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 나꼼수와 마르크스

차로 오가며 가끔씩 나꼼수 듣는 게 낙이었다. 나는 그다지 열혈 청취자는 아니었지만(4-5편 들었나?), 정봉주 전의원이 잡혀가게 생겼다니 기분이 그다지 좋진 않다. 뭐 누구는 고소해 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요새 나꼼수 까는 것도 이쪽(?) 바닥에선 유행인 모양인데… 나는 깐 건 절대 아니고ㅎㅎ… 그냥 그걸 소재삼아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해 난잡한) 짤막한 글을 하나 써봤다. 고려대학교 교지 “고대문화” 겨울호에 실렸다. (따라서 예상독자는 대학 1~2학년생?) “나꼼수”와 “마르크스”를 대놓고 함께 다룬 첫 번째 글이 아닐까 한다 ㅋㅋㅋㅋ

 

나꼼수와 마르크스: 우리의 ‘가치이론’은 당신의 ‘말빨’보다 강하다

0. 도입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연일 신문과 뉴스포탈사이트의 헤드라인을 현란하게 장식하는 경제위기에 관한 각종 지표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지구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다양한 불만들. 또한 이와 같은 세계적인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가카’의 온갖 ‘꼼수’들과 그 반대편에서 터져나오는 반값 등록금과 무상급식, 청년실업 해결에의 요구.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식으로 귀결되느냐에 따라 오늘 한국의 청년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이 상당 정도로 결정될 것임엔 분명하지만, 대체 이런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관두고라도—에 대해선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이해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른 한편, ‘이해’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19세기 유럽의 사상가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물적 힘(material force)에 주목할 수도 있는가 하면, 요새 온/오프라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를 통해 널리 퍼지고 있는 방식, 즉 ‘모든 것은 가카의 꼼수다’라는 식으로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1. ‘나꼼수’ 식 현실 인식

‘나꼼수’를 만드는 4인방의 실제 생각도 그렇게 단순하진 않겠지만, 그들에 의해 유포되는 ‘모든 것은 가카의 꼼수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프레임이 오늘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얼마전 보궐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일이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가 지금과 같이 대규모로 그리고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에서, ‘나꼼수’와 같은 매체가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인식의 한계는 매우 명확하다.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의 세금으로…’, ‘회사를 개인의 재산증식수단으로 사용하다니…’ 등이 ‘나꼼수’ 식 분노의 대표적인 형태인데, 이에 따르면 우리는 일단 대통령을 갈아치워야 한다. ‘나꼼수’의 대표격인 김어준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마따나 ‘지도자의 품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에서 그런 품격 있는 지도자로 거론되고, 또한 ‘나꼼수’를 통해 공공연히 홍보되는 인물은 잘 알다시피 조국, 문재인, 안철수 등이다. 그러나 ‘나꼼수’는 대통령이 저런 인물들로 바뀌면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저런 인물들은 ‘비전’과 ‘도덕성’을 가진 인물임을 강조할 뿐이고, 우리는 그저 만약 저들이 대통령이 된다면 ‘BBK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질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대체로 BBK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즉 BBK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좋아졌을지에 대해선 도통 오리무중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범지구적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이 겪는 특수한 어려움을 암시하며 국민의 동참을 호소한 김대중이 차라리 솔직했을 뿐 아니라 정확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대중이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어쩌면 다음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그러나 ‘어떤’ 정권으로?)를 이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폭발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민중의 분노를 해석하는 문제, 이런 사태가 앞으로 어떤 국면들을 맞을 것인지를 예측하는 문제, 현재의 투쟁들을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끌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 요컨대 앞으로 대한민국 경제와 사회를 어떻게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끌고 통제할 것이냐의 문제는 ‘나꼼수’가 제안하는 방식보다는 훨씬 복잡한 사고와 세심한 실천을 요한다. 부언하자면, 현재의 사태를 대중의 ‘분노’라는 감수성 또는 막연한 ‘정의 관념’의 문제로, 또는 ‘부도덕한 지도자’의 문제로 묶어두는 것은 사실 저 기득권 층의 이해관계와도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최근의 ‘점령하라!’ 운동이 국내의 보수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방식을 보라. 그것은 ‘부도덕하고 뻔뻔스런 몇몇 금융회사 CEO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라는 식으로 종종 채색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부도덕한 지도자’로 치면 ‘가카’도 울고 갈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가 존경받는 학자 출신인 마리오 몬티(Mario Monti)로 바뀌긴 했지만, 몬티 또한 현재 글로벌 위기의 가장 큰 주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 골드만 삭스 출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순히 인물을 잘못 뽑은 것이 아니라, 현재 위기의 성격을, 즉 특정인의 능력이나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심원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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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만 삭스의 유럽 점령도”?
(위 그림이 곁들여 나온 The Independent 기사도 읽어볼 만하다.)

요컨대,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분노의 근원이 무엇인지, 다시 말해, 분노를 일으킨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분노를 갖게 만드는 현실의 핵심적인 물적 메커니즘이 무엇인지를 캐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꼼수’와 같은 문제제기의 역할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보다 한걸음 더 내딛여야 하는 까닭이다.

2. 마르크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기가 총체적이고 범지구적 성격을 가짐을 이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를 덮치고 있는 작금의 혼란은 범지구적 맥락 안에서 보지 않으면 해결을 구하는 것은 물론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이 범지구적 혼란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지난 1970년대부터만 따지더라도 여러 번의 공황과 위기를 겪어왔지만, 이제까지 그것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2008년 이후 일련의 사태는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미국의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고 있는 일련의 ‘점령하라(occupy)!’ 운동, 영국이나 칠레 등지에서의 거국적 등록금 투쟁, 그리스의 총파업,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아랍의 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라. 현재 대중의 불만은 단순히 몇몇 금융기관들의 방만한 경영과 비도덕성이 아니라 경제의 작동과 운영 전반을 겨냥해 제기되고 있고, 나아가 그냥 경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재생산과 관련하여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사회가, 그리고 그 물적 기반으로서의 경제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재생산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비록 지금은 상업광고의 문구 정도로 추락했지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질 때 우리는 오늘날 세계를 ‘자본주의’라는 용어로써 묘사하곤 한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란 한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이 이뤄지는 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우리가 현대사회를 자본주의로 파악한다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인격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구별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이라는 영역에서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이 관계가 경제적 재생산의 다른 영역들(교환, 분배, 소비)에서, 나아가 사회적 재생산 전체에서 재현되는 역사특수적인 방식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사실 위와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담 스미스를 중심으로 한 고전정치경제학(classical political economy)의 주된 과업이었지만, 그것이 가장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다뤄진 것은 마르크스의 미완성 주저 {자본론}에서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물질적 부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가치’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모든 상품의 가치는 거기 들어있는 노동시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은 특수하게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고용계약에 기반해 이뤄지기 때문에, 가치의 실제적인 생산자인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내어줄 수밖에 없고, 자본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가 노동자로부터 받아낸 잉여가치의 일부를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여한 사회의 각 계급들(잉여화폐소유자, 토지소유자 등)에게 분배해 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 자본주의 하에서 인구 증가의 의미, 선진 국민경제의 해외로의 팽창, 경제의 전체적인 순환, 생산부문들 간의 경쟁, 생산에서 금융과 상업의 역할, 자본주의 경제에서 구시대의 잔재이기도 한 지대의 특수한 존재형태 등을 전체 경제의 운동과 관련해 다룬다.

사실 여기까지만 놓고 본다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내놓은 이론은 기존의 고전정치경제학의 완성이자 세련화라고 불러도 좋았을 것이다. 실은 그것만 가지고도 커다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기여는, 위에서 간단히 묘사한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메커니즘이 모순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적시했다는 데 있다. 즉 자본주의는 서로 반대되는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들—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그리고 그런 대립의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화해’에 기초해 있으므로 끊임없는 모순 속에서 발전하는 체계이며, 이 모순은 공황과 위기를 통해 일시적으로 해소되기도 하지만 곧 전보다 크고 복잡한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의 이론이 과거엔 옳았을지 몰라도 더 이상 오늘날의 사회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의 특유의 방법론을 오해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현대사회의 물적 재생산의 가장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해 점점 구체적인 규정들을 덧붙임으로써 현실감을 더하는 구조를 취한다. 즉 그가 {자본론} 제1권에서 내놓은 상품의 가치결정이나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착취관계 등에 관한 논의는 바로 그런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 곧장 적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컨대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임금을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지만, 우리가 현실의 임금을 실제로 다루기 위해선 그것을 규정하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한편으론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좀 더 구체적인 범주들을 도입하는 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하는 각종 역사적인 특수형태들을 도입하는 데 열려있다고 평가하는 게, 그리고 그런 열린 공간을 채워넣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인정하는 게 마땅하다.

사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틀렸다거나 낡았다기보다는) 미완성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는 위와 같은 방법론에 입각해 세 권짜리 저작 {자본론}에서 자신의 이론을 어느 정도 밀어붙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런 작업을 오늘날 경제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까지 충분히 수행하진 못했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은 오늘날 경제의 핵심적인 동인으로 떠오른 금융이라는 문제, 20세기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국가의 경제적 기능, 제국주의, 국제적 착취, 세계화 등의 용어들로 논의되곤 했던 자본주의 경제의 범지구적 측면 등을 충분히 다루는 데 부족함이 있으며, 특히 198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진전되고 있는 이른바 ‘지식기반사회’ 또는 ‘인지자본주의’를 다루는 데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한계는 마르크스의 가치이론(value theory) 안에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한계이지, 최근 국내에서 일정한 주목을 끌기도 했던 {인지자본주의}의 저자가 주장하듯이 기존 이론의 폐기를 요구하는 한계가 아니다.

3. 가능한 대안들?

이 자리에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론(가치이론)의 현대적 발전방향 또는 동향에 대해 자세히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가 제안하는 것과 같은 정치경제학적 방식으로 현대의 경제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현재와 같은 위기국면에서 ‘대안’으로 고려되고 있는 것들이 갖는 의도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기만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금융의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2008년 이후 세계경제에 불어닥친 위기가 금융적인 속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수많은 비난들이 보통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조차 없는 복잡한 금융적 수단들의 무분별한 증식에 돌려지곤 한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국제적 자본이동을 규제하는 토빈(Tobin)세 도입 등을 통해 금융을 규제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투기적 금융자본은 ‘일부 투기세력’만의 문제일까? 오히려 그것은 특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지난 30년 사이에 경제와 우리의 사회적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예컨대 2000년대 초중반 한국사회를 괴롭혔던 ‘신용카드 대란’은 그저 ‘대란’일 뿐인 게 아니라 신용카드로 대표되는 ‘신용’이라는 도구가 이제는 개개인들의 삶에 깊숙하게 뿌리내렸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우리는 ‘신용’이나 ‘금융’에 대해 (한편으로는 인위적인 규제책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전보다는 더 정교한 시각을 가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위의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탐욕성을 비판하면서 대안적 가치들, 예컨대 생태적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그간 ‘가치(관)‘으로서 다뤄졌던 생태라는 문제가 최근들어서는 그간 이를 무시해왔던 자본에 의해 점차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하나의 ‘산업’으로서 고려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으로서의 생태는 예컨대 자동차 만드는 회사에 방해가 될 뿐이지만, 산업적인 관점에서 고려되었을 때 그것은 ‘전기차’라는 새로운 ‘시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반전은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목격되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산업분야들을 창출하고 있다. 건축물에 대한 생태친화적인 새로운 환경기준이 확립된다고 해 보자. 이런 일이 국지적으로만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런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인 기업의 이윤추구행위에 걸림돌이 되겠지만, 만약 그것이 전지구적으로 확립된다면 그것은 자본 전체에겐 마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를 새로 건설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경제의 조직형태, 재생산 메커니즘을 관할하는 물적 힘이라는 것은 결코 ‘가치(관)’의 문제가 아님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향후 발전모델로서 거의 모든 정치세력들에 의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옹호되고 있는 복지국가를 보자. 많은 경우에, 즉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저출산 등의 문제에서 ‘복지’는 소득이 충분치 못한 계층에 대한 시혜라는 차원에서 주로 접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의 ‘선진국’들의 경험에서 보듯이 복지국가의 핵심은 못사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베푸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단도직접적으로 말하면, 개별 개인이나 가계에 무질서하게 맡겨져 있던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국가가 나서서 공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거대한 사회적 프로젝트다. 몇몇 서유럽 나라들에서와 같이 이것이 만약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그 나라의 이른바 ‘국민적 생산성’은 (아이들에게 집에서 각자 밥차려주는 것보다 한 곳에 모아 한꺼번에 먹이는 게 훨씬 효율적이므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참고로 현재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종전엔 주부의 가사노동 등에 의해 비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던 활동들이 경제적 영역 안으로 편입되면서 자본에게는 엄청난 시장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복지국가 도입을 꺼리는 것은 과거엔 개개인들이 사적으로 부담하던 비용들을 복지국가 하에선 자신이 거두는 잉여가치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지출(조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와 같은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적 의미—이는 단순히 돈이 얼마나 들 것이냐 하는 예산책정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않은 채, 그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에 기대 복지국가를 미래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이다.

4. 맺음말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번 공황과 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커다란 재편을 낳지 않고서는 해소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재편 이후의 모습은 민중들의 저항이 어느 정도일 것이냐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민중들의 다양한 외침들은 한편으론 앞서 말한 현재 위기의 총체성과 범지구성의 표현이기만 한 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론 현재 위기의 총체성과 범지구성을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은, 지금 뒷짐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이 투쟁은, ‘금융의 횡포’나 (‘나꼼수’가 재기발랄하게 제기하는 것과 같은) ‘가카의 꼼수’에 대한 투쟁이어도 좋고, ‘복지국가’나 ‘생태적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이어도 좋다.

그러나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재 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었을 때—그러니까 ‘혁명’이 나지 않는다면 말이다—우리는, 지금보다는 좀 더 질서는 잡혔을지언정 결코 금융의 힘이 전만 못하진 않은 세상, 자본이 생태적 가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기야 하겠지만 유기농음식, 환경친화적 건물, 전기자동차 등의 형태로 생태를 자신의 가치영역 안에 길들여놓을 세상, 복지국가는 되었으되 민중의 고통은 여전한 세상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런 세상에 대응하는 이론적 무기로서 마르크스는 ‘가카’만 물러나면 자진해산하겠다는 ‘나꼼수’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마르크스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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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oughts on “[201112] 나꼼수와 마르크스

  1. EM님

    EM님 얘기 기본적으로 맞는데요…

    고대문화 독자들은 EM님 글이 재미있다고 느끼지는 않을 듯
    (ㅎㅎㅎ…재 뿌리려는 건 아니구요…아마도 그럴 거라는 얘기)

    우훔…제 얘기 핵심은 우리가 “나꼼수”한테 배울 건 뭐 없냐는 거겠지요.

    전 있다고 봐요.

    우석훈이 말한 것을 잘 음미해 봐야 하겠지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0312115252&code=990000

    물론, 전 우석훈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입장은 별로지만요.

    저는 2010년에 출간된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도 배울 게 있다고 봐요.

    물론, 어떤 점에서는 나꼼수나 장하준이 먹히는 이유는 바로 그 이념적, 이데올로기적 한계(타협성, 어정쩡함 등)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타협적이지 않은 얘기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니까요.)

    반면에, 맑스 자신을 포함해서 맑스주의자들에게 익숙한 게 바로
    타자의 이념적, 정치적 한계를 지적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하지만, “수사학의 효과”이라는 범주를 갖고 들어가면
    얘기는 상당히 달라진다는 게 제 생각예요.

    아까 위에서 말한 대로 “나꼼수” 등이
    이념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사적 효과를 갖는 것인지
    아님, 바로 그 이념적 한계 때문에 수사적 효과가 더 커지는 것인지는
    더 깊이 따져봐야겠지만요…

    암튼, 저는 우리가 나꼼수 멤버를 맑스주의자로 만들던가
    아님 우리가 그들보다 더 재미있는 걸 내놓지 않는 한,
    그들의 이념적,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고 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문제는 제한된 저의 경험을 놓고 보았을 때
    아주 재미 있게 굴던, 혹은 놀던 사람도 맑스주의자가 되면서부터
    자기 스스로도 그렇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재미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대체 왜 그런 거죠?)

    암튼, 이 주제와 관련해서
    프랑스 소설가 Eugène Sue에 대한 맑스의 언급들을 쭉 훑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드네요.

    맑스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0)에서
    “감상적 소부르주아 몽상가”라고 딱지를 붙였던 으젠느 쉬는
    1840년대 초에 아주 많이 팔린 소설 을 쓴 적이 있거든요.

    그 소설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미스테리 장르의 원조에 해당하는데 당시 유럽 전역에 걸쳐서 인기를 끌었지요.

    으젠느 쉬는 1850년에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구요.

    여기에 덧붙여, 노회찬과 나꼼수를 비교해보는 일도 필요할 것 같구요.
    이런 점에서 이외수, 김제동, 이효리 등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안철수도 마찬가지구요.

    정치인 및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의 인기,
    그리고 엔터테이너, 혹은 좁혀서 소셜테이너 문제는 그리 간단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또, 노빠들의 노무현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구요.

    문제는 그런 인물들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그런 인물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열망이지요.

    그런 인물들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열망에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고 부정적인 요소도 있을테니

    우리가 그것들을 조심스레 잘 따지고 가려내야 겠지요.
    우리가 얻어내려고 하는 게 바로 그 열망이니까요.

    우리는 단지 그런 인물들을 혹은 세상을 비판해버리고 끝내려는 게 아니니까요.
    혁명적 실천이란 게 단지 말이나 이념적 차원의 비판으로 그친다면 넘 웃긴 거니까요.

    물론 혁명적 실천 자체도 어려운데 즐거움과 재미까지라니
    정말 힘든 것이긴 한데요…

    암튼 구 소련 해체 및 독일 통일 때 넘 충격받은 제가
    문화연구 내지는 문화평론을 하게 된 것도
    사실은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었는데…

    이거 수능식으로 정리하면
    “불만, 분노, 원한 + 이론적 인식 + 즐거움, 재미, 쾌락”이 되려나?

    암튼, 더 토론해 보기로 해요.

    1. 최근에 장문의 덧글을 많이 달아주시네요. 긍정적인 토론을 이끌어주셔서 운영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매우 감사드립니다. :)

      그런데 저는 말씀하신 내용에 크게 공감하기는 하면서도, 크게 동의되진 않습니다. 아마도 그건… 우선 저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스탠스’ 때문이기도 할 거고… 다른 한편으론 (지난번에도 언뜻 말씀드렸던) 저나 제 이후의 ‘또래’들이 (sunanugi님의 그것에 비교해) 어느정도 공유할만한 어떤 분위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전자와 관련해서는 저 자신이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있겠네요.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리면, 제겐 함께 어깨를 걸 ‘동지’보다는 진득하게 공부할 ‘동료’가 더 절실합니다. 따라서 만약 제가 위 글을 통해 어떤 ‘정치적 효과’를 구하고자 했다면, 바로 후자와 같은 이들, 즉 나꼼수만으로는 뭔가 좀 찜찜하다고 여기는 몇몇 (소수의?) 이들에게 어필하는 것이었지요.

      두 번째, 제또래의 분위기 문제도 사실 간단합니다. 어쩌면 (박정희가 총맞았을 때 이미 성인이셨던) sunanugi님께는 ‘문화’라는 것이 새로운 그 무엇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장 저만 같아도 그건 일종의 ‘상수’입니다. 늘 거기 있는 것이죠. 전 사실 ‘저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매력’이 그다지 부럽지도 않고, 또 극복할 그 무엇이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전 그냥 나꼼수를 듣고, 같이 웃습니다.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고, 공감도 많이 됩니다.

      네… 세대니 뭐니 하는 문제와 관계없이…. 요즘 어린 친구들도, 실천운동을 하다 보면 맥빠지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럴 때 나꼼수 같은 프로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배우자, 이기자…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전 정말 나꼼수들이 부럽지도 밉지도 않아요. 요새 유행하는 뿌리깊은 나무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길이 있고, 제겐 저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들 모두를 제가 주로 고민하는 어떤 ‘이론적 영역’에 끌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1. EM님께

        A. 문화와 관련된 화두

        A-1. 문화가 상수인 것은 어느 세대나 마찬가지인 측면이 있다고 봐요.

        굳이 차이가 있다면, 예컨대 음악의 경우, 그게 무엇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테지요.

        예컨대 포크송이냐 락이냐, 락도 클래식락의 단계냐 아니면 X-Japan을 포함하는 단계냐, 혹은 펑크락이냐 모던락 아님 랩 메탈이냐 하는 차이 정도…

        A-2. 문화와 관련해서, 있음직한 더 큰 차이를 굳이 짚어보다면,

        문화 콘텐츠(이 용어 쓰기 싫지만 할 수 없군요…쩝)가
        특정 세대 혹은 그 세대에 속하는 사람의 삶에 얼마나 깊이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게 있을 테지요.

        이건 일차적으로 소득 수준 및 소비 수준에 좌우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 나름대로 사회적 관성이 있고 세대 간에 큰 차별성이 있어서
        레이몬드 윌리암즈가 ‘느낌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라고 불렀던 그런 것에 속한다고 봐야겠죠.

        담에 기회가 생기면 바로 이 문제에 관해
        쪼금 더 깊게 이야기하고 싶네요.

        A-3. 위 두번째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 세대별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문화에 대한 성찰적인 자기의식이 어느 정도로 생활의 밑바탕에 터잡고 있는 하는 것일텐데요.

        저는 제 세대나 EM님 세대가, 혹은 한국의 각기 다른 세대가
        위 1과 3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봐요.

        (전 락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뽕짝보다 더 문화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일단, 걍 다른 것일 뿐이지요.)

        다만, 2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요.
        (바로 이 점에서 락음악과 뽕짝이 각 세대의 삶에 대해서 갖게 되는 문화적으로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는 거겠지요.
        약간 오바해서 말한다면, 70년대 락 음악은 제 삶에 있어서 내재적인데 반해서 뽕짝은 그렇지 않다능…)

        그런데, 여기에서는 세대간의 차이 못지 않게
        세대 내 개인간의 차이도 중요한데다가

        장르나 미디어와 관련해서, 사회 전체가 변해가는 측면도 있어서
        (문학, 문자 중심에서 영상, 노래, 몸, 퍼포먼스 중심으로의 이행)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B. 함께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이론적 친구가 거의 없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네요.
        또, 이론적 작업을 자기 삶의 기본 방향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C. 제 말은 단순히 “배우자, 이기자”란 얘기는 아니었는데
        제 표현이 너무 나이브하고 너무 통념적 어휘들에 의존했던 듯…쩝

        D. 제가 의도했던 것은

        D-1. 대중적 열망을 정치적, 문화적으로 획득해내야 한다.
        D-2. 레토릭에 대해서는 레토릭으로 싸워야 한다.
        D-3. 더 나아가서, 이론도 넓은 의미에서 담론인 한, 레토릭과 관련된 전략을 가져야 한다.
        (EM님의 글이 레토릭이나 전략이 부족하다는 얘기는 아니었구요.
        따지고 보면, EM님 반응으로 봐서, 오히려 앞의 제 댓글이 레토릭과 전략이 없었다는 얘기…허걱)

        E. 암튼, 제가 늘 두려워 하는 것은,
        D에 유의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우리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멸종 생물이 되어버릴 거라는 거죠.

        F. 아 참, 그리고 고백할 게 있는데

        전 “나꼼수” 한 번도 안들어 봤어요…
        (헷! 또, 책 안보고 서평하는 식?)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재미있다고들 하고 있지만
        워낙, 전 읽어야 책과 들어야 할 음악과 확인해봐야 할 이미지나 동영상들과 올라야 할 산들과 마셔야 할 술병들이 많아서리…쩝

        다만, 정봉주가 조선일보 기자에게 전화로 욕하며 호통친 거
        아주 짧은 몇 분짜리 음성 파일만
        누가 술자리에서 강제로 들려줘서 억지로 들어본 정도지요.

        저도 “나꼼수”가 그렇게 “부럽지”는 않아요.

        그건 대중적 열망과 관련된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를 보면 잘 알 수가 있는 거죠.
        “노무현 -- 황우석 -- 촛불 집회 -- 미네르바 -- 나꼼수 및 안철수”이라는 흐름을 크게 보면 그렇다고 생각해요.

        워낙 이런 종류의 이슈나 인기라는 게 어찌 보면 거품과도 같은 거니까요.

        하지만, 제 초점은 잠재적으로 변화를 원하는 대중적 열망이 엄존하고 있는 한,
        우리가 늘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겁니다.
        (당연한 얘길 또 “꼰대”처럼 늘어놔서 죄송…)

        사실, 전 다가오는 총선이나 대선이 벌써부터 상당히 지겹거든요.

        부르주아 선거는 사람들을 다시 속일테니까요.
        또,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서요.
        게다가, 술자리에서 쁘띠 부르주아 관점과 상상력으로 정치 얘기하는 거 질색인데…어쨌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 보면 그런 얘기를 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장문의 댓글을 다는 것은
        이 블로그가 맘에 들어서 그런 거예요.(아부 모드…넙죽 and 굽신)

        Happy New Year!

        1. ㅎㅎㅎ 이제 이해가 좀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장문의 댓글은, 정말 늘 고마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재미지고 찰지고 도움도 되니까요! :)

          D와 관련… 저도 나꼼수에 대한 몇몇 반응들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슴다. 특히 D-2의 문제…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열폭”이라고 하죠? 그런 반응들… 말이 아무리 옳더라도, 구리다는 걸 부정할 순 없죠. 또한 D-3과 관련해서는… 사실은 저 나름대로는 위 글을 쓸 때 그런걸 염두에 둔 면도 있는데.. (좀 역부족?) 암튼 제 생각은 굳이 나꼼수에 대항하기보단 그것을 짚고 넘어갔을 때 마주칠법한 일종의 징검다리 같은 것을 하나 마련해 본다면 뭐가 있을까… 하는 거였는데..

          그나저나 나꼼수 한번도 안 들어보셨다니… ㅎㅎ 뭐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요. 저도 아이패드만 없었더라면… 그리고 운전만 하지 않았더라면 들을 일이 없었을 건데… 암튼 말씀하신 그 조선일보 기자.. 대목은 저도 들었는데, 정봉주, 쪼끔 멋지더군요. 제가 양아치 또는 양아치틱한 것을 좀 좋아해서리…

        2. 아.. 그리고 하나 더요. 제가 문화에 대해 세대간 차이를 굳이 언급한 것은… 어쩌면 님께서 A에서 하신 말씀이, 매우 지당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저와 가까운 새대에겐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할만한 것인 반면, sunanugi님쪽에선 사실상 (앞서 글에서도 고백하셨듯이) 일정한 고통을 수반하면서 어렵게 깨달은 그 무엇이 아니냐는 겁니다(물론 sunanugi님 개인이 어떠셨느냐와는 별개로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sunanugi님은 나꼼수의 인기 또는 인기비결에 진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제가 보기엔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시는 것 아니냐…. 말하자면 대충 이런 심증?을 저는 가졌던거죠.. ㅎㅎ

  2.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란”에서부터 “사회적 재생산 전체에서 재현되는 특수역사적인 방식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드릴께요.

    그룬트리세 서설 부분을 보면 맑스가 생산, 분배, 교환, 소비를 하나의 동일한 과정의 계기들로 보고 있거든요. 생산이 출발점이고 소비는 전체 과정을 새롭게 시작하는 종착점인 하나의 동일한 과정으로. 그런데 이 부분을 읽어보면 맑스는 생산물의 소비를 통해 다시 생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재생산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과정을 유기적 전체로 봤기 때문에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하기보다는 내적 통일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집에서 생산한 것을 집에서 소비하고 남는 것을 교환했기 때문에 생산이 아주 단순한 상태에서 이해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복잡해졌기 때문에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독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이론들, 제가 그 이론들을 안다는데 아닙니다. 그런 이론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방식을 보면 왠지 엄밀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보기에는 판매나 서비스 노동자들은 교환영역에 있는 것 같고 전업주부들은 소비영역에 있는 것 같은데.. 내년에는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1. 잠시만.. 제가 질문을 잘못했군요.

        저는 EM님과 견해를 달리한다는 취지였는데 제가 이 얘길 분명히 못했어요.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으실줄 알았는데..

        EM님은 자본주의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교환관계, 즉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사회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이 관계보다 상품과 화폐의 교환관계가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에센스라고 생각합니다. 바꿔말하면 교환관계가 생산관계를 지배하고 이에 따라 사회관계가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환영역에서는 재화와 서비스가 화폐와 교환되는데 자본주의가 발전한 국가일수록 서비스산업이 발전하기 때문에 조정환씨 같은 사람들이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를 주장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조정환씨의 주장은 대체로 이해를 못하겠어요.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전세계적으로 볼 때 이치에 맞지 않아요.

        그러나 저는 EM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어요.

        1. 그러니까 제 얘긴.. 이거 전공하시는 분이니까 짧게 말씀드릴께요.

          자본주의는 M-C-M. 시작과 끝이 동일한, 무한한 운동이잖아요.

          그런데 EM님 글은 생산영역이 다른 영역들로, 결국 사회전체 영역으로 나아가는 걸로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생산이 출발점인 것 맞는데 그 목표는 소비잖아요. 이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 보면 생산은 종착역에 예속되어있잖아요. 그러나 결국 목적은 소비가 아니라 더 많은 화폐잖아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운동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생산영역에서 맺는 관계가 중심이 될 수 없죠. M-C-M이 중심이 되어야하죠.

        2.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말씀드릴께요. 지금 골이 뱅글뱅글 돌아요. 나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건지 잘 모르겠어 ㅠㅠ

          A라는 자동차 공장에 일하게 된 B가 있어요. B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 이 공장에서 일하려는게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 이 공장에서 일하는거에요. 그러니까 B는 생계비만 받으면 되요. 그러나 자본가는 B가 생계비보다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B는 생계비를 받는 조건으로 공장에서 일을 했어요. 자본가는 미리 준비된 돈으로 임금을 지급하는거니까 생산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생산이 이루어지기 전에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을 구매한거죠. B는 생계비를 받기로 하고 자신의 노동력의 사용을 자본가에게 넘겼기 때문에 두 사람은 공정한 계약을 한거죠.

          그러니까 한쪽에는 화폐 소유자가 있고 또 한쪽에는 노동력 소유자가 있는 이 교환관계가 생산관계보다 우선이죠.

    1. MCM이 중심이 된다는 거랑 생산이 중심이 된다는 거랑 뭐가 그리 다른 것인지 모르겠네요. 마지막 덧글에서 님께서 드신 예에서 보면, A와 B 사이의 “교환”이라는 게 또한 동시에 “생산관계” 아닌가요? 단순하고 추상적인 영역의 문제를 지나치게 경직되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저는 적어도 님께서 제기하신 문제 속에서는, 생산과 교환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느냐를 가리는 건 부질없다고 봅니다. 왜냐면… 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산과 교환은 매우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이어서 그냥 같은 거라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1. EM님 머리속에서는 같은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을 대상으로 쓴 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다른 영역으로 나아간다는 식으로 간단히 언급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사악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맑스는 임금노동과 자본에서 “노동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계급의 존재가 자본의 필수적 전제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교환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과 교환하여 생활 수단을 얻는다. … 그러나 내가 생활 수단을 소비하자마자 나는 이 생활 수단을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상실하게 되는 바…” 결국 EM님이 사악하게도 간단하게 언급한 그 부분은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자본의 증식이고 노동자에게 줬던 돈을 도로 다 뺐는 것이고, 노동자 입장에서 보면 자본가한테 생활비를 받았다가 홀라당 다 써버리고 다시 생산으로 돌아가는 무한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중요한 얘길 하지 않으면서 그냥 같은 거라고 하시다니..

        1. daydream님, EM님에 대한 코멘트 이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

          마르크스는 그륀트리세 서설에서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총체의 부분들로서, 통일체 속의 차이들로서”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여기서 생산영역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상세히 논증합니다 (펭귄판 p.90). 마르크스는 “교환과 소비가 지배적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p.99)고 말하죠. 그리고 “교환에서는 생산과 소비는 개인의 우연적 요소에 의해 매개된다”고 언급합니다.

          물론 이런 몇몇 인용으로부터 생산영역이 지배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설명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댓글에 댓글을 다는 형태로 진행하기가 힘듭니다. 필요하시면 제가 이와 관련해서 쓴 미발표 글을 보내드릴테니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제 이메일은 블로그 우측 메뉴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악’하다는 표현은 기분만 상하게 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M님께 사과하시고 앞으로 그런 표현은 사용하시지 않는게 좋을 것 같네요.

        2. EM님께 사과드릴께요. 사악하다는거 외에 다른 어떤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그랬어요. 제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그런거다보니. 문제는 제가 구사하는 단어들에 있어요. 죄송해요.

          글은 읽어보고싶어요. 메일은 내일 보낼께요. 안녕히 계세요.

  3. 새벽에 자다 깨다 꿈1을 꾸면서, 꿈1 속에서 또 다른 꿈2을 꾸다 그 꿈2에서 깨어나서 꿈1로 돌아왔더니 침대 옆에 정봉주가 앉아서 요한 바오로 2세의 두툼한 전기를 읽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감방 갈 때 가져 가실래요 이랬더니 됐어요 하길래 제가 가져가셔도 되요 그랬거든요. 그러다 꿈1에서도 깨어났는데 … 어제 정봉주가 감방가는 건 안타깝지만 이러다 정말 위대한 정치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 꿈을 꿨나봐요.

    저도 그 네 명의 노력으로 꼼수가 사라진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해요. 그런데 이들이 자본주의의 극복을 얘기하지는 않지만 어떠한 경로로 결국은 그것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구요. 어쨌든 나꼼수 덕에 출퇴근 길이 조금 더 즐거워졌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죠. 참. 그런데 다른 건 제쳐두고 일단 물불 안가리는 태도는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어요. 일단 지르고 보는…

      1. 정봉주를 구출해야지요.

        명진 스님이 첨에는 “탈옥해, 정봉주”라고 했다가

        정작 정봉주가 출두하는 날 서울 지검 앞에서는
        “정봉주 탈옥말라! 다음 선수 들어오면 버릇 고쳐 주라”라고 했더군요.

        명진 스님 말 첨엔 좋았는데 나중엔 급 실망.

        아마 자기 자신이 앞에 한 말을 스스로 검열해서
        나중에 고친 듯 여겨져요.

        저는 과거에 종종 강의 듣는 학생 중에 군대 간다는 친구들이 있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1. “최고는, 병역 기피하는 거야”
        2. “아님, 나중에라도 탈영해”라고 했거든요.

        암튼, 저 나름대로 정봉주 구출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어디서 탈옥시키는가 하면
        바로 소위 “민주통합당”으로부터요.

        위의 나꼼수 얘기도 크게 보면 그런 관심에서였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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