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호] 정운영,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
정운영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은 언젠가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국민이 그들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사실 원하는 정부를 세우고 원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회를 ‘이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최초의 기본적 요구마저 쉽사리 수락되지 않는 현실의 온갖 갈등 때문에 그것을 이상적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습관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여기서 ‘원하는 정부’라는 뜻 안에는 유권자의 의사가 완벽하게 개진되고 전달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자유의 신장이라는 항목이 가장 중요한 몫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상, 정치, 문화 등 사회의 상부 구조에 속하는 여러 영역에서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제일차적 지표가 되어야 한다.

‘원하는 상품’의 의미 역시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의 질과 양이 사회 전체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소비재의 질에 대한 판단은 예컨대 추위를 가릴 서민의 집과 한가함을 달래기 위한 호화로운 별장 가운데 무엇을 먼저 지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벽돌을 찍느냐 아니면 대리석을 수입하느냐는 토론은 단순히 비용이나 효율성의 측면이 아닌 사회의 양식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와 직결된다.

소비재의 양이 결정되는 방법도 한 개인의 근면이나 한 개인의 자비심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불과 몇 장의 지폐를 봉급 봉투에 보태기 위해서 소리 지르고, 얻어터지고, 잡혀 다니고 그러다가 어떤 때는 목숨을, 단 하나뿐인 그 목숨을 잃기도 하는데, 어째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억원이 선거마당으로 풀려나가고, 수십억원이 나라 밖으로 도망나가고 수백억원의 돈이 성금이란 이름으로 호기롭게 한 사람의 주머니를 채워줄 수 있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는 사회 전체에 제기해야 한다.

자유의 보완 개념인 평등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인 생산물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서로 나누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사회의 양식 또는 공정한 분배를 사회의 정의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면, 원하는 정부와 원하는 상품에 대한 강조는 한마디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요컨대 자유가 숨쉬고 정의가 흐르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 바라고 세워야 할 사회이다. 그 과정을 당분간 ‘경제의 민주화’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로 자유를 신장시키는 정치 행위와 정의를 확보하려는 경제 행위가 전혀 별개의 사항이 아니다.

우선 사회의 재물이 몇몇 선택된 사람들에게 집중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치권력이 필요하며, 반대로 권력은 자신이 수행한 경호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독점된 이익의 일부를 떼어주도록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정경유착이니 국가독점 자본주의니 하는 어려운 이론을 끌어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축적된 재산을 그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기 위해서도, 합의된 본래의 궤도로부터의 이탈을 예방하고 바른 진행방향을 꾸준히 일깨우는 정치 세력의 존재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앞서 가고 있으나 정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현실을 잘못 진단한 실수이거나 사실의 한 면을 고의적으로 가리려는 음모일 수밖에 없다. 되풀이하자면 경제가 성장한 만큼 정치가 발전했다고 말하거나 정치가 낙후된 만큼 경제도 불안하다고 말해야 정확하게 그 뜻이 전달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전자의 주장에 흔쾌하게 찬표를 던질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수가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됨으로써 소수가 인간 이상답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추방된 니카라과의 독재자가 훔쳐 달아난 재산이 그 나라의 성장과 관계가 없었고, 폐위된 이디오피아의 황제가 마차 밖으로 뿌리고 다녔던 동전 역시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듯이, 정녕 경제에서의 성장이 정의라는 내실을 갖출 때에만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경제는 바로 이 점에서 실로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약속은 1961년 5월 총을 들고 한강을 넘어 온 사람들이 내건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그들이 하나의 밀알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금 먹지 말고 더 불려서 나누자는 논리를 폈을 때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그 밀알은 15곱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각성제를 먹고 제 살을 찔러가며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자유’와 밖으로 닫아건 방 속에서 불이 나면 고스란히 타죽을 수밖에 없는 ‘정의’가 절망과 기아선상을 대신했을 뿐이라면, 그 밀알을 키우는 데 쏟았던 우리의 노동과 애정은 도대체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역사가 가르치는 바가 그렇고 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도 그러하듯이, 비록 그 밀알이 1백50배로 켜져도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지 않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할 것 같다. 그러므로 경제의 민주화는 밀알을 키우는 노력을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 수확이 모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분배되도록 규제하는 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의 하나는 분배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향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가 성장의 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는 한쪽에서의 애걸과 다른 한쪽의 동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강인한 투쟁과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만이 국민이 원하는 소비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실로 확고한 것이라면, 그 소망을 성취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민주경제’ 건설의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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