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철수고, 또는 마르크스의 지적발달에서 정치경제학의 의의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진보불로그의 순이님과 비교적 최근부터 글을 쓰고 계시는 냉커피님의 글을 보고서 자극을 받아 조금 써보려고 한다. 미리 밝혀두건대, 이 글은 그분들의 글을 비판하거나 평가하기보다는—물론 군데군데 그런 뉘앙스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그냥 내 평소 생각을 밝히기 위해 쓰는 것이다.

[관련글]

3월9일 경철수고 수업 정리 (냉커피, 2010년 3월 11일)

나도 3월 16일 경철초고 수업 정리 + 짬뽕 (순이, 2010년 3월 17일)


1. 두 분은 마르크스의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이하 《경철수고》)를 대상으로 일련의 포스트를 올려주셨다. 아마도 이 책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하고 계신 것 같다. 앞으로 관련된 글을 더 쓰실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껏 나온 것만 보면, 두 분은 주로 《경철수고》에 나오는 노동이나 욕구 등의 개념, 그리고 《경철수고》의 (비판)대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 같다.

세부적인 내용들에 대해 토를 달 수는 없을 것 같고… 전체적으로는, 대체로 두 분 모두 몇몇 핵심개념들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치중하시는 것처럼 보인다(“xx 개념의 이해”, “재구성” 따위). 물론 이건, 어떤 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까닭은, 한편으로 이분들은 《경철수고》를 텍스트로 해서 세미나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분들에겐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나를 포함한—대부분에겐) 《경철수고》에 나오는 “말의 의미” 자체가 쉽게 와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욕구”니 “노동”이니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알송달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말의 의미에 지나치게 치중하면 전체 맥락을 놓친다“라는 진술이 그저 하나마나한 상투적인 코멘트 이상인 것은, 다뤄지는 대상이 마르크스의 저작, 특히 이른바 “초기” 저작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전체 맥락”이 중요한 까닭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일생에 걸친 지적발달 속에서, 흔히 “인식론적 단절”이라 불리는 매우 근본적인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이 변화를 무엇이라고 부르느냐에 대해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내겐 그 내용이 중요할 뿐인데, 다시 이 내용이라는 것도 실은 우리가 잘 알듯이 마르크스의 최초의 본격 경제학 저작인 1859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 매우 간결한 언어로 나와있다. 이에 따르면 위의 그 “근본적인 변화”란 “법학/정치학/철학으로부터 (정치)경제학으로의 이행“이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으며, 이에 따른 “일반적 결론”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위와 같은 비경제학에서 경제학으로의 이행에 더해, (정치)경제학 내부에서의 “방법론적 정교화”도 함께 강조하는 입장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자신도—스스로 행하고 있으면서도—명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분명해지고, 일단 획득되자 내 연구의 길잡이로 쓰였던 일반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표현될 수 있다. 즉 인간은 그들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그들의 물적 생산 제력의 일정한 발전 수준에 조응하는 일정한, 필연적인,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제관계,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 생산 제관계 전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를 이루며, 이 위에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 토대에 조응한다. 물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과정 일체를 조건지운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김호균 옮김, 중원문화, 7쪽)

주지하다시피 이런 식의 명제는 “(경제) 환원주의”니 “경제결정론”이니 하는 등의 비난을 늘 동반해왔는데, 우리는 마르크스의 위와 같이 단순하고 명료하기 그지없는 언어에 온갖 잡다한 단서들을 갖다붙이는 방식으로—“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과잉결정”과 같은 낯선 말을 동원해가면서—이런 비난을 피해가려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마르크스의 저 얄짤없이 환원주의적으로 보이는, 비록 비유법을 쓰고는 있지만 결코 애매모호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명제를, 그만큼 명확하게, 그래서 거기에 대해 환원주의니 뭐니 하는 의문을 제기할 여지도 없을 정도로 비환원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2.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는 길이 여럿이 있을런지 몰라도, 나는 “경제” 또는 “경제학”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근본적으로 제기하고 그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학이 현실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위에서 환원주의/경제결정론을 언급했는데, 그런 것에 대해 개개인들이 어떤 입장을 취하든 상관없이 사회과학의 여러 분과들은 경제학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학 제국주의”라는 현상을 눈앞에 두고서도, 경제학 이외의 다른 분야들의 고유성을 주장함으로써 예의 그 환원주의/경제결정론에 맞서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순이님이나 냉커피님의 충분히 반성되어 있지 않아 보이는 “반(anti)-경제학 환원주의”적 태도가 우려스러운 것도 대체로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제학 대 비경제학” 또는 “경제학 대 사회학 대 정치학 대 …”와 같은 대립구도를 타파하는, 즉 근대분과학문 체계를 전제한 물신화된 사고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요구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은 바로 그런 과정에서,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위 질문은 핵심적인 것으로서 제기될 것이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보자면, 위 질문은 위와는 다른 의의도 갖는다. 실제로 마르크스 자신의 지적 발달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경제(학)의 의의에 대한 지속적인 깨달음을 계기로 해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부분에서 엿보이는 경제(학) 이해는 대체로 1840년대 중반의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관찰되는데, 그 뒤 마르크스의 지적 행보, 즉 《자유무역에 대한 연설》, 《공산당 선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잉여가치학설사》, 《자본》 등의 연쇄를 쫓다 보면,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깊이가 있어짐을—즉 단순히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헤겔이 18세기의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선례에 따라 ‘시민사회’라는 이름 아래 그 전체를 요약한 바 있는 물질적 생활관계 … 시민사회의 해부학은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 (위의 책, 6쪽)

여기서 마르크스는 마치 자신이 위와 같은 결론에 이미 1844년에, 즉 《경철수고》를 쓰기도 전에 획득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실은 《경철수고》에서조차도 위와 같은 인식은 그저 희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해야 공정할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마르크스는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 (나름 날카롭지만) 상대적으로 초보적인 이해수준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헤겔의 그것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위 구절에 나타나는 헤겔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경철수고》에서의 가차없는 비판을 비교해 보라! 요컨대 후자와 같은 비판이란 따라서 (그 자체만 가지고 보면 타당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크게 제한적이거나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경철수고》에서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의 핵심명제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헤겔은 노동을 행위로 파악하지 않고 정신의 작용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식의 비판은, 마르크스의 일생에 걸친 지적작업의 견지에서 보면 그다지 대단하달 만한 의미가 없으며, 또 그런 까닭에 이런 비판은 매우 제한적이고/거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위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헤겔에 대한 평가가 좀 더 냉정해지고 그것이 위치한 지적맥락 안에서 좀 더 객관적으로 수행됨에 따라, 정치경제학에 대한 견해도 “소외된 과학”에서 “시민사회의 해부학”으로 변환된다. 물론 이런 변환이—헤겔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서도 그렇듯—정치경제학이 이제는 더 이상 “소외된 과학”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에 부여하는 의의와 정치경제학에의 개입지점이 바뀜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뀐 의의를 그는 계속해서 밀어붙임으로써 《자본》을 우리에게 남겨주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렇다면 정치경제학을 “소외된 과학”으로 보는 것과 “시민사회의 해부학”으로 보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좀 더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자.


3. 《경철수고》를 포함한 “초기저작”에서 마르크스의 관심은 대체로 어떻게 하면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 제대로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나갈 것이냐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지만, 그리하여 마르크스가 훗날 《자본》 시절에 갖게 될 문제의식과도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진정한 핵심은 그가 위 문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했느냐에 있다.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겠다만, 여기선 “개인”과 “사회”를 대비시키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일단 둘을 대비시키고 나면, 《경철수고》를 포함한 초기저작들에서 마르크스는 “사회”보다는 “개인”을 중심으로 해서 위에 제시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라는 것이 당시에든 오늘날에든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경제인” 또는 “로빈슨 크루소”는 아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여기서 “개인”에 대한 강조가, 흔히 우리가 비판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와는 다른 맥락에 속한다는 얘기다. 그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암담한 현실”을 인식하고 또 그의 극복을 꾀함에 있어 “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떠오르는 개념이 바로 “소외”다. 소외란 정의상 “어떤 이상적인 상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이상적인 상태란 무엇인가? 마르크스가 “개인”에 주목하는 한, 이상적인 상태란 곧 바로 그 개인의 이상적 상태, 즉 “인간 본성(이 이상적으로 발현되는 상태)”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소외라는 개념은 곧 “인간 본성”이라는 인간의 본래적 상태를 전제하게 되고, 또 바로 이 소외가 현실인식의 핵심개념으로 떠오르는 한 여기서 도출되는 필연적인 현실개입전략은 “바로 그 인간 본성의 회복”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는, 적어도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형식”의 측면에서는, 그가 종종 비판하곤 하는 근대사상가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게 된다. 근대사상가들도 인간의 본성을—그것을 “합리적 경제인”이라 부르든 “로빈슨 크루소”라고 부르든—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본질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즉 나중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1857년)에서 명확히 밝히듯이 근대사상가들이 말하는 인간본성이란 실은 당대현실을 구성하는 현실적 인간을 추상화해 과거로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 반면, 마르크스의 그것은 (헤겔의 강한 영향 아래) 전자보다는 더 “반성된” 개념이라는 거다. 이때 “인간 본성”을 정의하기 위해 그가 발달시키는 개념이 바로 “노동”이니 “욕구”니 하는 것들이다. (한편, 근대 부르주아 사상가들이 말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실은 현실의 인간의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역사란 바로 그렇게 설정된 인간 본성의 실현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현실이란 늘 “순리에 맞는 상태”, 당시까지 존재했던 중에서 최선의 상태일 수밖에 없고, 미래를 위한 현실개입전략이라고 해봐야 그런 이상적 상태의 좀 더 완전한 실현을 위한 것에 그칠 뿐이다. “조금 더 많은—자본을 위한(!)—자유”라는 식으로.)

현실을 참조해서 거꾸로 과거를 이해하고 나아가 왜곡하는, 위에서 묘사된 근대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태도는 이미 헤겔도 비판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마르크스는 헤겔과 정확히 같은 입장에 있는데, 하지만 《경철수고》에서 그는 헤겔에게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노동이나 욕구라는 개념들을 (포이어바하 등의 영향을 받아) 좀 더 “유물론적으로” 전화시킴으로써 오히려 헤겔을—헤겔이 부르주아 사상가들을 비판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비판하는 데 써먹는다(같은 방식의, 그러나 좀 더 역사적인 견지에서의 비판은 〈헤겔 국법론 비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마르크스 사상의 발달과 관련해서) 장기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보면, 이 과정에서 그가 동시에 정치경제학(또는 국민경제학)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순이님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유용해 보인다.

맑스는 국민경제학자의 저술을 발췌하면서 이들의 주장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고 주장. 이들에 따르면 소득의 원천은 임금, 자본의 이윤, 지대이지만 궁극적으로, 소득은 ‘노동’에서 온다. 근데 현실적으로 노동자는 극심한 경쟁 상태에 있고,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상태.즉 국민경제학은 노동을 가치의 원천으로 보면서도 노동의 모든 열매를, 소유적 시장사회의 근본 원리인 사유재산제에 넘기고 노동자가 처한 현실이 왜 그러한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가진 자는 그저 가진 자일 뿐이고, 가진 자의 가짐과 그 사회 전체의 사적소유는 자연법칙인양 관철된다. 맑스에 따르면 국민경제학은 사유재산 형성의 기원을 밝히지 않고 그것을 전제로 두어 ‘학’의 임무를 망각했다. 이것이 국민경제학에 대한 실증적 비판의 결론. [출처 링크]

위와 같은 《경철수고》에서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이후 《자본》에서의 그것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커다란 흥밋거리일 것이다. 이 또한 여러가지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후자와는 달리 “개인”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행해진다는 데 주목한다. 즉 마르크스는 행위 중심적으로 번역된 노동과 욕구 등의 개념을 기반으로 인간의 본래적인 상태와 그로부터의 소외를 논한 뒤, 정치경제학이 이 소외 문제를 정직하게 드러내지를 않는다고 비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근대사회에서 소외란 곧 사유재산제도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정치경제학은 도리어 그 사유재산제도를 “자연법칙”인 것처럼 간주하기 때문에 “소득의 원천은 임금, 자본의 이윤, 지대이지만 궁극적으로, 소득은 ‘노동’에서 온다”라는 모순적인 명제를 보고도 그것을 모순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라본다는 얘기다. 이렇게 소외를 고발하기보다는 전제해버리는 정치경제학을 마르크스는 “소외된 과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치경제학 비판, 즉 정치경제학의 세부적인 논의들에 세심하게 개입하기보다는 그에 대해 지나치게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것을 거의 “일언지하”에 거부하는 이런 비판은, (역시 이후 《자본》까지를 염두에 뒀을 때) 지나치게 단순하고 이 당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이해의 얄팍함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대한 문제를 “소외”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한, 이런 한계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인가? 그것은 단순하게도, “소외”라는 문제틀이 대체로 “개인”을 중심으로 한 문제제기인 반면, 정치경제학이란 기본적으로 “사회”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약간 무리해서 말한다면, 정치경제학이란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의 문제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런 문제에 별로 관심 자체가 없다. 그렇다면 《경철수고》에서 행해지고 있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정치경제학의 핵심문제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에서—포커스가 잘못 맞춰진 것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은 논의는 곧 우리를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끈다. 나는 이 문제를 이 블로그의 다른 글(“사회” 관점의 지성사적 의의)에서 다룬 바 있다. 거기서 나는, 정치경제학이란 근대적 의미에서의 “사회”의 출현에 대응해서 발달한 것이라면서, 이런 발달의 가장 완성된 모습을 제시한 것이 마르크스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회”라는 것의 특수한 지위가 인식된 것이 엄청난 의의를 가짐을 염두에 두면, 그리고 그것이 “(정치)경제학”의 발달에 미친 결정적인 영향을 고려하면, 마르크스(Karl Marx)가 사상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결국 그는, 지성사적 의미에서 “(근대)사회”의 출현이 갖는 의의를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문제의 중심을 “개인”에서 “사회”로 옮겨놓았던 것이다. [……] 마르크스를 통해 이제 정치경제학은 “사회”를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이제 그것은 인간본성이라는 흐리멍텅한 선험적 가정 대신, 사회라는, 즉 인간을 둘러싼 관계들의 구조라는 엄연한 물적 현실(material reality)로부터 출발한다. [출처 링크]

위와 같은 결론적 언급에 비춰보면, 우리는 마르크스 사상의 발달이란 곧 “인간본성이라는 흐리멍텅한 선험적 가정”으로부터 “인간을 둘러싼 관계들의 구조라는 엄연한 물적 현실”로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은 그것이 바로 이른바 “인식론적 단절”의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행과정이 필연적으로 정치경제학 비판의 본질적 성격/내용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제 정치경제학은 “소외를 전제하는 소외된 과학”이 아니라 “물적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무력한 과학”이라고 비판받는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에서는, 후자와 같은 정치경제학의 무력함 자체가, 실은 자본주의적 사회과정의 특수한 성격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산출된다는 것이 논증되기에까지 이른다.) 말하자면… 근대 정치경제학이란 “시민사회의 해부학”으로서 의도되었지만 “서툰 해부학”인 셈이며, 이에 마르크스는 “제대로 된 해부학”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4. 위와 같은 구분 안에서 《경철수고》란, “인간본성이라는 흐리멍텅한 선험적 가정”에 입각한 논변전개가 가장 훌륭하게 드러난 저작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앞서 밝혔듯, 이런 가정 자체는 물론 그에 입각한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게 바로 독특하게—즉 “행위 중심적으로”—개념화된 노동, 욕구 등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여기선 노동이니 욕구니 하는 것들을 “어떻게 개념화하느냐” 자체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좀 더 숙성된 틀, 즉 “인간을 둘러싼 관계들의 구조라는 엄연한 물적 현실”에 주목하는 틀 안에서 노동이나 욕구는,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원리로서의 지위를 회복한다. 여기서 “회복한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노동이나 욕구가 원래 헤겔에서, 나아가 아담 스미스 등과 같은 근대 정치경제학자들에서 이미 그런 의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경철수고》에서 마르크스가 그런 의의를 충분히 음미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아가 노동이나 욕구에 대한 독특한 개념화에 근거를 둔 채 전개되었던 소외라는 것도 이제는 하나의 “경제적 사실”(economic fact)로 이해될 뿐이다—“소외”가 사라진 게 아닌 거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경제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산출하는 물적 현실의 “구조”(이 단어에 더이상 알러지 반응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이며, 바로 그 구조의 해부학이 바로 “정치경제학”이다. “해부학”이므로, 정의상, 그 비판자는 이제는 “일언지하” 성의 “단칼 거부”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그 스스로 “진정한” 해부학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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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thoughts on “경철수고, 또는 마르크스의 지적발달에서 정치경제학의 의의

  1. 안녕하세요~ 아침에 뎡야힝이 전화로 알려줬는데, 마침 인터넷 통신사를 바꾸는 바람에 늦게 들어오게 됐네요.. 우선 저는 초기의 맑스에서 광범위하게 설정된 노동 개념이 < 헤겔법철학비판>에서부터 나타나는 ‘사회적 차원’에 대한 자신만의 전개로 돌입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차원’의 분석과 전망에 있어서 EM님이 말씀하신대로 노동 개념이 제 위치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과다하게 노동을 형이상학화하는 입장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깨작깨작 공부하는 거라서 좀 그렇지만…에휴.. 참, 그런데 EM님께서는 ‘탈노동사회’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 답글 고마워요. 순이님과 이렇게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기분 좋습니다. 뎡야님께서도 수고가 많으시네요 ㅎㅎ

      탈노동사회론에 대해 말씀해 주셨네요. 글쎄요… 솔직히 저는 그런 문제에 대해 충분하게 생각해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주 원론적으로 말하면…
      (1) “탈노동사회”와 같은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그 이전의 문제 즉 “노동사회” 내부의 문제들이 현실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2) 그러나 탈노동사회든 노동사회든… “노동”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데는 좀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그런 방식으로, 현대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금융(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다분히 “자본”주의라는 명명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기획되었을 “노동”사회라는 명명은, (마르크스가 행한)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분석/비판만큼 power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노동사회론이 하나의 입장이 될 수는 있겠는데, 그러나 특히 그것이 마르크스에 기반을 두려 할 때에는, 위와 같은 이유로 (한마디로 말하면, 마르크스는 노동이 아닌 자본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마르크스에 대한 일정한 “왜곡”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이상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의미에서, 탈노동사회론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론과 일정한 보완관계에 있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구체적으로 그 관계가 어떨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2.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이의 허접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구요…앞으로도 많은 비판 부탁드립니당…ㅎ 저는 아직 맑스의 후기저작들을 제대로 탐독하지 못해서 정확하게 제 입장을 밝힐수 있는 처지는 아니구요. 일단 이후에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불릴수 있는 지점의 발생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님의 말씀대로 문제의식 자체가 바뀐거라기보다는 맑스당시의 시대적 역사적 맥락속에서 개진된 하나의 방법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맑스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맑스의 혁명론이나 경제학적 해석의 유효함보다는 인간행위의 실질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 해방을 기획했다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맑스가 자본의 부제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타이틀을 건 것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그대로 그들의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아닐까요…그래서 우리는 자본론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이구요..오히려 경제학이라는 패러다임을 하나의 툴이 아니라 원리로 상정하는 것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그리고 물론 초기저작에서 소외라는 개념이 인간학적 본성에 기대는 듯한 뉘앙스를 주는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주목하는 것은 추상적 인간활동을 부정하고 구체적 인간활동으로 실천(관계맺음)이라는 새로운 혁명적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님은 개인과 사회라는 관계가 경철수고에서 잘발전되지 못했기에 어찌보면 나이브해 보이는 관점이 드러난다고 보시는듯 합니다. 하지만 저는 ‘관계’라는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상호주관성을 더 주목하고 있구요…그래서 행위에 대한 주체의 선택과 책임, 행위결과의 행위주체에 대한 귀속이라는 출발점에서 다시 고민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공부하는 단계라 저의 문제의식이 외려 나이브할수도 있다고 생각하구요….ㅎ 어쨌든 이런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분을 또 만나니 너무 반갑네용…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당…ㅎㅎ

    1. 안녕하세요, 냉커피님. 주제넘을 수도 있는 트랙백에 알찬 덧글.. 고맙습니다. 음… 말씀해주신 내용이… 제가 하나하나 답변을 하는 것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진 않고요, 다만 몇 말씀 드리자면…

      -- 님은 스스로 아직 마르크스에 대해 잘 모르신다고 하시면서도, 마르크스를 잘 알아야만 이야기할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 이를테면 님은, 이른바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해, 그의 “비판”에 대해, 그리고 나아가 그의 논의 전체의 의의에 대해, 꽤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계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말입니다.

      -- 그러나 저는 그런 문제에 대해 님과 논의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까닭은, 첫째로 님은 스스로 본인은 잘 모른다고 하셨기 때문이고, 둘째로 위의 내용만 가지고는 제가 적절하게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혹시 좀 더 자세하게 논의를 전개해 주신다면 좀 더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지금 당장 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건전한 교류 기대합니다. ^^

  3. 님이 고민하시는 ‘구체적 현실의 문제’로서 금융과 같은 핵심쟁점에 대해서는 사실 고민의 폭이 넓지가 않아서 뭐라 말하기가 뭣하구요…지금 출발점을 어떻게 잡고 고민해나가야 하나라는 원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출발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 방향의 결과지점은 전혀 달라질수도 있으니까요.
    현실적인 제조건에 휩싸이다보면 ‘현실의 극복=인간해방’이 아니라 ‘현실안에서의 극복=경제라는 협소한 패러다임안에서의 고민’으로 문제설정이 축소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있습니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원칙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아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약한 인간학적 본성에 기댄 맑스의 소외론인지, 역사 유물론에 기댄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창한 후기의 맑스이데올로기인지, 아니면 담론적 가치의 폐기를 통한 ‘개인의 부각’이라는 탈현대주의자들의 원칙인지가 여전히 고민이구요…..ㅎ 이상 건강한 시민이 되고자 노력하는 한 ‘개인’이었습니다….

    1.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 저는 위 글에서 (마르크스를 따라)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볼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 님께서 제시해주신 세 가지 가능한 “원칙”들이 제겐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것이 원칙의 전부인가요? 혹은, 특히 첫 두 개의 원칙들이 진정으로 마르크스로부터 꺼낼 수 있는 원칙이긴 한가요?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 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류의 원칙이란, 처음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꽤 늦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4. 엄밀하고 치열한 고민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님 말씀대로 원칙을 처음에 정해놓고 출발하면 그것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이 될수도 있겠네요…아마 저도 헷갈리니까 원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구를 가지게 되고 그래서 공부의 방향도 그런 상호주관적 ‘원칙’을 수립하는 것에 집중이 되었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인 것처럼 보이는 글들은 사실 저도 배운 내용에 불과한 것들을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저의 생각과 견해’를 만들어나가야겠죠…그러기 위해서라도 좀 더 다른 생각들을 많이 접해야 할거 같구요..흥분 느껴질 정도로 짜릿한 채찍질이었습니다..^^
    자주 놀러올게용~~~

    1. 좋게 받아들여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여간 제 말씀은… 견해를 쉽게 “말하지 말자”는 것이라기보단, 견해를 쉽게 “갖지 말자”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앞으로 많이 얘기하기로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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