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2. commentaries_참견

My commentaries on others’ writings, etc.
타인의 글 따위에 대한 내 나름의 코멘트.

논쟁의 기본 전제: 이윤율의 경우

김성구 교수께서 <참세상>에 글을 쓰셨다. 매우 당연한 얘긴데…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아, 상식을 피터지게 설명해줘야 하는 세상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링크: 자본 물신성에 사로잡힌 이윤율 실증분석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 김성구 교수가 불쌍할 정도. 하지만 선생님이라도 이리 해주셔야 후학들이 앞으로 나아가죠… ^^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에서는 이윤율 공식에서 나타나는 양적 관계뿐 아니라, 그 공식을 통해 착취의 본질적 관계가 왜곡된다는 질적인 문제지적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윤(율)이라는 게 총유통과정에서의 잉여가치(율)의 전화된 형태인데도, 이윤(율)이라는 개념에서 이윤(율)은 가변자본 즉 착취로부터 생산된 것이 아니라 총자본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자본물신성이 지배한다.”

최근 류동민 교수가 피케티의 자본수익률 개념이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이랑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위 사항을 무시한 처사임.

마찬가지 논리로… 이윤율을 자본가가 생각하는 이윤율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말도 안 됨. 왜? 마르크스가 경제학 비판을 한 까닭은.. 기존의 경제학이 바로 그러한 “자본가의 의식”에 투영된 형태로 경제현상을 분석했기 때문. 문제는 저들의 의식 배후에서, 그러나 그 의식과 정반대로 작동하는 물적 흐름을 보는 것이죠.

끝으로…

“이들에 대한 내 비판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연구에서 그나마 이런 실증분석도 없는 게 문제라 할 게 아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혼동을 주는 분석은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은 것이다. 그래서 폴리와 뒤메닐, 브레너 등의 문헌을 번역해서 소개하는 연구자들이 이제 이들을 따라 자본주의의 역사와 동학을 왜곡하는 작업은 청산하는 게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자, 여기까지 기본으로 깔고…

이제부터 김성구 교수와 싸웁시다…!

박근혜와 최경환의 2중창: “아무 것도 하지 않으리”

전성인 교수 글 괜찮으네. (링크)

재밌는 것은.. 현 정부가 갑자기 난데없이 “재정적자”를 들고 나온다는 것.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적극적인 복지정책에 반대(=재정긴축)했던 자들이 아닌가? 링크된 전성인 교수의 글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변화의 의미를 밝히지 않은 것.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입장이 바뀐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최경환이나 박근혜가 최근에 쏟아내고 있는 말은, 실제로 재정적자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분탕질”을 다른 방식으로 하겠다는 뜻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 전에는 증세에 대한 상반되는 이해관계(증세는 복지 위해 필요하다 vs 증세는 경제성장에 해롭다)를 부각시켜놓음으로써 증세론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재정건전성 수호를 명목으로 적극적 복지정책을 봉쇄했다.
  • 지금은 선택적으로 (사실상의) 증세를 하겠다고 질러놓고(담뱃세 통한 서민증세, 연금공격 통한 하급 공무원 증세), 그럼으로써 재정에 대한 불안을 한껏 고조시킨 다음, 오히려 “적자재정을 하겠다”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현재 최경환의 “재정적자” 드립은… 정책이 아니라 협박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 야당의 본령은 “반대”이니까네… “안 된다. 재정건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하겠는가? 이거슨 그냥… 완전 맛탱이 간 소리지… 복지정책, 정부의 적극적 고용정책… 이런거 하지 말자는 소리지.
  • “그래, 재정적자 하자!” 이러겠는가? 이렇게 하는 순간, “서민증세” 인정하는 셈이겠지? 그냥 재정적자 하는것보단 이미 제안돼 있는 약간의 서민증세라도 하면서 재정적자 하는 게 재정건전성에 도움이 될테니? ㅎㅎ

결론은? 정부와 여당은 “네, 지금까지 그랬듯 아무 것도 안 하겠습니다”이고, 야당은 “네, 지금까지 그랬듯 걍 호구 하겠습니다”다.

(사족: 야당이 호구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전에 여당에서 “재정건전성” 들고 나올때,  “적자재정론”으로 적극적으로 압박했다면 지금과 같이 여당이 “적자재정” 수사를 동원하는 기막힌 일은 없었을 거라는 거다.. 당시 야당은, “재정건전성”을 모토로 내세우는 정부/여당에 대해, 말로만 그러지 말고 진정한 재정건전성을 지켜라,라는 식으로 다그치곤 했다… 미친거지… 그래서 현재의 야당이 호구인 거다..)

(이런 글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짤이 붙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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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말씀과 피케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가난한 이들을 위한 불평등론

1. 교황이 방한중에 우리나라 주교단에게 했다는 연설의 일부가 누락된 채 번역-배포되었다고 한다(링크).

빠졌다는 단락을 읽어보니, 참으로 감동적이다. 과연 핵심 중의 핵심을 빼먹은 것 같다. 교황의 이 말씀은, (내가 지금은 성당엘 안 나가지만) 여린시절에 성당에서 맨날 듣던 얘기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중산계급(middle-class)이나 부유층(well-to-do)을 위한 것이 되어선 안 된다. 늘 아래로 향해야 한다..” 뭐 이런 내용.

그런데 이를 요즘 경제학계의 수퍼스타로 떠오른 피케티(Thomas Piketty)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피케티야 말로 그간 마르크스주의의 자장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론”이었던 불평등 논의들을 “중산계급이나 부유층을 위한 것”으로 뒤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2. 도대체 1%에게 징벌 수준의 세금을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피케티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이 거두는 천문적인 수입을 그들이 가진 (물려받은) 재산에서 얻기 때문이다. 대기업 CEO 같은 이들의 경우에도, 비록 이들의 소득이 재산보유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아니다. 이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 “Tax the rich, tax the 1 percent!”

좋은가? 아주 똑똑해 보이는 젊은 경제학자가, 그저 인생에서 패배한 폭도로만 보였던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무리들의 주장에 우아한 이론적 근거를 심어준 것도 같다. 과연 그런가?

나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

 

3. 생각해보라. 우리가 2007/08년 위기에 대하여 “1퍼센트”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랬던 까닭은 대략 이거였다: “자본주의는 이제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끝났다. 우리를 이러한 위기에 쳐넣은 주범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을 몰아내자. 그들에게 이 위기에 대한 책임을 묻고, 그들로 하여금 이 위기에 따른 비용을 내게 하자!”

피케티가 내놓는 근거랑 얼마나 다른가?! 그는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하여 부자들에게 말한다. “이봐, 우리 시스템이 심상치않아. 이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당신들이 돈 좀 내놔야 할텐데?!” 그러나 우리는 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은 너희들 때문이다. 이 시스템을 끝장내야 한다. 이에 따른 모든 비용은 너희들이 지불해야 하고, 너희들은 이 시스템의 재구축과 관리/운영에 다시는 관여해선 안 된다!”

따라서 우리들은 99%를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요구했던 것이지만, 피케티의 방식에서 득을 보는 이들은 기껏해야 모든 죄를 뒤집어쓴 1%에 뒤이은 9%—능력있는 9%! 물론 그것은 9%일 수도, 19%일 수도 있다. Whatever!—일 것이다. 즉 피케티가 말하는 “불평등”이란 “중산계급(middle-class)”, “부유층(well-to-do)”을 위한 불평등론일 뿐이다. 그는 20세기 내내 우리가 힘겹게 발전시켜온 가난한 이들을 위한, 소외된 자들을 위한 불평등 논의를 타락시켰다.

피케티의 불평등론은 “차떼고 포뗀 불평등론”이요,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고, 여당추천위원 포함된 세월호특별법” 같은 불평등론이다.

 

4. 이상의 내용이 불편한 이들도 있겠다. 그렇다면 위의 교황 말씀은 어떤가? 요즘 성당에 나가보면, 위의 교황 말씀에 불편해할 사람이 많더라. (끝)

사상의 빈곤과 소시민적 두려움: {경향신문}의 “드림 내각” 기획 비판

{경향신문}에서 이런 인기투표를 하더군. http://news.khan.co.kr/event/poll2014/

재미는 있네.. 근데 과연 이것이 현실성이 있는가? 아니, 현실성은 떠나서 이러한 “인기투표”는 어떠한 의식의 발로인가? 어떤 의의를 갖는가?

가장 먼저, 현재 내각의 결함을 장관 개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 같아 별로다. 요즘 세월호나 군대문제 등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에 “개인이 아니라 구조/시스템이 문제다”라는 깨달음이 일반화되고 있는 중인데, 경향의 이러한 기획은 그와 같은 바람직한 움직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의도되지 않은 “물타기”이고, 이로써 {경향}은 우리사회의 의식 퇴보에 결과적으로 일조하는 것이다.

둘째로, (6명의 후보선정방식의 문제는 차치하고) 이것은 결코 현재 문제로 떠오르는 청와대의 인사방식에 대한 대안이 “조금도” 될 수 없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선정된 이들이 현재 청와대에서 내놓는 진상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도 잘 모르겠다.

기사에 따르면 “진보와 보수 진영의 단체·학자·전문가들로부터 후보를 추천받아 최종 6명씩으로 압축했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전문가”가 선정한 “괜찮은 후보들”을 대상으로 “비전문가”인 일반시민들이 투표를 한다? 결국 능력과는 상관없이 명망가를 뽑게 돼 있다. 이를테면, 통일부장관 후보 6명 중 우상호 의원이 압도적인 1위인데, 개인적으로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말이 되느냔 애기. 이런 방식이 “수첩인사”보다 나은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끝으로, 과연 이러한 “드림팀”을 논하는 것이 정치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기반한 것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란 계급적 갈등양상을, 또한 실제로 권력을 쥔 이들이 대표하는 계급이해관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다 대고 “드림팀”이라..?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는 이 인기투표의 어디에 반영되어 있는가? 언뜻 보면 “노동부장관 심상정”에 반영되어 있는듯 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미래창조과학”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것인가? 대체 정재승 교수가, 또는 거기 후보로 선정된 6명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대변하는가? 같은 맥락에서 산업통상자원부장관 후보자로 추천된 6명이 모두 (준)자본가와 그들을 대변하는 관료출신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도 지적할만하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비록 이번 “드림 내각”이 현실정치의 계급적 성격을 올바로 반영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경향신문}이 갖는 계급적 성격만큼은 통렬하게 드러내었다는 점이다. 그 계급적 성격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하면 이거다: “노동자계급은 ‘고용노동부장관 = 심상정’에 만족하고 ‘가만히 있어라’.”

결국 이번 {경향}의 내각드림팀 기획은 사상의 빈곤과 철없음, 그리고 계급적대에 대한 소시민적 두려움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의 “정신승리”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끝)

기본소득론: 그 계급적 성격 명확히 해야 현실성도 있다

강의 때문이기도하고 또 어떤 토론회에 토론자로 초청되기도 해서, 기본소득론에 대해 좀 살펴봤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가능만 하다면 한번 해볼만도 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난 이게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일시적인 사회분위기에 밀려 설사 진짜로 실행된다고 해도 지지부진하다가 그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던 차에… 이번주에 나온 주간지 {한겨레21}의 ‘1000호 기념 특대호'(2014.3.3 제1000호)에서 기본소득이 커버스토리로 다뤄지고 있는 걸 보았다. 기본소득론이 이 정도였나? 내친김에 기본소득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짚어보자.

*                        *                        *

기본소득론에 대해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배당이나 이자, 증권양도소득 등에 과세하고, 탄소세 등 환경세와 토지세를 걷으며,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무려 180조 원이 넘는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가 없다. 그리고 이 ‘어떻게?’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첫째, 가장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방식의 재원마련은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배당, 이자, 증권양도소득, 토지보유 등에 과세를 한다는 것은 곧 이 사회의 고액자산가들과 자본가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3개 상장 계열사로부터 총 1천79억원의 배당금을 2013회계연도에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링크). 그밖에 그의 자산은 한해에 3~4조 원씩 불어나니(링크), 결국 위와 같은 과세체계가 실행될 경우 그는 한해에 이래저래 1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세금으로 더 내야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이건희씨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 자본가, 전체 대자산가에 대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한 실효성 있는 실행방안이 없는 한, 기본소득론은 한 마디로 공염불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한에서, ‘기본소득은 이건희에게도 주자는 것이므로 보편적이다’라는 주장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뭐가 보편적인가? 1조 원 뜯어가고 360만 원 주는 건데..]

둘째, 위 사항은 기본소득 문제란 결국 계급이슈임을 드러내준다. 이건희씨에게 1조원을 내도록 만약 강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즉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써 강제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각종 사회세력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양념으로 필요할 것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노동자 세력이 약화돼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노동자 중심성’, ‘노자관계 중심성’이라는 말의 경제적 의미도 바로 이거다. 적-녹-보 연대, 물론 중요하지만, ‘녹’이나 ‘보’에서는 ‘돈’이 안 나온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계급이슈라는 것은, 이를 위한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 정도 함의를 준다. 즉 현재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재원마련을 다양한 세목을 신설해서 하기보다는 (근로)소득세를 더 걷어서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말이 된다는 얘기다. 물론 이를 위해선 임금인상이 선행되어야 하며, 오로지 그럴 때에만 소득세 인상이, 그리고 나아가 기본소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한겨레21}에 나온 재원마련안을 보니 기본소득론자들도 종합소득세(근로소득 포함)에 50%의 기본소득세를 부과해 27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이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임금인상을 위한 계급투쟁의 당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증세 문제를 계급이슈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기본소득론이 얼마나 현재 운동진영의 퇴행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가가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기본소득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복지국가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이 그렇다. 그들은 오로지 ‘시민의 자발성’만을 바라볼 뿐이며, 그러한 시민들이 한데모여 소리지르면 자본가들이 알아서 돈을 내줄 줄 안다.]

셋째, 현재와 같은 기본소득 재원마련안은 경제학과 세제에 대한 심대한 몰이해에 기반해 있다. 기본적으로 없던 세금이 부과되면 비용이 증가하거나 가격이 높아져, 기존과 같은 물량보다 적게 생산되거나 소비된다. 나는 이 문제를 ‘지하경제 양성화’와 관련해 풀어낸 적이 있다(링크). 요컨대, 지하경제 양성화란 이를테면 ‘현금가 임플란트’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에 따라 임플란트 가격이 모두 ‘카드가’로 되어 임플란트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러한 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지하경제 양성화의 세수효과’는 크게 과장된 거란 말씀이며, 또한 여기서도 임금인상 없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치과의사에게만 해로운 게 아니라 일반 소비자(=노동자)에게도 해로우며, 그런 의미에서 지하경제 양성화조차도 계급이슈란 말씀이다.

뿐만 아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이를테면 환경세를 대대적으로 걷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세’적인 성격의 세금을 걷어서 환경이 아닌 ‘기본소득’에 쓰겠다? 이것은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가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에 연계시키자, 나아가 국민연금 기금을 기초노령연금 재원으로 삼자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탄소세 등 환경세를 걷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점점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오고 있다. 다만 그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럴까? 다름아니라 시민들의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자본이 점점 ‘환경산업’에 관심을 보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현재의 추세가 지속돼 환경세를 실제로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이는 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우려가 그만큼 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환경보호를 명목으로 거둬들인 돈 30~40조 원을 환경보호가 아닌 다른 곳에 쓰기가 매우 어려우리란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이 가만 있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렇게 소중한 가치로 인정받고 자본도 따라서 산업재편 노력을 한다면, 환경세로 거둔 재원은 환경보호에 앞장 선 자본에 대한 ‘상금’으로 쓰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지는—즉 ‘자본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 ‘대중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는—실제 현실에서 각종 투쟁과 갈등의 결과로서만 결정될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심지어 환경세를 걷는 문제조차도 계급이슈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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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한데도, 기본소득론의 곳곳에는 그것이 계급이슈임을 애써 감추려는 의지가, 심지어 ‘계급’에 대한 적대까지도 뭍어있다. 이를테면 이들은 ‘소득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면서(그런데 이 말은 마르크스식 정치경제학의 견지에서 봐도 맞는 말이긴 하다. 소득/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비용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하거나 개인의 자아실현과 관련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증진하는 데 기본소득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임노동이 그만큼 덜 발달했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인디음악인이나 평론가, 각종 ‘예술행위’ 종사자들이 기본소득의 주된 수혜자들로 광고되지만, 실상 이들 중 상당수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선 ‘버젓한 직업인’으로 존재한다. 한국에서 그들이 먹고살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임노동화’되지 않아서이거나 자본이 그들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본이 그들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는 것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자본의 관점은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위장돼 일반 대중의 의식을 규정한다. 즉 ‘대중은 평론가란 쓸데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거다!

결국 (기본소득론과 같이 현체제를 인정하는 한) 평론가들의 사회적 유용성이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길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함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없다. 물론 그들은 이미 지금도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자본으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고 그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강제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 외에 그런 수단이 있는가? 단순히 말하면, [임금인상→잉여소득의 소비처 필요→평론 소비→평론가 고용시장 발달→평론가 임금지급 정례화]같은 식이다. 이렇게 평론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직종이 되며, 만약 이랬는데도 제대로 먹고살기 어려운 평론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기본소득(이 됐든 실업수당이 됐든)을 주면 된다. [이번 {한겨레21} 기사에서도 나타나듯, 기본소득론자들과 (보편적)복지론자들은 서로 싸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기본소득의 ‘잔여적’인 성격이 명확해지면 둘의 차이는 그야말로 별 게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기본소득도 위의 임금인상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위 연쇄의 ‘임금인상’ 자리에 ‘기본소득 지급’만 넣으면 된다. 이것은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론자들은 평론가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만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즉 평론이 임노동의 영역에 매우 불완전하게 편입되고 있는 한국에서와 같은 미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가일층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도 한다. 이를테면 이번 {한겨레21} 특집에서도, 기본소득이 ‘배짱이’만 늘릴 거라는 추측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언급한다.

실제로도 배짱이는 늘지 않았다. 2008~2009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한 가난한 마을에서 주민 930명에게 월 100나미비아달러(약 1만5천원)를 아무 조건 없이 지급했더니, 실업률이 1년 새 15%포인트 떨어졌다. (44쪽)

무엇보다 장소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후발국인 나미비아라는 것이 중요하다. 위 사례는 ‘기본소득이 배짱이를 늘리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그런데 나는 이것이 왜 기본소득론자 입장에서 ‘장점’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은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삼고있는데,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가 인정하지 않는 ‘배짱이’를 증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진전을 촉진함’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좀 더 일반적으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라는 의의도 크게 퇴색되지 않을 수 없다.

핵심은 ‘권리’다. 부양의무자, 자산 등을 심사할 필요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은, 선별적 복지에서 전면적인 보편복지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뜻한다. 또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킨다. 소득은 더 이상 노동의 대가가 아니게 된다. (44쪽)

여기서 보듯, 기본소득의 ‘대안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음미되고 있다. 노동-소득연계의 분리 문제는 위에서 다뤘으니 생략하고[앞서 평론가의 예에서 보듯, 기본소득론이 노동-소득 연계를 초월한다는 그 옹호자들의 주장은 별 근거없는 것이다], ‘무조건성’에 대해 마저 보자. 이것은 의외로 기본소득론자들이 기본소득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즐겨쓰는 근거인데, 내가 보기엔 정말 너무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 지급단계에서 ‘무심사’, ‘무조건성’은 그 이전단계에서 부양의무자 존재여부, 자산정도, 소득수준 등에 대한 면밀한 정보의 수집과 심사를 반드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건희에게도 기본소득을’, ‘이건희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을’이라는 슬로건은 오로지 ‘이건희에게서 1조 원의 세금을’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게 뭔 소리냐고?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연봉1억원 의사와 연봉5백만원 활동가에게 동등한 기본소득을’은, ‘전자에게 세금 5천만원, 후자에겐 세금 0원을’ 위에서만 가능하단 말씀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내세울 만한 장점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사가 그리 간단친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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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 기본소득론의 매력은 그것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그야말로 ‘한 큐에’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소득론이 현재와 같이 좌파운동진영이 파편화된 상황에서는 다양한 세력들을 모아내고 좀 더 활발한 논의의 장을 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도 바로 그러한 ‘보편성’에서 나온다. 우리가 정말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면, 기본소득론이란 비현실적이거나 퇴행적인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보다 우리에겐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좀 더 깊이 천착하는 대안이 필요하다. 현재 그러한 대안은 그 무엇보다 노동–자본 간의 계급모순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임금인상’을 가져올 계급투쟁의 전면화와 첨예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끝)

세금의 이해 – 어느 반면교사에 대하여

1.
누군가 말했듯 신문은 가장 좋은 선생님이다. 꼭 긍정적인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즉 신문은 “교사”이기도 하지만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오늘 후자에 속하는 매우 좋은(?) 글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매일경제}에 실린 “국민에 부담 주는 대기업 법인세 인상”이라는 기고문이다(링크). 글쓴이는 현 모라는, 매우 위엄이 철철 넘치는 분이다(이렇게 말이다: 링크).

여기서 현모는 대기업에 세금을 더 물리겠다는 발상이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근거없는 반감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그런 식의 대기업 과세는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와 협력 중소기업 등을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피해를 줄 뿐이라고 일갈한다.

대기업 법인세를 인상하면, 재벌총수와 그 가족들에게 세금폭탄을 안길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법인세에 대해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법인은 생명체가 아니므로, 세금 부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사람이 내게 된다. 대기업의 주인은 재벌가족들이 아니고, 주주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삼성그룹의 가족지분도 2% 이내이다. 법인세가 인상되면 주주인 재벌가족들에게도 부담이 돌아가겠지만, 일반 주주들도 당연히 부담을 지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법인세의 일부는 종업원, 자본가는 물론 소비자들에게까지 전가된다.
결과적으로 법인세 인상에 따른 부담은 재벌총수와 그 가족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게 간다.

매우 재미있는 대목이다. 옳은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다. 먼저 우리나라 재벌기업의 실제 주인이 주주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물론 법적으로야 그럴 수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 설립자 및 그 후손의 사유물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그렇다고 이것이, 그들이 기업을 자기들 멋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 위 대목은 세금을 둘러싼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그러나 “은연중에” 그러는 것이긴 하지만—높이 살만 하다. 그 “진실”이란 바로, 세금의 형식적 담세자가 누구냐와 관계없이 그것은 결국 일정 기간동안 생산된 부가가치로부터 지불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바로 그 부가가치는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에선 결국 기업에 의해 생산될 것이므로, 기업이 거둔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과거 포스팅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씨리즈를 참조하시길 바란다(링크1, 링크2, 링크3).

2.
암튼 이런 생각에 입각하면, 소득세나 법인세, 나아가 소비세 등은 모두 형태상의 차이만 가질 뿐이다. 이들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예컨대 “법인세는 올려야 하지만 소득세는 절대 못 올린다”라거나 “소득세나 법인세는 올리기 어려우니 소비세를 올리자”라는 등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개별 경제주체들이 거두는 “수입”이라는 것을 물신화(fetishise)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순환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러한 수입이란 개별 경제주체들에게 잠시동안 맡겨질뿐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동안 자신에게 맡겨진 수입들을 소비함으로써 자본순환의 한 주기(cycle)를 마무리지어야 하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저축 따위는 없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기이하게도 현모는 위 글에서 “법인세란 결국은 온국민이 내는 것이다”라고 (어떤 의미에선 매우 올바르게) 갈파하면서도, “법인세 인상은 기업경쟁력을 악화시킨다”라는 구태의연한 논리를 펴고 있다. 후자의 논리가 말이 되려면 법인세를 기업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즉 법인세를 기업이 내는 것도 아닌데, 왜 법인세를 올린다고 기업 경쟁력이 악화될까? 나는 잘 모르겠다.

3.
앞에서 법인세니, 소득세니, 소비세니 하는 것들은 사실은 형태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며, 본질적으로 한해동안 생산된 부가가치로부터 공제된다는 점에선 똑같다고 했다. 또한 글을 쓴 현모의 말마따나 만약 법인세 인상이 기업경쟁력을 악화시킨다면, 소득세나 소비세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들이 오르면 노동자들은 기존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선 기업에 대해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한 나라의 세금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는, 개별 세목—그것이 기업이 직접 부담하는 “법인세”라 할지라도—의 세율로는 알 수 없고, 전체 부가가치, 즉 국민총생산(GDP) 대비 총세수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는 개념이 바로 “조세부담률”이다. 그리고 여기에 세금이나 마찬가지인 사회보장기여금을 함께 고려한 것이 “국민부담률”이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과 국민부담률은 OECD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09년 기준으로 19.7%이고, 국민부담률은 25.5%로서 OECD 회원국 34개국의 평균 조세부담률(24.6%) 및 국민부담률(33.8%)에 비해 낮은 수준(조세부담률 26위, 국민부담률 30위) (출처: e-나라지표)

요컨대 우리나라의 세율은 높다기보다는 매우 낮은 편이며, 따지고보면 임금도 그러하다. 결국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생산성”을 두고 세계시장에서 처절한 경쟁전을 치르고 있다기보다는 낮은 세율과 임금 덕분에 엄청난 이윤을 거저 먹고 있는 셈이다—뭐,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렇단 얘기며, 업종에 따라, 그리고 기업규모에 따라 사정이 다르겠다. 여기에 덧붙여 재벌/대기업은 하청 중소/자영업자들을 수탈하기까지 한다.

4.
다시 세금 얘기로 돌아와서… 세금을 위와 같이 이해하면, 법인세니, 소득세니, 소비세니 하는 것들은, 적정한 조세부담률 또는 국민부담률 수준을 달성하는 세수를 거둬들이는 상이한 방식들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적정 수준”이란, 일반적으로 일정 시기 해당 국민경제의 발전수준을 나타낼 일정한 국민총생산(GDP) 수준에 조응하여 당시 사회경제적으로 요구되는 국가활동의 크기를 측정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한 “적정 수준”에 대비해 현재 세수가 적다고 판단되면 세금을 더 거둬들여야 할 것인데, 어떠한 세목을 올릴 것인가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제기되어야 할 사항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해당 시기 사회경제적 제반 역관계가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앞서 링크한 나의 과거 글에서 법인세율 인상의 필요성을 제기했는데, 이는 현모가 넘겨짚듯 단순히 재벌이 미워서가 아니다. 이를테면 소득세를 올려도 이론상 효과는 같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세력은 매우 약화돼 있어서, 소득세가 인상되었을 때 기존 생활수준의 유지를 위해 임금인상을 실질적으로 쟁취해낼 수가 없는 정도다. 이런 경우엔 법인세 인상이 더 효과적이며, 이를 통해 기존의 왜곡된 노-자관계도 일정 정도 바로잡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다. 등등.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3/끝) 무엇을 할 것인가

4. 세금과 임금: 현실에서는 모든 세금을 자본이 부담하진 않는다

앞에서 모든 세금은 원칙상, 그리고 이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세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의 근저엔 임금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논의가 전제되어 있다. 바로, ‘임금=노동력의 재생산비용=노동자의 생존비용’ 등식이 그것이다.

일단, 자본으로부터 직접 징수되는 법인세가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은 쉽다. 문제는 노동자 각자의 임금으로부터 공제되는 소득세인데, 정의상 임금은 노동자의 사회적 생존비용이므로, 여기에서 한푼이라도 세금으로 나간다면 노동자의 재생산에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이는 결국 자본이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보충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노동자의 재생산비용, 또는 ‘사회적 생존비용’이라는 것이 가변적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정한 사회적 평균값일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평균은 변화하지 않을 수 없고, 나라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이나 계층마다 다를 수 있다. 결국 ‘임금=재생산비용’이라는 명제는, 이런 모든 차이들을 사상한 매우 추상적인 규정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임금을 결정하는 이런 모든 요소들을 ‘임금의 역사적, 도덕적 요소’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임금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그러한 평균값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수도 있다. 갑작스럽게 물가가 올랐을 때, 임금은 명목크기가 유지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하락한 것이며, 이는 곧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저하로 나타난다. 즉 정상적인 재생산이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의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러한 상황은 곧 임금인상을 통한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 해소될 것이기에 그저 일시적인 교란상황에 그친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 현실에선 노동-자본 간의 계급관계에 따라 그러한 임금인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하여 만약 저하된 실질임금 수준이 장기화되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적 평균으로 자리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원칙상으로는, 노동자로부터 걷어가는 소득세가 많아지면, 그 차액만큼을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임금인상을 통해 받아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차질이 생기며, 나아가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새로운 ‘정상’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세금은 자본가가 낸 것이 아니고, 노동자의 생활수준 저하를 통해 지불된 게 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는 앞서 소개한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라는 글에서 현대적 조세제도“치열한 계급투쟁의 결과 얻어낸 임금인상이라는 ‘전리품’을 자본가계급이 은밀하게 회수해가는 교묘한 방식”이라고 부른 것이다.

5. 세금, 복지, 임금: 증세의 조건?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편으로 세금은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금은 (특히 자본이 직접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 저하를 대가로 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데, 이러한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임금’이라는 범주다. 증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증세의 결과 줄어든 소득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통해 보상받아낼 수 있는지 여부가 핵심이란 얘기다. 그리하여 현재의 논쟁이나 투쟁도 바로 여기로 집중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정부의 세제개편안이 포함하고 있는 ‘보편증세’의 문제는, 현재 논쟁의 양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저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 고소득 노동자를 털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증세를 임금인상으로 성공적으로 연결시켜 내느냐 여부의 문제다. 좀 더 평이하게 말하면, 증세의 결과 노동자 서민대중의 삶의 질이 저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세금을 걷어서 전투기 사자는 것도 아니고 복지를 하자는 것이니, 어차피 노동자가 세금을 내더라도 더욱 큰 복지로 돌려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여기에서 임금인상은 별개의 문제 아닌가?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둬들인 재원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그러한 복지정책이 노동자의 재생산비용을 낮춰 세금인상분을 정확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면, 이러한 증세를 통해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류의 프로젝트들의 근간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루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첫째, 현재로서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추가세수가 그들을 위한 복지에 쓰일지, 아니면 자본이 내지 않은 세금을 보충하고 나아가 자본을 위해 쓰일지, 심지어 전투기 구입하는 데 쓰일지조차 확실치 않다. 올초부터 정부에서는 ‘세수부족’을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지금 논의되는 증세규모는 적극적인 복지는커녕 세수부족을 메우는 데도 모자란 수준이다.

둘째, 추가세수가 복지에 쓰이더라도 문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자와 서민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삶의 수준의 유지가 아니라 그 대폭적인 상승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계급투쟁이 지향해야 할 바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모든 경제적 가치는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고, 아무리 많은 복지를 해도, 일하지 않는 자본가가 단 한푼이라도 챙겨간다면 착취는 철폐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6. 다시 복지로: ‘어떤’ 복지냐의 문제

여기서 잠시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가 이슈로 떠오르는 배경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자. 왜 보수정권조차도 복지를 하려고 하는가? 바로 대중의 활력이 극도로 저하돼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인지, 경제위기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여하튼 그러한 대중의 활력 저하가 단순히 (일부) 노동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 경제의, 그리하여 자본의 원활한 재생산을 방해하고 있고, 이를 보기좋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 바로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복지인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복지란 자본(주의) 재생산의 위기를 타개해주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를 보라. 너무 심각하다. 사회의 응집력과 재생산을 크게 방해할 정도다. 어떻게 해결할까? 정규직화? 임금인상?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나. 이러한 명확한 해결책을 취하지 않고도 비정규직 문제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복지’를 선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관리를 위해 복지확대를 추구한다.

이 대목에서 ‘어떤 복지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른다. ‘체제의 유지와 관리’ 차원에서, 즉 대중의 삶의 수준을 현재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복지를 추구하는 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과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우리는 어떤 복지를 원하는가? 적어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의 복지에 대한 태도는, 그것을 바닥에 처박힌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고 극단으로 치달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복지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를 향한 투쟁은 복지(국가)와 세금이란 것이 그 자체로 계급투쟁의 표현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은 임금을 가지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러한 투쟁을 통해 충분한 임금을 확보해낸다면 복지도 필요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최저임금 결정에서 극명히 드러났듯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힘관계는 현저한 임금인상을 낳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노동은 더없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복지의 확대는 자본가에 대항한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투쟁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임금 올려달라고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복지를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정당성을 갖는 게 요즘 한국의 현실이다. 이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노동자와 서민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좌파는 그러한 복지에의 열망을 대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계기로, 나아가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적극적인 계기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제껏 논의되고 있던 복지가 후퇴되는 일은 막아야 하며, 나아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만약 증세가 필요하다면, 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와 서민대중이 제 살을 깎아 복지비용을 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종국에 그들의 삶을 ‘조금’ 낫게 해준다 해도 말이다. 따라서 증세의 최우선순위에는 자본가, 그리고 그간 제대로 세금을 내지도 않았던 대자산가에 대한 법인세나 재산세, 자본이득세가 올라야 할 것이다.

또한 전술적인 이유에서든, 아니면 위와 같은 증세로는 충분한 복지재원이 마련되지 않아서든, 만약 노동자와 서민대중에 대한 보편증세(소득세/소비세 인상, 그리고 사실상의 보편증세인 사회보험료 인상 등)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단, 이럴 경우, 엄청난 대중의 저항이 있을 것인데, 좌파들은 그러한 저항이 복지에 대한 저항이 되지 않으면서 자본가와 대자산가 집단을 향하도록,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임금인상에의 대중적 요구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좌파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복지’ 국면, ‘증세’ 국면을, 현재의 미약한 계급역관계를 뒤집는 기회로 사용해야 한다.

(※ 사족: 복지비용을 실질적으로 자본가가 부담케 하는 데 있어 핵심이 보편증세와 더불어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것이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대자산가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그들에게 엄격하게 과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과세의 결과가 이를테면 세입자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전월세상한제 등이 보조적으로 필요하다.)

(끝)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2) 세금의 본질과 계급투쟁

2. 복지재원? 모름지기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어쨌든 복지를 위한 재원이 쟁점으로 되고 있으니,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복지재원은, 나아가 모든 세금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게 뭔 소리냐, 하실 것. 아니,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피같은 임금에서 세금이 나가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_-) 근데 그렇지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치경제학의 대답}이라는 책에 실린 나의 글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를 보시면 된다(링크). 책을 구하기가 번거로우신 분은, 이 블로그에 있는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씨리즈를 보셔도 되겠고(링크1, 2, 3), 원하시면 앞의 글을 파일로 보내드릴 수도 있다(저 EM의 이메일주소는 우측상단에 있슴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이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비용이다(물론 이것은, ‘이론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현실에선 당연히 개인적인 차이와 다양한 교란요인이 있다). ▲임금이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 미치면 노동자의 정상적인 재생산은 위협받기 때문에, 원리상 노동자의 임금에서는 세금이든 뭐든 자신의 (사회적) 생존과 관계없는 비용이 지출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노동자들은 세금을 내는데, 이는 곧 자신의 생존비용 이상으로 사전적으로 임금상승이 있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따라서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말씀이지만, 이러한 사항을 지금 이 글에서 상술할 수는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신 분은 위에서 언급된 글들을 보세요^^)

모든 세금은, 따라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추가적인 복지재원도 결국은 자본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이를테면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소득세의 (사실상의) 증세도, 겉보기엔 노동자의 주머니를 터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러한 재원은 자본가의 금고에서 나오는 것이란 얘기.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증세가 궁극적으로 임금상승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이 있어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노동자의 세후 임금이 그의 재생산비용(즉 생존비용)이라면, 소득세 증세 이후의 임금은 그러한 재생산비용에 못미칠 것이므로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서는 임금인상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임금인상분과 소득세 인상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소득세 증세의 일부는 노동자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임금인상은 소득세 인상분보다 작을 것이다.) 이 얘긴 잠시 뒤에 더 하자.

3.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재원을 빼낼 것인가?

이렇게 보면, (‘어떤 복지인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의 방법론은 결국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복지재원을 빼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법인세를 더 걷는 것은 자본으로부터 직접 수금을 하는 것이겠고, 소득세를 올리는 것은 간접적인 방식이다. 부가세도 마찬가지. 흔히 사람들은 자본이 법인세 인상에는 반대하지만 소득세 인상에는 찬성할 것이라고 짐작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도야 덜하겠지만 자본은 소득세나 부가세 인상에도 반대한다. 그것은 곧 임금인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복지나 사회기반시설이 잘 갖춰지면 자본에도 이롭다. 먼저 자본 자신이 여러모로 이득을 보고,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직접적 비용도 줄어들 것. 따라서 자본은 국가지출의 증가에 대해, 이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입장결정을 할 것이다.)

대체로 자본으로부터의 직접적 세금징수인 법인세 인상은 자본이 가진 현실적인 힘을 고려하면 매우 어렵고, 소득세 인상은 자본의 저항은 상대적으로 덜 받지만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 등등.

그렇다면 이번 세제개편안에 대해 자본이 격렬히 반응하지 않는 까닭은? 정답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알아서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세금을 자본이 직접 내지 않고 노동자/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냈을 때 거둘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효과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지출을 늘리고 복지를 늘리는 것은 계급투쟁의 성과이고, 따라서 노동-자본 간의 투쟁의 표현인데, 노동자 대중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세를 납부함으로써 자본은 그러한 계급투쟁을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 또는 실체도 모호한 ‘국민적 갈등’으로 치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세금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노동자 계급을 옹호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거기에 깃든 계급투쟁적인 측면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바로 이 지점에, 일종의 사회변혁론으로서의 ‘시민증세론’의 가장 핵심적인 허점이 있다. 본질에 있는 계급투쟁을 보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즉 복지를 ‘시민적 합의’의 문제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계속)

세제개편안 논란에 대하여 (1) 문제는 복지다

이제는 지겨울 만도 한 세제개편안. 꽤 뜨거운 논쟁이 진행됐는데, 모름지기 이런 데는 뒷북을 쳐야 제맛. 모른척 지나가기 아쉬우니 몇 마디 거들자.

1. 문제는 복지다

이번 논란에서 재밌는 것은, 박근혜나 새누리당은 쏙 빠져있고 민주당과 기타 시민사회진영이 서로 싸운다는 점. 한쪽에선 중간소득계층의 세부담을 높이는 이번 세제개편안을 ‘세금폭탄’이라고 규정하고, 다른 한쪽에선 그 정도의 세부담은 복지국가를 위해 필수적이라면서 ‘시민증세’를 옹호한다. 특히 후자를 주장하는 이른바 ‘진보진영’의 꽤많은 인사들은 이번 세법개정안의 ‘방향’은 옳다면서 그에 대한 지지를 밝히는 ‘신앙고백’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참으로 기가막힐 노릇.

사실 위와 같은 논쟁은 매우 저열한 것이다. 어차피 복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데는, 그러한 복지체제를 바라건 바라지 않건 누구나 동의할 것. 그래서 보수층에서는 증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복지국가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고, 진보진영에서는 증세란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래서 핵심적인 문제는 ‘복지국가를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 그리고 만든다면 ‘어떤 복지를 만들 것이냐’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세제개편으로 이뤄질 증세는 매우 미미한데, 사실은 그런 점을 들어서 박근혜 정부의 복지에 대한 비전의 부재를 공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스스로 지갑을 열어 ‘옛다, 돈!’ 이러지 말고, 복지 요구나 제대로 하란 말이다…)

그런데 현재 논쟁을 벌이는 양측 사이에서 위와 같은 측면은 전혀 부각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저 복지를 위한 재원마련을 ‘선 부자증세, 후 시민증세’로 할 것이냐, 아니면 ‘선 시민증세, 후 부자증세’로 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될 뿐인데, 솔직히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복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 없이, 또는 자신이 가진 그러한 비전의 차별점을 부각시키지 않은 채로 증세의 방법론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오히려 증세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감만 키워 우리를 복지(국가)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계속)

안철수, 욕심쟁이 우후훗!

오늘 무슨 기사를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독자세력화를 모색하는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정치적 지향점으로 보수와 진보, 좌(左)와 우(右)를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으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결정한 것으로 14일 알려졌다. (. . .) 진보적 자유주의는 그동안 우파가 즐겨 사용해온 ‘자유주의’ 개념을 좌파가 주창하는 ‘진보’와 결합시킨 것이라고 안 의원측은 설명했다. (출처: “안철수, 정치적 좌표로 ‘진보적 자유주의’ 제시”, 연합뉴스, 링크)

‘자유주의’를 우파가 즐겨 사용해왔다고? 웃기는 소리. 2003년 유시민의 예에서 드러나듯, 우리나라에서 ‘자유주의’는 원래 오늘날의 기준으로 (굳이) 말하면 ‘진보’쪽에 저작권이 있었다.

 

이 사진을 기억하시는가? (사진 누르심 관련기사로 링크됨) 

 

따라서 안의원이 여기에 ‘진보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1) 그냥 말장난이다. 즉 최근 ‘진보’라는 수사가 유행하니까 붙인것일뿐.

(2) 또한 그것은 ‘진보’ 개념의 타락을 보여준다. 적어도 10년전 유시민이 ‘자유주의’라고 자신을 규정했을 때, 그것은 소위 ‘수꼴’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은 (‘노동’을 중심으로 한) ‘진보파’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안철수는 ‘노동’과 ‘진보’와 ‘자유주의’를 모두 가지려고 한다. 그게 과연 뭘까? 암튼 안철수, 욕심쟁이 우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