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과 야당과 촛불 앞에 놓인 ‘선택’들

이번주 야권의 탄핵시도가 불발에 그치면 지금 광장에 모인 200만 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분노의 물결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이에 대해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대로, 희미해지는 촛불과 함께 군중의 규모도 줄어들고 우리는 다시 전과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가길 강요받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나는 설령 야권의 탄핵시도가 불발에 그치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은 끝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시기도 4월까지 늦춰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사태가 그저 대통령을 포함한 정권의 ‘추악한 민낯’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껏 사태는 보통사람으로선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련의 사실들과 그에 대한 대중의 이례적으로 격렬한 반응에 의해 압도적으로 추동되어 왔다. 이러한 쓰나미 같은 충격에 밀려 박근혜 대통령이 재빠른 자진사퇴를 선택하거나 국회를 통해 탄핵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현실을 우리는 지난 한달여간 경험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자진사퇴나 국회의 탄핵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의 경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현재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허용하지 못할 정도로 절박하다. 바로 이것이, 정권 차원의 스캔들과 관련된 ‘거품’이 걷혔을 때 드러나게 될 ‘바닥’이다.

현재 한국경제의 상황은 ‘자본’의 위기, 특히 ‘재벌’의 위기라고 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물론 이런 위기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간 재벌은 국가권력과 결탁해 근로대중을 희생시키며 솜씨좋게 위기를 넘어 왔다. 그래서 그동안은 ‘자본’의 위기가 사회양극화, 고용불안정, 비정규직 확산 등의 형태로 위장되어 왔던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본은 나름대로 경제성장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과 자원을 총동원해 재벌의 뒤를 봐줬다. 하지만 세계경제의 침체로 인한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심화하는 소득(및 자산)양극화와 고용불안정 등으로 이제 더 이상 대중은 양보할 게 없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와중에 불거진 박-최 스캔들은 그간 재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조금도 남김없이 없애버렸다. 이제 자본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그야말로 ‘맨몸으로’ 맞닥뜨려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은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것이다. 행여 그것을 겪더라도 그 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데 우리나라의 독점자본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본다. 물론 ‘질서있는 퇴진’론도 말은 된다. 여당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4월에 임기단축 형식으로 퇴진하고 이후 조기 대통령선거를 통해 새 정부로 이행하자고 주장한다. 재벌로서는 자신의 기존 파트너들이 내놓는 이 시나리오가 잘 작동하기만 한다면 거기에 동조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리 녹록치가 않다. 새누리당의 ‘4월퇴진’ 시나리오는 재벌이 현재의 국정공백 상황을 최소한 6개월, 아마도 9개월 정도를 더 감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 사이에 삼성전자는 폭발로 인한 갤럭시 노트7 단종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낼 새 모델도 출시해야 하고, 현대자동차 또한 비슷한 처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두 기업이 그렇단 얘기다. 다른 많은 수출기업들도 제대로 영업을 해나가려면 정부의 보증이 필요한데, 만약 그 사이에 미국의 금리인상에 이어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1 안 그래도 세계적으로 보호주의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는데, 과연 우리 기업들이 그 파고를 정부의 도움 없이(또는 매우 약한 도움) 넘을 수 있을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삼성이 갤럭시 노트8 또는 갤럭시 s8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까? 혹시 미국이나 다른 어디에서 적대적인 소송이나 당하지 않을까?

중기대출

방금 국가신용등급을 언급했는데, 그와 더불어 향후 우리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 국제기구들의 경제성장 전망치 하향조정이다. 이미 OECD가 그러한 조정을 했고(3.0% @ 2016년 6월 —> 2.6% @ 2016년 11월), 내년 1월에 전망치를 내놓을 IMF도 이미 해외매체를 통해 지난 10월에 3.0%였던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출 것임을 시사했다.2 과연 얼마나 내릴까? 지금도 벌써 많은 이들이 벌벌 떨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경제위기’론은 정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금 ‘위기론’을 확산시키며 일부 보수매체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지금 시점에서 한국의 독점자본의 선택은 이미 꽤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향후 사태의 추이에 따라 재벌은 좀 더 자신들에게 친숙한 파트너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이것이, 어떤 일이 있어도 박근혜가 끌어내려지는 그 시간까지 촛불이 꺼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한 선택이 지금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현재 재벌이 박-최 무리와 ‘공범’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하나 갖춰지고—나는 대내적 조건보다는 대외적 조건이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상황이 점점 ‘임계점’에 다가감에 따라 재벌의 선택이 겉으로 드러날 시점이 올 것이다. 바로 그러한 순간이 왔을 때, 그들은 타협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타협의 대상은 야권이다.

사태진행의 주요한 무대가 정치권인 지금, 200만 촛불을 배경으로 가진 야권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일부 여권과 ‘타협’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간간히 감지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움직임은 일단 적발되기만 하면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재벌의 선택’이 가시화되고 무대가 정치권을 넘어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될 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야권의 여당 정치세력과의 타협이 아니라 바로 저 재벌과의 타협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박근혜의 조기퇴진과 야권을 중심으로 가급적 빠른 정권안정을 전제로 할 것이다.

자, 이러한 갈림길 앞에서 현재의 야당의 선택은 무엇일까? 작금의 사태의 공범인 재벌과 타협하면서 좀 더 안전하지만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결연히 선을 긋고 조금은 더 힘들지만 정의로운 길을 갈 것인가? ‘재벌도 공범이다’라고 외치는 200만 촛불과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악마와 손을 잡을 것인가?

또한 200만 촛불의 선택은 또 어떠할 것인가? 박근혜가 끌어내려지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재벌을 포함한 모든 공범들이 처단될 때까지 촛불을 밝힐 것인가? 물론 이런 선택이란 게 모 아니면 도 식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타협점은 어디쯤에서 만들어질 것인가? 이 경우에도, 앞서 올린 글의 말미에 내놓은 질문이 여전히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현재의 열기 속에서 박근혜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한국경제에서 비정규직의 위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겠는가?’

Print Friendly
SNS로 공유하기!

  1. 경제장관 긴급소집.. 무디스·S&P·피치에 “경제 이상없다” 전화 (조선일보, 2016.12.10.)

  2. 지난 4월 영국의 내년도(2017년) 경제성장률을 2.4%로 전망했던 IMF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인 10월에는 그 수치를 1.2%로 반토막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