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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버펫 판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via Farnam Street

지난 몇년 간 대규모의 자본투자(지출)을 통해 섬유부문에서 가변비용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모두 즉각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표준적인 ROI 검증을 통해 따져보자면, 사실 이런 기회들은 이윤율이 꽤 높은 캔디사업 혹은 신문사업에 대한 비슷한 투자에서 거둘 수 있는 것보다 보통 더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올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섬유부문에 대한 이러한 투자가 가져올 것으로 보였던 이득은 환상에 불과했다. 국내외 경쟁자 상당수가 비슷한 지출을 계획하고 있었고, 충분한 숫자의 회사가 이런 투자를 한 이후에는 산업 전반에 걸쳐 가격이 하락했으며, 비용절감에 의한 새 생산비용이 새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보았을 때, 개별 회사의 자본투자결정은 비용 절감 효과가 있으며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산업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결정들은 개별적인 자본투자결정을 상쇄하는 효과를 나았으며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퍼레이드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더 잘 보기 위해 모두 까치발을 딛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차례 투자가 끝날 때마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게임에 더 많은 돈을 박아 넣었으며 이익은 여전히 보잘 것 없었다.

워렌 버펫, 버크셔 해서웨이 이사회 의장의 편지, 1985년

Over the years, we had the option of making large capital expenditures in the textile operation that would have allowed us to somewhat reduce variable costs. Each proposal to do so looked like an immediate winner. Measured by standard return-on-investment tests, in fact, these proposals usually promised greater economic benefits than would have resulted from comparable expenditures in our highly-profitable candy and newspaper businesses.

But the promised benefits from these textile investments were illusory. Many of our competitors, both domestic and foreign, were stepping up to the same kind of expenditures and, once enough companies did so, their reduced costs became the baseline for reduced prices industrywide. Viewed individually, each company’s capital investment decision appeared cost-effective and rational; viewed collectively, the decisions neutralized each other and were irrational (just as happens when each person watching a parade decides he can see a little better if he stands on tiptoes). After each round of investment, all the players had more money in the game and returns remained anemic.

문창극의 바벨탑

세월호 사건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야당에 내정을 넘기고 개헌을 제안하는 수준의 광범위한 정치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나라 전체가 3년상을 치를 판인데 제살 깎는 희생 없이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충청도가 돌아섰으며 야당의 동의 없는 입법은 불가능하다. 국가개조는 말할 것도 없고 창조경제나 규제철폐도 물건너 갔다. 대통령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헌정의 연속성 정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문창극씨가 총리가 되느냐 마느냐는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후보지명 철회를 전제로 충분히 해명을 하고 물러나는 방식으로 이 해프닝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창극은 정면돌파를 선택해 도리어 일을 크게 벌이고 있다.

사람들이 강연 동영상 전체를 보고 나면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넘기고 국회에서 과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자신의 신을 강연에 이용해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한줌에 불과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를 욕보이기로 결정했다. 강연은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그 내용은 기독교적인 역사관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질서 있는 퇴각의 기회는 사라졌고, 덤터기는 모두 신이 뒤집어쓰게 됐다.

문창극은 기독교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역사의 완성을 대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속류헤겔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이전의 모든 시대는 예비단계에 불과하며, 고난의 행군은 빛나는 영광을 위한 필연적 계기라고 생각한다. 헤겔에 있어 역사가 이성의 자기실현이라면, 문창극에게는 기독교-한미일삼각동맹-반공-자본주의가 민족사의 동력이다. 기독교를 통한 민족대각성을 위해 이조시대의 당쟁과 가난이 필요했으며, 자본주의의 싹을 심기 위해 일본을 이용해 식민지가 되었고, 반공을 위해 남북분단을 감수했으며,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해 6.25 전쟁을 결행했다는 식이다. 이 역사의 동력은 (헤겔에게서처럼) 마침내 자신을 실현해내는 이념이며, 존재했던 모든 것이 이 빛 가운데서만 자신의 올바른 자리를 찾는 그러한 이념이다. 그러므로, 편안한 중립과 실용의 언어 뒤에 숨어 이념의 경직성을 비판하는 칼럼을 쓸 때 문창극은 실은 자신의 확고부동한 이념을 배반했던 것이다. 이런 그를 위해 신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마태 7:5)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창극은 그의 이념이 곧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하여튼 크리스찬이 먼저 정신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요. (문창극, 과거 교회 강연)

신은 (그것조차 자신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간난의 세월을 극복하고 마침내 기독교-한미일삼각동맹-반공-자본주의를 완전히 실현해 내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실현되었으며, 공산주의 철폐의 중심국가로 쓰임을 받을 대한민국을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될 날도 멀지 않았다 (이것을 그의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먼저 정신을 차려 깨달아 알고 있는 문창극은 무지몽매한 동료 기독교인들이 어서 신의 뜻을 깨우치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독려한다. 그러면 순리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문창극은 속류라이프니츠주의자이기도 하다. 분단이나 6.25 같은 엄청난 고통조차 신의 뜻을 담지하고 있으니 이를 비난하고 멀리할 것이 아니라 그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미 신의 은총으로,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는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결핍과 고난조차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인샬라! 그런데 그는 왜 북한을 긍정하지는 못할까?

대단히 위험한 신앙관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예수를 배반한 가롯유다는 희생번트를 댄 것에 불과하며, 십자가에서 나를 왜 버렸느냐며 절규하는 예수는 제대로 쇼를 한 셈이다. ‘신의 손’의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한 마라도나는 진정한 신앙인일 것이며, 핵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련을 묵묵히 견뎌낸 북한에 주신 신의 축복이 되고 만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뜻 사이의 긴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문창극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전 1:25)다고 했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의 뜻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신의 뜻을 내 머리로 이해하고 내 손에 쥐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뜻은 ‘진정성’과는 달라서 아무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 깊은 약함과 악함을 자각한 사람이 대진리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두려운 마음으로 뱉어내는 그런 말이다. 그것은 숨이 끊어지기 전 자신의 전생애 속의 모든 굴곡과 희로애락을 회고하면서, 삶을 이끌어 온 것이 자기자신이 아니었음을 꿰뚫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운명이다’라고 통째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다. ‘신의 뜻’은 삶의 지침도 아니며 윤리적 덕목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대신 세상을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간 사람에게, 그의 고통과 패배와 절망과 실패와 두려움과 고뇌 속에 한줄기 빛처럼 스며드는 위로의 능력이다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마태 28:20).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신의 뜻을 고백의 방편으로서만 겸손히 ‘사용’해야 한다. 생의 모든 잘못과 실패와 패배의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되, 그러한 잘못과 실패와 패배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그를 지탱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있던 거룩한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 바로 이러한 회고적 태도가 ‘신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가장 건강한 방법일 것이다.

반대로 신의 뜻이 사전적인 판단의 근거와 정당화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것은 테러리스트의 무기가 된다. 신의 뜻을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우매한 대중을 계몽하려하고,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신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뜻이며, 인간의 생각을 신의 생각으로 꾸며놓은 것에 불과하다. 포이에르바흐가 주장한대로 그들은 신을 창조하여 인간의 속성을 그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소외시켰다. 여기에는 올바른 신앙인은 우선 참 인간이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다.

신의 뜻 운운하며 과거를 뒤집어 놓는 장난을 해서는 안된다. 식민지 지배가 없었으면 근대화도 없었고, 이승만과 박정희가 없었으면 민주화도 없었다고 생각하는가? 시간적 선후관계와 논리적 선후관계를 혼동하지 말라.  3.1 운동과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긍정적 평가를 가능하게 한 것이며, 민주화가 되었으므로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5월 광주가 없었으면 박정희 기념사업 같은 것도 없었다. 6월 항쟁이 없었다면 전두환이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박근혜에게 정치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된 것이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야 그들의 공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을 훑어보며 나는 이 사람이 바벨탑을 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창세기 11:4)

그는 10년 동안 칼럼을 쌓고 쌓아 마침내 ‘역사의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때가 왔다. “주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창세기 11:5). 개독의 바벨탑이 여기저기서 무너지려 하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인지 두려워하며 신의 뜻을 묻는다.

(142) 절망적인 종속 – 가치의 오디세이

전에는 동일한 도구를 다루는 것인 평생의 전문직이었는데, 이제는 동일한 기계에 봉사하는 것이 평생의 전문직으로 된다. 기계는 노동자 자신을 유년시절부터 특정 기계의 한 부분으로 전환시키는 데 악용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이 현저히 감소할 뿐 아니라, 동시에 공장 전체에 대한, 따라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절망적인 종속이 완성된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와 그 발전의 자본주의적 이용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본론 1권 15장, pp. 566-7; MEW 23, 445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용가치의 생산을 매개로 한 가치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치생산이 원인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결과다. 가치생산이 내용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그 형식이다. 다만 이 형식 – 혹은 형태 – 은 가치생산이라는 내용의 존재양식이므로, 사용가치생산 없는 가치생산은 있을 수 없다.

가치생산은 (원인) 자본가 사이의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 (결과). 가치생산에 대한 자본가의 욕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생산성의 증대에도 한계가 없다. 자본주의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생산과정을 급속도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가치는, 이 추상적 논증을 현실화해야 했다. 사용가치는 가치를 팔벌려 환영하지 않았고, 우선 가치는 사용가치를 무릎꿇려야 했다. 번번히 접신을 거부하는 노동력 사용가치를 굴복시키기 위해 가치는 기계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공장제 대공업의 “자본주의적 이용”은 가치의 사용가치 정복전이었으며,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절망적 종속화의 과정이었다. 가치는 가격과 같은 단순한 숫자도 아니지만, 노동-자본 관계의 추상적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혼이다. 가치는 사용가치 안에 가만히 머물러 안식하지 않았다. 가치는 자신을 부정하고 사용가치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 그것을 자신의 틀에 맞게 변형시키고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직 그 후에야 가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 진정한 실질적인 자본이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가치의 오디세이이며, 자본론은 가치의 경험의 학인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가치의 오디세이는 쉬지 않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추동한다. 가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가치는 언제나 그것의 “자본주의적 이용”으로까지 나아가 자신의 운동의 산물, 곧 총체로서의 자본주의를 “절망적인 종속”의 체제로 완성시키고 또 재완성시킨다. 가치는 어떤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치의 긍정적인 측면은 계승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철폐하자는 주장은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다. 그 공상이 현실화하는 순간,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 가치가 긍정적으로 계승된 자기자신을 우선 철폐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141) 노동시간 단축의 수단이 그 연장의 확실한 수단이 된다는 역설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모든 생활시간(Lebenszeit)을 자본의 가치증식에 이용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된다는 경제적 역설이 이로부터 나온다 – 자본론 1권 15장, p. 547; MEW 23, p. 432

노동자: 어이 자본가. 지난 1년간 기계를 이용해서 생산을 해봤는데, 생산성이 두 배로 높아졌어. 노총에 나가봤더니 다른 회사 노동자들도 같은 얘기를 하더라고. 너 정말 기계 잘 들여왔다. 니네 자본가들 돈에만 환장한 줄 알았는데 꽤 쓸모있어. 훌륭해. 이제 노동시간 반으로 줄이자. 어차피 반만 일해도 생산량은 똑같애.

자본가: 뭔소리여. 법정근로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너는 나랑 자유롭고 평등한 조건 하에서 고용계약서에 싸인했던거 아니여? 주당 40시간 노동은 내 권리라고!

노동자: 자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좀 들어봐. 내가 월급을 받으면 그걸로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들을 구매한단 말이야. 저기 가치 말고 사용가치라는 것도 있어요. 버스도 타야되고, 하루 세끼 먹어야 되고, 가끔 외식도 하고, 한 달에 한번은 영화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인문학 강의도 듣고. 이걸 다 생산하는데 시간이 이제 절반만 필요하다니까? 굳이 내가 계속 40시간을 일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뭘 더 달라는게 아니잖아.

자본가: 나는 사용가치 같은 거 먼지 몰라도 지금까지 잘 살았고, 앞으로도 그런 것에 관심둘 생각 전혀 없음. 그리고 40시간은 너희들 대표자가 국회에서 정한거야. 왜 이제 와서 딴소리여.

노동자: 아놔. 내가 그동안 굳이 얘기를 안했는데, 내 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거 다 알고 있다고. 너한테 중요한 건 어차피 비율 아니야? 필요노동시간 절반으로 줄었으니까 공평하게 잉여노동시간도 절반으로 줄이자. 내가 착취 없애라고 까지는 안할게.

자본가: 웃기고 있네. 너네는 무조건 40시간 일해야 돼. 노동시간 줄일 거면 내가 미쳤다고 기술개발하냐? 나도 다 살자고 이러는거야. 다른 자본가들 다 난리라고. 옆 공장은 생산성이 두배 반이나 올랐어. 걔네가 덤핑하면 나 쫄딱 망한다.

노동자: 정말 이해가 안되네. 너네 전국경제인연합회랑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모여서 뭐하냐? 같이 모여서 합의를 해라. 합의를. 비용 갹출해서 기술개발 같이 하면 되지 서로 피곤하게 뭐하는 짓들이여.

자본가: 허허. 니가 잘 모르나본데 다들 금메달 딸 각오로 피터지게 노력해야 되는거야. 그래야 사회 전체적으로 기술수준도 높아지고 모두들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보이지 않는 손인가 발인가가 다 알아서 한다고. 이게 내 철학이야 철학.

노동자: 다시 차분히 생각해봐. 우리가 계속 40시간 씩 일하면 생산량이 두배로 늘어날 거 아니냐, 생산성이 두 배로 늘어났으니까. 그지? 우리들 몫 빼고 남는 분량이 이제 예전에 비하면 세배야 세배. 이거 어디다 팔거야. 사용가치 이거 만만한게 보면 안된다. 그러다가 재고 쌓이고 은행빚 못갚고 공황오고 이런거 아니여? 무턱대고 너무 많이 생산하면 다 망한다고.

자본가: …

노동자: 음… 니가 이해도 못하는 것같고 또 욕심 있는거 다 아니까 우리가 통크게 양보할게. 계속 40시간씩 일할테니까 우리 몫을 두 배로 올려줘. 비율 그래도 유지하자. 그러면 우리가 저금 안하고 공장 물건 아낌없이 사 줄테니까. 재고 쌓이면 서로 골치 아프잖아. 그리고 니네 신고전파 경제학인가 뭔가 그거 생산성 두배 오르면 임금도 두배로 올라야 된다며. 그래야 균형인가 뭔가 아마 다시 성립될걸. 그거 되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배운대로 해. 노동시간 안 줄일려면 대신 월급 올려. 상생하자.

자본가: 허허. 경제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건 교수님들이나 하는 얘기고 우리는 그냥 본능 따라 살면서 가끔 호탕하게 웃어주면 끝이야. 그리고 니네가 사주긴 뭘 사줘 이것들아. 우리나라 무역입국한거 모르남? 상사맨들이 외국에 내다 팔면되지.

노동자: …

자본가: 그리고 이놈들이. 생각해 보니까 열이 확 오르네. 이제 기계 들여와서 니네 기술이나 경험도 별로 필요 없거든! 외국 사람들 중에 니네 월급 반만 줘도 일한다는 애들 널렸어. 걔네 며칠 빡쎄게 뺑뺑이 돌린다음에 현장에 투입하면 되는데 어디서 개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밤중에 기계 놀리는 거 아까워 죽겠는데. 이것들이 지금까지 기술 좀 있다고 뻣뻣하게 나와서 스트레스 받았는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안다더니 딱 그 짝이구만. 어디서 재료 나부랭이가 인간 행세야. 너네 이제 필요 없으니까 셋 셀 동안에 꺼져라. 아쉬우면 밤에 나와서 일하던가.

(140) 자본주의 이중성이론, 인간재료

나는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 약간의 불만을 갖고 있다. 노동가치론을 풀어서 설명하면 노동이 가치(와 가격)의 원천이라는 이론이라고 할텐데, 이것이 그 자체로 잘못됐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자본주의적 착취를 해명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올바르고 순수하고 단순한 명제의 진실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이)가치(의 원천이라는 이)을 강조하는 마르크스 해석의 폐해는 이것이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단순한 (그러나 올바른) 주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마르크스가 예술적 총체로 여긴 자본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왜곡한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1) 노동만이 가치의 원천이므로 노동이 아닌 것은 가치와 무관하다; 2)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에는 별 의미가 없으며 생산적 노동만이 분석의 가치가 있다 –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어떤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집착한다; 3) 중요한 것은 착취의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다; 4) 노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류의 해석들은 공통적으로 노동과 가치를 (적어도 암묵적으로) 동일시하며, 따라서 대체 어떠한 역사적 조건에서 노동이 가치의 실체가 되는지, 그리고 왜 마르크스가 착취의 해명에 그치지 않고 현상형태의 영역으로의 상승을 시도하는지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있어 노동과 가치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지만, 노동은 가치뿐만 아니라 사용가치 역시 생산한다. 가치가 일면적이라면 노동은 이중적이다. 서로 가깝고도 먼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다이앤 엘슨 (Diane Elson)과 같은 사람은 이러한 폐해에 주목해서 노동가치론 (the labour theory of value) 대신 노동의 가치이론(the value theory of labour)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에 근거한 가치(와 가격)의 해명이 아니라, 노동이 왜 가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는 스미스, 리카도 등의 고전파 정치경제학자와 마르크스 사이의 연속성을 과장한다는 문제도 있다. 노동가치론은 마르크스가 최초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분명히 옳지만, 노동가치론을 매개로한 연속성이 마르크스와 고전파 정치경제학 사이의 관계의 요체인 것은 아니다. 나는 연속성의 측면보다는 단절의 측면이 훨씬 크고, 마르크스의 이중성 이론이 바로 단절의 핵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 1장은 자본론 1권 1장 1절의 내용과 놀랄만하게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반부에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구분, (교환)가치량이 노동의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주장이 제시되며, 심지어 사용가치가 없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하지만, 리카도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관계를 상품의 이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지 않고, 따라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성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르크스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부각시킨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중성이론’이라는 표현을 제안할 것 같다. 영어로 하면 the dual-character theory of capitalism 정도가 될까.

마르크스는 1867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론의 두가지 최고의 포인트 중 하나로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논의를 꼽으면서 이것이 “모든 종류의 사실의 이해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마르크스에게 이중성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두 가지 차원 – 즉 필요의 충족을 위해 조직화된 경제체계로서의 차원과  임노동에 기초한 계급사회로서의 차원 – 을 개념화하고 서로를 전제하는 이 두 차원의 모순적 성격을 명백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이중성은 자기증식한다. 노동이 이중적이므로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 역시 이중적이고 (가치 vs. 사용가치) 이 내적 이중성은 일반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표현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생산과정 또한 이중적이다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생산과정이 이중적이므로 지휘의 역할도 이중적이며 (노동과정의 조직 vs. 지휘의 전제성), 인간 역시 주체로서의 인간과 객체로서의 상품(물건)으로서의 이중적 존재로 전락한다.  여기에 더해 나는 노동의 이중성,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이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으로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패망의 유전자는 자본주의의 세포형태인 상품 속에서 그 발현을 기다리고 있다.

이중성 이론의 또다른 핵심은 서로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배제하는 쌍방의 모순관계에서 언제나 한쪽이 공세를 취하고 다른 한쪽은 수세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상품이 가치이기 위해서는 우선 사용가치이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사용가치의 생산이 가치생산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노동과정도 마찬가지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 가치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부터 노동과정 그 자체는 가치생산과 가치증식에 걸맞는 형태로 변형되어간다. 단순협업이 매뉴팩쳐로 매뉴팩쳐는 기계제대공업으로 발전하며, 노동자는 노동과정의 주체에서 인간재료로 전락한다. 여기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담백하게 쓴다.

대공업의 출발점은 노동수단의 혁명이며, 그리고 이 혁명은 공장의 편성된 기계체계 안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를 얻는다. 이 객체적 유기체에 인간재료(Menschenmaterial)가 어떻게 합체되는가를 고찰하기 전에 … -자본론 1권 15장, p. 529; MEW 23, p. 416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모순적) 이중성을 1장을 제외하고는 별도로 상세히 논의하지는 않지만, 기계제 대공업을 다루는 15장에도 이중성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 여기저기 녹아 있다. 예를 들어,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은,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가치증식과정이 맞다]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 생산물형성요소로서의 기계와 가치형성요소로서의 기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 어떤 노동수단이라도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고 가치형성과정에는 항상 그것의 평균적 마멸에 비례해 일부만 참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 p. 519-20; p. 408

그리고 각주24에서 마르크스는 리카도가 이 이중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리카도는 … 다른 곳에서는 [기계의] 이러한 작용 [heesang: “기계의 생산적 효율성이 도구의 그것에 비해 크면 클수록 기계의 무상봉사의 크기도 그만큼 더 크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 사이의 일반적 차이를 알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 p. 520; p. 409

(139) 강신준과 프루동의 긍정의 변증법 – 번외편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에서 강신준은 다음과 같이 쓴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서는 “부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혁의 과제로 내가 얘기했던 성숙의 의미인 것이다 … 그래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건설된다는 것을 강조한 의미인 것이다.

그는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다음 구절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 …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마르크스에게 있어 변증법은 현존 – 자본주의 – 의 부정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부정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자본주의를 충분히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성숙한 자본주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애매할 뿐더러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관련 구절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독일에서는 이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이 유행했는데 이는 그것이 현존하는 것들을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우선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은 헤겔 우파의 변증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프로이센 제국을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의 최종단계로 보았다. 이렇게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이론이라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신비화된 외피 속에 감추어진 합리적 핵심”이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긍정이 부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강신준에게서처럼 긍정이 부정의 “모색”을 위한 “토대”인 것은 아니다 (번역에 대해 지적하자면,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 대신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이 옳다. “부정”과 “몰락”이 동격이다. 비봉판에는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대상의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 … 에 대한 이해”가 포함 혹은 간직되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부정적인 이해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라는 대상에 대해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긍정적 이해 외에도 자본론 출판 데드라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공언한 것보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출판된다) 부정적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긍정은 좋은 것, 부정은 나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긍정과 부정 사이에는 별다른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는 데드라인을 지키면서도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긍정이 부정을 포함하고 있어 긍정과 부정이 상호 연관되어 있을때, 긍정과 부정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 실현과 해소의 대립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은 대논리학 서론(임석진 번역, 벽호)에서 변증법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의식의 제형태가 각기 저마다의 실현을 이룩하면서도 또 어느덧 자기를 해소시키는 가운데 결국 여기서 얻어지는 그의 결과란 다만 자기자신의 부정일 뿐이니 – 이럼으로써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하게 되는 셈이다. 학적인 진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명제를 인식하는 데 있으니, 그것은 즉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자기 모순적인 것은 결코 영이나 추상적인 무로 해소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의 특수적인 내용의 부정 속으로 해소됨으로써 또 달리 말하면 결국 그와같은 부정은 전면적, 전칭(全稱)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시 해소되게 마련인 특정한 사상(事象; Sache)의 부정이며 따라서 특정한, 규정적 부정이라는 것이다. (43, 강조 추가)

반대물을 통일성 속에서,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 (47)

변증법에서 대상은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해소하며 이를 통해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한다. 실현에 대한 이해(긍정적인 이해)가 바로 해소(와 이행)에 대한 이해(부정적인 이해)에 해당하므로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변증법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의 자기실현은 곧 자본주의의 자기해소이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1, p. 412, 박종철 출판사). 대조적으로 강신준의 변증법에서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우선하고 그것을 “토대”로 부정을 “모색”해야 한다. 긍정(실현)이 부정(해소)과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대신 긍정이 부정의 전제조건으로 기능한다.

강신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긍정적 이해의 핵심은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유기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마련이므로, 자본주의의 이 긍정적이고 좋은 측면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바로 이때 자본주의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나쁜 측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타파가 아니라 성숙의 결과인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좋은 측면에 기반하여 나쁜 측면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사회주의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우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 기반하여 그 성숙을 촉진하는 것이 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풍요롭게 내린다는 식이다. 죄는 죄로서 나쁘지만, 은혜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이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해 죄를 짓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이미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느냐고 강변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긍정)이 바로 그 패망의 법칙(부정)임을 가르쳐준다. 자본주의의 성숙이 곧 그 패망이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더욱 더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패악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것이 일시적인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것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타파하여 이 고통스러운 변증법을 마침내 완성할 것인가.

강신준의 변증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 깊다. 그것은 좋은 측면은 유지하고 나쁜 측면은 제거해야 한다는 프루동의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변증법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치열한 학문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은 건재했다.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둘째 사위 라파르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프루동이 라파르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족관계의 친밀함도, [철학의 빈곤]도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방어하는데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강신준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단순히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쓴다 (강민철, 김진영 옮김, 아침새책 117-8,  131, 강조는 원문; 맑스 엥겔스 선집 1권에도 수록)


이제 프루동이 헤겔의 변증법을 정치경제학에 응용하면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프루동에게 있어서 모든 경제적 범주들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라는 양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소부르조아가 위인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범주를 관찰한다: 나폴레옹은 위인이었다, 그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동시에 많은 악을 범했다.

프루동이 보기에는 좋은 측면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이 서로 합쳐져서 모든 경제적 범주의 모순을 형성한다.

문제의 해결은 좋은 측면을 유지시키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노예제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범주이다. 따라서 그 역시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노예제의 나쁜 측면은 젖혀두고 좋은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우리는 수리남, 브라질, 북미의 남부지역에 있는 직접적 노예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 노예제는 기계, 신용만큼이나 부르조아 산업의 중추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면화를 구할 수 없고, 면화가 없다면 근대 공업이 있을 수 없다. 식민지에 가치를 부여해준 것이 바로 이 노예제이다. 세계무역을 창출해냈던 것은 식민지이며, 대규모 공업의 전제조건이 세계무역이다. 그러하기에 노예제는 가장 중요한 경제범주인 것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가장 발전된 나라인 북미는 아마도 가부장적 나라로 바뀌었을런지도 모른다. 세계 지도에서 북미를 지워보라. 그러면 남는 것은 근대 문명과 교역의 몰락이라는 무질서뿐일 것이다. 노예제를 사라지게 해보라. 그러면 북미를 세계지도에서 지울 수 있으리라.

노예제는 경제범주인 까닭에 모든 나라에서 항상 존재해왔다. 근대 국가는 자신의 나라 내부에서만큼은 노예제를 위장시켜야만 하지만, 신세계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노골적으로 강요해왔다.

노예제를 수호하기 위해 프루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것이다: 이 경제범주의 좋은 측면을 유지하고 나쁜 측면을 제거하라.

헤겔에게는 정식화할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프루동은 헤겔의 변증법은 전혀 갖지 못한 채 그 언어만을 도용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적 방법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에 대한 독단적인 구별에 있다.

잠깐 프루동을 범주로서 예를 들어보자. 그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을 검토해보자.

프루동은 인류 선을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헤겔에 비해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변증법적 출산의 진통에 의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무기력하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변증법적 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두 대립된 측면의 공존, 양자의 투쟁, 새로운 범주에로의 이행이다. 나쁜 측면을 제거한다는 그 문제 설정은 변증법적 운동에는 부족하다. 본래의 모순적 성질에 의해 자신을 정립시키고 대립시켰던 것은 범주가 아니다. 범주의 두 가지 측면 사이에서 흥분하고 당황하고 안달이 났던 것은 바로 프루동이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탈출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프루동은 높이 뛰기를 하고는 일약 새로운 범주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이성 속에서의 연속적 계열이, 그가 보기에도 놀랍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손쉬운 것을 손에 넣어 첫번째 범주로 삼고는, 자의적 방법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범주의 결점을 치유할 수 있는 성질이 거기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우리가 프루동을 믿는다면, 조세는 독점의 결점을 치유하고, 교역의 균형은 조세의 결점을 치유하고 대토지 소유는 신용의 결점을 치유해야 한다. 

프루동에 따르면 분업은 일련의 경제적 발전을 전개시킨다.

분업의 좋은 측면 – “본질적인 면에서 고려한다면, 분업은 조건과 지성의 평등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분업의 나쁜 측면 – “분업은 우리에게는 빈곤의 원천이 되어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에 고유하고 자신의 생산성의 주요한 조건인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분할시킴으로써, 노동은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의 목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해결되어야할 문제 – “분업의 결점을 일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유용한 효과를 보존하는 새로운 합성체”를 발견하는 일.

(138) 자연력과 과학 그리고 외부성

우리는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생산력은 자본가에게 아무런 비용도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회적 노동이 만들어내는 자연력이다. 생산과정에 적용되는 증기, 물 등과 같은 자연력도 역시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 자본론 1권 15장, 518; MEW 23, 508

경쟁균형의 존재를 가정하는 주류경제학에서 일반적인 생산요소는 그 한계생산만큼의 보상을 받는다. 예를 들어 임금 = 노동의 한계생산; 이자율 = 자본의 한계생산; 그래서 경제적 이윤=0. 생산에 기여하지만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 그러니까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 생산요소의 경우, 이것을 생산요소라고 칭하지 않고 생산과정에 “양의 외부성”이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보통 양봉장 옆의 정원 – 벌이 공짜로 식물의 교배에 기여한다 – 이나 과학기술 – 자동차 생산에 대한 뉴턴의 기여는 보상받지 않는다 – 이 양의 외부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이렇게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생산에 기여하는 것들을 – 여기에는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생산력”이 포함된다 – 마르크스는 “자연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자연력”은 주류경제학의 양의 외부성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전류의 작용범위 안에서는 자침이 편향한다든가, 주위에 전류가 돌고 있으면 철에서 자기가 발생한다는 법칙 등은 일단 발견한 뒤에는 한푼의 비용도 들지 않는다.

과학이 주류경제학에서 “양의 외부성”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마르크스는 과학을 “자연력”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주류경제학의 차이는? 주류경제학이 사용가치의 경제학이라면 가치론은 가치의 경제학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에는 토지, 노동, 기계, 도구, 자연력 등이 필요하지만, 가치의 생산의 경우에는 (토지, 기계, 도구, 자연력 등을 이용하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 (물론 가치생산에서 기계, 도구는 과거노동의 결정체로 전환된다). 증기, 물,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자연력, 과학 등등은 사용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만, 그리고 때때로 공짜로 더 많은 사용가치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리고 가치생산의 전제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직접 가치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가치가 사회적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증기와 물과 협업과 과학이 인간 사이의 관계에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성의 가치론 같은 것은 없다. 잊지말자. 가치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기계가 생산에 참여한다. 가치생산의 관점에서는 기계는 과거노동의 결정체에 불과하며 (그것이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상품생산과정에서 마멸되는만큼의 가치를 최종생산물에 이전할 뿐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그것이 공짜로 사용되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내생적 경제성장이론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지식, 과학, 기술의 양의 외부성 – 정확하게는 지식생산의 생산성을 높이는 외부성 – 을 제시한다는 사실에 있다. 앞에서 외부성의 가치론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의 가치론 같은 것도 없다. 가치론의 관심은 자본축적에 – 이것은 성장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 그리고 자본축적과정과 더불어 함께 축적되는 모순과 그 결과들에 있다.

(137) 빌어 온 토대를 타파하고

발명의 수가 증가하고 또 새로 발명된 기계에 대한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기계 제작업이 다양한 독립부문으로 분화되었고, 기계제작 매뉴팩쳐 안의 분업이 더욱더 발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매뉴팩쳐에서 대공업의 직접적인 기술적 토대를 본다. – 자본론 1권 15장, 513; MEW 23, 402

발명의 수가 증가하고 새로 발명된 기계에 대한 필요도 증대한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사회적 분업의 발전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필요의 발전과 (경향적으로) 병행하여 이루어진다.

이 매뉴팩쳐는 기계를 생산했는데, 그 기계의 도움에 의해 대공업은 [그것이 최초에 장악한 생산부문들에서] 수공업 생산과 매뉴팩쳐 생산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계를 생산하는 체계는 자기에 적합하지 않은 물질적 토대 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naturwüchsig) 생긴 것이다. 그 체계가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 동안 종래의 형태로 더욱 발전해 온] 이 빌어 온 토대를 타도하고 자신의 생산방식에 상응하는 새로운 토대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매뉴팩쳐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을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속에서 싹트는 “자연발생적” 변화가 반드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의 이행과 같은 거대한 스케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즉, 기계로 대표되는 생산력이 매뉴팩쳐가 대표하는 생산관계(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점진적 분리, 노동의 위계제, 노동의 일면화와 전문화)의 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빌어온 토대”를 타도하고 “새로운 토대”의 창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빌어온 토대는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적절한 의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대공업은 [그 특징적 생산수단인] 기계 그 자체를 기계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대공업은 자기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했으며 자기 자신의 두 발로 서게 되었다. – 516

대공업은 “자기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조해냈다. 기계제 생산이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에 이르렀을 때 매뉴팩쳐에 기반한 상품생산과 매뉴팩쳐가 대표하는 생산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되었으며 비로소 매뉴팩쳐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이 완료되었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아야 한다. 새로운 생산관계,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우선은 기존의 물질적 토대 속에 싹을 틔우고 자라나지만 종래에는 이 토대의 기술적, 사회적 제한을 타파하고 새로운 토대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지배적인 생산관계, 사회적 관계로 자리잡을 수 있다.

현대자본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살아가는 시대를 대격변의 시대, 혹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대사변의 시대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우리시대가 대격변, 대사변의 시대이기 위해서는 과거는 무격변, 무사변의 지루한 시대여야만 한다. 오늘날의 경제가 지식, 협력, 협업, 공통되기로 대표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대를 물질노동과 육체노동의 시대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과거는 현재가 아닌 것으로, 현재는 과거가 아닌 것으로 부정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물론 현재는 과거와 대립된다. 최신식 생산관계는 구식 생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하지만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산물로서, 현재와 과거는 하나의 연속체 속의 대립물로서 이해된다.

따라서 현대자본주의를 경제의 서비스화의 시대, 인지자본주의의 시대 혹은 지식경제의 시대로 이론화함에 있어 이 새로운 시대가 어떠한 빌어온 토대에서 자라 이 토대를 타파하고 지배적인 생산관계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경제의 서비스화에 주목하는 이들은 반드시 “빌어온 토대”인 제조업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서비스 산업인 운수업의 경우, 자동차 산업의 발전 정도가 운수업의 폭발적인 확장에 일종의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는가? 서비스업의 확장은 (기계제 대공업이 기계제작 매뉴팩쳐를 기계화했듯이) 제조업을 서비스화하면서 그 “빌어온 토대”를 과연 타파하고 있는가? 경제 내의 서비스업의 확장은 경제의 본질적인 변화의 결과인가 아니면 형태 상의 변화일 뿐인가.

경제를 이해하고 싶다면

If you want to understand the economy, the last thing to study is economics. To do so would be to invest an enormous degree of energy in studying ephemera and technique.

경제를 이해하고 싶다면 경제학을 공부해서는 안된다. 경제학 공부라는 것은 잠깐 쓰고 버릴 것과 기법을 공부하는 것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 벤 파인, “Being Radical or Radical Being?”,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2012 44: 100

제목은 ‘행위로 래디컬할 것인가 의식으로 래디컬할 것인가’ 정도로 의역할 수 있겠다 (메일 주시면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대가의 말이니 전제가 아닌 결과로 이해되어야 함. 경제학을 몰라도 된다는 얘기는 아님.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할 분들을 위하여…

(136) 마르크스와 특허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은 그가 1784년 4월에 얻은 특허권의 명세서에 나타나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증기기관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한 발명이 아니라 대공업의 보편적 동력기로 서술되어 있다. – 자본론 1권 15장, 508, MEW 23, 398

자본론 1권에서 마르크스는 “특허”라는 단어를  세번 언급하는데, 두번은 남을 조롱하기 위해 일종의 비유로 사용하고 나머지 한번은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기술의 보편성에 주목한 “와트의 위대한 천재성”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활용한다. 2, 3권이나 잉여가치학설사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다. 특허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지적재산권의 경제적, 정치적, 이론적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 보면 이해가 되면서도 의아하고, 안타까운 측면이 많다.

1. 이해가 된다

마르크스 시대의 특허와 오늘날의 특허, 좀더 일반적으로 지적재산권을 동일선상에서 분석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특허 통계를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출판한 1867년 특허출원건수는 3,723건이었으며, 이는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마르크스가 사망한 1883년에는 대략 6,000건에 이른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884년에 특허출원건수는 17,110건으로 급속도로 늘어나고 1900년대 초에는 연간 출원건수가 30,000건을 돌파한다.

양적팽창 이외에도 특허제도는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는 특허가 주로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에 부여되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생명체와 인간유전자도 특허의 범위에 포함된다. 게다가 특허 이외에도 저작권이나 디자인, 상표권 등의 적용 범위 역시 넓어졌음을 감안해야한다.

2. 그렇지만 의아하다

마르크스는 와트의 1784년 특허명세서를 자본론에 언급할만큼 기술에 커다란 관심이 있었다. 그런 그가 볼턴앤와트(Boulton and Watt)사가 특허를 통해 상당한 라이센스 수입을 올렸고, 특허권을 침해한 이들과 송사를 벌였던 일을 몰랐을리가 없다.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혁신과 신기술개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마르크스가 왜 특허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과제가 될 수 있겠다.

3. 안타깝다

주류경제학에서는 특허 등의 지적재산권을 경제성장의 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본다. 지식은 그 비경합성과 비배제성 때문에 양의 외부효과를 갖는 ‘생산요소’이고 따라서 별도의 보호장치가 없다면 사회전체적으로 지식이 과소생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생적 성장이론의 대표적인 모형인 폴 로머의 1990년 모형 역시 지적재산권을 통한 지식의 영구적 독점을 전제한다.

특허가 일종의 인센티브로 작용하여 혁신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기술의 사회적 전파를 방해한다는 부정적인 면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자는 극대화하고 후자는 극소화하기 위한 절묘한 제도를 설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실용적인 사람들도 많다.

좌파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보통 특허나 지적재산권을 싫어한다. 이해도 되고 공감도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제도의 기원과 역할과 의의를 학적으로 정리하는 것에 더 관심이 간다. 문제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 그래서 마르크스가 약간의 단초가 될만한 언급이라도 남겨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본론 3권의 농업지대에 대한 분석을 지적재산권 분석에 원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잉여가치 중 일부가 토지의 독점으로 인해 지대로 전유된다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것은 이 지대가 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물적 현실 (예: 지주 계급의 존재로 인한 농업의 상대적으로 느린 기술발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지대론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농업에 대한 이론이다.

라이센스나 로열티 같은 것들이 잉여가치 중 일부를 특허권자나 저작권자가 전유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론이 그 지점에서 그친다면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지적재산권의 적용범위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고, 각국의 제도는 점점 동질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 기술개발은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시장가치를 높이고 때로는 즉각적으로 상품화되어 판매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개발과 지식의 생산만을 목적으로 창업되는 기업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기업간 기술의 거래규모는 경제성장률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국가 간 기술거래 규모 역시 확장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금융화의 영향일 것이며, 금융화를 더 촉발시키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을 놓고 오늘날 우리는 지식경제시대 혹은 창조경제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주장도 있고, 그것은 표피의 변화를 과대평가한 것일뿐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주장도 있다. 등등등. 이러한 현대적인 현상들을 과연 어떻게 가치론의 구체적인 적용들을 통해 해명할 것인가. 이런 것에 소용이 없다면 가치론에는 대체 또 어떤 소용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