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자본에 내재하는 생산력으로 나타나는 비극

서로 독립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들은 제각각인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본가와 관계를 맺지만 자기들 서로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다. 그들의 협업은 노동과정에서 비로소 시작되는데, 그때에는 이미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과정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자본에 편입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협업자로서, 또는 하나의 활동하는 유기체의 구성원으로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특수한 존재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 자본론 1권 13장, 450; MEW 23, 352

1. 무서운 구절이다.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기 전 노동자는 독립적인 개인이지만, 자본을 통하지 않고는 이 고립된 개인은 타인과 어떤 유의미한 관계도 맺지 못한다 (그럼 친구는 뭐냐고? 다행히 아직 자본관계가 친구 사이의 관계에까지 파고들지 못했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 자본관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에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다).

독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협업은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 이후 “노동과정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런데 오호통제라. 노동과정에 들어서서 이제 동료 노동자들과 마침내 유의미한 관계를 맺으려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님을 발견한다. 독립적인 인간에서 “자본의 특수한 존재양식”으로 탈바꿈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적이고자 하는 그 순간, 자신의 관념적 본질을 마침내 실현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물건이 되어 버린다.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삶은 이렇게 숙명적으로 비극적이다.

2. “그때에는 이미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다”의 원문은 “aber im Arbeitsprozeß haben sie bereits aufgehört, sich selbst zu gehören”이다. 직역하면,

‘그러나 노동과정에서는 그는 더 이상 자기에게 속하는(gehören) 것을 멈춘다(aufgehört)’

마르크스가 라임을 맞추려고 멋을 부린 것 같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협업에서 발휘하는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이다.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은 노동자들이 일정한 조건 하에 놓일 때는 언제나 무상으로 발휘되며, 그리고 노동자들을 바로 이러한 조건 하에 놓은 것은 자본이다. 이 생산력은 자본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는 것이고, 또 이것은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에 속하기 전에는 노동자 자신에 의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생산력은 자본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생산력으로, 자본에 내재하는 생산력으로 나타난다. – 450-451; MEW 23, 352

1. 우선 “노동자가 협업에서 발휘하는 생산력” 대신 ‘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자로서 발휘하는 생산력 (Die Produktivkraft, die der Arbeiter als gesellschaftlicher Arbeiter entwickelt)’이 옳다.

2. “자본에 내재한 것”으로 번역된 “die das Kapital von Natur besitzen”은 직역하면 ‘자본이 본성 상 가지고 있는 것’.

3. 협업하는 사회적 노동자일 때, 노동자는 자본이다. 그러므로, 협업에서 발휘되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이다. 동시에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자본의 생산력은 자본에 내재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협업에서 발휘되는 사회적 생산력은 자본의 생산력이지만, 이것이 자본에 내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자본의 생산력”의 내용은 자본의 특수한 형태인 협업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이 마련한 특수한 조건 하에서 자본의 지휘 하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생산력이다. 이 생산력은 자본이 어디서 돈을 주고 사온 무엇인가에서 발휘되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발휘되는 것도 아니므로, 자본에 속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

4. 물론, 이런 사정은 감추어져 있다. 마치 자본 자체에 뭔가 엄청난 힘이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어로는 나타난다, 독어로는 erscheinen, 영어로는 appear. 매우 중요한 단어다.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1)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보인다. 뿐만 아니다. 2)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 필연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표리가 부동하며 필연적으로 부동하다. 자본주의가 일반적으로 표리필연부동하다.  해괴한 비극적 동물,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_-);

양의 탈쓴 이리

 

양의 탈 밑의 이리는 보지 못하고, 저것은 양이다 양이다 양이다 하면 그것은 물신주의다. 반대로 양 가죽을 벗겨내고 저것은 이리다 이리다 이리다 하면 양과 이리의 혼합이 가져오는 해괴함의 미적 효과를 제대로 분석할 수가 없다. 요는 저 해괴한 이중성의 총체를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이중성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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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oughts on “(121) 자본에 내재하는 생산력으로 나타나는 비극

  1. “서로 독립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들은 제각각인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본가와 관계를 맺지만 자기들 서로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다.”

    맑스의 이 말은 자본가와 개별 노동자들 사이의 일면적 관계를 강조하는 말이지 공동체에서 인간 상호 간의 다양한 관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을까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인간들 상호 간의 관계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사실 그런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자본의 논리가 지배적이라면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는 일탈적 관계들도 공존하고 있지 않을까요? 맑스는 ‘아마도’ 자본의 운동을 포착하고 분석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일정한 도식을 설정해야만 했을 겁니다. 도식이란 마치 개념처럼 대상의 특정한 측면을 강조하지만 대상 그 자체가 아닌 것처럼 추상화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맑스의 이 구절을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오랜만에 들러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인사삼아…

  2. 1. 말씀하신대로 인간 상호 간의 다양한 관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회 문제를 자본-노동 관계의 결과로 환원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요. 그래서 제가 친구의 예를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친구관계는 자본-노동관계로부터 정말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다만, 자본-노동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사회관계이기 때문에, 그 직접적인 영향력 바깥에 있는 사회관계들도 간접적인 영향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 저는 자본의 논리가 구체성을 결여한 ‘도식’이라기 보다는 사회를 특수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움직이는 강력하고 본질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힘이 미치는 범위와 파괴력의 정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텐데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과 구조들을 자본의 논리에 복속된 것들과 그 논리로부터 벗어난 것들로 일도양단하기 보다는, 자본의 논리, 자본-노동관계의 구성력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 보이는 사회관계들과 구조들을 어떻게 변형해 나가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 그런 측면에서 저는 여전히 이 구절이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힘이 인간을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니까요.

    1. 네,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자본이 지배하는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전 이 시스템에서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는, 또는 비자본주의적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런 관계를 만들 것인가, 이건 물론 정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이 시스템에서 가능한 정치 투쟁이 이 시스템을 거역할 수 없으니 어떤 점에서는 쳇바퀴처럼 구르는 상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복이 비자본-관계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 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자본주의적, 반자본주의적 관계들을 만들어갈 수 있고, 또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이러한 시도들이 특히 자본의 강력한 힘 때문에 많은 경우 실패하더라도, 설령 이론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더라도, 혹은 때로는 전진을 가로막는 후퇴를 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시행착오 없이 어떤 완성된 대안이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걸음 한걸음씩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사람들을 뚜렷한 목적에 대한 인식 없이도 본능적으로 행위로 내몬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물론 대안적 프로그램들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인식도 필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체계적으로 만들어내는 경향들과 효과들에 대한 이론들을 (이론과 무관해 보이는) 정치적인 활동 속에서도 항상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성에 대한 이론에 비추어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돌이켜 보는 것, 이것은 실질적으로 중요할 뿐더러 심리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3. 제가 생각했을 때는 자본 1권 13장 450페이지는 개인이 자본의 생산영역 속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노동자로서만 존재하고, 노동자로서의 존재양식은 자본의 특수한 존재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heesang님과 blue planet님이 대화를 나누셨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맑스가 말한건 개인이 노동자일 때는 자기 자신이 아니고 노동자가 아닐 때는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같아요. 그런데 두 분이 적절히 지적하셨듯이, 생산영역을 벗어난 생활영역은 유통영역이라는 겁니다. 노동자는 생산영역에서는 판매자로 존재하고, 유통영역에서는 구매자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생활영역을 생산영역을 포괄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면(물론 이런 정의가 엄밀한 것은 아닙니다) 생활영역은 또 다시 유통영역과 비유통영역으로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구분이 가능한 것이냐는 말입니다. 친구를 만나더라도 돈이 있어야 술 한 잔 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개의 관계는 비자본적인 관계인 것 같지만, 제가 개에게 먹을 것을 주려면 돈이 있어야합니다. 비자본주의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생산관계 자체를 바꾸지 않고 사회관계를 바꾸려는 시도는 모두 망상입니다. 반복은 차이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1. 네, 동의합니다. “경철수고”의 이 단락이 생각나서 옮겨 보았습니다.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노동이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의 철학을 초기와 후기로 나누기도 하는데 저는 그런 구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아마 청년 시절에 가졌던 문제의식을 나이가 들면서 더 정교하고 더 다양한 방식으로 ‘펼쳤다’고 하는 편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기와 후기, 청년기와 성숙기를 ‘절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거지요.

      그런데 ‘비자본주의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고민이 됩니다.

      1. 제 생각에 의견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맑스는 프로이트처럼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제가 맑스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에게서는 전기와 후기의 이론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가서 자기 이론을 자기가 부정합니다. 맑스는 이론적 입장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발전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맑스에게서 과학자로서의 입장과 철학적 입장,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맑스는 그의 과학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정치적으로는 꼬뮌주의자입니다. 전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맑스는 자신의 이론과는 달리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기미를 보고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그러나 역사의 방향은 다른 곳을 가리킨다 이런 식으로 말을 흐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경철수고는 맑스에게 과학적 저서가 아니라 철학적 저서입니다. 인용하신 저 문장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라고 했는데 저 노동자가 가부장적 존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무슨 여자와 아이들이 집에서 편안함을 느껴요. 집 밖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비자본주의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을 바꾸면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존재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계에서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자본주의적 관계에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비자본주의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명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을 때 나는 내 존재가 있는 곳에 갈 수 있습니다.

        Wo Es war, soll Ich werden. 그것이 있는 곳에 내가 가야한다.

  4. 두분 코멘트를 포괄해서 제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자본주의적 관계는 존재할 수 있는가? 비자본주의적 관계를 자본의 논리에 반하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관계라고 정의한다면 비자본주의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죠 (가령 엄마와 아들 관계). 하지만, 이 비자본주의적 관계가 진실로 자본의 논리의 자장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엄격한 시각에서는 비자본주의적 관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겠죠. 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논리가 본질적이고 지배적이라고 할 때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감안한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 초기의 맑스와 후기의 맑스에 차이가 있는가? 저는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EM님이 강조했듯이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간 것은 주목할만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초기에는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바깥의 초월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비판하려는 시도가 곳곳에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주의를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폭로하고, 자본주의의 자기파괴성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옮아간 것 같아요. 그러나 ‘인식론적 단절’ 류의 표현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참조 EM님의 글 -- 경철수고, 또는 마르크스의 지적발달에서 정치경제학의 의의 (http://socialandmaterial.net/?p=29)

    3. 마르크스에게 있어 ‘집에 있는 시간’ 중요합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집에 있는 시간’ 역시 자본의 논리의 자장을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마르크스에게 있어 더 많은 ‘집에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요채였습니다.

    참조: (93) 권리 대 권리 (http://socialandmaterial.net/?p=4414)

    4. “생산관계 자체를 바꾸지 않고 사회관계를 바꾸려는 시도는 모두 망상입니다” -- 맞는 말씀입니다. 종국적으로 생산관계 자체가 바뀌어야 하지요. 하지만 생산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분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 운동에 찬성합니다. 기본소득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모두 이 운동이 향후에 생산관계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후적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등도 마찬가지이구요.

    5. 그리고 마르크스는 과학자인가? 과학의 의미가 요새는 상당히 제한적인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저는 가능하면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과학이냐 과학이 아니냐’의 잘못된 논쟁에 휘말릴 우려도 있구요. 마르크스의 학문은 그냥 ‘자본주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본주의학을 철학, 과학, 경제학, 정치학으로 쪼개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이건 경제학적 이론, 이건 정치학적 이론 등으로 분류하는 순간 각개격파가 시작되고, 마르크스의 고유성도 사라지고 맙니다.

    1. 5번에 대해서만 일단 말씀드리겠습니다. 맑스는 생애통상 수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 중에는 서신도 있고 신문기사도 있고 팜플렛도 있습니다. 맑스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이런 것들도 포함시켜야합니다. 전 최근에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맑스의 학문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자본주의학으로 명명하는 것이 옳을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맑스는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서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거는 한 이론가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맑스의 저술에서 그런 상이 제시되고 있기도 해요. 전 엄밀히 말해서 맑스가 이럴 때는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경철수고를 철학적 저서라고 하는 것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분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철학이라는건 기본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겁니다. 굉장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철학자들 중에는 현실을 보는 눈이 굉장히 날카로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도 철학에 많이 의존합니다. 하지만 철학 자체가 어떤 인식을 생산하지는 못해요. 이를테면 저는 집에 바디우의 “사랑예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읽는다고 사랑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되는게 뭐가 있어요?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맑스의 체계에서, 최근에 알게 된건데 독일어에서 체계란 유기적 전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철학적인 것들, 과학적인 것들, 정치적인 것들 등등을 섬세하게 구분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로 본다면, 물론 heesang님이 이런 주장을 하신건 아닙니다, 맑스의 체계를 이론이 아닌 것도 이론으로 보게 하는 효과, 그래서 모든 것을 절대시하고 숭배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5. 경철수고가 철학적 저서라면 자본론은 어떤가요?

    가치론을 예로 들어보죠. 가치론은 가격을 다루는 경제이론이고, 사회적 관계를 탐구하는 사회이론이며, 연구대상의 실재성과 그 유기적 구조를 강조하는 철학이론이고, 물신주의 해명의 열쇠라는 점에서 이데올로기 이론입니다. 구조주의의 기본 토픽인 구조와 작인의 문제를 다루기도 합니다.

    가치론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철학적 관점에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각각 탐구할 수 있겠지만, 이들 관점들 사이의 연관을 놓치는 순간 가치론은 고만고만한 이론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게다가 이런 접근에는 해당 분과학문의 지배적인 (잘못된) 조류가 침투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치론에 대한 일반균형론적 접근을 대표적인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방법에 관한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마르크스의 방법은 그의 이론 그 자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데, 방법을 이론으로부터 분리하여 연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구분이 종합으로 이어지지 않을 바에는 아예 구분을 하지 않고 어린아이의 눈으로 마르크스를 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1. 그냥 저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으로 맑스를 봤을 때 맑스의 문제의식은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또는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타인과 우애롭게 지낼 수 있는가 또는 어떤 조건에서 각인의 발전은 만인의 발전이 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집에 있는 시간은 어떤 인간에게는 좋은 것이지만, 어떤 인간에게는 안좋은거에요. 옛날에 제 친구는 집에 있으면 병이 난다고 직장에 다니는게 좋다고 했어요. 이것도 자본주의의 병폐에요.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히키고모리 현상이 있는데 이것도 자본주의의 병폐에요. 우리 좀 더 현대적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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