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로버트 오웬의 위대한 유토피아

이 투쟁[heesang – 표준노동일의 제정을 위한 투쟁]은 근대산업의 영역에서 개시되는 것이므로 우선 근대산업의 모국 영국에서 일어났다. 영국의 공장노동자들은, 그들의 이론가가 자본가들의 이론에 대한 최초의 도전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각주 157), 영국의 노동자계급뿐 아니라 근대적 노동자계급 일반의 투사였다.

(각주 157) 1810년 직후,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은 노동일 제한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주장했고, 10시간 노동일을 뉴 라나크(New Lanark)에 있는 자기 공장에 실제로 도입했다. 세상 사람들은 후자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라고 비웃었다. 그의 ‘아동의 교육과 생산적 노동의 결합’, 그리고 그가 창설한 노동자의 협동조합도 마찬가지로 비웃음을 샀다. 오늘날, 첫번째 유토피아는 공장법으로 되었고, 두번째 유토피아는 모든 공장법에서 공식적인 관용구로 나타나 있고, 세번째 유토피아는 이미 반동적 사기를 은폐하는 가면으로 쓰이고 있을 정도이다. – 자본론 1권 10장, 402-3

마르크스가 엥겔스와 함께 저술한 {공산주의당 선언}에는 ‘비판적, 공상주의적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라는 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계급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며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공상적 사회주의가 현존 사회의 모든 기초들을 공격하는 비판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자본론}, {잉여가치학설사}에서는 생시몽, 푸리에, 오웬에 대해 매우 간략히 언급할 뿐, 공상적 사회주의를 별도로 다루지는 않는다.

아마도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독일의 관념론이나 영국의 정치경제학과 같은 반열에 놓이게 된 것은 엥겔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와 {반-뒤링} (공상적 사회주의에 관한 부분은 여기를 참조) 등에서 이를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개인적으로 나는 이러한 표현이 별로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와 대비하여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적어도 오웬에 대해서는 상당한 호의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성공한 자본가였던 오웬에게 역설적이게도 “영국의 공장노동자들”의 “이론가”이며 “자본가들의 이론에 대한 최초의 도전자”라는 칭호를 선사한다. 또한 남들이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라고 비웃은 오웬의 프로그램이 적어도 뉴라나크에서는 이미 현실화되었다고 옹호한다. 그는 자본론에서 프루동의 이론, 특히 그의 노동화폐론이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라고 비판하면서도 이것이 오웬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오웬과 프루동의 차이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어째서 화폐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노동시간을 대표하지 못하는가, 어째서 한 장의 종이쪽지가 X노동시간을 대표하지 못하는가 라는 문제는 어째서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노동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 상품생산사회에서 ‘노동화폐’라는 천박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검토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 61 이하) … [heesang: 여기까지는 프루동 비판] 오웬은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노동[즉 상품생산과는 정반대인 생산형태]을 전제하고 있다 … 오웬은, 상품생산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상품생산의 필연적 조건들을 [화폐에 관한 속임수에 의해] 제거해 보려는 엉뚱한 생각 [역주: 프루동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121, 강조 추가)

오웬은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1771년(헤겔과 동시대 인물이다) 웨일즈에서 태어난 오웬은 10세가 되던 해 런던으로 상경하여 일종의 포목점 기숙 점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성실하고 명민했던 그는 그후 맨체스터에서 기계제작과 방적업에 종사하다가 겨우 19세의 나이에 500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는 방적공장의 일종의 COO로 영입된다. 그는 방적 공정을 치밀히 연구했고, 개별 노동자들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 주위에서는 ‘아이’가 매니저가 되었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는 금새 가장 성공한 방적업자가 된다. 오웬에 따르면, 그는 인간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일찍부터 개인적인 고뇌와 한계로부터 자유로웠다.

20대 중반의 오웬은 몇몇의 동업자(벤담도 그중 하나다)와 함께 뉴라나크의 방적공장(2,500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이 공장은 영국 최대의 규모였다)을 인수한다. 그는 이때부터 ‘기계제 대공업’(자본론 15장 참조)이 노동자 계급에 가져온 참혹한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오웬은 기계의 도입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그것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물적 토대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대공업이 노동계급에 대해 미친 영향에 대한 오웬의 강연을 인용한다:

“대자본가는 이제 부 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는 이를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를 통해서 권력을 얻었습니다. 그의 부와 권력의 그의 이성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리고 그는 무자비하게 억압하면서도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합니다 … 그의 시종들 – 이렇게 불리지만 실제로는 그의 노예들 … 은 가장 절망적인 타락으로까지 떨어졌습니다 … 현재의 체제 아래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변화에 대해서 개인들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 변화들은 규칙적인 자연 질서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진전되고 있는 위대하고 중요한 사회 혁명으로 가는데 필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마르크스의 인용,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번역본 2권, 391)

그는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했고,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체벌을 엄격히 금지했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경제위기 중에는 공장의 가동을 중지했지만 노동자들을 한명도 해고하지 않고 임금도 삭감 없이 지급했다. 동료 자본가들이 매우 불편해했던 이런 불필요한 자비심(?) – 그는 자본 대비 5-10%의 이윤을 제외한 모든 초과이윤을 교육과 노동환경 개선에 투입했다 – 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의 사업은 성공적으로 번창한다. 1700년대 말, 20대의 오웬은 영국의 최첨단산업의 가장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엥겔스에 따르면:

오웬은 이 모든 것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창조해 준 생존은, 그의 눈에는 인간의 존엄에 어울리는 것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노예들이었다” (반-뒤링,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5권, 290)

이후 오웬은 사회운동에 관심을 돌려 공장법의 제정과 교육개혁에 주력했다. 이것은 그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최고위 권력층에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웬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영국에서 영향력 1위였다 – 약간 왕자병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일종의 성지가 된 뉴라나크(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에는 매년 수천명의 고위인사들이 방문했고 오웬은 유럽 전역을 돌며 자신의 새로운 이념과 모델을 설파한다.

물론 그는 노동, 주거, 교육 환경의 개선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은 이상주의자였으며,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적 대립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급진적 아이디어와 프로그램을 뉴라나크에서 성공적으로 현실화했을 뿐더러 자신의 (위험한) 생각을 사회에 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수많은 적들이 그를 ‘검증’하고 비난하고 적대시했다. 여기에 대해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공산주의를 향한 진보는 오웬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단순한 박애주의자로서 행동하는 동안에는, 그는 부와 갈채와 명예와 명성만을 얻었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신분이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치가들과 군주들도 그의 말에 호의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갖고 등장하자, 국면은 일변하였다. 사회 개혁으로 가는 길을 다른 어떤 것보다 봉쇄하고 있다고 그에게 보여지는 세 개의 거대한 장애가 있었다: 사적 소유, 종교, 현재의 결혼 형태. 이것들을 공격한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공식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파문. 사회적 지위 전체의 상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것들에 개의치 않고 가차없이 공격해 나갔으며, 그리고 그가 예견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그는 공식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였고, 언론으로부터 묵살당하였고, 재산 전체를 바친 아메리카에서의 공산주의적 시도들이 실패하는 바람에 알거지가 되어 버렸으며, 그는 직접 노동자 계급에게로 방향을 돌려 그들 가운데서 삼십 년 동안을 더 활동하였다. (반-뒤링,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5권, 291-2)

나는 오웬의 공상적 사회주의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에 비해 열등한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오웬은 자본주의에 대한 학적 연구에는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았지만, 세상을 어느 정도는 분명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협동조합의 창시자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공한 자본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의 최첨단산업인 면공업에 정통했기 때문에 (오웬은 특히 원재료를 감별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수익성을 유지하면서도 노동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실제로 더 나은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2,5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자신의 기업을 통해 사람들 눈 앞에 보여주었다. 부와 명예를 갖고 있던 그는 당시의 지배층,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반자본주의 운동에 어떤 명확한 기준이나 방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의 편에 선 사람이 반드시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가 오웬에 대해서 얘기한 것처럼 성공한 자본가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이론가가 될 수도 있다.

아마도 오늘날 한국에서 오웬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안철수씨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자본주의의 극복보다는 개혁을 원하며, 뉴라나크와 같은 지상의 유토피아를 갖고 있지도 않다.

언젠가 우리 시대의 성공한 반자본주의 자본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오웬에 대한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뉴라나크 홈페이지오웬의 자서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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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99) 로버트 오웬의 위대한 유토피아

  1. 오늘 규항넷에서 김규항의 글을 읽고 든 생각. 아마도 로버트 오웬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은 안철수가 아니라 김규항인 것 같다. 1) 그는 성공한 자본가는 아닐지 몰라도 (주)고래가 그랬어의 운영자다. 고래가 그랬어는 ‘하나뿐인 어린이 교양지’이지만 형식상으로 김규항은 잡지사업자. 2) 그는 나름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를 만들어가고 있고, 이미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3) 김규항은 분명한 사회주의자인데 과학적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영성적 사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는 “사회 변화에 대해 말하자면, 사회 변화가 나를 결정하는 것도 내 변화가 사회변화를 결정하는 것도 아닌, 사회변화와 나의 변화와 하나인 것이다”라고 얘기했는데 100% 동감. 4) 오웬과는 달리 지배층에 대한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그의 사회적 영향력은 단단하다. ‘진보’ 칭호가 붙는 제법 이름을 알린 사람들 중 나는 그가 발군이라고 생각한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쉽게 보기 힘든 진짜라고 할까.

  2. 지난 2일 밤 몇몇 분이 모인 술자리 중에 이 글 이야기와 함께 문국현이 거론되었었는데(사실은 제가ㅎㅎ) 그 몇 시간 후에 김규항을 언급하는 덧글을 달아 주셨네요. 이번에도 어김 없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1. ‘거론’ 감사드립니다 ^^ 유한양행 설립자인 유일한, 전문경영인인 문국현 모두 훌륭한 분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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