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의 비판에 답한다 (4 – 끝) – 사회의 문제

내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24호에 기고한 논문 “<인지자본주의>의 노동가치론 해석 비판”에 대하여 이 책의 저자인 조정환 선생이 (이하 존칭 생략)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비판의 글을 게재하였다.

이 글에서는 조정환의 글을 전재하고 여기에 나의 논평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조정환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제시한다. 단락의 번호는 편의를 위해 내가 추가한 것이며, 조정환의 글에서 나의 논평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부분은 빨간색으로 표시하였다.

 

4.1. 노동가치론이 보편성을 입증받으려면 노동 외부에 아무 것도 없다고 가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즉 정치, 문화와 같은 노동 외 범주들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적어도 노동을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로서만 고려되어야 한다. 전희상(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사유경향을 “중요한 것은, 정치, 문화 등의 분석에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의 근본적 규정성을 인정하고 여기에 자본-노동 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특수한 요소들을 분석에 적절히 반영하는 것이다“(287-8)라는 말로 표현한다.

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의 근본적 규정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다소 후회한다. 사회적 관계와는 분리되어 있는 경제가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 등의 상부구조를 규정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본주의경제에 관해 논할 때는 언제나 사회적 관계의 상품경제형태로서의 경제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위에 인용된 문장에서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인종주의, 민족주의, 페미니즘 등을 자본-노동 관계(사회적 관계의 상품경제형태)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분석에서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특수한 요소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4.2.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그는, 사회적 삶과 생명체의 세계를 “개체들이 함께 만들어 낸 세계”로 보면서 “이 사회적 세계에서 모든 개체는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보는 나의 공통되기의 존재론([인지자본주의], 167-8)을 이상적인 자연주의적 사회상이라고 비판한다. 이 조급한 비판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에게, 공통되기의 존재론은, “생명이 본원적으로 그리고 항상적으로 공통적인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이 공통적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본래 공통적임을 의미하기보다 공통되기의 노력을 통해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 나갈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인지자본주의, 168)고 한 나의 글을, “사회적 삶은 생명의 사회적 표현이며 생명적 개체는 “본래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전희상, 286)로 읽는 오독이 필요했다는 것에는 안타까움을 끔할 수 없다.

생명적 개체가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 나갈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 것을 “본래 공통적”인 것으로 잘못 인용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둘 사이에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정환에게 있어 개체는 초역사적인 사회성 (즉, “공통되기의 노력을 통해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 나갈 능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적인 것이 개체들의 공통되기의 결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4.3.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를 자본-노동 관계로 이해할 때 노동은 임금wage노동이며 강제노동이다. wage라는 영어는 “담보로 잡히다”는 뜻의 프랑스어 gagier에서 나온 말로 “담보를 잡히고 전쟁을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wage에는 이렇게 채권-채무 관계의 역사가 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노동’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travail는 세 개의 말뚝을 이용한 고문도구였던 tripalium에서 나온 라틴어 tripalare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산고’의 진통을 의미하기도 하는 이 말 travail는, 영어 labor도 그렇지만, 수고, 고통, 아픔을 겪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노동이 사회적인 것의 기초로 되는 것은 전희상도 인정하고 있듯이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서다. 그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산업)자본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관계인 착취관계는 상품경제의 형태를 취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으로, 경제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되고, 경제와 비-경제 사이의 구분은 내적인 구분(287)이라고 단언한다. 이 믿음에 기초하여 그 내부에서 맑스에 대한 그의 표상들과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표상이 서로 충돌한다.

4.4. “마르크스는 초역사적인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도출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오히려 특수한 사회적 관계의 총체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를 사상한 자연주의적이고 추상적인 사회를 분석하지 않으며, [인지자본주의]에서와 같이 이상적인 자연주의적 사회상 ― 공통되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사회― 에 입각하여 (산업)자본주의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오히려 내재적 비판이다.”(전희상, 286-7)

4.5.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도 공통되기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인지자본주의]의 생각이다. “회복해야 할 것은 교환과정 이전에, 혹은 그것과는 별개로 부의 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들 사이, 그리고 인간, 기계, 자연 사이의 창조적 공동협력에 대한 인식이다.”([인지자본주의], 492)

여기서 조정환은 어느 사회에나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 나갈 능력”의 발현으로서의 공통되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 그는 이것을 뒤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4.11을 보라). 

4.6. 그러나 이러한 공동협력, 즉 공통되기는 전희상에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가진 표상과는 달리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본관계가 그것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 창조적 공동협력을 가치 술어로 환원한 후, 이것을 가치라는 척도에 따라서 필요한 것과 남는 것으로 분할한다. 즉 여러 힘들 사이의 공동협력과 공통되기를 가치 요소들로 분할한다.”([인지자본주의], 492) 같은 페이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맑스는 잉여가치의 착취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생산과정의 이 요소적 분할의 논리를 받아들였고 그 중에서 노동 요소의 근본성과 가치형성에서의 유일성을 단언했다.” 교환가치적 맥락에서 노동시간이라는 요소의 근본성과 유일성 강조하는 것이 옳다 하더라도 사용가치적 맥락, 부의 맥락에서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의 맥락에서는, 자연력과 노동력 그리고 기계력은 각각의 요소로서가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긴밀한 접속과 연결을 통해, 아니 오히려 단일하고 공통된 자연력으로서 생산적 창조력으로 기능한다.. 맑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노동이 자연력인 노동력의 표현일 뿐이며, 노동은 여러 수단들 및 부속 주체들과의 협력 속에서만 수행된다고 말한다.”([인지자본주의], 492)

나는 공통되기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인지자본주의]에 잘 기술되어 있듯이 산업자본주의에는 공통되기의 요소적 분할이라는  제약이 있으며, 인지자본주의에서는 명령이나 지적재산권 등이 공통되기에 제약을 가한다. 결국 무슨 얘기인가? 개체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초역사적으로 공통되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제약이 가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제약이 없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공통되기를 시도하는 초역사적인 개체적 속성에 대하여 역사적인 제약이 외부에서 부과된다는 얘기이다. 인지자본주의적 제약이건 산업자본주의적 제약이건 공통되기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이러한 제약은 나쁘다. 왜냐하면 초역사적인 공통되기의 속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조정환이 언급한 바와 같이 물적 부 – 사회적 부가 아니다 – 의 생산에 있어서는 노동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작용한다. “노동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자본론 1권, 235-6 페이지, 김수행 번역). 노동과정을 이렇게 자연, 노동, 도구 사이의 공통되기로 본다면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공통되기”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일반화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시하는 것은 사회적 세계가 [타자와 더불어 “공통적으로 조정된 세계를 만들어 나갈 능력”이 있는 생명적 개체의  “미시적이고 존재론적인 운동”(인지자본주의, 167 페이지)]의 결과이며, 이 초역사적 사회적 세계에 대하여 사회형태에 특수한 역사적 제약이 부과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4.7. 이러한 생각이 과연 ‘초역사적인 개인적 속성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도출하려는 시도’일까?

그렇다. 반복적으로 언급했지만, [인지자본주의]는 사회적인 것을 개체들 사이의 생명활동의 결과로서 파악한다. 사회 속에 개체들 사이의 생명활동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개체에서 사회의 근원을 찾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4.8. 이것은 ‘이상적인 자연주의적 사회상’일까?

그렇다. 왜 이상적인가? 공통되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황 – 개체들 사이의 창조적 공동협력의 결과로서의 사회적 세계 – 혹은 역사적으로 부과된 제약을 제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상적으로 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 자연주의적인가? 사회가 개체의 속성의 자연적 발현의 결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4.9. 맑스는 정말로 자본주의 비판을 자본 외부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자본에 내재적인 방식으로 수행했을까? 그는 과연 사회적인 것의 자연주의적 존재론을 거부했을까? 나는 여기에서 나의 생각을 미리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본 내재적인 자본 비판, 자본 중심적인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를 포함하는 온갖 개혁주의의 뿌리이며 (임금노동을 사회적인 것의 근본적 기초로 삼는 관점과 더불어서) 바로 자본가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제기하고 정식화하는 방법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내재적 비판에서 비판은 나쁜 것을 비판한다는 것이 아니라 면밀하게 따져 실체를 명백하게 드러낸다는 의미에서의 비판이다. 내재적 비판에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 그 자기파괴성을 자본주의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논리의 전개를 통해 보인다. 이것은 자본가의 논리가 아니다. 자본가는 이윤과 잉여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윤이 정당한 투자의 결과라고 생각할 뿐더러 자본-노동 관계가 자연적인, 초역사적인 사회관계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물론 외부적 기준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아동노동에 비판, 비숙련화에 따른 인간의 일면화된 발전에 대한 비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은 아니다. 이러한 외부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비판을 위해서는 굳이 그가 자본론이나 다른 저작에서 서술한 체계적인 이론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는 착취를 단지 중립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관심의 대부분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해당하는 착취관계가 어떠한 결과 – 특히 자본주의의 극복의 가능성 – 를 가져오는지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있었다. 그는 심지어 상품물신주의로 대표되는 의식의 전도현상까지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4.10. 여기서 우리는 단편-맑스와 총체-맑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단편-맑스는 맑스의 이러저러한 단편적 언급들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총체-맑스는 맑스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일관된 정신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단편-맑스들은 자본내재적 비판을 맑스주의 방법의 모델이라고 정당화해 줄 수 있다. 예컨대 [자본론]과 [바그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평조]만이 고유하게 맑스적인 것이라고 본 알뛰세의 방법은 전형적인 단편-맑스의 사례다. 초기 맑스와 중기 맑스를 대립시키거나 중기 맑스와 후기 맑스를 대립시키는 방법도 단편-맑스적 방법론에 속한다. 물론 총체-맑스가 맑스의 작품들에 수미일관성만 존재하며 모순이나 공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맑스의 사유들 속에서 모순, 공백, 수정, 자기비판 등이 무수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넘어서는 경향적 일관성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그것은 착취비판, 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산주의 등의 술어로 요약할 수 있는 일관성이다.

이런 류의 비판은 양날의 칼이다. 나는 비물질노동과 육체노동만이 노동가치를 생산한다는 조정환의 마르크스 해석이 단편-맑스적 방법론을 따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가령 그는 비물질노동인 운수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다루지 않는다 (“운수업에 투하된 생산자본은 수송되는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는데, 그것은 일부는 운수수단으로부터의 가치이전에 의하여, 그리고 또 일부는 운수노동에 의한 부가가치에 의해서이다”, 자본론 2권, 173 페이지 – 김수행 번역).

4.11. 이 일관성의 관점에서 볼 때, 맑스의 비판은 자본내재적이기보다 삶내재적이다. 맑스는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관계로 보았는데, 그 사회관계는 어느 시대에나 공통된 존재론적 생명활동의 특수한 역사적 현상방식이다. 맑스는 당대의 경제학자들이 갖고 있는 경향, 즉 특수한 사회관계를 일반화하는 경향과 투쟁하는 가운데 공통성과 일반성으로부터 상이성과 특수성을 구분하고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3쪽) 하지만 이 특수성에 대한 강조는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적 공통성에 대한 그의 서술과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노동과정이 동시에 가치증식과정임을 밝히면서, 노동과정을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자본론 1권, 235 페이지) 고찰한다. 다시 말해 노동과정을 사회적 규정을 배제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과정으로서 다룬다. 노동과정이 언제나 사회적 규정 하에 있지만 동시에 자연적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정환의 주장대로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어느 시대에나 공통된 존재론적 생명활동”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주장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노동과정 그 자체 혹은 노동과정 일반을 고찰한다는 것과 이것들이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마르크스는 노동과정을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분석/고찰한 후에 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과정이 동시에 가치증식과정이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규정이 배제된 노동과정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은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노동과정 그 자체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가치증식과정이다. 

‘존재론적 생명활동’은 어떠한가? 개체들 사이의 존재론적 생명활동은 곧 공통되기이며 사회적 세계를 산출한다. 자연적 과정이 사회를 산출한다. 조정환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은 어느 시대에나 공통적이다.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통되기에 부과되는 외부적 제약 – 산업자본주의적 제약, 인지자본주의적 제약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은 동시에 가치증식과정이다. 조정환의 경우에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존재론적 생명활동은 공통되기의 결과로서의 사회적 세계를 산출하며, 여기에 산업자본주의적 제약이 부과된다. 초역사적인 공통되기에 역사적 제약이 부과되며 그 결과로 공통되기에 침식이 발생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실체가 동시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갖는다면, 조정환에게 있어서는 초역사적인 하나에 역사적인 다른 하나가 더해진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노동과정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 봉건제적 노동과정, 사회주의적 노동과정 등으로 존재하며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지만, 조정환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세계를 산출하는 생명의 미시적 운동으로서의 공통되기는 역사적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우선 존재할 수 있다. 여기에 특수한 사회적 제약이 부과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하나의 실체가 동시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갖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흑인이면서 노예, 사용가치이면서 가치, 노동과정이면서 가치증식과정, 계급투쟁이면서 자본-노동 사이의 투쟁. 전자는 대상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고찰하는 것이며, 후자는 특수한 사회형태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4.12.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적 공통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1844년 수고]에서 집중적으로 서술되는 노동소외론 혹은 소외된 노동론에 잘 나타나 있다. 소외Entausserung란 외부로(äußer) 떨어져(Ent-) 나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외과정에서 외부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4.13.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1. 자연과 2. 자기자신 곧 인간자신의 활동기능.인간의 생명활동을 소외시키므로, 이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유(類)를 소외시킨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 있어서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의 수단으로 만든다. 첫째 소외된 노동은 유적 생활과 개인적 생활을 소외시키며 둘째 개인생활을 추상화시킴으로써 이를 유적 생활의 목적으로, 그것도 추상적이고 소외된 형식을 통해 그러한 목적으로 만든다.”([경제학-철학 수고], 61)

4.14. 맑스에게서 인간이 유적 존재인 것은 (전희상도 말하고 있듯이) 어떤 고정된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유 곧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그밖의 다른 사물들의 유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으며, 또한 동시에 인간이 지금 살아 움직이는 유로서의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고, “인간이 보편적인universel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경제학-철학 수고], 60) 맑스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동물이 자신의 생명활동과 직접적으로 통합되어있음에 반해 인간은 자기의 생명활동을 대상으로 삼는 의식적인 생명활동을 하는 데서 찾았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생활을 대상으로 대하는 의식적인 존재인 것은 바로 인간이 유적 존재이기 때문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자연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이 된다.[인간의 유적 생명력이 자유로운 활동이 되는 인지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황수영, ‘생명과 인지'([인지와 자본], 갈무리, 2011, 근간 참조]  나아가 맑스는,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기자신만이 아니라 자연전체를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동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표준과 필요에 따라 생산할 뿐이지만 인간은 모든 종의 표준에 따라 생산하는 법을 알며 미의 법칙에 따라 대상을 조형하기도 한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은 대상세계의 가공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유적 존재로서 현실적으로 실증하는데 바로 이러한 생산이 곧 활동적인 유적 생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을 통해서 자연은 인간의 작품과 인간의 현실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맑스를 따라, “노동의 대상은 인간의 유적 생활의 대상화”(62)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을 의식에서처럼 지적으로 이중화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처럼 활동적으로 이중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자신을 바라본다.

4.15. 그러나 인간의 이 유적 생명은 노동의 소외로 인하여 박탈되고 전도되어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되어 버린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그의 생산대상을 탈취함으로써 인간으로부터 유적 생활 곧 인간의 현실적인 유적 대상성을 빼앗아 버리며 인간의 비유기적인 몸인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탈취함으로써 동물에 비한 인간의 이점이 오히려 약점으로 전화된다. 또 소외된 노동은 자기활동 즉 자유로운 활동을 수단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 생활을 신체적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인간이 유에 대해 가졌던 의식 역시 소외를 통해 유가 그에게 수단이 되는 식으로 변형된다.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노동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인간들이 자기자신에 대해서뿐만 서로에 대해 대립하게 된다.(경철수고, 62-63 참조)

인간이 유적존재라는 것은 특히 의식적 활동에 있어 동물과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러한 시각은 자본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 (자본론 1권 256쪽).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을 사회적 형태와 무관하게 유적존재로서 고찰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의 활동,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대상세계를 가공하는 활동이 곧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생산활동을 사회형태와 무관하게 바라보면 그것은 대상세계를 의식적으로 가공하는 유적존재로서의 활동이지만, 그것을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인간이 특수한 작업에만 종사하게 되고, 비숙련화되며, 그 결과물을 소유하지도 못하는 사회적 상황을 대입하면) 그것은 유적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 여기서도 앞서 언급한 하나의-실체의-서로-다른-두-측면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유적존재로서 활동한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이 활동은 유적존재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진다.

시대와 무관하게 유적존재로 실재하는 인간이 자본주의에서 그 유적존재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유적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유적존재로부터의 소외인 것이다.

4.16.내가 말한 바 “환경과의 상호섭동을 통해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자기생성적 조직으로서의 생명”이 맑스가 말하는 바, 자연을 자신의 비유기적 몸으로 삼으면서 자기자신과 자연전체를 재생산하는 자유로운 활동으로서의 “유적 생명”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맑스는 자연주의를 거부하기는커녕 인간주의가 곧 자연주의(Naturalismus)라고 누누이 표현했고 혁명도 자연사적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규정했다. 맑스는 철저하게 자연내재적이고자 했고 생명/삶 내재적이고자 했으며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형태로 나타나는 노동인 임금노동을 유적 생명의 소외(외부화)로 정의했다. 유적 생명의 존재론적 운동을 맑스에게서 제거하는 것은 맑스의 급진성(뿌리에 이른다는 의미에서)을 제거하는 것이며, 맑스의 비판을 뿌리 없는 비판주의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삶내재성을 자본내재성으로 전도시킴으로써 하나의 소외된 역사범주로서의 경제(적인 것)을 나머지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범주로 위치지우려는 경제주의의 전략에 속하는 것이며 이것은 경제적인 것에 의존하는 자본에게 커다란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적존재 그 자체”가 실재하지는 않는 반면 – 실재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유적존재이다 –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환경과의 상호섭동은 사회적 형태와 무관하게 실재한다. 즉, 이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개념들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적존재에 대한 논의가 공통되기에 대한 조정환의 논의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조정환은 유적존재를 사회적 형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4.17.그렇지만 일부의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하곤 하듯이 유적 생명과 소외라는 개념이 청년 맑스의 헤겔주의적 잔재에 불과하고 맑스가 [자본론]에서는 청산해 버린 낡은 개념이라면 어쩔 것인가? 이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중년에 이른 맑스는 ‘자본론] 초고인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 ‘소외’의 테마를 반복할 뿐 아니라 발전시킨다.

나는  마르크스가 유적존재라는 테마 – 특히 동물과 구분되는 의식적 생산의 측면 – 를 자본론에서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론 1권 7장 참조).

4.18.“사회적 부가 갈수록 노동자체에 의해 창출된 노동조건들로 표현된다는 것,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사호적 활동의 한 계기-대상적 노동-가 다른 계기인 주체적 노동, 즉 살아 있는 노동의 거대한 신체가 되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하여 노동의 객체적 조건들이 그것들의 범위 자체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 그것이 갈수록 거대한 자립성을 띠게 되고 사회적 부가 거대한 분량의 낯설고 지배적인 노동권력으로 마주 서는 것으로 표현된다는 것 이외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대상화됨(Vergegenstaendlichtsein)이 아니라 소외됨, 외화됨, 양도됨(팔림-인용자)에 두어져야 하며 사회적 노동 그 자체가 그 계기들 중의 하나로서 그 자신에 대립시킨 괴물스런 객관적 권력이 노동자에 속하지 않고 생산의 인격화된 조건(즉 자본)에 속한다는 조건에 두어져야 한다.”(요강, 3권, 124; 번역 수정)

4.19. [경철수고]에서 맑스에 드리운 헤겔의 그림자는 소외를 대상화 그 자체와 동일시하곤 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었다. 그는 이 점을 분명히 수정하면서 대상화보다 오히려 노동의 객체적 조건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에 속한다는 것이 소외 문제의 핵심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생산조건들이 왜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속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자본론]은 응답은 다성적이다. 첫째 시초축적 장은 폭력이 그 역사적 계기였다고 답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이 계기는 역사적으로 소멸한 것이 아니라 지속되어 왔다. 시장은 국가(폭력) 없이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이 측면보다 시장 메커니즘에 더 역점을 두어 설명한다.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등가적 상품교환 속에 들어 있는 부등가교환, 즉 착취라는 경제적 과정이 낳는 법적 정치적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노동자 관점에서 볼 때 노동의 소외가 자본가의 관점에서 볼 때 타인 노동의 점취로 나타나는 이 착취는 실재적이고 또 필연적이다. 하지만 맑스는 이 역사적 필연성이 토대에서 볼 때 생산력 발전을 위한 필연성이지 생산의 절대적 필연성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사라지는 필연성이고 이 과정의 (내재적인) 결과와 목적은 그 과정형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토대 자체를 지양한다”(요강, 3권, 125). 무엇이 이것을 사리지게 하는 것일까? 나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노동의 인지화를 통해서이다. “단순한 개별적인 노동이거나 또는 단순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일반적인 노동으로서의 살아 있는 노동의 직접적인 성격이 지양됨과 더불어, 개인들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일반적이거나 사회적인 활동으로 정립함과 더불어 이러한 소외형태는 생산의 대상적 계기들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므로 대상적 계기들은 개인들을 개별자들이되 사회적인 개별자들로서 재생산되게 하는 소유로서, 다시 말해 유기적인 사회적 신체로서 정립한다.”(요강 3권, 125) 이로써 유적 생명이 소외로부터 벗어날 주객관적 조건이 동시에 확립된다. “개인들의 생명의 재생산에서, 이들의 생산적 생활과정에서 그렇게 존재할 조건들은 역사적인 경제과정 자체에 의해서 비로소 정립되었다. 객관적인 조건들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조건들도 그러한데 이들은 동일한 조건들의 상이한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요강, 3권, 125)

4.20.그러나 자본은 끈질기다. 노동의 사회적 인지화의 과정이 노동을, 교환매개적인 직접적 소외노동으로 기능하기를 멈추도록 강제하는 순간, 맑스가 고려했으나 [자본론]에서 강조하지 않았던 첫 번째 계기, 즉 폭력이라는 계기가 전면으로 부상한다. 교환되지 못하는 노동력(실업노동자), 강제적으로 불평등한 교환관계에 들어간 노동력(비정규직), 비가시적 방법으로 수탈되는 노동력(외부효과) 등이 그것이다. 상품형태의 외관은 유지되지만 그것은 명시적으로 폭력에 의해 보충된다.(감시, 평가, 테러)  유적 생명의 소외의 지양은 다시 제약된다. 폭력은 사회적 인지토지에 대한 엔클로져(시초축적)를 통해 생산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의 재결합을 강제적으로 분리시킨다. 이 메커니즘의 규명은, 노동가치론의 유효성에 대한 강조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과제이며 오늘날 정치경제학 비판이 결코 피해서는 안 될 과제이다. [인지자본주의]는 현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충분히 체계적인”(전희상, 275) 이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인지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축적이 취하는 타인노동의 역사적 점취형태를 비판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맑스가 수행했던 착취비판을 변화된 조건에서 지속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가능성의 조건을 밝히는 데 있다. 인지토지에 대한 엔클로져가 공통가치에 대한 명령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은 [인지자본주의]에서 이미 밝혔다. 그 명령은 핵-원자력 지배를 비롯한 여러가지 방법들과 경로들을 통해 작용하면서 감시사회와 통제사회를 일반화하고 있다. 그 중 주목해야 할 하나는, 지적소유권을 통한 인지적 독점(이른바 ‘정보사회’에 대한 명령형태)인데 이에 대해서는 [인지자본주의]에서 비교적 자세히 규명했다. 또 다른 하나는, 금융화와 채권-채무 관계의 생산(이른바 ‘신용사회’에 대한 명령형태)을 통한 명령인데 이 점은 만족할 만큼 규명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규명은 다른 기회를 빌어 계속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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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조정환의 비판에 답한다 (4 – 끝) – 사회의 문제

  1. 1. “…되기”는 들뢰즈가 한국에 끼친 나쁜 영향 중의 하나예요.

    들뢰즈가 소개되기 훨씬 이전인
    1970년대부터 문학과지성사 계열의 문학평론가들,
    대표적으로 김현 선생이 “…되기”란 개념이나 표현을 자주 쓰곤 했죠.

    요컨대, “생각의 무늬(figure of thought)”라는 점에서 본디 문학적이라는 것이 핵심.

    저도 한때 문학판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으니
    문학적 발상이나 표현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구요…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게 유치하다는 거죠.

    또, 왜, 들뢰즈가 영국 사상가들이나 소설가들에게 끌린다는 것을 가끔 언급했는지를 생각이나 해보고나서

    (굳이 말하자면, 더 일찍부터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동물적인 역동성에 들뢰즈가 끌렸기 때문에…)

    그러고나서 “…되기”란 말을 흉내낼 필요가 있지요.

    그러니까, “…되기”를 말로만 떠들지 말고
    먼저, “…”가 실제로 되어 보란 말이지요.

    “여기가 로두스닷, 여기서 뛰어라”는 거지요.

    2. 기본적으로 철학사 연구에 공이 큰 들뢰즈는
    니체와 스피노자를 제대로 잘 부각시켰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데요.

    한국의 얼치기 지식인들이 들뢰즈 등의 흉내를 내면서
    “…되기”를 쓰게 된 거지요.

    모진경씨, 모정환씨 등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례.

    모진경씨는 그나마 모정환씨보다는 분명 두세 등급은 높은 편이고
    한국의 지적, 사상적 수준으로는 걍 봐주고 넘어갈만 하지만요.

    3. 본디, “경철수고”에서 소외 개념을 화폐에 연결시키면서
    자본주의를 철학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 공저자 중의 한 명인 모제스 헤스의 기존 논의를
    맑스가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결과라고 봐야겠지요.

    독일어가 가능하실테니
    모제스 헤스 글을 직접 읽어보세요.

    마치 “경철수고”를 읽는 느낌이 팍팍 와요.
    저도 처음에는 엄청 충격받았지요.

    PDF 파일 다운로드는,
    http://www.archive.org/details/sozialistischeau00hess

    또 그 전에, “공동체” “유적 존재” “소외” 개념 등은 포이어바하로부터 맑스가 채용한 것이구요.

    이런 점에서 냉정하게 따지면 젊은 맑스의 독창성이라는 것은 없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맑스가 왜 어째서 위대한 사상가냐 라는 건데요.

    맑스는 다윈과 같은 의미에서의 위대한 사상가는 아니지요.

    반자본주의 사상, 그리고
    19세기 중반 시점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개념적-이념적 준별 등은 맑스 이외에도 많았으니까요.

    이것은 역시 기본적으로,

    초기의 철학적 비판으로부터 출발해서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대한 치열하고 체계적인 비판으로
    어느 정도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옮겨갔다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모정환씨도 설익은 구라 푸는 대신에
    자기 시간과 정력을

    오늘날의 부르주아 경제 이론을 비판하는 일,
    혹은, 자기가 경제학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게 어렵다면,
    부르주아 경제 이데올로기나 담론을 비판하는 일에 바쳤으면 더 좋았었겠지요.

    맑스도 첨에는 고전파 경제학을 모르니
    수십년을 바쳐서 열심히 노트에 베껴가며 공부한 거잖아요?
    모르는 건 엥겔스한테 묻기도 하고…

    맑스의 수학 노트 보면
    심지어 미적분 열심히 공부한 거 잘 알 수가 있지요.

    그런데, 모정환씨는 경제학을 ㅈㅗㅈ도 모르니,

    결국, 한편으로 사상가인 척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맑스 경제학과 경제학자 자체를 그렇게 쉽게 매도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제 얘기는, 다른 “..되기”는 엄청 떠들어대면서
    정작 “맑스 되기”는 왜 안하냐 라는 거지요.

    4. 그리고, 저는 모정환씨 그 양반 글의 문체가 넘 짜증나요.

    글 내용이 3류 키치 수준이라서 형편 없는 것은 그렇다고치고
    읽기 자체가 힘드니, 원…

    한국어를 너무 학대하고 있잖아요.
    그 딴 식의 문체는 그나마 관심있던 사람들을 내쫓는 역할만 하고 있죠.

    “공통 안되기” “삶 초월적”의 대표적인 사례지요.

    5. 또, 들뢰즈나 네그리 책 몇 권 읽고나서 대충 짜깁기 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가 땀을 흘려가면서

    맑스, 칸트, 헤겔, 니체, 스피노자, 프로이트 등을 꾸준히 읽어내는 일이 필요한데…

    이거는 상당히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든 일이거든요.

    요즘의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의 지적 유행도 이런 맥락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단물이 다 빠지면, 또 다른 서구 애들 거 찾아내고 수입해서
    다시 몇 년 우려먹고 살아가겠지요…쩝

    삼성이 퀄컴 등에 로얄티 주는 일과 닮은 꼴이지요.
    결국, 주요 원자재 및 기술을 수입해서 조립하는 수준.

    다만, 삼성보다도 못한 점은
    모정환씨 수준으로는 절대로 외국으로 수출할 수가 없다는 것.

    암튼, H님 수고 많았어요.

    1. 1. 예전부터 들뢰즈 얘기가 많이 나와서 저도 ‘의미의 논리’를 읽다가 도저히 해독이 안되서 그냥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도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 이런 식의 논의를 전개하는 것 같더라구요 (맞나요?) [인지자본주의]에서 비슷한 문구를 인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3. 독일어권에 살지만 독일어 잘 못합니다. 평상시에 쓸 일이 없어서요 --; 간신히 해독하고 술과 고기와 소세지를 주문하는 수준이지요 ㅎㅎ MEGA를 읽어야 하는데 잔뜩 스트레스만 받습니다.

      5. 저는 사실 맑스만 읽어도 죽을 것 같애요. 뭘 그리 많이 쓰셨는지. EM님이 예전에 그의 엉덩이 종기에 대한 글을 쓰셨는데, 그런 면에서 종기에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 저는 헤겔은 그래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니체를 읽다보면 통쾌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향후 5년 간 특히 지젝, 아감벤 등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왜 맑스 연구에 현대 철학자들의 논의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치/사회 운동을 이론적으로 정초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구요. 제가 일종의 가치론 근본주의자인데, 이름 있는 학자이건 그렇지 않건, ‘가치론의 위기’라는 식의 표현이 나오면 그 시점에서 포기하는 편입니다.

      1. 들뢰즈 등 프랑스 쪽 애들 해독 안되는 건 당연해요.

        한국 독자들 상당수가 해독 안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건 잘못된 거죠.

        걔네들 문체가 원래 그래요.
        비비꼬여 있고, 했던 말 돌려서 또하고 그러니까요.
        자기 자신들도 주체못하고 모호하게 말할 때도 많지요.

        게다가 번역도 개판인 경우가 많아서요.

        들뢰즈, 푸코보다 한 세대 위가 롤랑 바르트인데
        바르트 글 읽어봐도 뭔 말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지요.
        (저는 불어 못해요.)

        얼토당토 않은 수식까지 동원하는 라캉은 거의 사기꾼 수준이고요.
        물론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합리적 핵심은 때때로 이해되지만요.

        소위 소칼 사건이 그런 걸 잘 드러내주고 있지요.

        반면에 17세기의 데카르트는 글이 비교적 명료하지요.

        프랑스에서 10년 이상씩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에게
        술자리에서 물어봐도

        그 사람들도 전공자가 아닌 한
        들뢰즈, 푸코 읽기가 어렵다고 해요.

        일일이 책이나 글을 문장 단위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걔네들 각자가 강조하려는 게 정확히 뭔가만을 파악하면 되요.

        맑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대학원 석사 시절인 1980년대 초중반에 헤겔을 열심히 읽었는데
        그 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죠.
        (전 석사만 하고 공부는 때려쳤지요.)

        “대논리학” 같은 것은 문장들이 길지 않은데도
        이해가 어려웠어요.

        하루 종일 읽어도
        서너 페이지 못넘기는 경우 많았지요.

        현대의 영미철학에서
        언어 문제나 과학 이론 구성의 철학적 근거를 파고들게 된 것도
        다 그런 배경이나 풍토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영어권이 비교적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글을 쓰는 풍토가 널리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어요.

        저도 독일어는 헤겔과 맑스 읽을 때 빼놓고는 전혀 쓸 일이 없어서
        어렵기는 마찬가지예요.
        늘, 영어책이나 일어책을 옆에 두고 확인하곤 해요.

        도리어 문제는 우리가 한국어를 제대로 써 본 역사가 짧기 때문에
        한국어로 글 쓸 때 고통스럽다는 거죠.

        독일어 같으면 칸트나 괴테가 있었고
        영어 같으면 베이컨이나 셰익스피어가 있었고
        불어 같으면 몽테뉴 및 데카르트나 라신느가 있었는데…

        걔네들 전통은 300-400년 되지만
        우리는 8.15부터 치자면 겨우 60년 겨우 넘긴 셈이니까요.

        저는 요즘 글쓰는 준비하다가
        심지어 라틴어 원본을 들여다 보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라틴어 전혀 못하지만
        영어본의 주요 개념이 라틴어 원어로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할 때가 자주 있거든요.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아예 찾아볼 엄두도 못냈겠지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학 문제는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고 봐요.

        아무리 불어나 독어를 잘 한다고 해도
        역시 10년 이상씩 배운 영어가 편하고

        또 영어를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번역이나 해석 과정에서 어휘 선택의 면에서는
        일어가 편할 때가 많으니…

        머, 한국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죄로
        무조건 디스카운트당하는 거죠.

        영미권에서 태어난 애들은
        우리가 영어하듯이, 혹은 그것보다 더 잘
        불어나 독어를 하게 되는 것이니…쩝

        어학이 딸리니 같은 시간에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아주 떨어지는 거죠.
        자기 생각을 발표하고, 토론/설득하는 능력도 밑바닥인 거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각해야 할 시간이 없게 되는 거구요.
        책을 읽고 해석하는 데에 시간을 넘 많이 뺏기니…

        인문사회과학 쪽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학자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쩝

        그래서 번역이 중요한 건데
        정말 우리 번역 수준은 일본보다 훨씬 뒤쳐져 있거든요.

        번역에 관해서는
        앞으로 몇 십년이 더 지나야 일본과 경쟁할 수 있겠지요.

        반면에, 중국애들은
        이미 중국어가 글로벌하게 상당히 중요한 언어가 되어버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주 자신만만…

        게다가 어순이 같으니 중국 애들이
        우리보다 영어나 다른 서구어를 더 잘하게 되는 것도 당연해요.
        최소한 말하는 기능에 있어서는 아주 분명한 사실이지요.

        머…이렇게 말하니 졸라 한심한데
        그래도 버텨야지요.

        H님 홧팅!

  2. 안녕하세요. 몇 년이 지난 글이지만, 최근에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이 글에 공감이 많이 돼 댓글을 남겨 봅니다.

    1. 저는 1번 글의 마지막 문단이 가장 눈에 띕니다. 조정환씨(저자)는 인지자본주의에서 이윤과 이자, 심지어 임금조차도 지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고 말합니다. 정규직 임금노동 부분이 여성, 불안정, 이주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지대임금(=임금지대)를 획득한다고 하죠. 게다가 현대의 지배적 생산은 상품의 생산이 아닌 삶정치적 생산이고, 금융자본이 자립해 생산자본과의 관계가 역전되며, 평균이자율이 먼저 결정되고 평균이윤율은 이에 종속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가 왜 ‘자본’주의 사회인지, 잉여가치(?)를 전유하는 주체가 왜 ‘자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자본은 차라리 지주에 가까운 범주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저자는 기존의 관계도 잔존하여 공존한다는 식으로 일종의 이론적 우회로를 마련하는 듯 하지만, 상술한 경향들이 지배적인 사회를 왜 (인지)자본주의라 정의하고, 왜 마르크스를 빌어 이를 설명하냐는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변명으로 느껴집니다.

    2. 다른 쟁점들은 차치하더라도, 저자에게는 3번 글의 네 질문에 대해 명확한 이론적 설명을 해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이론들보다 우월한, 엄밀성과 설득력을 갖춘 것이어야 할텐데, 책을 읽어보고 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무망해 보입니다. 심지어 이런 방향으로의 이론적 발전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3. 이 글과는 관련 없는 얘기지만, 책 내용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각종 철학적 용어와 논의들은 많이 당황스럽고 실망스러웠습니다. 신경체계, ~되기, 곳들, 때들, 미분, 상호섭동, 자기생성, 되먹임 같은 한국말도 벅찬데 여기에 카오스, 다이어그램, 알고리즘, 카디브리스, 스킬라, 카이로스, 크로노스 등의 외국어에다 들뢰즈, 가따리, 푸코,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들까지 튀어나오니 가독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현시대에 다시 쓴 자본론이라고 해서 어떤 거창한 일반 이론서를 기대하고 읽었는데 이건 뭐… 통계 자료 하나 없는, 정작 현실의 자본의 운동에 관한 경험적, 구체적, 체계적인 분석은 없는 이 책의 속살이 현시대 ‘좌파 이론’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 씁쓸했습니다.

    뭣도 모르는 놈의 개인적 감상이 너무 길어진 것 같네요. 좋은 하루 되시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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