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시위의 한계에 관한 하나의 시각: ‘평화시위 회의론’이 보지 못하는 것

요즘 ‘평화시위’라는 방식을 두고 얘기가 많다. 한쪽에선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시위문화도 선진화해야 한다며 평화시위를 옹호하고, 다른 한쪽에선 평화시위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은 이미 2008년 광우병 집회를 하면서 보지 안았으냐며 답답해 한다. 나는 이 후자를 ‘평화시위 회의론’이라고 부른다. 이 입장에 따르면, 평화시위로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가 없고 광장에 모인 군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별 성과 없이 흩어지기 쉽다.

그런데 ‘평화시위 회의론’이 2008년의 실패를 상기시킬 때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2008년엔 평화시위 프레임이 실패했지만, 지금의 촛불 정국에서는 평화시위의 위력이 막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한달반 정도의 기간을 돌이켜보면, 광장에 모인 군중의 ‘평화’ 기조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반면, 군중의 규모와 위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그리고 그에 이은 야권의 분열과 ‘질서있는 퇴진론’의 등장 이후에도,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촛불은 더 크게 불타올랐다(12월 3일 집회). 분명 이것은, ‘평화시위 한계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잠정적으로) 마련한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사안 자체에 내재된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구별이 2008년 광우병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박-최 게이트’에서는 명확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확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박-최 게이트’에는 내재해 있다. 더구나 이미 최순실은 물론 박근혜도 검찰에 의해 (사실상) 피의자로 지목된 상태다. 이렇게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명확한 우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대중운동이 굳이 폭력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평화’로 일관했을 때, 운동의 효과는 극대화될 수도 있다. 실제로 평화적인 방식으로 현재 광장은 200만 넘는 사람들을 모아내었고, 이 ‘규모’ 자체가 엄청난 ‘힘'(force)이 되고 있다. 즉 현재의 시위가 만약 성공(?)한다면, 그것은 이번 시위가 평화로워서가 아니라 강해서다.

이에 비해 2008년 광우병 파동에서 제기된 문제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할 것인가, 수입한다면 어떤 조건으로 할 것인가, 협상과정은 충분히 투명하고 공정했는가, 장기적으로 국민의 먹거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문제들은 훨씬 더 모호하고 비결정적이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2008년에 평화시위 프레임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저런 비결정적인, ‘정답’이 정해지지 않고 사회세력간 이해관계 대립이 첨예한 사안에서는, ‘평화적으로’ 대중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오직 ‘힘’만이 사태를 해결한다.

또 이런 측면도 있다. 여태까지 평화시위라는 것은 청와대/대통령한테 뭘 좀 해달라는, 애원하는 식이었다. 그런 평화시위라는 게 먹힐리가 없다. 하지만 이번엔 바로 그 대통령이 물러나라는 게 주제다. 즉 현재의 시위에서 핵심은 ‘평화’가 아니라 ‘박근혜 퇴진’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기존의 평화시위에서와는 전혀 다른 요구다. 과거엔.. 이를테면 세월호 때를 돌이켜봐도, ‘부디 대통령께서 살펴주시라’는 식이었고, ‘박근혜 퇴진하라’,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는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고찰은, 올해 ‘박-최 스캔들’이 오직 ‘평화시위’에만 의존해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가리키는 반면, 그러한 ‘승리’가 내포하는 내용적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암시도 동시에 준다. 박-최 스캔들은 2016년 말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유일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진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독점재벌의 횡포, 비정규직 일반화, 남녀차별, 청년실업, 노년노동… 한마디로 경제와 사회 전체에 퍼진 비민주성을 척결(최소한 개선)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는 안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이해와 해법은, 박-최 스캔들만큼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다. 앞서 광우병 파동과 관련된 문제들처럼, 그것들은 지극히 비결정적인, ‘정답’이 없는 문제다. 각각의 사안을 둘러싼 물질적 이해관계, 사회 세력들 간의 대립 속에서, 즉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에 대한) 상당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오직 잠정적으로만 ‘타협점’이 형성될 것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비정규직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면, 얼마나 줄여야 하는가? 소득의 재분배는 어느 정도까지 정당화될 것인가? 여성에 대한 차별은 어느 선까지 교정될 것인가? 과연, 이런 문제들이 지금과 같은 ‘평화시위’로 근로대중의 바람에 부합하는 정도로까지 해소되겠는가?

지난 한달 반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평화시위는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힘을 가졌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 성공할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성취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 이후, 우리가 위에서 말한 한국사회의 기저를 이루는 ‘진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평화시위의 무력함을 다시금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 평화시위의 이중적 성격이며, 흔한 ‘평화시위 회의론’이 보지 못하는 측면이다. 그리하여 중요한 질문은, 이를테면, 현재의 열기 속에서 박근혜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한국경제에서 비정규직의 위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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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평화시위의 한계에 관한 하나의 시각: ‘평화시위 회의론’이 보지 못하는 것

  1. 애초 목적이 자신들의 존재와 주장을 알리는 정도라면 ‘평화시위’라는 것도 말이 되지만, 무릇 적법한 소정의 절차도 작동하지 않고 말로는 도무지 해결이 안 될 때 거리로 뛰쳐나오는 게 ‘시위’ 아닌가? 이런 시위가 평화적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고 반대로, 평화시위와 폭력시위를 대비시켜놓고 평화시위(x), 폭력시위(o) 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논리. 적어도 발달된 민주주의 사회라면, 평화시위고 폭력시위고 간에.. 시위는 최소화되는 게 맞는 거다. 하지만 이 발달된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합리적 토론이나 제도로써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최근 몇 년 사이에 시위에 나선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려보시길. 바로 이럴때 시위에 나선 약자들이, 평화롭게 자기 얘기만 하길 바라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온갖 부당한 처사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평화롭기만 했음..)

    나는 이번 토요집회의 평화로움을 거스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시위대가 강력한 것은, 정치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순전히 현재 제기되는 의제의 정당성과 시위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본다. 평화롭다는 것은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점.. 지금 우리가 거두고 있는 것 같은 성공이 그 ‘평화로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행여 나중에 우리 중 누군가가 부당한 처사에 못이겨 거리로 뛰쳐나갔을 때, 만약 그들이 아주 자그마한 폭력을 휘두르기라도 했을 때, 그들을 잘못 비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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