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의 시대와 채권자의 승리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 (%), 출처: 여러가지 자료]

 

위 차트를 보면 2007년까지 대부분의 국가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대단히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새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이 비율은 2003년 48.7%에서 2007년 36.1%로 하락했었다.

정부부채는 2007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2005년과 2010년을 비교해보면, 유로지역 전체의 경우 GDP 대비 정부부채비율은 70%에서 85.3%, 미국의 경우 63.6%에서 96.8%, 영국의 경우 42.2%에서 80.0%로 대폭 증가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복지지출 증가가 아니라 2007년의 공황 때문이다. G20 회원국들은 세계적 위기에는 세계적 해법이 필요하다면서, 수요진작을 위한 대규모의 동시적인 정부지출을 결의했고, 또한 부실 금융기관 구제를 위해 개별국가별로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다.

금융기관 구제금융은 근본적으로 채권자에 대한 구제금융이다. 구제금융은 강제적인 감자(capital reduction)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주가는 대폭 하락하고 주주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채권자들에게 구제금융은 채권의 부도위기해결을 의미한다. 걱정했던 원금 손실은 커녕 이자까지 꼬박꼬박 챙길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아일랜드,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확산된 유럽의 재정위기는 채권자들의 배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럽의 재정위기는 채권자들의 국채의 투매에 기인하는데, 이에 따라 국채의 가격은 폭락하고, 수익률과 부도위험성은 증가한다. 각국 정부가 빚을 내 위기를 넘겨 주었더니, 이제 왜 그렇게 빚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며 공격한다. 물론 과거 정책의 수혜자와 국채를 팔아치우고 있는 이들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자낳는 자본의 한 분파인 ‘채권투자자’들이다.

새로운 재정위기 와중에 여전히 채권자들이 승리하고 있다. 그리스의 경우에는 일종의 채무재조정이 진행되고 있고, 채권자들도 일부 비용을 부담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1997년의 한국의 경우에서처럼 구제금융은 채권자들은 보호하는 대신, 정부의 주주 그러니까 일반시민들의 희생을 요구한다. 재정건정성 확보라는 허울좋은 이름 하에 정부지출, 복지의 축소와 공공자산의 매각이 강요된다. 영국의 새정부에서 시작되고, 미국의 부채한도증액 협상을 통해 완결되었으며, 이제 남부유럽 국가에 강요되고 있는 긴축재정 기조는 그래서 이자낳는 자본에 대한 국가의 굴욕적인 굴복이다.

경제전망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만, 나는 지난 공황과 비교한다면 현재의 재정위기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럽중앙은행이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정부채권을 구매하기 시작하자마자 이들의 수익률 (즉, 위험도)이 대폭 하락하기 시작했다. S&P가 미국정부 장기채권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낮추었지만, 오히려 10년물의 수익률(즉, 위험도)은 하락했다. 다시 말해 미국 채권의 “시장”에서의 신용등급은 한 단계 높아졌다! 인플레이션 가능성 역시 낮아 보인다 (양적완화를 통해 시중에 풀린 돈은 거의 없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케인지언들의 주장대로 경기진작을 위한 재정지출의 규모가 지금까지 너무 작았을 수도 있고, 여기에 더해 균형재정 달성을 위한 정부지출의 축소는 경기를 더욱 하강시킬 수 있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경기침체 혹은 위축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무슨 재정위기나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과는 무관할 것이다.

지금 (내 생각에는) 극복되고 있는 이 위기는 채권자들의 위기이다. 이 위기를 넘어서면 시민들의 위기가 시작된다. 미국 정치인들은 재정지출은 줄이되 세금은 늘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는 연대세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부유세를 신설했는데, 그런 점에서 유럽의 사정은 더 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감세와 민영화와 정부지출 축소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전위이고, 긴축의 부담은 고스란히 노동자 계급의 몫일 것이다. 자본이 낳은 위기를 국가가 떠안았으며, 다시 이제 자본은 이를 본격적으로 일반 시민들에게 떠넘기려한다. 그런 점에서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그리스 시민의 투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경제 속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이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은 GDP 대비 정부부채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튼튼한 제조업을 바탕으로한 경상수지 흑자국이어서 외환위기의 위험도 낮다. 그런데 지금 서울시장은 우리와는 크게 상관도 없는 유럽의 재정위기를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악용하고 있다. 재정위기의 원인을 무분별한 복지지출로 왜곡할 뿐더러, 시민의 저항은 복지수혜자 집단의 부도덕한 저항으로 매도한다. 이것은 하나의 시발점이다. 아마도 별 문제 없는 나라 한국은, 곧 문제 있는 나라들이 굴욕적으로 채택한 긴축정책을 나서서 수입할 것이다. 전세계적인 재정확대의 결과가 한국에서는 4대강 사업으로 나타났다. 전세계적인 긴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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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긴축의 시대와 채권자의 승리

  1. 오.. 대단히 명쾌한 글입니다. 위 차트는 직접 만드셨어요? 멋지네요 :)

    저는 “정부의 주주 그러니까 일반시민들”이라는 표현이 가장 맘에 듭니다. 한 나라 또는 정부를 주식회사에 비유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절적하긴 하지만, 이명박씨가 옹호하는 그런 비유에서 어쩌면 가장 부적절한 것은 국민을 “사원”으로 보는 태도가 아니었나도 싶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비유라면, 국민은 사원이라기보단 “주주”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옹호하는 “주주자본주의” 논리대로, 국가는 주주인 국민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상당히 해괴한(!) 결론이 나옵니다. ㅎㅎ

    1. 차트. 직접 만들었습니다. ㅋㅋ 여러군데 찾아보았는데 미국, 유럽을 합쳐 놓은 건 없더라구요.

      빨리 주주총회 열어서 CEO랑 서울지사장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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