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vs 자본

다음은 2008년 12월, 국내에 시판중인 《Das Kapital》의 두 가지 버전, 즉 김수행 번역의 《자본론》과 강신준 번역의 《자본》의 일부분을 재미 삼아 대조해본 뒤에 쓴 글이다. 최근 방명록에서 ‘너구리’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약간 수정/가필해 다시 올린다.




1. 일단 먼저 말해둘 것은, 적어도 《자본(론)》에는 ‘독일어의 심오함’ 따위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독일어의 심오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본(론)》을 제대로 안 읽어본 사람이거나 또는 힘들여 독일어로 읽은 데 따른 일종의 보상심리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론)》에 특정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심오함’이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단순하게도 마르크스 자신이 그런 성격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은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자본(론)》은 뭣보다 경제학적 저작이고 그런 의도로 저자에 의해 씌었다. 그래서 예컨대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용어조차도 《자본(론)》에서는 이를테면 《경철수고》에서 만큼 커다란 울림을 자아내지 않는다. 또는 그런 울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본(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울림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울림’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자본(론)》을 그릇된 방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2. ‘독일어의 심오함’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여는 까닭은, 실제로 그 동안 김수행판이 그런 심오함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번역이라는 식의 주장이 매우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판단에 반대하며, 거기엔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김수행판이 갖는 기본적인 한계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것이 중복번역이라는 데 있다. 원래의 의미들이 그런 과정에서 단순화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엔 현저하게 바뀌기도 했으며, 또 구절 자체가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런 모든 문제들은 대체로 중복번역이라는 데서 오거나, 그저 번역이라는 것 일반이 갖는 문제점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번역자 또는 편집자(출판사)의 서투름 때문이지, 결코 ‘독일어의 심오함’을 살려내지 못한 ‘영어의 경박함’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독일어의 심오함’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모든 각국어로 나온 책들도 독일어로 번역된 것으로 보고, 모든 외국책들의 한글번역도 그 원전의 심오한 독일어 번역판에 기반해서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순화나 변형은 대체로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김수행판이 그다지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면 영어판을 참조한 것, 나아가 독일보다는 영국에 더 익숙한 사람(김수행)이 번역한 것이 여러모로 장점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김수행은 자신이 번역한 《자본론》 제1권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자본론》의 이론적 토대는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현실적 예증은 주로 영국사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며, 번역자 자신이 영국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연구했다는 사실도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글쎄.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까지 하는 데는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앞부분은 타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럼에도, 《자본(론)》은 독일어로 씌었다. 따라서 그 언어를 기반으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유/불리’를 따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3. 이렇게 본다면,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되, 영국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인가? ‘이상’을 따지자면 나는 그런 개인 또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이 얼마나 거기 따라줄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보면, 아예 몇몇 전문가들의 자문 아래 능력 있는 전문번역가가 나서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이 얘긴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 《자본》과 《자본론》을 함께 보면서, 두 교수들의 학자로서의 자질보다는 번역가로서의 자질에 새삼 의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두 번역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많은 경우 그들의 번역가로서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됨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는 번역가 개인의 문제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편집을 책임지는 출판사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번역판의 경우엔 언어구사가 자연스럽지 못한 대목이 많다. 내가 보기엔 이는 거의 전적으로 출판사의 문제다. 왜 자연스럽게 다듬지 않는가? 내가 알기론 비봉출판사는 거의 사장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로, 《자본론》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의미의 편집 이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결코 ‘번역자를 존중’하는 게 아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조차 오류가 많다면, 그게 과연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반면 강신준판의 경우엔 자연스런 언어구사가 읽는이를 편하게 해준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건 아무래도 출판사에서 나름의 방침을 가지고 정성껏 손을 봤기 때문이리라. (조교 시켜서는 이렇게 나오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신준-도서출판 길’이 환상적인 팀이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실은 그 반대다.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서의 질을 볼 때, 그 옮긴이가 인명, 지명, 책제목 등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본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리라 짐작한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제대로 번역했다는 것은 적어도 번역이 상당한 성실성을 가지고 진행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본(론)》의 경우 이런 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예컨대 인명의 경우, 인용되는 저자들이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으로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같은 Michael도 경우에 따라 ‘마이클’이라 하거나 ‘미하엘’로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강교수의 번역은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이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책의 번역서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책들을 보면, 영어권 사람의 이름조차도 독일어식/프랑스어식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지 때문인지,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명표기와 관련, 강신준판 《자본》은 강신준 교수의 독일어 구사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도 불러 일으킨다.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거다. 영어에서는 사람이름이 소유격으로 쓰일 때 Michael’s와 같은 식으로 ‘어포스트로피 s’가 붙지만, 독일어에서는 다짜고짜 ‘s’만 붙고는 한다. 그런데 강교수는 설마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그런 이름들을 s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꿀벌의 우화》로 유명한 맨더빌을 ‘Mandevilles’로 표기하는 식이다. (설마 이것이 강교수의 문제일까! 출판사 잘못이 크리라 본다. 하지만 욕은 옮긴이가 주로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밖에도 강교수의 번역엔 저서 등을 표기하는 방식, 옮긴이 주를 다는 맥락 등등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문제들을 품고 있다. 예컨대 〈제2판 후기〉 부분인 56-7쪽을 보자. 56쪽의 각주(4번)에 《Saturday Review》라는 저널이 인용된다. 강교수는 이를 《새터데이 리뷰》라고 해놓고, 아주 친절하게도 “’토요평론’이라는 뜻”이라는 옮긴이 주를 달아놓음으로써 지나친 친절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친절함이 무색하게도 이후 이런 식의 옮긴이 주는 내가 본 범위에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Journal du économistes》라는 저널을 《이코노미스트》라고 옮기고 있다. 여기엔 예의 그 ‘친절한’ 옮긴이 주도 안 달렸을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랑 혼동하기 딱 좋게 번역된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바로 이 《이코노미스트》를 매우 많이 인용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엔 《경제학자 저널》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지금 보고 있는 56-7쪽엔 완전한 오역도 있다. 56쪽에 지베르(Sieber)의 저작이 인용되는데, 그 제목이 잘못 옮겨진 것이다. 《리카도의 가치 및 화폐 이론》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화폐’는 ‘자본’이 되어야 옳다.


4. 이상의 언급들이 지나치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나는 지금 번역의 ‘기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예를 보여주면 충분할 것 같다.

(1) 역시 위와 같은 〈제2판 후기〉의 한 대목이다. 54쪽 윗단락 마지막 부분:

…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심없는 연구 대신 돈벌이를 위한 논쟁이 자리를 잡았고, 편견없는 연구 대신 비양심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변론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장주 코브던(Cobden)과 브라이트(Bright)가 선봉에 섰던 곡물법 반대동맹이 날림으로 만들어 시중에 배포한 조잡한 소책자까지만 해도 토지소유귀족들에 대한 그들의 반론 속에는 비록 전혀 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필 이후의 자유무역입법은 이런 마지막 양념조차도 속류경제학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의 “양념”이라는 단어를 보라. 문맥을 고려했을 때, 과연 그것이 적절한 어휘인가? 위 대목은 그나마 과거엔 경제학이 나름 괜찮았고 비판적인 측면이 조금은 있었는데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점점 더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내용을 품고 있으며, “양념”이란 바로 그 종전까지만 해도 얼마간 남아있었던 바로 그 비판적 요소를 일컫는다. 그러나 “양념”이 뭔가? 그것은 오히려 전체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따라서 여기서 “마지막 양념”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양념”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Stachel인데, 여기엔 “양념” 말고도 “일침(=sting)”이란 뜻도 있다. 이 대목에서는 후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실은 바로 이 “일침”에 해당하는 것들, 즉 경제학의 역사 속에서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들을 재구성해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학설사》를 내놓으려고 했다.)

(2) 마음을 조금 관대하게 먹는다면, “일침”을 “양념”으로 쓴대도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까? 엥겔스가 쓴 〈제3판에 부쳐〉의 한 구절을 보자. 69쪽 마지막 부분:

… [마르크스가 인용하는 방식의 특징과 그렇게 하는 까닭을 설명한 뒤] 그래서 독자들은 이제 제2판의 후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마르크스가 거의 전적으로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인용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시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구절도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저 대목에서 깜짝 놀랐는데, ‘과연 강신준 교수는 《자본(론)》을 읽어나 보았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그것도 “거의 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고?!!! 더 길게 말할 필요 없다. 위 대목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왜 마르크스가 예외적으로만 독일의 경제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는지…” 어쩌다 이런 오역이 나왔을까? 그저 한숨이 나올 따름이다.

이상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오류들이 강교수 번역의 신뢰도를 매우 심각하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맨 처음 트랙백해 둔 글에서 밝혔듯이 〈해제〉와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그의 자신만만한 표현들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두 개의 예는, 강교수의 독일어실력이나 번역가로서의 자질, 또는 출판사의 편집솜씨 등이 아니라, 강교수의 텍스트 이해 자체를, 나아가 그의 경제학자로서의 자질 자체를 의심케 하는 데 충분하리라 본다.

(나중에 발견한 것인데, 강교수의 내용이해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예가 바로 제1장 제2절에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거기서 헤겔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강교수가 붙여놓은 옮긴이 주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5. 내가 지나치게 강교수판에 회의적인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수행판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수행판에 대해 말하자면, 강교수판의 등장으로 중복번역이라는 그 기본적인 한계가 이제는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울 정도로 되었지 않느냐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가 곧 강신준판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 위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얘기했듯, 강신준판이 ‘원어번역’이라는 이점을 그다지 잘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두 번역자가 드러낸 학문적 자질 부분에서도, 강교수 쪽이 몇 수 아래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김교수의 번역엔 적어도 위 (2)와 같은 오역, 핵심적인 내용 이해를 해치는 심각한 오역은 거의 없다. 물론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번역자 자신은 물론 여러 후학들에 의한 교정 덕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결국 장기적으로는, 둘의 공동작업, 또는 제3자에 의한 둘의 ‘비판적 지양’을 통해 사태가 해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체되는 데 따르는 피해는 독자들과 후학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재 사태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강신준판의 등장으로 김수행판의 한계는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지겠지만 앞으로 한동안 사람들은 그 한계에 맞춰 자신의 인내심을 더 키워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셈이다.


6. 그렇다면 최종적인 질문. 과연 어떤 것을 볼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독자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보기엔, 기존에 김수행 번역판을 통해 《자본(론)》을 봤던 사람은 굳이 강신준판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익숙함’이라는 미덕을 대체할 만한 확실한 그 무엇을 제공해주기에 강교수판은 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제 막 마르크스의 이 걸작에 입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강신준 교수의 번역이 ‘표현’ 등의 면에서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자본(론)》에 좀 깊이 있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은? 에, 결국 둘 다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엔, 강교수 번역판을 ‘기본’으로 삼는 것도 (기존 김수행 판의 ‘익숙함’의 미덕을 버리더라도)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영어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독일어보다는 영어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심지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조차도)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큰 장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김수행판은 원래 영어판을 대본으로 삼았으므로, 읽다가 원문을 대조하려면 부득이 독일어 원전을 봐야만 했다. 독일어 못해서 한글로 보는 건데, 내용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독일어를 참조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그러나 강신준판을 보게 되면, 굳이 독일어 원전을 보지 않고 영어판만 봐도 cross-checking이 가능하게 된단 말씀이다. 물론 이것은 강교수의 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치명적인 오역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한테 해당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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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자본론 vs 자본

  1. 안녕하세요. 아는 분 소개로 이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는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서 자본론 읽기 모임을 하고 있고, 작년부터 지금까지 < 자본>에 묶여 지내는 평범한 주부 겸 외주교정자입니다. 강선생 번역본 제2권부터 교정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 자본>에 관해 EM옘님이 쓰신 글들을 열심히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뭐라 간단히 말하기 어려운 기분입니다. 공부할 것이 너무나 많군요…

    지베르의 < 리카도의 가치 및 화폐 이론>은 역자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무엇보다 편집자의 책임이라고 봅니다. < 자본> 1-2권 뒤에 딸린 참고문헌에서는 제대로 번역이 되어 있거든요. 본문과 통일하는 작업을 놓친 것이지요. 2권부터는 그런 일이 없게끔 노력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후에 1권의 오역들을 바로잡은 수정판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때도 제가 작업을 맡게 된다면 EM옘님의 이러한 지적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아무래도 독일어를 좀 아는 사람이 < 자본> 편집 작업을 맡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해집니다. 저는 독어도 모르고 경제학도 모르는데 어쩌자고 이 일을 맡았는지… 이미 일을 맡은 지 오래니 이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작업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앞으로도 이렇게 < 자본>에 대해 글 올려주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1. 안녕하세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도 여러번 지적했듯이, 문제는 편집자라기보단 번역자입니다. 지베르의 책 제목을 바로잡는 것이야 간단한 편집작업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번역자의 무지나 원문에 대한 오해/오독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은 편집자가 개입해서 바로잡기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번역자 편집자 둘 다 중요하죠.무지나 오해 , 오독도 당연히 있을수 있구요.번역이란게 아직은 우리나라는 정착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2014년 시점에서 보아도, 그렇구요. 뒤늦게 나마, 자본주의에 대한 실상 및 문제점을 느끼고, dsa kapital에 대해서 시간 날때마다 보고 있는데, 쉽지가 않네요. 그나마 영어판 초판번역이 아닌, 소위 말하는 만델판을 구해서 보고 있는데 , 쉽지 않네요. 영어로 보는데도 네이티브 수준은 아니니, 시간이 나무나 많이 걸리고, 암튼 번역이 참 중요한데, 체계적이고 정확하고, 거의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신뢰성은 저만큼 멀리가고, 자본의 논리로만, 일단 책부터 내고 보자는, 태만한 생각때문에 그런듯 합니다.자본주의 출판계의 한계이기도 하겠지요.진리를 벗어난, 진짜 번역정신을 없는.
    암튼 지간에 모처럼만에 번역에 관한 여러분들의 각자의 글다운 솔직한 글을 보게 되어 참 좋네요.
    자본(론)의 진의를 절실히 깨닫고 싶은 1인 씀.

    1. 반갑습니다. :) 자본론의 진의… 쉽지 않겠지요. 하나하나 깨우쳐가다 보면 언젠가 “자본론이란 이것 것이지”라는 일종의 견해가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절대로 이를 “혼자서”, “골방에 쳐박혀서”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세상과, 타인과 소통하면서 깨우쳐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검증받고, 교정받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견해는 그냥 “편견”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주 놀러오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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