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미숙련공은 숙련공의 미래. 비정규직은?

매뉴팩쳐는 [그것이 장악하는 모든 업종 [heesang – 수공업] 에서] 이른바 미숙련노동자라는 하나의 부류[수공업은 그 성질상 이러한 부류를 엄격히 배제한다]를 만들어낸다 – 자본론 1권 14장, 473-4; MEW 23, 371

등급제의 등급과 나란히 숙련공과 미숙련공이라는 단순한 구분이 나타난다 – 474; 371

자본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이며, 이 사회적 관계는 상품관계이고 착취관계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다소 밍숭맹숭하다. 자본은 사회적 관계 (혹은 구조)임과 동시에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의 본질이 잉여가치의 생산에 있다면,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자본은 잉여가치 생산규모의 절대적, 상대적 증대 과정이다. 관계와 과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관계는 과정을 규정하며, 과정은 관계를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달리 표현하면, 관계는 과정의 전제이며 결과이다.

과정으로서의 자본의 논리를 생산성 증대와 잉여가치 생산규모의 확장이라는 추상적 결과로 파악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경쟁우위 확보와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경제적 필요 이외에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투쟁적 필요에 근거한다. 동시에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생산방식은  언제나 특수한 조건 (예: 기술적 조건과 계급역관계)에서 제기되는 특수한 문제에 대한 특수한 해법이며,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양적 변화 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를 요구하기도 한다.

매뉴팩쳐시대 (“대략 16세기 중엽에서 18세기의 마지막 1/3”, 455)에 존재한 매뉴팩쳐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형태 역시 생산성 제고와 노동통제 강화를 목표로 한 특수한 해법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절 “매뉴팩쳐의 두 가지 기원”에서는 매뉴팩쳐가 어떤 특수한 조건 – (일정 수준의 사회내 분업을 전제하는 단순협업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수공업 – 에서 발생했는지를 다루고, 2절 “부분노동자와 그의 도구”에서는 매뉴팩쳐에서 생산성 증대와 통제의 강화가 어떤 방식 – 노동자의 부분화와 일면화  – 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해명한다.

특수한 구조로서의 매뉴팩쳐는 매뉴팩쳐에 고유한 구조적 효과 – 대표적으로 노동력 등급제와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 – 를 생산하며, 이 구조를 (재)생산하는 생산성 증대의 과정은 어느 시점에는 특수한 해법을 요구하는 특수한 문제에 봉착한다. 추후에 다루겠지만, 이 특수한 문제는 매뉴팩쳐에 의한 기계의 생산(513), 숙련공에 의한 기계의 생산이라는 모순이며, 이에 대한 해법은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 미숙련공에 의한 기계의 생산, 즉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을 철폐하고 숙련공을 미숙련공화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매뉴팩쳐는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을 만들어내지만, 종국에는 숙련공을 미숙련공화하는 물적 토대를 제공한다.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과 라임이 잘 맞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전자가 분업에 기반한 생산이라는 특수한 생산형태의 한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후자를 “생산과정의 지적 요소들을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분리”(568)시키는 기계제 대공업의 필연적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대체가 용이한 작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많이 고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동일노동을 정규직 노동자가 수행하기도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행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노동시장은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적 분할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정년과 풍성한 연금이 보장되는 교원/공무원과 항상적인 고용불안과 노후걱정에 시달리는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 노동자 사이에는 (정규직,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과는 다른)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

자본론 1장 14장까지 마르크스는 (자본에 고용되어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물론 13장에서 협업에 필요한 감독, 지휘, 통제 기능을 다루기는 하지만, 분석의 촛점은 노동의 분화보다는 이들의 기능적 필요성을 짚고 넘어가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마르크스는 아직 상품의 판매, 가치의 실현, 대부와 투자업에 종사하는 비생산적 노동에는 관심이 없으며, 아예 자본에 고용되지 않는 공무원, 교사, 종교인, 그리고 자영업자와 전업주부 등은 완전히 논외로 하고 있다. 따라서 숙련공과 미숙련공 사이의 구분과 관련된 마르크스의 분석을 업종과 분야를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존재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분에 곧바로 적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다음의 몇 가지 측면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미숙련공의 탄생이 특수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문제에 대한 특수한 해법인 것처럼 비정규직의 탄생을 일종의 특수한 해법으로 다룰 수 있다. 그리고 미숙련공의 탄생이 기술적 해법의 필연적 결과에 해당한다면, 비정규적은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위계의 산물이라는 차이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둘째, 미숙련공과 숙련공의 구분이 기계제 대공업에 의해 철폐된 것처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의 흐름도 분명히 존재한다. 정규직의 당일 해고가 가능한 미국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교사나 공무원 역시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셸 리가 나올 수 없음). 유럽에서도 보통 1-3개월의 노티스 기간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정규직 해고가 자유롭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정규직이나 교사, 공무원 등의 특수직종 종사자가 누리는 일종의 특권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 같다.

셋째, 비정규직 생산직 (혹은 판매직) 노동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노동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교사나 공무원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고 (어쨌든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한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가장 낮은 등급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노동 일반은 자기 실현의 도구이고 신성하다 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적 노동은 자기를 실현하기는 커녕 파괴하고, 신성하기는 커녕 속세의 모든 번뇌와 고통의 원천이다. 물론 노동자들은 이 비루함 속에서도 변화의 담지자가 되지만…  노동이라는 깃발 아래 모이는 까닭이 자본주의적 노동의 철폐에 함께하기 위한 것이라면 좋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는 바케쓰 안에 우겨넣는 것은 옳지 않다.

넷째,  노파심에서. 자본-노동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 사회적 관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비생산적인 다종다양한 노동들 역시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노동관계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군사부 삼위일체의 한 축인 선생님들이 대체 왜 ‘월급’이란 걸 받겠어? 전업주부와 교사, 그리고 공무원에 대한 분석이 노동력 재생산이나 자본주의에서의 국가의 기능을 다루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망할까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벤 파인의 노동시장이론: 건설적 재평가 (Labour Market Theory: A Constructive Assessment) 참조. 특히 7장 마르크스주의적 대안이 유용함. 메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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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oughts on “(127) 미숙련공은 숙련공의 미래. 비정규직은?

  1. heesang님이 연재를 다시 시작해서 기분이 좋네요. 제 공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죠. 사악하고 이기적인 나의 심성. ^0^

    참견 하나해도 될까요. 교사나 공무원을 언급한 부분입니다. heesang님은 교사나 공무원이 노동자인 것은 어쨌든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서 약간의 의문이 생겼어요. 만일 그렇다면 교사나 공무원은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도 실질적으로는 노동자였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과거에 교사는 공동체에서 생산자가 아니라 생산자들에게 봉사하는 계급이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조선후기의 서당은 마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졌죠. 사극을 보면 아이들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쌀 같은 것을 서당에 수업료로 내는 걸 볼 수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공동체에 고용된 계층이고 이 사람들은 생산자들과는 구별되는 비생산자 계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반면 공무원은 조정에 고용된 사람으로서 생산자들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고 사실상 생산자들에게 기생하는 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사나 공무원은 자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에게 봉사하거나 감시, 감독하는 일을 하면서 봉급을 받는 피고용자 계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이들이 다른 노동자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노동자 계층이 되는데 저는 그 이유를 맑스에게서 찾아보았습니다. 요강 2권 375쪽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노동과 타인 노동의 이러한 교환은 타인들의 노동의 동시적인 공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이 행하는 선불에 의해서 매개되고 조건 지워져 나타난다.”

    교사나 공무원이 노동자인 것인 그들이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고용되고 자본에 봉사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2. 쓸데없는 얘기 하나 해도 될까요. ㅠㅠ 저는 가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림 그리는 노동자, 글 쓰는 노동자 이런 프로필 보면 잠시 얼떨떨해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노동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지. 이 사람들 생각은 노동자란 노동하는 사람이란 뜻인 것 같아요. 물론 사전적 의미에서 틀린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임노동과 동일시한다는 건 그들이 하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일 뿐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들이 하는 노동은 대부분 자기 노동의 결과에 대한 보수를 받는 자율노동인데 남 밑에서 8시간, 심지어 12시간 13시간 동안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감시당하면서 하는 노예노동을 같은 거라고 생각하다니. 너무 불쾌해요. -_-;;;

  3. daydream님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잘 지내셨죠?

    공무원이나 (공립학교)교사에게는 일반노동자와 동일한 측면 -- 임금을 받는다,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 이 있고. 그렇지 않은 측면 -- 자본에 고용되지 않는다. 해고의 위험이 없다 -- 이 있죠 그래서 딱 잘라서 노동자다 노동자가 아니다 혹은 노동자계급에 속한다 노동자계급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강에서 인용하신 문구가 공무원/교사가 노동자라는 주장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그렇다/아니다의 문제 보다는 자본-노동관계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하드코어(?) 생산직 노동자를 가장 중심에 놓고, 판매직 노동자, 이른바 지식노동자, 감정노동자, 교사/공무원(노동자), 자영업자 등등을 적절히 배치하는 것이죠.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배치를 마치고 나면, 제 생각에는 교사/공무원은 아마도 중심에서 가장 먼곳에서 발견될 것 같고, 별다른 변화가 없는한, 다른 집단들을 계속해서 중심 쪽으로 밀어붙이는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교사와 공무원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노동자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면 이런 현실이 간과될 수 있습니다. 제가 원글에도 썼지만, 노동자로서의 측면에 대한 강조가 연대를 위한 것이라면 적극 환영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누리고 그 비루함은 회피하려는 용도로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남용되는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두번째 댓글에서 언급하신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그러니까 예술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경우에는 노동이라는 표현이 연대라는 측면보다는 그마나 노동으로라도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라도 누리고 싶은 거죠. daydream님 말씀대로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생계에 대한 걱정없이 정말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4. 잘 지내지 못했어요. 얼마전에 직장을 구했는데 면접 볼 때는 9시 반에서 9시 반이라고 하더라구요. 힘들긴 하지만 돈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업장이 새로 오픈한데여서 한달 동안만 9시부터 10시까지 해달라고 말을 바꾸더라구요. 황당했지만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되니까 후유증으로 못일어나겠더라구요. 며칠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지금은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데 여기도 황당하죠. 하지만 제 시간이 있으니까 왠만하면 다니려고 해요. 자본을 읽어야하거든요!!!

    heesang님 글의 전체적인 요지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특히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는 바께쓰 안에 우겨넣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에는 적극 동의합니다. 지난해에 고정갑희씨가 책을 내면서 임신이나 출산도 노동이라고 주장했는데 완전 황당하죠. 저는 가사노동이라는 용어도 사실 못마땅해요. 역사적으로 볼 때 여성은 가사관리를 담당했고, 여성이 집에서 하는 일은 보통 직장에서 하는 타율노동과는 달라요.

    그러나 제가 문제를 삼은 것은 사실상 단 한마디의 언급에 지나지 않아요. 이미 언급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heesang님이 제 지적을 이해를 못하시는것 같아요. 제 설명이 부족한 점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온라인상에서는 대화에 한계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문제삼는 것은 누가 노동자냐, 그가 왜 노동자냐 이 문제에요. 사실 이 문제는 사안에 따라 굉장히 중요한 쟁점이 되기도 하죠.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하기 때문에 노동자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범주에 드는 사람은 굉장히 많아져요. 농민이나 자영업자도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어제 시간이 없어서 잘 읽어보지도 않고 적절치 못하게 요강을 인용한 것 같은데, 교사나 공무원이 노동자인 것은 그들이 자본 또는 국가에 고용되어있기 때문이지 그들이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자본이나 국가가 그들의 노동력을 구매한 이유는 그들의 노동이 구체적 유용노동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라면 용역도 마찬가지로 구체적 유용노동을 하기 때문에 자본에 고용된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용역도 어쨌든 구체적 유용노동을 수행하기 때문에 노동자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또 하나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건 예술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예요!!! 이건 제가 설명을 충분히 못했기 때문에 제 잘못이지만 제가 말씀드린 건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 트위터나 블로그 같은데서 자기 소개를 글 쓰는 노동자, 그림 그리는 노동자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들이에요. heesang님은 이 분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모르시는것 같아요. 예술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노동자는 아니죠. 이를테면 관현악단 단원들은 연봉을 받고 해고도 되잖아요. 이 사람들은 당연히 노동자고 제가 이걸 가지고 문제삼은게 아녜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프리랜서들은 실질적으로 원청에 예속된거나 매한가지에요. 전 이런 사람들은 노동자로 봐요. 근데 그게 아니라 노동운동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영업자처럼 일하면서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남 밑에서 일하는게 뭔지 모르는 것 같아요. 물론 그 사람들 대부분이 고용된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배고픈 자유인이 배부른 노예를 부러워할 수도 있죠. 하지만 배고픈 서러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처럼 자유도 마찬가지에요.

    1. daydream님 말씀대로 저희 사이에 큰 의견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 굳이 첨언을 하자면,

      daydream님은 고용여부를 노동자이냐 아니냐의 기준으로 보시는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그런 기준을 정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쟁점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생산적 노동 v 비생산적 노동의 문제와는 경우가 다르죠.

      그리고 제가 구체적 유용노동을 언급한 것은 노동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예시였어요. 교사/공무원과 생산직 노동자 사이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야 한다면 구체적 유용노동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자영업자처럼 일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제가 알고 있는게 거의 없어서 죄송하지만 별다른 코멘트를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1. 그래서 저도 쓸데없는 얘기라고 양해를 구했는데 그냥 패스하셨으면 좋았을텐데 또 쓸데없이 얘기가 길어졌군요. 실은 제가 언젠가 한번 이 얘길 꺼내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는데 우연히도 이 얘길 heesang님에게 하게 되었네요. 전 다만 heesang님이나 다른 분들이 제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궁금했을 뿐이었어요.

        “자영업자처럼 일하는 노동자”는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노동자와는 달라요. 프리랜서도 천차만별이겠지만 제가 볼 때 노동자군에 속하는 프리랜서들.. 이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건 얼마전 대나무숲 열풍이 불었을 때였어요. 그 때 실태조사보고서를 찾아서 보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 대부분이 과도한 업무, 낮은 보수, 중압감, 고용불안정 등등 상태가 심각한 편이에요. 이들 대부분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직업이라는 매력 때문에 프리랜서라는 힘든 길을 택했지만 실상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죠. 오히려 일반 노동자들보다 고용이 더 불안정하기 때문에 일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원청에 예속되는 경우가 많고요. 이 사람들의 특징은 일하는 시간과 노는 시간이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거에요.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테레비 보는 것, 게임하는 것도 일이에요. 이 사람들이야말로 자본이 돈 안주고 더 많은 시간을 뽑아간다고 볼 수 있을 정도에요. 이 분들은 노동자라는 자각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건 별로 없을거에요. 노동조합 만들기도 힘드니까요. 그런데 노동자라고 주장하지만 제가 보기엔 노동자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 그 분들 하루 일과 좀 알고 싶어요. 아마 직장인들 하루 일과는 많이 다를거에요. 생계유지는 어떻게 하는지도 궁금해요. 아마 가족 중 누군가가 그나 혹은 그녀의 생계유지를 하고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 사람들이 다른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가장 큰 이유는 노동운동을 하고 싶고 그게 자신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일 하고 자기 시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다만 생계유지가 안되는게 그들의 고충이라면 사실 그들의 노동은 일정한 수입만 보장되면 아무 문제 없겠죠. 그리고 그렇다면 노동이란 것 자체가 그야말로 이상적인 것이겠죠. 제가 아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살지 못해요. 사람들은 일당 7~8만원 때문에 지옥같은 하루를 보내요. 노동자라는 말 할 때 생각 좀 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노동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전 그 말이 하고싶었을뿐이에요. 여기에 이런 글 남겨서 죄송합니다.

        1. 위에 남겨주신 글을 읽으니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의미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되구요. 다만, 제가 지적하신 그런 흐름에 대해 아는바가 거의 없어서 더 논의를 진행해나가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2. 또 하나 덧붙이자면 고용여부가 노동자냐 아니냐의 기준이냐의 문제. heesang님 말씀대로 중요한 쟁점이 아닐 수도 있어요. 다만 저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동이 자신을 위한 노동이냐, 아니면 타인을 위한 노동이냐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라면 편의점 사장도 일종의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 이 사람의 문제는 자본이 과도하게 이 사람에게 돈을 가져가기 때문이지 일정한 돈만 요구한다면 사실 이 사람은 며칠 날밤을 새서 일을 하든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거에요. 물론 그 일이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하더라도. 물건 팔리면 좋죠. 그만큼 돈들어오니까. 실명을 거론하는게 적절치 않다는건 저도 알지만 공지영씨 우리가 노동자라고 보기 힘들죠. 그 분 책쓰는데 누굴 위해서 쓰나요. 자기 생계유지를 위해 출판사를 위해 노동하는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어요. 그 사람이 쓴 책은 그 사람의 것이에요.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노동해요. 그렇기 때문에 칭찬도 비난도 혼자서 독차지해요. 공지영씨가 글쓰는 노동자라고 주장한다면 아 그러시군요 하겠지만 알만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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