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의 비판에 답한다 (3) – 노동가치론의 위치

내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24호에 기고한 논문 “<인지자본주의>의 노동가치론 해석 비판”에 대하여 이 책의 저자인 조정환 선생이 (이하 존칭 생략)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비판의 글을 게재하였다.

이 글에서는 조정환의 글을 전재하고 여기에 나의 논평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조정환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제시한다. 단락의 번호는 편의를 위해 내가 추가한 것이며, 조정환의 글에서 나의 논평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부분은 빨간색으로 표시하였다.

3. 맑스에게서 노동가치론의 위치: 정치적 해석

3.1. 노동가치론의 해체로까지 이르게 될 이 위험한 지적 모험이 회피되는 것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맑스와는 달리 본질적 노동가치론자들, 혹은 노동가치 본질론자들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노동가치론을 오직 경제학적으로만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단의식이기 때문이다. 전희상은 나의 해석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것을 경제학적 해석을 따르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대한 좀더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또다른 포스팅을 참조 (클릭):

1) 노동가치론은 무엇보다 본질로서의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이를 은폐하는 상품경제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본질적 사회관계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의 상품경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착취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경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교환을 통해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는 전도된 의식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상품물신주의이다.

2) 따라서 사회이론을 사상한 경제이론은 상품물신주의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제이론, 특히 당시의 속류경제학을 비판하는데,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3) 한편 경제이론을 사상한 사회이론도 잘못된 것은 마찬가지인데,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회 관계는 경제적 관계를 매개로 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4) 결국 노동가치론은 사회이론인 경제이론이며, 경제이론인 사회이론이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을 “노동가치론을 오직 경제학적으로만 해석하고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조정환의 노동가치론 해석을 비판하는 것은 위에 언급한 내용과는 별 관계가 없다. 내가 그의 노동가치론 해석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소재적 측면에서는 물질노동, 사용되는 인간능력의 측면에서는 육체노동으로 제한하여 노동가치론의 적용범위를 협소화하고, 노동가치론이 물질노동과 육체노동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만 유효한 이론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3.2. 나는 내가 따라야 할 해석(의 전통)을 갖고 있지 않다. 해석은 지금여기에서 내가 수행해야 할 실천적이고 창의적 활동이고 그것의 산물이기 문이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맑스가 노동가치론자였다고 거듭해서 주장해 왔다. 맑스가 노동가치론에 준하여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서술하기 시작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노동가치론의 보편적 타당성이나 지속적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극복을 원했던 혁명가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자본주의 연구를 통해 이 극복의 가능성이 자본주의 내부에, 노동가치론의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정환이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이 “보편적”으로 “타당”하거나 “지속적”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노동가치론이나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 유효한 상황에 있어서도, 마르크스가 서술하는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은 어떤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자기파괴적 성격을 보여주는 운동법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가치론은 노동가치론의 소멸에 대한 이론이다. 노동가치론의 유효성과 노동가치론의 유한성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3.3. 맑스는 노동가치론에 따르지 않은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그것은 노동가치론을 옹호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노동가치론이 유효하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매우 불안정한, 스스로를 파괴하는 생산양식이라는 주장을 포함한다. 노동가치론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일반균형이론과 같은 균형 이론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의 강점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 파괴성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노동가치론을 옹호한다. 노동가치론의 옹호는 자본주의와 노동가치론의 극복에 대한 긍정과 다르지 않다.

3.4. 착취에 대한 비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물질적 가능성에 대한 발견은 가치에 대한 노동이론을 철저하게 밀고 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론은 결코 맑스의 발견이거나 그의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고전 정치경제학자들의 발견이며 또 그들의 주장이다.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과 스미스/리카도 등의 노동가치론에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차이만큼의 커다란 차별점이 있다. 노동가치론이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의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3.5. 맑스는 오히려 노동가치론에 따라 운동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노동가치론과 가치법칙을 위기에 빠뜨리는지를(예컨대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에 의해 규정되는 공황은 구매도 판매도 불가능한 상황, 화폐를 포함한 상품이 -가치화되는 상황이다)

노동가치론과 가치법칙이 위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가치론과 가치법칙이 파괴적으로 관철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결국 자본주의의 종말을 내포하는 한 노동가치론과 가치법칙의 관철은 (좋은 의미에서) 노동가치론과 가치법칙의 위기이기도 하다. 조정환은 노동가치론이 유효하다는 주장과 노동가치론이 위기에 있다는 주장이 양립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공황은 “구매도 판매도 불가능한 상황, 화폐를 포함한 상품이 탈-가치화하는 상황”, 노동가치론을 벗어나는 상황이 아니라, 노동가치론의 관철을 통해 가치가 파괴되는 상황이다.

 3.6.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가치법칙을 붕괴시킬 계급을 생산하는가를 탐구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가치법칙의 근본적 해소의 가능성을 예시(豫示)한다. 맑스의 이러한 생각은, 노동가치론의 역사적 해체에 대한 탐구를 맑스의 사상 그 자체의 해체와 동일시하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생각의 원천이거나 모범이기는커녕 그것과 대립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이 전도된 인식이 맑스주의를 지배해 온 것은,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1970년대 이후 너무나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노동가치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가령 소비, 문화, 정보 등)에 주목하면서 반/비맑스주의로 전향케 만든 이론적 배경이 된다.

노동가치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에 직면했을 때 조정환과 같이 노동가치론를 폐기하고, 이를 계승 발전하는 새로운 이론(인지자본주의론)의 개발을 시도할 수 있는 반면, 동시에 이러한 현상들을 노동가치론에 입각하여 해명하고자 할 수도 있다. 물론 후자에 비해서 전자의 시도가 훨씬 많다. 나는 후자의 길을 택했으며 (특히 지식, 정보 등의 분야), 이것이 마르크스의 방법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영국의 농업을 가치론을 바탕으로 해명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지대론이다. 지대를 가치론에 입각하여 해명하는 것은 지난한 과제였다 (리카도가 자신의 가치론으로 지대를 해명하고자 한 시도는 그의 가치론의 붕괴로 이어졌다). 벤 파인(Ben Fine)은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광업, 남아프리카 경제, 소비(!), 사회적 자본, 노동시장, 여성의 고용, 음식 등과 같은 매우 다양한 주제에 가치론을 바탕으로 개입하고 있다.

후자(노동가치론에 입각한 현대자본주의의 해명)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의 이론적 한계가 아니라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연구자들의 이론적 역량과 각오라고 생각한다.

맑스에게서 [자본론]의 위치

3.7. 가치법칙의 역사적 위기 주장에 대한 거부감은 노동가치론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경제학적 믿음에서 나온다. 이 경제학적 믿음은 [자본론]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비판이자 프롤레타리아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논증 프로젝트인 [자본론](6부작)을 경제적인 것에 의해 규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에 대한 이론적 서술로 경제학화하는 것이다. 전희상이 “(노동시간)가치의 존재는 증명 가능한 것이 아닐 뿐더러 노동가치론의 유효성은 오직 이를 바탕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구체적 현상들을 체계적이고 충실하게 이론화하는 것을 통해서만 드러날 것”이라고 말할 때, 그도 이 경제학주의적 해석을 공유한다. 이것은 맑스의 사상에서 혁명적 알끼를 빼내는 이론적 중립화 작업에 다름 아니다. 맑스도 [자본론]의 목적이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데 있다”(1권, 비봉, 6)고 했지만, 이 말은, 자본주의 사회의 제 현상형태들에 대한 충실한 이론적 체계화가 자신의 작업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그것의 부정, 즉 불가피한 파멸“을 서술하는 것이며 “모든 역사적으로 전개된 형태들을 유동상태. 운동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들을 동시에 파악”하는 “본질적으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인“(1권, 비봉, 19) 작업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노동가치론, 그리고 세권의 자본론에 제시된 자본주의 운동법칙은 자본주의의 불안정성, 자기파괴성을 서술한다. 따라서 충실한 이론적 체계화와 마르크스이론의 혁명성은 서로 보완적이다. 자본주의의 자기파괴성을 보여주는 이론은 혁명의 필연성을 보여주며, 혁명의 무기로 기능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목적 아닌가?)

‘연구’와 ‘서술’ 문제

3.8. “현대자본주의에서 노동가치론의 중심적 지위”(전희상, 279)를 입증하는 것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초미의 관심사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 산업노동과 인지노동의 개념적 구분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림으로써 물질노동과 비물질노동에 대한 맑스의 조심스런 구분을 제거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본론], 특히 1권 1장에 서술된 노동가치론을 사회의 근본이자 출발점으로 삼는다. 전희상은 [자본론]에서 상품의 가치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는 규정은 노동과정, 분업, 기계화에 대한 분석 이전에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밀과 철이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이 둘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공통요소 때문이고 이 공통요소가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것이다.(전희상, 282) 그에 따르면 “맑스는 이러한 역사적 경향으로부터 가치범주를 도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추상적인 규정에 의거하여 역사적 경향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한다.”(전희상, 283)

 3.9. 여기에서 우리는 노동시간으로서의 가치라는 경제학적 형태범주에 대한 집요한 경제학적 집착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 추상적인 형태범주의 자기운동으로 보는 인식론적 전도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역사가 추상적인 가치범주의 자기운동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가치라는 “추상적인 규정에 의거하여 역사적 경향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강조 추가). 마찬가지로 나는 자본론 1권 1장을 “사회의 근본이자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자본론 1권 1장에서 마르크스가 어떠한 “역사적 경향[이것은 역사적 분업형태를 지칭한 것이었다]으로부터 가치범주를 도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노동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을 물질노동, (특정한 분업형태를 전제하는) 육체노동으로 제한하는 조정환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역사를 관념의 자기운동이나 자기실현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헤겔연구자들 중에도 이러한 극단적인 관념론, 헤겔철학의 극단적 관념화를 인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나는 물론 가치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범주이며, 자본주의의 극복가능성을 담지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3.10. 역사가 가치범주의 운동의 구성물로 되는 것이다. 서술된 바의 [자본론]만을 염두에 둔다면 맑스가 바로 그러한 방법론을 취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맑스에게서 서술(Darstellung)은 연구(Forschung)가 도달한 결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논리적 서술은 역사적 연구에 후행한다. “서술방법은 형식의 면에서 연구방법과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연구는 마땅히 세밀하게 자료에 정통하고 자료의 상이한 발전형태들을 분석하고, 이 형태들의 내적 연관을 구명해야 한다. 이 작업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현실의 운동을 적절하게 서술할 수 있다.”(1권, 비봉, 18. 번역본에서 연구는 조사로, 서술은 발표로 번역되어 있다) [자본론] 1권 1장 1절의 가치에 대한 서술은 그에 선행한 [정치경제학 비판요강] 의 종장(‘Ⅰ. 가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본론] 서술 이전에 이루어진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는 전희상이 언급하고 있는 노동과정, 분업, 기계화 등이 가치 이전에 모두 다루어진다.  그래서 맑스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방법”이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이지만 그것은 “사유가 구체적인 것을 점취하고 이를 정신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재생산하는 방식일 뿐 … 결코 구체적인 것의 생성과정은 아니다. 예컨대 교환가치라는 가장 단순한 경제적 범주는 인구,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생산하는 인구와 일정한 종류의 가족제도, 공동체 제도, 국가제도 등을 전제로 한다. 교환가치는 이미 주어진 구체적인 살아 있는 전체의 추상적인 일방적인 관계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요강, 1권, 71)고 말한다. [자본론]에서 이후에 오는 것들이 [요강]에서 이전에 온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추상에서 출발하여 구체로 나아가는 [자본론]의 서술방식을 “추상이 구체의 원인”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위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추상이 구체의 원인이며 현실 속에서 추상이 구체를 생성시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본질로서의 추상의 구체에 대한 규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구체적 사물의 본질이 사물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할 수는 없다. 본질이 사물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물에 대한 학적 서술은 언제나 본질에서 시작해야 한다. 논리적, 분석적 선차성과 시간적, 존재적, 역사적 선차성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3.11. 그럼에도 전희상은 추상을 구체의 원인으로 보고싶어 하며 가치를 역사의 동인으로 보고 싶어 한다. 그의 생각은, 가치에 대한 노동이론이 분업 이전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산업노동과 인지노동의 구분과 같은 분업, 즉 역사적 분화는 가치법칙의 현상형태로 파악될 수 있을 뿐이며 그러므로 내가 강조하는 바의 인지노동의 출현이 가치법칙의 위기/종말을 가져오는 사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정환은 한편으로는 노동가치론 혹은 가치법칙의 유효성을 산업자본주의에 특수한 분업형태와 연관시키며 구상과 실행 사이의 경계가 허무어지고 있는 인지자본주의에서 노동가치론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가치생산과 역사적 분업형태의 인과관계를 뒤바꾸어 놓는 것이며 가치생산의 범위를 협소화한다.”(전희상, 285)

여기서 조정환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범주이고 가장 추상적인 범주인 가치가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분업형태에 우선한다는 나의 주장을 가치 혹은 가치에 대한 노동이론이 시간적, 존재적, 역사적으로 분업형태에 우선한다는 주장으로 잘못 해석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총체를 이론적으로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이 생산양식의 추상적인 본질을 파악하고 (연구), 점차 분석의 추상수준을 높여가며 여러 가지 개념들을 도입하고 이론적, 역사적 경향을 이론화한다 (서술). 자본주의에서의 기계화,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경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가장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개념 중 하나인 가치로부터 출발하여 이 역사적 경향을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조적으로 조정환은 기계화에 따른 구상과 실행 사이의 분리를 가치생산의 전제조건으로 간주한다. 물론 가치생산은 이러한 역사적 경향 속에서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을 가치생산의 필연적이고 유일한 분업형태로 간주할 수 있을까?

3.12. 분업형태를 가치형태의 결과로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인식론적 전도인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 맑스에 따르면 정확히 그 반대가 사실이다. 가치형태는 역사적 분업의 산물이다. 가치형태는 사회 속에서 생산하는 개인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개인들, 집단의 부속물이었던 상태를 벗어난 자유경쟁적 개인들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개인들’은 봉건적 사회형태의 해체의 산물이고 16세기 이래 새롭게 발전된 생산력의 산물이다.(요강, 1권, 52) 경제학과를 창설한 아담 스미스의 환상 속에서 역사의 결과물인 이 개인은 역사의 출발점이자 근거로서 나타난다. 전희상은 스미스의 이 로빈슨크루소주의를 공유한다. 이러한 사고법은 현존하는 사회적 관계(가치생산 관계)의 영구성과 보편성을 전제이자 결론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사고법은 가치생산의 범위를 ‘협소화’하는 주장에, 다시 말해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되는 가치형태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것이며 그것이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인해 이미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에 거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가치형태가 소멸하면 하나의 자립적 범주로서의 경제 그 자체도 소멸하는 것이므로 경제학이나 경제학과의 존재이유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경제학 일반(주류경제학이든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든)이 가치형태(및 가격형태)의 소멸에 대해 이론적 저항을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경험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가치형태는 역사적 분업의 산물이다”는 조정환의 주장에 대하여 – 가치생산이 역사적 산물인 것은 맞지만, 역사적으로 특수한 분업형태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가치범주와 가격형태와 경제학과 경제학과에 별다른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 노동가치론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가 주장하는 새시대의 이론, 그러니까 1) 이윤과 임금과 이자가 지대화되고 있고, 2) 화폐는 척도가 아니라 명령이며, 3) 이제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구성체이며 4) 그래서 노동이 새로운 방식으로 착취되고 있다는 이론은 엄격한 이론화를 결여한 가설적 선언에 그치는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1. 인지자본주의에서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아니면 이러한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전면화된 상품경제는 더 이상 이론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가?

2. 마르크스에게 있어 착취는 노동력이 생산하는 가치가 노동력의 가치를 초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지자본주의에서의 착취는 대체 무엇인가? 다중이 공통적으로 생산한 그 무엇을 자본이 조금만이라도 가져가면 그것이 인지자본주의적 착취인가?

3. 이러한 착취는 어떠한 역사적 경향을 가져오는가? 마르크스는 착취의 존재의 사실로부터 이윤율 저하의 경향, 상대적 가치의 생산 경향 등을 이론적으로 도출한다. 인지자본주의에는 어떠한 경향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다중과, 여기에는 전혀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공통적인 것을 전유하려는 자본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만이 존재하는가? 여기에는 힘과 힘의 충돌만이 존재하는가? 사회적 관계는 매개되는가 아니면 매개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나는가?

4. 인지자본주의에서 상품물신주의와 같은 의식의 전도현상은 유지되는가?

3.13. 다만 우리는 가치형태와 그것을 떠받치는 사회적 개인들이, 맑스가 말하듯이, 봉건적 사회형태의 해체의 산물이고 그 해체의 과정은 시초축적이라 불리는 유혈적 연옥을 통과해야 했는데, 공유지에 대한 엔클로져([자본론] 제8편),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부랑자의 감금과 정신병원의 구축(푸코의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 등의 군사적 대량살상과 정치적 박해, 그리고 정신적 배제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이 유혈적 시초축적 과정은 가치형태의 정립과 더불어 18세기에 끝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으로 정상적인 생산과정 그 자체가 항상적인 시초축적을 동반한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20세기까지 지속된 식민주의는 시초축적의 다른 형태였으며 나의 주제인 인지자본주의론도 이 시초축적이 내가 ‘인지토지’ 혹은 ‘인지적 공유지’라고 부른 새로운 영역에서 (축적의 예외형태가 아닌 정상형태로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밝히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3.14. 노동가치 관계를 떠받치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개인들의 평등한 등가교환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형태는, 맑스가 [자본론]을 통해 논증한 것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조화롭기는커녕 적대적이며 영원하기는커녕 일시적이다. 나는 그것이 생산과정 밖으로, 교환될 생산물을 배출하는 물질노동의 헤게모니 시대에만 일정한 설득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교환될 생산물을 낳지 않는 노동에 의해 사회가 (재)생산된다면, 등가성 자체가 의문에 붙여지게 되고 등가성의 해체는 척도의 해체를 낳고 그렇게 되면 척도로서의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론이 직면한 현재의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중 노동가치론이 “조화”에 대한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노동가치론은 당연히 적대에 대한 이론이다. 착취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세히 논증할 수는 없지만, 척도와 등가성의 애로점은 이론가의 머리 속의 애로점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는 상품과 화폐와의 교환이 원활히 잘 이루어지고 있다. 현실 속에서 척도와 등가성의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척도와 등가성의 불가능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 시장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거래는 단지 우연과 변덕의 산물일 뿐인가? 척도가 없이도 화폐의 명령 때문에 교환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이 명령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논증 없이는 가설 수준을 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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