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경제양성화, 재벌이 선택한(!) 증세 방식

◯ 주지하다시피 박근혜와 그 동료들은 ‘증세 없는 복지’를 추구한다. 이것이 그 자체로 ‘형용모순’임은 이미 인수위원회 내부에서도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이며, 요새 솔솔 흘러나오고 있는 ‘복지 축소론’이란 사실상 그러한 인식의 필연적 결론이다. 어쩌면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들의 복지 공약을 지킬 의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위와 같은 ‘마술’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기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지하경제양성화’다. 즉 현재 약 1,300조원인 국민소득(GDP)의 20~3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경제 중 일부만 양성화해도 매년 적게는 1.6조, 많게는 5조의 추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링크).

그런데 ‘지하경제양성화’도 엄연한 ‘증세’의 한 방식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박근혜가 ‘증세 없는 복지’를 추구한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하경제양성화’가 의미하는 ‘증세’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지금 그 얘길 좀 풀어보겠다. 미리 말하자면, 내 결론은 지하경제양성화란 ‘재벌증세 없는 부자증세’, 나아가 ‘재벌증세 없는 보편증세’라는 것이다.

 

◯ 가장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원칙상 지하경제가 양성화되는 것은 대자본에게 아무런 해를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지재원조달수단’으로서 (민주당에서 제안된) 부자증세와 (새누리당에서 제안된) 지하경제양성화의 차이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다. 즉 전자는 대자본을 포함한 ‘부자 일반’에 대한 반발이지만 후자는 대자본을 뺀 부자에 대한 반발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인데, 흥미롭게도 아직까지는 이런 사항은 어떠한 언론매체에서도 다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떨지 주목된다.

대충 말하면 이런 거다. 일반적으로 부자에 들어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의사나 변호사, 동네 주유소 사장 등을 포함하는 고소득 자영업자, 건물 몇 채씩 소유하면서 월세 받아서 먹고 사는 지주들과 같은 부자들과 (대)자본은 많은 경우에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적어도 ‘부자증세’라는 문제제기와 관련해서는 그렇다. 그러나 ‘지하경제양성화’와 관련해서는? 일단 재벌도 다양한 방식으로 탈세를 하고, 또 그들이 관여하고 있는 ‘지하경제’의 규모도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금권을 앞세워 행해지는 그러한 행위들이 매우 교묘할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국세청이 재벌에 일정 정도 종속된 상황에서 그러한 재벌의 관행에까지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지하경제양성화’는—만약 그것이 성공한다면—필연적으로 재벌을 제외한 다양한 크고 작은 부자들을 타겟으로 할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 기사를 보라.

국세청이 차명계좌를 이용해 탈세를 저지른 성형외과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 수십 명의 정보를 확보해 정밀 조사에 착수했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첫 단계 조치로 올해부터 ‘차명계좌 신고포상금제’를 도입한 덕이다. [. . .] 국세청은 이 제도의 타깃이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공인중개사, 학원, 병·의원, 치과, 한의원, 골프장, 예식장, 유흥주점 등 이른바 탈세 가능성이 큰 30개 현금영수증 발급의무화 업종이 될 것으로 본다. (링크)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지하경제양성화’란 ‘재벌증세 없는 부자증세’라고 부를 만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를 찍은 ‘부자들’은 재벌을 위해 살신성인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가히 대단한 희생정신의 소유자들이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국세청이 정말로 위와 같은 부자들—의사, 변호사, 각종 ‘준재벌’들—에게까지 총구를 겨눌지는 확실치 않다. 그들보다는 좀 더 쉬운 상대가 최초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그게 누구냐면, 바로 ‘(고소득 말고 그냥) 자영업자’, 예를 들면 이번 대선에서 ‘역적’으로 지목된 ‘50대 자영업자’ 말이다.

“국세청에서는 고소득 전문직에 세금 징수가 쉽지 않기 때문에 영세 자영업자한테 세금을 더 거두려고 강하게 세무 조사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처)

어떤 이들은 ‘부동산시장 부양’ 문제를 들어 50대가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적어도 그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50대 자영업자’는 박근헤를 당선시킴으로써 자신의 소득원이었던 ‘지하경제’를 대놓고 포기한 셈이고 나아가 재벌 좋은 일만 해준 격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기 발등을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지하경제양성화’가 ‘(고소득 말고 그냥) 자영업자’까지 포괄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단순한 ‘재벌증세 없는 부자증세’가 아니라 ‘재벌증세 없는 보편증세’라고까지 할 만하다.

아, 이런 아이러니를 어쩔 것인가?! 이 정도면, ‘지하경제양성화’를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재벌이 선택한 증세 방식’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지하경제양성화’는 간접적으로도 대자본에 이익이 된다. 만약 위에서와 같이 지하경제양성화 정책이 특히 의사와 변호사, 동네 음식점 사장님 등을 타겟으로 한다면, 이들 중 상당수는 대자본 아래 편입되는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자본의 활동영역, 착취영역이 커지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나는 전부터 ‘지하경제양성화’를 진보세력이 재벌과 타협할 수 있는 매우 유력한 협상수단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번에 문재인이 당선되었다고 해도 박근혜가 내세운 ‘지하경제양성화’는 받아들일만 했다. 재벌에 일정한 양보를 요구하고 그 반대급부로 법인세 인상을 보류해주는 것인데, 이때 모자라는 세수를 ‘지하경제양성화’로 조달한다면 재벌도 이에 기쁘게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도 ‘지하경제양성화’를 재벌에 대한 협상카드로 사용할 것인가? 아무런 압력이 없다면 당연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하경제양성화’가 재벌을 위한 정책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이를 근거로 재벌로부터 뭔가를 얻어낼 것을 압박하는 것, 그것은 향후 (범)진보세력의 중요한 의제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 말이 나왔으니, ‘지하경제양성화’와 대자본(=재벌)의 관계에 대해 한 가지만 더. 말할 것도 없이 지하경제 양성화는 장기적으로 한국경제가 추구해야 할 바이지만, 그것이 현재와 같이 특정한 목적 아래 ‘정치적으로’ 추구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 중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국세청과 관련된 것인데, 크게 두 가지 포인트에 주목할 수 있다.

첫째, 국세청 권력의 비대화 문제다. 연예인 강호동을 최고의 자리에서 곧장 은퇴시킨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국세청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곧 들어설 차기 정부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한다는 명목으로 그러한 국세청에 더 많은 권한을 주려 하고 있다. 특히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자료에 대한 접근권 확대의 경우엔 단순히 부처 간 기싸움의 차원의 문제로 치부할 것은 아니다.

둘째, (국세청 권력의 비대화의 결과로서) 국세청의 중립화/독립화 문제다. 국세청이 권한이 막강해지면 막강해질 수록 국세청의 중립성이 화제로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매우 흔한 일인데, 예컨대 기존의 관치금융의 폐해에 반대하면서 1990년대 들어서는 ‘금융의 독립’이 이슈였고, 노무현 정권기에는 ‘검찰의 독립’을 통해 기존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씼고자 했다.

그러나 금융이든 검찰이든 정치권력의 ‘도구’인 것이 문제라고 해서 곧장 ‘독립화’가 해답은 아니다. 실제로 위의 두 사례에서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금융과 검찰이 이후 ‘거대자본(=재벌)’에 종속되는 길을 걸었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다. 사유화된 금융은 오늘날 한국경제는 물론 세계경제를 파탄낸 주범이 되었고, 사유화된 검찰은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렇게 금융과 검찰을 손에 쥔 대자본에 정치권이 종속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는가?

달리 말해, 금융과 검찰의 경우 문제는 그것들을 통제하던 정치권력이 몇몇 개인들의 ‘사유물’로 존재했다는 것—그리하여 금융과 검찰이 몇몇 개인/집단의 사유물로 존재했다는 것—이지, 그것들이 정치권의 통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이 경우 금융과 검찰을 진정으로 개혁하고자 했다면, 사유화된 정치권력을 민주적 방식으로 개편한 뒤 금융과 검찰에 대해서도 그러한 민주성에 기반한 통제가 가해지는 방식으로 방향이 설정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사례는 현재 국세청의 변화 행로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단적으로 말해, 현재 그 권한이 막강해지고 있는 국세청은 향후 ‘독립성 강화’를 명목으로 오히려 자본에 더욱 강하게 종속되는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재앙적인 결과를 한국경제에 가져올 수 있지만, 앞서 밝힌 ‘지하경제양성화’의 진정한 의미 등을 보면 그리 비현실적인 공상도 아니다. 이에 대해 좌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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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지하경제양성화, 재벌이 선택한(!) 증세 방식

  1. 마지막에 빠뜨린 것 하나. 그러니까.. 박근혜 측에서는 국세청을 통한 지하경제양성화나 기타 ‘숨은 세원 찾기’를 통한 사실상의 증세에 의해 복지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한 ‘복지재원확보’를 넘어 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다양한 위협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도 강조될 필요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세무조사’라고 하는 것이 이미 그런 성격을 상당 정도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국세청의 권한이 더욱 커지고 동시에 ‘독립’을 명목으로 자본과 (사적) 권력에 더욱 유착될 때, 그와 같은 성격은 극대화될 것임이 불보듯 뻔하다. 더욱이 이러한 자의적인 세무조사에 ‘복지재원 확보’라는 당위가 덧씌워지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때마침 나온 기사 하나도 참조: http://bit.ly/T7iNth

  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지하경제가 GDP의 20%라는 기사의 내용이 믿기지가 않는데요. 저도 얼마전에 물리치료를 받느라 지하경제를 이용했고, 앞으로도 애용할 생각이지만, 20%라는 숫자를 생각하면 갸우뚱하게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 맞습니다. 지하경제의 규모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데요.. heesang님 계시는 동네 출신의 학자 Schneider라는 양반이 있는데, 이분이 꽤 높게 잡습니다. 이제껏 한국정부(=기획재정부+국세청)는 그분의 지적을 무시하고 그저 일개 의견으로 치부하면서 지하경제의 규모를 애써 작게 잡았죠. 이를테면 그런 외국 학자들은 한국의 특수한 사정을 모른다.. 이런 논리로요.

      작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특기할 것은 이번 ‘양성화’ 논란을 거치면서 그러한 정부의 태도가 180도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지하경제의 규모를 ‘애써’ 높게 잡습니다. 그럼으로써 당선자의 정책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죠.

      하여튼 지하경제의 규모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이겠죠.ㅎㅎ

      저는 뭐 개인적으론 흔히 ‘지하경제’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이질적인 요소들을 포괄하기 때문에 ‘지하경제’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부터가 좀 문제라고 보는 편인데요… 과세와 관련해서도, 기업과세를 제대로 하고 또한 강화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실효성도 있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기업과 관련된 현금흐름을 국가가 제대로 파악하고 올바르게 과세한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적어도 겉으로는) 없애고자 혈안이 되어있는 ‘성매매 산업’도 훨씬 줄어들 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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