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혜노믹스’의 밑그림 (2) ‘국민 행복’의 이론적 의의

3. 근혜노믹스의 핵심을 ‘국민 행복’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이거나 향후 상황전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피할 구실을 마련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매우 뿌리깊은 보수파의 ‘입장’이 깃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입장은 경제학에 고질적인 ‘개체주의'(individualism)와 관계가 깊다. 주지하다시피 스미스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리카도에 의해 (부르주아적으로) 완성된 고전정치경제학에서 주인공은 ‘개인’이다. 흔히 이 대목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를 대립시켜, 전자를 강조하면 속류/(신)고전파, 후자를 강조하면 과학/마르크스파라고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꼭 그렇진 않다. 마르크스가 비록 ‘사회’를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개인’을 중심으로 한 논의를 싸잡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논의들이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서’ 다루지 않고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했을 뿐이다. 실제로 마르크스 자신 또한 {자본론} 등에 ‘대표적 개인'(representative individual)을 등장시키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강조하는 ‘추상화’의 중요한 기법이다(물론 마르크스의 ‘대표적 개인’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대표적 개인’이랑은 크게 다르다. 후자는 일반적으로 이성적 능력만을 갖는 텅빈 개인이지만, 전자는 만약 그것이 텅비어있다면 이는 오직 단계적인 추상과정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런 것이며 이후 서술과정을 통해 채워넣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스미스나 리카도를 포함하는 18-19세기 유럽 선진국들의 사회사상가들, 정치경제학자들은 ‘개인’을 다루면서도 위에서와 같은 구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나중에 정치경제학이 속류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전파경제학에서는 ‘사회의 산물로서의 개인’이라는 관점과 ‘동떨어진 개인’이라는 관점이 혼재되어 있었던 데 반해 속류경제학에서 개인은 오로지 후자의 측면에서만 고찰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에게 고전정치경제학은 딱 그 만큼 과학적이었던 것이고, 속류정치경제학은 딱 그런 의미에서 일말의 과학성도 담보하지 못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다(링크). 링크된 글에서 말하는 ‘사회’ 관점이 비록 마르크스에 의해 꿋꿋하게 견지되었던 반면 리카도에서 밀(J. S. Mill)을 포함한 경제학의 ‘주류적’ 전통에서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사회’ 관점이 단순한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세계 특유의 물적 현실을 포착하는 것인 한, 속류경제학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류적 전통 내에서도 ‘사회’ 관점은 어떤 식으로든 ‘재발견’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1930년대부터 본격화한 이른바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출현이 그 결과물이었다. 물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당시의 경제위기 속에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그렇다고 해서 경제학이 그 특유의 속류성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앞서 박근혜를 포함한 보수파의 뿌리깊은 ‘입장’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속류성, 곧 ‘사회’ 내지는 ‘구조’를 이론적으로 무시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태도는 단순히 ‘이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게 아니고, 박근혜의 각종 정책들로 구체화되어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까지 재현된다. 바로 ‘국민 행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서 말이다.

 

4. 위와 같이 보면,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며, 또 그와 유사한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가장 비근한 예가 이명박의 ‘공정사회’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보수정권에서 주창된 ‘빅 소사이어티’가 아닐까 한다(다음 글 참조: 링크). 물론 이러한 입장의 직접적 원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 정책 패러다임을 가지고 기존의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했던 쌔처(Margaret Thatcher)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위기를 맞았고, 우리는 그 대안으로 박근혜 버전의 ‘국민 행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박근혜 등의 “국민 행복”이 쌔처의 “사회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와 판박이라면,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려 한다는 것인가?’ 겉으로 보기엔 모순 그 자체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단호하게도 ‘그렇다’이다. 무슨 얘기냐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그들이 갇혀 있는 지적 한계 안에서만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또 그 해결을 구한다는 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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