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만약 우리가 노동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다면, 농업, 공업 등과 같은 주요부문들[heesang – 속(屬; Gattung; genus)]로의 생산의 분할을 일반적[heesang – 보편적] 분업, 그리고 이들 생산부문[heesang – 속]의 종(種; Art; species)이나 아종(亞種; Unterart; sub-species)으로의 분할을 특수한 분업, 그리고 하나의 작업장 안의 분업을 개별적 분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자본론 1권 14장, 475: MEW 23, 371

1. 일단 종 < 속 < 과 < 문 < 강 < 문 < 계에 대응하는 영어 표현은 species < genus < family < order < class < phylum < kingdom, 독어 표현은 Art < Gattung < Familie < Ordnung < Klasse < Reich.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만, 이에 맞추어 번역을 하는 것이 올바르다.

2. 보통 철학에서 보편-특수-개별의 틀을 사용하니까 일반적 분업보다는 보편적 분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길판에도 일반적 분업으로 되어 있음.

3. 그런데 마르크스는 굳이 왜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보편-특수-개별은 철학에서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하나는 개념들을 계층화해서 삼단논법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가령 부천시, 경기도, 대한민국이 각각 개별, 특수, 보편에 대응하는 경우다. 부천시는 경기도의 일부이다, 경기도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다, 고로 부천시는 대한민국의 일부이다는 삼단논법의 논증이 가능하다. 개별이 특수의 일부이고, 특수가 보편의 일부이므로 개별이 보편의 일부라는 것.

4. 다른 하나는 헤겔의 용법이다. 헤겔은 보편-특수-개별의 삼단논법을 논리학의 후반부에서 다루는데 여기서는 삼라만상의 내적연관, 일종의 세계일화(世界一花)가 전제되어 있다. 베이징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태평양에 폭풍을 일으키고, 이때 먹구름 속에서 우는 천둥이 봄부터 울던 소쩍새와 더불어 한송이 국화꽃을 피워낸다는 식이다. 이러한 개별적 대상, 사건, 개념들 사이의 연관은 특징적으로 특수와 보편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하나하나의 개별자는 (특수자를 매개로 한) 보편자의 인스턴스이며 – 다시 말해 근원이 같으므로 개별자간 상호연관이 가능하다 – 보편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처럼) 개별자, 특수자와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자와 개별자 내부에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보편-특수-개별 사이의 이러한 물고 물리는 연관관계 때문에 헤겔은 개별 < 특수 < 보편의 단방향 삼단논법 외에도 특수 < 개별 < 보편, 개별 < 보편 < 특수 등의 다양한 방식의 삼단논법을 다루었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모든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5. 부천시의 경우는 다르다. 부천과 경기도 그리고 경기도와 대한민국 사이의 관계는 순전히 외적 관계이다. 부천을 없앤다고 대한민국의 존립에 문제가 될 이유는 없으며, 부천을 인천광역시에 편입시키면 안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6. 분업의 경우는 어떨까. 시계테엽생산노동, 시계생산노동, 제조업 노동을 개별, 특수, 보편의 틀을 통해 살펴보자. 1) 제조업 노동은 시계테엽생산노동과 같은 다종다양의 구체적 유용노동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2) 시계생산노동, 마차생산노동과 같은 사회 내의 제품별/산업별 분업은 경제 내의 제품간 산업간 연관관계를 반영한다. 3) 시계테엽생산노동은 조밀하게 짜여진 사회적 분업의 체계 속에서 예를 들어 마차바퀴생산노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생산된 시계를 마차로 배송하는 경우를 상정해보라).

심지어 작업장 내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에 의해 규정될 뿐 아니라 거꾸로 사회 안의 분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특수가 개별을 포함한다는 계층적 이해를 버려야 하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학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노동도구의 분화에 따라 이 도구를 생산하는 산업들도 더욱 더 분화된다 –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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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thoughts on “(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1. 좋네용…특히 마지막.
    em도 대공업 토대로서의 매뉴팩쳐의 변증법적 의미 매우 강조했는데, 변증법 머시기 나올 때마다 매우 감탄하면서도 마치 하늘 꼭대기에서 지구별을 내려다 보는 관점이 되는 것 같아 어질어질하기도 하네요.

  2. 1. 여기서는 생물학적 분류 체계를 굳이 염두에 둘 필요는 없을 듯해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종”과 “속” 이외에도 다른 위계적 범주들,
    즉, “과 -- 목 -- 강 -- 문 -- 계”등은 어디로 갔냐? 라는 반문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2.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에서는 정의(definition)를 아래처럼 다룹니다.

    [본질/종의] 정의 = genus[類/류] + differentia[差/차]

    어떤 개체의 본질/종을 정의할 때에,
    더 크거나 높은 범주인 류와 그 류 아래에서 서로 다른 종[species/ 種]들 사이의 차이[differentia]를 제시함으로써 본질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 인간 = 동물 + 이성(을 가진)

    노예 = 재산 + 말(하는)

    * “본질”이 왜 “종”과 연관되는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생인 플라톤의 철학 체계 안에서 본질, 형상 등의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idos가 중세 학문 체계에서는 라틴어 species로 번역되었던 거죠.

    ** 그리고, 서세동점의 19세기에 동북아시아에 서양의 학문이 유입될 때
    아리스토텔레스 정의에서의 species와 genus는
    각기 종[種]과 류[類]라는 한자어로 번역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동북아시아에서, 이미 있던 “종류”란 말, 혹은 “종”과 “류”란 말을
    species와 genus에 배정해서 번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있던 종류란 단어의 역사적 전거에 관해서는 http://www.zdic.net/cd/ci/9/ZdicE7ZdicA7Zdic8D227850.htm)

    *** 그러니까 라틴어 genus, species, differentia에 상응하는
    그리스어는 각기, eidos, genos, diaphora

    3.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사고/접근 방식을 취한다고 한다면
    species의 번역어는 “속”이 아니라 “류”가 되는 거죠.

    포이에르바하 및 맑스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 등에서
    Gattungswesen을 그 동안 “유적 존재”라고 번역해 온 것을 참고하면 되겠습니다.

    4. 또, 희상님이 인용한 대목은,
    “자본” 본문의 “주 50″에 나오는 스카르벡(Skarbeck)의 논의를 맑스가 걍 거의 그대로 갖다 쓴 거로 보이니까
    특별히, 헤겔과의 관련이 강하다고만 보기도 힘든 것 같아요.

    5. 아무튼, 사회적인 것의 일반성/특수성/개별성의 문제는
    생물학적 분류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관/변호사가 다루는 판례나 의사가 다루는 증례가 보여주듯이
    인간 사회에서의 특정한 사례나 증례는
    생물학의 분류에서처럼 더 일반적, 보편적인 것 아래로 다소간에 무조건적으로 포섭되는 것은 아닐테지요.

    예컨대, 사법 판결에서 특수하고 예외적인 정황 또는 정상 참작의 경우 등이라든가
    의학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잘 듣는 약이 어떤 사람에게는 잘 듣지 않는다든가 하는…
    (특히, 사회과학의 각종 역사주의적 입장에서는 더 그러합니다.)

    개체성, 우발성, 일회성, 단독성, 사건성 등을 강조하는 20세기 후반의 다른 철학적 입장에서는
    일반 -- 특수 -- 개별에 관한 헤겔식의 틀을 거부/비판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저는 그런 철학적 입장에 대해 굳이 찬성하는 쪽은 아니지만요.)

    6. 암튼, species와 관해서는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유럽어 어휘들 중에 special 등을 맑스가 다른 데서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눈여겨 봄직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이미 방금 지나온 “협업”에서,

    “결합된 노동일의 특수한 생산력
    (die spezifische Produktivkraft des kombinierten Arbeitstags)”
    (MEW 23: 349)

    “협업 그 자체가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고유한 그리고 이 생산과정을 특수하게 구별짓는 역사적 형태로 나타난다.
    (die Kooperation selbst als eine dem kapitalistischen Produktionsprozeß eigentümliche und ihn spezifisch unterscheidende historische Form.)”
    (MEW 23: 354)

    위 두 경우, spezifisch는 besonder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자본” 전체에 걸쳐서 spezifisch의 용법을 체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앗, 잘못이…정정합니다.

      *** 그러니까 라틴어 genus, species, differentia에 상응하는
      그리스어는 각기, genos, eidos, diaphora

      1. 아앗…또 잘못이…정정합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사고/접근 방식을 취한다고 한다면
        genus / Gattung의 번역어는 “속”이 아니라 “류”가 되는 거죠.”

    2. 쓸데없는 번잡스런 얘기로 들릴까 봐서 지난번에는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파심에서 추가합니다.
      혼란을 겪는 분들께 도움을 드릴까 해서요.

      위 논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어 general의 어원은 라틴어 genus(類: 그리스어 genos)입니다.
      special의 어원이 species(種)인 것과 대조되는 거죠.
      아무튼, general과 special은 이런 식으로 의미상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번역어로서 채택된 한자어 ‘류’와 ‘종’은
      아주 쉽게, 예컨대, 인류(人類)와 인종(人種)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인류 & 인종도 번역어인데 나름대로 정확하게 ‘류’와 ‘종’을 가져다쓴 거겠죠.)

      그리고, 지난번에 확인되었듯이,
      근대 이전의 전통 학문 체계 내지는 논리학에서
      “[본질적인 & 분류학상의] 정의 = [최근의/상위의] 류 + 종차”인 거죠.

      반면에, 영어 general에 상응하는 독일어 allgemein는
      말 그대로 all + gemein(공동의, 공통의)에서 만들어진 말로 보입니다.

      그리고, universal의 경우는,
      universal(영어 형용사) < universe(영어 명사) < universum(라틴어 명사) < universus
      (라틴어 형용사)

      형태소/의미소로 따져서는,
      universus = unus("one") + versus(동사 vertere["to turn"]의 과거분사)인데
      (특히 versus란 라틴어 형태소는 영어 단어 versus["對"]에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universus는 그리스어 "to holon(우주)"을 번역하면서 로마 사람들이 만든 말입니다.

      따라서, universal의 의미상 대조어는 particula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명사 particle의 의미가 "입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간단히 이해됩니다.

      우주 vs. 입자!!!
      (물론, 입자라고 해서 아주 작은 것만은 아닙니다.
      뉴튼 물리학 체계에서는 항성에 대해서 행성이 particle입니다.)

      라틴어 particula에서 만들어진 영어 단어 particle는 14세기 후반에서부터
      "small part or division of a whole, minute portion of matter"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영어 particular에 상응하는 독일어는 besonder(e)입니다.
      지금 제게 독일어 어원 사전이 없어서 100%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독일어 형용사 besonder는 어원적으로, 아마도,
      sondern(동사: 따로 나누다, 가르다 / 접속사: 오히려, 달리, …도 또한)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편, 다들 익히 잘 아시다시피,
      영어 individual은 라틴어 individuum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다시 어원상으로는 in("not") +dividuus("divisible")…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으로서의 개체]"
      이 라틴어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atom이란 말에 정확히 대응하는 거죠.

      그래서. 영어 general/special[specific], universal/particular, individual
      그리고 여기에 상응하는 독일어,
      allgemein/speziell[spezifisch], universal/besonder, individuell 각각을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쓰던 간에
      제가 말씀드린 어원상의 차이 및 의미상의 대조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으면
      아주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즉, 아래의 유추 관계만 염두에 두고 있으면 되는 거죠.
      general : special[specific] = universal : particular
      (류 : 종 = 우주 : 입자)

      어색하긴 하지만 굳이 한 자리에서, 이 넷을 서로 다르게 번역해본다면
      일반적인 : 종별적인 = 보편적인 : 특수한
      一般적인 : 種別적인 = 普遍적인 : 特殊한

      여기에, 생물학적인 분류의 위계 질서를 염두에 두면
      분류 위상 수준의 변화에 따라서,
      낮은 단계에서는 엄연히 general한 것이
      더 높은 단계에 가서는, special[specific]한 게 된다는 정도를 추가…

      다만, 독일어에서는 의미성분상
      allgemein(general)과 besonder(particular)가 서로 대조적으로 연관되는 느낌을 줍니다.
      또, 때로, allgemein과 individuell이 서로가요…
      즉, 특별히 "공동[체] vs. 개인/개별"이라는 맥락에서 그러합니다.
      (이건 순전히 제 주관적인 언어 감각…독일 사람들에게 확인한 적은 없어요)

      이런 취지에서, general과 universal 사이의 뉘앙스를 굳이 따진다면,
      전자가 분류, 정의 등과 관련된 인식론적인 범위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그 자체로 존재론적인 영역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위에 보듯이, 형태상-어원상 적어도 다섯 개의 서로 다른 단어가 있는데
      이것들을 굳이 헤겔식으로 "보편성 -- 특수성 -- 개별성"이라는
      다소간에, 순진하고 소박한(!) 것으로 여겨지는 틀에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30년 쯤 전에 헤겔 "대논리학"을 정말 열라 읽었지만
      지금 머리에 남은 것은 "매개" "규정" "반성" 정도의 단어뿐이네요…쩝)

      또, 이 단어들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는,
      미리 제 혼자 못박아두거나 외워둔 어떤 단어(들)를 교조적으로 굳이 고집할 게 아니라
      실제 용법이나 문맥에 따라서 적절하고 유연하게 선택해서 번역해 쓰면 되겠지요.

      그런데, 어떤 특정한 철학 체계나 이론 체계를 전제하고나서
      위의 단어들을 일정한 의미로 한정하거나 특정한 색채의 이론적 개념으로 쓰는 경우에는
      바로 그 서로 다른 철학/이론 체계가 뭐냐 하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체계를 선호하거나 그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쉽지는 않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개체, 개별성, 일회성, 우연성, 우발성, 사건 등을 유달리 선호하는
      들뢰즈나 가타리 같은 사람들에게까지 갈 필요도 없이,
      예컨대,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만 하더라도
      헤겔의 체계과는 다른 체계/전망에서 위 단어/개념들을 다룹니다.

      아도르노나 헤겔 둘 다 똑같이, 변증법 및 매개 개념이
      그들 철학 체계에서의 핵심적 모티브인데도 불구하고요.

      아도르노 입장에서는, 헤겔이 아무리 매개를 떠든다고 하더라도
      (보편자와 특수자 사이, 혹은 보편자와 개별자 사이의 매개…)
      기본적으로 헤겔은 "총체성/전체성 -- 동일성 -- 보편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는 거겠지요.

      패러다임이라는 점에서
      헤겔의 관념적, 사변적 형이상학을 깨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포이에르바하 -- 맑스/엥겔스가 그랬듯이
      유물론적으로 뒤집어엎어버리는 길

      다른 하나는,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이 그랬듯이
      부정성[및 부정성에 바탕을 둔 비판적 계기]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길

      아도르노는 심지어 맑스도 헤겔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상당수 1960대 서구 맑스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걸텐데요.
      (물론, 저는 아도르노의 맑스 이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단적으로 말해서, 아도르노는 우리처럼 열심히 "자본"을 전혀 공부하지는 않았던 거죠)

      아무튼, 이 점에서는 아도르노와 들뢰즈는 같은 입장입니다.
      현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주의적이고 프라이빗한 아비투스가 그들에게 작용한 탓이겠지요.
      (물론, "선험적 차이의 존재론"을 내세우는 들뢰즈는
      아도르노보다 훨씬 더 멀리 나간 것이라고 확인해둬야 하겠지만요…)

      그런데, 소련이 망한 뒤로,
      그리고 지금 중국이 열심히 자본주의의 길을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제게는 헤겔 식의 매개/규정 개념에 의한 "보편성 -- 특수성 -- 개별성" 틀보다는
      들뢰즈[의 심연]가/이 더 계몽적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포스트-자본주의 사회는
      아도르노나 들뢰즈가 겪어낸 바 있는 바로 그 아비투스,
      혹은 전철 안에서 제각기 스맛폰을 들여다보며 웃고 있는 사람들마다의 차이/개성을
      보존/보호/유지/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는 거죠.

      1. 물론, 헤겔은 이 대목에서

        스맛폰을 매개로 삼아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소비자” 일반으로 포섭해 버리겠지요.
        혹은, 약간 멋부려서 “노마드” 일반으로요…

        들뢰즈는 그런 논리가 일종의 파쇼고, 사기라는 거죠.

      2. 설명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유’와 ‘종’은 잘못된 번역일 수도 있습니다. spezifisch는 Spe­zi­es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Art, Familie, Gattung, Ordnung, Rasse 이거 다 포괄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독일어로 die Spezies Mensch라고 합니다. unsere Spezies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인종보다는 인류에 가깝습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species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의 동사형인 specio는 보다(see)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그리스어는 σκέπτομαι인데 아마 skeptesthai일겁니다. 살펴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서 나온 skepsis는 “독자적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꾸 어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유와도 상관 있고 종과도 상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맑스에게 spezifisch가 어떠한 의미냐는 겁니다. 맑스가 사용한 문장들을 비교해보면서 spezifisch를 어떻게 옮기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따져야합니다.

      3. 또 하나. allgemein/speziell[spezifisch], universial/besonder를 각각 일반적인:종별적인 = 보편적인:특수한이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구분하시는지 과문한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네요. 헤겔이 개념을 설명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인 이런 것입니다.

        Die Momente des Begriffs sind die Allgemeinheit, Besonderheit und Einzelheit. Er ist ihre Einheit.

        각각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을 영어로 바꾸면 general[universal], particular, single에 해당합니다. individual은 개별성과 무관합니다. 아마 프랑스인들은 개별성을 singularité라고 할 겁니다. 물론 들뢰즈에게singularité는 개별성이 아니라 특이성이겠지만. 어쨌든 individualité는 개별성이 아니라 개체성, 또는 개인성이라는 뜻입니다.

        1. Daydream님,

          반갑습니다.

          제 설명의 포인트는 헤겔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저는 그 단어들의 어원이라든가 의미상의 대조관계를 제 나름대로 설명했을 뿐입니다.

          단지, general, special[specific], universal, particular의 단어들을 접하거나 다룰 때에
          굳이 헤겔 틀에 갖히지는 말자는 점을 부차적으로 덧붙였을 뿐입니다.

          제가 “어색하긴 하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그 단어들을 서로 다르게 굳이 우리말로 옮겨본 데는 바로 그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Einzelheit 역시 꼭 “개별성”으로만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때에 따라서는 “단일(성)” “단독(성)” 등등 여러가지로 쓰일 수도 있으니까요.

          설령, 헤겔 개념들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헤겔의 “대논리학”을 번역할 때에조차도
          Einzelheit를 꼭 “개별성”이라고 옮겨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헤겔을 님과는 다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사람의 관점/입장에 따라서는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는 거겠지요.

          암튼, 상식적으로, individual은 형용사로 “개별의” “개체의” ‘개인의” 등의 여러가지 뜻이 있을테지요.

          그런데, individual을 “개별의” 등 중에서 미리 꼭 어느 하나로 못박아 둘 필요는 없다는 게 제 얘기의 취지였습니다.

          또, individual의 명사형이 무엇이든 간에
          (구체적인 것을 뜻하든 아니면 추상적인 것을 뜻하든 간에)
          님처럼 미리 “개체성” “개인성”이라고 못박지는 말자는 게 제 기본 태도입니다.

          맥락과 경우에 따라서는 individual의 명사형을
          님이 거부하고 배제하고 있는 “개별성”의 의미로 쓸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아무튼, 님이 고수하려는 것으로 제 눈에 보이는 바의,
          헤겔 틀의 나쁜 측면 때문에
          들뢰즈 같은 이는 singularity란 말을 선호하는 거겠지요.
          (여기서 “나쁘다”는 것은 님이 아니고 헤겔의 틀이며
          “나쁘다”는 표현은 제가 상정한 들뢰즈의 입장…)

          또 singularity란 말 역시
          “특이성”이라든가 “특이점” 따위로 미리 못박아서
          이 말만 나오면 무조건 “특이성” 등으로 쓰지는 말자는 게 제 취지입니다만…
          (그건 중딩이 수준의 단어 암기 or 사용일테니까요.)

          문맥과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단독성/단독적임”이라고 할 수도 있고
          “단수성/단수적임”이라고 할 수도 있고
          “홀로임” “혼자임” “왕따당했음” “은톨이” 등등 여러가지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아무튼, 제가 이해하기로, 들뢰즈 입장은,
          singularity라는 걸 이해할 때에
          헤겔식의 “보편 -- 특수 -- 개별”의 틀로 억압하지는 말자는 거겠지요.
          (singularity를 뭐라 번역하든 간에요.)

          헤겔/들뢰즈 등을 공부하는 것은 각자 선책할 일이고
          헤겔/들뢰즈 틀을 고수하는 것은 각자 취향일 겁니다.

          특정한 외국어 단어를 특정한 한국어로 옮기는 것도
          결국에는 각자의 선택/취향에 달린 문제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단어/문장의 해석이나 번역에 있어서는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의 문제로 갈 게 아니라
          (즉, 진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상황이나 맥락”에서
          어떤 단어나 말을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
          과연 어느 게 더 커뮤니케이션의 효과가 큰가 하는 식으로
          따져나가는 게 현명하다고 봅니다.
          (화용론적 차원에서의 효과 문제)

          물론, 이 효과에 대한 판단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요.
          또,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어진 맥락/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겠구요.

          그러니까, 문장/단어의 해석이나 번역에 관한 한,
          “나는 이 맥락에서 x란 단어의 번역어는 y라고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정도의 태도가 더 쓸모있을 듯합니다.

          화용론적 효과에 포인트를 맞추고자 한다면
          바로 그 효과의 있고 없음에 관한 판정이 비교적 아주 쉽게
          경험적, 실천적, 집단적, 집합적으로 내려지니까요.

          반면에 “거기서 x를 z라고 하면 틀린 거야,
          x는 H의 개념이니까 반드시 언제나 y라고 해야지”라는 방식은
          더 이상의 실속있는 논의를 이루어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제 느낌에는, 님의 발화 방식이
          바로 이 후자가 아닌가 라고 받아들여집니다…

          물론, 그게 아닌 거라면 결국 제 오해/오바일테니까 아주 다행이겠지만요.

          제 얘긴,
          정치노선의 문제를 젖혀놓고서,
          문장이나 말의 해석 문제에 관해 좁혀 말한다고 하더라도
          스탈린의 방식보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방식이 더 낫다는 거죠.

          이왕 비트겐슈타인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요…

          헤겔이든 들뢰즈든 간에
          심지어 맑스조차도(!),
          (이렇게 말하다가 다른 분들로부터 혼날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지적-정신적 “사다리”인 겁니다.
          쓰고나서는 걷어차버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특정한 틀에 갖히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됩니다.

          저의 경우는 이미 밝혔듯이
          오늘날에는 헤겔보다는 들뢰즈라는 입장이지만
          (즉, 철학적 테마로서는, “동일성”보다는 “차이”가 더 계몽적, 함축적이라는 쪽…),
          그렇다고 해서 들뢰즈의 틀을 좋아하거나 선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들뢰즈가 더 많은 깨우침을 주거나 시사하는 바가 더 많다는 거죠.
          분명히, 헤겔보다는요, 단, 제 경험에 있어서는요.
          (사실, 저는 한국의 “들뢰즈주의자”들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무튼, 우리가 “자본주의” 현실을 논할 때에
          들뢰즈가 아니라
          들뢰즈 할애비가 와서 쌩구라를 까대더라도
          결국 그건 다 헛발질이 되겠지요.

          그래서인지, 당연히 잉여가치나 착취나 축적을 먼저 논해야 할 대목에서
          리비도나 스키조나 혹은 “매끄러운/움푹 패인” “접힌/펼쳐진”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리고 싶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암튼, 자본주의를 논할 때는
          맑스나 레닌을 저버리고 딴 생각 하기란
          제 지적 양심으로 볼 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맑스의 개념적/이론적 어휘 체계가
          헤겔과 연관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요.

          맑스는 지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기,
          그러니까, 1830년대 후반에 “독일”의 대학생이었으니까,
          게다가 베를린대학의…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인 거겠지요.

          그렇지만, 예컨대, 소외, 노동력, 화폐 등에 대해서
          맑스 외에 예컨대 칼 폴라니와 같은 접근법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폴라니도 그 문제들을 자신의 중심적인 연구 주제로 삼았지만
          맑스보다는 더 간결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다룹니다.
          (즉, 헤겔 식의 어휘나 체계나 problematique은 아니라는 거죠.)

          폴라니 입장에서도 포스트-자본주의를 논할 수 있는 거고
          또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있다면
          그들과 함께 토론할 수 있고
          더 중요하게는, 함께 연대해서 싸워나갈 수 있는 거죠.

          그런가하면, 예컨대, 제국주의를 논할 때에도,
          레닌 말고 엔리크 두셀같은 라틴 계통 사상가들도 엄연히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두셀이 볼 때에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라는 게
          정작 라틴 아메리카의 토착적 피억압자 입장에서는
          포인트를 잘못 짚은 것일 수 있거든요.

          레닌이 계속해서 반제식민지 해방투쟁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레닌 사상 자체에 유럽중심주의가 일정하게 깃들어 있으니까
          두셀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두셀이 실제로 이렇게 말을 했는지는 모릅니다마는…)

          혹은, 맑스적인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이 아니라
          단지 “서발턴”의 개념만으로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이해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의 토론, 연대 역시 아주 바람직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또 예컨대, 자본주의에서 소위 관리노동의 이중성 문제를 생각할 때,
          베버나 슘페터 식의 접근도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구요.

          베버, 슘페터 등은
          당연히 맑스에 비해 기본적 한계가 아주 명백하기는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시사하고 함축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역사적 사회주의에서의 소외 문제는
          관료주의와 관련된 게 많았는데
          그걸 과거에 우리가 이해한 바의 맑스 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게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드러났으니까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이라든가
          파리 코뮌 방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또,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서로 경쟁하게 되는 상황에서는,
          사회주의적 방식의 혁신이라는 게 분명 필요할텐데
          이건 아무래도 슘페터의 접근을 조금은 참조해야 하거든요.

          생산 노동자들을 억압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서
          더 효율적이고 혁신적으로 생산 시스템을 돌릴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그 방법을 모색하고 택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누구를 본받자” 하는 식으로
          정신력만을 인민들에게 파쇼적으로 강요하는 것 말고요…)

          역사적 사회주의가 참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식의 발뺌은 유치한 얘들 핑계인 셈이지요.
          (그 숱한 소위 “국가자본주의론” 및 변종 이론들의 비겁함!)

          소련, 동구, 중국, 베트남 등이 자본주의로 회귀하게 된 데에는
          바로 그러한 혁신이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에서 불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니까요.

          맑스나 레닌을 교조주의적으로 받아들이던 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누구든지 “나는 교조주의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싶겠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적-정신적 독단에 빠지는 것을 늘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스탈린주의와 모택동주의의 결점과 한계는
          지적-정신적인 면에서 보자면
          “해석의 독점”을 체제/권력을 통해서 모든 이에게 정치적으로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맑스를 이해할 때에,
          헤겔이나 루카치나 코르쉬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알튀세나 발리바르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코헨, 뢰머, 엘스터 등의 소위 분석적 맑스주의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겁니다.
          또는, 들뢰즈나 푸코의 문제의식으로 풍부하게 보완할 수도 있는 거구요.
          (제 개인적 느낌에 의하면, 역시 그래도 영어권 애들이 가장 명료하고 담백하고 프랙티컬합니다.)

          또, 지젝 등이 지적한대로,
          맑스/레닌 시대의 한계로 인해서
          맑스/레닌이 보지 못한 것, 놓친 것
          혹은 보긴 했지만 이론적 무의식에 가둬버린 것 등등을
          우리는 맑스/레닌 텍스트 안에서 읽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인생은 짧고 취향은 독특한 거니까,
          모든 걸 다 알려고 들 필요는 없겠지요.
          또, 중요한 것은 세계의 해석보다는 세계의 변혁이니까,
          또, 공부를 다 하고나서야만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세상의 전부다 라는 식이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해서는…쩝!

          어떤 특정한 입장이나 전망을 택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의 해석 체계에 갖힌 채
          다른 것을 보지/받아들이지 못하는 관성에 젖어 있다면,
          혹은 해석의 문제에서 배타적으로 발언/발상해나간다면,
          그다지 생산적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떤 해석이나 번역은 명백히 틀린 것일 수 있습니다.
          모든 게 다 통한다는 얘기는 아니지요.

          제 얘기는, 자기 자신의 몸/마음/생각의 중심을 분명히 하되
          그물을 넓게 친 채 탄력적, 개방적으로 세상을 보고
          유연하게 움직이고 실천해나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자기 해석이나 발상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차이!)을
          언제나 그리고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빨아들여서
          자기의 뼈와 피와 살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우리는 더 구체적이고 풍부하고 윤택하게 세상을 볼/살아갈 수 있습니다.

          암튼, 제 긴 댓글은 그 의도가 님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나 비판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노파심에서…

          그리고, 소련이 망한 직후에 말 그대로 엄청난 “멘붕”을 겪고 방황해본 적이 있는 사람의,
          그렇지만, 여전히 “그래도 역시 맑스…”이라는 입장에 서 있는, 블로그의 친구가 건네는
          일종의 방법론적 권유나 태도에 관한 제안입니다.

          저는 갠적으로 늘,
          “지적, 실천적 pivoting이야”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간에, 지금, 저의 이 “pass”를 잘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계속 공부해나가 님의 모습은 늘 경이롭게 주시하고 있습니다.
          “간바리마쇼!”

        2. 긴 글 고맙습니다. sunanugi님이 우려하시는 부분이 특별히 오해는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지금까지 계속 공부만 하신 분인데 그 분이 예전에 누군가를 굉장히 비판하셨어요, 그런데 얼마전에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그 땐 내가 잘 몰라서 그랬다면서 쑥스럽게 웃으시더라구요. 그 분처럼 공부를 많이 한 분이 드문데 제가 오죽하겠어요. 다만 저는 님처럼 포괄적인 얘길 하려고 했던게 아니에요. 그런 얘길 저는 할 수도 없고 사실 관심도 없어요.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건 spezifisch는 speziell과도 다른 말이고 besonder와도 다르다는 겁니다. 특히 맑스의 용법에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한 번에 많은 것을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저처럼 늦은 나이에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에게는 매우 해롭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판단은 언제나 제3자들이 하는 것이니까요.

        3. 그리고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한 말에 틀린 부분만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긴 글은 서로 대화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한마디 툭 던지고 가는게 대화에 도움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느낌으로는 님은 저와 대화를 원하시는게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학생을 대하는 선생의 태도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학생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르는게 있으면 물어볼 사람도 있고 heesang님에게 물어봐도 되요. 앞으로는 이런 대화 아닌 대화가 없길 바라면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솔직한 제 느낌으로는 님에게 훈계를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훈계 뒤에는 일종의 비웃음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지만 틀린 부분만 지적해주시면 합니다. 대화의 주제를 좁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 외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따로 하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족이지만 제 주위에는 님처럼 멘붕을 겪었어도 여전히 맑스를 고집하는 사람들 천지지만 제게 별로 도움이 안 되고 있습니다. 왜 멘붕입니까. 소련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날벼락맞은 거면서.

        4. 원체 긴 글이어서 읽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몇번을 읽어봤습니다. 한가지 지적하자면 Einzelheit는 단일성이 아니라는겁니다. 단일하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Einheit입니다. 이 말은 보통 통일이라고 옮기지만 사실상 통일이란 분리되어 있던 것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뜻으로서 Vereinigung이 더 적합한 단어입니다. Einheit Deutschlands라고 하면 하나의 독일이라는 뜻이지 독일 통일이 아닙니다. 독일 통일은 Deutsche Vereinigung이라고 합니다. 개별적(einzeln)과 개별화된(vereinzelt)가 다른 것처럼, Einzelheit와 Einheit는 엄연히 다른 말입니다. 저는 님이 쓴 글을 읽으면 어 이게 틀렸는데, 왜 이렇게 생각하지 이런 의문이 들어서 몇자 남긴 겁니다. 님이 저를 판단하는 것처럼 저도 님을 판단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은 문제인 겁니다.

        5. 노파심에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저는 님을 제 틀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라 님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적하는 겁니다. 제 지적이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대화는 거부합니다. 대화는 동등한 자들끼리 하는 것이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가르쳐주고 열등한 자는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님의 대화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배움은 대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으니까요. 교육은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에게나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맑스에게 끌리고 어떤 사람은 들뢰즈에게 끌리고 어떤 사람은 버틀러에게 끌리는지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삶에 있는 것입니다.

        6. 더 밑에 댓글을 달 수 없어 여기에 답니다.

          1. 우선, 팩트에 관한 문제.

          저는 speziell과 spezifisch의 뜻이 같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두 단어가 같은 어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general : special[specific] = universal : particular”라는
          어원에 기반한 유추 틀 안에서 한 항목으로 묶어서 설명한 겁니다.

          또, 그 윗 줄에서
          “special[specific]”(영)과 “speziell[spezifisch]”(독)이 서로 상응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special과 speziell이
          그리고 specific과 spezifisch이 상응한다는 얘기지요.

          영어 special과 specific이 다른 만큼
          독어 speziell고 spezifisch도 다르겠지요.

          2. 한 단어의 의미나 해석, 번역에 관한 문제들은
          어느 누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거나 고집부려서는 안된다는 게
          일관된 제 입장입니다.

          또, 그것들은 사전이나 한두 사람의 지식 및 용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전의 규정이란
          실제 사용되고 있는 풍부한 의미와 사례를
          다소간에 모범적인 차원에서 정리해놓은 것에 불과하니까요.
          또, 말을 쓸 때, 사전대로 쓰라는 법도 없는 거구요.

          한편, 한두 사람의 얄팍한 지식이나
          아주 특정하고 제한된 용례가
          (이것이 헤겔의 것이든 맑스의 것이든 간에)

          그 단어의 의미 영역 전체를 확정하는 것도 아니며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래서, 텍스트 안의 구체적 문맥/상황에서,
          다양한 쓰임새를 살펴야한다는 얘기를 거듭해서 한 겁니다.

          3. 거대 담론에 관한 문제는
          사적 유물론이나 맑스 경제학이야말로 일종의 거대 담론이라는 얘기만을 하겠습니다.

          4. 님이 “선생질”로 받아들인 부분은

          님의 제한된 지식이나 인식 틀이 갖는 위험성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사상사적, 역사적 사례를 거론한 결과일 따름입니다.

          게다가, 댓글이 길어진 또 다른 이유는

          제가 확인해 두고 있는 한에서의
          님의 과거 관행으로 봐서는,

          혹, 제 글의 취지를 오해해서
          무작정 반발하며 고집부리지는 않을까 라는 제 우려 때문에,

          나름대로 간곡하고 호의적으로 설득하고자 했기 때문인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또 이렇게 나오시는군요.

          물론, 제 담론적/수사적 설득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인 거이고
          제 의도가 실패해버린 결과인 거겠지만요.
          (인생은 늘 이렇지요…쩝)

          5. 저는 선생 흉내를 내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굳이 “친구”라는 말을 쓴 거구요.

          또, 저는 수업료를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강의를 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하지만, 님이 제 글에서 그렇게 느꼈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반발할 정도인지는
          다른 분들이 판단해주시겠지요.

          6. 특정한 토픽에 관해서 하나의 댓글이 긴 거나

          한두 단어의 의미메 병적으로 집착하는 바의,
          상대적으로 짧아보이는 댓글들이
          특정 블로그를 집요하게 도배질하는 거나

          큰 차이는 없을 겁니다.

          아마, 더 무섭고 지겨운 것은 후자겠지요.

          그래서, 저는 평소에 님의 “짧은” 댓글 시리즈를 거의 안읽는 편이랍니다.
          “아항, 재미없는 연속극이 또 시작되었구나…” 하며 휙 지나가버리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님은 제 긴 댓글을 읽어주셨습니다.

          이 점에서도 저는 님께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7. 어쨌든 이 문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피차 간에 서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더 이상의 대화는 감정 소모나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또 긴 댓글이군요.
          참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건투를 빕니다.

        7. 사실 댓글이 길다는 이유로 문제삼은 것은 아닙니다. 불필요한 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님에게 완곡하게 표현한 것 뿐이었습니다. 물론 님은 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그러셨겠죠. 하지만 제가 님이 틀렸다고 계속 지적하는데 제가 님의 충고를 받아들일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착각입니다. 아마 님도 제가 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거라는걸 알고 계셨을겁니다. 그래서 저도 님이 저와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님을 높이 평가하는 분들은 많을테니 그 분들에게는 님의 조언이 필요하겠지만 제겐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님의 독일어 실력은 형편없습니다.

  3. 간만에 뭔가 내용있는(?) 덧글 남깁니다. :)

    일단 저는 ‘속’이 아니라 ‘류’라는 데 sunanugi님 의견에 동의하고요…

    그보다 제가 흥미 있는 것은 (heesang님은 생략했지만 sunanugi님께서 덧글에서 상기시켜주신) Skarbek입니다. 일단 ‘보편-특수-개별(적 분업)’의 문제는… 제 생각엔 Hegel과의 연관을 따질 것도 없이 {자본론}에서 마르크스의 대체적인 용법에 부합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게 ‘단순히’ Skarbek에게서 따온 것일 뿐인 것은 아닌듯하고… 그러니까, 자기 생각이랑 맞으니까 따왔다는 건데요, 쓰고보니 당연한 얘기네요 ㅋㅋ

    제가 Skarbek이라는 이름에 주목을 하는 것은, 그가 {1844년 경철수고}에도 나오는 경제학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경철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아직 경제학 공부가 덜 된 관계로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서 손에 잡히는 경제학 저자들을 마구잡이로 참조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리카도도 접하기 전이니까요.

    그렇게 마구잡이로 접한 저자들을 마르크스는 이후 자신의 경제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배제합니다. 물론 좀 더 이해가 깊어진 저자도 있지만 말이죠. Skarbek의 경우엔 어떻게 보더라도, 즉 당대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거의 ‘듣보잡’이었을텐데, 무려 {자본론}에서까지 그를 인용한다는 것은 어쨌든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이지요.

    스카르벡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도 좀 어리석네요. 하지만 이런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에 대해 조금 뒷조사를 해봤는데, 이분, 나름 재밌는 구석이 있네요.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 쇼팽과의 인연 때문인데요.. 쇼팽의 아버지가 이분의 가정교사였고, 쇼팽은 이분의 대자(godson)이라네요ㅋㅋ

    일단 이렇게 저의 ‘마구잡이’ 판단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 덜고 얘길 좀 더 하면… heesang님께서 처음에 인용하신 대목에 붙은 각주에 나오는 스카르벡의 구절은 {1861-63년 수고}엔 좀 더 길게 인용됩니다. 여길 참조하세요: 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61/economic/ch33.htm

    에… 사실은 이 얘길 할라고 지금까지 뜸을 들인건데…;;;; 암튼 위 링크된 페이지의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좀 더 긴 구절을 보시면, ‘보편-특수-개별(적 분업)’의 구별의 의미가 조금은 더 명확해질 것 같습니다. (애초의 ‘포부’와는 달리, 쓰고보니 별 ‘내용’은 없네요ㅋ)

  4. EM님이 언급한 Skarbek 인용문은 찾아보니

    신MEGA로는 3.1의 291쪽에
    MEW로는 43권 313쪽에 있습니다.

    역시, EM님 내공이 깊군요…ㅎㅎ

    맑스가 인용한 Skarbek의 저서는 원래 불어본이네요.

    그래서, 초고 그대로 출간한 신MEGA판의 인용문은 불어고
    MEW판의 인용문은 그것을 번역한 독일어…

    Skarbek은 폴란드 사람이고 정말 쇼팽과 연관이 있군요.
    http://en.wikipedia.org/wiki/Fryderyk_Skarbek

    아,그리고 듣보잡으로 치자면
    “잉여가치학설사”의 많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물론이고
    “반뒤링론”에서의 뒤링도 오늘날은 듣보잡이 되겠지요.

    그런가 하면, 초기 맑스 사상 형성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듣보잡이 여럿 있는데
    예컨대, Dilke와 Schultz가 그러하지요.

    http://en.wikipedia.org/wiki/Dilke

    http://de.wikipedia.org/wiki/Friedrich_Wilhelm_Schulz

    “그룬트리세”에서 익명의 팜플렛으로부터 인용한
    “부는 가처분 시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MEW 42:311)라는 유명한 문장은 Dilke의 것이고

    “정신적 생산”과 “물질적 생산” 등을 포함해서 사적 유물론의 기본 범주 중에서 상당수는
    맑스가 슐츠의 저작 “생산의 운동”으로부터 가져와서 비판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니까요.

    슐츠는 “짠돌이” 맑스가 공공연하게 칭찬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지요.
    (MEW 23:392의 주 88 참조)

    1. 에고 무슨 말씀을요;; 그런데 딜키는 도통 기억이 안 나네요..ㅎㅎ 함 찾아봐야겠네용 ^^;;

      그나저나… 드디어 스팸분류의 비밀을 찾아냈습니다. 앞으론 다신, 절대, 쓰신 덧글이 스팸으로 분류되는 일 없을 겁니다;;;;

  5. 이 부분을 원문에서 찾아보았습니다.

    Hält man nur die Arbeit selbst im Auge, so kann man die Trennung der gesellschaftlichen Produktion in ihre großen Gattungen, wie Agrikultur, Industrie u. s. w., als Theilung der Arbeit im Allgemeinen, die Sonderung dieser Produktionsgattungen in Arten und Unterarten als Theilung der Arbeit im Besondern, und die Theilung der Arbeit innerhalb einer Werkstatt als Theilung der Arbeit im Einzelnen bezeichnen50).
    만약 우리가 노동 그 자체만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적 생산을 농업, 공업 등처럼 유로 분할하는 것을 노동의 보편적 분업으로, 이러한 생산의 유를 종과 아종으로 분리하는 것을 노동의 특수한 분업으로, 한 작업 내부의 노동의 분업을 노동의 개별적 분업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제 생각에는 heesang님 말씀대로 이 문장은 생물학적 체계를 염두에 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노동의 분할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봤을 때 유로 분할하는 것이 보편, 유 내부의 분리를 특수, 한 작업장 내부의 분할이 개별에 해당하고 있습니다. 각각 Gattung -- Art -- Familie에 해당합니다. 헤겔의 보편 -- 특수 -- 개별의 범주는 한 개인 내부에서 교차하는 것이고, 자본에서는 맑스가 이 범주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맑스가 초기에는 헤겔의 범주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헤겔과 맑스 모두 특수성의 해체에 따른 총체적 개인의 탄생을 역사의 목적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한 개인은 어떤 특수성의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spezifisch는 sich aus den Eigenschaften einer Sache oder Person ergebend 한 사물이나 개인에게 속하는 고유함을 의미합니다. 특수한것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eigentümlich에 가깝습니다.

    1. 다시 찾아보니 제가 뭔가 잘못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이런걸 잘 몰라요. 생물학적 체계는 Family{과(科)} →Genus{속(屬)} → Species{종(種)}이군요. 어쨌든 spezifisch는 영어의 specific에 해당하고 generic(속에 특유한)의 반대어로, genus(속)와 구별되는「species(종)에 독특한」을 의미한다고 나와있습니다. 특수한 거 아닙니다. 오히려 같은 것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죠.

  6.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 명제에 관하여를 옮긴 김진성씨는 genos를 무리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초기 맑스의 정의와도 부합합니다. 맑스는 애초에 인간은 유적 동물, 가축떼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적으로 말하죠.) 주해 27번에서 “흔히 유로 번역되는 genos는 기본적으로 태어난 곳이나 태어난 것을 뜻한다. 비슷한 것의 떼란 뜻에서 무리로 옮겼다”고 쓰고 있습니다. 반면 eidos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서 “꼴”이라고 옮겼습니다. 사람과 소는 생긴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꼴이 다릅니다. 그래서 무리는 사람이나 소와 같이 같은 꼴을 가진 것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꼴들이 모여 동물이라는 무리를 이룹니다. 종차(differentia)는 꼴들이 갖는 차이성이라고 옮겼습니다. 예컨대 발 달림, 날개 달림, 물속에 삶, 두 발 달림은 꼴들이 갖는 차이성입니다. 그리고 본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eidos가 아니라 logos입니다. 사물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입니다.

  7. 제가 아직 14장을 읽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heesang님이 맨 처음에 인용하신 부분은 각주에 인용한 슈토르히와 스카르벡을 비판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 문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헤겔의 보편-특수-개별에 상응하는 자연발생적 존재의 변화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헤겔에 따르면 보편성은 순수한 것이고 단순한 것이고 자기자신과 동일한 것입니다. 보편성이 제일 먼저 주어집니다. 이 때 보편성은 A=A와 같은 것으로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입니다. 넌 누구냐고 물었을 때 한참 생각하다가 나는 나다 이렇게 대답하면 이 단계입니다. 이로부터 보편성의 부정으로서 규성된 특수성이 등장합니다. 넌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버지다, 또는 나는 노동자다라고 대답하면 이 단계입니다. 개별성은 특수성의 부정으로서 자기자신으로 회귀한 보편성이지만 이 때의 보편성은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구체적, 총체적 개인입니다. 맑스가 초기에는 거의 이런 식의 논의를 전개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자기 실행은 물질적 생활과 일치하게 되는데, 이러한 일치는 개인들의 총체적 개인들로의 발전 및 모든 자연 성장성의 탈각에 조응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1. 자꾸 댓글이 길어져서 정말 민망하군요. 제가 원래 성격이 어수선한 사람이라. 다시 읽어보니 이것도 아닌것 같아요. 그렇다면 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그대로 사용한 스카르벡의 분류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리스톨레스의 삼단논법은 이런 것이죠. 동물(보편자) -- 사람(특수자) -- 소크라테스(개별자) 사람은 동물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동물이다. 끝. heesang님이 맨 처음 인용하신 문장은 지금의 산업분류체계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분류방식인 것 같아요. 모든 점에서 이런 식으로 분류하죠. 백화점에 가면 화장품과 식품 코너는 분리되어 있죠. 화장품은 Gattung이죠. 이 화장품이 기초화장품, 색조화장품 등의 Art로 분류되죠. 이 화장품 종류는 스킨로션, 립스틱과 같은 개별적 화장품들로 구성되어 있죠.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구분하지 말라는 말 아닐까요?

  8. 엄청난 댓글들인데, 중복되는 부분도 있어서 제가 여기에 종합해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okcom, 정말 어질어질하죠? 게다가 변증법을 너무 남용하면 모순이란 모순은 죄다 지양하려 들고, 모든 것을 총체의 계기들로 살피려는 못된 버릇도 생기구요. 부분적이라 생각되는 설명은 애초에 거들떠보지 않는 거만함까지 겸비하게 됩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별 수 없죠 ㅋ

    @ sunanugi,

    1) 류, 종에 관한 내용은 정말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 무식이 탄로나긴 했지만 뭔가를 제대로 배운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이제 와서 제가 쓴 글의 내용을 바꾸기는 뭐하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sunanugi님의 댓글을 참조해 주세요.

    2) spezifisch의 경우 저는 ‘고유한’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어 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위에 인용하신 두 번째 문장을 찾아보았는데, 문장의 앞부분에는 besonder를 사용했네요. 이 문장에서는 besonder는 특수한으로 spezifish는 고유한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요.
    Ihnen gegenüber erscheint die kapitalistische Kooperation nicht als eine besondre historische Form der Kooperation, sondern die Kooperation selbst als eine dem kapitalistischen Produktionsprozeß eigentümliche und ihn spezifisch unterscheidende historische Form.

    @ sunanugi & EM & daydream

    (daydream님도 지적하셨지만) 스카르벡으로부터의 인용은 각주에 넣고 본문에 비슷한 내용을 다시 기술한 것에 주목했습니다. 의미를 비틀려했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스카르벡이 보편-특수-일반을 형식논리학적 의미에서 사용했다고 가정할 때, 마르크스가 형식논리학적 용법에 동의했다면 본문에 같은 내용을 넣었을 것 같진 않아요.

    헤겔과 관련해서는, 마르크스가 가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는데도 불구하고 헤겔식 용어법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구절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멋을 내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은연 중에 헤겔 식의 사고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겠죠. 저는 후자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특히 대상의 총체성과 계기들의 내적 연관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헤겔과 마르크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정 수준의 탐구는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신비적인 외피는 제거해야 겠지만…

    daydream님이 언급하신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의 의미와 관련해서 헤겔은 재밌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법철학 #7에 나오는데요. “우정이나 사랑의 경우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heesang -- 보편] 기꺼이 상대방과의 관게 속에서 스스로를 제한하지만 [heesang -- 특수], 우리는 이러한 제한 속에서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알고 있다 [heesang -- 개별]. 규정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인간은 스스로 규정되어 있다고는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타자를 타자로 바라봄으로써 여기서 비로소 자기감정을 누리는 것이다.결국 자유란 규정받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규정받는 것도 아닌, 바로 이 둘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1. spezifisch에 대한 부분은 heesang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제 4절 매뉴팩쳐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 마지막 문장입니다.

      Während die Teilung der Arbeit im Ganzen einer Gesellschaft, ob vermittelt oder unvermittelt durch den Warenaustausch, den verschiedenartigsten ökonomischen Gesellschaftsformationen angehört, ist die manufakturmäßige Teilung der Arbeit eine ganz spezifische Schöpfung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사회의 일반적 노동분업은, 상품교환에 의해 매개되든 아니든, 완전히 종류가 다른 경제적 사회구성체에도 존재하지만, 매뉴팩쳐적인 노동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완전히 고유한 창조물이다.

      이 문장에서 맑스는 노동분업이 종류가 다른 사회구성체들에 공통된 것이지만, 매뉴팩쳐적인 노동분업은 다른 모든 노동분업들과 구별되는 자본주의만의 고유한 생산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장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heesang님이나 EM님이 좀 더 세심하게 다루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일단 비봉판을 읽을 때 내용의 이해에 대해서 큰 무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맑스가 사용한 단어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 본문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소한 지적을 하자면 비봉판 475쪽 주해 26번에서 엥겔스가 인류의 원시상태에 관한 그 뒤의 매우 근본적인 연구에 의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본문에 있는 맑스의 주장을 뒤집어버립니다.

      맑스: 한 가족 안에서 그리고 더욱 발전해 한 종족 안에서 성과 연령의 차이로 말미암아[즉, 순전히 생리적인 토대 위에서] 자연발생적인 분업이 나타나는데..

      엥겔스: 즉, 본래 가족이 종족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종족이 혈연관계에 입각한 인간집단의 본원적인 자연발생적 형태였으며, 그리하여 종족의 결속이 느슨해지기 시작한 이후에 비로소 여러 가지 가족형태가 발전했다.

      엥겔스를 믿을 수 없어서 본문을 찾아봤더니 종족에 해당하는 말이 Stamm입니다. Stamm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Wurzel(뿌리)라는 뜻이고 „Nachkomme einer Familie“ 한 가족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영어로는 tribe인데 이 말은 라틴어 트리뷰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로마가 건국할 당시 부족이 3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트리뷰스인데 이 트리뷰스가 나중에는 35개의 행정구역이라는 의미로 바뀝니다. 그런데 그 전에 그리스에는 로마인들이 겐스라고 부르는 게노스가 있었습니다. 이 게노스는 귀족들의 집단입니다. 아테네에서 사람들은 게노스를 전복시키고 데모스로 대체했는데 이 말은 민중, 또는 행정구역을 뜻합니다. 그런데 겐스, 또는 게노스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한 게노스의 구성원들을 그리스어로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같은 젖을 먹고 자란”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핵심은 혈통입니다. 이 말을 라틴어 파밀리아, 그리스어 오이코스와 비교해 봅시다. 파밀리아의 진정한 의미는 재산입니다. 오이코스는 그냥 가족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게노스에서 오이코스가 파생된 것 같습니다. 종족에서 가족으로 발전했다는 엥겔스의 설명이 맞는것인가? 아닙니다. 로마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푸블리우스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스키피오는 이 사람의 성입니다. 진짜 중요한 이름은 코르넬리우스입니다. 그런데 이 코르넬리우스느 코르넬리우스 겐스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이름입니다. 그럼 겐스가 종족이고 여기서 가족이 나온 것인가, 엥겔스의 설명이 맞는 것인가? 아닙니다. 원래 코르넬리우스는 같은 성을 가진 가족이었습니다. 이 가족이 분가하고 분가해서 큰 집단을 이루었는데 동생들이 형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어쩌고 해서 성을 따로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코르넬리우스는 동일한 조상을 가진 종족입니다. 나중에 여기서 무지한 세월이 흘러 발전된 것이 바로 부족 트리뷰스입니다. 그룬트리세의 “자본의 유통 과정`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형태들”에도 상세히 나오지만, 맑스는 고대사뿐만이 아니라 고대철학, 문학 등에 통달해 있었기 때문에 맑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2. 오늘 “그룬트리세”를 읽다가 “종차”가 나오는 대목을 만났네요.

      In der bürgerlichen Ökonomie (wie in jeder) sind sie in spezifischen Unterschieden und in spezifischen Einheiten gesetzt. Es güt, eben diese differentia specifica zu verstehn.
      (MEW 42:547)

      부르주아 경제에서(모든 경제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특유한 차이들과 특유한 통일들 속에서 정립되어 있다. 바로 이 종차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권, 312쪽, 김호균역,2007)

      1. 김호균 교수는 spezifisch를 특유한이라고 옮겼군요. 특유한이나 고유한이나 같은 말이지만 특유한은 왠지 특이한(sonderbar)와 비슷한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저라면 이렇게 옮기지 않겠습니다. 물론 제 아집에 불과하지만. spezifisch를 찾으면 같은 말이 이렇게 나옵니다.

        arteigen, bezeichnend, charakteristisch, eigen, eigentümlich, signifikant, typisch, wesenseigen

        자본 3권 36장 자본주의 이전의 관계 비봉판 731쪽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전의 시대에 고리대가 취하는 특징적인 존재형태는 두 가지이다. 나는 ‘특징적’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사용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형태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 위에서도 다시 나타나지만, 오직 종속적인 형태일 뿐이며 이자낳는 자본의 성격을 결정하는 형태들은 이미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두 형태란, 첫째 낭비적인 귀족(주로 토지소유자)에 대한 고리대, 둘째 자기 자신의 노동조건을 가지고 있는 소생산자에 대한 고리대이다. 이 소생산자에는 수공업자도 포함되어 있지만 현저하고 독특하게 농민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이전의 조건들이 소규모의 자립적인 개별생산자들을 허용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농민계급이 그 대다수를 구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Die charakteristischen Formen jedoch, worin das Wucherkapital in den Vorzeiten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existiert, sind zweierlei. Ich sage charakteristische Formen. Dieselben Formen wiederholen sich auf Basis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 aber als bloß untergeordnete Formen. Sie sind hier nicht mehr die Formen, die den Charakter des zinstragenden Kapitals bestimmen. Diese beiden Formen sind: erstens, der Wucher durch Geldverleihen an verschwenderische Große, wesentlich Grundeigentümer; zweitens, Wucher durch Geldverleihen an den kleinen, im Besitz seiner eignen Arbeitsbedingungen befindlichen Produzenten, worin der Handwerker eingeschlossen ist, aber ganz spezifisch der Bauer, da überhaupt in vorkapitalistischen Zuständen, soweit sie kleine selbständige Einzelproduzenten zulassen, die Bauernklasse deren große Majorität bilden muß.

        spezifisch를 고유한, 독특한, 특유한 아무튼 뭐라고 옮기든 특수한, 특이한 이렇게 하면 틀린 겁니다.

        1. 738쪽을 보면 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나 고리대의 진정한 주된 독특한 활동기반은 역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있다.”

          Die Funktion des Geldes als Zahlungsmittel ist jedoch das eigentliche, große und eigentümliche Terrain des Wuchers.

          “이와 같이 고리대는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로부터 발생하여 화폐의 이 기능[고리대의 가장 독특한 활동기반]을 확대하게 된다.”

          Hier schießt der Wucher aus dem Geld als Zahlungsmittel empor und erweitert diese Funktion des Geldes, sein eigenstes Terrain.

          맑스가 charakteristisch, ganz spezifisch, eigentümlich 이런 표현을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 앞으로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_-V

  9.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알튀세의 “맑스를 위하여”를 뒤적거리다가 알튀세가 “모순과 중층결정 연구를 위한 노트”에서 자본 2판 후기를 인용한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자본 서문은 저도 원문과 대조하면서 읽어보려고 했던 것인데 “맑스를 위하여”에 번역된 글이 비봉판과 조금 달라서 소개합니다.

    Meine dialektische Methode ist der Grundlage nach von der Hegelschen nicht nur verschieden, sondern ihr direktes Gegenteil.
    그 원리에 있어서 나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그 정반대이다.

    Für Hegel ist der Denkprozeß, den er sogar unter dem Namen Idee in ein selbständiges Subjekt verwandelt, der Demiurg des wirklichen, das nur seine äußere Erscheinung bildet.
    헤겔에 있어서, 그의 관념이란 이름아래 자율적 주체로까지 변형시켰던, 사고의 과정은 실재의 창조주이다.

    Bei mir ist umgekehrt das Ideelle nichts andres als das im Menschenkopf umgesetzte und übersetzte Materielle.
    나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두뇌 속에 전치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에 다름 아니다.

    Die mystifizierende Seite der Hegelschen Dialektik habe ich vor beinah 30 Jahren, zu einer Zeit kritisiert, wo sie noch Tagesmode war.
    나는 이미 30년 전에 그것이 유행할 때 헤겔 변증법의 신비적 측면을 비판했다.

    [중략]

    Ich bekannte mich daher offen als Schüler jenes großen Denkers und kokettierte sogar hier und da im Kapitel über die Werttheorie mit der ihm eigentümlichen Ausdrucksweise.
    나는 따라서 공개적으로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임을 선언했으며, 가치이론에 대한 장의 여기 저기에서 그의 고유한 표현방식과 더불어 유희를 벌였다.

    Die Mystifikation, welche die Dialektik in Hegels Händen erleidet, verhindert in keiner Weise, daß er ihre allgemeinen Bewegungsformen zuerst in umfassender und bewußter Weise dargestellt hat.
    헤겔의 손에서 변증법이 겪었던 신비화는 결코 어떠한 방식으로도, 헤겔이 변증법의 보편적 운동형태들을 폭넓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Sie steht bei ihm auf dem Kopf.
    헤겔에 있어서 변증법은 머리가 밑에 있다.

    Man muß sie umstülpen, um den rationellen Kern in der mystischen Hülle zu entdecken.
    신비적 외피 속에서 합리적 핵심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복해야만 한다.

    In ihrer mystifizierten Form ward die Dialektik deutsche Mode, weil sie das Bestehende zu verklären schien.
    그 신비화된 형태에 있어서 변증법은 독일적 유행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여를 변모시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In ihrer rationellen Gestalt ist sie dem Bürgertum und seinen doktrinären Wortführern ein Ärgernis und ein Greuel, weil sie in dem positiven Verständnis des Bestehenden zugleich auch das Verständnis seiner Negation, seines notwendigen Untergangs einschließt, jede gewordne Form im Flusse der Bewegung, also auch nach ihrer vergänglichen Seite auffaßt, sich durch nichts imponieren läßt, ihrem Wesen nach kritisch und revolutionär ist.
    그 합리적 형상에 있어서 변증법은 부르주아들에게 스캔들이자 경악의 대상이었다. 변증법은 소여에 대한 앎 속에 소여에 대한 부정과 그 필연적 파괴에 대한 앎을 동시에 포함시키므로, 모든 무르익은 형태를 운동의 진행 속에서 따라서 또한 그 일시적 측면 하에서 파악하므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속아넘어가지 않고, 그 본질에 있어서 비판적이며 혁명적이다.

    London, 24. Januar 1873

    “핵심과 과육과 씨앗의 오랜 역사에서 재미있는 변이가 생긴다. 여기에서 핵심은 씨앗을 내포하는 껍질의 역할을 한다. 핵심은 씨앗의 외부에 있고, 씨앗은 핵심의 내부에 있다. 씨앗(새로운 원리)은 더 이상 자기에게 부합하지 않는 과거의 핵심을 파괴시킨다. (그것은 과거의 씨앗의 핵심이었다)” A. pour marx

  10. daydream님, 경고입니다. 이유는 본인이 아실 거입니다.

    논쟁이 격해질 수도 있고, 따라서 욕도 할 수 있고 서로 비꼴 수도 있지만, 재미 없으면 모두 쫓아낼 거임. (^.~)

      1. 재미없는 덧글 쓰셨잖아요. 삭제된 것 말입니다. 이쯤하시고,
        다른 재밌는 얘기로 넘어갑시다 :)

        1. 이번이 두번째 경고군요. 저는 아마도 올해를 못넘기고 네모내져서 차가운 창고로 쫓겨날거에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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