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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울프,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 (2004) 서문

마틴 울프(Martin Wolf)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칼럼니스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에서 일하기 시작해 지금은 수석 경제 칼럼니스트(chief economics commentator)다. 이분은 단행본도 몇 냈는데, 지금 소개하는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 범지구적 시장경제 옹호⟫(Why Globalization Works: The Case for the Global Market Economy, 2004)도 그 중 하나다. 국내에는 ⟪금융공황의 시대⟫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이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보시길.)

이하는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에 실린 자전적 성격의 서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상은 중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짤막한 글에서 그는, 자기가 가진 자유주의(liberalism) 사상의 우월성과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진정 열심히 달려 왔기에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지식인답게,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자기가 살아온 길을 꽤 소상하게, 그리고 상당히 ‘솔직하게’ 서술한다. 그러나 이 글의 진정한 특징은, 그런 서술의 과정에서, 평소 그의 신문 칼럼에서는 보기 어려운 온갖 비논리적이고 억지스러운 진술들이 난무한다는 거다. 특히 그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등등에 대한 혐오는 정말 입이 벌어질 정도다. 아아… 그의 빛나는 신문칼럼 뒤에는 정녕 이런 일그러진 ‘사상’이 있었단 말인가! (아, 물론 이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그런 판단에 영향을 줄 마음은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의 결론적인 생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저정도면 좋다’라고 인정하는 편이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왼쪽)와 함께. 런던에 있을 때 마틴 울프를 몇 번 보았는데, 이분, 좀 '펭귄맨' 닮으셨다. 글을 많이 읽다보니, 친근해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ㅎㅎ
야니스 바루파키스(왼쪽)와 함께. 런던에 있을 때 마틴 울프를 몇 번 보았는데, 이분, 좀 ‘펭귄맨’ 닮으셨다. 글을 많이 읽다보니, 친근해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ㅎㅎ

더군다나, 이 책이 나오고 나서 몇년 뒤 ‘선진국발’ 세계경제공황이 났고, 그로부터 8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세계경제는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세계화는 끝났다’라는 말을 질리도록 듣고 있다! 적어도 울프가 이 책에서 했던 말들의 상당 정도는 좀 더 신중하게 재고되어야만 할 것이다.

어쨌거나 아래의 ‘서문’은 그 자체로 꽤 재밌는 글이다. 이 글은 비단 마틴 울프 자신만이 아니라 그 세대의 영국의 (또는 유럽의) 한때는 좌파 사상에 매력을 느꼈으나 지금은 거기에서 멀어진, 그러나 여전히 이 사회의 진보를 믿는다고 스스로 자임하는 중도 자유주의자들이 으레 살아왔을 법한 모습을 담고 있다고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원래 이 번역문은 2008년 8월에 내 과거 블로그에 올려뒀던 것이다.


Martin Wolf, Why Globalization Works: The Case for the Global Market Economy, New Haven: Yale Nota Bene, 2004, pp. x-xviii.
(원문에 달린 미주는 번역하지 않음.)

서문―왜 나는 이 책을 썼는가

정부가 인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은총의 하나인
자유무역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기가 없다.
— 토머스 맥콜리(Thomas Macaulay), 1824

사상(ideas)은 중요하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내 아버지 고 에드먼드 울프(Edmund Wolf)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그는 히틀러로부터 도망 온 오스트리아 유태인 난민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영국으로 건너왔다. 극작가이자 열정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미치광이 사상과 그것과 거의 같은 정도로 미치광이 사상인 공산주의자들의 그것이 과연 어떻게 세계의 커다란 부분에서 문명화한 삶을 파괴했는지, 그리고 파괴하고 있는지를 내게 가르쳐줬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에 태어났으므로, 이와 같은 위험이 그다지 오랜 얘기가 아니었다. 독일은 내가 태어나기 겨우 일 년 전에 패망했다. 내가 외부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컨대 나는 내 양친이 무장한 사상을 피해 달아난 난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내 친가와 외가 직계가족들은 유럽을 떠남으로써 살아남긴 했지만, 그들의 대부분의 친척들은 오늘날 홀로코스트라 불리게 된 것―나는 이를 그 히브리어 이름, 쇼아(Shoah, 파괴)라고 부른다―에서 사라져갔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네덜란드 유태인 집안 출신인 내 어머니는 그녀의 아저씨, 아주머니, 사촌들 중 거의 서른 명이 나치 치하에서 죽었다는 얘길 우리에게 해 줬다. 나는 또한 공산주의 독재정권들이 유럽을 분할해 놓고도 내가 자라난 나라의 자유와 평온까지도 위협하고 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자 작가였으므로, 그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추측에 의거하기보단 사실에 바탕을 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수많은 그의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결코 공산주의에 매료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며 비난했는데, 그 위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무된 폭군들이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고문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었고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당시는 많은 지식인들이 반(反)공산주의를 꽤 부끄러운 일로 여겼지만, 그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래도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랬듯, 그는 사회주의―온건하고 신중한 종류의 것이긴 했지만―에는 끌렸었다. 사회민주주의가 당시 그의 천성에 맞는 지적 거처였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토니 블레어(Tony Blair)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의 정치는 좋아했을 것이다. 언론인이자 방송인 및 작가로서의 긴 경력을 거치며(다른 뭣보다도 그는 1950년대에 BBC의 독일어 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자였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런던 통신원이자 나중엔 칼럼니스트였으며, 독일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 감독 겸 극작가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는 했다. 이 당시는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종들에 놀아나던 때였다는 게 중요하다.

내 아버지는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버지보다 덜할 것 없이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담백한 인간적 품위가 갖는 영속적인 가치를 배웠다. 나는 내 부모님의 가치관에 저항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민주주의자 즉 ‘사회적 자유주의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통틀어 ‘자유주의자’라 했을 때 의미하는 바다―로 바뀌어 갔다. 나는 자유(freedom), 민주정부, 무관심적 진리추구와 같은 계몽주의적 이상들은 한없이 귀중하지만 동시에 끔찍스러우리만치 취약하다는 것을 배웠다. 또 나는 이런 가치들에는 수많은 적들이 있으며, 그 중 몇몇은 공개돼 있지만 다른 몇몇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이 제공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 혜택을 보면서도 그것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지식인들이다. 이들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공격했던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었음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매 세대마다 되돌아오며, 순진한 젊은이들을 망쳐놓고는 한다.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었던 피리 부는 사나이(pied piper)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였다. 좀 더 최근에 그것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였지 않나 한다.

1965년 10월, 나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에 입학해서 고전학(classics)을 공부했다. 내 세대를 휩쓸었던 저항의 파도가 휩쓸기 직전이었다. 그런 저항들 중 몇몇―특히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 같은―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정당해 보인다. 개인의 해방을 위한 요구에 나는 공감했다. 비록 지금은 혁명들이 다들 그렇듯 그것 또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고 여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많은 저항들이 나는 이미 그로부터 면역되어 있었던 유치한 좌익급진주의의 형태를 띠었다. 나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아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듯했다. 나는, 별 볼일 없는 두 시인의 장점들을 구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즉 해충과 벼룩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따져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어차피 나는 모든 종류의 마르크스주의들이 사악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유―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대한 적대는 혐오스러웠다. 그 이후 역사는 내가 내 부모님으로부터 일찌감치 배운 나의 태도를 승인해 마지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옥스퍼드에서 좀 더 긍정적인 것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1967년 고전학에서 정치학/철학/경제학(PPE)으로 전공을 바꾼 뒤였다. [그 때 배운 것으로서] 이 책과 관련된 주요한 교훈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단의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제국주의, 군사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마침내 파시즘―의 공격으로 자유주의가 무너짐에 따라 빚어진 폐해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좋은 경제정책―당시 많은 수의 옥스퍼드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현명한 케인스주의 정도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긴 하지만―이 자유로운 사회와 경제를 그런 공격들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것도 배웠다. 1930년대에처럼 경제가 실패하면 정치의 안정과 사회의 조화는 커다란 위험에 처한다. 번영이 비록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경제학은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에 관여한다. 경제학은 우리가 문명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려 할 때에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 자녀들을 위한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동의에 기반을 둔 사회는 주저앉는다.

내가 옥스퍼드로 갔을 때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자―그 당시 죽은 지 얼마 안 됐던 노동당수 휴 개츠켈(Hugh Gaitskell) 성향의―였다. 나는 16살 때부터 노동당의 ‘젊은 사회주의자들’(Young Socialists) 그룹에서 철두철미한 반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다. 옥스퍼드에서 나는 ‘노동당 클럽’(Labour Club)에 가입했다. 첫 번째 학기가 끝날 무렵, 해롤드 윌슨(Harold Wilson) 당시 노동당 정부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존 ‘노동당 클럽’을 장악하자 나는 ‘옥스퍼드대 민주 노동당 클럽’(Oxford University Democratic Labour Club)이라는 이탈조직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1967년 나는 1966년 초에 우리가 세웠던 ‘민주 노동당 클럽’의 의장이 되었다. 나는 1970년대 초까지 노동당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1969년, 나는 옥스퍼드의 너필드 대학(Nuffield College)로 가서 지금은 경제학 석사(Master of Philosophy)라고 부르는 것을 했다. 거기서 나는 주로 세 명의 스승―이안 리틀(Ian Little), 모리스 스콧(Maurice Scott), 맥스 코든(Max Corden)―에게서 번영, 특히 제3세계의 번영을 위해 국제무역이 중요함을 배웠다. 맥스 코든은 당시 실효적 보호에 대한 중요한 저작을 끝마쳤고, (나처럼) 수학에 자신 있는 학생들에게 특히 유의미한 방식으로 무역이론을 가르쳤다. 다른 둘은 (예일대의 티보 스키토프스키Tibor Scitovsky와 함께) 이전 반 세기동안의 경제발전에 대해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저작의 하나인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산업과 무역⟫(Industry and Trade in Some Developing Countries)을 1970년에 펴냈다. 우리 시대의 ⟪국부론⟫이라 할 만한 이 훌륭한 책은 여러 나라의 무역정책과 경제발전에 대한 연구로서, 리틀 교수가 OECD의 ‘발전센터’(Development Centre)에서 행한 것이다. 그것은 수입대체가 아닌 외향적 무역 체제(regime)의 중요성을, 그리고 통제경제정책(dirigisme)이 아닌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하나의 반혁명 선언(counterrevolutionary manifesto)이었다. 나중에 이런 접근은 일반적인 상식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나쁜 인습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책은 내가 시장경제가 그에 대한 다른 어떤 대체물보다도 뛰어나다는 믿음으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민주주의에 대해 했던 기막힌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시장경제]은 이제껏 시도되었던 모든 형태의 것들만 빼면 가장 형편없는 경제시스템이다.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는 영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짤막한 논문을 쓰면서 굳어졌다. 이 과정에서 나는 지대에 대한 통제와 공공임대주택의 증가가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알았다. 당시 너필드 대학에 있다가 나중에 런던정경대(LSE)로 옮겨간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내가 이 주제로 ‘젊은 페이비안들’(Young Fabians)을 위해 짧은 팸플릿을 쓰도록 설득했다. 이 팸플릿은 익명의 심사자로부터 즉각 거부되었고, 나중에 나는 그가 그 바로 전에 장관을 지냈던 리처드 크로스만(Richard Crossman)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런 일을 통해 나는 노동당이 낡고 작동 불가능한 국가주의(statism)와 결합한 채 지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믿게끔 되었다. 이런 확신은, 영국의 재앙적인 주택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 말에 [크로스만보다] 훨씬 더 지적인 앤써니 크로슬랜드(Anthony Crosland)마저도 설득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더 굳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작품들, 특히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과 ⟪자유헌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을 통해 나는 시장경제는 안정되고 내구성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함을 확신하게 됐다. 시장경제는 그와 같은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조건이기는 한데, 계획경제에 내재된 권력의 집중은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인적 선택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시장은 자유의 차원(dimension)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신념들은 나를 사회민주주의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로 돌려세워 놓았다. 지금도 여전히 난 자유주의자인데, 그것은 내가 개인의 자유에 최상의 가치를 두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제넘게 나서는 정부(intrusive government)의 지력과 능력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내가 사회민주주의자들(미국에서라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사회주의의 소멸이 건전한 이들의 계획경제와 국가소유에 대한 믿음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광신자, 반(反)계몽주의자, 극단적 환경론자, 파시스트,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오늘날의 반(反)지구화론자와의 전투에서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온건한 보수주의자는 같은 편에 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폭넓은 범주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며, 바라건대 그들이 범지구적 시장경제가 매우 바람직한 것임을 믿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그것 자체라기보단 이 범지구적 시장경제를 어떻게 운영(govern)하고 규제할 것이냐다.

너필드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에 나는 세계은행(World Bank)에 젊은 전문가(young professional)로 지원했다. 당시 은행의 경제국 수장이었던 데이빗 헨더슨(David Henderson)이 나의 이런 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와 함께 얼마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은행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에는 OECD의 수석 경제학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만났던 또 다른 자유주의 대의의 전사로, 당시 [너필드] 대학의 연구원이었던 디팍 랄(Deepak Lal)이 있다.

1971년 세계은행에서 내 경력은 훌륭한 영국인 경제학자 스탠리 플리즈(Stanley Please)가 이끌던 부서에서 시작됐다. 그런 선택을 한 까닭은, 그것이 매력적이고 보람 있는 기회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소득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현대적 과업이라고 당시에―그리고 지금도―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최고의 훈련이었음이 드러났다. 많은 평생의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 중 몇몇은 그들의 모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서 했다. 그 초창기 동료들 중에는 나중에 인도의 개혁적인 재무 비서관이 되는 몬텍 싱 알루왈리아(Montek Singh Ahluwalia), 나중에 인도의 수석 경제자문관이 되는 샹카 아카리야(Shankar Acharya)가 있었는데, 이 둘은 1990년대 인도의 시장 지향적 개혁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72-74년에는 동아프리카, 1974-77년에는 인도를 담당하는 경제학자로 일하면서 나는 국가가 통제하고(dirigiste) 내향적인 경제정책이 행하는 폐해를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이는 기괴한 비효율성 때문만이 아니고, 그것이 낳는 부패라는 돌림병 때문이기도 하다. 은행에서의 10년에 걸쳐 나는 주로 시장 메커니즘과 무역에 더 많이 의존할 것을 주장했다.

세계은행에서 내가 쓴 첫 번째 주요 보고서는 케냐의 민간부문에 대한 것이었다. 얼마 뒤 나는 잠비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정책들의 반(反)농업적 편향에 대해 연구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무척 기가 꺾였는데, 이 두 나라가 세계은행의 꽤 열정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서도 경제적 낭떠러지 위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에서 내가 가장 오랜 기간 매달린 것은 인도의 터무니없이 반무역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연구였다. 인도가 큰 나라라는 이유로, 세계은행의 지원은 비록 작게나마 계속 유지되었다. 기업들에 어떤 기술과 투입물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를 명령하도록 고안된 면허제도가 빚어낸 결과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 작업은 인도의 수출에 대한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인도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수많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가졌다. 그들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만모한 싱(Mannohan Singh)이었다. 당시 그는 인도정부의 수석 경제자문역이었고 나중에는 개혁적인 재무장관이 되었다.

세계은행에서 나는 1978년에 출판된 첫 번째 ‘세계개발보고서’(World Development Report) 작성을 위한 팀원으로 일 년 간 일한 적도 있다. 이는 당시 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가장 창의력 있는 기획의 하나였으며, 당시 은행의 사업부문 수장으로 막 뽑혀서 나중에 그 자리를 약 20년 지켰던 어네스트 스턴(Ernest Stern)이 지휘했다. 여기서도 나는 무역에 초점을 맞췄다. 은행에 있는 동안 내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이젠 고인이 된 벨라 발라사(Bela Balassa)가 있다.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와 세계은행에 소속되어 있었고, 수출지향적 무역정책을 장려하기 위해 끈기 있게 일했다. 다른 중요한 지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당시엔 MIT에 있었고 지금은 콜럼비아 대학교에 있는 자그디쉬 바그와티(Jagdish Bhagwati)와 당시엔 미네소타 대학교에 있었고 지금은 IMF 부총재인 앤 크루거(Ann Krueger)가 있다. 이 두 학자 모두 외국무역체제 및 경제발전에 대한 고전적 연구의 개론서를 1970년대에 낸 바 있다.

1970년대 말에 이르자 나는, 세계은행은 그 직원들의 훌륭한 의도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기관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의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것이 돈을 빌려주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는 거의 무관심한 채로 대부에 매달리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불가피한 단점인데, 왜냐하면 세계은행은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것―돈―이 종종 [그 돈을 받는 나라에] 별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점은 과거 미 국방장관을 지냈고 1967년부터 1981년까지 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성격 때문에 더 증폭됐다. 맥나마라는 무지막지한 의지의 사나이로, 빈곤경감에 개인적인 사활을 걸었으며 끔찍하리만치 상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본성상 그는 계획자이자 수량화에 능했다. 그의 수석 경제자문관이었던 고(故) 홀리스 치너리(Hollis Chenery)의 보좌 아래 그는 스탈린식 발전관을 실행시켰다. 즉 (1) 빠른 성장이 투자증대와 이용 가능한 외환의 증가에 뒤따를 것이다, (2) 이 둘은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자원을 필요로 한다, (3) 이런 자원의 상당 부분은 세계은행에서 나오게 된다. 그의 관리 아래 은행과 은행의 대부는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모든 부서는 프로젝트의 질이나 수혜국의 발전 프로그램에 사실상 상관 않고 돈을 더 많이 대출하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이는 은행 직원들의 전문성을 훼손시켰고, 돈을 빌리는 쪽으로 하여금 뻔한 결과를 무시하고 부채를 쌓아 나가도록 부추겼다. 이런 상황은 계속될 수 없었고 실제로 그랬다. 몬텍 알루왈리아가 언젠가 내게 말했듯, 세계은행은 죽어가는 산업의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그 성장의 한계에 다다를 것은 뻔했고, 맥나마라가 은행을 떠난 뒤 곧 그렇게 됐다.

이런 일에 질색이 날 때쯤, 나는 부서의 선임 경제학자로서 인도를 대상으로 3년째 일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은행과 관련한 내 주요한 기능은 엄청난 양의 원조제공을 정당화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 돈이 인도정부로 하여금 그들에게 절실한 정책전환을 보류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 정책전환은 거의 20년을 낭비한 끝에 1991년 외환위기의 깊은 수렁 속에서 단행되었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만모한 싱이 이 전환의 책임자였고, 몬텍 알루왈리아가 경제비서관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재무비서관으로 그를 도왔다. 이와 같은 경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확인시켜줬다. (1) 정책전환은 경제성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2) 그런 정책전환은 똑똑하고 의욕있으며 규율이 잘 잡힌 비교적 소수의 팀에 의해서도 실행될 수 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3) 그런 정책전환은 바깥에서 부과될 수는 없다.

불행히도 세계은행의 잘못은 과도한 대부만이 아니었다. 은행은 또한 정부들에도 대부를 해줘야만 했다. 이는 두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1) 은행은 정부가 해당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가정해야만 했다, (2) 은행은 부당하게도 그 국가이익에 대한 집단주의적 견해를 강화시켰다. 은행의 대부는 부패하고 종종 사악한 정부들이 그들 국민들의 이해관계와 바람을 무시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은행을 그만둘 무렵 나는 은행의 대부자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1)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부자, (2) 도움을 이용하지 않으려 하는 대부자, (3)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대부자. 세계은행은 그 구조상 통상 매우 작은 그룹인 이 세 번째 범주의 대부자들에게 그것의 역량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그 결과 그것이 행하는 노력들은 불필요하거나 소모적이었다. 따라서 나는 고(故) 피터 바우어(Peter Bauer) 경이 오래 전에 원조에 대해 했던 비판의 대부분에 동의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발전을 위해 통합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세계경제의 몇 가지 측면들을 감시하도록 디자인된 기관들이 실패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오늘날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자유로운 세계경제를 수호하는 것이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특정 기관을 수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관들은 그들 자체로서 판단되어야―그리하여 개혁되거나 폐기되거나 해야―한다. 이 단계에서 이런 깨달음을 통해 나는 은행의 보호막을 나와 비교적 불확실한 민간연구소(think tank)의 세계로 들어갔다. 1981년 9월, 나는 런던에 있는 무역정책연구센터(Trade Policy Research Centre)에 연구국장으로 들어갔다. 이 자리는 전후(戰後) 국제무역이론의 거성인 고(故) 해리 존슨(Harry Johnson)이 차지했던 것이기도 하다. 정력적인 소장 휴 코벳의 지휘 아래 센터는 무역자유화와 다자간무역체계에 대한 연구로 그에 합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나는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던 마지막 두 해에 센터와 처음 접촉했다. 동료 도널드 키싱(Donald Keesing)과 함께 나는 개발도상국의 섬유/의류 수출품에 대해 선진국들이 행하고 있던 수입할당제도에 대한 건실한 연구보고서를 썼다. 그것은 빈국의 비교우위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반응에 들어있는 위선에 대한, 그리고 몇몇 무역정책기조의 복잡성과 불합리성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제공했다.

나는 센터에서 6년간 연구국장을 지냈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작업은 다자간무역협상의 여덟 번째 라운드를 열 것을 촉구하는 일이었다. 이는 나중에 우루과이 라운드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결국 1986년에 시작됐다. 센터는 서비스에 관한 무역협상을 위한 의제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내가 한 가장 중요한 기여는 무역체계에서 개발도상국의 역할에 대한 연구들을 기획한 것이다. 이 연구들의 목적은 개발도상국이 호혜적인 방식으로 무역협상에 나서기를 꺼리는 오랜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고, ‘특례 및 우대 조치’(special and differential treatment)를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저명한 국제무역법 학자이자 당시엔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던 로버트 휴덱(Robert E. Hudec)에 의해 수행되었다.

아아, 적어도 영국에서 민간연구소의 재정은 고질적으로 취약하다. 1986년에 이르자 센터는 문을 닫아야 할 것임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었고, 머지않아 그렇게 됐다. 새로운 일을 찾고 있는데 1987년, 나는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편집인이던 저프리 오웬(Geoffrey Owen)으로부터 거기의 수석 경제학 필자가 되어 달라는 초청을 뜬금없이 받았다. 이것은 그로서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내가 그 신문에 몇 번 글을 낸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언론인은 아니었고 그렇게 될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도전이었고, 결국 나는 1987년 9월에 ⟪파이낸셜 타임스⟫에 들어갔다.

이 무렵 경제정책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은 수차례의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주어진 현실의 결과들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를 미세조정할 수 있다는 순진한 케인스주의적 신념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깨져버린 바 있다. 그것은 화폐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물가안정(inflation targetting)―나는 이 개념을 1970년대 모리스 스콧으로부터 처음 들었다―이라는 목표가 널리 채택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통제경제정책과 보호주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인기가 시들해졌다. 영국에서 환율통제는 1979년 쌔처(Thatcher)정부에 의해 폐기됐다. 민영화가 1980년대 초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세계를 휩쓸었다. 1980년대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영국 경제학자 존 윌리암슨(John Williamson)이 만든 용어―는 경제발전에 있어 건전한 재정/통화정책과 적극적인 시장의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게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았던 것은, 내향적 무역정책의 실패 및 무역자유화의 뛰어남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로 개발도상국들은 과거 무역라운드에서보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더 큰 역할을 실제로 했다. 이는 1995년 1월에 세계무역기구(WTO)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시장관계를 기반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경제라는 아이디어가 한동안의 집산주의적 휴지기 뒤에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1989년-91년 사이 소비에트제국(Soviet empire)의 붕괴―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깜짝쇼―는 정치와 경제정책에서의 범지구적 변환을 확정짓는 것만 같았다. 사회주의는 죽었다. 미국 분석가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심지어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런 시각은 그것을 부당하게 희화화한 자들에 의해 경멸받았다. 후쿠야마가 주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앞선 경제와 사회를 운영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거였다. 이 점에서 그는 옳았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적들은 그것의 생존을 여전히 위협할 수 있고, 역사가들이 거의 확정적으로 황금시대라고 보는 것을 끝장낼 수도 있다. 이 명제가, 대부분의 인류역사를 훼손시키는 어리석은 짓과 범죄가 앞으로 이런 저런 형태로 다시는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무질서가 다시금 세계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 만약 역사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또는 더 나쁜 세상을―고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단 설득을 위한 것이다. 이 책은, 시장을 통해 통합된 세계는 인류 대다수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거라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시장은 생활수준을 높임에 있어 지금까지 발명된 그 무엇보다 더 강력한 제도(institution)다. 사실 그에 필적할 상대는 없다. 그러나 국가가 시장을 필요로 하듯 시장은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둘이 잘 결합했을 때 우리는 한 사회를 운영하는 데 가장 훌륭한 방식인 현대 자유민주주의를 갖게 된다. 그것의 혜택은 더 널리 퍼져나가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많은 범지구화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더 많은 자유시장과 더 많은 협력적 세계운영(co-operative global governance)을 잘 조합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나는 국가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국가가 협력적 세계경제질서에서 그들의 장기적 이익에 대해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명제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첫 번째 자유주의적 질서의 붕괴는 30년 동안의 대재앙을 낳았고, 내 부모세대는 그것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수백만의 생명들이 그런 실책 때문에 사그라져갔다. 이제 우리 모두는―또는 거의 모두는―철이 들었다.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신념에 흠집을 내는 사상들은 잘못됐다. 사회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실수였을 뿐만 아니라 범죄였다. 제국주의는 일종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군사주의와 민족주의는 유럽문명을 파괴했다. 이제 우리는―분별력 덕분일 뿐 아니라 요행수로―전보다 나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다시 창조했다. 이는 기회를 세계 전체로 확장한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내던져버리지 않는 것은 우리 후손에 대한 우리의 의무다. (끝)

[한겨레 창간호] 정운영,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
정운영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은 언젠가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국민이 그들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사실 원하는 정부를 세우고 원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회를 ‘이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최초의 기본적 요구마저 쉽사리 수락되지 않는 현실의 온갖 갈등 때문에 그것을 이상적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습관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여기서 ‘원하는 정부’라는 뜻 안에는 유권자의 의사가 완벽하게 개진되고 전달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자유의 신장이라는 항목이 가장 중요한 몫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상, 정치, 문화 등 사회의 상부 구조에 속하는 여러 영역에서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제일차적 지표가 되어야 한다.

‘원하는 상품’의 의미 역시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의 질과 양이 사회 전체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소비재의 질에 대한 판단은 예컨대 추위를 가릴 서민의 집과 한가함을 달래기 위한 호화로운 별장 가운데 무엇을 먼저 지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벽돌을 찍느냐 아니면 대리석을 수입하느냐는 토론은 단순히 비용이나 효율성의 측면이 아닌 사회의 양식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와 직결된다.

소비재의 양이 결정되는 방법도 한 개인의 근면이나 한 개인의 자비심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불과 몇 장의 지폐를 봉급 봉투에 보태기 위해서 소리 지르고, 얻어터지고, 잡혀 다니고 그러다가 어떤 때는 목숨을, 단 하나뿐인 그 목숨을 잃기도 하는데, 어째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억원이 선거마당으로 풀려나가고, 수십억원이 나라 밖으로 도망나가고 수백억원의 돈이 성금이란 이름으로 호기롭게 한 사람의 주머니를 채워줄 수 있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는 사회 전체에 제기해야 한다.

자유의 보완 개념인 평등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인 생산물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서로 나누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사회의 양식 또는 공정한 분배를 사회의 정의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면, 원하는 정부와 원하는 상품에 대한 강조는 한마디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요컨대 자유가 숨쉬고 정의가 흐르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 바라고 세워야 할 사회이다. 그 과정을 당분간 ‘경제의 민주화’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로 자유를 신장시키는 정치 행위와 정의를 확보하려는 경제 행위가 전혀 별개의 사항이 아니다.

우선 사회의 재물이 몇몇 선택된 사람들에게 집중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치권력이 필요하며, 반대로 권력은 자신이 수행한 경호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독점된 이익의 일부를 떼어주도록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정경유착이니 국가독점 자본주의니 하는 어려운 이론을 끌어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축적된 재산을 그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기 위해서도, 합의된 본래의 궤도로부터의 이탈을 예방하고 바른 진행방향을 꾸준히 일깨우는 정치 세력의 존재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앞서 가고 있으나 정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현실을 잘못 진단한 실수이거나 사실의 한 면을 고의적으로 가리려는 음모일 수밖에 없다. 되풀이하자면 경제가 성장한 만큼 정치가 발전했다고 말하거나 정치가 낙후된 만큼 경제도 불안하다고 말해야 정확하게 그 뜻이 전달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전자의 주장에 흔쾌하게 찬표를 던질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수가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됨으로써 소수가 인간 이상답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추방된 니카라과의 독재자가 훔쳐 달아난 재산이 그 나라의 성장과 관계가 없었고, 폐위된 이디오피아의 황제가 마차 밖으로 뿌리고 다녔던 동전 역시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듯이, 정녕 경제에서의 성장이 정의라는 내실을 갖출 때에만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경제는 바로 이 점에서 실로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약속은 1961년 5월 총을 들고 한강을 넘어 온 사람들이 내건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그들이 하나의 밀알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금 먹지 말고 더 불려서 나누자는 논리를 폈을 때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그 밀알은 15곱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각성제를 먹고 제 살을 찔러가며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자유’와 밖으로 닫아건 방 속에서 불이 나면 고스란히 타죽을 수밖에 없는 ‘정의’가 절망과 기아선상을 대신했을 뿐이라면, 그 밀알을 키우는 데 쏟았던 우리의 노동과 애정은 도대체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역사가 가르치는 바가 그렇고 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도 그러하듯이, 비록 그 밀알이 1백50배로 켜져도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지 않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할 것 같다. 그러므로 경제의 민주화는 밀알을 키우는 노력을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 수확이 모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분배되도록 규제하는 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의 하나는 분배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향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가 성장의 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는 한쪽에서의 애걸과 다른 한쪽의 동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강인한 투쟁과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만이 국민이 원하는 소비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실로 확고한 것이라면, 그 소망을 성취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민주경제’ 건설의 길이 된다.

워렌 버펫 판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via Farnam Street

지난 몇년 간 대규모의 자본투자(지출)을 통해 섬유부문에서 가변비용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모두 즉각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표준적인 ROI 검증을 통해 따져보자면, 사실 이런 기회들은 이윤율이 꽤 높은 캔디사업 혹은 신문사업에 대한 비슷한 투자에서 거둘 수 있는 것보다 보통 더 큰 경제적 이득을 가져올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섬유부문에 대한 이러한 투자가 가져올 것으로 보였던 이득은 환상에 불과했다. 국내외 경쟁자 상당수가 비슷한 지출을 계획하고 있었고, 충분한 숫자의 회사가 이런 투자를 한 이후에는 산업 전반에 걸쳐 가격이 하락했으며, 비용절감에 의한 새 생산비용이 새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보았을 때, 개별 회사의 자본투자결정은 비용 절감 효과가 있으며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산업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결정들은 개별적인 자본투자결정을 상쇄하는 효과를 나았으며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퍼레이드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더 잘 보기 위해 모두 까치발을 딛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차례 투자가 끝날 때마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게임에 더 많은 돈을 박아 넣었으며 이익은 여전히 보잘 것 없었다.

워렌 버펫, 버크셔 해서웨이 이사회 의장의 편지, 1985년

Over the years, we had the option of making large capital expenditures in the textile operation that would have allowed us to somewhat reduce variable costs. Each proposal to do so looked like an immediate winner. Measured by standard return-on-investment tests, in fact, these proposals usually promised greater economic benefits than would have resulted from comparable expenditures in our highly-profitable candy and newspaper businesses.

But the promised benefits from these textile investments were illusory. Many of our competitors, both domestic and foreign, were stepping up to the same kind of expenditures and, once enough companies did so, their reduced costs became the baseline for reduced prices industrywide. Viewed individually, each company’s capital investment decision appeared cost-effective and rational; viewed collectively, the decisions neutralized each other and were irrational (just as happens when each person watching a parade decides he can see a little better if he stands on tiptoes). After each round of investment, all the players had more money in the game and returns remained anemic.

문창극의 바벨탑

세월호 사건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야당에 내정을 넘기고 개헌을 제안하는 수준의 광범위한 정치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나라 전체가 3년상을 치를 판인데 제살 깎는 희생 없이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충청도가 돌아섰으며 야당의 동의 없는 입법은 불가능하다. 국가개조는 말할 것도 없고 창조경제나 규제철폐도 물건너 갔다. 대통령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면 그것은 헌정의 연속성 정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문창극씨가 총리가 되느냐 마느냐는 애초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후보지명 철회를 전제로 충분히 해명을 하고 물러나는 방식으로 이 해프닝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창극은 정면돌파를 선택해 도리어 일을 크게 벌이고 있다.

사람들이 강연 동영상 전체를 보고 나면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넘기고 국회에서 과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자신의 신을 강연에 이용해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한줌에 불과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를 욕보이기로 결정했다. 강연은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그 내용은 기독교적인 역사관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질서 있는 퇴각의 기회는 사라졌고, 덤터기는 모두 신이 뒤집어쓰게 됐다.

문창극은 기독교인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역사의 완성을 대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속류헤겔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이전의 모든 시대는 예비단계에 불과하며, 고난의 행군은 빛나는 영광을 위한 필연적 계기라고 생각한다. 헤겔에 있어 역사가 이성의 자기실현이라면, 문창극에게는 기독교-한미일삼각동맹-반공-자본주의가 민족사의 동력이다. 기독교를 통한 민족대각성을 위해 이조시대의 당쟁과 가난이 필요했으며, 자본주의의 싹을 심기 위해 일본을 이용해 식민지가 되었고, 반공을 위해 남북분단을 감수했으며, 한미일 삼각동맹을 위해 6.25 전쟁을 결행했다는 식이다. 이 역사의 동력은 (헤겔에게서처럼) 마침내 자신을 실현해내는 이념이며, 존재했던 모든 것이 이 빛 가운데서만 자신의 올바른 자리를 찾는 그러한 이념이다. 그러므로, 편안한 중립과 실용의 언어 뒤에 숨어 이념의 경직성을 비판하는 칼럼을 쓸 때 문창극은 실은 자신의 확고부동한 이념을 배반했던 것이다. 이런 그를 위해 신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마태 7:5)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창극은 그의 이념이 곧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하여튼 크리스찬이 먼저 정신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요. (문창극, 과거 교회 강연)

신은 (그것조차 자신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간난의 세월을 극복하고 마침내 기독교-한미일삼각동맹-반공-자본주의를 완전히 실현해 내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실현되었으며, 공산주의 철폐의 중심국가로 쓰임을 받을 대한민국을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될 날도 멀지 않았다 (이것을 그의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먼저 정신을 차려 깨달아 알고 있는 문창극은 무지몽매한 동료 기독교인들이 어서 신의 뜻을 깨우치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고 독려한다. 그러면 순리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문창극은 속류라이프니츠주의자이기도 하다. 분단이나 6.25 같은 엄청난 고통조차 신의 뜻을 담지하고 있으니 이를 비난하고 멀리할 것이 아니라 그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미 신의 은총으로,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는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결핍과 고난조차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인샬라! 그런데 그는 왜 북한을 긍정하지는 못할까?

대단히 위험한 신앙관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예수를 배반한 가롯유다는 희생번트를 댄 것에 불과하며, 십자가에서 나를 왜 버렸느냐며 절규하는 예수는 제대로 쇼를 한 셈이다. ‘신의 손’의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한 마라도나는 진정한 신앙인일 것이며, 핵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련을 묵묵히 견뎌낸 북한에 주신 신의 축복이 되고 만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뜻 사이의 긴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문창극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전 1:25)다고 했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의 뜻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신의 뜻을 내 머리로 이해하고 내 손에 쥐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뜻은 ‘진정성’과는 달라서 아무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뿌리 깊은 약함과 악함을 자각한 사람이 대진리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두려운 마음으로 뱉어내는 그런 말이다. 그것은 숨이 끊어지기 전 자신의 전생애 속의 모든 굴곡과 희로애락을 회고하면서, 삶을 이끌어 온 것이 자기자신이 아니었음을 꿰뚫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운명이다’라고 통째로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다. ‘신의 뜻’은 삶의 지침도 아니며 윤리적 덕목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대신 세상을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간 사람에게, 그의 고통과 패배와 절망과 실패와 두려움과 고뇌 속에 한줄기 빛처럼 스며드는 위로의 능력이다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마태 28:20).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신의 뜻을 고백의 방편으로서만 겸손히 ‘사용’해야 한다. 생의 모든 잘못과 실패와 패배의 책임은 자신에게 돌리되, 그러한 잘못과 실패와 패배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그를 지탱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있던 거룩한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 바로 이러한 회고적 태도가 ‘신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는 가장 건강한 방법일 것이다.

반대로 신의 뜻이 사전적인 판단의 근거와 정당화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그것은 테러리스트의 무기가 된다. 신의 뜻을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우매한 대중을 계몽하려하고,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신의 뜻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뜻이며, 인간의 생각을 신의 생각으로 꾸며놓은 것에 불과하다. 포이에르바흐가 주장한대로 그들은 신을 창조하여 인간의 속성을 그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소외시켰다. 여기에는 올바른 신앙인은 우선 참 인간이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다.

신의 뜻 운운하며 과거를 뒤집어 놓는 장난을 해서는 안된다. 식민지 지배가 없었으면 근대화도 없었고, 이승만과 박정희가 없었으면 민주화도 없었다고 생각하는가? 시간적 선후관계와 논리적 선후관계를 혼동하지 말라.  3.1 운동과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긍정적 평가를 가능하게 한 것이며, 민주화가 되었으므로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5월 광주가 없었으면 박정희 기념사업 같은 것도 없었다. 6월 항쟁이 없었다면 전두환이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박근혜에게 정치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식민지 지배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된 것이며,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야 그들의 공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을 훑어보며 나는 이 사람이 바벨탑을 쌓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창세기 11:4)

그는 10년 동안 칼럼을 쌓고 쌓아 마침내 ‘역사의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때가 왔다. “주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창세기 11:5). 개독의 바벨탑이 여기저기서 무너지려 하고 있다.

과연 그런 것인지 두려워하며 신의 뜻을 묻는다.

(142) 절망적인 종속 – 가치의 오디세이

전에는 동일한 도구를 다루는 것인 평생의 전문직이었는데, 이제는 동일한 기계에 봉사하는 것이 평생의 전문직으로 된다. 기계는 노동자 자신을 유년시절부터 특정 기계의 한 부분으로 전환시키는 데 악용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이 현저히 감소할 뿐 아니라, 동시에 공장 전체에 대한, 따라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절망적인 종속이 완성된다.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와 그 발전의 자본주의적 이용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본론 1권 15장, pp. 566-7; MEW 23, 445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용가치의 생산을 매개로 한 가치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치생산이 원인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결과다. 가치생산이 내용이고 사용가치생산이 그 형식이다. 다만 이 형식 – 혹은 형태 – 은 가치생산이라는 내용의 존재양식이므로, 사용가치생산 없는 가치생산은 있을 수 없다.

가치생산은 (원인) 자본가 사이의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높인다 (결과). 가치생산에 대한 자본가의 욕구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생산성의 증대에도 한계가 없다. 자본주의는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생산과정을 급속도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가치는, 이 추상적 논증을 현실화해야 했다. 사용가치는 가치를 팔벌려 환영하지 않았고, 우선 가치는 사용가치를 무릎꿇려야 했다. 번번히 접신을 거부하는 노동력 사용가치를 굴복시키기 위해 가치는 기계라는 우회로를 택했다. 공장제 대공업의 “자본주의적 이용”은 가치의 사용가치 정복전이었으며, 가치에 대한 사용가치의 절망적 종속화의 과정이었다. 가치는 가격과 같은 단순한 숫자도 아니지만, 노동-자본 관계의 추상적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혼이다. 가치는 사용가치 안에 가만히 머물러 안식하지 않았다. 가치는 자신을 부정하고 사용가치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져 그것을 자신의 틀에 맞게 변형시키고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직 그 후에야 가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 진정한 실질적인 자본이 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가치의 오디세이이며, 자본론은 가치의 경험의 학인 것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가치의 오디세이는 쉬지 않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발전에 기인하는 생산성 증대”를 추동한다. 가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가치는 언제나 그것의 “자본주의적 이용”으로까지 나아가 자신의 운동의 산물, 곧 총체로서의 자본주의를 “절망적인 종속”의 체제로 완성시키고 또 재완성시킨다. 가치는 어떤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치의 긍정적인 측면은 계승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철폐하자는 주장은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다. 그 공상이 현실화하는 순간,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장벽도 용인하지 않는 가치가 긍정적으로 계승된 자기자신을 우선 철폐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141) 노동시간 단축의 수단이 그 연장의 확실한 수단이 된다는 역설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노동자와 그의 가족의 모든 생활시간(Lebenszeit)을 자본의 가치증식에 이용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된다는 경제적 역설이 이로부터 나온다 – 자본론 1권 15장, p. 547; MEW 23, p. 432

노동자: 어이 자본가. 지난 1년간 기계를 이용해서 생산을 해봤는데, 생산성이 두 배로 높아졌어. 노총에 나가봤더니 다른 회사 노동자들도 같은 얘기를 하더라고. 너 정말 기계 잘 들여왔다. 니네 자본가들 돈에만 환장한 줄 알았는데 꽤 쓸모있어. 훌륭해. 이제 노동시간 반으로 줄이자. 어차피 반만 일해도 생산량은 똑같애.

자본가: 뭔소리여. 법정근로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너는 나랑 자유롭고 평등한 조건 하에서 고용계약서에 싸인했던거 아니여? 주당 40시간 노동은 내 권리라고!

노동자: 자자. 흥분하지 말고 차분히 내 말좀 들어봐. 내가 월급을 받으면 그걸로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들을 구매한단 말이야. 저기 가치 말고 사용가치라는 것도 있어요. 버스도 타야되고, 하루 세끼 먹어야 되고, 가끔 외식도 하고, 한 달에 한번은 영화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인문학 강의도 듣고. 이걸 다 생산하는데 시간이 이제 절반만 필요하다니까? 굳이 내가 계속 40시간을 일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뭘 더 달라는게 아니잖아.

자본가: 나는 사용가치 같은 거 먼지 몰라도 지금까지 잘 살았고, 앞으로도 그런 것에 관심둘 생각 전혀 없음. 그리고 40시간은 너희들 대표자가 국회에서 정한거야. 왜 이제 와서 딴소리여.

노동자: 아놔. 내가 그동안 굳이 얘기를 안했는데, 내 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거 다 알고 있다고. 너한테 중요한 건 어차피 비율 아니야? 필요노동시간 절반으로 줄었으니까 공평하게 잉여노동시간도 절반으로 줄이자. 내가 착취 없애라고 까지는 안할게.

자본가: 웃기고 있네. 너네는 무조건 40시간 일해야 돼. 노동시간 줄일 거면 내가 미쳤다고 기술개발하냐? 나도 다 살자고 이러는거야. 다른 자본가들 다 난리라고. 옆 공장은 생산성이 두배 반이나 올랐어. 걔네가 덤핑하면 나 쫄딱 망한다.

노동자: 정말 이해가 안되네. 너네 전국경제인연합회랑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모여서 뭐하냐? 같이 모여서 합의를 해라. 합의를. 비용 갹출해서 기술개발 같이 하면 되지 서로 피곤하게 뭐하는 짓들이여.

자본가: 허허. 니가 잘 모르나본데 다들 금메달 딸 각오로 피터지게 노력해야 되는거야. 그래야 사회 전체적으로 기술수준도 높아지고 모두들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보이지 않는 손인가 발인가가 다 알아서 한다고. 이게 내 철학이야 철학.

노동자: 다시 차분히 생각해봐. 우리가 계속 40시간 씩 일하면 생산량이 두배로 늘어날 거 아니냐, 생산성이 두 배로 늘어났으니까. 그지? 우리들 몫 빼고 남는 분량이 이제 예전에 비하면 세배야 세배. 이거 어디다 팔거야. 사용가치 이거 만만한게 보면 안된다. 그러다가 재고 쌓이고 은행빚 못갚고 공황오고 이런거 아니여? 무턱대고 너무 많이 생산하면 다 망한다고.

자본가: …

노동자: 음… 니가 이해도 못하는 것같고 또 욕심 있는거 다 아니까 우리가 통크게 양보할게. 계속 40시간씩 일할테니까 우리 몫을 두 배로 올려줘. 비율 그래도 유지하자. 그러면 우리가 저금 안하고 공장 물건 아낌없이 사 줄테니까. 재고 쌓이면 서로 골치 아프잖아. 그리고 니네 신고전파 경제학인가 뭔가 그거 생산성 두배 오르면 임금도 두배로 올라야 된다며. 그래야 균형인가 뭔가 아마 다시 성립될걸. 그거 되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배운대로 해. 노동시간 안 줄일려면 대신 월급 올려. 상생하자.

자본가: 허허. 경제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런 건 교수님들이나 하는 얘기고 우리는 그냥 본능 따라 살면서 가끔 호탕하게 웃어주면 끝이야. 그리고 니네가 사주긴 뭘 사줘 이것들아. 우리나라 무역입국한거 모르남? 상사맨들이 외국에 내다 팔면되지.

노동자: …

자본가: 그리고 이놈들이. 생각해 보니까 열이 확 오르네. 이제 기계 들여와서 니네 기술이나 경험도 별로 필요 없거든! 외국 사람들 중에 니네 월급 반만 줘도 일한다는 애들 널렸어. 걔네 며칠 빡쎄게 뺑뺑이 돌린다음에 현장에 투입하면 되는데 어디서 개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밤중에 기계 놀리는 거 아까워 죽겠는데. 이것들이 지금까지 기술 좀 있다고 뻣뻣하게 나와서 스트레스 받았는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안다더니 딱 그 짝이구만. 어디서 재료 나부랭이가 인간 행세야. 너네 이제 필요 없으니까 셋 셀 동안에 꺼져라. 아쉬우면 밤에 나와서 일하던가.

(140) 자본주의 이중성이론, 인간재료

나는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 약간의 불만을 갖고 있다. 노동가치론을 풀어서 설명하면 노동이 가치(와 가격)의 원천이라는 이론이라고 할텐데, 이것이 그 자체로 잘못됐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그리고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자본주의적 착취를 해명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올바르고 순수하고 단순한 명제의 진실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이)가치(의 원천이라는 이)을 강조하는 마르크스 해석의 폐해는 이것이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단순한 (그러나 올바른) 주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마르크스가 예술적 총체로 여긴 자본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왜곡한다는 것에 있다. 여기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1) 노동만이 가치의 원천이므로 노동이 아닌 것은 가치와 무관하다; 2)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에는 별 의미가 없으며 생산적 노동만이 분석의 가치가 있다 – 이런 시각을 가진 이들은 어떤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집착한다; 3) 중요한 것은 착취의 존재를 해명하는 것이다; 4) 노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류의 해석들은 공통적으로 노동과 가치를 (적어도 암묵적으로) 동일시하며, 따라서 대체 어떠한 역사적 조건에서 노동이 가치의 실체가 되는지, 그리고 왜 마르크스가 착취의 해명에 그치지 않고 현상형태의 영역으로의 상승을 시도하는지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있어 노동과 가치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지만, 노동은 가치뿐만 아니라 사용가치 역시 생산한다. 가치가 일면적이라면 노동은 이중적이다. 서로 가깝고도 먼 사이인 것이다.

그래서 다이앤 엘슨 (Diane Elson)과 같은 사람은 이러한 폐해에 주목해서 노동가치론 (the labour theory of value) 대신 노동의 가치이론(the value theory of labour)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에 근거한 가치(와 가격)의 해명이 아니라, 노동이 왜 가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노동가치론이라는 표현에는 스미스, 리카도 등의 고전파 정치경제학자와 마르크스 사이의 연속성을 과장한다는 문제도 있다. 노동가치론은 마르크스가 최초로 제시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분명히 옳지만, 노동가치론을 매개로한 연속성이 마르크스와 고전파 정치경제학 사이의 관계의 요체인 것은 아니다. 나는 연속성의 측면보다는 단절의 측면이 훨씬 크고, 마르크스의 이중성 이론이 바로 단절의 핵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 1장은 자본론 1권 1장 1절의 내용과 놀랄만하게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반부에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구분, (교환)가치량이 노동의 양에 의해 규정된다는 주장이 제시되며, 심지어 사용가치가 없는 상품은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언급도 등장한다. 하지만, 리카도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관계를 상품의 이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지 않고, 따라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성에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르크스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부각시킨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중성이론’이라는 표현을 제안할 것 같다. 영어로 하면 the dual-character theory of capitalism 정도가 될까.

마르크스는 1867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론의 두가지 최고의 포인트 중 하나로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논의를 꼽으면서 이것이 “모든 종류의 사실의 이해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마르크스에게 이중성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두 가지 차원 – 즉 필요의 충족을 위해 조직화된 경제체계로서의 차원과  임노동에 기초한 계급사회로서의 차원 – 을 개념화하고 서로를 전제하는 이 두 차원의 모순적 성격을 명백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이중성은 자기증식한다. 노동이 이중적이므로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 역시 이중적이고 (가치 vs. 사용가치) 이 내적 이중성은 일반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표현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생산과정 또한 이중적이다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생산과정이 이중적이므로 지휘의 역할도 이중적이며 (노동과정의 조직 vs. 지휘의 전제성), 인간 역시 주체로서의 인간과 객체로서의 상품(물건)으로서의 이중적 존재로 전락한다.  여기에 더해 나는 노동의 이중성, 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이 생산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으로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상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패망의 유전자는 자본주의의 세포형태인 상품 속에서 그 발현을 기다리고 있다.

이중성 이론의 또다른 핵심은 서로를 전제하면서 서로를 배제하는 쌍방의 모순관계에서 언제나 한쪽이 공세를 취하고 다른 한쪽은 수세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상품이 가치이기 위해서는 우선 사용가치이어야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사용가치의 생산이 가치생산의 수단으로 변질된다. 노동과정도 마찬가지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 가치의 형태를 취하는 순간부터 노동과정 그 자체는 가치생산과 가치증식에 걸맞는 형태로 변형되어간다. 단순협업이 매뉴팩쳐로 매뉴팩쳐는 기계제대공업으로 발전하며, 노동자는 노동과정의 주체에서 인간재료로 전락한다. 여기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담백하게 쓴다.

대공업의 출발점은 노동수단의 혁명이며, 그리고 이 혁명은 공장의 편성된 기계체계 안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를 얻는다. 이 객체적 유기체에 인간재료(Menschenmaterial)가 어떻게 합체되는가를 고찰하기 전에 … -자본론 1권 15장, p. 529; MEW 23, p. 416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모순적) 이중성을 1장을 제외하고는 별도로 상세히 논의하지는 않지만, 기계제 대공업을 다루는 15장에도 이중성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 여기저기 녹아 있다. 예를 들어,

우선 말해두어야 할 것은,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가치증식과정이 맞다]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는 사실이다 … 생산물형성요소로서의 기계와 가치형성요소로서의 기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 어떤 노동수단이라도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고 가치형성과정에는 항상 그것의 평균적 마멸에 비례해 일부만 참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 p. 519-20; p. 408

그리고 각주24에서 마르크스는 리카도가 이 이중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리카도는 … 다른 곳에서는 [기계의] 이러한 작용 [heesang: “기계의 생산적 효율성이 도구의 그것에 비해 크면 클수록 기계의 무상봉사의 크기도 그만큼 더 크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 사이의 일반적 차이를 알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 p. 520; p. 409

(139) 강신준과 프루동의 긍정의 변증법 – 번외편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에서 강신준은 다음과 같이 쓴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서는 “부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혁의 과제로 내가 얘기했던 성숙의 의미인 것이다 … 그래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건설된다는 것을 강조한 의미인 것이다.

그는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다음 구절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 …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마르크스에게 있어 변증법은 현존 – 자본주의 – 의 부정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부정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자본주의를 충분히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성숙한 자본주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애매할 뿐더러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관련 구절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독일에서는 이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이 유행했는데 이는 그것이 현존하는 것들을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우선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은 헤겔 우파의 변증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프로이센 제국을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의 최종단계로 보았다. 이렇게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이론이라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신비화된 외피 속에 감추어진 합리적 핵심”이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긍정이 부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강신준에게서처럼 긍정이 부정의 “모색”을 위한 “토대”인 것은 아니다 (번역에 대해 지적하자면,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 대신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이 옳다. “부정”과 “몰락”이 동격이다. 비봉판에는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대상의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 … 에 대한 이해”가 포함 혹은 간직되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부정적인 이해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라는 대상에 대해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긍정적 이해 외에도 자본론 출판 데드라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공언한 것보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출판된다) 부정적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긍정은 좋은 것, 부정은 나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긍정과 부정 사이에는 별다른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는 데드라인을 지키면서도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긍정이 부정을 포함하고 있어 긍정과 부정이 상호 연관되어 있을때, 긍정과 부정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 실현과 해소의 대립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은 대논리학 서론(임석진 번역, 벽호)에서 변증법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의식의 제형태가 각기 저마다의 실현을 이룩하면서도 또 어느덧 자기를 해소시키는 가운데 결국 여기서 얻어지는 그의 결과란 다만 자기자신의 부정일 뿐이니 – 이럼으로써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하게 되는 셈이다. 학적인 진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명제를 인식하는 데 있으니, 그것은 즉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자기 모순적인 것은 결코 영이나 추상적인 무로 해소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의 특수적인 내용의 부정 속으로 해소됨으로써 또 달리 말하면 결국 그와같은 부정은 전면적, 전칭(全稱)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시 해소되게 마련인 특정한 사상(事象; Sache)의 부정이며 따라서 특정한, 규정적 부정이라는 것이다. (43, 강조 추가)

반대물을 통일성 속에서,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 (47)

변증법에서 대상은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해소하며 이를 통해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한다. 실현에 대한 이해(긍정적인 이해)가 바로 해소(와 이행)에 대한 이해(부정적인 이해)에 해당하므로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변증법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의 자기실현은 곧 자본주의의 자기해소이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1, p. 412, 박종철 출판사). 대조적으로 강신준의 변증법에서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우선하고 그것을 “토대”로 부정을 “모색”해야 한다. 긍정(실현)이 부정(해소)과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대신 긍정이 부정의 전제조건으로 기능한다.

강신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긍정적 이해의 핵심은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유기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마련이므로, 자본주의의 이 긍정적이고 좋은 측면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바로 이때 자본주의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나쁜 측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타파가 아니라 성숙의 결과인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좋은 측면에 기반하여 나쁜 측면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사회주의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우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 기반하여 그 성숙을 촉진하는 것이 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풍요롭게 내린다는 식이다. 죄는 죄로서 나쁘지만, 은혜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이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해 죄를 짓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이미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느냐고 강변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긍정)이 바로 그 패망의 법칙(부정)임을 가르쳐준다. 자본주의의 성숙이 곧 그 패망이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더욱 더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패악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것이 일시적인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것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타파하여 이 고통스러운 변증법을 마침내 완성할 것인가.

강신준의 변증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 깊다. 그것은 좋은 측면은 유지하고 나쁜 측면은 제거해야 한다는 프루동의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변증법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치열한 학문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은 건재했다.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둘째 사위 라파르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프루동이 라파르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족관계의 친밀함도, [철학의 빈곤]도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방어하는데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강신준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단순히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쓴다 (강민철, 김진영 옮김, 아침새책 117-8,  131, 강조는 원문; 맑스 엥겔스 선집 1권에도 수록)


이제 프루동이 헤겔의 변증법을 정치경제학에 응용하면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프루동에게 있어서 모든 경제적 범주들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라는 양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소부르조아가 위인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범주를 관찰한다: 나폴레옹은 위인이었다, 그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동시에 많은 악을 범했다.

프루동이 보기에는 좋은 측면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이 서로 합쳐져서 모든 경제적 범주의 모순을 형성한다.

문제의 해결은 좋은 측면을 유지시키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노예제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범주이다. 따라서 그 역시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노예제의 나쁜 측면은 젖혀두고 좋은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우리는 수리남, 브라질, 북미의 남부지역에 있는 직접적 노예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 노예제는 기계, 신용만큼이나 부르조아 산업의 중추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면화를 구할 수 없고, 면화가 없다면 근대 공업이 있을 수 없다. 식민지에 가치를 부여해준 것이 바로 이 노예제이다. 세계무역을 창출해냈던 것은 식민지이며, 대규모 공업의 전제조건이 세계무역이다. 그러하기에 노예제는 가장 중요한 경제범주인 것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가장 발전된 나라인 북미는 아마도 가부장적 나라로 바뀌었을런지도 모른다. 세계 지도에서 북미를 지워보라. 그러면 남는 것은 근대 문명과 교역의 몰락이라는 무질서뿐일 것이다. 노예제를 사라지게 해보라. 그러면 북미를 세계지도에서 지울 수 있으리라.

노예제는 경제범주인 까닭에 모든 나라에서 항상 존재해왔다. 근대 국가는 자신의 나라 내부에서만큼은 노예제를 위장시켜야만 하지만, 신세계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노골적으로 강요해왔다.

노예제를 수호하기 위해 프루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것이다: 이 경제범주의 좋은 측면을 유지하고 나쁜 측면을 제거하라.

헤겔에게는 정식화할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프루동은 헤겔의 변증법은 전혀 갖지 못한 채 그 언어만을 도용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적 방법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에 대한 독단적인 구별에 있다.

잠깐 프루동을 범주로서 예를 들어보자. 그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을 검토해보자.

프루동은 인류 선을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헤겔에 비해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변증법적 출산의 진통에 의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무기력하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변증법적 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두 대립된 측면의 공존, 양자의 투쟁, 새로운 범주에로의 이행이다. 나쁜 측면을 제거한다는 그 문제 설정은 변증법적 운동에는 부족하다. 본래의 모순적 성질에 의해 자신을 정립시키고 대립시켰던 것은 범주가 아니다. 범주의 두 가지 측면 사이에서 흥분하고 당황하고 안달이 났던 것은 바로 프루동이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탈출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프루동은 높이 뛰기를 하고는 일약 새로운 범주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이성 속에서의 연속적 계열이, 그가 보기에도 놀랍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손쉬운 것을 손에 넣어 첫번째 범주로 삼고는, 자의적 방법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범주의 결점을 치유할 수 있는 성질이 거기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우리가 프루동을 믿는다면, 조세는 독점의 결점을 치유하고, 교역의 균형은 조세의 결점을 치유하고 대토지 소유는 신용의 결점을 치유해야 한다. 

프루동에 따르면 분업은 일련의 경제적 발전을 전개시킨다.

분업의 좋은 측면 – “본질적인 면에서 고려한다면, 분업은 조건과 지성의 평등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분업의 나쁜 측면 – “분업은 우리에게는 빈곤의 원천이 되어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에 고유하고 자신의 생산성의 주요한 조건인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분할시킴으로써, 노동은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의 목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해결되어야할 문제 – “분업의 결점을 일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유용한 효과를 보존하는 새로운 합성체”를 발견하는 일.

(138) 자연력과 과학 그리고 외부성

우리는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생산력은 자본가에게 아무런 비용도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회적 노동이 만들어내는 자연력이다. 생산과정에 적용되는 증기, 물 등과 같은 자연력도 역시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 자본론 1권 15장, 518; MEW 23, 508

경쟁균형의 존재를 가정하는 주류경제학에서 일반적인 생산요소는 그 한계생산만큼의 보상을 받는다. 예를 들어 임금 = 노동의 한계생산; 이자율 = 자본의 한계생산; 그래서 경제적 이윤=0. 생산에 기여하지만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 그러니까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 생산요소의 경우, 이것을 생산요소라고 칭하지 않고 생산과정에 “양의 외부성”이 존재한다고 얘기한다.  보통 양봉장 옆의 정원 – 벌이 공짜로 식물의 교배에 기여한다 – 이나 과학기술 – 자동차 생산에 대한 뉴턴의 기여는 보상받지 않는다 – 이 양의 외부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이렇게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생산에 기여하는 것들을 – 여기에는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생산력”이 포함된다 – 마르크스는 “자연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자연력”은 주류경제학의 양의 외부성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전류의 작용범위 안에서는 자침이 편향한다든가, 주위에 전류가 돌고 있으면 철에서 자기가 발생한다는 법칙 등은 일단 발견한 뒤에는 한푼의 비용도 들지 않는다.

과학이 주류경제학에서 “양의 외부성”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마르크스는 과학을 “자연력”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와 주류경제학의 차이는? 주류경제학이 사용가치의 경제학이라면 가치론은 가치의 경제학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에는 토지, 노동, 기계, 도구, 자연력 등이 필요하지만, 가치의 생산의 경우에는 (토지, 기계, 도구, 자연력 등을 이용하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 (물론 가치생산에서 기계, 도구는 과거노동의 결정체로 전환된다). 증기, 물, 협업과 분업으로부터 생기는 자연력, 과학 등등은 사용가치의 생산에 기여하지만, 그리고 때때로 공짜로 더 많은 사용가치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리고 가치생산의 전제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직접 가치를 생산하지는 못한다. 가치가 사회적 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증기와 물과 협업과 과학이 인간 사이의 관계에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부성의 가치론 같은 것은 없다. 잊지말자. 가치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기계는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언제나 일부씩만 참가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기계가 생산에 참여한다. 가치생산의 관점에서는 기계는 과거노동의 결정체에 불과하며 (그것이 동력기, 전동장치, 작업기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상품생산과정에서 마멸되는만큼의 가치를 최종생산물에 이전할 뿐이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노동과정에는 언제나 전체로 참가하지만, 가치형성과정에는 (그것이 공짜로 사용되기 때문에) 참가하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내생적 경제성장이론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지식, 과학, 기술의 양의 외부성 – 정확하게는 지식생산의 생산성을 높이는 외부성 – 을 제시한다는 사실에 있다. 앞에서 외부성의 가치론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의 가치론 같은 것도 없다. 가치론의 관심은 자본축적에 – 이것은 성장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 그리고 자본축적과정과 더불어 함께 축적되는 모순과 그 결과들에 있다.

(137) 빌어 온 토대를 타파하고

발명의 수가 증가하고 또 새로 발명된 기계에 대한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기계 제작업이 다양한 독립부문으로 분화되었고, 기계제작 매뉴팩쳐 안의 분업이 더욱더 발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매뉴팩쳐에서 대공업의 직접적인 기술적 토대를 본다. – 자본론 1권 15장, 513; MEW 23, 402

발명의 수가 증가하고 새로 발명된 기계에 대한 필요도 증대한다. 마르크스에게서는 사회적 분업의 발전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필요의 발전과 (경향적으로) 병행하여 이루어진다.

이 매뉴팩쳐는 기계를 생산했는데, 그 기계의 도움에 의해 대공업은 [그것이 최초에 장악한 생산부문들에서] 수공업 생산과 매뉴팩쳐 생산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계를 생산하는 체계는 자기에 적합하지 않은 물질적 토대 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naturwüchsig) 생긴 것이다. 그 체계가 일정한 발전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 동안 종래의 형태로 더욱 발전해 온] 이 빌어 온 토대를 타도하고 자신의 생산방식에 상응하는 새로운 토대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매뉴팩쳐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을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속에서 싹트는 “자연발생적” 변화가 반드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의 이행과 같은 거대한 스케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즉, 기계로 대표되는 생산력이 매뉴팩쳐가 대표하는 생산관계(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점진적 분리, 노동의 위계제, 노동의 일면화와 전문화)의 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빌어온 토대”를 타도하고 “새로운 토대”의 창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빌어온 토대는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적절한 의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대공업은 [그 특징적 생산수단인] 기계 그 자체를 기계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대공업은 자기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했으며 자기 자신의 두 발로 서게 되었다. – 516

대공업은 “자기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조해냈다. 기계제 생산이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에 이르렀을 때 매뉴팩쳐에 기반한 상품생산과 매뉴팩쳐가 대표하는 생산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되었으며 비로소 매뉴팩쳐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의 이행이 완료되었다.

사회적 변화에 대한 설명은 이와 같아야 한다. 새로운 생산관계,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우선은 기존의 물질적 토대 속에 싹을 틔우고 자라나지만 종래에는 이 토대의 기술적, 사회적 제한을 타파하고 새로운 토대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지배적인 생산관계, 사회적 관계로 자리잡을 수 있다.

현대자본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살아가는 시대를 대격변의 시대, 혹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대사변의 시대로 규정하고 싶어한다. 우리시대가 대격변, 대사변의 시대이기 위해서는 과거는 무격변, 무사변의 지루한 시대여야만 한다. 오늘날의 경제가 지식, 협력, 협업, 공통되기로 대표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대를 물질노동과 육체노동의 시대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과거는 현재가 아닌 것으로, 현재는 과거가 아닌 것으로 부정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물론 현재는 과거와 대립된다. 최신식 생산관계는 구식 생산관계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하지만 현재는 언제나 과거의 산물로서, 현재와 과거는 하나의 연속체 속의 대립물로서 이해된다.

따라서 현대자본주의를 경제의 서비스화의 시대, 인지자본주의의 시대 혹은 지식경제의 시대로 이론화함에 있어 이 새로운 시대가 어떠한 빌어온 토대에서 자라 이 토대를 타파하고 지배적인 생산관계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경제의 서비스화에 주목하는 이들은 반드시 “빌어온 토대”인 제조업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서비스 산업인 운수업의 경우, 자동차 산업의 발전 정도가 운수업의 폭발적인 확장에 일종의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는가? 서비스업의 확장은 (기계제 대공업이 기계제작 매뉴팩쳐를 기계화했듯이) 제조업을 서비스화하면서 그 “빌어온 토대”를 과연 타파하고 있는가? 경제 내의 서비스업의 확장은 경제의 본질적인 변화의 결과인가 아니면 형태 상의 변화일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