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은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만은 아니다

어제 “무상급식” 투표가 있었다. 누구 말대로, 투표 안하고서 이렇게 홀가분한 건 처음인 것 같다. 투표의 결과, 초등학교에선 이번 2학기부터 “무상급식”이 시행된다고 한다.

1.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뤄 생각해보면 참으로 잘된 일이다. 다른건 관두고… 어린시절, 학교에서 도시락 먹던 것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난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던 처지라,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다닌 적도 (자주는 아니어도) 있었고 도시락이 있어도 반찬이 거의 매일 형편없었다. 그러니 점심시간이 내겐 두 번째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첫 번째로 고통스러운 시간은 음악시간. 악기를 다뤄야 하는데, 못하면 얻어맞았으니까.. 그것땜에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린적도 몇 번 있다.) 분위기상 혼자 먹을 수는 없고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하는데, 반찬을 꺼내는 것 자체가 친구들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또 어떤 (잘사는) 친구들과는 꿈에도 밥을 같이 먹을 엄두를 못냈다. 지금이야 그냥 가볍게 웃으며 회상할 수 있지만, 그땐 좀 서러웠던 것 같다.

2.

어쨌든 주민투표도 무산됐으니, 이제는 무상급식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이번 무상급식 논쟁에서 가장 못마땅한 것은 찬성파나 반대파나 이 문제를 “애들 밥 먹이는 문제”로 본다는 점이다. 오세훈 파는 그렇다 쳐도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이른바 “진보파”도 문제인데, 이들이 오세훈 등의 보수파를 비난할 때 “애들 밥주는 것 가지고 째째하게 군다”는 식의 논리를 사용하곤 했는데, 이건 그야말로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비아냥이 딱 어울릴 정도로 엉터리다.

실제로 이번 투표의 선택지도 {모두에게 급식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만 선별적/단계적으로 제공할 것인가}였지 않은가. 후자를 지지하는 오세훈 등은 재원부족, 그리고 재정 집행의 효율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반면, 전자를 지지하는 진보진영에서는 전면 무상급식만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제대로” 위하는 길이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즉 무상급식의 시행의 포커스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일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는 거다. 내가 보기에 이건 코미디다.

적어도 현재 우리사회에서 고민되고 있는 무상급식은, 말하자면 집에 놀러온 우리애 친구에게 밥을 공짜로 퍼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베푸는 시혜도 아니다. 만약 “형편이 어려운 소수의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 무상급식의 진정한 목적이라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많다. “낙인”이 문제라면, 그것을 방지하는 길도 많다. 따라서 만약 무상급식이 고작 그런 용도에만 그쳤다면, 오세훈 쪽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내가 보기엔 이번 투표에서 오세훈이 저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무상급식은 “애들 밥주는 문제”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것은 “애들”의 문제라기보단 “어른”의 문제이며, 특히 “형편이 어려운 어른”보다는 “대충 그럭저럭 살만한 보통 어른”에게 가장 첨예하게 제기되는 문제다. 이런 상황에선 결국,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다”라는 대의(cause)란 그런 “보통 어른들”(다른 말로 하면 여론 주도층)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또다른 대의를 관철시키는 일종의 구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보통 어른들”이 무상급식을 옹호하는, 옹호할 수밖에 없는 까닭, 대의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무상급식을 통해 애들 도시락 걱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도시락 걱정”이란 단순히 “돈”의 문제는 아니다. 애들 도시락 싸줄 돈이 있다고 해서, 이를테면 반찬거리를 결정하고 조리하는 문제까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젊은 부부일 가능성이 높은 이런 “보통 어른들”은, 대체로 저마다 자기들 일(꼭 “직업”과 관련된 것은 아니더라도)로 바쁠 것이며 자기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긴 하겠지만 아이들 때문에 자기 삶의 구석구석까지 방해받는 것을—결국 그렇게 되더라도—기꺼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무상급식을 가장 필요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른들인 것이다. (덧붙임: 아래 덧글 참조.)

3.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 차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은 기껏해야 “절반”의 진실만을 전달해줄 뿐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이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은 다름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며, 혹시 개인을 고려하더라도 이때의 개인은 일정한 사회적 성격들의 화신으로서만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확장해 나갈 때, “무상급식”이라는 용어가 정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요새 어떤 이들은 “무상급식”이 아니라 “의무급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타당한 지적이다(“무상의무급식”이 더 타당한 것도 같은데, 이런 문제는 접어두자). “무상” 대신 “의무”를 선호하는 까닭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내 경우엔 후자가 사태를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이 실질적으로는 “무상”이 아니기도 하지만, “의무”라고 표기했을 때 그것이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가 더 잘 드러난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급식”을 “의무교육”의 일환으로 봐야하므로 “의무급식”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주장을 떠올릴 수 있다. 요새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문재인 이사장도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링크). 멋진 “레토릭”이긴 한데, 이것은 그저 “레토릭”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이를테면, 이런 명제는 “의무교육”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과연 의무교육은 절대선인가?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행해지는 의무교육을 무조건, 아무런 유보조항 없이 옹호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과 같은 보편적인 의무교육의 발달이—그 “실제” 역사적 기원에 대해선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자본주의 발달과 궤를 함께한다는 것은 이미 적지 않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다. 무슨 얘기냐면, 교육이든 급식이든… 그것을 국가, 그것도 “자본주의적 국가”가 나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예컨대 단순한 “시혜”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거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하면, (무상)(의무)교육이나 (무상)(의무)급식이라는 문제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국가의) 시혜로만 보는 것—현재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의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이런 시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은 오늘날의 국가를 전근대적 국가(신이나 마찬가지인 왕과 그 신하들이 불쌍한 백성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식)로 바라보는, 커다란 시대착오에 기반을 둔 견해라는 얘기다.

물론 국가, 정확히 말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무상급식의 실시를 고민하는 국가는 바로 자본주의적 국가다. 이러한 국가가, 의무교육으로 지정되어 있어 국민의 절대다수가 가야만 하는 학교에서 그들이 “먹는 문제”를 완전히 책임진다는 것을,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태의 핵심을 놓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얘기는 비단 의무교육이나 무상급식(또는 의무급식)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 커다란 화두가 되고 있는 “(보편적) 의료”, 나아가 “(보편적) 복지” 일반에도 해당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복지”라는 것이 자본주의 현실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모순되는 측면들을 두루 봐야한다는 거다.

4.

그렇다면 급식의 전면화, 나아가 의무화 내지는 무상화가 갖는 사회경제적 의미, 즉 단적으로 말해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미는 무엇인가? 얘기가 이정도 나왔으니, 이 글을 읽는 이라면 누구라도 곧장 두세가지 정도는 열거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아이들의 학교교육을 통한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범위 확장, 양육부담으로부터 일부 해방시킴으로써 주어진 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계급인 부모들을 자본의 메커니즘에 좀 더 충실하게 함,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복지에서 국가의 담당영역을 넓힘으로써 국가의 계급성 희석, 등등.

사태를 이렇게 보게 되면,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무상(의무)급식의 “비용”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코미디임이 드러난다. 이 문제는, 현재 논의되는 무상급식으로부터 혜택을 가장 크게 입을 주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혜택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저절로 답이 나온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수혜자는 가난한 집 자식들이 아니라 (가난한 + 그만그만한) 어른들과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자본이다. 다시 말해 이번 무상급식은 돈 있는 사람들의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애들 보는 것이 성가시거나(이는 개인의 무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자본주의에서 개인의 발달상의 한 단면이다) 어려운 사람들이 이제까지 자신들이 어렵게 감당해야 했던 책임을 국가에 떠넘기고 그 대가로 일정한 금액을 세금의 형태로 지불하는 것이다. 물론 (역시 주요 수혜자인) 자본도 그런 비용의 상당부분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따라서 혹시 자본이 이번 문제를 철저히 개별 경제주체들의 것으로 돌리면서 자신들은 그냥 무임승차 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엄중히 감시할 필요도 있다—아니, 이미 자본은 이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리고 있다).

가난한 집 자식들로 말하자면, 무상급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진 않으리라는 게 내 솔직한 예상이다. 오히려 무상급식은 그들을 좀 더 이 사회에 순응적인 인간으로, 안전하게 관리/양육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물론 복지 일반에 대해서도 대체로 타당한 진술일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복지를 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슬프지만, 이런 이중성이 있다는 얘기다).

다시 “비용” 얘기로 돌아가자. 무상급식의 수혜자가 바로 위와 같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무상급식에 따르는 비용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는) 부담하기로 동의할 것이다. 다만 지금 문제는, 이와 같은 사태의 “실질적인 면모”가 언제쯤 제대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냐다.

5.

지금까지 쓴 얘기는 상당히 일반적인 수준에서 풀어놓은 것이다. 여기에다가 현재 한국사회의 특수한 사정들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지금 나로서는 벅찬 일이다. 어쨌거나, 무상급식 문제를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로만 봐서는 논의를 의미있게 진전시키긴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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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thoughts on ““무상급식”은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만은 아니다

  1. 한편 이상의 논의의 함의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하나 밝혀보면, 이는 우리에게 비경제적 영역이 어떻게 경제 안에 편입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이 얘긴 나중에 좀 더 적절한 기회에 더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2. 이 글을 읽다가 깨달은 게 내가 무상급식 담론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 운동 전반을 균형있게 보기보다 크게 이슈되는 일이 있으면 난 안 해도 될 것 같은.. 마치 나 하나쯤이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규

    오늘 참세상에서 칠레 청소년들 등록금 투쟁소식을 읽고 왜 돈내는 부모들이 아니라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뛰어나왔을까 신기했는데 그게 떠오르네영 근데 부모들이 대학생 등투는 지지하려나 한국에서

    1. 설마 “아무” 관심도 없으셨겠어요.. ㅎㅎ 저도 큰 관심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 어린 자녀들 둔 부모들은 관심이 많더군요. :) 하지만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겠죠..

  3. 꾸준히 눈팅을 하고있는 장삼이사 중 한명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이번에 알게된 것인데 2008년 2월 조사 기준으로 1일 평균 급식 수는 전체 학생의 97.8%에 달한다고 합니다. (무상급식을 지지하는 “보통 어른”이 과연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도시락 걱정에서는 해방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제가 아는 초등학교 자녀를 둔 분의 말을 들어보면 학부모들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는 도시락이 아닌 그 운영방식이 직영인가, 위탁인가. 학부모가 급식에 동원되는가에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휴가를 써서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무상의무급식이 되어도 얼마나 바뀌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몇 자 남겨 봅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남겨주세요ㅎ

    1. 말씀 고맙습니다. 눈팅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시네요. 모습을 드러내주셔서 더 고맙습니다. :)

      그나저나.. 급식 비율이 그정도나 되는군요. 운영실태는 좀 다르겠지만요. 사실 위 글에는 지적하신 문제를 충분히 반영하진 못했습니다. 변명을 드리자면, 어젯밤 글쓰는 중에 일이 생겨 날림으로 글을 맺었는데, 부실한 게 이렇게 들켜버리네요;;; “일반론”아라고는 했지만, 부족한 점이란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실제 급식은 널리 시행중이긴 하지만, 그 실상은 차라리 도시락 싸던 예전만 못하단 말도 많은 것 같고..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이번 투표를 계기로 급식 논의도 한단계 진전을 거둔 셈이니 이제 급식의 질을 포함한 그 실상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보자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다시금 드러나는 건. 급식이 “가난한 애들 밥주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죠.

      영국 같은 경우에도 학교급식이 문제가 많아, 최근엔 제이미 올리버 같은 이를 통해 그 문제가 공공의 관심사로 등장하기도 했지 않나요. 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급식이 의무화/무상화되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아니라, 애들 밥챙겨주는 문제가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의 일로 등장한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형식적으로 급식이 시행되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론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지나치게 개인에의 부담으로 남아있다고 여겨집니다. 결국 이번 투표는, 그와 같은 지지부진함을 한꺼풀 걷어내고 급식의 “공공성”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는 계기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끝으로 덧붙이자면… 맨앞에 덧글에서 제가, 이번 일은 “비경제적 영역이 어떻게 경제 안에 편입되는지”에 대한 예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급식의 공공화를 통해 기존엔 그저 비경제적 재생산의 영역에 속했던 것이 사회적/공적으로 인지되고 나아가 경제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입니다(이를 확장시키면, 가사노동 일반이 복지국가/자본주의발달/과학기술적용 등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겠죠).

  4. 음.. 좀 다른 얘긴데 요즘 등록금 투쟁에서도 무상구호가 나오는데 물론 여러가지 대학개혁을 애기하고 있긴 하지만 (이 구호가 현실에서 가당키나 한거냐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하고) 이게 현실화되었을 때 대학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박탈감이나 서울에 대한 지방의 박탈감, 강남에 대한 강북의 박탈감은 어쩔거냐는 문제가 있죠. 급진적인 구호가 정말 급진적인 요구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경우가 그렇더군요.

    사실 복지는 말씀하신대로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우파들의 과제인데, 자유방임 시절이었던 1906년 영국에서도 모든 아동이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받는다는 식사공급조례가 통과되었는데 그 이유가 군 장성이 군인들의 체력이 부실해서 그 이유를 조사했더니 어릴때부터 영양이 부족해서 그렇다며 이런 상태로는 영국 군대는 망한다고 해서 의회가 발칵 뒤집어졌다는군요. 좌파는 착취나 지배와 같은 좀 더 근본적인 문제와 싸워야하는데 모두들 복지논쟁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저도 정치적으로는 기본소득에 반대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적극 찬성합니다. 매달 백만원씩만 나와준다면..

    근데 왜 이멜주소는 쳐야하는건가요.

    1. 안녕하세요 :) 글쎄요.. 이멜 주소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워드프레스 템플릿 다루는 데 서툴러서 고치기도 그렇고.. ;;; 그냥 가라 주소 하나 쳐 넣으심 되지 않을까요 ^^;;

      말씀하신 대로 체제 재생산이란 우파들의 과제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재생산할 것이냐에는 여러 가능성이 있으니 좌파들이 급진적 의제들을 밀어붙여줘야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복지”라는 문제설정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데.. 여기서 제기되는 좌파만의 고유한 과제는, 그러한 문제설정, 또 그에 입각한 사회운동과 그 결과로서의 현실변화의 의미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일 겁니다..

  5. 이론적으로는 노동력의 가치 결정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네요. 관련 논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1. 맞아요. 노동력 가치의 결정 문제가 여기에 밀접히 얽혀있죠(사실 제가 염두에 두고있던 것도 그건데.. 딱 들켰네요ㅎ). 관련논의는.. 찾아보면 좀 있긴할텐데.. 많진 않을 것 같네요. 있더라도 우리가 지금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적절히 기록되어있을지도 심히 의심스럽고요… 하지만 다른건 몰라도 ben 대인의 “SoP 접근”도 크게 보면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요. 그러니까..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즉 복지국가 문제, 그리고 예컨대 세탁기의 발명/실용화와 같은 기술/생산력발달의 문제와 관련해서 노동력 가치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6. 잘 보았습니다. 복지와 관련해서 그렇지 않아도 뭔가 끄적거려보고픈 생각이 있는 참인데요,

    본문과 관련해서 질문을 하자면, 예컨대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 즉 사회주의사회나 공산주의사회에서 교육은 어떻게 되나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경우 국가 혹은 사회가 교육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을까요? 국가 혹은 사회가 일정한 기초적 교육의 의무를 지지 않을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할까요?

    만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체제의 이념으로 확정한 사회 혹은 국가가 의무교육의 형태로 일정한 수준의 교육을 담보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의무교육이 가지고 있는 제 목적들, 즉 “아이들의 학교교육을 통한 (여기선 자본주의적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혹은 공산주의적이겠죠) 사회화의 범위 확장, 양육부담으로부터 일부 해방시킴으로써 주어진 사회에서 가장 활동적인 계급인 부모들을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메커니즘에 좀 더 충실하게 함”이라는 것이 실효될 수 있을까요? “국가의 계급성 희석”은 아닐지 몰라도 “일반 국민의 일상생활/복지에서 국가의 담당영역을 넓힘”까지는 존재하지 않을까요?

    근대 이후의 국가 의무교육이라는 체제에 대한 비판이 바로 그 “근대 이후”가 자본논리에 의해 구축된 개념이라는 전제 아래서는 본문의 비판적 의식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으나, 국가 혹은 사회가 교육의 일정한 부분을 책임지는 상황이 자본주의 아닌 시스템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 부분은 교육의 자율성이라는 측면과 결부하여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고견을 부탁합니다.

    1. 안녕하세요. 별로 “고견”을 내놓을 주제도 못 되면서, 답변이 너무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

      저는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상당히 “단순한” 견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사실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이후의 모습에 대해선 맘먹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단순한” 견해나마 조금 말씀드려 보면…

      일단 제가 본문에서 강조한 것은 의무교육이나 복지가 자본주의 하에서 실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이중성”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행인님도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곧장 제기됩니다. (1) 그렇다면 자본주의 하에서 의무교육이나 복지의 확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결국 자본에 좋은일 시켜주는 것이므로 그만둬야 하는가? (2)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가면 복지의 이중성은 사라지는가? (행인님은 이 후자의 문제를 제시하신 것이네요.)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1)에 대해선 “아니오”, (2)에 대해선 “어느 정도는 남아있지 않겠는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그것도 안 하면 무엇을 하겠냐는 거죠(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님). 분명 복지의 심화/확충은 인간주의적인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제대로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지제도는 자본주의의 모순 중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을 전보다 훨씬 대규모로, 그리고 사회적이고 공공적인 형태로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한 대로, 가사노동을 여기서 생각할 수 있겠죠. 전통적으로 자본은 노동자에게 노동력의 재생산비용 명목으로 임금을 제공하지만, 대개 남성가장인 이 노동자는 집안에서는 그의 아내의 (자본주의적으로 식별되지조차 않는) 노동에 크게 의존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또 반대로 (대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이 자본에 의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모순이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든 분명한 것은, 복지제도를 통해 그와 같은 경제적 및 사회적 재생산의 비용이 드디어 사회적으로 식별될뿐 아니라 이제 공공의 관심사로 당당히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사정을 두고서 저는, 복지제도란 한편으론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기여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대화된 형태로 폭로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2) 이에 대해선, 교육/복지보다는.. 기계를 예로 들어보면 어떨까요? 기계도 자본주의 하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갖잖아요. 그것은 인간을 복되게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을 바보로 만들고 소외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후자와 같은 성격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에서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 보진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기계(와 그것을 사용한 분업)의 그와 같은 폐해는, 기계(와 분업)의 철폐를 통해서보다는 한 인간이 기계(와 분업)에 의존해 행하는 생산에 종사하는 시간(즉 “직업”에 종사하는 시간)을 급진적으로 줄임으로써만 해소될 것 같거든요.

      이상의 답변, 특히 행인님께서 직접 관심을 가지고 계신 (2)의 답변은 분명 불충분해 보이실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제 부족함 탓입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하나 덧붙이자면.. 특히 미래의 사회, 즉 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 “이념”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 둘만 제대로 구분해도 상당부분 “교통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념적으로 보면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분명히 구분되지만(“이념적으로” 보면, 기계는 자본주의에서와는 달리 공산주의/사회주의 사회에선 인간의 복리에 종속될 것입니다), 요새는 그런 “이념”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사실 행인님의 의문도 “이념”보다는 “현실”에 대한 것이리라 짐작합니다(물론 행인님께서 “이념”에 관심이 없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를 모두 경험해 보았기에, 그것들을 이념적으로 논하는 것은 별로 쓸모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물론 이와 반대로 어떤 이들은, 우리가 경험한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올바른 것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먼저 그에 대한 이념부터 제대로 논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현실”적으로 보는 것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관점으로 여겨지곤 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념”대신) “현실”에 주목하다 보면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데.. 흔히 이념적으로는 나쁜 자본주의의 경우 그 현실을 보면 (이를테면 맘씨좋은 자본가도 있고, 성공한 노동자도 있듯이) 좋은 점도 많다는 식으로 자본주의를 찬양하게 되기가 쉽고, 흔히 이념적으로 이상향으로 여겨지는 공산주의/사회주의의 경우엔 그 현실을 고려할 경우 자칫 잘못하다간 공산주의도 별 수 없다는 허무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7. 아, 고맙습니다. ^^ 또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시는군요.

    간단히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요.

    1) 저는 현실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이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합니다. 소위 ‘현실사회주의’라는 어떤 구조들이 제 힘에 겨워 몰락하거나 몰락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것을 ‘현실’과는 또 다른 ‘이념’의 문제로 등치시키고싶지는 않구요. 스스로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 자신이 아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이상을 저버리지 않고 있다는 거구요. ㅎㅎ

    2)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복지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은 아마도 ‘인권’이 가지고 있는 양가성과 마찬가지의 아이러니일 겁니다. 이걸 그냥 두자니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고, 그렇다고 이거 아니라고 하자니 꿈만 먹고 사는 짓이 될 거고. 여기서 저는 그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만큼 그에 대응하는 전략 역시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전적으로 EM님이 이야기 한 자본주의적 복지의 양가성에 기반한 것이죠. 자본의 모순을 폭로하는 기제인 동시에 자본의 재생산이 아닌 자본의 사회화전략으로서의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이러한 전략은 상당히 장기적이고 면밀한 계획을 전제해야만 할 터인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만한 전제는 이미 세울 수 있을만큼의 역량이 준비되어 있다고 보구요.

    3) 마찬가지로 교육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해요. 위 덧글 말미에 제가 자율성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했던 것도 그러한데요. 예를 들어 국정교과서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일단의 폐해라는 것을 그러면 국정교과서를 폐지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단순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봐요. 오히려 중요한 것은 국정교과서 외에 다른 교과서를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는 거죠. 혹은 개입을 허용할 때 어느 정도까지를 용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될 수 있을 겁니다.

    체제가 달라진다고 해도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그 개인성은 물론 집단성이라는 것을 해소할 수 없을 거라고 봐요. 자본주의체제의 교육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 문제는 행위의 결과를 전부 개인의 몫으로 돌리게 만들면서도 이를 보편으로 포장하는 거죠. 더불어 생산수단의 문제에 대해 이를 소유하지 않은 모든 개인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조장한다는 것이구요. 저는 이 부분을 깨고 나가는 게 교육의 문제라고 봐요. 그건 교육을 기계로 비유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4) 그런 의미에서 무상급식논란은 한국 진보의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라기보다는 한국 보수의 천박함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이렇게 떠들썩하게 난리가 날 정도로 진보진영이 목을 매달만큼 남한 사회 진보의 바로미터정도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책이었는지, 이건 정말 잘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무상급식이 말이 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최근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데, 전술이라는 것이 이토록 단순명쾌하게 선언됨으로써 전략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진보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진보의 무능력이라고 할 겁니다.

    5) 교육의 문제를 계기고 돌아보게 된 복지의 문제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복지라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 무시되고, 새삼스레 ‘보편적 복지’니 ‘선별적 복지’니 하는 말이 난무하는 거, 한국에서도 꽤 오래전부터 통용되는 ‘생산적 복지’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모순, 게다가 오세훈이 떠들어대는 ‘과잉복지’까지, 이건 여전히 남한사회에 복지는 커녕 복지담론조차 제대로 형성된 적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죠. 암튼 그래서 이래 저래 생각이 갈피를 못잡고 흐트러지는 요즘입니다.

    간만에 EM님 글 보다가 많이 고민하고 가네요. ㅎㅎ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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