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4. pub_matters_발표된_글

Things published in any form.
어떤 식으로든 발표된 글.

[201612] 촛불정국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과제

지난해 12월 13일에 국회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 발표한 뒤 시간이 꽤 흘렀고 급히 써서 좀 성기지만, 아직 봐줄만은 한듯. ㅎㅎ (앞서 여기에 내놓은 포스팅을 발전시킨 것임.)

이 글에서 내 나름대로 반박(?)하고자 했던 해석은, 이번 촛불정국이 그간 사회경제적 모순(불평등, 비정규직, 세월호 등)이 누적됨에 따라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 물론 이러한 모순들이 이번 촛불정국의 중요한 배경은 되지만, 과연 그것을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그런 모순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는 할 수 있을까? 글쎄.. 그렇게도 보긴 어렵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위와 같은 모순이나 민중의 분노의 의의를 경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이런 사태를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는 ‘자본축적’이어야 한다는 얘기. 불평등 심화든 비정규직 확산이든.. 바로 그 자본축적이라는 핵심 동학의 결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링크

트럼프 당선보다 더 큰 문제는 경기 침체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예측을 깨고, 그리고 우리의 ‘문명수준’에 대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믿음을 배반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다음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의 당선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두고 다양한 해석과 분석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아마도 가장 솔직한 대답은 ‘도무지 모르겠다’라는 것일 듯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힐러리 클린턴의 열성 지지자였던 폴 크루그먼은 트럼프 당선이 확실시된 뒤 공개된 뉴욕타임스의 칼럼에서 ‘우리는 우리의 나라를 정말 모르고 있었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경선 과정에서 드러났듯 트럼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언행이 기존의 ‘정치문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정치적 입장 또는 프로그램에도 입각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결과를 ‘공화당의 승리’라고 할 수도 없다. 부시 전 대통령처럼 공화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요 인물들이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선언할 정도였다.

특정한 정치적 의제나 가치를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했다기보다 트럼프는 노련한 사업가답게 미국 사회에서 불고 있는 어떤 ‘바람’을 감각적으로 포착해내고 거기에 자신을 성공적으로 던져 넣었다. 그 바람이란 바로 ‘분노’다.

분노는 결코 이성적인 반응이 아니다. 대중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은, 분노의 원인이 제거되어 자신의 분노가 풀리기를 이성적으로 원하기도 하지만 뭐라도 한 대 쳐서 당장의 분을 삭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인들의 분노는 현재 미국 경제가 커다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유래한다.

지난 8년간 오바마 행정부는 다른 선진국들의 정부에 비해 경제위기를 잘 관리한 편이지만, 대중이 체감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실질임금 상승은 정체되거나 뒤집혔고, 지표상의 실업률 하락과는 반대로 장기실업이 일반화되고 있다. 소수의 가진자들의 배만 불리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전체가 분노의 원인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런 ‘원인’을 건드린 게 아니다. 그가 한 일은 화난 미국인들의 발 앞에 깡통을 던져준 것이었다. 미국인들은 그 깡통을 힘껏 발로 참으로써 트럼프에 화답했지만, 선거 뒤에도 트럼프가 대중의 분노에 봉사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트럼프가 ‘침묵하는 다수’라고 불렀던 그들은 이제 다시 침묵을 강요받을 것이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 앞에는 그들을 분노케 했던 거대한 ‘시스템’이 놓여 있다.

이 시스템의 ‘주인’이 월스트리트 안팎의 자본가들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중의 분노에 편승하고 동원하기 위해 트럼프가 내놓았던 약속들이 저 ‘주인’의 의사에도 부합한다고 보긴 어렵다. 트럼프 말대로 당장 외국인들을 미국 경제에서 몰아내면 미국의 거대자본에게 좋겠는가.

그런데도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현재 체제의 실질적인 주인들도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침체 앞에서 ‘속수무책’임을 방증한다. 적어도 그들로서는 대중의 분노가 자신들을 향하는 것보다는 트럼프 같은 이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해소되는 편이 낫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국의 선거는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싸움이었다기보다는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함을 정확히 지적한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떨어졌을 때 이미 끝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클린턴의 중요한 패착은 대중의 분노를 진보적으로 받아 안았던 샌더스의 ‘유산’을 적절히 계승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샌더스가 민주당 후보였더라면 이겼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 좀 더 핵심적인 문제들이 제기됐을 것이고 ‘싸움’은 좀 더 볼 만했을 것이다.

결국 앞으로 일정한 혼란은 있겠지만, 특히 경제 영역에서는 ‘트럼프 변수’보다는 기존의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침체 변수’가 더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세계경제의 보호주의로의 회귀 움직임은 트럼프 같은 ‘대중추수적’ 정치인들의 선동 때문이 아니고 이른바 ‘자유무역의 이득’이라는 것이 실현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에 활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그러한 활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개별적인 자본보다는 각국 정부들과 그들의 세계적 연합체들(국제기구 등)이 전면에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트럼프의 미국 앞에 놓여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이 글은 뉴스1에 먼저 실린 것으로,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원문에 사소한 수정을 가하였습니다.)

[201406]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이론적 의의와 한국에의 시사점

일전에 블로그에 조금 끄적걸여 놓은 것을 정리하고 보완해 국내의 한 학술지에 냈다. 이는 ‘학술지’ 기고용으로 작성된 것이라, 문체와 내용이 다소 점잖아보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내 나름대로 정성껏 썼다.

이 글을 쓴게 6월 초순. 그때는 확실치 않았는데, 나중에 점점 명확해진 추가적인 생각들이 있다. 이에 대해선 조만간 다른 기회에 정리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별도로, 현재 피케티 비판을 담은 좀 더 포괄적인 성격의 저작도 준비중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여러 훌륭하신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것이라 나 스스로도 기대가 많이 된다.

글 링크: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이론적 의의와 한국에의 시사점

참고로, 위 글은 한국사회경제학회가 발행하는 {사회경제평론}에 실렸다. 여기 공개하는 것을 허락해준 편집진께 감사드린다. 한편 같은 호에 KDI 류종일 교수의 서평도 함께 실려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바란다.

사회경제평론 링크: http://ksesa.org/page/page_view?menu_num=166

[201209] 경제위기와 복지국가

{정치경제학의 대답: 세계대공황과 자본주의의 미래}(김수행/장시복 외 지음, 사회평론, 2012)라는 책에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낸 바 있다(제14장, 439~62쪽).

이는 그 이전에 몇 차례의 강의를 통해 다듬은 생각을 정리한 것인데, 내 나름대로는 (다소 불충분하긴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출판된 지 얼마 안 된 책에 수록된 것이기도 하고 해서 공개하지 않았는데, 이젠 시간도 좀 흘렀고 내 글 때문에 책을 살 사람은 없으리라 간주하고 공개한다.

참고로 원제목과 목차는 다음과 같다.

[원제목]

      • 경제위기와 복지국가에 관한 에세이

[목차]

      • 머리말: 정치경제학 비판과 현대 자본주의
      • 예비적 논의: 임금의 정치경제학?
        • 임금이란 무엇인가?
        • 자본주의 경제의 얼개
      • 국가의 경제적 의의
        •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적 의의
        • 복지국가
      • 복지국가의 모순?
        • 복지국가를 둘러싼 자본의 복잡한 이해관계
        • ‘국민’이라는 환상
      • 경제위기와 복지국가: 21세기 초 한국

이 링크를 누르면 원문으로 연결됩니다. 많은 의견 주세요!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2)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2012년 봄)에, 나의 논문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가 실렸었다. 앞서 밝혔듯, 이번에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이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했는데, 다음과 같다(한글초록 및 기타 추가적 정보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먼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인지자본주의론의 현재
2. 소극적 비판: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인식에 대하여
_(1)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비판의 개요
_(2) 인지자본주의론이 보는 가치이론: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
3. 적극적 비판: ‘비물질노동’을 가치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한 메모
_(1) ‘비물질성’, 노동의 특정 유형의 성격인가 노동 자체의 성격인가
_(2) 단순 비교 대 역사적 형성
_(3) 가치이론의 기반: 측정가능성 대 비교/동등화
4. 맺음말

보시다시피 이 글에서 핵심은 2절과 3절이다. 따라서 아래 요약은 이 두 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1절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언뜻 보면 1절은 그냥 구색 맞추기 위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조정환이 어떤 종류의 연구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왜냐?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이 마치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고 있다는 듯이 묘사하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제껏 관련 논의를 국내에 소개해온 선구자들을 단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이건 적어도 ‘예의’의 문제다), 관련된 세계적 논의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다(이건 적어도 ‘성실성’의 문제다). 이러한 행태로부터 드러나는 조정환의 ‘의지’는 무엇인가? 자신을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가진 기존의 지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추악한 의지, 자신의 책을 팔아줄 독자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가련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써 나는, 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전희상에 대해 했던 부당하고 모욕적인 표현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더구나 특히 이 후자의 경우엔, 조정환이 그리도 혐오하는, ‘경제적’ 내지는 ‘가치이론적’ 고려(!)가 개입되었으리라(자, 이렇게 경제학 또는 가치이론은 여러분들의 실생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부디 두려워 말길). 따라서 나의 비판은, 조정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정환이 아주 작은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는 ‘인지자본주의론’ 일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정환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지자본주의론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주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의 (현실적 또는 이론적) 특수성을 상당히 반영한 논의를 내놓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인지자본주의론을 어떤 면에선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인지자본주의론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러니까… 김수행 교수가 공황론을 주로 소개했다고 해서 김교수의 입장이 공황론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당연하지 않은가? 실제로 과거엔 김교수가 공황론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그런데 요샌 조정환이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게을러졌거나, 조정환의 간이 배밖으로 나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비판을 보자. 애초 나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어 있었지만, 다음에서는 이 둘을 뭉뚱그려 모두 네 개의 주장으로 요약했다.

1. 가치이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오해. 이것은 마치 {자본론} 제1권 제1장을 읽으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명품가격”을 반박근거로 내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여기서 상품가치는 매우 단순하게도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데, 이른바 명품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이런 원칙을 거스르는 것 같기 때문. 이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반응은, “제3권까지 한번 가봐라”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본론}에서 제시된 이론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최소한의 규정에서 출발해서 점차 복잡하고 구체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해 가치와 가격의 괴리 문제는 계속해서 구체적 규정들이 덧붙여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기각은 마르크스의 가치개념/규정을 제1권 제1장 수준, 즉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채로 이뤄진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이 기각의 근거로 삼는 현상들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그렇다면 가치이론의 기각이 왜 포드주의 시대(=노동과 자본 간의 “협약”에 기초해 종전보다 현저히 높은 임금수준이 실현된 시대)에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난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2. 비물질성의 지위.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비물질노동을 노동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비물질성은 노동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이제까지 가치이론에서는 그런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 밝혔듯 가치이론은 단순/추상에서 복잡/구체로 나아가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물질성 문제도 논의의 어떤 단계들에서 차차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계기를 줬다는 점에서 인지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노동의 비물질성, 나아가 그러한 비물질성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노동유형들을 가치이론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예컨대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의 노동과 전통적으로 상정되는 이미지를 가진 노동, 이를테면 볼트와 너트를 맞춰 조이는 기계공의 노동을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전자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함(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 병치/비교는 마르크스의 방법과 배치된다. 즉 특정 노동들의 병치/비교보다는 “역사적 형성”을 보는 것이 더 유의미한 파악법이다.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을 기계공과 대비시키면 누구라도 그 “인지적 아우라”에 취하기 쉽겠지만, 역사적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기계공의 모습에 가깝다(즉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 이로부터 제기되는 이론적 문제는, 특히 현대자본주의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과학기술노동의 그와 같은 역사적 형성—즉 자본주의화—이 현대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기존 이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4.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측정” 자체에 대해. 인지자본주의론은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 때문에 상품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평균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함을 근거로 가치이론의 기반이 사라졌다고 본다. 두 측면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1) 마르크스 자신도 오늘날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측정의 어려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동일’을 다루는 {자본론} 제8장(불어/영어판 제10장)을 보면, 정해진 노동시간을 야금야금 늘리려는 자본가들의 작태들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를 마르크스는 “분 뜯어내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작태들은 한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이 얼마인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신이 방금 전에(=즉 제1장에서) 내놓은 “직접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 명제를 철회하는 근거로 삼지 않았는데, 이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상상하듯 그러한 행태들이 마르크스 시대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제로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게 “노동일” 장에서 마르크스의 요지다), 자신의 가치이론의 체계상(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개방성’을 떠올릴 것!) 그것은 고려되더라도 뒤에 가서야 고려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초과착취”가 매우 일반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자본론} 제1권(부터 제3권까지)에서는 “정상착취”만 전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

(2) 측정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특히 기술적 사정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노동일”이라는 표현 하나만 봐도 금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이를 “하루 동안의 노동시간”이라는 의미로 쓰지만, 원래 노동일(working day)이란 노동하는 날, 그러니까 “휴일”의 반대말이었다(참조). 즉 노동의 단위가 “하루”였던 시대로부터 “시간”으로 바뀌어가는 사정을 “노동일”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반영하는 것인데,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술적 뒷받침 없이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노동일”이 아니라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하려면 실제로 그것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손목시계의 광범위한 생산을 전제한다(물론 “(자동장치로서의) 시계”의 출현의 의의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측정 이상이지만).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시간”이 19세기의 시계, 또는 시간관념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의 정밀화된 시계, 시간관념으로는 측정 가능하고, 또 끊임없이 측정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인지자본주의론은 직접적인 노동시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류작용들도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측정 불가능성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오늘날 예컨대 블로그를 통한 광고가 상품가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마르크스가 그것을 몰랐을까? 그가 살았던 중기 빅토리아 시대는 그야말로 “유행과 평판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런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의 미완결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상품의 평판을 측정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구글 애드센스의 등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평판이 주되게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드디어 “평판”이라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등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말하자면 “평판의 정치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은 “측정”이 갖는 이러한 가변적인 성격 때문에 De Angelis and Harvie는 “측정이란 정치적 범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측정 문제의 본질은,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상이한 노동들이 끊임없이 비교되고 또 그럼으로써 동등화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사실 아담 스미스나 헤겔,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주목했던 근대사회의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5. 맺음말. 나의 글이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론이 기존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노동시간의 ‘측정 불가능성’을 주요 근거 중 하나로 해서 세워져있는 만큼, 이상의 비판이 인지자본주의론에 일정한 타격은 가하리라 본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가치이론적으로 좀 더 유의미한 방식으로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개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끝)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제목]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실린 곳]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년 봄) (링크)

드디어 저널이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편집자를 좀 많이 괴롭혀서 그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글을 보기좋게 뽑아주어 정말 고맙다. 다음은 위 글의 한글초록이다.

이 글은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가치이론 비판을 검토함으로써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를 가치이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흡수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의 가치이론 이해가 단순함을 들어 가치이론을 소극적으로 방어한 다음, 좀 더 적극적으로 가치이론이 그들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지를 논하겠다. 여기서 핵심 주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비물질노동’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노동은 그 역사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에만 가치이론적으로 유의미하게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측정’ 또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미결정된 채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능-불가능의 차원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요 용어] 인지자본주의, 비물질노동, 가치이론, 가치법칙, 역사적 형성, 측정.

마음 같아서는 원문을 여기에 올려놓고 싶지만, ‘도의상’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암튼, 위 글과 함께 이번 저널에 실린 다른 논문들(이번호는 ‘인지자본주의론의 쟁점’이라는 특집으로 꾸며졌다)을 통해 논의가 한층 고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고고씽! ㅋ

(참고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이번호엔 H님의 글도 함께 실려있다.)

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이번호는 상당히 기념비적인 성격을 갖는다. 물론 이런 성격이 당장부터 두드러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왜 그러냐?! 특집을 채운 논자들의 면면을 보면 금새 그 까닭이 드러난다. 일반논문이나 서평 외에, ‘특집’ 꼭지에 총6개의 논문이 실려있고, 조정환 자신의 논문을 빼면 모두 다섯 명의 논자가 인지자본주의론을 비평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다섯 명 중에서 자그마치 세 명(나와 H님을 포함해)이, 그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연구자라는 거다!

적어도 지난 20년 정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연구동향을 떠올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연구분야 정도만 빼면, 내 생각엔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연구가 대개 이렇다. 한마디로 말해, 그간 이 동네는 대가 끊겨있었던 셈인데… 이번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언뜻 생각하기론 약15년만에 거의 처음으로 ‘우리 여기 살아있다고!’라고, 그것도 ‘집단적으로’ 외친 것이다!!

물론 그간에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몇몇 개인의 산발적인 연구였고(나 자신도 좀 뒤늦게 합류하긴 했지만 그 중 하나였다), 그렇다 보니 그런 연구들이 어떤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아니, ‘바람’을 일으키기는커녕 기존의 선배 연구자들의 정당한 주목 내지는 건전한 개입을 받지 못한 채 잊혔던 게 아니었나 싶다(물론 어느정도는 ‘함량미달’이어서도 그랬겠지만ㅋ).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특집호에서 ‘젊은’ 연구자 셋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정환 선생께서도 지금까지처럼 무슨 ‘선지자’처럼 굴지 마시고 이번엔 비판에 귀 좀 기울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가 이제껏 상대해야 했던 ‘논적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와 ‘구원'(舊怨)도 없고, (그가 맨날 욕하는) ‘스탈린주의’도 모른다. ‘낡은’ 틀로, 거기에 잘 들어맞지도 않는 우리를 재단하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구린내 풍기는 ‘꼰대’일 뿐이다(실은 이미 어느정도는 그러고 있다).

암튼, 기분 좋다. ㅎㅎ

[201112] 나꼼수와 마르크스

차로 오가며 가끔씩 나꼼수 듣는 게 낙이었다. 나는 그다지 열혈 청취자는 아니었지만(4-5편 들었나?), 정봉주 전의원이 잡혀가게 생겼다니 기분이 그다지 좋진 않다. 뭐 누구는 고소해 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요새 나꼼수 까는 것도 이쪽(?) 바닥에선 유행인 모양인데… 나는 깐 건 절대 아니고ㅎㅎ… 그냥 그걸 소재삼아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해 난잡한) 짤막한 글을 하나 써봤다. 고려대학교 교지 “고대문화” 겨울호에 실렸다. (따라서 예상독자는 대학 1~2학년생?) “나꼼수”와 “마르크스”를 대놓고 함께 다룬 첫 번째 글이 아닐까 한다 ㅋㅋㅋㅋ

 

나꼼수와 마르크스: 우리의 ‘가치이론’은 당신의 ‘말빨’보다 강하다

0. 도입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연일 신문과 뉴스포탈사이트의 헤드라인을 현란하게 장식하는 경제위기에 관한 각종 지표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지구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다양한 불만들. 또한 이와 같은 세계적인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가카’의 온갖 ‘꼼수’들과 그 반대편에서 터져나오는 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 청년실업 해결에의 요구.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식으로 귀결되느냐에 따라 오늘 한국의 청년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이 상당 정도로 결정될 것임엔 분명하지만, 대체 이런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관두고라도—에 대해선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이해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른 한편, ‘이해’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19세기 유럽의 사상가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물적 힘(material force)에 주목할 수도 있는가 하면, 요새 온/오프라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를 통해 널리 퍼지고 있는 방식, 즉 ‘모든 것은 가카의 꼼수다’라는 식으로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1. ‘나꼼수’ 식 현실 인식

‘나꼼수’를 만드는 4인방의 실제 생각도 그렇게 단순하진 않겠지만, 그들에 의해 유포되는 ‘모든 것은 가카의 꼼수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프레임이 오늘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얼마전 보궐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일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가 지금과 같이 대규모로 그리고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에서, ‘나꼼수’와 같은 매체가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인식의 한계는 매우 명확하다.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의 세금으로…’, ‘회사를 개인의 재산증식수단으로 사용하다니…’ 등이 ‘나꼼수’ 식 분노의 대표적인 형태인데, 이에 따르면 우리는 일단 대통령을 갈아치워야 한다. ‘나꼼수’의 대표격인 김어준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마따나 ‘지도자의 품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에서 그런 품격 있는 지도자로 거론되고, 또한 ‘나꼼수’를 통해 공공연히 홍보되는 인물은 잘 알다시피 조국, 문재인, 안철수 등이다. 그러나 ‘나꼼수’는 대통령이 저런 인물들로 바뀌면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저런 인물들은 ‘비전’과 ‘도덕성’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할 뿐이고, 우리는 그저 만약 저들이 대통령이 된다면 ‘BBK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대체로 BBK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즉 BBK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좋아졌을지에 대해선 도통 오리무중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범지구적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이 겪는 특수한 어려움을 암시하며 국민의 동참을 호소한 김대중이 차라리 솔직했을 뿐 아니라 정확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대중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어쩌면 다음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그러나 ‘어떤’ 정권으로?)를 이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폭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민중의 분노를 해석하는 문제, 이런 사태가 앞으로 어떤 국면들을 맞을 것인지를 예측하는 문제, 현재의 투쟁들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끌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 요컨대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와 사회를 어떻게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끌고 통제할 것이냐의 문제는 ‘나꼼수’가 제안하는 방식보다는 훨씬 복잡한 사고와 세심한 실천을 요한다. 부언하자면, 현재의 사태를 대중의 ‘분노’라는 감수성 또는 막연한 ‘정의 관념’의 문제로, 또는 ‘부도덕한 지도자’의 문제로 묶어두는 것은 사실 저 기득권 층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의 ‘점령하라!’ 운동이 국내의 보수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방식을 보라. 그것은 ‘부도덕하고 뻔뻔스런 몇몇 금융회사 CEO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라는 식으로 종종 채색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부도덕한 지도자’로 치면 ‘가카’도 울고 갈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가 존경받는 학자 출신인 마리오 몬티(Mario Monti)로 바뀌긴 했지만, 몬티 또한 현재 글로벌 위기의 가장 큰 주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골드만 삭스 출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순히 인물을 잘못 뽑은 것이 아니라, 현재 위기의 성격을, 즉 특정인의 능력이나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심원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Pg-12-eurozone-graphic

“골드만 삭스의 유럽 점령도”?
(위 그림이 곁들여 나온 The Independent 기사도 읽어볼 만하다.)

요컨대,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분노의 근원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분노를 일으킨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분노를 갖게 만드는 현실의 핵심적인 물적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캐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꼼수’와 같은 문제제기의 역할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보다 한걸음 더 내딛여야 하는 까닭이다.

2. 마르크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기가 총체적이고 범지구적 성격을 가짐을 이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를 덮치고 있는 작금의 혼란은 범지구적 맥락 안에서 보지 않으면 해결을 구하는 것은 물론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이 범지구적 혼란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지난 1970년대부터만 따지더라도 여러 번의 공황과 위기를 겪어왔지만, 이제까지 그것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2008년 이후 일련의 사태는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미국의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고 있는 일련의 ‘점령하라(occupy)!’ 운동, 영국이나 칠레 등지에서의 거국적 등록금 투쟁, 그리스의 총파업,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의 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라. 현재 대중의 불만은 단순히 몇몇 금융기관들의 방만한 경영과 비도덕성이 아니라 경제의 작동과 운영 전반을 겨냥해 제기되고 있고, 나아가 그냥 경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재생산과 관련하여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사회가, 그리고 그 물적 기반으로서의 경제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재생산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비록 지금은 상업광고의 문구 정도로 추락했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오늘날 세계를 ‘자본주의’라는 용어로써 묘사하곤 한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란 한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이 이뤄지는 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우리가 현대사회를 자본주의로 파악한다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인격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구별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이라는 영역에서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이 관계가 경제적 재생산의 다른 영역들(교환, 분배, 소비)에서, 나아가 사회적 재생산 전체에서 재현되는 역사특수적인 방식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사실 위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담 스미스를 중심으로 한 고전정치경제학(classical political economy)의 주된 과업이었지만, 그것이 가장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다뤄진 것은 마르크스의 미완성 주저 {자본론}에서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물질적 부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가치’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모든 상품의 가치는 거기 들어있는 노동시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은 특수하게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고용계약에 기반해 이뤄지기 때문에, 가치의 실제적인 생산자인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내어줄 수밖에 없고, 자본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가 노동자로부터 받아낸 잉여가치의 일부를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여한 사회의 각 계급들(잉여화폐소유자, 토지소유자 등)에게 분배해 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 증가의 의미, 선진 국민경제의 해외로의 팽창, 경제의 전체적인 순환, 생산부문들 간의 경쟁, 생산에서 금융과 상업의 역할, 자본주의 경제에서 구시대의 잔재이기도 한 지대의 특수한 존재형태 등을 전체 경제의 운동과 관련해 다룬다.

사실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내놓은 이론은 기존의 고전정치경제학의 완성이자 세련화라고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실은 그것만 가지고도 커다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기여는, 위에서 간단히 묘사한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메커니즘이 모순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적시했다는 데 있다. 즉 자본주의는 서로 반대되는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들—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그리고 그런 대립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화해’에 기초해 있으므로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발전하는 체계이며, 이 모순은 공황과 위기를 통해 일시적으로 해소되기도 하지만 곧 전보다 크고 복잡한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과거엔 옳았을지 몰라도 더 이상 오늘날의 사회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의 특유의 방법론을 오해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현대사회의 물적 재생산의 가장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점점 구체적인 규정들을 덧붙임으로써 현실감을 더하는 구조를 취한다. 즉 그가 {자본론} 제1권에서 내놓은 상품의 가치결정이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관계 등에 관한 논의는 바로 그런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 곧장 적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컨대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지만, 우리가 현실의 임금을 실제로 다루기 위해선 그것을 규정하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한편으론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좀 더 구체적인 범주들을 도입하는 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하는 각종 역사적인 특수형태들을 도입하는 데 열려있다고 평가하는 게, 그리고 그런 열린 공간을 채워넣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인정하는 게 마땅하다.

사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렸다거나 낡았다기보다는) 미완성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는 위와 같은 방법론에 입각해 세 권짜리 저작 {자본론}에서 자신의 이론을 어느 정도 밀어붙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런 작업을 오늘날 경제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충분히 수행하진 못했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은 오늘날 경제의 핵심적인 동인으로 떠오른 금융이라는 문제, 20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국가의 경제적 기능, 제국주의, 국제적 착취, 세계화 등의 용어들로 논의되곤 했던 자본주의 경제의 범지구적 측면 등을 충분히 다루는 데 부족함이 있으며, 특히 198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진전되고 있는 이른바 ‘지식기반사회’ 또는 ‘인지자본주의’를 다루는 데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한계는 마르크스의 가치이론(value theory) 안에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한계이지, 최근 국내에서 일정한 주목을 끌기도 했던 {인지자본주의}의 저자가 주장하듯이 기존 이론의 폐기를 요구하는 한계가 아니다.

3. 가능한 대안들?

이 자리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론(가치이론)의 현대적 발전방향 또는 동향에 대해 자세히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가 제안하는 것과 같은 정치경제학적 방식으로 현대의 경제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현재와 같은 위기국면에서 ‘대안’으로 고려되고 있는 것들이 갖는 의도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기만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금융의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08년 이후 세계경제에 불어닥친 위기가 금융적인 속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수많은 비난들이 보통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조차 없는 복잡한 금융적 수단들의 무분별한 증식에 돌려지곤 한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국제적 자본이동을 규제하는 토빈(Tobin)세 도입 등을 통해 금융을 규제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투기적 금융자본은 ‘일부 투기세력’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그것은 특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지난 30년 사이에 경제와 우리의 사회적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예컨대 2000년대 초중반 한국사회를 괴롭혔던 ‘신용카드 대란’은 그저 ‘대란’일 뿐인 게 아니라 신용카드로 대표되는 ‘신용’이라는 도구가 이제는 개개인들의 삶에 깊숙하게 뿌리내렸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신용’이나 ‘금융’에 대해 (한편으로는 인위적인 규제책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전보다는 더 정교한 시각을 가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위의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탐욕성을 비판하면서 대안적 가치들, 예컨대 생태적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그간 ‘가치(관)‘으로서 다뤄졌던 생태라는 문제가 최근들어서는 그간 이를 무시해왔던 자본에 의해 점차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하나의 ‘산업’으로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으로서의 생태는 예컨대 자동차 만드는 회사에 방해가 될 뿐이지만, 산업적인 관점에서 고려되었을 때 그것은 ‘전기차’라는 새로운 ‘시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반전은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목격되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산업분야들을 창출하고 있다. 건축물에 대한 생태친화적인 새로운 환경기준이 확립된다고 해 보자. 이런 일이 국지적으로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런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인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걸림돌이 되겠지만, 만약 그것이 전지구적으로 확립된다면 그것은 자본 전체에겐 마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를 새로 건설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경제의 조직형태, 재생산 메커니즘을 관할하는 물적 힘이라는 것은 결코 ‘가치(관)’의 문제가 아님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향후 발전모델로서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에 의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옹호되고 있는 복지국가를 보자. 많은 경우에, 즉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저출산 등의 문제에서 ‘복지’는 소득이 충분치 못한 계층에 대한 시혜라는 차원에서 주로 접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의 ‘선진국’들의 경험에서 보듯이 복지국가의 핵심은 못사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베푸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단도직접적으로 말하면, 개별 개인이나 가계에 무질서하게 맡겨져 있던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국가가 나서서 공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거대한 사회적 프로젝트다. 몇몇 서유럽 나라들에서와 같이 이것이 만약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그 나라의 이른바 ‘국민적 생산성’은 (아이들에게 집에서 각자 밥차려주는 것보다 한 곳에 모아 한꺼번에 먹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므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참고로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종전엔 주부의 가사노동 등에 의해 비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던 활동들이 경제적 영역 안으로 편입되면서 자본에게는 엄청난 시장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복지국가 도입을 꺼리는 것은 과거엔 개개인들이 사적으로 부담하던 비용들을 복지국가 하에선 자신이 거두는 잉여가치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지출(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와 같은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적 의미—이는 단순히 돈이 얼마나 들 것이냐 하는 예산책정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은 채, 그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에 기대 복지국가를 미래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4. 맺음말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번 공황과 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커다란 재편을 낳지 않고서는 해소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재편 이후의 모습은 민중들의 저항이 어느 정도일 것이냐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민중들의 다양한 외침들은 한편으론 앞서 말한 현재 위기의 총체성과 범지구성의 표현이기만 한 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론 현재 위기의 총체성과 범지구성을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은, 지금 뒷짐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이 투쟁은, ‘금융의 횡포’나 (‘나꼼수’가 재기발랄하게 제기하는 것과 같은) ‘가카의 꼼수’에 대한 투쟁이어도 좋고, ‘복지국가’나 ‘생태적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이어도 좋다.

그러나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재 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었을 때—그러니까 ‘혁명’이 나지 않는다면 말이다—우리는, 지금보다는 좀 더 질서는 잡혔을지언정 결코 금융의 힘이 전만 못하진 않은 세상, 자본이 생태적 가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기야 하겠지만 유기농음식, 환경친화적 건물, 전기자동차 등의 형태로 생태를 자신의 가치영역 안에 길들여놓을 세상, 복지국가는 되었으되 민중의 고통은 여전한 세상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런 세상에 대응하는 이론적 무기로서 마르크스는 ‘가카’만 물러나면 자진해산하겠다는 ‘나꼼수’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마르크스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201110] 경제학, ‘제국적’ 학문?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글을 하나 썼다. 제목은 위와 같다. “시대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기획에서 한꼭지를 차지하는 글이다.

할당된 분량에 맞게 글을 쓰는 것도 기술인데… 아직 그런 데까진 멀었나보다. 줄이느라 혼났다. 덕분에 좀 설명이 조금 불충분한 곳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사람 이름 같은 것은 가급적 원어표현을 함께 써두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중간중간에 소제목도 넣었지만 결국 뺄 수밖에 없었다. 고육지책. 절대로 이것은 {대학원신문}의 잘못이 아니다. 다 내가 모자란 때문이다.

출판본은 맨앞에 링크를 해두기도 했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곳에 초고와 출판본을 참조해 글을 좀 더 가다듬어 올려둔다. 사실은 제목도 “경제학의 ‘원리’엔 ‘경제학’이 없다”였는데, 위와 같이 바뀌었다.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것도 나 스스로 고려했던 것이기도 하고.

경제학의 ‘원리’엔 ‘경제학’이 없다

하버드 경제학자 맨큐(N.G. Mankiw)의 {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Economics)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잘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로, 1997년 이래 지금까지 다섯 번의 개정을 거치며 경제학 교육의 표준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저자가 제목에 ‘원리’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리카도(D. Ricardo), 밀(J.S. Mill), 마샬(A. Marshall)을 관통하는, 물리학의 뉴턴(I. Newton)에 필적하는‘권위’의 상징—그의 {프린키피아}를 떠올리라—이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그 어떠한 주요한 교과서 저자도 쓰기를 주저했던 일종의 ‘금기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맨큐의 ‘오만함’을 꼬집을 필요는 없다. 그가 위 책에서 내놓은 ‘경제학의 열 가지 기본 원리’는 이제 크리스트교의‘십계명’과 같은 권위로 자리를 잡아, 경제학의 신봉자든 비판자든 누구라도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위 책의 한글판 제목 {맨큐의 경제학}은 이런 의의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

경제학의 ‘원리’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도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맨큐의‘원리’는 그의 선배들이 내놓았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리카도나 밀에게 가장 중요한 원리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물질적 부, 즉 가치(value)의 본질/크기 및 생산/분배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경제학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두루 참조해야 했다.

반면 그런 원리들은 맨큐의 십계명엔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대체로 ‘모든 선택엔 대가가 따른다’, ‘교환은 교환당사자들을 이롭게 한다’ 따위의 인간의 사고와 행동 일반에 관한 매우 추상적인 성격의 명제들로 채워져 있다. 과연 이런 것들을 ‘경제학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우리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하다못해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니, 까놓고 말해, 대체 경제학은 무엇인가?

현재 이런 질문들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는 표제 아래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현실의 제국주의와 같이 경제학이 여타 사회과학의 고유영역들을 침범하고 나아가 자신의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경제학은 그 영역을 넓혀나갈 뿐 아니라 사회과학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국’ 건설을 꾀한다.

경제학: ‘제국적’ 학문?

경제학이 처음부터 제국주의적이진 않았다. 원래 그것은 사회의 특정한 성격의 문제들에 집중했다. 그것의 궁극적인 관심은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을 밝히고, 나아가 ‘정치가나 입법자’에게 통치와 관련된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A. Smith, {국부론} 참조). 훌륭한 경제학사가이기도 했던 마르크스(K. Marx)가 근대적인 과학적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았던 페티(W. Petty) 이래 로크(J. Locke), 흄(D. Hume), 스미스, 리카도, 밀 등은 모두 이런 의미에서의 ‘경제학’(political economy)을 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어? 로크가 경제학자야?’라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를 ‘경제학자’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가는 생각해볼 문제겠지만, 그가 꽤 심각한 경제학적 저작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만약 이들 중 몇몇이 경제학자보다는 역사가나 철학자 또는 포괄적 의미의 사상가라는 자격으로 우리에게 더 알려져 있다면, 이는 경제학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경제학은 사회의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면서도, 자신의 대상인 근대 자본주의 경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그것의 역사와 지리적 불균등 발전에 관한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조했고 온갖 사회적 결정인자들을 고려했다. 그러나 경제학이 당시 막 태동하던 여러 사회과학들의 성과를 존중심을 가지고 참조하기는 했어도 다른 사회과학들의 고유영역을 침해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사태를 반전시켜 경제학이 제국주의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일정한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변화의 추이를 최근 파인과 밀로나키스는 그들의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괴짜경제학으로}(B. Fine and D. Milonakis, From Economics Imperialism to Freakonomics, 2009)에서 ‘축소에서 팽창으로’(from reductionism to expansionism)라는 모토로 적절히 요약한 바 있다.

‘축소에서 팽창으로’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경제학이 다룰 문제도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선 경제학을 연역적 방법론과 현실의 추상을 통한 모형화에 입각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시키려는 시도도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경제학이 기존의 역사적/사회적 관심을 점차 내려놓는 방향으로 발달한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웠으며, 이런 움직임은 1870년대 ‘한계혁명’(marginal revolution)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제 사회적 생산과 분배에 상이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인간집단들을 칭했던 ‘계급’은 ‘최적화하는 개인’(the optimising individual)으로 대체되고, 여러 역사적/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복잡하게 규정된다고 여겨졌던 ‘경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상반되는 힘으로 구성되는 시장’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런 재편과정은 많은 반대와 유보조항들을 낳기도 했지만, 마침내 1930년대에 이르면 하이에크(F.A. Hayek)의 런던정경대(LSE) 동료 로빈스(L. Robbins)는 “경제학이란 인간행동을 목적과 다양한 용처가 있는 희소한 수단 사이의 관계로서 연구하는 학문이다”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정의 아래, 이제 경제학의 고전적인 주제들은 ‘경제사’, ‘경제철학’, ‘방법론’, ‘산업경제학’ 등의 이름을 갖는 여러 응용분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일단 경제학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리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정의된 이상, 그 응용분야가 경제학의 전통적 영역에 한정될 필요는 없었다. 즉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을 최소한도로 축소시키는 노력으로부터 ‘팽창주의’의 싹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팽창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인물이 베커(G. Becker)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선택’이 있는 곳엔 늘 ‘경제학’이 있으며, 일상의 그 어떤 사소한 행위들도 ‘경제학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경제학의 본령이라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폐허를 걷어내고

결국 맨큐의 십계명은 이와 같은 경제학의 변천사의 산물이다. 그것이 일러주는 대로 만약 경제학이 ‘선택’과 ‘교환’에 관한 학문이라면, 과연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이슈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인간들이 창출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선택’과 ‘교환’의 문제로 환원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사회적 삶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경제학이 사회과학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회과학을, 우리가 사회과학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 실질적 내용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하게도 경제학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며, 맨큐의 원리들은 그 파괴상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범지구적 경제위기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경제학이 무능한 근원적인 이유다. [사족: 맨큐의 원리, 좀 더 일반적으로는 오늘날의 경제학을 비판할 때, 그것이 가정하는 ‘경제인homo economicus’, ‘합리성rationality‘ 등을 주된 과녁으로 삼곤 한다. 즉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은 그것이 비판하는 경제학만큼이나 자폐적이고 회의적으로 흐르거나(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 또는 그 반대의 극단 즉 지나친 낙관주의 내지는 주의주의로 흐르기 쉽다(인간은 생각보다 이타적이니 인간을 너무 얕보지 말자?). 진화/행동/신경/정보 등등이 붙은 다양한 ‘경제학들’이 그러하다. 하여간 이 얘긴 나중에 따로 한번 ‘제대로’ 해야 한다..]

요새 위와 같은 경제학의 무능 때문에, 나아가 그런 무능에도 불구하고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경제학의 뻔뻔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특히 학계에서조차도 反경제학적인 분위기가 크게 번지고 있는 것 같다. 경제학의 그간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생각하면 이러한 ‘주변부’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제국주의적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중심부의 노동자/민중과의 옹골찬 연대’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게 곧장 드러난다.

다시 말해, 현재 여러 사회과학 영역들에서 경제학의 파괴적인 영향들을 걷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학이 제 구실을 하도록 비판하고 독려하는 일도 긴요하단 얘기다. 즉 경제학은 그것이 응당 품어야 할 ‘진정한’ 원리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끝)

[200711] 세계시장

제목: 세계시장 (링크)

출처: 김수행.신정완 엮음,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355-91쪽.

지금으로부터 4년도 더 전에 쓴 글이다. 당시의—그리고 상당부분은 지금도 유효한—나의 문제의식을 종합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나 나름대로는 꽤 흥분해 가면서 쓴 글이었는데, 막상 주변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코멘트를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웹에 공개하면 좀 달라지려나? 모르겠다 ㅎㅎ

책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 같아 조금 늦긴 했지만 이렇게 공개한다.

 

[201012]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제목]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 새로 완역 출판된 <자본> 서평을 겸하여
[출처]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7권 제4호 (2010년 겨울호)
[원문] 여기를 누르면 연결됩니다!

위와 같은 글을 얼마전 써서 저널에 냈다. 참고로 위 논문이 실린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최근호는 ‘신MEGA 출판의 역사와 의의’라는 주제의 특집으로 꾸며졌다. 내 글도 그 특집의 일환으로 마르크스문헌학(Marxology)에서는 국내 유일의 학자라 할 수 있는 정문길 선생과 MEGA 편집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 일본의 오무라 이즈미 교수의 글과 함께 실려있고.

내 글의 <초록>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이 최근 우리말로 새롭게 완역 출판된 것을 계기로 Das Kapital의 성격 및 그것의 번역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들을 고찰한다. 또한 이는 이 새로운 『자본』(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10)의 서평을 겸한다. 옮긴이에따르면 이번 판본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그것이 ‘원전 번역’이라는 것인데, 실제번역과 관련된 주요한 사항들을 살펴본 뒤 이 글은 이번 판본에서 ‘원전 번역’의묘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살아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이번 길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하는 옮긴이 자신의 ‘해제’를 검토한 뒤, 그것이 독자들의 『자본』이해를 돕기보다는 어떤 점에서는 심각하게방해함을 보일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번역 대본의 선택은 적절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본』에서 ‘원전’ 또는 ‘정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을 것이다. 이를 통해우리는,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 대한 연구의 최근 성과들로 미뤄봤을 때 Das Kapital을 이해하는 방식이 ― 그 ‘해석’의 다양성과는 별도로 ― 복합적으로 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이 블로그를 통해 공개했던 기존의 글들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글을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 제1권이 나온) 2008년 상반기에 썼으니, 말하자면 위 논문은 약 2년 반 동안의 잉태기를 거친 셈이다. 그러나 제2-3권의 번역본이 나온 것이 작년 9월 초였고, 당시 내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서, 정작 논문을 쓰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몇 가지 세부적인 부분에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런 불만사항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 글을 쓰면서는 MEGA를 참조하질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 글에서 MEGA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개선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내 글과 거의 동시에 위 『자본』의 서평이 다른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황해문화》 2010년 겨울호에 실린 이재현 선생의 <자본가의 머리로 던져진 솜방망이>가 그것이다(링크).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글은 이번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이 비판은 나의 비판과는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몇 가지 배울 수 있기도 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