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 or 경제학? – 다시 한 번 ‘꼼수’에 대하여

경향신문이 사정이 진짜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이런 글까지 다 실어주니까 말이다.

[경제와 세상] ‘경제학’ 용어에 숨겨진 꼼수 (강신준, 2012년 2월 15일)

1. 이 글은 단순한 ‘무개념’뿐 아니라 경제학 교수가 범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관계상의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몇 가지 간단히 지적하겠다.

우선 사실관계를 얘기하자면 후자의 용어[economics]는 알프레드 마셜이란 사람이 1890년에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사실관계’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대담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종류의 용어변천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집단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예컨대 ‘economics라는 표현을 저서의 제목에 처음 쓴 사람은 xxx이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강교수와 같이 ‘xxx가 만들었다’라고 하긴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어떤 기준으로 보든 위 진술은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샬의 1890년 저작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Principles of Economics}일 것이다. 분명 이 책에 ‘economics’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이 책이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로 대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마샬도 아니고, 또 그의 저 1890년 저작에서 그 용어가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일단 ‘economics’라는 용어는 다름아닌 마샬 자신이 그의 부인과 함께 쓴 이전 저작 {The Economics of Industry}(1879)에도 쓰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economics’가 출현한 첫 사례는 아니다. 그 전에 이미 1877년, 1878년에 각각 J. M. Sturtevant 및 H. D. Macleod의 저작의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특히 Macleod는 이에 앞서 187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political economy’를 ‘economics’라고 바꿔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economics를 “교환가능한 양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이미 나 자신이 몇 번 밝혔다. 나는 심지어 강교수가 그에 대해 무려 ‘반론’을 내놓기까지 한 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아는 한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관련논문 중 가장 훌륭한 이헌창 교수의 글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강교수께서 위와 같은 오류를 견지하고 계신다니..)

 

2. 다음으로,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둘의 차이는 단순히 앞에 ‘정치’가 붙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구별하는 것은 ‘꼼수’를 진실과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 경제학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과학이 아니라 단지 ‘진실’과 ‘꼼수’의 차이일 뿐인데 이를 서로 달리 부르는 것은 곧 ‘꼼수’의 의도처럼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 . .] 두 경제학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기본적으로 나는 위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진실’과 ‘꼼수’를 달리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전혀 설득력이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아량을 발휘해 그의 의도를 읽어보면, 대충…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가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나아가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는 마샬을 위시한 경제학자들의 ‘꼼수’의 산물이므로, ‘진실’을 수호하는 우리가 굳이 물러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불편한 용어를 쓸 까닭이 없다]라는 것 같다.

그런데 강교수가 말하는 것과 달리,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는 단순히 앞에 형용사 하나가 더 붙었느냐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전자가 후자로 바뀌면서, 이름만 바뀌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일 것이다. ‘political economy’에서 ‘economics’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름에 대한 게 아니며, 이 과정에서 ‘economics’는 기존의 ‘political economy’에 대해 그 대상과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론 자체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고,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개개인의 의지와는 어느 정도 별도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모든 얘기를 풀어낼 수는 없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특히 두 번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행히도 강교수도 둘의 차이가 단순히 이름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 대목에서 ‘꼼수’ 드립을 치고 있다. 세상에! 그러니까 강교수에 따르면, 마샬은 뻔뻔스러운 ‘꼼수쟁이’가 된 것인데… 세상에…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만 하겠다. 첫째, 마샬은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그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갇혀있긴 해도 그 나름대로 노동이나 산업의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 시야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둘째, 마샬 부부가 그들의 1879년 저작에서 말하듯(p. 2), 그들이 ‘political’을 뺀 데는 그 용어의 의미가 과거와 크게 변화했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정치적인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경제학’ 또는 ‘사회경제학’이라고 해야 원래의 ‘political economy’와 의미상으로는 통하는 게 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교수는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들이 했던 연구, 즉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경제학’은 원래 ‘political economy’의 역어였던 것이다.

이헌창 교수가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서양의 ‘political economy’가 번역될 때 ‘경제학’이 선택되었고, 이에 대응해 이후의 ‘economics’에 대해서는 한때 ‘이재학’과 같은 역어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서양에서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에 압도되는 것에 발맞춰, 점차 ‘economics’도 ‘경제학’으로 일괄 번역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political economy’는 ‘정치경제학’이라는 다소 괴상한(?) 이름으로 번역되게 된 것이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제격인 상황이다.

 

4.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몇몇 학자들이 굳이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를 살려쓰고, 또 (비록 좀 껄끄럽기는 해도)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름으로, 오늘날 그야말로 막나가고 있는 ‘경제학’을 견제하고 나아가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경제학은 상당히 ‘political’해지고 있다. 원래 마샬 등이 ‘political economy’였던 것을 ‘economics’로 바꾸고자 했던 데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순수경제학’인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political economy’는 순수이론과 각종 응용분야들로 나뉘게 되는데, 말하자면 과거에 ‘political economy’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를테면 J. S. Mill 같은 이가 열정적으로 다뤘던 분배의 문제)은 ‘순수이론’이 아닌 ‘응용’분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학이 최소한으로 정의되자마자(‘제약 하에서의 선택에 관한 과학’이라는 식으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반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인간사에서 ‘제약 하에서의 선택’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이리하여 경제학은 그것이 마샬 등에 의해 제안된 ‘협소한 한계’를 넘어, 그리고 과거 ‘political economy’ 시절에 그것을 규정했던 한계도 훌~~쩍 넘어, 경제학이라는 틀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여타 사회과학들의 영역을 마구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한다(관련글).

요컨대 오늘날, 영어로 치면 ‘political economy’, 우리말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제로 우리가 꾀하는 것은, 위와 같은 막나가는 경제학(economics)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경제학 내부로 치면 ‘economics’가 ‘political economy’였던 시절에 가졌던 사회적(the social)이고 물질적(the material)인 관심(바로 이 블로그의 이름이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그러한 ‘political economy’라는 관점을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과 한편으론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론 ‘정치경제학’을 그것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삶의 단면들에 관한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성과들과 결합함으로써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5. 사태가 이러하기에, 사실 마르크스의 주저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를 ‘자본’이라고 할 거냐 ‘자본론’이라고 할 거냐, ‘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정치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등등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을 생각하면, 위 문제, 적어도 ‘정치경제학’이냐 ‘경제학’이냐라는 문제는 중요하기도 한데, 지금까지 대충 밝혀졌듯이, 강교수는 이것이 ‘왜!!’ 중요한지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사태를 ‘꼼수’라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괴테를 차용한 마르크스의 저 구절, ‘개념이 빠진 곳에는 말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꼼수에 대해서 내가 일전에 주장했듯이(‘나꼼수와 마르크스‘), 사태를 (가카의, 또는 경제학자들의) ‘꼼수’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만큼 단순하고도 그릇된 것도 없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 및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그의 주저를 썼다. 강교수는 바로 그 저작, 그것도 독일어 원저작의 한국 최초의 완역자다. 바로 그런 분께서 꼼수 운운하는 것이 딱하고, 그분이 번역한 것을 읽게될 선량한 독자들이 딱하다. 그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인식으로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경제학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희롱 발언이나 일삼는 나꼼수 4인방이 비열한 착취를 철폐하고 새세상을 열 거라고 생각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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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oughts on “정치경제학? or 경제학? – 다시 한 번 ‘꼼수’에 대하여

  1. 그러니까… 강 교수는 “마셜이 용어를 바꾸어 경제학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노동하는 사람이 가난하다는] 문제를 경제학이 외면하도록 하고자” 했고 그게 ‘꼼수’라는 거군요. 그런데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을까?…

    쌤 말씀은, 마셜은 economics라는 용어를 써서 경제학의 영역을 좁게 한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이 사방팔방 각종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셜이 만약 살아서 현재 상황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요..ㅎㅎ 그런데 왜 마셜이 “‘경제학’이라는 것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자” 했는지 궁금해서 오랜만에 이헌창 교수의 글을 다시 훑어봤습니다. “과학적 경제학을 수립하자는 동기가 신고전학파의 성립을 낳은 중요한 요인”이었고, 그에 따라 political economy란 용어에 대한 불만이 생겨났으며, 결국 “신고전학파가 주류경제학으로 부상한 19세기 후반부터 ‘economics’로 대체되어갔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에게는 윤리나 정치와는 분리된, 순수과학적인 경제학이 중요했다는 거겠죠..?

    아무튼 용어의 출현에서 확립에 이르는 나름 복잡한 과정을 그냥 한 개인의 ‘꼼수’라고 치부해버리는 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은 여기저기서 꼼수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니까 지겹습니다. 마치 2012년 한국은 ‘꼼수 제국주의’ 세상인 듯한… -_-

    1. 마르크스는 개인들을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로 다룬다고 말했고, 또 그가 경제학자들을 한편으로 경멸은 했을지언정 늘 그러한 경멸 이면엔 경제학자들은 “왜” 경멸스럽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역사적/사회적/구조적/인식론적 등등의 설명을 준비하고 있었잖아요. 우리가 최근에 확인했듯이 말입니다.

      사실 마샬에게 “꼼수”가 있었는지는 하나의 논란거리가 되기는 할 겁니다. 그는 분명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에 비하면 훨씬 더 fair- and open-minded한 사람일 테지만, 그의 제자인 케인스가 보기엔 ‘꼴통’ 같은 사람이기도 했지요. 어쨌든 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땐, ‘political’이라는 단어의 의미변화라는 문제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해서 일본인들은 ‘political economy’ 대신 ‘social economy’라는 말을 쓸 정도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주류경제학의 일부가 자신의 경제학적 기법으로 정치적 이슈들(이를테면 선거, 의료보험 등)을 다룰 때 이를 ‘political economy’라고 부르는 것이고, 또 이것이 그런대로 타당해 보이는 것입니다(즉 “정치적 경제(학)”이라는 뜻으로요).

      이름이 바뀌고, 경제학이 ‘순수이론’을 구축하려고 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그만큼 경제학이 관여하는 현실의 그 측면, 즉 “정치경제”라는 것이 그 정도로 복잡다단해졌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이론도 그에 맞게 복잡다단하게 발달될 필요를 가리키는데, 당시의 “속류” 정치경제학은 그럴 힘이 없었고, 따라서 “순수이론”으로 후퇴했다.. 즉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에게 닥친 이론적 위기를 피해갔다.. 이렇게 보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십분 양보해서 꼼수가 있었다고는 해도, “꼼수”가 주요한 차원(아마도 이것은 극도로 구체적인 차원이겠죠)보다는, 그러한 꼼수조차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었던 커다란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더구나 100년도 더 지난 오늘엔 더 긴요한 자세겠죠. MB의 꼼수가 아무리 기가막혀도, 그래서 정권이 바뀐 뒤 그것을 처벌하는 게 아무리 중요해도, 100년이 지난 뒤 2010년 한국의 역사를 “꼼수”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보다 어리석고 우스운 일이 또 어디있을까요?

      바로 그런 어리석고 가소로운 인식--그것도 다름아닌 ‘경제학의 역사’에 대한--을, 경제학 교수 강교수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죠.. 지금쯤 아마 강교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 유명한 구절을 원용해 이렇게 되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꼼수의 역사다.”

    2. 아.. 그리고.. “순수 vs 응용”이 “순수이론 vs 윤리/정치”인 것만은 아닙니다. 응용분야에는 다양한 게 들어가는데.. 위에서 소개드린 마샬 부부의 {The Economics of Industry}도 그런 응용분야 중 하나죠. 오늘날 시각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응용분야가 “경제사”이기도 하고요. :)

      그건 그렇고… 위 글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economics”를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쓴 Macleod는, {자본론} 중 우리가 읽은 부분에 한번 나오기도 했습니다. :)

  2. 어머니가 디스크 파열로 입원하셔서 요즘 간병인 생활 중임다.

    옷 갈아입으러 들어왔다가 잠시 들려요.
    (병원에 무선 인터넷이 안되요…쩝)

    간병인 일당은 24시간에 6만원이니까
    방학 중 알바 치고는 훌륭하지요.

    훔…이런 논의가 있군요.

    핵심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비판'”에 있는 거겠지요.

    혹은 비판적 경제학 내지는 경제학에서 비판적 관점과 태도, 방법 — 머, 이런 거라고 생각해요.

    참고로 일본어가 가능하신 분은
    동북아시아에서 경제학이란 말이 어떻게 형성, 채택되었나를 아시려면,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경세제민” 항목 찾아보세요.

    http://ja.wikipedia.org/wiki/%E7%B5%8C%E4%B8%96%E6%B8%88%E6%B0%91

    글쿠, 이 정도 딱딱한 일본어는 번역기로 돌려도 대충 의미 파악은 가능할 겁니다.

    그럼…

    1. 어이쿠… 몸고생 마음고생이 크시겠습니다.. 마음으로나마 위문드립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경제학이든 정치경제학이든.. 바로 그 “비판”을 위해서는 사태를 올바르게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어있다는 얘기죠.

      소개해주신 위키항목은.. 간략해서 좋네요. 본문에서도 소개한 이헌창 교수의 글은 번역과 관련된 일/중/한의 매우 상세한 사정을 밝혀주는 장점은 있지만, 결론은 맘에 안 들더군요.

      sunanugi님, 건강하세요!!

  3. 얼마 전에 푸코에 관련된 글을 접하던 중에 정치경제학에 대한 중요한 함의점들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있어서 몇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푸코는 통치성이라는 개념을 통한 자유주의라는 통치양식에 대한 계보학적인 분석 속에서 정치경제학을 자유주의적 통치성의 가장 중요한 지식으로 간주합니다. 푸코는 통치성을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기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 절차, 분석, 고찰, 계측, 전술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통치성의 정치적 합리성의 근거를 제공하며 동시에 통치성의 한계 또한 규정하게 됩니다. 16~17세기 주요한 지식 담론은 법/권리 담론 즉 자연권 및 계약이론이었으나, 이것은 통치성의 한계를 외부적으로 규제하는 것이었고, 이는 통치성의 합리성이 언제라도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통치성의 합리성에 대한 내적 규제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맥락 속에서 정치경제학이 등장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담 스미스가 제시한 ‘보이지 않는 손’ 이라는 개념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되는 시장은 자연적인 체계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연적인 체계의 작동원리는 통치의 합리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연적인’ 이라는 말 속에 담긴 정치경제학의 보편성, 객관성, 순수성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실제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원리들이 여러 권력 장치들과 미세한 권력 망들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즉 언제나 보편성으로 대표되는 개념들에 가닿을 수 없고 자꾸만 미끄러져내리는 지점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지점이야 말로 그 개념들의 사후성을 명확히 지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보편성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개념들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개념들의 철저한 물질성일 것입니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에는 우리가 세심히 고찰해야 할 긴장관계들이 존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물론 강교수님께서도 이러한 정치경제학에 존재하고 있는 긴장관계들을 매우 잘 파악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미스테리한 점은 강교수님의 논리전개의 결과가 어찌하여 경제학이라는 언어의 사용으로 도출되었는가 라는 점입니다. 제 생각에는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의 고집스러운 고수가 진정으로 중요한데, 그것이야말로 이러한 정치경제학이 지니고 있는 긴장관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사유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처음뵙는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덧글로서는 어디서도 보기드믄 장문인데다가 알찬 덧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이해하는 데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ㅋ 안그래도 저 자신도 말하자면 “정치경제학의 계보학”이라고 할만한 주제와 관련, 푸코의 논의에 관심이 있었는데, 아직 제대로 공부해본 단계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님의 덧글이 더더욱 반갑네요. :)

      그런데 소개해주신 푸코식의 접근에서 배울 점도 많고, 또 꽤 그럴싸한데다가 재미도 있는데… 더구나 멋지기까지 한데… 제겐 어딘지 답답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근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첫째는 이러한 방식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어쩌면 “초기”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포함해 이른바 “철학적” 관점에서 사태에 접근하는 논의들에서 공통적으로 받곤 합니다. 이런 식의 비판은 늘 정치경제학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좀 단순한 것 아니냐는 게 제 의심입니다.

      두 번째 불만 또한 그러한 단순함과 연결된 것인데, 정치경제학의 “계보학”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 또한 정치경제학의 근대사회에서의 의의 내지는 위상이라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이해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그것입니다. 이를테면… 푸코나 프랑크푸르트의 학자들처럼 “철학자”는 아니지만, 경제학 내에도 “경제사상사” 내지는 “지성사로서의 경제학(의 역사)”라는 문제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는 이들이 있는데요, 제겐 이런 분들의 논의가 (비록 재미도 없고 쉽게 멋을 느낄 수도 없지만) 더 많은 뭔가를 던져주는 것 같거든요. 물론 저 자신도 갈길이 아직 까마득하지만 말입니다 ㅠㅠ

      하여간, 이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푸코 대인과 같은 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비록 그들의 논의가 위의 두 가지 불만 중에서 첫 번째 쪽과 관련해서는 그다지 개선될 여지가 없어보이긴 해도(이것은 제가 현재의 글 다음에 쓴 글에서 “마르크스가 대체될 수 없는 곳”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됩니다), 두 번째 측면과 관련해서는 제게 일정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죠. 해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철학자들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그로부터 배우려고 하는 만큼, 그들도 경제학자들에게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말 미스테리한 점은 강교수님의 논리전개의 결과가 어찌하여 경제학이라는 언어의 사용으로 도출되었는가”라고 하셨는데.. 제겐 이것이 전혀 미스테리하지 않습니다. 뭐, 그냥 “고집”이죠ㅋ

      또한… “제 생각에는 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의 고집스러운 고수가 진정으로 중요한데”라고 하셨는데,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위 본문에서 밝혔듯 BTdiony님과는 그 근거가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용어”로만 본다면 “정치경제학”이든 “경제학”이든 상관없다고 봅니다. 더구나 우리말에서 “경제학”이 애초에 “political economy”의 번역어였음을 떠올리면, “경제학”을 쓰는 것도 나름 일리는 있지요(물론 저는 강교수가 이런 생각을 깔고 “경제학”을 고수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도 이런 생각을 밝힌 적이 없거든요).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바로 오늘날,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의 대립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저는 불충분하게나마, 번역문제와 관련해 일정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정치경제학”이라는 번역어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어로는 그냥 속편하게 “political economy”라고 쓰면 되겠지만요…

      “political economy”의 “economics”로의 변화, 그리고 오늘날의 “economics”… 이런 문제에 대해 푸코는 뭐라 할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결국 여기에 답하는 것은 산 자의 몫이겠죠.

    1.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기사도 있더군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618180511

      인용하신 구절은 거짓말, 아니… 강교수가 뭘 잘 몰라서 하는 말이죠. 모르면 좀 배울 일이지… “신MEGA”의 첫 권이 1976년인가 나왔으니… 초기 권들엔 “분칠”이 덕지덕지 되어 있지요.

      분칠이고 자시고 간에… 저런 식으로 장사하는 건, 결국 그것 말고는 다른 마케팅 포인트를 못 찾기 때문이겠죠. 뭘 알아야 말이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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