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강신준 번역)의 재출간을 보며

얼마전 <교수신문>을 보니, 강신준 교수의 번역으로 <자본> 제2권과 제3권이 올해 안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씁쓸하다. 다음 글은 2008년 6월, 위의 그 <자본> 제1권이 나왔을 때 쓴 글이다. 시중에 있는 <자본>과 <자본론> 중 어느 것을 보아야할지 망설이는 이들을 위해 그 글을 다시 걸어둔다. 원글을 조금 고치고 없던 말도 조금 덧붙였다.

오래전부터 떠돌던 이야기, “이론과 실천” 출판사에서 나온 <자본>이 새로 나온다는 얘기가 비로소 실현됐다. 출판사는 “도서출판 길”이고, 이번 번역판에서는 번역자의 이름이 강신준 교수로 바뀌었다. 1987년에 나온 “이론과 실천”판 <자본>도 강교수가 번역했지만 당시 사정상 이름을 숨겨야 했는데,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책값이 엄청 비싸졌다. <자본> 제1권은 두 분책으로 나왔는데, 각각 값이 3만5천원, 3만원이다.)

주로 통용되는 번역, 즉 김수행 교수가 옮긴 “비봉출판사”판 <자본론>이 있는데 왜 또 나오는 거냐고 물을 사람도 있겠다. 이에 대해선 아무래도 번역자의 말을 들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한편 한글 번역본은 현재 국내에 2개가 존재한다. 최초의 번역본에 해당하는 이론과실천의 <자본>과, <자본>에 채워진 족쇄가 풀린 뒤에 출판된 김수행의 <자본론>(‘비봉출판사’판)이 그것이다. 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간 경제대국에서 인류지성사의 거의 최상급 고전 반열에 들어 있는 <자본>의 번역본이 겨우 2개뿐이라는 점도 초라하지만, 전자가 불완전한 익명의 것인데다 그나마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하나만 남아 있는 후자도 영어본을 대본으로 한 중역본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서글픈 문화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게 된다. 이제 늦게나마 MEW판을 대본으로 하는 제대로 된 번역본의 출판에는 개인적으로 오래된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는 홀가분함이 들어 있지만,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옮긴이의 말”, 33쪽)

솔직히 이 대목을 보고서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번역자인 강교수 스스로도, 이번 번역본의 의의를 고작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것에서 찾는단 얘기라서 말이다. 뭐 어쨌든 “적어도” 나쁜 얘기는 아니다.

2. 그렇다. 나는 강교수가 밝힌 위 “재번역의 변”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는 여기서 지나치게 “오버”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얘길 해보자.

먼저 그의 “변”이 부족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강교수의 표현을 빌려 단적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은 단순히 독일어 원본이 아닌 영어판을 대본으로 한 중역重譯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개선”됐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원본 번역본으로 중역본을 대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절실한 과제다. 여기엔 조금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 점에서 강신준 교수의 이번 재번역은 그 자체로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한국사회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연구)는, 적어도 강신준 교수가 처음 <자본>의 번역에 손을 댔을 20여년 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그 중에서도 <자본>을 위시한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이번 “도서출판 길”판의 <자본>에 붙여둔 번역자의 “해제”와 “옮긴이의 말”을 두고 봤을 때, 강신준 교수는 그와 같은 새로운–아니 사실은 그다지 새롭다고 볼 일도 아니다. 그와 같은 연구성과들은 이미 적어도 197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쌓여온 것이다–연구성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현재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 있어 최첨단을 달리는 집단이 바로 마르크스-엥겔스저작집(MEGA)의 편집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거나 MEGA를 통한 성과를 직접 누릴 수 있는 독일어권 학자들이다. 이들의 연구와 논의를 통해 특히 최근들어 제기되고 있는 흥미로운 논점들이 있다. 예컨대 원저자인 마르크스와 동료이자 독자, 서평자이자 유고의 편집자인 엥겔스 사이의 관계 문제가 있고, 또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해 밝혀지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의 발전의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은 데는 여러가지 피치못할 사정도 있지만, 그런 사정들이, 영원히 그런 문제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면죄부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MEGA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에 출판된 <자본>의 다양한 판본들뿐만 아니라 엥겔스의 편집대상이 되었던 또는 편집대상에조차 끼지 못했던 마르크스 자신의 원고들을 출판하는 것 또한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 또는 “훈고학적 집착”이라고 한정짓거나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1. MEGA에 대해선 다음 두 글 참조: 김만수, 〈MEGA란 무엇인가〉, 《진보평론》 7호. 정문길, 《니벨룽의 보물》 (2008).

2. MEGA 연구를 통한 성과의 한 예로는 다음 글 참조: Michael Heinrich, 〈MEGA2 II/15 서평〉, 《Historical Materialism》 15.4 (2007). 같은 저자의 〈현대 자본주의 분석의 장애물로서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양가성〉 (2004).

이런 사정을 고려해 보면, “옮긴이의 말”(32-3쪽)에 나와 있는 강교수의 MEGA에 대한 인식은 아주 실망스럽다. 그는 여기서 MEGA의 의의를 축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그릇된 정보까지 제공하고 있다. 물론 내가 MEW판이 아닌 MEGA판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오늘 한국의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다만 나는, MEGA의 출간으로 “독일어 원문”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아주 복잡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정본”으로 여겨졌던 MEW판의 “권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현상황에 대한 강교수의 인식이 지극히 안일하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다. 하기에, 결국 MEW판으로 번역을 하더라도, 이런 사정과 문제들에 대해 정확히 인식을 하고서 번역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사이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문제는 올해 “길”에서 강교수 번역으로 제2권과 제3권이 나오면 더 심각하고 날카롭게 불거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교수는 한참 “오버”도 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옮긴이의 말”에서 그가 쓴 것과는 달리,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삼았다고 해서 그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택함으로써 그저 하나의 관문을 통과했을 따름이며, 그의 번역이 진정으로 “제대로 된” 것인지 여부는 오로지 실제 번역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을 뿐이고, 또 그 판단 또한 결코 그의 몫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삼았다는 게 장점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큰 장점이 되지는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이 둘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3. 이번 강신준 번역 <자본>에서 뭣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책의 첫머리에 붙인 “해제”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사족”일 뿐만 아니라 “오버”다. 혹시 “도서출판 길”에서 개정판을 낸다면 이 부분은 그냥 들어내 버리는 게 나을 정도다. 왜 그런가?

이 “해제”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비유로 시작한다. 강교수는 여기서 <자본>을 거대한 놀이동산에 비유하면서, 처음 가보는 복잡한 놀이동산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안내도”가 필요하듯이 난해하기로 이름난 저작인 <자본>을 별다른 낭패없이 보기 위해서는 놀이동산의 안내도와 같은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해제”가 그런 길잡이 노릇을 해줄 것이란 얘긴데… 이건 전혀 엉뚱한 유비다. 그래, 강교수 말대로 <자본>을 놀이동산에 비유해 보자. 놀이동산의 “길잡이” 즉 “지도”에 해당하는 것은 강교수의 “해제”가 아니라 <자본>에 달린 “목차”다. 오히려 그의 “해제”는, 이런 비유 속에서는, 이를테면 그 놀이동산을 먼저 가본 사람이 쓴 “관람기”에 해당한다고 하는 게 차라리 옳다.

관람기–그것도 아주 어수룩한 관람기가 바로 강교수의 그것이다. 이 “해제”는, “해제”라는 그 성격에 맞지 않게 독자에게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841년 마르크스는 철학 연구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점>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1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는 예나Jena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강교수는 위 구절의 바로 앞 대목에서 마르크스가 본Bonn대학에서 베를린Berlin대학으로 옮겼다는 말만 함으로써,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마르크스가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이해할 만한 충분한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실은 마르크스가 베를린에서 학위를 받지 못하고 예나로 가게 된 당시의 사정이야말로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 두 사람은 … ‘서로의 머릿속을 바꾸어 앉아도 될 만큼’ 각자의 분신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쪽)
—이미 위에서도 말한 대로, 적어도 <자본>과 관련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아주 달랐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잘 몰랐으며, 마르크스가 자신의 원고를 엥겔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만 놓고 보더라도(물론 공개하지 않은 까닭은 마르크스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반영할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엥겔스를 무시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가정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이라는 레닌주의적/스탈린주의적 교조가 설 땅은, 적어도 이론의 영역에서는, 이젠 없다.

… 그 무렵 영국은 … 경제학의 본거지였다.” (12쪽)
—마르크스가 <자본>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영국은 “경제학의 본거지”라기보다는 당시 가장 발달한 산업국이었다. 그가 주목한 것도 실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경제학”은 영국뿐만 아니라 16-17세기 유럽 전역에서 각 지역의 색깔을 반영하면서 발생하고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가 바로 이와 같은 “산업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발달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자신의 직접적인 이론적 개입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위 언급엔 오해의 소지가 작지 않다. 실제 <자본>을 읽다 보면, 또는 <요강>이나 다른 경제학 연구노트들을 읽다보면, 마르크스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학자들도 적지 않게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 및 준사실 관계의 왜곡만큼이나 의심스러운 것은 강교수의 연구자로서의 자질이다. 적어도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학자가, “경제학”을 “돈을 버는 것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문“(17쪽)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 아닌가! 사실 이런 규정은 물신화와 피상성의 극치를 달리는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자들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돈을 번다”라는 표현 대신에 그들은 “개별 경제주체의 행위의 효율성 극대화를 꾀한다”라는 식의 표현을 선호할 것인데, 하지만 이게 단순히 표현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이런 표현을, 강교수의 진심어린 생각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글이 “입문자들을 위한 관람기”인만큼) 대상을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세 대목에서 드러나는 쉽게 오해를 살만한 단순화와 뭉뚱그림도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더라도 이것은 글쓴이의 주의 부족(또는 인식 부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강교수의 자질에 대한 의심은, “추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극에 달한다. 그는 추상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무지개를 이해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한다. 실제의 무지개는 서로 다른 무수한 색깔을 갖지만 우리는 흔히 무지개가 7가지 색깔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강교수에 따르면, “무한한 다양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일정한 범위로 국한시켜 단순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상의 존재가 7가지 색깔인 것이다. 이렇게 단순화하는 과정을 추상화라고 하는데, 마르크스는 현실의 경제를 먼저 그런 방법으로 압축하였다. (19쪽)

결국 이 말에 따르면, <추상(화)=상상>이 된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강교수는 무지개는 무한개의 색깔을 갖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7가지 색깔”은 “상상의 존재”라고 말한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무지개는 무한개의 색깔을 가지며, 우리는 그 색깔들을 ‘7가지 색깔’로 단순화시켜 이해한다.” 무지개가 무한개의 색깔을 갖는다고 해서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깔이 상상의 산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지개 속에서 정확히 “빨강”을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분명 “빨강”은 거기에 있다. 우리가 수직선에서 정확히 “1”을 찍을 수는 없지만, 거기에 “1”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은 바로 이렇기 때문에 “무지개”는 “추상”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별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 적어도 강교수가 말하는 방식으로는 말이다. 즉 무지개에 “빨강”이라는 색깔은 분명히 있지만, 예를 들어,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체적인 “노동들” 중에는 우리가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위와 같은 예를 통해, 그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강교수가 추상에 대해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리카도와 유사한 이해방식을 구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건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겠지만, 이 맥락에선 깊이 이야기할 게 못 된다. 그냥 넘어간다.)

위와 같은 설명은 한편으로 보면,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강교수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이 잘못된 비유와 설명은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만들기만 할 뿐이다. 아니, 더 나쁘게는, 위와 같은 “쉬운 비유”를 통해 어려운 개념을 이해했다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도 있다. 뭔가를 설명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 특히 조심해야 할 대목이다.

이 짧은 “해제”에서도 문제가 되는 대목은 부지기수이지만, 이제 하나만 더 지적하고 그만 두겠다. 강신준 교수는 “<자본>의 현재성”을 다루는 대목에서, <자본>은 미완성의 저작이기 때문에 “열린” 저작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완결되지 못한 저작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아직도 ‘진행 중’인 저작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이후에 진행되는 모든 변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28쪽)

말은 좋다. 하지만 정말 하나마나한 소리일 뿐만 아니라 얼토당토 않은 정당화다. 어떤 저작이 “완성되지 못했다”라는 건, 기본적으로, 결코 미덕이 아니다. <자본>의 경우 그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자본>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자본>이 열린 저작이라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대로 <자본>이 열린 저작인 것은, 그것이 미완성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을 계속해서 늦추면서까지 (이미 그 일반적인 초고는 완성해 놓고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현실적인 발달은 좀 더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그리고 좀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반영하려고, 그리고 기존 버전의 내용을 수정/보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미하엘 크래트케(Michael Kraetke)와 같은 논자들에 의해 단순히 선언적으로가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의 원고를 통해 실증적으로 증명된 바다(예컨대, <요강> 집필 150주년을 기념해 나온 《Karl Marx’s Grundrisse: Foundations of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50 years later》 (edited by Marcello Musto, London: Routledge, 2008)에 실린 그의 논문을 보라).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미뤄보더라도, 강교수의 “해제”는 놀이동산의 “안내도”라기보다는 (좋게 말하더라도)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기”에 지나지 않으며, 이 관람기는 해당 놀이동산을 제대로 즐기는 데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많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아… 이런 희한한(?) “해제”와 “옮긴이의 말”을 가진 <자본>의 새판을 읽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번역 자체에 대해서도 글을 써볼까 한다.)

(2008년 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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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자본>(강신준 번역)의 재출간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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