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자본가의 지휘의 이중적 성격

많은 임금노동자의 협업에 따라 자본의 지휘(Kommando)는 노동과정 그 자체의 수행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생산의 현실적 조건으로 발전해 간다. 생산장소에서의 자본가의 지휘(Befel)는 이제 전쟁터에서의 장군의 지휘(Befel)와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것으로 된다 – 자본론 1권 13장, 447; MEW 23, 350; 강조 추가

1. 아주 단순한 협업에도 지휘는 필요하다. 백짓장이라도 맞들기 위해서는 누군가 하나 둘 셋을 외쳐야 한다.

2. 강조표시한 ‘노동과정’에 주목하자. 지휘가 ‘노동과정 그 자체의 수행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지휘가 사용가치 생산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3. 지휘는 노동과정 내부에서 수행된다. 그런 측면에서 지휘 기능은 노동과정 이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할 지식(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디자인, 생산기술, 제품의 기능)의 생산과는 무관하다.

지휘(Leitung; directing)와 감독(Überwachung; superintending)과 조절(Vermittlung; adjusting)의 기능은 자본의 지배 하에 있는 노동이 협업적으로 되자마자 자본의 하나의 기능으로 된다. 자본의 독자적인(spezifisch) 기능으로서, 지휘(Leitung)의 기능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spezifisch)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1. ‘조절’보다는 (매개와 중재의 의미를 갖고 있는) ‘조정’이 더 나은 번역이 아닐까 한다. adjusting이라는 번역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2. ‘자본의 독자적인 기능으로서’라는 번역은 옳지 않다. 원문이 뜻하는 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휘는 자본의 특수한 기능이 되며, 바로 자본의 기능이 됨으로써 지휘라는 기능이 특수한 성격들을 (원문에 복수로 표현되어 있다)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휘가 획득하는 특수한 성격들은 가치생산과 연관되어 있다. 지휘는 사용가치뿐만 아니라 가치생산의 필요조건이 된다. 아래를 보라.

자본가에 의한 통제(Leitung)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유래하는 하나의 특수기능일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의 착취대상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 448; MEW 23, 350

1. 번역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통제 대신 ‘지휘’를 사용해야 한다.

2. 사회적 노동과정 vs. 사회적 노동과정의 착취 (즉, 가치증식과정). 마르크스는 여기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명확하게 쓴다.

자본가의 지휘는 그 내용에서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지휘하는 생산과정 자체가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 449, MEW 23, 351; 강조 추가

7장에서 마르크스가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대비시키는 것을 감안하면, 노동과정 대신에 ‘사회적 노동과정’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어찌되었건, 가치이면서 상품가치인 상품의 이중성은 이제 협업에서의 지휘 기능의 이중성으로까지 나아갔다. 이중성의 종착점은 과연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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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thoughts on “(116) 자본가의 지휘의 이중적 성격

  1. 안녕하세요, heesang님. 잘 지내시나 궁금했어요. 요즘은 3장을 읽고 있는데 과학에는 비약이 없다는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저자를 계속 따라가는 것이지, 앞의 내용은 모르면서 어느 한 부분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그래서 그냥 넘어갈까 망설였는데, 그래도 제가 고민하는 문제와 곂치고, 또 이 부분을 같이 보고 싶어서 몇 자 적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아직 제가 앞부분을 읽는 중이기 때문에 잠정적인 생각일 뿐이에요. spezifisch에 관한 문제에요. 저는 지금은 이 단어를 besonder와 구분하기 위해 “독특한”으로 옮기고 있어요. spezifisch는 영어로 옮기면 unique, 아니면 specific인 것 같아요. 그런데 과학에서는 specific이 맞는 것 같아요. 비열이나 비중, 비엔트로피와 같은 단어들 앞에 모두 specific이 붙어요. 그 앞에 비가 무엇일까 찾아봤더니 전부 비율이 들어가요.

    제13장 452쪽 맨 마지막 줄

    Ihnen gegenüber erscheint die kapitalistische Kooperation nicht als eine besondre historische Form der Kooperation, sondern die Kooperation selbst als eine dem kapitalistischen Produktionsprozeß eigentümliche und ihn spezifisch unterscheidende historische Form.

    그것들에 비하여 자본주의적 협업은 협업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협업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고유한,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역사적으로 독특하게 구별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영어판이 없어서 그러는데 spezifisch를 unique로 옮겼는지, specific으로 옮겼는지 알아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 생각에 이 문장에서 핵심은 “구별하는”이에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1.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태다. => 자본주의는 다른 생산양식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일 뿐이다.

    2.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형태다. => 자본주의는 다른 역사적 형태들과 구별되는 독특함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말 “특수한”이 1번과 2번 두개 다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사람들은 같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뭔가 조치(measure)를 취해야함이.. -_-;;;

    1. 위에서 또 잘못했네요. 그것들에 비하여 자본주의적 협업은 협업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데.. 죄송.

    2. daydream님, 지난번에는 좀 아팠고, 이번에는 연말이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블로그에 또 뜸했습니다…

      spezifisch 혹은 specific에 언급하신 내용에 저도 동의합니다. 용례에 따라 때로는 ‘특수한’으로 때로는 ‘독특한’ 혹은 ‘고유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비봉판의 번역을 “자본의 *고유한* 기능으로서, 지휘의 기능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라는 식으로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펭귄판에서는 spezifisch를 모두 specific으로 옮겼고, MIA 판에서는 앞의 spezifisch는 아예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2. 햐~~ 섣달 그믐까지도 포스팅이라…

    여기에서의 이중성은 Zwieschlächtigkeit의 번역어인데,
    형용사 zwieschlächtig는 희상님 설명대로 상품의 이중성을 맑스가 설명할 때 나온 표현이기도 하지요(MEW 23: 56, 60, 95)

    그런데 zwieschlächtig는 doppelt(두 배의, 이중의, 중복의)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릅니다.
    zwieschlächtig는 어원상 Geschlecht와 관련이 있는데요…

    Geschlecht
    1. 종(種), 종류, 종속, 종족
    2. 성(性); 성이 같은 사람; [언어] (Genus) 성
    3. 혈족; 성(性), 가족, 씨족, 일가

    그러니까, zwieschlächtig는 “Geschlecht가 두 가지”란 뜻이 그 어원이므로,
    이종(異種)적인 것, 혼종(混種)적인 것이라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는 셈이지요.

    doppelt는 그저 이중적이라는 의미니까, 동종의 것일 수도 있고 이종의 것일 수도 있지만요.

    결국 zwieschlächtig는 이종(二種)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이면적, 양면적, 이중적인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한편, doppelseitig는 단지 겉으로 봐서 두 개의 면(Seit)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이 단어와 비교하면
    zwieschlächtig은 뭔가 내용면에서 종류가 서로 다른 게 두 개가 있다는 뉘앙스인 거지요.

    이런 뉘앙스의 차이를 음미해가면서 “자본”을 읽으면
    “자본”이 더 맛있답니다.

    암튼, zwieschlächtig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미타 세키스케(見田石介)의 “자본론의 방법(資本論の方法)”(1964) 73-79쪽을 참조하세요.

    불어본은 해당 부분의 zwieschlächtig와 관련해서 이를 쉽게 풀어서
    “내용에 있어서 이중의 측면(quant à son contenu, a une double face)”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Si donc la direction capitaliste, quant à son contenu, a une double face, parce que l’objet même qu’il s’agit de diriger, est d’un côté, procès de production coopératif, et d’autre côté, procès d’extraction de plus-value, — la forme de cette direction devient nécessairement despotique.
    (http://www.marxists.org/francais/marx/works/1867/Capital-I/kmcapI-13.htm)

    이 블로그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께,
    glückliches neues Jahr!

    1.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네요. 수차Wasserrad와 관계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차를 찾아보니 물의 위치에너지를 회전운동의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기계(원동기)라고 나오네요.

      schlächtig는 수차로 물을 친다(aufschlagen)에서 나온 말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수차의 차가 바퀴라는 뜻이니까 적절히 결합해서 “두 개의 바퀴로 움직이는”이라고 옮겼거든요.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1.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불어본에서 말한 내용의 이중적 측면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아래 내용을 읽어보니 대략 그런 것 같아요. -_-;;;

        mit zwieschlächtig bezeichnet man Dinge oder Vorgänge welche nicht eindeutig zugeordnet werden können oder Behauptungen, welche ein “ungutes” Gefühl hinterlassen, weil sie mehrfach gedeutet werden könen

        1. 이 분은 내가 알던 daydream님과는 다른 daydream님인 듯하군요.

          아니면,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daydream님께도 원래 Zwieschlächtigkeit이 있었다능?

          암튼, 새로 알게 된 daydream님에게도,
          oder, daydream님의 원래 더 좋은 측면에게도

          glückliches neues Jahr!

          새해엔 모두 자기 자신을 더 성찰해서
          자기의 좋은 면을 키워나갔으면 합니다.

          물론, 저 자신부터 그렇게 노력하려구요.
          저는 나잇값을 해햐 하겠지요.
          그러니까,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능…

        2. 자꾸 댓글 달아서 죄송해요. 이것 때문에 지금 일이 안되고 있어요. -_-;;; heesang님이 인용하신 부분은 이렇습니다.

          Wenn daher die kapitalistische Leitung dem Inhalt nach zwieschlächtig ist, wegen der Zwieschlächtigkeit des zu leitenden Produktionsprozesses selbst, welcher einerseits gesellschaftlicher Arbeitsprozeß zur Herstellung eines Produkts, andrerseits Verwertungsprozeß des Kapitals, so ist sie der Form nach despotisch.
          그리하여 자본가의 지휘가 실질적으로는 두 개의 전투라면, 그가 지휘하는 생산과정 자체가 하나는 생산물의 생산을 위한 사회적 노동과정이고, 하나는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인 두 개의 전투성이기 때문에, 자본가의 지휘는 형식적으로는 독재적이다.

          내용적으로라는 말은 실질적이라는 말이고, 형식적의 반대말입니다. 여기서 schlächtig는 Schlacht(전투)에서 나온 말인 것 같아요.

          Schlächtig, adj. et adv. von dem Zeitworte schlagen, welches nur in den Zusammensetzungen oberschlächtig und unterschlächtig ist, S. dieselben.
          위에서 치고, 아래서 치고 그런다는 말이죠. 제 생각엔 친다는 말인 것 같아요.

        3. 제가 zwieschlächtig라는 표현을 여러 웹사전에서 찾아보았는데,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곳이 없네요. 일종의 사어 혹은 고어인 것 같아요. 어원을 따져볼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에 이것을 ‘이중적인’ 정도로 이해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Zwieschlächtigkeit와 Doppelcharakter(이중성)의 차이를 좀 살펴보려고 했는데, sunanugi님께서 상세히 설명해 주셨네요.

      재미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1장 2절의 제목으로 Doppelcharakter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본문에서는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는 대신 Zwieschlächtigkeit를 사용합니다). 특히 sunanugi님의 설명을 염두에 둔다면, 마르크스의 ‘이중성’은doppel이 아니라 zwieschlächtig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텐데,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doppel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1. heesang님, 이중성보다는 양면성이 어떨까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doppel을 찾으면 인위적인 것들이 나타나요. 이를테면 쌍두마차, 2인용 침대, 2층 버스.. 두개를 합친 것, 두배. 그런데 zwie를 찾으면 나오는게 양파에요. zwie는 한 사물이 고유하게 두 개의 성격을 갖고 있을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생각되요.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맑스가 그 단어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1. schlächtig는 schlagen에서 나온 말이고 sunanugi님이 언급하신 Geschlect(성)은 원래 인간은 하난데 반으로 쪼개는 것(Schlag)이죠. doppel이 더한 것이라면 schlächtig는 나누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말에서 양분한다는 의미에 해당하는 명사나 형용사가 없어요.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고 맑스는 이 단어들을 어떻게 (같게, 혹은 다르게) 사용했는지 보고싶네요. ^^

        2. 맑스가 다른 곳에서 zwieschlächtig를 사용한 것을 찾아봤습니다. 철학의 빈곤(원래는 비참함인데)의 제2장 마지막 일곱번째 고찰 중에서. 선집 1권 258쪽,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127쪽입니다.

          Von Tag zu Tag wird es somit klarer, daß die Produktionsverhältnisse, in denen sich die Bourgeoisie bewegt, nicht einen einheitlichen, einfachen Charakter haben, sondern einen zwieschlächtigen; daß in denselben Verhältnissen, in denen der Reichtum produziert wird, auch das Elend produziert wird; daß in denselben Verhältnissen, in denen die Entwicklung der Produktivkräfte vor sich geht, sich eine Repressionskraft entwickelt; daß diese Verhältnisse den bürgerlichen Reichtum, d.h. den Reichtum der Bourgeoisklasse, nur erzeugen unter fortgesetzter Vernichtung des Reichtums einzelner Glieder dieser Klasse und unter Schaffung eines stets wachsenden Proletariats.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는 단일한(통일적인) 하나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고 두 번역본 모두 옮겼는데 제 생각에는 두개로 분열된 성격이라는 의미 같아요. 이중이라는 말은 Doppelhelix(이중나선)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zwiefach, 두개가 곂친다는 말이에요. 사회적 노동과정은 부를 생산하지만, 가치증식과정은 자본가에게만 부를 생산하고 노동자에게는 das Elend(비참함)을 생산하는 것이죠. 양면성이라고 생각해요.

        3. 자본의 불어본에서 double face는 겉과 속이 다름(duplicité)를 의미해요. 원래 맑스가 쓴 Misère de la philosophie에는 duplicité로 써있어요. 불어는 맑스의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 단순한 표현을 사용했을거라고 생각해요.

          De jour en jour, il devient donc plus clair que les rapports de production dans lesquels se meut la bourgeoisie n’ont pas un caractère un, un caractère simple, mais un caractère de duplicité;

          원문의 caractère antagoniste는 독어 번역본에서는gegensätzliche Charakter로 옮겼어요. 여전히 제 생각에 zwieschlächtig는 전투와 관련된 말 같아요.

          Es entwickelt sich ein Kampf zwischen der Proletarierklasse und der Bourgeoisklasse, ein Kampf, der, bevor er auf beiden Seiten empfunden, bemerkt, gewürdigt, begriffen, eingestanden und endlich laut proklamiert wird, sich vorläufig nur in teilweisen und vorübergehenden Konflikten, in Zerstörungswerken äußert.

          Kampf는 계급투쟁을 가리키지만, Schlacht는 자본가들끼리의 전쟁을 말하는 것 같아요. 이건 중세의 제왕들의 싸움이에요. 최근에는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에서나 쓰이고 있어요.

        4. 저는 양면성보다는 이중성이 나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말 이중성에는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의미가 있어서, 단순히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 이외에도, 이 두 가지 측면의 대조적 요소를 더 잘 드러내는 것 같아서요.

  3. -- ‘조절’이나 ‘조정’보다는 ‘조율’이 어떨까요?

    -- 끝에서 두번째 인용문에서, ‘그와 동시에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며’에 나오는 ‘착취’가 적절한 표현인가요?

    -- 새해 복 많이 받읍시다!

    1. 1. 조율, 괜찮은 거 같습니다. 세 단어를 한꺼번에 쓰는 것도 방법일지도 :)

      2. Ausbeutung의 번역어인데 영어판에서 거의 일괄적으로 exploitation으로 번역해 놓았네요. 마르크스는 Ausbeutung과 Exploitation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구요… 좀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는 착취라는 표현이 분명히 어색해 보이는데요.

      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벌써 2013년이 오고 있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1. Ausbeute는 화학에서 이론상 (손실없이) 최대치를 산출하는 것(yield)를 의미해요. 이것은 비율로 나타나기 때문에 착취율과 같은 것이죠.

        1. 그나저나 통계를 보니 지난 한 해 동안 덧글을 가장 많이 남기신 게 daydream님이시더군요. ㅎㅎ 고맙습니다. :)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

      2. 어젯밤엔 원문이 없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해서 간단히 남겼어요. 말씀하신 대로 문제의 ‘착취’는 Ausbeutung의 번역어군요.

        몇몇 곳에서 마르크스는 Ausbeutung과 Exploitation을 거의 같은 의미로 쓰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용례에서는 전자를 좀 더 폭넓은 의미로 쓰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기계의 Ausbeutung”이나 위에 나오는 것처럼 “노동과정의 Ausbeutung”과 같이요. 반면에 예를 들어
        “착취도”와 같이 좀 더 ‘규정적’인 대목에서는 어김없이 Exploitation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구분이 엄밀한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일정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요 바로 위에서 daydream님이 그러시듯) 둘을 완전히 같은 의미로 쓰느냐, 아니면 마르크스의 다소 불완전한 구별을 좀 더 밀어붙여서 일관되게 둘을 구별할 것이냐 하는 문제죠. 저는 전자의 방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후자와 같이 하는 것이 좀 더 이론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관심 구절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어느 정도는 Ausbeutung의 해석과는 별개로) 비봉판과 길판 사이의 차이가 눈에 띕니다. 비봉의 번역은 위에 heesang님이 옮겨놓은 대로이고.. 길판에서는 같은 구절이 ‘사회적 노동과정이 지니는 착취의 기능’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물론 후자가 오역입니다.

        둘째, ‘착취’라는 번역어 대신 다른 표현, 이를테면 ‘뽑아먹는다’와 같은 좀 더 일상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여러모로 이점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1. 길판의 “사회적 노동과정이 지니는 착취의 기능”이 오역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비봉판의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 맞는 번역이라는 말씀이신지요? 제가 이해를 제대로 못해서,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해당 부분을 각각 옮겨 보겠습니다.

          “자본가에 의한 통제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성질로부터 유래하는 하나의 특수기능일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의 착취 대상[즉 노동자]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ㅂ판, 448)

          “자본가의 지휘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본성에서 생겨난 자본가만의 독특한 기능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 노동과정이 지니는 착취의 기능이기도 하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 착취대상 사이의 불가치한 적대관계에 기초한 것이다.” (ㄱ판, 460; M350)

          “자본가의 지휘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본성에서 발생하여, 그 과정에 따르게 마련인 하나의 특수한 기능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 노동과정의 착취의 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 착취원료[노동자]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 (일판)

          영어판에서는 “a function of the exploitation of a social labour-process”라고 나오는군요.

        2. EM님 안녕 ^0^

          어제는 저도 기운이 빠져서 간단히 남겼어요. 지금 3장하고 있는데 13장을 제대로 볼 겨를이 없어요. 다만 다른 분들이 지적하신 문제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Ausbeutung은 기본적으로 Beute에서 나온 말입니다. 전쟁에서 노획하다(beute machen)을 의미하는데 Ausbeutung은 그 뜻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한 번 시험삼아 해봤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뽑아낸다는 뜻입니다. 화학에서 Ausbeute(yield)는 이론상 가능한 최대치와 실제로 뽑아낸 것 사이의 비율이니까요.

          http://de.wikipedia.org/wiki/Ausbeute_(Chemie)

          Zunächst ist das treibende Motiv und der bestimmende Zweck des kapitalistischen Produktionsprozesses möglichst große Selbstverwertung des Kapitals (20), d.h. möglichst große Produktion von Mehrwert, also möglichst große Ausbeutung der Arbeitskraft durch den Kapitalisten.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추진하는 동기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규정하는 목적은 가능한 최대의 자본의 자기증식, 다시 말해 가능한 최대의 잉여가치의 생산, 그러므로 자본가가 가능한 최대의 노동력을 노획(beute)하는 것이다.

          [중략]

          Die Leitung des Kapitalisten ist nicht nur eine aus der Natur des gesellschaftlichen Arbeitsprozesses entspringende und ihm angehörige besondre Funktion, sie ist zugleich Funktion der Ausbeutung eines gesellschaftlichen Arbeitsprozesses und daher bedingt durch den unvermeidlichen Antagonismus zwischen dem Ausbeuter und dem Rohmaterial seiner Ausbeutung.
          자본가의 지휘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본성으로부터 나오고, 사회적 노동과정에 속하는 특수한 역할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사회적 노동과정의 적대적 성격에서 나오는 역할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회적 노동과정을 선점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따라서 자본가의 지휘는 사적 소유자와 그가 소유한 것(사회적 노동과정)의 원료(노동자)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3. 1. 문제가 되는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군요.

          sie ist zugleich Funktion der Ausbeutung eines gesellschaftlichen
          Arbeitsprozesses(MEW 23:350)

          해당 문장의 문맥이 “적대”에 관한 것이므로
          일단 “착취”란 번역은 큰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2. 원문은 Ausbeutung이 명사인데,
          문법적으로 가능한 해석들은,
          그 다음 독일어 2격의 어구(“사회적 노동과정”)를

          2-1. Ausbeutung의 의미상의 목적어 내지는 대상으로 보느냐
          2-2. 반대로, Ausbeutung을 “사회적 노동과정”의 의미상의 목적어 내지 대상(일종의 부분 집합 같은…)으로 보느냐
          2-3. 아니면, Ausbeutung 및 “사회적 노동과정”을 서로 의미상의 동격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데

          이런 경우에는 역자가 어느 하나로 확정하지 말고
          가급적 원문의 구문을 살리면서 직역하는 게 옳바를 듯해요.

          즉,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 노동과정의 착취의 기능이다”라고 번역해두고
          해석은 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하게끔 하는 거죠.

          3. 문법적인 것을 떠나서 말하자면,
          여기에는 지휘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있는데요…

          익히 아시다시피, 소위 관리/지휘/경영 노동의 이중성 문제는
          “자본” 3권 23장에서 다시 다루어지고 있지요.(MEW 25:397 이하)

          3.1. 일단, 그 중의 한 측면에 대해서는 명백히 “생산적 노동”이라고 하고 있어요. 즉, “모든 결합된 생산양식”에서 공통적으로 수행되는 노동의 경우에요.

          Es ist dies eine produktive Arbeit, die verrichtet werden muß in jeder kombinierten Produktionsweise.(MEW 25:397)

          3.2. 더 나아가, 적대적 성격의 다른 측면조차도 “생산적 기능들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불가분한 것으로 [아말감처럼] 결합되어 있다”(ist auch im kapitalistischen System unmittelbar und unzertrennbar verquickt mit den produktiven Funktionen,[…])고 하고 있지요.(MEW 25: 399-400)

          3.3. 지휘 노동의 이중성 문제에는
          누구나 처음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히 뜯어 생각해 보면
          매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3.4. 흔히들, “생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원리의 핵심이라고 얘기하지만,
          추상적으로 안이하게 처리할 수는 없는 문제가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3.4.1. “민주”라는 것은 정치적 의사 결정의 원리인 것이고
          3.4.2. 생산(및 경영)과 관련된 의사 결정은 이와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3.5. “지휘 노동의 이중성”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도 상당 기간 동안 존속하는 문제라고 해야겠지요.

          3.6. 포스트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내포적 축적이라든가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는 데에도
          지휘 노동의 이중성이라는 테마를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3.7. 이것은 결국, 특정 상황에서의 Ausbeutung를 번역할 때
          걍 관례대로 “착취”라고 하고 마느냐
          아니면 넓은 의미에서 “이용”이라고 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앞에 소개한 야마구치의 논문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3.8.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혹은 상당한 과도기 동안에 타인의 노동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되는 거죠.

          3.9. 현실적으로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젊은 세대의 비정규직 노동을 Ausbeutung하고 있는 상황을 보는 관점과도 연결이 되는 거구요.
          http://socialandmaterial.net/?p=4471

        4. sunanugi님,
          먼저, 야마구치 논문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논문을 읽고 와서 댓글 다신 걸 봤는데도
          아 그런 거구나 싶게 정리가 되지는 않네요.
          제가 이해를 못해서…ㅠ

          일단은 ㅂ판의 번역을 기준으로 하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또는 개발/이용)하는 기능”이라고
          이해하면 될는지요.

          논문을 보니까 노동력의 ‘이용’과 ‘착취’에 대해 논하면서
          ‘착취’를 이용의 특수한 한 형태,
          “우월적 위치에 기초해 어떤 것을 개발/이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더군요.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정리를 좀 하면서 읽을걸…
          그냥 죽 읽었더니 잘 기억이 안 납니다…;;

        5. G.D.님께

          1. 저로서는 지휘 노동의 이중성 문제는 충분히 & 전면적으로 정리해두고 있지는 못한 상태예요…그 문제의 복합성만을 대충 깨닫고 있는 정도구요.

          2. 사실, 굉장히 심각한 이론적-실천적 함축을 지니고 있는 문제라서요…쉽게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 특히, 소위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 요인 중의 하나가 “내포적 축적”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요.

          -- 현재까지 제시된 유력한 견해들 중의 하나는,
          암튼 그 체제(특히 스탈린주의 체제)가 대규모 물량 투입에 의한 “외연적 축적”에는 성공했지만
          “내포적 축적”에는 실패했다는 거죠.

          3. 암튼, 갠적으로,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해당 문장의 번역은 강신준 선생 것이 더 나은 듯해요.
          (제가 말한 대로, 원문의 구문을 그대로 살리는 번역이 젤 낫지만요.)

          4. “노동과정을 착취하는”이라는 김수행의 번역은 아예 말 자체가 통하지 않으니까요.
          -- 개념상, “과정”을 착취할 수는 없는 거죠.
          -- 물론, “과정을 이용한다”는 번역은 가능하겠지만요.

          5. 글쿠, 야마구치 논문은 Ausbeutung이라는 말을 일괄적으로 “착취”라고 번역하거나 일방적으로 “착취”란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의 문제점을 개념사적으로 다룬 것이니까…그저 참고하시란 의미였어요.

        6. 저는 길판의 ‘사회적 노동과정이 지니는 착취의 기능’이라는 표현은 오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표현에 따르면 착취의 주체가 ‘사회적 노동과정’일 테니까요. Ausbeutung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의 문제와는 별도로 일단 이 표현의 의미는 좀 풀어서 표현하면 ‘자본가가 사회적 노동과정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필요한 기능’ 정도가 될 것 같아요. Sunanugi님 말씀대로 ‘사회적 노동과정의 착취’라는 비봉판의 표현도 문제는 있지만 그래도 의미는 어느 정도는 전달되는 것 같아요.

        7. Ausbeutung의 의미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http://de.wikipedia.org/wiki/Ausbeutung

          제가 이걸 다 읽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비봉판을 수정할 때 노획이나 선점, 사적 소유와 같은 말들로 바꾼 것은 이 단어가 소유와 관련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usbeutung은 특히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exploitation도 원래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맑스가 이 단어들을 개념화한 것입니다. 3장 읽으면서 이런 말하기 멋적은데, 어쨌든 제 생각으로는 맑스는 설명을 전개해나가면서 단어들이 상승해요. 처음에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어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가 점점 더 구체화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제 생각엔 Ausbeutung도 그렇습니다. 맑스의 문장은 앞문장과 뒷문장의 연결이 굉장히 타이트합니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장 다음에 나오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Ebenso wächst mit dem Umfang der Produktionsmittel, die dem Lohnarbeiter als fremdes Eigentum gegenüberstehn, die Notwendigkeit der Kontrolle über deren sachgemäße Verwendung.(21)
          또한 임금노동자에 대해 타인의 소유물로 대립하는 생산수단의 규모가 증대함에 따라 그것이 적절하게 사용되도록 효과적으로 통제할 필요도 증대한다.

          Ausbeutung은 맑스가 노예노동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강제노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노예노동은 직접적인 강제노동이고, 임금노동은 매개된 강제노동이죠. 그런데 왜 강제노동을 하느냐. 사적 소유때문이에요.

          최근에는 이 단어가 주로 혹사노동이나 아동노동처럼 자본주의에서도 비윤리적인 노동에 사용되고 있어요.

        8. Ausbeutung을 정리해 놓은 것이 있어서 일단 세 문장만 옮겨봤습니다.

          „Ausbeutung ist entweder unmittelbare Zwangsarbeit oder vermittelte Zwangsarbeit.“ K.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232.
          Ausbeutung은 직접적 강제노동이거나 매개된 강제노동이다.

          „Ausbeutung heißt, dass die produktiven Arbeiter fremdes Eigentum schaffen und dieses Eigentum über fremde Arbeit kommandiert.“ K.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48.
          Ausbeutung은 생산적 노동자들이 타인의 소유를 창조하고 이 소유가 타인의 노동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Alle Ausbeutungsverhältnisse sind gekennzeichnet durch den Ausschluss des Arbeiters vom Produkt.“ K. Marx, Kapital I, MEW 23, 555
          모든 Ausbeutung의 관계들을 특징짓는 것은 노동자들이 생산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Wenn das Produkt der Arbeit nicht dem Arbeiter gehört, … so ist dies nur dadurch möglich, dass es einem anderen Menschen außer dem Arbeiter gehört. Wenn seine Tätigkeit ihm Qual ist, so muss sie einem anderen Genuss … Lebensfreude … sein.“ K.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MEW 40, 519

          „Das Kapital hat die Mehrarbeit nicht erfunden. Überall, wo ein Teil der Gesellschaft das Monopol der Produktionsmittel besitzt, muss der Arbeiter, frei oder unfrei, der zu seiner Selbsterhaltung notwendigen Arbeitszeit überschüssige Arbeitszeit zusetzen, um die Lebensmittel für den Eigner der Produktionsmittel zu produzieren …“ K. Marx, Kapital I, MEW 23, 249.

          „Nur die Form, worin diese Mehrarbeit dem unmittelbaren Produzenten, dem Arbeiter, abgepresst wird, unterscheidet die ökonomischen Gesellschaftsformationen, z. B. die Gesellschaft der Sklaverei von der der Lohnarbeit.“ K. Marx, Kapital I, MEW 23, 231.

          „Braucht der Arbeiter alle seine Zeit, um die zur Erhaltung seiner selbst und seiner Rasse nötigen Lebensmittel zu produzieren, so bleibt ihm keine Zeit, um unentgeltlich für dritte Personen zu arbeiten. Ohne einen gewissen Produktivitätsgrad der Arbeit existiert keine solche frei verfügbare Zeit für den Arbeiter, ohne solche überschüssige Zeit keine Mehrarbeit und daher keine Kapitalisten, aber auch keine Sklavenhalter, keine Feudalbarone, in einem Wort
          keine Großbesitzerklasse.“ K. Marx, Kapital I, MEW 23, 534.

          „Im Kapital ist die Zusammenarbeit der Arbeiter nicht erzwungen durch direkte physische Gewalt, durch Zwangs-, Fron-, Sklavenarbeit; sie ist erzwungen dadurch, dass die Bedingungen der Produktion fremdes Eigentum sind…“ K. Marx, Grundrisse der politischen Ökonomie, 484

          „Die Herrschaft des Kapitals über die Arbeit ist einerseits … historischer Fortschritt und notwendiges Entwicklungsmoment im ökonomischen Bildungsprozess der Gesellschaft …, andererseits ist Lohnarbeit … ein Mittel zivilisierter und raffinierter Ausbeutung.“ K. Marx, Kapital I, MEW 23, 386.

        9. 나머지도 한 번 해봤습니다. 번역본과 대조하며 확인해보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Wenn das Produkt der Arbeit nicht dem Arbeiter gehört, … so ist dies nur dadurch möglich, dass es einem anderen Menschen außer dem Arbeiter gehört. Wenn seine Tätigkeit ihm Qual ist, so muss sie einem anderen Genuss … Lebensfreude … sein.“ K.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MEW 40, 519
          노동의 산물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 그것은 단지 노동자 외부에 있는 다른 인간에게 속할 때만 가능하다. 그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것은 타인에게는 향유 … 삶의 기쁨 … 일 것이다.

          „Das Kapital hat die Mehrarbeit nicht erfunden. Überall, wo ein Teil der Gesellschaft das Monopol der Produktionsmittel besitzt, muss der Arbeiter, frei oder unfrei, der zu seiner Selbsterhaltung notwendigen Arbeitszeit überschüssige Arbeitszeit zusetzen, um die Lebensmittel für den Eigner der Produktionsmittel zu produzieren …“ K. Marx, Kapital I, MEW 23, 249.
          자본은 잉여노동을 발명하지 않았다. 사회의 일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자유롭건 자유롭지 않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시간을 생산수단의 소유자를 위한 생활수단을 생산하기 위해 빼앗긴다.

          „Nur die Form, worin diese Mehrarbeit dem unmittelbaren Produzenten, dem Arbeiter, abgepresst wird, unterscheidet die ökonomischen Gesellschaftsformationen, z. B. die Gesellschaft der Sklaverei von der der Lohnarbeit.“ K. Marx, Kapital I, MEW 23, 231.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에게 잉여노동을 쥐어짜내는 형식만이 경제적 사회구성체들을 구분한다. 이를테면 노예제 사회를 임금 노동과 구분한다.

          „Braucht der Arbeiter alle seine Zeit, um die zur Erhaltung seiner selbst und seiner Rasse nötigen Lebensmittel zu produzieren, so bleibt ihm keine Zeit, um unentgeltlich für dritte Personen zu arbeiten. Ohne einen gewissen Produktivitätsgrad der Arbeit existiert keine solche frei verfügbare Zeit für den Arbeiter, ohne solche überschüssige Zeit keine Mehrarbeit und daher keine Kapitalisten, aber auch keine Sklavenhalter, keine Feudalbarone, in einem Wort keine Großbesitzerklasse.“ K. Marx, Kapital I, MEW 23, 534.
          노동자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을 생산하는데 사용한다면, 그에게 제3자를 위해 무보수로 일할 시간은 남지 않는다. 노동의 생산력이 일정하게 발전한 단계가 아니면, 노동자에게 자신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노동자에게 시간이 남지 않는다면, 잉여노동과 따라서 자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노예소유주, 봉신(봉토를 받은 자), 한마디로 대토지 소유계급도 없었을 것이다.

          „Im Kapital ist die Zusammenarbeit der Arbeiter nicht erzwungen durch direkte physische Gewalt, durch Zwangs-, Fron-, Sklavenarbeit; sie ist erzwungen dadurch, dass die Bedingungen der Produktion fremdes Eigentum sind…“ K. Marx, Grundrisse der politischen Ökonomie, 484
          자본에 속한 노동자들의 공동노동은 강제노동, 부역, 노예노동과 같은 직접적인 육체적 폭력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소유의 생산이라는 조건에 의해 강요된다.

          „Die Herrschaft des Kapitals über die Arbeit ist einerseits … historischer Fortschritt und notwendiges Entwicklungsmoment im ökonomischen Bildungsprozess der Gesellschaft …, andererseits ist Lohnarbeit … ein Mittel zivilisierter und raffinierter Ausbeutung.“ K. Marx, Kapital I, MEW 23, 386.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력은 한편으로는 … 역사의 진보이며 사회의 경제적 형성과정에서 필연적인 발전단계다 … 다른 한편으로 임금노동은 문명화된 그리고 세련된 Ausbeutung의 수단이다.

  4. sunanugi님의 다음 코멘트에 대한 제 의견입니다.

    “3.5. “지휘 노동의 이중성”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도 상당 기간 동안 존속하는 문제라고 해야겠지요.

    3.6. 포스트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내포적 축적이라든가 협동조합적 소유라는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는 데에도
    지휘 노동의 이중성이라는 테마를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

    1. 일단 지휘 노동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휘는 기본적으로 *자본*에 속하는 *기능*이니까요. 물론 자본주의 경제는 자본의 기능인 사회적 노동과정의 지휘를 마치 노동인것처럼 나타나게 하지만요.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로 글을 하나 쓸 생각입니다.

    2. 저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휘 노동의 이중성은 기본적으로 상품의 이중성 (상품은 가치이면서 사용가치. 하지만 가치와 사용가치는 서로를 배제), 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성(노동은 추상노동이면서 구체노동), 이 노동이 수행되는 노동과정의 이중성 (노동과정은 노동과정 그 자체이면서 가치증식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3. 이중성 중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사태를 생산양식과 무관하게 고찰한 결과이고, 후자는 사태를 자본주의 경제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생산양식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지휘 기능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생산과정의 지휘는 생산양식과 무관하게 협업에서는 언제나 필요하지요. 다만,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협업 자체가 가치생산을 위한 것이고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에 기초하기 때문에, 지휘가 폭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감독, 감시, 통제라는 자본주의 경제에 고유한 특색으로 나타납니다.

    4. 따라서 생산양식과 무관하게 협업에 반드시 필요한 지휘의 기능은 포스트 자본주의에서는 꼭 폭압적인 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지휘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새로운 특색과 성격을 획득하겠지만요. 다시 말해서 ‘이중성’이라는 것 자체가 저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는 이중성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하고 기대합니다.

  5. ㅎㅎㅎ…분명 누군가로부터 반론이 제기될 거라고 짐작했어요.
    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냅니다.

    1. 우선, 몇 가지 전제를 하고 논의를 해나가야 할 것 같아요.

    1.1. 자본주의 이후에도 상당 기간은 과도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타강령 비판”에서의 맑스 표현에 의하면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곧바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에(서)”
    (in der ersten Phase der kommunistischen Gesellschaft, wie sie eben aus der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nach langen Geburtswehen hervorgegangen ist: MEW 19:21)

    논의를 한정하는 것으로 하지요.

    1.2. 그 다음으로, 감독 기능과 관련된 압제(Despotismus)를 일단 논외로 하고 얘기를 해보지요.
    (이 압제라는 테마는 지휘 노동뿐만이 아니라 국가 기능의 문제,
    혹은 다른 측면에서는 소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문제 하고도 관련이 되는 것이니까요.)

    1.3 지휘 노동이란 말이 적당치 않다는 지적이 있지만…
    현재로선 별 대안이 없으므로…쩝, 일단 계속 쓰기로 하겠습니다.

    2. 이 단계에서 소위 지휘 노동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물어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는 바의 기능은 “생산과 관련된 의사 결정”의 측면입니다)

    2.1. 지휘 노동의 두번째 측면(자본주의적 생산에 고유한 것과 같은, 혹은 유사한)에 해당하는 기능이 필요한가 혹은 존재할까?

    2.2.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로 적대적 or 대립적일까?

    2.3.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로 생산적일까?
    (더 효율적으로, 경제 잉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 이 “경제 잉여”는 맑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 대목에 해당하는 거죠.
    “생산의 확장을 위한 부분(Teil für Ausdehnung der Produktion: MEW 19:19)”

    2.4. 만약 그렇다면, 그것(특히, 의사 결정)은 도대체 누가 & 어떤 과정을 거쳐서 수행하게 되는 것일까?
    (부르주아의 주식회사 의사 결정구조와는 전혀 다른 그런 것을 과연 우리는 가질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특히, 이 점에서, 소위 협동조합적 소유가 과연 충분한 대안인가? 등등)

    3. 희상님은 “이중성 자체가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라고 하셨는데…
    즉, 그 두번째 측면은 필요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취지일 거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물론 저도 “기대”야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생겨날 문제, 혹은 이미 생겨났던 문제를
    제대로 냉엄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이거 딴 얘긴데요,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지향하는 바의 포스트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가
    과거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와 아무런 or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1. 저는 부끄럽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에 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해보지 못해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있는 의견을 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일반론적인 측면에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기본적으로 지휘 기능의 적대성은 사회의 계급성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계급적대가 소멸되지 않는 한 지휘 기능의 적대성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휘 기능과 의사결정의 기능은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지휘 기능이 적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사회적 노동과정 내부에서이고, 의사결정은 사회적 노동과정이 시작되기 이전에 사전적으로 완료되어 있어야 할테니까요. 의사결정과 적대성은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아서요.

      1. 1. 잘 아시다시피,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지휘(노동)의 이중성은 협업을 논의하는 중에 나온 겁니다.

        2. 맑스의 문제의식은 협업/ 공동노동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의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화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 설명 과정에서 바로 이 이중성 문제를 거론한 거죠.

        (프루동은 어리석게도, 바로 이 문제,
        즉, 소위 “결합 생산력”의 성과를 자본가가 훔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댓가를 내놔라 라고 주장한 바 있지요.)

        (“자본” 3권 23장은 소위 기업가 수익에 대한 부르주아 관념/의식과의
        이론적 대결 과정에서 이중성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이구요.)

        3. 지휘 기능의 적대는 분명히 계급 적대와 관련이 있고
        더 파고 들면, 당연히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소유/영유[취득] 사이의 적대적 모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겠지요.

        4. 그런데,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소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착각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에서의 지휘 내지는 의사 결정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소유와 관련된 계급적 적대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다고 해서
        지휘(노동)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풀리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제 생각…

        5. 어떤 의미에서 “전제”란 사소한 문제이지요.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일정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생산 계획이 잡혔다면

        그것을 따라야 하는 거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집단에게는
        일정하게 강제가 주어질 수 있겠지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등등의 방법으로요.)

        6. 문제는 거시적이든(사회 전체) 미시적이든(개별 생산 단위)에서의
        생산 문제와 관련된 의사 결정을 누가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을 놓고 본다면,
        어떤 점에서는 미시적인 게 더 어려울 수도 있어요.)

        7. 희상님은 사회적 노동과정 이전에 “계획” or “의사결정”이 주어져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제 얘기는, 과연, 그게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주어지느냐 하는 거죠.

        8. “기능하는 자본가”의 가장 핵심적 기능은 바로 이 계획/ 의사결정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머지 노동과정에서 실제적 감시, 관리 등은 소위 산업 (하)사관들이 하고 있지요.
        (경영 관리, 재무 관리, 노무 관리, 생산 관리 등등)

        문제는 군대로 치면,
        장군(그리스어 장군이란 말에서 전략이란 말이 나왔다고 하지요)
        혹은 사령관의 역할은
        자본주의 이후 상당 기간의 과도기 동안 누가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9. 또, 저는 이 기능이 불가피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이 기능에 깃든 일정한 적대성/ 전제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라는 게 궁금한 겁니다.

        10. 저는 이 문제에 관해 현재 제시되어 있는 이론들이나 주장들이
        그다지 만족스럽다고 보지 않고 있거든요.

        1. 1. 일단 #7에서 “계획”이나 “의사결정”은 사실 꼭 필요한 기능이지만, 마르크스가 13장에서 다루는 지휘, 감독, 조정/조율/조절의 기능과는 약간 다른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 같아요.

          2. 과도기가 꼭 필요한 것인가요? 만약 과도기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너무 단순한 생각이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에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지휘의 적대성의 해소의 문제는 제가 118에 쓴 아바도의 지휘와 같은 방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구체적인 생각이 없으니 일종의 비유(?)로밖에 말씀드릴수밖에 없네요 :)

        2. 계획 및 의사결정과 관련된 지휘 기능은
          나중에 3권 23장에서 다시 깊이 따져보기로 해요.

          과도기 문제에 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고타강령비판”(1875)에서 맑스는
          넓은 의미의 공산주의를 두 단계로 나누죠.

          1.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eine kommunistische Gesellschaft wie sie eben aus der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hervorgeht”(MEW 19:20)

          2. 다른 하나는, “그 자체의 토대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eine kommunistische Gesellschaft wie sie sich auf ihrer eignen Grundlage entwickelt wie sie eben aus”(MEW 19:20) 내지는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 In einer höheren Phase der kommunistischen Gesellschaft”(MEW 19:21)

          후자 단계의 슬로건이 그 유명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Jeder nach seinen Fähigkeiten, jedem nach seinen Bedürfnissen!”(MEW 19:21)이라는 거죠.

          3. 전자 단계에서 후자 단계로의 이행과 연관하여 과도기[이행] 논쟁이 있었구요.
          http://swl.jinbo.net/bbs/skin/ggambo7002_board/print.php?id=free&no=3929

          3.1 북한에서의 과도기 논쟁은
          http://books.google.co.kr/books?id=AmYtaHyGSikC&pg=PA21&lpg=PA21&dq=%EA%B3%BC%EB%8F%84%EA%B8%B0+%EB%85%BC%EC%9F%81&source=bl&ots=y-RY4UrDAR&sig=eqCX4L4qMJgm966qcYgsiIHAylw&hl=ko&sa=X&ei=lm_kUPmnN6WViAKAqIDABg&ved=0CDIQ6AEwAA#v=onepage&q=%EA%B3%BC%EB%8F%84%EA%B8%B0%20%EB%85%BC%EC%9F%81&f=false

        3. 방금 sunanugi님 덧글 하나 살렸습니다. 스팸으로 분류되었던 것은, 링크를 많이 넣으셔서 그런데요.. 앞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수정해야겠습니다 ^^;;

  6. 오해가 생길까봐 몇 자 추가합니다.
    4의 “딴 얘기”는 희상님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소위 “공통 통제”나 “참여적 계획”을 얘기하고 마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는 생산 문제에 있어서,
    과거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1. 아. 별말씀을요…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한 공부와 고민이 너무 부족해서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7. @ daydream님, 인용하신 내용을 보면 Ausbeutung은 생산양식과 무관하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생산물을 전유하는 것을 뜻하는 것 같군요. Exploitation이 Ausbeutung의 자본주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인용문 -- MEW 23, 555 -- 은 원문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네요…

    ===

    „Ausbeutung ist entweder unmittelbare Zwangsarbeit oder vermittelte Zwangsarbeit.“ K.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232.
    Ausbeutung은 직접적 강제노동이거나 매개된 강제노동이다.

    „Ausbeutung heißt, dass die produktiven Arbeiter fremdes Eigentum schaffen und dieses Eigentum über fremde Arbeit kommandiert.“ K.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48.
    Ausbeutung은 생산적 노동자들이 타인의 소유를 창조하고 이 소유가 타인의 노동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Alle Ausbeutungsverhältnisse sind gekennzeichnet durch den Ausschluss des Arbeiters vom Produkt.“ K. Marx, Kapital I, MEW 23, 555
    모든 Ausbeutung의 관계들을 특징짓는 것은 노동자들이 생산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1.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비봉판 1권 하 18장 717쪽) Beute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어요. 한번 찾아봐주세요.

      Wohl aber die Rate des Mehrwerts oder der wirkliche Exploitationsgrad der Arbeit. Nimm z.B. die Schätzung des Herrn L. de Lavergne, wonach der englische Ackerbauarbeiter nur 1/4, der Kapitalist (Pächter) dagegen 3/4 des Produkts (18) oder seines Werts erhält, wie die Beute sich immer zwischen Kapitalist und Grundeigentümer usw. nachträglich weiter verteilt. Die Mehrarbeit des englischen Landarbeiters verhält sich danach zu seiner notwendigen Arbeit = 3 : 1, ein Prozentsatz der Exploitation von 300%.

      이 부분을 비봉판에서는 “노획물이 추후에 자본가와 지주 등등의 사이에서 다시 어떻게 분배되든”이라고 써 있어요. Ausbeutung이 우리 말로 옮기기가 상당히 까다로운게 원래 이 단어가 전리품을 나눠먹는다는 뜻이었어요.

  8. 아, 과도기 논쟁과 관련해서…

    일단 과도기에 관한 주장은 크게 봐서
    (제 기억이 맞다면…ㅎㅎ..하도 오래 전에 공부한 거라서…쩝)

    1. 자본주의로부터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과도기다
    2.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 자체까지가 과도기다
    3. 낮은 단계로부터로 높은 단계로의 이행이 과도기다

    하는 주장 등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그 논쟁들은 각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적 특성 및 내부 정치적 한계 등과 맞물리면서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나타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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