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전제와 아나키의 (외적) 이중성

우리는 앞에서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 전제이므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 안의 분업이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을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거꾸로 매뉴팩쳐 안의 분업은 사회적 분업에 반작용해서 그것을 발전시키며 증가시킨다. – 자본론 1권 14장, 477; MEW 23; 374. (128) 보편적 분업, 특수한 분업, 개별적 분업 참조.

마르크스는 작업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을 서로 대조하여 분석한 후, 상호연관의 수준을 넘어 이들을 아예 자본주의적 생산이라는 총체 의 두 계기로 파악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분업에서의 무정부상태[heesang – 아나키]와 매뉴팩쳐적 분업에서의 독재[heesang – 전제]가 서로 다른 것의 조건으로 되고 있[다]. – 482; 377

1.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의 원문에는 ‘지배하는’이 없다. 직역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회에서는 (in der Gesellschaft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이지만 좀 어색하긴하다. 길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라고 풀어서 써 놓았다.

2. Anarchismus혹은 anarchism을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것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선은 무정부상태라고 하면 누구나 혼란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아나키스트들이 사회적 질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은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는데,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질서다. 여기에 더해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권력의 철폐라는 부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합, 상호부조를 강조한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연합주의나 그냥 아나키즘을 선호한다고. 나도 무정부상태 혹은 길판의 무정부성 대신 ‘아나키’를 쓰기로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아나키는 상호부조와 호혜의 아나키가 아니라 살벌한 경쟁과 이윤추구로 대표되는 아나키다. 그래도 등가교환이라는 질서에 따른 아나키므로 무정부상태는 아님. 여담이지만 얼마전에 자서전 읽었는데 크로포트킨 정말 매력적이다.

3. ‘독재’가 아니라 ‘전제’인 이유는 (117)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참조. 지휘 기능은 협업 일반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지휘가 협업에 반작용하여 가능한 많은 잉여가치를 쥐어짜내는 역할을 한다. 지휘 그 자체는 전제적일 필요가 없지만, 자본주의적 지휘는 전제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4. ‘서로 다른 것의 전제가 되고 있다’의 원문은 ‘einander … bedingen’. 길판에는 ‘서로를 제약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자본주의의 아나키는 경쟁의 아나키다.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단가를 끊임없이 낮추어야한다. 심하게 얘기하면 ‘너 죽고 나 살자’의 아나키. 생산단가를 낮추려면 노동일을 늘리거나 (절대적 잉여가치), 노동생산성을 높이거나 (상대적 잉여가치), 노동강도를 높여야 한다 (절대적 잉여가치). 자본가가 노동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의 뜻대로 생산유기체를 작동시킬 수 있을때만 가능한 방식들이다. 결국 전제적 통제 없이 아나키는 불가능하며, 아나키가 없다면 굳이 전제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

5. 다시 한번 이중성이다.

[가치 vs. 사용가치]. [추상노동 vs. 구체노동]. [상품관계 vs. 화폐]. [노동력 vs. 인간]. [가치증식과정 vs. 노동과정]. [자본 vs. 기계].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 vs. 정치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자본가의 전제적 지휘 vs. 협업에 필요한 지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관계 vs. 초역사적이고 영속적인 존재]. 그리고 [작업장에서의 전제적 통제 vs. 아나키]

전자가 본질이고, 후자가 존재양식이다. 전자는 후자를 통해 후자 속에만 존재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은폐한다. 전자는 보통 관계고, 후자는 보통 존재다. 전자를 잊고 후자에 집중하면 물신주의로 빠지게 된다.

이중성은 동일한 존재의 이중성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아예 별도의 존재로 쪼개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상품이 가치이면서 사용가치라는 내적 모순은, 상품과 화폐의 외적 대립으로 지양된다. 마르크스가 말한대로, “모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이 운동할 수 있는 형태를 제공”(133)하는 경우다. 전제적 통제와 아나키 사이의 외적 대립도 비슷한 경우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불평등한 계급관계에 입각한 생산이며 동시에 평등한 상품관계에 입각한 생산, 곧 계급관계의 상품형태에 입각한 생산이다. 불평등하면서 평등한, 불평등이 평등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모순적인 생산방식이다. 이 내적 모순은 전제적 통제(=불평등한 계급관계)와 아나키(평등한 상품형태)의 외적대립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모순은 운동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얻었다.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작업장 안의 분업, 전제적으로 통제되는 이 분업에는 자본주의의 도장이 찍혀 있다:

전체사회 안의 분업은, 상품교환에 의해 매개되든 아니든,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존재할 수 있지만, 매뉴팩쳐에서 수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작업장 안의 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혀 독특한 창조물이다. – 485; 380

이후 마르크스는 매뉴팩쳐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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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130) 전제와 아나키의 (외적) 이중성

  1. Despotie가 독재가 아니라 전제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맑스와 그 이전의 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독재는 불명예스러운 말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독재는 지명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고 항상 “그는 독재관으로 지명되었다” 이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면 Despotie는 어원이 Herr(주인)입니다.

    Wenn die Anarchie der gesellschaftlichen und die Despotie der manufakturmäßigen Arbeitsteilung einander in der Gesellschaft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bedingen, bieten dagegen frühere Gesellschaftsformen, worin die Besonderung der Gewerbe sich naturwüchsig entwickelt, dann kristallisiert und endlich gesetzlich befestigt hat, einerseits das Bild einer plan- und autoritätsmäßigen Organisation der gesellschaftlichen Arbeit, während sie anderseits die Teilung der Arbeit innerhalb der Werkstatt ganz ausschließen oder nur auf einem Zwergmaßstab oder nur sporadisch und zufällig entwickeln.(59)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사회에서는 사회 안의 노동분업의 무지배와 매뉴팩쳐 안의 노동분업의 전제정이 서로의 조건이 되는 반면, 직업의 분류가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한 뒤 결정화되어 종국에는 법적으로 굳어진 이전의 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노동이 계획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이라는 큰 그림을 요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작업장 내의 노동분업이 완전히 배제되거나 단지 왜소화된 상태로 또는 단지 분산적이고 우연적으로만 발전된다.

    저는 맑스가 이 부분에서 노동분업을 정체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 안의 노동분업은 무지배, 또는 무지배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회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산자들중에는 자기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생산자들도 있지만, 자본가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느냐는 그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맑스는 매뉴팩쳐를 국가 중의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질서와 전제정이 서로의 조건이 되는 사회는 종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로 이행한다는 말 아닐까요.. 물론 누가 그들을 지명하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가치법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며칠전부터 감기에 걸려서 자본을 읽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참견이 하고싶어서. -_-;;;

    1. 아. 얼른 나으세요! 노동분업을 정체에 비유해서 설명했다는 지적이 인상적이네요. 추후에 기계제 대공업에 관한 장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하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1. 저도 빨리 나았으면 좋겠지만 감기는 일주일은 간다고 하네요. 이젠 감기에 걸려도 검색을 하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어요.

        오늘은 아나키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요. 위키에 이렇게 나와 있네요.

        Die Dichter Homer (8. Jahrhundert v. Chr.) und Herodot (490 bis etwa 420/25 v. Chr.) nennen Anarchia eine Gruppe Menschen oder Soldaten „ohne Anführer“. Bei Xenophon (um 580 bis 480 v. Chr.) wird der Begriff erstmals für Herrscherlosigkeit verwendet: die „Anarchia“ ist ein Zeitraum ohne obersten Staatsbeamten, den Archon.[2] Euripides (480-407 v. Chr.) bezeichnet damit Seeleute ohne Leiter. Aristoteles (384 bis 322 v. Chr.) beschrieb Anarchie als „Situation von Sklaven ohne Herren“.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양치기나 소몰이꾼이 없는 가축떼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아나키를 민주정이 타락한 형태로 보는 것 같아요.

        Niccolò Machiavelli nutzt den Begriff Anarchie zur Beschreibung von Degenerationserscheinungen der Demokratie. Machiavellis Staatstheorie unterscheidet in Anlehnung an Aristoteles zwischen drei positiven (Monarchie, Aristokratie und Demokratie) und drei negativen Herrschaftsformen (Tyrannei, Oligarchie und Anarchie).[2]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Despot입니다. 이 말은 지도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가부장 master of the house입니다. 집의 여주인을 déspoina라고 합니다.

        변증법을 모르면 맑스를 이해할 수 없지만, 맑스를 읽지 않으면 변증법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오죠.

        “이성을 현재라는 십자가 위에 드리워진 장미로 인식하여 여기서 현재를 기쁨으로 맞이한다는 이성적 통찰이야말로 철학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현실과의 화해의 길이다. 이때 그들에게서는 사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는 내적인 요구가 고개를 들면서 실체적인 것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주체적인 자유를 유지하는가 하면, 또한 주체적인 자유를 간직하면서도 결코 어떤 하나의 특수하거나 우연한 것 속에서가 아닌 절대적인 존재 속에 깃들어 있고자 하는 내적인 요구가 싹터나와야만 한다.”

        이 어려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철학을 세심하게 읽어야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것만 보자면 헤겔은 가족에서 시민사회로 시민사회에서 국가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현대적 구체제는, 그 현실적 주인공들이 죽고 없는 세계 질서의 희극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철저하고, 낡은 등장 인물을 무덤으로 보낼 때에 많은 국면들을 통과한다. [중략] 왜 역사의 진행이란 이러한가? 인류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와 즐겁게 이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 즐거운 역사적 사명을 독일의 정치적 세력들에게 요구한다.”

        빨리 감기가 나아서 다시 자본을 읽을 수 있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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