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철학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다 쓰고 나서 보니, 이 글은 그만 포스톤에 대한 글이라기보단 “철학적 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대한 작고 엉성한 비판이 되고 말았다. (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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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삼님의 덧글(링크):

다른게 아니라, 제가 아시는 편집자가 Moishe Postone의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A Reinterpretation of Marx’s Critical The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번역에 관해서 물어왔는데요. 본인도 잘 모르는 저자와 책이라 혹시 아니고 말이죠. 전에 EM님이 한 번 언급한 것 같아서요. 어떤 저자고 어떤 맥락에 관한 책–자본론과 그룬트리세르 재해석했다는 제법 유명한 책이라는 정도만 아는지라–인지 코멘트 부탁드려도 될까요?

EM의 대답:

근데 그 책 번역되어 나온다는 얘길 어딘가에서 들은 거 같은데… 아닌가요? 예, 제가 예전에 한번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 근데 지금 찾아서 다시 읽어보니 (역시 예상대로) 아주 피상적인 언급이었네요(하… 그게 벌써 2년도 더 전 일입니다. 세월 참…). 그런데도 다시, 그다지 깊이가 더하다고 볼 수 없을 코멘트를 하나 더 하자니 좀 민망스럽기도 하고 그러네요 (-_-;)

일단 포스톤의 프로필을 제가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기본적인 사항은 그의 홈페이지(http://history.uchicago.edu/faculty/postone.shtml)를 보시면 좋을 것 같고요, 거기 잘 나와있다시피 포스톤은 프랑크푸르트 비판이론적 전통에서 마르크스를 해석하고 발전시키려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킬 때, 그가 “전통적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을 강하게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전통적 해석”이란 노동의 관점에서 행해진, 노동에 대한 일의적 해석에 의거한 마르크스 이해, 다시말해 대충 자본-노동-(잉여)가치-착취-계급지배 등의 개념연쇄로 이뤄진 해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스톤은, 이런 해석이 이제껏 많은 성과를 거둬내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한계가 크며 마르크스가 이뤄낸 진정한 성과와도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란 마르크스가 입각해있던 관점이라기보단 오히려 그가 비판하려고 했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노동”이라는 것을 그는 역사적 지평 위에 놓으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취하는 독특한 성격들을 조명함으로써 노동 자체의 개념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려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관철되는 “계급관계”의 양상과 “지배”의 성격도 함께 다룹니다. 이는 곧, 위와 같은 노동에 대한 그 나름의 독특한 이해와 더불어, 그런 이해를 가능케 했고 또 그 이해를 심화시킬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을 발견해냄으로써, 결국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일종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도출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전체적으로 엮어내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는 위에서 말씀드린 “전통적 해석”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주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까닭을, <자본>이 매우 어렵고 또 그래서 다양한 오해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는 데서 찾습니다. 결국 그가 <요강>에 주목하는 것도, 그것을 통해 바로 그런 <자본>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또 거기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의미들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네그리(Antonio Negri)처럼 <요강>에 주목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을 개무시하는) 네그리와 달리, 그리하여 그보다 훨씬 더 명석하게도 <자본>의 의의를 인정함과 동시에 <자본>과 <요강>의 관계를 한층 더 복합적으로 파악합니다(뿐만 아니라, 앞서 행했던 “노동의 관점”과 “노동의 비판”이라는 대립쌍을 떠올리면, 네그리나 레보위츠(Michael Lebowitz) 같은 사람들이 전자에 입각해 있는 반면 포스톤은 후자에 서 있다는 차이점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이것이 <요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이라는 표현이 전제하는 “전통적” 해석이 <요강>에 대해선 이렇다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는 (만약 그런 것이 있다 해도) 포스톤이 그것을 딱히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스톤의 그것은 <요강>에 대한 여럿 (여기엔 네그리의 그것도 포함되겠죠) 중 하나의 해석–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이라 해야할 것입니다.

글쎄요… 포스톤이 내놓는 구체적인 논의내용을 “제가”, “이곳에” 요약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고요… 다만 몇 가지 주변적인 이슈들에 대한 제 견해를 몇 가지 말씀드린다면… (1)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포스톤 같은 사람들의 마르크스 해석이 의미있게 다가오려면, 그것이 염두에 두는 “전통적” 해석이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포스톤의 논의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많은 의미를 갖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퍼져있는 마르크스의 이론, 좀 더 구체적으론 정치경제학에 대한 “기존” 해석이라면 구소련/동독, 알튀세르, 국제사회주의, 기타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이 있을텐데, 이들이 별다른 질서없이 중구난방식으로 섞여 있다가 거의 한꺼번에 해소된 게 우리나라의 사정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럼에도 저는, 포스톤과 같은 논자들이 매우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하시겠지만, 그 까닭은 그런 이들이 대체로 마르크스의 비판이 “정치경제학”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거의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상식적이게도, 마르크스의 비판은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입니다. 물론 그것이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지만, 그 본령은 전자에 있습니다. 따라서 포스톤이 칭하는 바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의 진정한 의미를 캐내려면, 그가 실제로 개입하려고 했던 바로 그 정치경제학이라는 맥락을 살피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3) 하지만 포스톤 같은 철학적 해석에도 저는 그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이를, 제가 즐겨사용하는 도식(?)을 빌려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 체제”로 고려되며, 실은 바로 그런 고려 자체가 기존 논의 비판의 매우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입니다. 역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사회는 크게 “생성-발전-소멸”의 과정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기존의 이론들은 자본주의의 생성, 발전, 소멸에 대해 저마다 일정한 왜곡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비판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죠. 첫째로, “생성”에 대해 말하자면, 기존 이론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일정한 “역사적 생성과정”을 겪었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듯이 말합니다. 즉 그런 시각을 그것들은 “이론적으로” 왜곡하며(이를테면 근대 사회계약이론), 나아가 실제 역사까지 왜곡합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따라서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의 접근을 필요로 하겠죠. 곧 근대사회이론에 대한 이론적 개입과 실제 역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그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마르크스 이론 중에서도 전자의 성격(근대사회이론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조명하는 데 유용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발전”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데,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집중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곧, 자본주의 경제를 내적으로 통합된 “재생산 매커니즘”을 갖는 하나의 총체로 보고, 그 매커니즘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들을 바로 그 총체적 관점에서, 달리 말하면 “변증법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얘길 더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소멸”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달리 “지양”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새로운 사회–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론의 핵심 중 하나가, 그것은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사회(자본주의)의 태내에서 자라난 모순들의 일정한 귀결이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소멸”의 논의는 “발전”의 논의와 필연적인 연관을 갖겠지만, 마르크스 자신은 그것을 충분히 발전시키진 않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제 견해로는, 철학적 해석이 가장 생산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저는 이를 마르크스 비판의 “유토피아적 계기”라고 부르는데요, 그런 비전에 대한 논의는 포스톤이 속하기도 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가장 훌륭하게 발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힌트는 뽀삼님 바로 위에 덧글을 달아주신 무연님의 소개로 알게 된 벤하비브(Sheila Benhabib)의 논의를 검토하는 중에 얻었습니다. 사실은 포스톤도 벤하비브를 인용하고 있기도 한데,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포스톤보다는 벤하비브가 한 수 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문제는, 포스톤이 자신의 논의를 그런 “유토피아적 계기”에 위치짓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자본주의 경제의 내적 본질 및 그 작용이라는 차원, 즉 위의 제 도식에 따르면 “발전”의 차원에 위치짓습니다. 그러나 저는, 포스톤의 논의는 (어느 정도는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논의가 철학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소멸”의 차원, 또는 “유토피아적 계기”를 발달시키는 데 궁극적으로 헌신하고 있다고 (또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이것은, 마르크스의 “비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엇갈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앞서 다른 포스트에서(링크) 내놓은 바 있는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을 매우 강하게 고수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판에 대한 다른 이해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믿습니다. 결국엔 포스톤도, 제 범주에 따른다면, 비판에 대한 “단순한” 개념에 입각해 있습니다. 음… 이렇게 말씀드리면 의미가 좀 애매모호할텐데요, 간단히 하면 이런 겁니다. (포스톤을 포함해) 흔히 비판을 “부정”(negation)의 의미로 쓰는 반면, 저는 그것을 “긍정”(affirmation)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죠–“긍정을 통한 부정”, 또는 “분석을 통한 비판”이라고 하면 뜻이 더 살아날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구분에 따른다면, 주어진 대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부정하는 것”이 포스톤 등에겐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이 되겠지만, 제겐 (말하자면) 대상을 “진정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분석하는 것”이 핵심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그런 절차에 뒤이어 “대상에 대한 부정”이라는 과정(예의 그 “비판의 유토피아적 계기”)이 자연스럽게 나오겠지만,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적어도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이를 크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 관점에서는 포스톤은,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과 관련, 상대적으로 사소한 대목에 집중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시대에 마르크스주의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비판(단순한 의미–부정–에서의), 해방, 저항… 이런 것도 좋지만, 어떤 면에선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범지구적 자본주의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본주의는 현재의 범지구적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 위기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생산/유통/소비,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수입의 배분이 띠는 특수한 형태는 무엇인가, 파생금융상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지구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는가, 중국은 과연 헤게모니 국가가 될 것인가, 한국은 왜 맨날 요모양 요꼴인가, 대체 MB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등. 과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포스톤 같은 이들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저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바로 이런 문제에 답하는 이론,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이런 문제들에 거짓 답변을 내놓는 부르주아 이론들에 대항해 그에 대한 진정한 답변을 내려주는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얘기가 이쯤 되면, 포스톤이 비판하는 “전통적 이론”이라는 것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그런 이론도 사실은, 그 당대에 제기되었던 위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은 현실의 문제들에 복무하는 과정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형성되고 발전된 것이라는 겁니다. 포스톤은 이런 사정에는 정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마치 거기에 “진정한 해석”이라는 것이 있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가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이는 사뭇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도, 그가 비판을 기본적으로 “이론비판”이라기보단 “현실비판”으로 보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포스톤의 논의가 오늘날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위에서 제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나열한 것은 그것들이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선 그것들은 “거의 모든” 문제들입니다. 특히나, 포스톤이 겨냥하는 바로 그 “전통적 이론”이라는 것이 아무런 힘이 없는 오늘날엔 더더욱, 나아가 그런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한국에서는 더더더더더욱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 마지막 대목의 논의는, 포스톤과 같은 철학적 성격을 갖는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이 향할 하나의 지향점 같은 것을 제시해주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는 결국 그들아 짊어질 과제이지만, 제가 보기엔 기존의 자신들의 논의들을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는 의미있는 걸음들을 내딛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아… 아마도 뽀삼님의 요청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글은 아닐 것 같습니다. 다만 이상의 이야기로써 뽀삼님께 조금이나마 영감을 드렸다면 만족합니다^^;;)

P.S. 한 가지 빼먹은 게 있어 추가합니다. 포스톤과 같은 논의의 “전망”에 대해 추가요. 기본적으로 포스톤의 논의는 “해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뽀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새 마르크스 연구는 특히 MEGA의 발간을 계기로, 기존에 다양하게 제시되었던 “해석”들이 마르크스 자신의 언급들에 의해 명시적/비명시적으로 옹호 내지는 기각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곧 기존의 분분했던 “해석”들의 진위를 가려줄 (그러나 예전엔 존재하지 않았던) 근거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죠. 포스톤의 논의도 그런 “심판”으로부터 자유롭진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심판관이 될 수는 없지만요;;

이 얘길, “철학적” 마르크스주의 일반과 관련시켜 확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때 제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헤겔에 대한 연구가 성숙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연구가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헤겔에 대한 그것도 그렇다고 합니다. 아직은 헤겔에 대한 구태의연한 해석이 아닌 진지한 연구에 입각한 논자들이 마르크스에도 비슷한 기여를 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또는 아직은 그런 기여들이 널리 알려질 기회가 없었지만, 그것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에도 결국에는 심각한 충격을 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랬을 때, 포스톤을 포함한 기존의 “철학적”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은, 그 이론적 기반의 밑바닥이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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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oughts on “이른바 철학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1. 써놓고 나니까 자꾸만 빈틈들이 보이네요. 이렇게 덧붙이면 되겠죠..;; 근데 저보다는 아마도 찬별님께서 훨씬 더 좋은 얘길 해주실 수 있으실텐데… 이 포스트를 혹시 보시면 한말씀 부탁.. ^^;

    위에 포스트에서 제가 하려던 얘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글이 좀 난삽해서 덧붙입니다). 포스톤과 같은 “철학적 마르크스주의” 논의는 (제가 말하는) 마르크스 이론의 “유토피아적 계기”를 발전시키는 데 적합한데, 그리고 실제로 그의 이론은 그것에 복무하고 있어 보이는데, 포스톤은 자기가 마치 자본주의의 동학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맹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흥미가 좀 생겨서 포스톤의 다른 글들을 훑어보다가, 이런 맹점이 매우 잘 드러난 글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Political economy and global capitalism: the 21st century, present and future](2007, 링크)라는 책에 실린 그의 “Theorizing the Contemporary World: David Harvey, Giovanni Arrighi, Robert Brenner”라는 논문입니다. 글을 다 요약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그는 Brenner를 비판하기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의 동향을 분석한다면서 경제적 측면만 부각하고 사회적/문화적 측면의 변화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라고 합니다. 물론 그는 Brenner의 이와 같은 “한계”의 근원을 그 나름대로 밝히긴 하는데, 저로서는 뭐 이런 비판이 다 있나 싶네요. 그러니까 이건, 경제학 논문 보고서 왜 거기엔 철학 얘기가 없냐고 나무라는 격인데… 좀 너무합니다. 더구나 그의 위와 같은 비판은, 그가 늘 강조하는 “내재적 비판”(immanent critique)도 아닙니다. 끝으로 그는 “비판적 정치경제학”과 “정치경제학 비판”을 구분하는데, 그 취지야 십분 이해하지만,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한지도, 그리고 이런 구분이 마르크스의 입장에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런 사례가 바로, 포스톤이 자신의 논의가 위치해야 할 곳을 잘못 찾고 있다는 하나의 근거가 됩니다. 번짓수가 틀렸다는 겁니다.

  2. 간단한 코멘트를 부탁했는데, 장문의 논평을 올리셨네요. 주말에 과한 노동을 부탁한듯 ^^;; 많은 도움 받았습니다. 캄싸*100ton!!!

    1. 뭘요.. 저 나름대로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어요.

      포스톤에 대해, 문득 작년엔가.. 친구가 했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런던에서 있었던 Historical Materialism 저널이 여는 연례학술대회 자리에서, 포스톤이 발표를 하던 세션이었죠. 저는 그 시간에 다른 곳에 있었고, 포스톤의 발표장에 있었던 그 친구 말이… 누군가가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포스톤이, 질문이 엉성하다며 답변을 거부했다고 하더군요. (좋은 의미에서) 엄밀한 분이라는 얘기죠. ㅎㅎ

    1. 흠… 참으로 철학적 마르크스주의스러운 덧글이네요 ㅋㅋ

      글게 말이죠… 허허… 마침 그 일터앞을 지나다 생각이 나서…
      전하기로 약조한 것도 있고… 그러니,
      죄없는 이몸을 탓하지 마시고, 과묵한 그를 탓하심이
      순리에 더 맞을 듯 하네요. ^_^

      1. 뭥양

        이엠님하고 밥’만’ 먹는다구 그랬을 뿐임미다.
        다른 정보도 다 몰랐어용 >.<
        그것도 아마 자신의 행적을 설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언급이랄까요. (더 과묵해질까봐 쉴드)

        1. ㅎㅎㅎ 저 요새 “평온 개리”에 완전 꽂혀있는데…
          “과묵 xx”으로 불러드려야겠네요 ㅋㄷ
          그나저나 혹시 제가 두분만의 과묵한 시간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문득 걱정이…;;;

        2. 그럴리가요 ㅋㅋ

          그리고 우리둘만의 시간에 그는 절대로 과묵하지 않습니다 ㅋㅋ 제 견해에 이견을 제시하느라 과묵해질 수가 없는 듯? ㅋㅋㅋ

        3. 뭔가 손에 잡히지 않는 아슬아슬함 같은 것이 있었는데, 우리 졸귀님 덕분에 깨진 것 같아 좀 아쉽기도 하고 속시원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ㅋㅎㅎ

  3. 금요일 정확히는 토요일 새벽에 댄 보크너랑 악수하고 대화하고 난리났었다능 ㅋㅋㅋㅋ 댄 보크너한테 씨유인런던! 했는데 될라나 ㅠ_ㅠ

  4. 헐… 이건 제 실수입니다; 도서관 알바 하던중에 잠깐 정신을 놓았던듯 ㅡ.,ㅡ 근데 왜 삭제가 안되는거죠?

    1. 제가 대신 해드렸슴다. 괜찮으시죠? (누구도 기분나빠할 사람 없는 것 같으니, 걱정 마세요, 네오풀님. ^^)

  5. ㅋㅋ 아까 그 별명 좋았는데 말이죵. 뭔가 마사루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과 비스므레 하면서도 뭔가 이국과일 이름 같기도 한 것이……과묵하신 그분은 괘안으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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