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노동자와 자영업자—그리고 경제학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남들 보기에도 그럴 거고.. 이스탄불까지 가 있으면서 블로그나 들여다보며 댓글을 달거나 하는 것이, 어째 좀 ‘못할 짓’인 것 같아서 한동안 ‘눈팅’만 했다.

‘성매매’인지 ‘성노동’인지에 대해 말이 많다. 나도 글을 하나 써서 ‘논란’에 일조한 셈이다. 당연히 나는 그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저런 (내 글에 대한 반응을 포함해서) 의견들을 찾아 읽다보니까 ‘역시나’ 우려했던 반응이 나오고야 말았다.

그 ‘우려했던반응’이란 바로 ‘섹스워커’가 가치이론으로 곧장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자본주의적 범주가 아님을 의미할 뿐이다라는 나의 언급에 대한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런 언급에 기분이 상하는 걸까? 왜 쓸데없이 ‘성숙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을 규범적으로, 즉 가치평가적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사실 이런 식의 반응은 ‘생산적 vs 비생산적 노동’ 논쟁에서 늘 봐왔기에 낯설진 않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이를테면 “가정주부의 노동은 경제학(=가치론)적으로 봤을 때 ‘비생산적’ 노동이다”라는 표현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곤 한다.

한편으론 경제학—주류경제학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무지를 경제학을 경멸함으로써 ‘정신극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렇게 경멸스런) 경제학이 다뤄주지 않는다고 우는 소리를 일삼는 것은 무슨 심리인가? 하여간 나로서는, 그런 반응을 내보이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성격의 언급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라는 것 외에는 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아, 물론 이 표현도 절대 가치평가적인 것은 아니다. :)

*                        *                        *

앞서의 글에서 어떤 분께서 재밌는 질문을 하나 해주셨다. 질문이 나왔을 때 곧장 답변을 내놓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은 요 앞의 포스터를 참조하면 되겠고… 그에 대해 간단히 의견을 밝혀보겠다. 일단 그분은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읽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있어서 댓글을 남깁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임노동의 개념은 무엇인가요? 제가 노동법 시간에 배운 임노동의 개념은 임금(근무시간에 비례한 고정적 수당)을 받고 사용자의 지휘감독하에 노동을 제공하는 유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무시간에 비례한 임금이 아니라 일의 완성물에 지급하는 보수하고는 또 구별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경제학에서 쓰는 임노동의 개념은 약간 다른 것인지 궁금하네요.제가 가진 개념을 기준으로 하면, 섹스워커는 근무시간에 비례한 수당을 받는게 아니니까 당연히 임노동자는 아닙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월급을 받는 택시기사 말고 사납금 내는 개인택시기사하고 비슷한 유형이라고 생각해서 자영업자에 가깝지 않나 싶긴한데, 어쨌든 경제학은 조금 분류가 다른가 보네요.

기본적으로 위 질문은, 현실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노동의 형태들 중에서 ‘임노동’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구별해내려는 열망과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글쎄… 어떤 차원에서는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픈 것은, 그것이 비록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고 해도, 마르크스가 ‘임노동’이라는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그리고 그가 했던 바로 그 생각이야말로 경제학을 경제학답게 만드는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흔히들 어떤 개념이 선험적인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개념은, 특히나 사회과학의 개념은, 그 개념과 대립되는 다른 개념들과의 관련 속에서 정의되고 또 이해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상대’ 개념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개념을 통해 제기되는 핵심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이번 ‘논쟁’에서 거의 대부분의 이들이 ‘임노동’이라는 개념을,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임노동과 동시에 존재하는 여러 노동 형태들과의 관련 속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여러 형태들’에는, 위 질문에서 언급된 택시운전기사의 경우와 같이 일종의 ‘성과급’ 형태로 임금을 지급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그러나 위 질문에 나타난 택시기사 묘사는 조금 부정확하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넘어간다), 덤프트럭 운전하시는 분들과 같이 형식적으로는 차를 ‘소유’한 채 수행되는 자영업의 형태도 있다. 등등.

이런 식으로, 임노동을 이를테면 자영업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흔히 사람들은 임노동을 하나의 ‘사회적 형식’, 또는 특정한 인간관계가 뒤집어쓰는 ‘껍데기’로 보지 않고 거기에 어떤 ethical하거나 value-oriented된 이미지를 투영하기도 해서, 이를테면 관리자나 심지어 CEO가 임금을 받고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애써 그들의 노동(?)을 ‘진정한 임노동’과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마도 현실에서 결코 ‘진정한 임노동’을 발견해낼 수 없을 것이다(예컨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조원은 ‘진정한 임노동자’ 맞는가?). 또는 발견하더라도, 그런 임노동이 현실을 규정한다고—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듯—말하기가 매우 곤란할 정도로 턱없이 부족함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구별을 하다 보면, 그것이 (1) 자영업자들은 임노동자가 아니니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결론, 또는 이와 반대로 (2) 덤프트럭 운전자나 섹스워커를 ‘노동자’로 보지 않는 것이 그저 어이없다는 핀잔, 나아가 경제학이 쓸모없다는 희의 등등으로—다시 말해,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결론으로—치닫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임노동이라는 것을 규정할 때 늘 역사적인 관점에 서 있다. 즉 그는 임노동을 이를테면 노예노동이나 농노노동과의 차이 속에서—추상적인 ‘노동 일반’과의 차이가 아니라(!!)—규정한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임노동의 존재, 그것도 역사상 유례없이 거대하고 지배적인 규모로의 존재를 현대사회의 역사적 특징으로—주저없이—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보게 되면, ‘임노동’이라는 범주를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 같다.

*                        *                        *

자영업자 얘기가 나왔으니, 그에 대해 좀 더 말해보자. 과연 오늘날의 자영업자도 위와 같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 못볼 것은 없다.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자영업자는 중세의 장인이나 독립 수공업자와 관련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중세의 장인이나 독립 수공업자에 대해 말하길, 그들이 근대의 자본가의 기원이기도 하다고 했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자영업자란 기본적으로 ‘되다 만 자본가(half-way capitalist)’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쁘띠부르주아라는 표현을 떠올리면 될 것 같은데, 구멍가게 주인이나 농촌의 자영농 같은 경우가 여기 해당할 것이다.

여기서 ‘되다 만 자본가’란, 향후 자본가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임노동자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제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존재하는 ‘자영업자’라는 것은, 무늬만 자영업자지 실제로는 임노동자나 다름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덤프트럭 운전사, 또는 프랜차이즈 빵집이나 치킨집 ‘사장’을 보라. 이런 이들은 형식적으로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자영업자’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일반적인 ‘임노동자’에 비해 크게 나을 것은 없다. 흔히 말하는 ‘특수고용직’은 또 어떤가? 간단히 말하면, 이런 이들이 사라지지 않고 ‘자영업자’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해당 산업이 충분히 자본주의화하지 않았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한국의 자본주의발달이 급속하게 진행되다 보니 몇몇 산업에서는 자본형성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반대 측면에서는 대규모 ‘임노동자’의 형성도 늦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이른바 ‘위탁’이니 ‘지입’이니). 타당하다. 우리나라 자영업자 비중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높은 반면 임노동자 비중이 크게 낮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특히 한국에서 그러한 산업부문에서의 ‘자영업’이란 임노동의 변형된, 가장(假裝)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이른바 ‘특수고용직’의 ‘임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잇따르는 것도 이를 증명해준다.

*                        *                        *

이상의 논의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어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는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니며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를 다루는 데 특화된 오늘날의 ‘경제학’이 적절하게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어떤 면에서 한국 자본주의가 ‘진정한 자본주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이는 오히려 ‘글로벌 자본주의’ 속에서 한국경제가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면서 바로 그러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규정을 받고 있음을, 그리하여 ‘진정한 자본주의’—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에 비해 훨씬 더 복합적인 분석이 거기엔 필요함을 말해줄 뿐이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음 구절을 보라.

아직도 노예노동 부역노동 등의 비교적 낮은 형태로 생산을 영위하는 민족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세계시장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 그들 생산물의 해외판매를 주요한 관심사로 삼게 되면, 노예제나 농노제 등의 야만적인 잔학성 위에 과도노동이라는 문명화된 학대가 접목된다. 그러므로 미국의 남부 주들의 흑인노동도 생산의 목적이 주로 직접적인 자가수요의 충족이었던 때에는 온건한 가부장제도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면화의 수출이 남부 주들의 사활문제로 됨에 따라 흑인에게 과도노동을 시키는 것, 때로는 흑인의 생명을 7년간의 노동으로 소모해버리는 것이 계획적인 수익증대수단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흑인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유용한 생산물을 뽑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잉여가치 그 자체의 생산이었다. 다뉴브 제후국 등에서 관찰되는 부역노동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본론} 독일어판8장(=영어/불어판10장) 2절)

내가 앞에서 “‘섹스워커’가 가치이론으로 곧장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자본주의적 범주가 아님”이라고 말했던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생각에서였는데, 여기서 어떤 이들은 ‘성숙한 자본주의적 범주가 아님’이라는 구절에 주로 주목을 했지만 정작 내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곧장’이었다(박가분님은 이를 제대로 음미한 것 같은 반면, 진보넷 불로그의, 별로 언급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어떤 코멘터는 이를 이해 못하고 대책없는 열폭을 내지르기도 했다). 물론 이는, 경제학이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선 여전히 많은 발전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무리하면서, 다시 애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질문자께서는 본인이 ‘노동법 시간에 배운 임노동’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 대목에서 앞서 언급했던 법원의 판결들을 다시금 상기시켜드리고 싶다(참조). 무슨 얘기냐면, 경제학이 불완전한 만큼 ‘노동법’도 불완전한 요소가 많다는 거다. 현실을 참조하면서 부단한 발전이 필요한 대목이다. (끝)

Print Friendly, PDF & Email
SNS로 공유하기!

13 thoughts on “임노동자와 자영업자—그리고 경제학

  1. “경제학이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혹은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해야 하며,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를 유동상태, 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는군요.

    궁금한 게 있는데,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국 경제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시는 건가요? “우리나라 자영업자 비중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높은 반면 임노동자 비중이 크게 낮다는 것”만 의미하시는 건지 아니면 이를 훨씬 넘어선 (언급하지 않으신) 다른 부분까지도 의미하시는지요?

    그리고 이건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한국사회에서 주로 나타난다는 영세한 ‘자영업자’라는 포괄적 계급(?)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선진국(특히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상대적으로 굳건한 국가)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요? 사실 별 근거는 없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산업 자동화가 급격히 진행되다 보면 기존의 임노동자가 해고되는 비율이 높아져, 어떤 식으로라도 먹고 살자는 생각에 (정말 많이 영세하긴 하겠지만) 형식적으로는 자영업의 형태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라고 피상적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아니라면 산업별 자본주의화가 정도가 가속화됨으로써 기존 자영업자가 거대 자본(혹은 기업)에 의해 자신의 (준)자본가적 기반을 대거 상실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라는 건데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봤을 때 다른 선진국에서 한국보다 임노동자가 되는 비율이 더 높아서 나타난 것인지 궁금합니다.

    쓰다보니 질문이 좀 두서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

    PS: 그런데,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이 선진국보다 높은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이건 제가 경제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니 모를 수도… ^^;

    1. 안녕하세요.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래저래 답을 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래요 ^^;;;

      흠… 처음 인용문에서 원래 주어는 ‘변증법’이 아니었나요? 원래 그것은 변증법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진술이었는데, 주어를 ‘경제학’으로 바꾸고 나니 ‘경제학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당위적인 진술로 바뀌었네요. 재밌습니다. 네, 경제학은 그렇게 ‘변증법적으로’ 행해져야지요! ㅎㅎ

      마르크스는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흔히 그것을 우리는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모토로 요약하죠. 즉 자본주의 경제를 가장 추상적이고 단순하게 성격지은 다음, 새로운 좀 더 구체적인 요소들을 단계적으로 도입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도입에 따라 기존의 요소들을 한층 더 전개시킴으로써 논의를 점차 구체적으로 결정화하는 방식이죠. 이런 방법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왔던 방식—여기엔 우연적인 요소가 당연히 개입되겠지요—을 반영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에 입각한다면, 흔히 ‘자영업’이라고 하는 것은 순서상으로 보면 상당히 늦게 도입될 것이 분명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상정하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마치 하나의 나라와 같이 존재하며 또 여기서는 이른바 ‘자본주의화’가 완전히 전개되어 모든 사람이 자본가 아니면 노동자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죠. 일례로, 화폐나 토지는 소유했으되 직접 자본가가 아닌 사람들, 즉 이자나 지대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자본론} 제3권에 가서야 도입되지요. 이렇게 보면, 이른바 ‘자영업자’라는 범주도, 만약 그것이 언젠가 분석에 도입이 된다면, 제4권이나 제5권—물론 이런 새로운 권들을 누군가가 마르크스에 이어 쓴다면요—쯤에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영업자가 논의에 도입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직접적으로 ‘현실의’ 자영업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는, 제1권의 ‘임노동자’나 제3권의 ‘지주’가 직접적으로 현실의 ‘임노동자’나 ‘지주’를 일컫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의 이론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모든 사회과학의 이론들이 이와 같은 추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하여간, 우리가 제1권의 ‘임노동자’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2011년 한국의 노동자’를 이해하려면 당연히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 속에서 한국경제가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surplusb님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훨씬 일반적인 진술입니다”가 되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아주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도 있겠고, 좀 더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제가 보기엔, 오히려 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자기 스스로 ‘사업’을 해보겠다는 그야말로 ‘야무진’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일반적인 대답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마르크스가 즐겨 사용하던 표현을 쓰자면, ça dépend. 즉 ‘그때 그때 다르다’가 정답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대답이 마땅치 않아 보이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앞에서 제가 구체와 추상을 구분했고, 또 마르크스의 이론은 추상에서 구체로 점진적으로 다가간다고 말씀드렸는데(사실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죠), 그 얘긴 곧 어떤 문제는 추상적으로 답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구체적으로밖에 답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곧 님의 두 번째 질문은 매우 구체적인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1. 아, 이런 저의 실수. 제가 자본론을 공부할 때 몇몇 구절을 발췌하는 데, 발췌하는 과정 중에 실수가 있었네요 -_-;; 제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공부하는 중에 김수행 교수가 적은 글과 마르크스가 적은 글이 꼬인 것 같습니다. 제가 저렇게 머리가 좋을 리가 없다구요 ㅠㅜ

        어쨌든, 제가 궁금해하던 부분에 대해 좋은 답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1. 그러셨군요. 하지만 멋진 오독(?)이었어요:) 앞으로 다른 글에도 좋은 반응 많이 해주세요!

    1. 고맙습니다.. :) 하… 그나저나 날은 작년에 피리님을 처음 만날 때처럼 다시 더워지고 있는데, 피리님께 밥 얻어먹기가 왜이리 힘이 든지… ㅠㅠ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하여튼 연락 나누자고요! ^^;;

      1. 이스탄불 잘 다녀오셨나요? 사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오!) 제가 움직이기 편하니 시간 되실 때 찾아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

        1. 네, “잘” 다녀왔슴다. 그나저나 건축 전문가께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사진은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하기아 소피아는 아니에요;; 사진 속의 건물은 이스탄불대학교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것인데… 방금 찾아보니 이것이군요. 그러고보니 이번에도 하기아 소피아에 들어가보질 못했네요. 겉에서도 잘 못 보고 돌아와버렸어요^^;;; 연락 나누자고요! :)

        2. 짧은 깜냥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 건물은 아예 모르는 것이에요. 오오, 멋집니다.

        3. 짧으시다뇨!! 실은, 피리님의 위 덧글을 보고 나니, 하기아 소피아도 (입장료가 좀 비싸긴 했지만) 안 들어가보고 이스탄불엘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게 부끄러워졌어요;;;;;

  2. 저는 첫단락 내용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이해가 돼요.
    옛날에 대학교 때 전공 공부하면서 계속 생각했던 게, 왜 헛갈리게 학술 용어를 일상 언어랑 같은 단어를 쓰면서 뜻을 다르게 입히는 걸까.. 공부하는 입장에서야 익숙해지지만 비전공자가 봤을 때 오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 단어인데 일상 언어에서의 의미와 이쪽 분야에서의 의미, 또 다른 분야에서의 의미가 달라서, 다른 전공자가 내 전공을 참조하면서 단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도 봤었구요.

    그렇다고 학술 용어는 전부 단어를 새로 만들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냥 많이 헛갈리겠구나 하고 나도 생각했었다는 그런 이야기…; 왜 갑자기 초라해지지;ㅋㅋ 사실 이걸 이엠도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 거라고 생각이 되지만뇨 =ㅅ=

    1. 뭐… 뎡야님도 저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죠. ^^ 근데 중요한 건,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도 이해못할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뭐가 그리 어렵나요? 물론 정확한 이해 못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해를 못하는 것과 ‘오해’를 하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는 아주 고약한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비록 그들이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뭔가를 전공(그게 꼭 학교 전공일 필요는 없죠. 뎡야님은 팔레스타인 전공한다고 할 수도)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그런 사람들도 흔히 ‘비전공자’가 하는 ‘오해’라는 것에 나름 익숙할 것이고, 심지어 그런 것에 신물이 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스스로 그런 오해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다는 것은, 결국 위 글에 쓴 대로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라고밖에 못 하겠어요. 냠…;;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