자들이 곳곳에서 잘려 나갔으며, 전국 각지에서 ‘점’으로 존재하면서 강연이나 기고로 살아가는 허울 좋은 ‘프리랜서’들의 소득이 ‘영(0)’으로 수렴해 갔다. 이렇게 애초부터 위기의 피해자는 곳곳에 흩어진 불특정 다수였다. ‘개인’의 위기였고, ‘개인’이 책임질 일이었다. 피해가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기저기 분산되어 발생하니 커보이지도 않았고, 따라서 정부의 초기 대응도 소극적인 편이었다. 어느 단계에 이르러 위기가 주식시장 등으로 확산되고 해외에서 과감한 조치들이 취해지자, 우리 정부의 태도도 바뀌었다.

코로나19에 따른 피해 보전을 위한 ‘전국민 일시 지원금 지급안’이 (이른바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제기된 것도 이 즈음이다. 이에 대한 논의가 우리 사회에서 급물살을 탄 것은 대체로 3월 중순부터다. 그리고 3월이 끝나가는 지금, 그것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우여곡절을 거치며 비로소 실행 결정을 앞둔 듯이 보인다. 코로나19로 인한 기층의 피해가 대략 1월 중순부터 본격화됐다고 보면, 이미 70일 이상 피해가 누적된 상태에서 저 ‘코로나 지원금’에 대한 논의가 일단락되는 셈이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늦은만큼 서둘러야 한다. 월요일(30일)에 있을 대통령 주재 긴급경제회의에서 현명한 결정이 나기를 기대한다.

‘전시 경제’로서의 ‘코로나 경제’

아무리 코로나19의 피해가 광범위하다고 해도, 전 국민에게 일시 지원금을 주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적어도 모두에게 주지 말고 피해의 정도에 비례해 선별해서 주는 게 낫지 않나? 지금까지 이에 대해 나는 수차례 글을 썼다. 방송에 나와서 말하기도 했고 유튜브 영상도 찍었다. 요는 이거다. 급하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모두에게 주는 게 낫다는 거다. 밍기적거리다간 모두 망한다.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선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일단 주고 나중에 조세제도를 통해 회수하자, 일단 주고 제대로 된 선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자고도 했다.

그간 코로나19의 피해에 대응한 보편적 긴급 지원금을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보편-선별 논쟁,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을 둘러싼 논쟁 등… 다른 때 같았으면 모두 유익하다고도 했을 이런 논쟁들이 한담(閑談)으로 보이는 것은, 지금 상황이 촉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긴급 지원금이 한 번이 아니라 앞으로 여러 차례 더 지급되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51조원(전국민에게 1인당 100만원 지급시 드는 예산총액)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지금 위기가 심각하단 말인가? 우리 재정을 거덜내자는 것인가? 아래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하나씩 대답해보겠다.

요즘 서구 매체에서 ‘전시 경제(war-time economy)’라는 표현이 부쩍 눈에 띄고 있다. 전시 경제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응해 경제를 재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19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전시 경제를 운영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얘기다. 전쟁이 났다고 해 보자. 일단 사람들은 바깥에 나가길 꺼릴 것이다. 괜히 나갔다가 적의 폭격에 죽을 수도 있다. 무릇 인간은 빵만으로 살진 않는다. 따라서 평상시 경제는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에 조응해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헌데 욕구에는 ‘급’이 있다. 가장 원초적인 의식주에 관련된 욕구에서부터 ‘뭘 그런 것까지’라는 핀잔을 듣기 제격인 부차적인(!) 욕구도 있다. 평상시엔 둘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지만, 전쟁이 나면 기본적 욕구에 해당하는 생산과 부차적 욕구에 해당하는 생산이 꽤 명확히 갈린다. 전쟁 중에도 전자는 계속되지만 후자는 멈춘다. 그와 별도로, 전쟁이 나면 평상시 필요가 거의 없던 전차나 폭탄의 수요가 급등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전쟁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기본적 욕구’를 넘어서는 생산활동이 급격히, 그리고 크게 위축됐다. 어떤 부문은 사실상 멈춰버리기도 했다. 반면에 평상시와 다름없이 생산활동이 이루어지는 부문(필수품 생산 부문)도 있고, 이른바 ‘코로나 특수’를 누리는 부문(마스크나 세정제 생산 부문. 이들을 ‘코로나-재(財)’라고 하자)도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놀고 있는 생산설비를 필수품과 코로나재 생산으로 강제로(!) 돌릴 필요까지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20세기 초의 양차대전이나 잇따른 한국전쟁 시기에 제정된 ‘전시 경제’ 법안들을 가동시킨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이렇게 전시에는, 경제에 존재하는 생산용 자원의 일부가 가동을 중지하기도 하고, 나아가 가동 중지된 설비를 전시의 필요에 맞게 재조직할 필요까지도 제기된다. 어떻든 가동 중지된 자원은 훗날 필요시에 즉각 생산에 투입될 수 있도록 잘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생산용 설비와 각종 자원을 전시의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훗날을 위해 보전하는 것—이것은 전시 경제의 기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물론 이 명제는 코로나 경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필수품과 코로나재가 순조롭게 생산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것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히 공급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 가장 단순하고 손쉬운 방법은 강제징발과 배급이다. 필수품 및 코로나재의 생산기업으로부터 상품을 강제로 징발해 국민들에게 필요한 만큼 나눠주는 것이다. 사실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시 경제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명령경제(command economy)’ 또는 ‘계획경제(planned economy)’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명령경제나 계획경제가 아니다. 물론 지금 코로나 국면에서는 필요하다면 ‘명령’ 또는 ‘계획’ 성격을 더할 수는 있겠고, 이에 대해선 앞으로 우리 사회가, 정치권이 합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북미와 유럽에서는 이미 이런 성격의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다.

‘코로나 경제’의 핵심 문제: 모두가 필수재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것

‘코로나 경제’의 특징을 잘 이해하기 위해, 하나의 경제를 상정하자. 이 경제는 생산과 고용의 규모가 같은 A와 B 두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자. 또한 정상적인 상황에서, 각 부문에서 1인당 생산액이 200만원이라고 하자. 다시 말해, 한 개인은 평균적으로 200만원의 소득을 거두며, 이를 A부문에 100만원, B부문에 100만원 씩 지출한다. 이제 코로나19의 창궐로, 생산부문의 일부(A부문: 필수품 및 코로나재 생산)는 평소와 다름없이 기능하는 반면 나머지 일부(B부문: 나머지 생산)는 완전히 멈추었다고 (극단적으로) 가정하자. 물론 현실에서는 양 극단 사이에 수많은 생산단위들이 위치할 것이다. 지금 문제는 A부문 생산물이 국민 모두에게 공급되어야 하지만 B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을 구매할 화폐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평상시라면 돈 못 버는 기업은 퇴출됨이 마땅하고 돈 없는 개인은 재화를 구매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한’ 상황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B부문도 A부문과 마찬가지로 경제와 사회의 당당한 일부였다. B부문이 별안간 쓸모없는 부문으로 전락한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상황이 바뀌면 A와 B의 자리는 얼마든 바뀔 수 있다. 따라서 A에서 생산된 것을 전량 국가가 징발해 A부문과 B부문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배급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어떤 이는 그래도 A부문 사람들만 일하고 B부문 사람들은 놀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맞다. 그래서 만약 현재의 코로나 경제가 장기화될 경우 B부문 종사자들은 A부문으로 옮겨가 생산의 수고를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는 B부문의 일부는 A부문으로 전환되기도 할 것이다(예: 소주 공장에서 손세정제 생산).

일단 지금은 그런 장기적인 문제는 접어두자. 반복해서 말했듯이 A부문에서 생산된 물자를 국가가 징발해서 모든 국민에게 배급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이게 불가능하면 어떨까? 사람들에게 필수품 구매에 필요한 돈을 주면 된다. 지금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제안되고 있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시 지원금을 그런 성격의 돈으로 볼 수도 있다. 위 가정에서 필수품 및 코로나재 구매에 필요한 금액 100만원을 국민 모두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국민 5100만명에 대한 재난 지원금은 모두 51조원에 이른다. 만약 지금 가정되고 있듯이 B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그 부양가족을 즉각적으로 선별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들에게만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경우 총액은 25.5조원이다. 기존의 절반이다. 즉각적인 선별이 가능하다면, 이렇게 해도 좋다.

만약 이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생산 면에서 봤을 때, 위의 가정에 따르면 GDP는 절반으로 줄어든다(A부문=정상생산, B부문=생산중단). 그런데 소비 면에서 보면, A부문에서 생산된 상품은 B부문 종사자들이 구매를 할 수 없으므로 절반만 팔릴 것이다. A부문 종사자들이 충분한 소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구매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상시라면 이렇게 팔리지 않는 상품은 해외로 수출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코로나 재난 상황에서는 교역도 사실상 멈추었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필수품이 남아돌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생산과 소비 면에서의 불일치 때문에, A부문 생산물의 재고가 쌓이고 GDP는 절반 이하로 크게 떨어질 것이다. 코로나 지원금은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는 의의도 있다.

‘코로나 지원금’의 화폐적 성격에 관하여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떠오른다. 첫째,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것 아닌가? 국가 재정 거덜나는 것 아니냐? 참고로, 51조원이면 우리나라 1년 국내총생산(GDP)의 2.5%가 넘는다. 둘째, 만약 위와 같은 식이라면, 사태가 계속되는 한 저 지원금은 주기적으로 지급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51조원은 그 자체로도 큰 금액이지만, 지금과 같은 코로나 경제에서는 B부문 종사자들과 그 가족들, 나아가 거기 속하지 않는 실업자나 비경제활동인구가 A부문에서 생산되는 필수품과 코로나재를 구매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지원금이 공급되어야 한다. 국민 1인당 필수품/코로나재 구매에 100만원이 필요하고 코로나 경제가 10개월 간 지속된다면, 총 100만원*5100만명*10회=510조원의 재정이 투입되어야 한다. 입이 딱 벌어지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 돈이 반드시 국가의 채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말하면, 코로나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즉 전 국민에게 필수품과 코로나재를 적절히 공급하기 위해 코로나 지원금을 아무리 공급하더라도 거기에엔 재정이 전혀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징발-배급을 잠시 떠올려보자. 여기에 재정이 드는가? 안 든다. A부문 생산물을 모두 국가가 무상 징발하고 이를 모든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이니 말이다. 다음으로, 국가가 징발만 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A부문 기업들을 모두 국유화하는 것도 여기 속한다. 이때 상품의 실제 공급을 위해 모든 국민에게 100만원씩을 나눠준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그 돈으로 국가로부터 필수품/코로나재를 구매할 것이다.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재화의 종류와 양이 다를 수 있으므로, 직접적인 배분보다 이렇게 각자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 더 나을 수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얻고 국가는 자신이 국민에게 나눠준 51조원(=100만원*5100만명)을 돌려받게 된다. 재정지출액? 제로다.

배급뿐 아니라 징발도 안 하면 어떨까? 이제 사람들은 국가가 나눠준 100만원으로 A부문으로부터 상품을 구매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A부문의 자본가의 손에는 51조원이 쥐어져 있을 것이다. 이제 국가가 그 돈을 거둬들이기만 하면 된다. 재정소요액은? 제로다. 이 짓을 여러번 하면? 역시 재정소요액은 제로다.

자, 이 도깨비장난 같은 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비밀은 저 코로나 지원금, 그러니까 필수재의 배분을 위해 국가가 국민에게 지급하는 돈의 성격에 있다.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일정량의 필수재를 국민 모두에게 배분시키는 데 필요한 ‘유통수단(means of circulation)’일 뿐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배급표와 같은 증서여도 상관이 없다. A부문에서 생산된 필수품+코로나재 구매에만 오로지 쓰일 수 있는 돈이다. 그 돈을 거기에 쓰지 않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수품이니까. 정의상 사람들은 필수품을 1인당 100만원씩 구매해야 한다. 돈이 없던 사람은 100만원을 받아 필수품을 구매할 것이고, 돈이 충분히 많은 사람도 어쨌든 100만원을 필수품 구매를 위해 지출할 것이다. 국민 모두에게 100만원씩 총 51조원을 나눠주면, 그들은 어쨌든 필수품을 100만원어치씩 구매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A부문 자본가의 손에는 51조원이 들려 있을 것이다. 이제 국가는 그 51조원을 회수하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거둬들일 것인가

문제는 저 51조원을 어떻게 회수할 것이냐다. 원칙적으로는 세금으로 걷으면 된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분배-소비의 과정을 거치면서 순환한다. 이는 전적으로 민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정부가 합법적이고 정상적으로 끼어들 수 있는 하나의 ‘길목’이 있다. 조세제도가 그것이다. 정부는 경제주체들이 거두는 소득이나 행하는 소비에 세금을 매겨 전체적인 경제활동을 조정한다. 그러니까 정부는 A부문에 속하는 기업에 대해 51조원의 세금을 매겨 이를 거둬들일 수 있다.

혹시 이러한 환수가 부당한 것은 아닌가? 혹시 A부문 기업의 이윤을 강탈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사유재산권 행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없다. 저 51조원은 순수하게 유통수단으로써 투입되었을 뿐이며, 그 이유는 지금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 때문에 경제의 일부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황이 장기화되어 B부문의 모든 근로인력 및 일부의 생산자원이 A부문으로 편입되었다고 해보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수입으로 필수품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필수품을 유통시키기 위해 51조원을 투입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점은, 애초 저 51조원이 어떤 형태로 지급되느냐에 따라 아예 회수할 필요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앞서 쓴대로 51조원에 해당하는 유통수단을 반드시 화폐의 형태로 나눠줄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그것은 증서로 나눠줘도 되고, 전자적 기호 같은 것으로 나눠줄 수도 있다. 이 증서나 기호가 교환이 이뤄진 다음에, 그러니까 그 주어진 역할을 행한 다음에 무효화될 수 있다면 별도의 회수과정은 불필요하다.

‘회수’를 넘어 분배의 조정으로: 조세제도의 의의

실제 현실은 지금까지 묘사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무엇보다, 코로나19에 따른 경제 붕괴의 양상은 매우 불균등하고 불규칙적이다. 피해의 정도를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나눌 수 없다. A부문-B부문의 구분은 분석을 위한 극단적 가정일 뿐이며, 실제로는 그 사이에 무수한 기업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자영업자들이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다. 화폐자산가나 부동산자산가 같이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수입을 거두는 주체도 있고,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국가로부터 주기적으로 일정액을 이전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세 가지로 유형화해 살펴보자. 첫째, 코로나19로 인한 피해 정도가 균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 더 따져보자. 이런 이유로, 지원금은 피해의 정도에 비례해 지급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내 경우에는 최근의 ‘재난기본소득’ 논의에서는 지급의 시급성과 즉각적 선별의 불가능성 때문에 보편지급을 옹호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위에서 논한 대로, 보편적으로 얼마씩을 지급하더라도 그것이 필수품과 코로나재 구매에 쓰이는 한, 지급된 총액이 A부문 자본가의 손에 모였을 때 국고로 회수된다면 재정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회수가 번거롭다면, 상품권이나 전자기호로 지원금을 나눠준 다음 사용후에 소멸시키는 방법도 있다.

둘째, 지원금의 보편지급 대신 선별지급을 옹호하는 핵심 논거 중 하나가 다음과 같다. 선별을 통해 분배의 형평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절반만 옳다. 왜냐하면 A부문의 강제징발 같은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는, 분배의 형평성 저하는 지원금의 보편지급방식에 유래하는 게 아니라 B부문 종사자들의 소득이 0원이 된 상황에서 A부문 종사자들만 소득을 거두고 있다는 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만약 A부문에 대한 강제징발에 이어 배급이 행해진다면 양부문 종사자 모두 소득이 0원이 되면서도 필요한 재화를 손에 넣을 것이므로, 분배와 관련된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산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A부문에서 종전과 같이 200만원의 일인당 소득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이런 조건에서 100만원씩 보편지급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이 필수품을 얻을 수야 있겠지만 A부문 종사자들은 200만원의 소득을 추가적으로 갖게 된다. 지원금이 B부문 종사자들에게만 지급될 경우, A부문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소득으로 필수품을 구매해야 할 것이므로 최종적으로는 필수품과 함께 1인당 100만원의 소득을 갖게 된다. 분배가 더 공평해지기는 했지만, 강제징발 정도까지는 아니다.

코로나나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기본적으로 이것은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과 철학의 문제다. 코로나19가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서, A부문은 종전과 같이 굴러가지만 B부문은 멈추었다. A부문 종사자들은 돈을 벌지만 B부문 종사자들의 소득은 0원으로 떨어졌다. 이를 개개인의 운이나 능력의 문제로, 그러니까 시장법칙의 정상적인 작동의 결과로 볼 것인가? 그렇다면 국가는 분배에 아무런 조정도 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를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극복해야 할 공동의 문제라고 본다면, A부문 종사자들이 B부문 종사자들에 비해 그 어떤 이득도 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형평성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내포한다. 전쟁상황을 떠올리면 쉽다. 그리하여 예컨대 코로나 경제 하에서 A부문 종사자들의 소득의 절반을 거둬들여 B부문 종사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면, 어떠한 분배상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그 어떤 국가부채도 발생하지 않는다.

위 두 번째를 연장하면 세 번째 문제에 이르게 된다. 경제에는 생산에 직접 기여하는 A와 B부문 종사자만 있는 게 아니다. 대표적으로 화폐자산가와 부동산자산가 같이 생산 및 소비를 위해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자나 임대료 같은 수입을 챙기는 집단이 있다. 코로나 경제에서 이들의 소득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자율이 떨어지고 부동산 임대료의 산출 근거가 되는 인적 교류의 양이 확 줄어버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 자산가들이 이자율이나 임대료를 스스로 낮추질 않는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렇게 줄어든 이자나 임대료조차도 B부문 종사자들은 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B부문 종사자가 현재 어떠한 수입도 거두지 못하더라도 그간 쌓아둔 부가 있는 경우 일정 기간 동안 임대료를 지불할 수도 있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어쨌든 이러한 자산가도 국민이므로 국가는 이들이 최소한의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게 마땅하다. 여기서 원칙은 이런 것이다. 첫째, 만약 자산가들 가운데 새로운 가격조건 아래서 필수생활비 구매에 필요한 1인당 100만원을 획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가의 구호를 받는 게 정당하나, 둘째, 기존 조건대로 높은 임대료 등을 얻고자 하는 자산가의 요구까지 국가가 보장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국가는 임대료 낮추기를 거부하는 자산가들에게 현재 조건에 맞게 임대료를 낮추게끔 강제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에 맞는 경제적 공정성에 대한 기준 확립이 필요하다

자, 코로나 경제에서 발생하는 특유한 경제 문제를 정리해보자. 첫째, 생산활동의 조정이다. 코로나 경제에 맞게 기존의 생산자원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필수소비재의 균등한 분배다. 이를 위해 주기적인 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동등하게, 또는 피해를 본 국민에게 차등적으로 지급할 필요가 있다(물론 강제징발-배급의 방법도 있다). 셋째, 여기서 지급된 지원금을 효과적으로 수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코로나 경제에 돌입함에 따라 급작스럽게 교란된 분배를 일정한 선에서 바로잡아야 한다.

특히 세 번째와 네 번째 문제에 대응함에 있어, 조세체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부동산 임대인과 임차인 간의 사적 계약을 존중하고 선의의 피해를 보는 임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기존 임대계약에 따른 임대료 납부를 국가가 지원해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임대료에 대한 세제를 정비해 낮은 임대소득자는 보호하는 한편 높은 임대소득에 대한 과세는 강화할 수 있다. 기본 원칙은 그 누구도 코로나 사태로 인해 ‘비정상적인’ 이득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제2차대전 당시 전쟁 당사국을 중심으로 최고소득세율이 100% 가까이 치솟은 것은, 이러한 원칙에 사회 구성원들이 대체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해 지금 우리는 훨씬 발달한 조세체계, 그리고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기술적 여건을 확보하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위 원칙을 어느 정도 선에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다. 코로나 경제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소득이 줄지 않는 이들에게서 주기적으로, 적어도 이 국면이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라도 상당액을 거둬들일 수만 있다면, 극단적으로는 재정투입이 전혀 없이도 코로나 사태를 이겨낼 수 있다. 위에서는 아주 단순한 모형에 입각했기에 A부문의 소득 절반을 조세로 거둬들여 B부문 종사자들에게 선별 지급한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또한 복잡한 세력관계 때문에 일정한 불평등과 불공정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 또 어느 정도 용인할 것인가? 아직은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없는 것 같다.

‘재난기본소득’의 의의, 그리고 불가피성과 시급성

우리 사회가 코로나19의 공포에서 조금은 벗어났다는 느낌이다. 그 공포란 단순히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도무지 정체불명이라는 데서 공포감은 유래한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스크? 손 씻기? 그 무엇도 확실한 답이 되진 못했다. 대구에서 확진자가 하루에 수백 명씩 늘어나면서 공포는 극에 달했었다. 사람들은 외출을 삼갔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밤마다 휘황한 불빛을 내뿜던 거리가 일순 텅 비었다. 이 고요가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짙은 안개 속에서 두려워하던 우리에게 희미하나마 한줄기 빛이 보였다. 아쉽게도 그것이 백신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었다. 코로나19가 전 지구적 유행병으로 발전하면서 함께 퍼지고 있는 이 표현은, 묘한 마법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길거리에서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가급적 피하는 것, 기침할 때 입을 막고 마스크를 쓰는 것,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면 외출을 삼가는 것, 가급적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회적 거리두기다. 왜 그것이 필요한가? 서로간의 거리를 둔다고 감염병 확산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속도가 느려질 뿐이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는 것─바로 그것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핵심이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같은 수의 사람이 코로나19에 감염되더라도 그 속도를 늦출 수만 있다면 우리가 가진 의료체계가 감염된 이들을 충분히 돌볼 수 있을 것이다. 확진자의 완치율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백신 개발에 필요한 시간도 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발휘하는 마법이란 이런 것이다. 이 새로운 인식 덕택에, 타인과의 접촉을 삼가고 학교와 교회와 가게의 문을 닫는 것이 감염병 확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한 우리 자신의 주체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막연한 공포심에 의해 강제된 행위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 주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했으니, 이제 우리는 일정 한도 안에서 상황을 통제할 수도 있다. 새로운 취미를 개발하는 등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고 재택근무의 장단점을 면밀히 따지면서 새로운 환경에 맞춰 삶을 재조직한다. 아는 것이 힘이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분간 계속되어야 한다.

재난기본소득, ‘사회적 거리두기’ 성공의 물적 토대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엔 이중적인 성격이 있다. 사람들 간의 접촉을 줄임으로써 감염병 확산을 늦추는 순기능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바로 그러한 이동과 접촉을 통해 수입을 거두는 많은 이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집단을 이룬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카페, 서점, 식당, 학원, 운동센터 등 동네의 활기를 먹고 사는 작은 점포의 업주들과 거기 고용된 저임금 노동자들,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학교가 원활히 돌아가는 데 없어선 안 될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때때로 마을 도서관이나 주민센터에 찾아와 우리의 메마른 삶을 촉촉이 적셔주는 인문·예술 강사들도 일이 끊겨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감염병으로 죽을 확률은 낮추지만 경제적으로 죽을 확률은 높이는 게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맹점을 훌륭하게 보완할 수단이 있다. ‘재난기본소득’이 그것이다. 그것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잠꼬대’로 취급되기도 했지만, 이후 김경수 경상남도지사,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잇따라 주장하면서 재난기본소득은 우리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며 빠른 속도로 지지세를 확장하고 있다. 나라 바깥에서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과 조지프 스티글리츠, 그리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의 저자이자 보통 ‘우파’로 분류되는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까지도 우리의 재난기본소득에 해당하는 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재난기본소득의 기본 아이디어는 지금과 같은 전국적 재난상황에서 국가가 전 국민에게 일정액의 구호금을 일시에 지급하자는 것이다. 위의 두 도지사들은 100만원을 제시한 바 있지만 액수는 얼마든 조정될 수 있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히는 기본소득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정액 소득을 의미하지만, 재난기본소득은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름은 껍데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코로나19의 확산을 제어하고 그 치사율을 낮추는 데 필요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의도치 않게 많은 이들의 ‘경제적 치사율’을 높일 위험이 있다는 점, 그리고 재난기본소득이 그걸 낮춰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감염병의 확산을 늦추듯, 재난기본소득은 일부 사람들에게 몰아치고 있는 경제적 위기를 평탄화해준다. 재난기본소득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성공하기 위한 물적 토대다.

재난기본소득, (실효성 있는) 선별을 위한 보편

재난기본소득의 핵심은 그 보편성에 있다. 모두에게 줘야 한다. 선별이 낫지 않나? 일반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재난 상황에서 선별이란 필시 피해의 여부와 정도를 기준으로 할 것인데, 그런 선별은 현재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다 해도, 거기엔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하니만 못하다.

그렇다고 재난기본소득이 선별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즉각적으로 실행 가능한 선별까지 배제하진 않는다. 예컨대 아동수당 수혜자인 7세 미만의 시민은 뺄 수도 있다. 이미 이들에겐 40만원을 추가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둘째, 김경수 지사의 안대로 지금 보편지급된 것을 나중에 소득세체계를 통해 일부 거둬들인다면, 사실상 소득수준에 따른 차등지급이 된 셈이다. 셋째, 재난기본소득은 단기적으로 위기의 폭발을 늦춤으로써 중장기적으로는 선별적인 지원책이 실효성 있게 펼쳐질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준다. 이것도 재난기본소득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요한 유사성이다. 둘 다 시간을 벎으로써 한정된 경제적 및 의료적 자원을 고도로 선별적이고 집중적이며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봉사한다.

지금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역학적 대응이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선도적 모범을 사회경제적 차원에까지 이어나가야 한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재난기본소득이 그 초석이다. 바로 여기에 그간의 모범적인 역학적 대응의 궁극적인 성공 여부도 달렸다. 시간이 없다.

‘경제’가 되어버린 ‘공유경제’: 공유경제와 플랫폼

‘오픈넷’에서 연 세미나(링크),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공유경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가?’에 토론자로 참여하였다(2019.12.16). 다음은 나의 토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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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경제’가 되어버린 ‘공유경제’: 공유경제와 플랫폼
토론자: 김공회(경상대 경제학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더 좋은가? 불평등을 덜 야기하는가? 사실 이 질문은 인터넷 자체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동안 어떻게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가상공간(virtual space)이 기존의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현실공간(real space)에 식민화되어 왔는지를 고찰함으로써 더욱 잘 다뤄질 수 있다. 다음 토론문은 이를 염두에 두고서 작성되었다. 또한, 공유경제의 여러 영역 중에서도 노동이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는 부문을 주로 염두에 두었다(하지만 이하의 논의는 쉽게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공유경제의 (아름다운) 세계

공유경제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유휴 자원—물적 및 인적 자원 모두를 일컬음—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한시적으로 내어주는 활동을 일컫는다. 공유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유휴 자원을 보유한 개인과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개인이 만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런 장이 바로 플랫폼이다.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플랫폼은 실제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이나 광장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주목받는 형태의 플랫폼은 주로 인터넷 가상공간에 위치하며, 개인용 휴대기기(스마트폰 등)에 설치된 앱을 통해 접근된다.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플랫폼이 시장이라고 했다. 오늘날 시장에서는 처음부터 시장에 내놓을 것을 목표로 생산된 상품들이 거래되는 게 보통이지만,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에서는 우연히 발생한 잉여물, 즉 직접적 필요를 넘어서는 ‘유휴 자원’이 거래되곤 했다. 이러한 원초적 시장에서의 거래야말로 공유경제였던 셈이다. 시장의 이러한 성격은 중고품 시장 같은 사례에서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유휴’ 자원이 거래되므로, 공유경제는 자원의 활용도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노는 자원이 거래된다고 해도 거기엔—그것이 ‘경제’라고 불리는 한—일정한 금전적 보상이 수반된다. 즉 공유경제는 판매자에게 일정한 경제적 수익을 안겨준다. 자원의 활용도를 높임으로써 경제의 전반적인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 그리고 이 효과의 일부가 화폐화되어 자원의 판매자에게 지급된다는 것이 옹호자들이 말하는 공유경제의 핵심적인 의의다.

한편, 공유경제는 통상적인 ‘경제’에 부차적이라는 느낌이 있다. 뭔가를 하고 남는 ‘유휴’ 자원이 거래되니 그렇다. 공유경제에서 판매자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고도 남는 방, 차량, 각종의 능력(운전, 번역, 안내) 등을 내놓는다. 이를 모르지 않기에 구매자도 통상적인 시장거래에서와는 다른 ‘기대’를 가지고 공유경제에 참여할 것이다. 말하자면 공유경제에서 판매자와 구매자는 (통상적인 시장에서보다 더)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정보 아래서 서로 만나는 것이다. 공유경제의 장점을 상찬하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뜻하지 않은 이로운 효과들을 강조하곤 한다. 첫 번째 발제자인 아이작 레데가드가 강조한 것이 그 한 예다.

플랫폼—공유경제의 ‘게임 체인저’

지금까지 얘기하지 않은 게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위와 같은 공유경제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아니, 없던 균열을 일으킨다기보다는 애초부터 내재된 균열의 가능성을 현실화한다고 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플랫폼은 하나의 비인격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에서 유휴자원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만난다. 그러나 현실의 플랫폼, 특히 오늘날의 인터넷 기반의, 또 개인용 휴대기기 기반의 플랫폼은 단순히 거래 당사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보통 플랫폼은 거래 당사자들로부터 거래 성립의 대가로 일정한 수수료를 받는데(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 해도), 더 많은 수수료를 얻기 위해선 더 많은 거래가 성사되어야 한다. 어떻게 더 많은 거래가 성사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플랫폼에 참여하는 주체가 많아야 한다. 참여자가 많으면 성사되는 거래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 숫자의 중요성은 그 이상이다. 플랫폼 회사들이 그 참여자들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가 바로 광고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광고의 효과가 클 것이므로 플랫폼은 더 많은 광고수익을 거둘 수 있다. 또한 참여자가 많을수록 이들의 교류 과정에서 더 많은 정보가 생성될 것이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광고를 맞춤형으로 할 여지가 생긴다. 당연히 플랫폼 기업은 더 높은 광고수수료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논의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두 번째 사항이다. 플랫폼에서 더 많은 거래가 성사되려면, 거기서 제공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질과 가격이 적절히 어울려야 한다. 달리 말하면, 플랫폼에서 제공되는 상품의 가격이 그 상품의 상이한 질에 대하여 근사적인 ‘신호’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얘기다. 플랫폼이 거기서 거래되는 재화와 서비스의 질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필요 때문이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의 세부적인 인적사항을 요구할 것이고 임대되는 방의 상태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준들을 마련할 것이다. 우버나 리프트 같은 차량공유 플랫폼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공유경제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이들이 갖는 ‘기대’도 바뀌게 된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통상적인 시장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기대하는 표준화되고 일관된 질을 공유경제에서도 기대하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공유경제’는 ‘경제’에 부차적이고 대안적인 선택지가 더이상 아니다. 양자는 서로 경합하는 관계가 되고, 나아가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게 된다. ‘공유경제’는 ‘경제’가 된다.

공유는 간데없고 플랫폼만 나부껴

위와 같은 사태가 가장 극단적으로 진행된 사례가 최근 국내에서도 문제되고 있는 차량공유서비스와 음식배달서비스다.

차량공유서비스를 먼저 생각해 보자. 공유경제로서 이런 서비스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운송 서비스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차량을 소유한 여러 개인들이 어차피 놀고 있는 차량과 노동력(운전)을 제공하는 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플랫폼 참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구매자와 판매자의) ‘욕망의 이중 일치’라는 관문을 뚫고 거래가 성사되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상이한 차량에 대해 상이한 이용료가 책정되어야 할 것이다. 차량의 종류나 연식 같은 거야 객관적으로 파악된다고 해도 차량의 관리상태는 쉽게 파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에 대해선 플랫폼 측의 통제와 규율이 필수적이다. 가장 문제는 운전자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이다. 결국 서비스 질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운전자를 교육하고 일정 수준의 규율을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차량별로 상이한 이용료를 책정하고 일정 수준의 차량관리, 대고객 서비스의 내용과 형식 등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플랫폼의 예가 우버다. 여기서 더 나아가 플랫폼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장 수요에 맞게 운전자들을 적절히 공급하고자 할 것이다. 즉 운전자의 서비스 제공 시간까지도 플랫폼은 통제하여야 할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는 차량의 종류와 상태까지도 통제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를 위해 플랫폼은 아예 차량을 소유할 수도 있다. 한국의 ‘타다’ 같은 서비스가 여기에 해당된다. 플랫폼이 차량을 소유하고 운전자의 시간과 서비스 내용을 통제한다—이쯤 되면 플랫폼은 통상적인 의미의 운송회사라고, 운전자는 그 회사에 고용된 통상적인 의미의 임금노동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음식배달서비스도 마찬가지다. 공급의 안정화, 서비스 질의 표준화, 비용의 최소화 등을 위해, 결과적으로 플랫폼은 운송수단(오토바이 등)을 소유하고 배달노동자를 고용한 통상적인 배달업체가 되는 것이다.

‘공유경제’가 공유하는 것은?

공유경제는 자유를 증진하는가? 공유경제에의 참여가 개인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선택’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참가자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미덕은 공유경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통상적인 임노동을 하는 이들 중에도 스스로 억압받고 통제받는다는 느낌 없이 일하는 사람도 존재하니 말이다. 누구도 이런 이들을 ‘표준’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공유경제를 바라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플랫폼을 통해 이른바 ‘공유경제’에 참여 중인 노동자는 전체 취업자의 2~3%에 이르고, 이 수치는 빠르게 커지고 있다. 또한 이들 가운데 93.4%가 하루에 5시간 이상을 플랫폼 일자리에 머물며, 자신의 총소득 가운데 절반 이상을 플랫폼 일자리에서 얻는 이가 74%, 업무와 관련된 지시와 통제를 받는다고 여기는 플랫폼 노동자가 53.5%에 달한다고 최근 보고된 바 있다(장지연, ‘한국의 플랫폼노동과 사회보장’, 제10회 아시아미래포럼 발표문, 2019). 요컨대 플랫폼을 매개로 한 공유경제는 ‘경제’가 되었고, 거기서 행해지는 노동은 점점 더 자본주의적인, 통제되고 소외된 노동의 성격을 빠르게 띠어 가고 있다. 플랫폼 또한 단순히 유휴 자원의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매개자에 그치지 않고,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통상적인 자본주의적 기업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유경제가 무언가를 공유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공유경제에 참여하는 이들이 내놓는 ‘유휴자원’은 무엇인가? 처음에 그들은 자기가 소유한 차량 등을 가지고 공유경제에 들어왔으나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점차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그들은 맨몸으로 들어오면 된다. 이때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그들의 남는 시간과 노동력이다(실제로 ‘당신의 시간을 공유하세요’는 플랫폼 기업이 애용하는 마케팅 문구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성립 초기의 ‘시초축적’(primitive accumulation) 기에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빈털털이 대중에게서 그들을 본 적이 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자본주의 초기의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신이 보유하던 생산수단(농기구, 토지 등)으로 분리된 것이지만 오늘날 ‘자유로운’ 플랫폼 노동자는 기존의 일자리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일종의 ‘공유지’라고 하면서 이 세계에 국가의 권력이나 자본주의적 소유권, 자본의 논리가 스며드는 것을 시초축적기의 ‘인클로저’, ‘공유지 수탈’, ‘uncommoning’ 등으로 부른다.)

맺음말: 우리 앞의 도전

요컨대 오늘날 ‘공유경제’의 활성화는 경제위기와 저성장에 따른 경제의 불안 가중, 대규모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의 만연,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결과로서의) 소득 감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공유경제가 심화하는 불평등에 대한 부분적인 해법이 된다고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인들이 폐지를 줍는 것이 노인빈곤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에서의 ‘긍정성’일 뿐이다.

다른 한편, 현재 플랫폼 기반의 공유경제가 엄청난 금력과 권력을 확보하고 있는 기존의 유사 산업들과 갈등을 겪고, 또한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탄압’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 플랫폼 기업들에 대해 법과 제도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한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또한 기존의 이해관계가 세워놓은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결과인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공유경제가 갖는 자본주의적 속성—플랫폼 기업의 이윤추구 속성, 참가자들이 행하는 노동의 소외된 성격, 노동과정에 대한 자본주의적 통제 등—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공유경제는 인터넷 및 모바일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특수성과 자본주의 경제로서의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특히 현재 공유경제는 후자의 성격을 빠르게 강화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유경제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와 노동자의 권리 보호와 관련된 기본 법/제도가 속히 적용되어야 한다. 시초축적기의 맨몸의 노동자가 오늘날 통상적인 노동자가 누리는 권리와 노동조건을 갖게 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오늘날의 ‘공유경제’의 플랫폼 노동자에게도 강요하여야 하겠는가?

 

‘지역화폐’의 확산을 경계한다

전국에 지역화폐 ‘광풍’이 불고 있다. 2016년에 1168억원에 그쳤던 발행규모가 올해는 2.3조원에 이른다고 하니, 3년만에 덩치가 20배로 불어나는 셈이다. 이를 도입한 지방정부의 수도 급증하고 있다. 지역화폐, 그냥 이대로 가게 내버려둬도 좋을까?

일단 오해를 바로잡자. 요즘 언론에서 지역화폐라고 흔히 불리는 것은 사실상 지방정부가 액면가보다 싸게 발행한 상품권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백화점 상품권과 같다. 후자는 전국의 해당 백화점 지점에서만 쓸 수 있는 반면 전자는 특정 지역 내에서만 쓸 수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교통카드와 같은 충전식도 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지역화폐를 도입한 여러 지자체들이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역주민 입장에서는 어차피 할 소비를 이 상품권을 통하면 크게는 10%까지 보조를 받을 수 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지역 바깥이나 온라인에서 할 소비까지도 기꺼이 지역으로 끌어올 정도로 매력적인 ‘미끼’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지역 내에서 소비가 활성화되면 지역 내 고용과 생산도 자극될 것이다. 결국 지역화폐라는 건 정부 재정으로 지역민들의 소비를 보조해주는 것에 다름 아닌데, 지역뿐 아니라 나라경제 전체가 침체되어 있는 지금 이 정도의 재정투입을 ‘퍼주기’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경제력이 온통 서울로 집중되고 지방소멸 ‘괴담’도 공공연한 지금, 지역으로서는 이 이상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정책수단도 드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마냥 좋게만은 볼 수 없다. 바로 그 역진성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본질적으로 지역화폐는 정부 재정으로 지역주민의 소비를 보조해주는 정책이다. 문제는 그 보조가 소비액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영균이네와 재영이네의 월간 지역 내 소비액이 각각 30만원, 300만원이라고 해보자. 현재의 지역화폐 정책은 영균이네한테는 3만원, 재영이네한테는 30만원의 소비보조금을 주는 정책이다. 이것은 과연 정당한가? 누가 부자에게 이로운 이런 정책을 승인했는가?

역진성에도 불구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다면 경우에 따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최선일까? 이 대목에서 이번 정부가 지난날 보수 정부의 ‘낙수효과’론에 반기를 들면서 ‘분수경제’, ‘소득주도성장’론을 기치로 삼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부자에게 보조금을 주는 정책, 부자의 소비에 의존하는 정책, 그리하여 조세·재정의 누진성을 훼손하는 정책─그것은 이번 정부의 기조와 정반대 방향의 퇴행적인 정책이다. 다시 말해, 지역화폐 정책은 지역 내 소비의 진작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바람직한’ 목적을 가졌지만 부자의 주머니를 채우고 부자의 소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강하게 내포한다는 점에서—현 정부로서는 그 확산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정책이다.

그럼 대안은 없을까? 실제로 역진성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시행중이기는 하다. 월간 최대수혜액을 설정한다거나 사용처를 제한한다거나 하는 게 그 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역진성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사실 역진성과 관련해서는 보다 ‘깔끔한’ 방법도 있다. 올해 지역화폐 발행규모가 2.3조원(예정)이라고 한다. 어차피 이것이 지역민들의 소비 보조용으로 나눠줄 돈이라면, 부자에게 많은 액수가 돌아가는 ‘상품권’ 방식보다는 모두에게 같은 액수가 돌아가는 ‘기본소득’ 방식이 적어도 더 바람직할 수 있다(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기본소득 옹호론자는 아니다). 나아가 이러한 기본소득 위에 현재의 상품권 방식을 보조적으로 얹을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쪽으로 발상을 전환할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 중요한 것은, 이제 해가 바뀌면 현재의 상품권 형태의 지역화폐가 더 확산될 텐데, 그렇게 되기 이전에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이 정책이 소비확대뿐 아니라 경제적 공평성을 증진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는 일이다.

[안내] Ben Fine 교수 연속강연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오랜만인 만큼, 좋은 소식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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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파인(Ben Fine) 선생께서 한국에 오십니다.

<현대 정치경제학 입문(Rereading Capital)>, <마르크스의 자본론(Marx’s Capital)> 같은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가 누구인지 잘 알려져있지는 않습니다. 연구자들도 의외로 잘 모릅니다. 7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황금기에 떠오른 서양의 여러 남성 경제학자 중 하나.. 특히 알튀세르주의적 경향이 다소 두드러진 경제학자 정도?

아마도 벤 파인 선생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우리말 설명은 <마르크스의 가치론>(Alfredo Saad-Filho 저)의 옮긴이 후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텐데요, 저와 함께 런던에서 벤 파인 선생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밟은 전희상 선생께서 벤 파인의 학문적 궤적/업적을 상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알프레도 선생의 책에 벤 파인 선생이 소개된 이유는, 알프레도도 벤의 제자이고 둘이 공동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벤 파인이 어떤 인물인가? 저에게 묻는다면, 주저없이 두 가지 대답을 할 겁니다. 첫째, 이제껏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을 현대화하고 또 그것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둘째, 경제학의 현 상태를 비판하고 그것이 사회과학 전반에 미친 해악을 파헤침으로써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 흩어져 있는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을 규합하고자 하는 사람. 저도 참여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IIPPE)가 바로 그러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번에 벤 파인 선생께서 방한하시는 동안, 총 3회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선’은 했지만, 여러 기관의 도움 덕분에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세 개의 강연, 주제가 모두 다릅니다. 다르면서도, 묘하게 서로 보완적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 세 번의 강연에 모두 참여하신다면, 벤 파인이라는 사람이 어떤 연구자인지, 그리고 그가 경제학과 (그 대안으로서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느정도는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3회의 강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강연은 모두 무료로 진행되고, 누구나 참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보시다시피 두 번은 대학에서 열리는데, 이는 대체로 연구자(교수, 대학원생 등)를 염두에 두고 준비될 것입니다. 하지만 벤 파인 선생은 비교적 친절하신 편이므로, 누구라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다른 한번은 위 두번보다는 캐주얼한 분위기로 열릴 겁니다. 그래서 장소도 홍대앞으로 잡아봤습니다. 학생이나 활동가들을 주로 염두에 두고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강연 이후에 음료(?)와 다과를 함께할 수 있도록, 선생께 양해를 구해 두었습니다. 유럽에 가지 않고도 유럽에 간 것 같은 시간, 벤 파인 선생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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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연>

제목: Economics and Interdisciplinarity: One Step Forward, N Steps Back?
일시: 7월 16일 화요일 오후2시
장소: 서울대학교 사회대 16동 국제회의실(3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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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년 경제위기를 통해 경제학의 무능과 다양한 문제점이 다시금 드러났고, 그 반작용으로 경제학의 변방, 그리고 경제학 바깥에서 경제학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다양한 흐름들이 주목받았다. 이런 흐름들을 당분간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고 이름 붙여보자. 그렇다면 이 정치경제학은 간학문적 성격을 띠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간 계속적으로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으로 발전해 온 것은 주류 경제학(mainstream economics)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경제학이 내학문적(intradisciplinary) 성격, 그러니까 여타 학문분야들과 구별되는 그 고유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경제학뿐 아니라 그 어떤 학문분야라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을 법한 태도와 단절하고 있는 신호로 해석해도 좋을까? 언뜻 보아서는, 주류 경제학의 간학문적 성격은 그간 경제학에 제기되어 온 주요한 비판들–이를테면 리얼리즘의 결여, 방법론 무시, 주류 이외의 대안적 경제사상 및 경제사상사에 대한 무시 등–을 불식시키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러한가?

이번 강연에서 벤 파인은 주류 경제학의 매우 특징적인 어떤 측면, 곧 그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르는 것을 추적함으로써 위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모색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학 제국주의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발달해왔는데, 이러한 단계들을 특징지으면서 파인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역사적 논리’를 새삼 강조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처음엔 그저 시장에서의 수요-공급 문제에 한정되었던 경제학 제국주의가 어떻게 나중 단계에 와서는 세상만사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논리적 틀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파인에 따르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결과, 여러 분야나 방법 가운데서도 미시경제학(과 계량경제학)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정도와 수용성이 그야말로 엄청나서, 미시경제학(과 계량경제학)의 원리들은 파인이 ‘suspension’(‘보류’라고 옮길 수 있을 법한 표현)이라고 이름붙인 과정을 통하여 여타의 학문분야와 영역에 적용되게 되었다–아무리 그것이 비일관적이고 마구잡이 식이라 해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주류 경제학의 (점증하는) 간학문적 성격의 실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두 번째 강연>

제목: Marx’s Political Economy, Prospects 150 Years after Capital
일시: 7월 16일 화요일 오후7시
장소: 공중캠프(홍대 산울림소극장 근처. http://dmaps.kr/4323o)

“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50년쯤 전에 영어로 처음 읽기 시작했습니다. (…) 저의 독서는 오늘날의 워드프로세서나 전자파일 버전이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이루어졌지요. 당시 막 경제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던 저는 손으로 일일이 노트를 한 페이지씩 채워나갔는데, 그것을 몇 번이고 복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뿐인가요. <자본론> 본문의 중요 페이지들을 고르고, 이를 잘라내서 붙인 뒤 나중에 참조하기 좋게 가치, 비생산적 노동, 공황, 지대, 기술변화 같이 여러 범주들로 분류해 철해두고는 했지요. 저는 그렇게 만든 결과물로 캐비넷 하나를 가득 채웠습니다. 덕분에 저는 무언가에 대해 쓰거나 그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찾아보고 싶을 때, 비교적 쉽게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 <자본론>은 제게 성경과도 같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자본론>은 그간 여러 상이한 해석과 응용에 열려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자본론>을 성경에 빗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저는 <자본론>을 태피스트리에 빗대고 싶은데요, 그 규모로 보나 범위로 보나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 정도는 되겠죠. 마르크스의 작업 전체로 보면, <자본론>의 1권은 그의 정치경제학—그 자체가 마르크스의 작업에서 일부죠—의 중요하기는 해도 일부분일 뿐이고, 그는 2권과 3권, 그리고 훗날 세 권으로 출간된 <잉여가치학설사>도 썼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 태피스트리를 한올한올 풀어헤쳐 자세히 뜯어볼 수도 있겠고, 특히 오늘날의 학적인 배경에서 재검토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태피스트리를 풀어헤치거나 특정 실오라기를 골라 이를 따라가보기 보다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태피스트리를 전체적으로 한번 바로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참, 저는 이 작업을 행하면서 11개의 테제—네, 11개요!—를 내놓으려고 합니다!”

(런던의 마르크스기념도서관(MML)에서 <자본론> 출간 150주년 기념해 마련된 강연에서 한 이야기를 약간 재구성)

 

<세 번째 강연>

제목: From Financialisation to Neoliberalism
일시: 7월 18일 목요일 오후2시
장소: 고려대학교 정경관 502호

(강연 개요 설명은 조만간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주휴수당, 없애는 게 지키는 것이다

주휴수당은 실제론 일을 하지 않았는데 했다고 치고 주는 돈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1주일 꼬박 일한 노동자에게 하루치 임금을 더 줘야 한다. 고용주로선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특히 최저임금이 빠르게 오르는 요즘, 주휴수당이 더 야속할 것이다. 1953년 제정될 때부터 근로기준법에 의해 보장된 주휴수당을 없애자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언뜻 보면 이상한 주휴수당, 왜 줘야하는 걸까? 임금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여러 임금이론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비다. 먹고 살아야 일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 할 순 없다. 하느님도 6일간 세상을 창조하고 하루를 쉬지 않았나. 신께서 하루를 쉬며 뭘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쉴 때도 힘이 든다. 먹어야 하고, 때론 즐겨야 하며, 그래서 더 먹어야 한다. 그러니 6일간 성실히 노동의 의무를 다한 이에게 하루치 주휴수당을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의 도구나 마찬가지다. 주휴일은 그 도구가 다음주에 제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수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거기 드는 비용을 자본가가 대는 것, 당연하다.

이렇게 보면 주휴수당은 하루가 아니라 이틀치를 주는 게 옳다. 폐지할 게 아니라 늘려야 한다. 주5일제 때문이다. 현재 근로기준법 상의 주휴제도는 주6일제 시대의 산물이다. 주5일제가 되었으면 법도 바뀌었어야 옳다.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한국의 노동자들은 5일 일하고 6일치 받아서 7일을 산다. 이 불합리를 일부 힘있는 노조들은 회사와 개별적으로 협상해 해소한다. ‘각자도생’. 법정 주휴일에 더해 약정휴일까지 주 2일의 유급휴일을 갖는다. 당연한 일인데도, 이것조차 한국 사회에선 ‘정규직의 특권’으로 나타난다.

상황이 이러니 주휴수당을 늘리는 게 마땅함에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미 법적으로 보장된 주휴수당조차도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빠른 최저임금 인상 분위기 속에서 자본가들은 주휴수당을 아예 없애려고 혈안이 된 듯하다. 어찌해야 할까?

나는 주휴수당을 없애자고 제안한다. 단, 주휴수당만큼 기본시급을 올리자. 올해 최저시급이 8350원이다. 주휴일은 1주일(=5일) 일했을 때 하루 주는 것이므로, 주휴수당은 기본시급의 20%다. 8350원의 20%는 1670원이다. 그러므로 내 제안은 주휴수당을 없애는 대신 기본시급을 8350+1670=1만20원으로 올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대다수의 노동자에게 달라질 건 없다. 예컨대 현행 제도 하에서 하루 8시간, 주 5일 일하는 노동자는 한달에 174시간쯤 일한다. 하지만 주휴시간을 포함하면 그는 209시간 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의 월급은 8350원*209시간=174만5150원이다. 한편 주휴수당을 없앤 대신 기본시급을 높일 경우 월급은 1만20원*174시간=174만5150원으로, 기존 제도에서의 월급여와 같다(사소한 계산상 오차는 무시).

달라질 게 없는데, 뭣하러 굳이 주휴수당을 없애자는 것인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무리 법에 명시돼 있다고 해도 주휴수당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몰라서 안 주고, 몰라서 못 받는다. 물론 알고도 안 주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주휴수당을 없애고 기본시급 인상하면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그와 관련된 불필요한 사회적·행정적 비용도 줄어든다.

둘째, 주휴수당을 ‘합법적으로’ 못 받는 노동자도 있기 때문이다. 주휴수당을 받기 위해선 1주일에 15시간 이상 일을 해야 한다. 하루 2.5시간씩, 주 12.5시간만 고용된 노동자는 주휴수당을 받을 수 없다. 이 노동자가 비슷한 조건으로 3곳에서 도합 주 40시간을 일해도 그는 주휴수당을 한푼도 못 받는다. 그러나 이런 노동자도 주휴수당이라는 개념에 들어있는 ‘휴식’이라는 걸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휴식에 필요한 돈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휴수당에 해당되는 금액을 기본시급에 잘게 쪼개넣으면 이런 단시간 노동자에게도 일정한 휴식수당을 지급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현행 주휴수당의 위와 같은 성격 때문에 일부 고용주들은 노동자를 이를테면 14.5시간만 고용하는 등으로 주휴수당 지급을 ‘합법적으로’ 피해 왔다. 이를 ‘고용 쪼개기’라고 한다. 하지만 고용이 단시간화하는 것은 오늘날 경제의 거스르기 어려운 추세이기도 하다. 나의 제안은 일부 고용주들의 ‘꼼수’를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도 부합한다.

이상에서 주휴수당의 의의를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인 여건상 그것을 없애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주휴수당을 어떻게 하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 특히 저임금 노동자들이 삶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계수단을 어떻게 획득하게 해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요즘 청년층을 포함한 많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고용은 ‘시간(hour)’ 단위로 이루어진다. 임금도 ‘시급’으로 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사이클은 결코 ‘시간’을 단위로 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및 사회적 여건상 적어도 ‘달’ 정도를 삶의 최소 단위로 보는 게 적절하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한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은 얼마인가? 올해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선 최저시급의 월환산액, 그러니까 적어도 한달에 175만원쯤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첫째, 이 액수가 충분한가? 앞에서 주휴수당이 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액수는 충분치 않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로 주장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적대하는 이해관계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잠정적으로만 내려질 수 있다. 둘째, 정해진 그 액수를 노동자들이 어떻게 확보하게 할 것인가? 현행 제도는 한달동안 주로 한 곳에 고용되어 성실히 일한 사람에 한해 실제 일한 데 대한 보수에 일정액(주휴수당)을 추가로 얹어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보면 주휴수당이란 실질적으로는 ‘휴식’과는 별 상관이 없고, 노동자에게 임금 또는 생계비(의 일부)를 확보시켜주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일부 노동자는 아무리 열심히, 오래 일을 해도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얻지 못한다. ‘합법적으로’ 말이다. 노동자가 생계비 일부를 주휴수당이라는 형태로 확보하게 하는 것은 오늘날 특히 청년들의 고용 현실에선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 얹어주는 것을 없애고 기본시급을 높이자. 이들에게 주휴수당에 해당하는 임금몫을 확보시켜주는 방법은 현재의 주휴수당을 없애는 것뿐이다. 물론 주휴수당에 해당하는 액수가 기본시급에 흡수된다고 해서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 휴식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이들의 임금을 높여줄 뿐이다.

현재의 주휴수당은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이들에게만 실질적으로 보장된다. 그 자체가 임금체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론 불안정한 지위의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제가 된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의 휴식권 보장을 위해 주휴수당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참조). 그러나 ‘주휴수당’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휴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주휴수당을 받지 못하는 불안정 노동자는 주휴수당 때문에 더 일을 해야 한다. 단순계산 해보면, 주휴수당을 못 받으면 한주에 8시간, 한달에 35시간(209시간 빼기 174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어떤 노동자에겐, 휴식을 방해하는 게 주휴수당이다. 주휴수당에 대한 자본가의 공격은 노동자의 휴식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임금을 삭감하려는 것이다. 주휴수당, 없애는 게 지키는 것이다.

현실의 역사와 지성의 역사: 역사 탐구의 한 가지 의의와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는 여럿이 있겠지만, 내 경우에 특히 와닿는 이유는, 인간의 지각 내지는 지력이라는 게 믿을 게 못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생각해보자. 흔히 이 문제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출현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돌이켜보면 비정규직 문제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국경제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오늘날 ‘비정규직의 역사’를 쓴다면, 그 시작점은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외환위기 이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아주 안 쓰인 것은 아니다). 내용적으로 ‘비정규직’을 가리키는 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오늘날과 같이 ‘비정규직’(정규직에 대비되는 비정규직, 또는 파견/시간제/기간제 등을 포괄하는 비정규직)이라는 보통명사 내지는 대명사로 공공연히 칭하면서 사회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1997년에 대하여, 이 해는 (A)비정규직이 생긴 해는 아닐지라도, (B)비정규직이라는 것의 존재와 그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자각된 해라는 식의 의미부여는 여전히 가능할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다. 역사에 대한 탐구가 없다면, (A) 같은 직관적인 의식에서 (B)와 같은 고양되고 반성된 의식으로 나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탐구를 통해) 비정규직은 1997년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보면서 (B)와 같은 의미부여에 동의한다면, 비정규직을 다루지 않았던 1997년 이전의 노동 관련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 교정도 할 수 있으리라(실제로 1997년 이전에 노동 관련 논의들 중에 비정규직을 핵심적으로 문제삼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현실 역사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으로 지성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이끌어내며, 궁극적으로는 ‘지성사’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실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비판’이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그의 비판에서 역사적 탐구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궁극적으로 ‘(비판적) 이론사’로 이어지는 것은 (그리하여 이를테면 ‘잉여가치학설사’가 <자본론>의 제4권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이론 비판이 아니고 현실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뭘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P.S. 그런데 ‘(비판적) 이론사’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논자들이 틀렸음을 보이는 게 아니고(그런데 많은 언필칭 ‘비판’들은 여기서 그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비정규직의 의의를 온전히 음미하지 못하게 만들었는가,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논의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때론 눈부시게 발전하기도 하고 때론 허망하게 무시되기도 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의 고갱이는 무엇인가 등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정경유착인가 (경제)범죄인가: (‘해결책’을 찾기에 앞서) 괴물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기

수개월 전부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진상이 점차 드러나고,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확산되면서 ‘정경유착’이 화두로 부상 중이다. 이에 따라 정경유착의 원인과 처방에 대한 논의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거의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논의도 별다른 성과 없이 잦아드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한다. 왜 정경유착 논의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헛되게 반복되는가?1 혹시 지금까지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이 어떤 잘못된 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정경유착’이라는 문제설정

말 그대로 풀면 정경유착(政經癒着)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간의 결합을 일컫는데, 우리나라 같은 후발국 고유의 문제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정경유착은 자원배분을 왜곡하고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등의 이유로 척결 대상이 되며, 만약 그것이 ‘척결’되면 좀 더 선진적이고 완전한 자본주의가 실현되리라고 여겨진다. 적어도 전근대적인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후발국에서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수립은 곧 ‘근대화’의 정점으로서 그 자체로 ‘진보성’을 담지하고 있기에, 정경유착 근절을 통한 더 나은 자본주의 건설이라는 테제는 우리나라 진보진영에서도 일종의 ‘(최대)공약수’로서 널리 공유되는 입장이다.

정경유착이 주로 후발국에서 문제시된다는 점 때문에, 후발국 고유의 특성들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곤 한다. 이를테면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1997년 외환금융위기 당시, 이 지역 특유의 유교적 전통에 기인한 ‘연줄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때문에 자본주의 발달이 왜곡되었고 결과적으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진단에 따르면, 과거의 잔재와 결별한 선진적인 제도의 도입만이 ‘제2의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방에 따라, 김대중․노무현 정권기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그 처방의 핵심 주체는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등이었다(‘워싱턴 컨센서스’).

정경유착은 후발국 고유의 문제?

정경유착을 후발국의 문제,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자본주의 미발달의 결과로 한정짓는 것은 정경유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첫 번째 걸림돌이다. 사실 정경유착은 그렇게 엄밀한 개념도 아니다. 이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도 불명확하다. 좀 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이를 부패(corruption)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정경유착이란 부패의 한 유형, 특히 후발국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꼭 그렇게만 한정지을 수도 없는 유형임이 단박에 드러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패는 차라리 ‘정상적인’ 것이며,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까지도 부패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부패는 각 경제주체들 간에 물질적 이해관계의 대립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부패의 형태나 유형은 나라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정도에 따라 다르다. 한국과 같은 후발국에서 부패가 특히 ‘정경유착’의 형태로 벌어지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자원의 배분, 나아가 경제발전 자체를 국가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한국은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룬 자본주의국으로서, 경제는 이미 국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못할 정도로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성숙했다. 여기서 독점대자본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단련’된 덕분에, 비록 내부 지배구조에 후진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현대화되고 근대적 합리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집단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독점대기업이 정경유착에 연루된다면, 그것은 대체로 부패하고 구태의연한 정치권력의 탓, 후진적인 정치문화의 탓으로 돌려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럴 경우 독점대기업이 그 자체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자행하는 다른 부패행위들을 시야에서 놓치거나 이런 행위들이 예의 그 ‘정경유착’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길 위험이 발생한다.

그간 정경유착이 제기된 맥락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정경유착이 경제와 사회, 나아가 정치제도 전반의 발전을 가로막는 핵심 문제로 부각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 대목에서, ‘정경유착’이라는 용어가 확립되고 일반적으로 쓰인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구축한 전자도서관이나 과거 일간지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보면, 정경유착이 별다른 통제 없이 횡행했던 1980년대 이전에는 놀랍게도 그런 용어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2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구축된 뉴스라이브러리(1920~99년치 <동아일보> 등 4개 일간지 원문수록)에 따르면, ‘정경유착’은 1980년 9월 4일자 <매일경제신문>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운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해,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정당성을 갖지 못한 공직사회를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을 통제할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육성된 화두였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화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화면

하지만 정경유착이 대유행을 탄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997년 외환금융위기 국면에서였다. 당시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이른바 ‘내인론’과 ‘외인론’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한 국제통화기금 등 서구세계의 주된 입장은 한마디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신흥국들의 역사적․문화적 DNA에 각인된 후진성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내인론). 이러한 후진성의 결과가 정경유착이었고, 정경유착은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해이를 일으켜 이들이 사전적․사후적으로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동안 한국 등 저발전국들의 ‘부패한’ 정치권력을 대상으로 ‘차관장사’, ‘원조장사’를 해온 것이 다름 아닌 선진 자본주의 정부들이었음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지적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줄잡아 1980년대 이래 정경유착, 좀 더 일반적으로는 부패에 대한 문제제기가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정당화하는 구실로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실증적으로 뒷받침되기도 어려운 다양한 논리들이 동원되었다. 부패는 ‘큰 정부’에서 비롯된다거나 경제성장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3 이러한 주장에 따라 많은 나라에서 기존의 복지시스템이 축소되었고, 특히 우리나라 같은 후발국에선 일련의 ‘자유화’를 위한 ‘구조조정’이 이뤄졌지만, 결과는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극심한 불평등과 (상당 정도로 그 결과로서의) 성장동력의 고갈이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일당이 개입된 ‘정경유착’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시각의 확장: 정경유착, 뭐라고 불러줄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이후 ‘정경유착’이 화두로 떠오른 데는 내적․외적으로 매우 특수한 맥락들이 있었고, 그러한 맥락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타당하다고 하기 어렵다. 이에 덧붙여, 그동안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역사적․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정치권력일수록 ‘정경유착’을 문제 삼는 데 열정적이었음을 다시금 강조해야겠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정치나 행정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자극해 맹목적인 포퓰리즘으로 활활 타오르곤 했다. 공직기강 확립과 (공직사회의) ‘적폐해소’를 그간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나 강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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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는 최순실(JTBC 화면 캡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경유착’이라는 화두가 제기하는 현실의 문제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제들을 제기하기 위한 보다 적확한 ‘틀’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우리 사회는 정경유착이라는 특수한 형태보다는 부패 일반을 문제삼지 않으면 안될만큼 성숙했다. ‘정경유착’만 해소한다고 끝도 아니고, 비대해진 경제권력이 정치권력하고만 유착하는 것도 아니다. 재벌을 비롯한 경제권력이 언론과 ‘유착’하는 것은 이미 일상사가 되었고, 이들은 자신이 필요하기만 하면 심지어 시민사회의 단체들과도 ‘유착’한다. 얼마 전 해외투기자본의 횡포를 고발하는 데 앞장서온 시민단체의 한 인사가 이 단체가 문제삼던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던 것이 밝혀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이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좀 더 만연되지 않을까?

‘정경유착’ 문제제기에서는 정치권력이 우위에 서고 경제권력이 뒤따른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구호가 이를 잘 요약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이미 10여년 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일갈했지만, 이 탄식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잊힌 듯하다. 어쩌면 권위주의적 성격의 세력들이 잇따라 집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야를 세계로 돌려보면, 지금 문제는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윽박질러 ‘거래’를 하는 것보다는, 경제권력이 자신의 이해관계 실현의 과정에서 정치권력을 이용한다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가 백악관과 행정부 요직에 이미 4명의 골드만삭스 ‘동창생’을 내정한 상태며,4 유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골드만삭스의 유럽 점령도? (출처: The Independent, 2011년 11월 18일자)
금융위기 이후 골드만삭스의 유럽 점령도? (출처: The Independent, 2011년 11월 18일자)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지금 진정으로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경제권력이 ‘종범’이 되는 정경유착보다는 그것이 ‘주범’으로 나서 저지르는 각종 경제범죄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 지난 2007~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로 기가 막힌 (유사-)경제범죄들이 주목받고 폭로되지 않았는가. 엔론 같은 대기업들의 회계부정,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나라간 세제 차이를 악용한) 조세포탈, 글로벌 신용평가기관들과 금융기관들의 조작사건(LIBOR금리 조작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경제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선진국들에서 벌어진 이러한 경제범죄들이 ‘정경유착’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범죄들이 ‘해이한 공직기강’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운 판단인가?

맺음말: 재벌은 ‘주범’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재벌은 주범이다. 지난해 12월 국조특위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보였던 ‘꺼벙이’ 같은 표정으로 재벌이 당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각을 굳건히 했을 때, 대기업-중소기업 관계의 왜곡, 만연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강요된 자영업의 성행과 가계부채 폭증, 나아가 정부의 재정정책상의 소극성과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까지, 현재 우리 경제의 난맥이 풀린다.

‘정경유착’이라는 문제제기는 ‘정’의 문제도 ‘경’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그것이 가리키는 현상의 ‘거대함’을 적절히 환기할 수 없다. 공직사회의 문제는 그것대로 푸는 게 옳다. 거대한 권력이 된 독점자본의 잘못된 행태들을 ‘범죄’로서 명확하게 지정하고, 문제가 될 경우엔 엄정하게 처벌하는 것—그것이 핵심이다.


  1. 어떤 면에선, 예전의 문제제기가 더 선명하고 근본적여 보이기도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對財閥政策, 더 나아가 分配와 生産, 所有와 雇傭을 둘러싼 經濟體制의 문제를 문제의식으로 삼고 政府가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이것은 1960년대 중반 대표적인 정경유착 사례인 한국비료 사태 이후 <동아일보>(1966년 11월 18일자) 1면에 게재된 기획기사의 일부다.

  2. 물론 각주 1)의 인용구가 보여주듯, 오늘날 우리가 ‘정경유착’이라고 일컫는 사태에 대한 자각은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정경유착’이라는 용어의 용례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유착’이라는 용어도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 기사에서도, ‘유착’과 함께 ‘정치권력의 [경제과정에의] 개입’, ‘밀착’, ‘기착’(寄着) 등이 쓰이고 있다.

  3. 예컨대 후자의 경우, 그것이 경제학이 즐겨 상정하는 매우 제한된 조건 아래서는 타당하다고 해도 역사적으로는 쉽게 지지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들에 있어 성장률이 가장 빨랐던 시기는 가장 부패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국의 경제당국은 국제기구 등에 의해 ‘부패’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당시 중국의 경제성장이 경제과정이 투명했더라면 더 빨랐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이 부패가 좋다는 뜻은 아니다.

  4.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지명자, 게리 콘 백악관 국민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지명자, 스티븐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 내정자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 인수위원회는 12일 골드만삭스 재단 이사장인 디나 파월을 백악관 경제담당 선임 고문으로 지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