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in a name? 자본론 vs 자본: ‘비판’의 의미에 대하여

1. 머리말

Karl Marx의 《Das Kapital》이라는 책이 있다. 내 블로그의 주된 테마 중 하나인 저작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좋을까? 현재 우리나라엔 번역자가 다른 《자본론》과 《자본》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 달린 덧글에서 누군가도 말했듯이, 이 둘의 차이는 단순히 ‘론’자 하나가 더 붙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국한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보다시피 아래 덧글은 냉커피님이 쓴 것이지만, 아래 논의에서 나는 그를 특정하지는 않는다).

맑스가 자본의 부제로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타이틀을 건 것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그대로 그들의 [sic]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아닐까요…그래서 우리는 자본론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이구요.. [출처링크]


예전에 진보넷 시절에 이런 문제를 가지고 네이버 블로거인 청수님과도 논쟁을 벌인 바가 있다(내 글은 나의 진보넷 블로그가 닫혀있으므로 링크를 걸 수 없지만, 청수님의 관련글은 걸 수 있다. 다음과 같다: 자본 음미 2자본 음미 2-1). 사실 청수님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명하신 분이다. 그분은 나를 안 지가 얼마 안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분을 꽤 오래 알아왔다. 따라서 나는 그분이 ‘자본론’이 아니라 굳이 ‘자본’을 고수하는 이유를 안다. 위 링크된 글의 버터 발라놓은 듯한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매우 강경한 어조로 ‘자본론’을 쓰는 이들을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 것을, 적어도 김수행 교수가 자신의 번역판 제목을 《자본론》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아냥대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증거? 대라면 어디든 뒤져서 댈 수 있겠지만, 귀찮아서 관두련다.

어쨌거나 내가 하고픈 얘기는, 위에서 인용한 냉커피님의 ‘자본론 vs 자본’에 대한 말씀은, ‘자본’을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주장이라는 거다. 물론 여기엔 청수님도 포함되며, 그의 ‘명성’ 등을 고려해볼 때 그는 이런 생각을 퍼뜨리는 데 나름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위와 같이 ‘분석’과 ‘비판’을 대비시킴으로써 ‘자본론’과 ‘자본’을 구별하는 시도는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다. 첫째, ‘비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째, ‘론’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2. 사태(?)의 전개

마르크스의 문제의 책의 정식 제목은 다음과 같다: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우리말로 직역하면,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이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봤을 때, 이 세 단어 중에서 가장 많은 곡절을 겪은 건 아마도 ‘비판’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일 지도 모르지만, ‘비판’이 겪은 곡절은 곧 《Das Kapital》이 이제까지 받아들여져 온 방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칠게 말하면, 20세기 초 러시아혁명 이후 특히 스탈린의 지도 아래 이른바 공산주의 세계가 제 발로 서는 과정에서 《Das Kapital》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경제학과 역사유물론은 하나의 ‘체계’로 교조화됐고, 이와 관련해서 나중에 흔히 ‘경제결정론’ 또는 ‘경제주의’라고 호된 비판을 받게 된 일정한 경향이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앞서 언급한 ‘자본’ 고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이 ‘자본론’으로 굳어지는 과정이었다고 묘사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Das Kapital》의 원제목에 덧붙여진 ‘비판’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경제학’이 되어버린 《Das Kapital》이 사실은 ‘정치경제학 비판’임을, 즉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 또는 ‘분석’하는 게 아니라 ‘비판’하는 저작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위에서 묘사한 사태에 경종을 울리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거명할 수는 없지만, ‘열린 마르크스주의’(Open Marxism)라는 깃발 아래 모인 일군의 학자들도 그들 중 하나다(이들에 대해서는 박승호,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재구성》 참고).

이렇게 사태가 흘러가는 동안 하나의 대립구도가 형성되는 것은 필연적인데, 그 대립구도란 바로 다름아닌 “‘분석’ 대 ‘비판’”이다. 대표적인 열린 마르크스주의 논자인 워너 본펠드(Werner Bonefeld)나 존 홀로웨이(John Holloway) 같은 이들의 논의를 참조하면, 결국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란, 대체로 197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20세기를 거치며 독점자본주의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심지어 조절이론 등과 같은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특유의 혁명성 및 비판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의 변모를 설명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것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과학, 즉 현실의 겉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일종의 변호론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사태인식과 문제제기 자체는 좋다. 타당한 측면, 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흐르는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비판’이라는 카드를 꺼내 제동을 거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위의 열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듯, 이렇게 ‘비판’을 강조하는 이들은 지나치게 많이 나가는 경향이 있다. 즉 그들은 ‘비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분석’을 거의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덧붙이자면, 이런 경향은 비단 ‘분석’과 ‘비판’을 대립시키는 사람들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경제학 대 정치학 (또는 사회학, 철학 . . .)’와 같은 구도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전히 정치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을 강조하면서 ‘경제결정론’이라는 흘러간 옛 노래를 즐기는 이들 모두에게 대체로 해당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경제학의 분석적 측면을, 나아가 경제학 자체를 무시하고 있다는 얘기다.

3. ‘비판’의 의미

‘경제학’의 의의에 대해서는 앞서 한차례 글을 쓴 일이 있으므로 여기선 ‘경제학 대 정치학 (또는 사회학, 철학 . . .)’에 대해선 얘긴 접고(이에 대해선 [링크] 참조), ‘분석 대 비판’에만 논의를 제한하겠다. 결국, 물과 기름과도 같이 섞일 수 없어 보이는 ‘분석’과 ‘비판’을 어떻게 하면 ‘변증법적으로’(!) 이해할 것이냐가 핵심일 것이다. 실제로 ‘비판’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분석’ 측면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애초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분석’과 ‘변증법적으로’ 엮일 수 있는 ‘비판’ 개념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일반화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비판’의 의미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거다(물론, 그동안 등한시되어오던 ‘비판’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살린다는 그들의 의도에 비춰볼 때, 이와 같은 단순함은 그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결점이다).

내 주장은 무척 간단하다. 비판이라는 말, 마르크스가 ‘비판’이라는 말을 입밖에 냈을 때 그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그것을 ‘분석’과 대립시키는 따위의 일은 헛되다는 게 쉽게 드러난다는 거다.

그렇다면 ‘비판’ 이란 무엇인가? 흔히 분석을 긍정적인 것으로, 비판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어원적으로 보든 아니면 그 개념이 실제 지성사에서 쓰인 방식으로 보든 ‘비판’이란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개념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원적으로 ‘비판’(critique)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까지 소급되는데, 이때 그것은 ‘위기’(crisis)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crisis란 일종의 의학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환자의 병세가 하나의 국면에서 다른 하나의 국면으로 넘어가는 어떤 고비 같은 것을 뜻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이런 의미에서 crisis는 사태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물론 그에 기반해서 내려질 냉철한 ‘판단’까지도 포괄하게 되는데, 이후 이런 ‘분석’이나 ‘판단’의 문제는 대체로 critique이라는 단어로 독립되었다. 나아가 critique은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밝힌 바 있듯이 근대 서유럽 지성계에서 심지어 ‘이성(reason)의 사용’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비판’에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이 말의 어원을 보자. 그것은 crisis와 맥을 같이 한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비판’이란 비판 대상이 일정한 ‘위기’ 상황에 있다는 판단을, 나아가 그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그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전제한다고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겠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현재 정치경제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며, 이런 판단을 설득력 있게 내어놓으려면 정치경제학을 면밀히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후자의 작업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 하나의 정치경제학 체계를 결과로서 내놓을 텐데, 우리는 그 결과를 《Das Kapital》이라는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Das Kapital》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존 정치경제학을 지양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 또 다른 정치경제학이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비판적이지 않은 경제학, 과학적이지 않은 경제학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진정으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경제학을 내놓고 증진시키며 예의 그 잘못된 경제학에 그것을 대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비판적’인—‘부정적’ 의미에서의—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춰보면,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은—‘분석 대 비판’이라는 속류적인 대립에 입각해 말한다면—‘자본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자본에 대한 분석’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더 타당한 셈이다. 이와 같은 단순하고 속류적인 의미의 ‘비판’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물론 그 자신들은 그것이 그다지도 단순하고 속류적인 것인지도 몰랐겠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Das Kapital》의 ‘최종’ 목표는 자본을 ‘비판’하고 ‘지양’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나는 대답하겠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그렇게 항변하시라. Nobody cares.

4. ‘론’에 대하여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을 제대로 제시하려면 위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논의가 요구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논의를 충분히 발전시킨 예를 나는 거의 본적이 없다). 그러나 위에 내놓은 이야기만으로도, ‘흔히 말하는 분석’이란 ‘진정한 비판 개념’을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임이 분명해졌으리라 믿는다. 가장 단순히 말해도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예의 그 ‘제목’을 둘러싼 논란을 다시 보자. 글의 첫머리에서 인용한 ‘자본’ 옹호자는 자신의 ‘자본’ 옹호의 근거를, 마르크스는 《Das Kapital》을 “새로운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말그대로 그들의 [sic] 방식으로 정치경제학을 반박하기 위해” 썼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적어도 내가 직/간접적으로 본 한에서는 ‘자본’ 옹호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근거인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Das Kapital》은 자본을 분석/설명하는 게 아니라 비판/반박하기 위한 저작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일단, 이상의 논의를 참조했을 때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두자. 그러고 난 다음, 하지만 더 재밌는 것은, 설령 이와 같은 (‘분석 대 비판’이라는) 이분법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이 ‘자본론’에서 ‘론’을 빼야 한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거다. 가장 단순히 말해도 ‘론’이란 ‘논하는 글’, ‘정당한 근거를 밝혀 주장하는 글’을 일컫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는 고전한문 문체의 하나로서(자세한 설명은 예컨대 [링크] 참조), 근대에 와서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단순히 말하면—‘논설문’으로 자리잡았다(배수찬, 《근대적 글쓰기의 형성 과정 연구》).

그러니까 《Das Kapital》을 ‘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성격을 어떻게 보더라도—즉 그것을 ‘분석’이라고 보든 ‘비판’이라고 보든—지극히 정당하다. ‘자본’ 옹호자들은 《Das Kapital》의 자본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이 아닌) ‘비판’으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그것을 ‘자본’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내가 사고방식이 특이해서 그런지 내가 보기엔 오히려 ‘자본’이라고 하는 게 더 ‘설명문’스럽다.

5. 진짜 중요한 문제는. . .

《Das Kapital》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론’자를 붙이느냐 마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목’과 관련해서 진짜 중요한 문제는, 그리고 실제 그것을 처음 번역했던 사람들이 고민했던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Kapital’(또는 영어의 ‘capital’)을 ‘자본’으로 옮겼다는 거다.

지금 이 글을 읽는분께서는 ‘자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아마도 십중팔구는 가장 즉각적으로 ‘사업 밑천’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본이 딸려서 일을 시작을 못 하고 있어”라는 식의 표현에 매우 익숙하며,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그것이 첫째 의미로 종종 나와있다([링크] 참조). 그러나 원래 ‘자본’은 ‘(사람의) 자태’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것이 ‘사업 밑천’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서양적 의미에서의 ‘자본’(=capital)이 일본의 국어사전에 공공연히 등재된 것도 대정시대(1912-26년)나 되어서의 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서양적 의미에서의 ‘자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앞서 링크한 daum.net의 국어사전에도 나와있듯이 그것은 기본적으로 ‘생산을 위한 도구’를 뜻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다보면 우리는 “자본이란 단순한 생산용구들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와 같은 표현을 종종 마주친다. 이 표현은 거꾸로, 일반적으로 ‘capital’이란 ‘생산용구’를 의미했음을 시사한다. 마르크스 자신도 자신의 경제학적 저작들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원래 ‘capital’의 어원도 ‘가축의 머리(머릿수)’와 관련이 있다. 당연히 가축은 가장 전통적인 ‘생산용구’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던 두 표현이 ‘랑데부’한 까닭은 뭘까? 즉 대체로 ‘생산용구’를 뜻하는 ‘capital’이, 도대체 어떤 경과를 거쳐 ‘자태’, ‘사업 밑천’ 등의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던 ‘자본’으로 번역된 것일까? 관련 문헌을 조금 찾아보면 틀림없이 이에 대한 설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그런 작업을 실행해보진 않았다. 누군가 관심있는 분께서 찾아내신다면 알려주시면 좋겠다. 다만 여기서 다시 드러나는 것은, ‘제목’ 문제와 관련해서 왈가왈부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론’에 대해 트집잡기를 일삼으면서도 정작 더 중요한 ‘자본’에 대해서는 문제제기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소(可笑)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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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oughts on “What’s in a name? 자본론 vs 자본: ‘비판’의 의미에 대하여

  1. 덧글을 썼다 지웠어요-_- 아도르노를 읽었을 때 ‘경제’와 ‘미학’ 의 대립, ‘경제’=’도구적 이성’의 영역이라는 식의 설정이 있었는데, 당시 상황이 ‘워낙 몰려서’라는 식의 이해(는 허무하다는 것이 원래 덧글) 말고 어째서 그런 흐름이 만들어졌는지 살펴봐야겠지 싶어서요.

    1. 네… 제가 보기에도 ‘(흔히 말하는) 경제’ = ‘도구적 이성’ 식의 등식이 어떤 면에선 잘못된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다만… 이런 식의 등식에 지나치게 의존했을 때 잃게 되는 것이 많다는 건데요… 그런 의미에서, 요즘 몇 개의 글에서 제가 주장한 대로, ‘경제’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가 결국엔 핵심문제로 떠오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상의 문제가 단순히 ‘(경제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순이님께서 말씀하신 아도르노를 포함한 몇몇 지식인들이 ‘경제란 이런 거다’라고 아무리 그릇된 방식으로 규정해도, 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기를 촉구하는 ‘(진정한) 경제’는 여전히 거기 존재하면서 사람들의 삶과 세상의 운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2. 훌륭한 글입니다! 저에게는 ‘비판’과 ‘분석’ 사이의 (속류적) 대립에 대한 비판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비판’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관계는 사회적 관계 (즉, 착취관계)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이론적 작업이라고 이해합니다. 반대로 ‘분석’은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하여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포함하는) 경제적 관계를 재구성해내는 것이구요. 두 가지 모두 중요하고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서로를 전제하는 이 둘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급하신 ‘진정으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경제학’이란 [자본주의의 본질적 착취관계의 필연적 현상 형태로서의 경제적 관계에 대한 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비슷한 측면에서 ‘Das Kapital’은 결국 Kapital -- 즉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적 관계 -- 의 학(Wissenshaft der Kapital?)으로 간주할 수 있을텐데, 그런 측면에서 굳이 골라야 한다면 저는 ‘자본’보다는 ‘자본론’을 선호합니다.

    ‘자본’ vs ‘자본론’ 논쟁이 말씀하신대로 ‘경제적 관계’, ‘경제학’ 등의 의미가 좀더 명확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비판/분석을 현대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우회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사태가 지금과 같이 이미 전개된 이상, 누구든 (결국엔) ‘자본’과 ‘자본론’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나아가 선택을 해야할 것입니다. 위 글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했듯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낫다는 절대적인 근거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바로 그런 까닭에, 누구든 만약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 근거는 심지어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정도로 정당해야한다고 봅니다. 물론 가장 바람직하게는 그런 식의 논란따위엔 그저 신경을 끄는 게 좋겠지만요. ㅎㅎ

      heesang님께서 적절히 강조해주신 대로, ‘론’보다는 ‘자본’ 쪽에서 좀 더 많은 토론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시답지않은 ‘말뜻’에 대한 토론 말고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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