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의 ‘진보성’에 대하여 (제1회 ‘낮은책들’ 월례강좌)

지난달 말일에 있었던 기본소득 강좌(링크)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깜짝 놀랐다. 이 강좌는 새움의 새로운 총서 ‘낮은책들’이 기획한 것으로 앞으로 이런 자리를 계속 만들 거라고 한다. 많은 관심들 가져주시길.

강연에 함께 나선 다른 두분과 달리 나의 준비가 상대적으로 많이 부실했던 것 같다. 제갈현숙 원장(민주노총 정책연구원)께서는 엄청난 퀄리티의 ppt를 준비해 오셨고, 이종태 기자(시사인)께선 최근에 기사를 쓰시면서 모은 다양한 사례들을 들려주셨는데, 나는 좀 날로 먹은 느낌;; 그래서 나름 AS(?)한다는 생각으로 그날 한 얘기를 간단히 정리해 본다.

참고로,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이미 글을 몇 개 썼다.

  1. 기본소득론: 그 계급적 성격 명확히 해야 현실성도 있다 (이 블로그, 2014년 2월 24일)
  2. ‘진정한’(?) 기본소득론 (한겨레, 2016년 8월 22일자)

1. 하나의 진보적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론은 모든 시민에게 무조건 얼마씩을 나눠주자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한해 일인당 GDP가 미화로 2만달러라고 하면, 모든 개인에게 해마다 2만달러를 나눠주자는 게 기본소득론이다. 물론 일정한 사회적 비용이 있을 것이고, 또한 개인이 ‘능력껏’ 벌어가는 부분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니 그 액수는 1만달러 정도가 될 수도 있다. 하여간 이렇게 무조건 나눠주는 거다. 그게 기본소득론이다.

이런 세상이 되면 빈곤도 없어지고 사람들도 일중독에서 벗어나며 기존 복지체계의 비효율성도 사라질 것이라고들 한다. 즉 기본소득론은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제기하고 또 해소하는 하나의 진보적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제기되고 있다. 나는 기본소득론에 그런 성격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빈곤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핵심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빈곤퇴치는 현재의 복지자본주의 하에서도 (적어도 기본소득제도 하에서 가능한 정도로는)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거꾸로 가장 잘 발달한 복지국가에서조차 빈곤이 100% 퇴치되지 않았다면, 기본소득제 하에서도 장담하긴 어렵겠다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의 ‘진보적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본소득제도의 최대 매력은, 그것이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켜준다는 것이다. 복지국가 하에서 인간은 태어나면 누구나 교육을 받고 학교에 가면 학용품을 나눠준다. 아, 우리나라 얘긴 아니다 ^^ 그러나 학교에서 나눠주는 공책이 죄다 파란색일 수 있다. 난 빨강이 좋은데… 기본소득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공책을 나눠주지 말고, 돈을 주고 각자가 원하는 공책을 사게 하는 것, 그것이 기본소득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복지자본주의 하에서 억압된 개인의 자유를 만개시켜주는 성격이 있다. 이런 성격은 역사의 발전을 개인의 자유의 발전과 연관시켰던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위와 같은 중요한 ‘진보성’을 내포한 반면, 하나의 ‘진보적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본소득제도는 매우 심각한 결함이 있다. 바로 거기엔 ‘생산론’이 없다는 사실이다. 기본소득론은 분배론이고 소비론이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어떤 청충은 ‘기본소득론에 생산론이 왜 없는가? 노동-소득 연계를 끊는다는 것, 그것이 기본소득론의 생산론이다’라고 반박했다. 맞다. 바로 그래서 기본소득론이 ‘생산론’이 아니라 ‘분배론’인 거다. 소득의 분배가 노동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특수한 분배론이다.

바로 이러한 중대한 결함 때문에, 나는 하나의 ‘진보적 대안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본소득제도는 아직 갈길이 멀다고 본다(하지만 이 길은 ‘막다른 골목’일 수도 있음을 덧붙여야 공정하겠다. 그것이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대안담론들에 닥친 운명이었다). 개인적으론 그래서 기본소득론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냥 ‘좋은 얘기’ 정도로 본다.

물론 이런 결함을 근거로 기본소득론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어떻게 보더라도 현재 우리 좌파들의 상황은 조그마한 차이나 결함 때문에 나와 다른 입장들을 억압하고 배제하기보다는 서로 장점을 북돋아주면서 함께 커가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라고 본다. 이것은 기본소득 찬성과 반대 양편에 공히 해당되는 얘기다.

2. 기본소득의 이상과 현실: 기본소득론의 출현 배경

기본소득론의 출현배경으로 얘기되는 것들이 있다. 기존 복지자본주의의 과잉에 따른 한계, 기계화/자동화 진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 개인의 욕구 다양화, 예술이나 비평 같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치를 생산하지만 시장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활동들의 존재/증식 등등.

그런데 실제 현실 역사에서 기본소득론이 등장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게 된 배경은 정반대에 가깝다. 즉 복지국가가 ‘한계’(이 한계에는 복지국가가 개성을 억압한다는 것도 포함된다)에 부딪혔다기보다는 1980년대부터 약화되고 변형되었다. 국가가 공급하는 재화/서비스의 양과 질이 떨어졌고, 더욱이 그 수혜조건으로 고용과의 연계가 강조되면서 ‘welfare’가 ‘workfare’로 전환하였다.

기계화/자동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는 줄어들기보다는 늘어났다. 일자리의 현황을 묘사하는 좀 더 정확한 용어는 ‘양극화’다. 다수의 저임금, 저질의 일자리가 급속도로 증식하였다. 그 배경은 기계화/자동화 진전보다는 세계화에 따른 자본간 경쟁의 격화, 자본의 전반적인 수익성 약화 등이 더 중요한 힘이었음이 두루 인정되고 있다.

복지국가의 후퇴는 일반적인 복지뿐 아니라 국가의 각종 지원제도의 축소도 의미한다. 그에 따라 직접적으로 자본관계에 종속되지 않았지만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어 온 다양한 ‘가치로운’ 활동들이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예술가들이 그 주된 피해자다.

이러한 복지국가 후퇴는 자본이 노자관계를 압도하고 국가의 정책결정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결정에서 민중의 힘이 크게 줄어들고 있음을 반영한다. 노조 약화는 그 중요한 계기다. 곳곳에서 문제가 터지지만, 바로 그 개별적인 문제의 장에서 사태에 맞닥뜨릴만한 힘이 우리 ‘대항세력’에겐 없다. 하지만 이렇게 약한 힘도 뭉치면 (상대적으로) 강해진다. 따라서 이제는 ‘약한 고리’를 치는 게 아니라 모든 역량을 긁어모아서 ‘중앙정부’에 요구한다! 하지만 세세하게 이것저것 시시콜콜 따지기는 어렵고(사실은, 그럴 능력이 없고), ‘돈으로 달라, 내가 알아서 할게’… 이것이 현실의 기본소득론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해선 일정에 페북에 끄적거린 게 있다: ‘운동의 무기력함과 국가에 대한 지나친 의존. 그리고 “세월호”의 난처함에 대하여’)

3. 최근 기본소득론의 인기가 반영하는 것

그러니까 현실의 기본소득론은 ‘힘든 사람들에게 소득보조를 해주자’, ‘청년들의 취업이 어려우니 일정한 생활자금을 지급하자’, ‘최저임금을 올리자’, ‘법인세를 올리자’ 등의 어쩌면 식상할 정도의 (그러나 매우 절실한) 사회적 요구들을 다르게, 좀 더 ‘섹시하게’, 그리고 좀 더 확장성 있게 나타내는 ‘언어적 포장’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기본소득론은—만약 그것이 ‘기본소득론’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애초 그것이 개념적으로 내포하듯이 기존의 복지자본주의를 해체하기는커녕 오히려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다. 즉 그 현실적 지향점은 기본소득의 옹호자들의 주장과는 전혀 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론의 최근 인기가 반영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복지국가와 (좀 더 일반적으로는) 국가기능의 축소와 형해화이지, 그 과잉이나 한계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즉 국내적으로는 공화주의적 복지국가체계가 미발달한 상황에서 글로벌한 차원에서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중첩된 우리나라 같은 후발국에서는, 기본소득론의 확산은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에 대한 불신까지도 내포한다. 이 불신은 전통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의견일치’의 근거였기도 하거니와, 이러한 불신은 최근 난항을 겪고 있는 서울시의 청년수당 시행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 청년수당정책이 기본소득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도 있지만, 현재 맥락에서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기본소득론의 증식에는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다. 위에서 현실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이 기존의 복지자본주의를 (해체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보완하는 성격이 있다고 했는데, 그 보완의 ‘방향’이 기본소득론 하에서는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진정으로 국가의 기능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현재 65세 이상 시민에게 지급되는 20만원의 기초연금 상당부분이 별 도움도 안되는 의료비로 나가는 현실에서(동네 아주머니들이 동네 한의원 물리치료 침대에 집단으로 매일 누워계시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이를 40만원으로 획기적으로 인상하는 것과 그 재원으로 노인에 대한 공공의료체계를 강화/확충하는 것 사이에서 어느 방향으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만 한다. 청년 고용의 문제도 그렇다. 기껏 어렵게 쥐어준 청년수당/청년배당이 토익책 사는 데, 또는 그 토익책을 보기 위해 들어간 커피숍 비용으로 고스란히 나간다면, 과연 그런 청년수당/배당이 바람직한 것일까? 여기서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일까?

[강연에서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선 특별히 기본소득론 증식은 자본주의 미발달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링크 후반부 참조.]

4. 기본소득, 옹호냐 반대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재 주류 정치권에서도 받아들이기 시작한 기본소득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본다. 까칠하게 굴 거 없다는 얘기다. 냉정히 말하면, 그것이 겉보기엔 기본소득론 지지로 나타나더라도 내용상으로 여기서 지지되는 것은 기본소득도 아니다. 그저 힘든 사람들 돕자는 정도의 수준이고, 어차피 1인당 월 20~30만원 정도는 기존 복지제도 하에서도 얼마든지 명목을 만들 수 있는 정도이니, 오히려 그런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체계를 보완하는 성격이 있다. 이렇게 좀 더 전술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현재의 기본소득론 인기가 향후 세수확충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기본소득, 그러니까 ‘기본소득이라고 주장되는 현실의 다양한 형태들(청년수당, 기초연금 등)’에 지지를 보낸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것들이 기본소득이 아니기 때문이다. 까놓고 말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복지제도를 확충합시다’라는 요구보다 ‘기본소득 해봅시다’가 전술적으로 ‘더 잘 먹힌다면’ 괜한 고집 피울 것 없다는 거다.

이것이 ‘무조건’ 옹호가 아님을 다시금 강조한다. 그러나 논쟁이 필요하다면 추상수준을 좀 낮추는 게 좋다. 적어도 ‘그건 기본소득이니까 반대’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기본소득 옹호자들도 이런 사정을 인정하고 좀 더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게 옳다고 본다. 이 세상은 어느 개인이나 세력의 사상을 펼치는 장이 아니다.

[덧. 강연회에서 한 청중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깜빡 잊었다. 질문은 ‘그럼 당신은 “진정한”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어찌 보느냐, 그것도 옹호하자고 할 거냐’였다. 앞서 쓴대로, 나는 ‘알파고의 영향으로 일자리가 줄어들어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커지고…’ 따위의 주장은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하고 이론적으로는 심각하게 반박할 정도로 성숙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그래도 때때로 비판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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