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경제학적 설명과 역사적 요소

수학자와 기계학자는 – 약간의 영국 경제학자들도 그런 말을 모방하고 있지만 – 도구는 단순한 기계이고, 기계는 복잡한 도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경제학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설명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그 설명에는 역사적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 자본론 1권 15장, 500; MEW 23, 492

어떤 설명이 경제학적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역사적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이상하게 들린다. (상품관계에 바탕을 둔) 경제학적 설명이 일반적으로 질적 차이를 사상하고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반면, 역사적 설명은 연속성보다는 질적 변화와 구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적 설명은 역사적 요소를 포함해야 하기는 커녕 오히려 배척해야 하는 것 같다.

이것은 경제를 고유한 논리를 갖는 하나의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에 따르면 경제적 논리는 수치화하는 논리, 효율화하는 논리, 개별성과 사익을 강조하는 논리이며, 경제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의 영역이 바로 경제다.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제의 영역과 비경제의 영역으로 분할되며, 경제적 논리는 비경제적 논리와 대립하고 경쟁한다. 여기서 공세를 취하는 것은 물론 경제다. 경제영역은 비경제영역을 하나하나 복속해 나가고 (민영화, 규제완화, 자유무역협정), 경제논리로 비경제영역의 작동원리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계몽을 시도하며 (인적자본론, 조폭 경제학),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한 이후에는 비경제영역을 경제논리의 산물인 것처럼 이론화하여 적군을 아군으로 만드는 (신제도주의 경제학) 정신승리의 단계에까지 나아간다.

경제의 가열찬 공세는 그 한계를 모른다.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이며 현상유지에 급급한 비경제의 영역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의 경제의 투쟁은 계속된다. 이러한 세계관에 역사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GDP로 표현되는 ‘양’의 역사 뿐이다. 기계와 도구 사이의 허다한 질적 차이는 ‘양’의 용광로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경제적 논리와 비경제적 논리가 외적으로 대립하는 대신 내적 (대립 속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우선 종적으로 경제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지배관계(즉, 비경제)의 존재양식이다. 횡적으로는 공공부문, 가정 등과 같은 비경제영역은 경제영역과 마찬가지로 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지배관계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경제영역의 무차별적 확장보다는 경제영역과 비경제영역 사이의 적절한 분할선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경제위기를 통해 재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입장”에 입각한 설명에서는 역사적 요소가 빠질 수 없다. 첫째, “경제학적 입장” 그 자체의 역사성의 측면에서 그렇다. 석기시대의 도구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과 기계제 대공업 시대의 기계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설명의 틀을 제공하는 경제학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원불멸의 경제학적 입장 같은 것은 없다. 둘째, 비슷한 맥락이지만, 경제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회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매뉴팩쳐시대의 자본주의가 대표하는 사회관계와 기계를 사용하는 대공업시대의 자본주의가 대표하는 사회관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도구를 사용하는 생산에서 기계를 사용하는 생산으로의 이행은 사회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즉,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에서 실질적 종속으로의 변화), 동시에 이러한 물적 생산조건의 변화 없는 사회관계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 경제학적 설명의 대상이 역사적 변화의 산물인 이상, 제대로된 경제학적 설명은 사회관계의 변화 – 즉 역사적 요소 – 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기계와 도구의 차이에 대한 경제학적인 설명은 보통 기계가 도구에 비해 더 높은 노동생산성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설명은 기계와 도구를 동질화하는 것에서 출발하므로 애초에 글러먹었다 – 기계는 기껏해야 고도화된 혹은 배수화된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진정한 경제학적 설명은 기계와 도구가 각각 표현하는 사회관계들의 차이, 이들 사이의 역사적 이행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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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oughts on “(132) 경제학적 설명과 역사적 요소

  1. 이사와 이직과 이주가 겹치는 바람에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세개 모두 가볍게 보았는데, 쉬운 것은 하나도 없더이다. 몸은 새 나라 새 집 새 직장에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지 키보드 치는 손가락이 -- 아니 사실 뇌가 -- 천근만근입니다. 게다가 자본론 1권 상은 이삿짐에 섞여 있어 어쩔 수 없이 1권 하로… 어쨌든, 페이스 회복하는데 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다. 게을러진 것은 아니니 양해해주세요.

  2. 이 글에서 “마르크스의 경우에는”으로 시작하는 단락 전체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역사적 요소”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맑스가 “경제적 관계”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가족이 하나의 생산단위였습니다. 생산, 분배, 소비가 가족 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이나 이집트처럼 공공부문이 발전했던 곳에서만 강력한 국가가 존재했을 뿐입니다. 유통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상품교환에 기초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 유통에서는 각 상품이 번갈아 가면서 사용 가치나 교환 가치 규정으로 관찰될 수 있다. 두 경우에 있어서 각 상품이 상품자체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욕구 대상으로서 유통을 벗어나서 전적으로 경제적 관계 밖으로 떨어진다.” (요강 1권. 268)

    그러나 자본의 출발점은 유통입니다. G-W-G.

    “자본은 무엇보다도 생산 도구이고 또한 과거의 대상화된 노동이다. 다시 말해 내가 “생산 도구”, “축적된 노동”을 비로소 자본으로 만드는 특유한 것을 간과한다면, 자본은 일반적인 영원한 자연 관계로 간주된다.” (54)

    문제는 자본이 유통에서 구매하는 상품의 성격입니다. 그는 생산력을 구매합니다. 반면 노동자는 생활수단을 구매해서 소비합니다. 노동자에게 소비는 생활수단의 파괴과정이며 자신의 재생산과정입니다. 그러나 자본에게 상품의 소비는 상품의 생산과정입니다. 자본의 유통과정에서 교환가치는 사라지지 않고 매번 출발점에 섭니다. 노동자에게 유통이란 W-G-W이기 때문입니다. 화폐를 소비하고 다시 노동력을 판매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일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 모두가 하나의 총체성의 분절들, 하나의 통일체 내에서의 차이들을 이룬다는 것이다.” (69)

    아무리 생각해도 유통은 교환의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G-W-G, W-G-W 이 두 개의 순환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교환이란 원래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물건을 바꾸는겁니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물건이란 다름아닌 화폐입니다. 자본가는 화폐를 화폐와 교환했습니다.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모두 자본의 생산과정이며 유통과정입니다. 이해가 잘 안되네요.

    1.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단락에 나타나는 경제는 모두 자본주의적 경제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1. 이제 알았어요. W-G-W는 G-W-G’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본 2권 제3편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 422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부르주아 사회 전체에서 가격으로서의 이러한 정립과 이것들의 유통 등은 피상적인 과정으로 나타나며, 그 아래의 심층에서는 개인들의 이러한 외견상의 평등과 자유가 사라지는 전혀 다른 과정들이 진행된다.” (요강 1권 243)

        “요컨대 부르주아 사회의 표층에 직접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유통은, 그것이 끊임없이 매개되는 한에 있어서만 유통이다. 그 자체로 관찰하면 그것은 전제된 극단들의 매개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극단들을 정립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각각의 계기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매개의 전체로서, 총체적 과정으로서 스스로 매개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의 직접적인 존재는 순수한 외양이다. 그것은 그것의 뒤에서 진행되는 과정의 현상이다.”(252)

        Der Kreislaufsprozeß des Kapitals ist also Einheit von Zirkulation und Produktion, schließt beide ein.

      2. heesang님이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전에도 우리는 이 주제에 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노동력의 가치는 이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며, 이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생활수단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입니다. 이 생활수단의 가치는 생산수단의 가치에 추가된 가치입니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 이런 식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맑스는 가치는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결정된다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가치는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본은 사실상 분배관계와 생산관계, 계급들로 끝납니다. 맑스는 여기에서 야릇한 말들을 많이 합니다. 나중에 또 이 주제에 관해서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죠.

  3. 얼마 전에 포럼에 아몬드문어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질문 내용과는 무관하게, 원문에서 “사회적 필요”에 해당하는 단어를 비봉판과 길판 모두 “사회적 욕망”이라고 옮겼습니다. 욕망에 해당하는 단어는 아시다시피 Begierde입니다. 제가 알기로 맑스는 직접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장에서 욕망을 다룹니다. 먼저 두 개의 자기의식이 대립합니다. 자기의식에게 타자의 자기의식은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직접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der Gegenstand der unmittelbaren Begierde ist ein Lebendiges.)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합니다. 전자가 주인이고 후자가 노예입니다. 주인은 노예를 매개로 해서 사물을 향유합니다. 결국 주인의 의식에서 욕망에 해당하는 것이 노예의 의식에서는 노동이 됩니다.

    원래 노동은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자연의 소재를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자연은 자신의 비유기적 신체로 나타납니다. 여기에 토지소유의 독점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제로서 나타납니다. 자본가에 의한 생산수단의 수탈과 자유로운 노동자의 탄생. 자본가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여 상품을 생산합니다. 노동자는 타인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타인을 위해 노동합니다. 이 때 노동과정은 여전히 노동자에게 속해 있고 노동의 생산물은 타인에게 속해 있습니다. 기계류가 등장하게 되면 노동수단은 노동자에게 자립화합니다. “매뉴팩쳐에서는 사회적 노동과정들의 분절화가 순전히 주체적이며, 부분노동자들의 결합이다. 기계체계에서는 대공업이 완전히 객체적인 생산유기체를 보유하는데, 이 생산유기체는 노동자들에게 완성된 물질적 생산조건으로서 현존한다.” 하나의 기계적 괴물이 등장합니다. 맑스는 이 기계적 괴물을 자연력에 비유합니다.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들며,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따라서 기계에 의한 노동자의 축출.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계급의 더욱더 많은 부문이 비생산적으로 고용된다.”

    “섬유공장과 광산의 취업자 수를 합하면 1,208,442명이 되며, 섬유공장과 금속공장의 취업자를 합하면 총수는 1,039,605명이 되는데, 어느 경우에나 현대의 가내노예들의 수보다 적다.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의 결과가 얼마나 훌륭한가!”

    이상한 순환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ㅠㅠ

  4. 전부터 궁금한게 있었는데 제가 아직 정리가 안되서 질문을 드리기도 참 애매하네요. 일단 정리를 해두고 질문은 나중에 드리기로 할께요.

    맑스는 그룬트리세의 고정 자본과 사회의 생산력 발전에서 기계가 도입되면 노동시간은 일반적인 과학적 노동, 자연 과학의 기술적 응용에 비해서 부차적 계기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총생산에서의 사회적 구조로부터 유래하는 일반적 생산력에 비해서도 부차적인 계기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다음 부분입니다. 번역을 약간 고쳤습니다.

    Wenn so einerseits die Verwandlung des Produktionsprozesses aus dem einfachen Arbeitsprozeß in einen wissenschaftlichen Prozeß, der die Naturgewalten seinem Dienst unterwirft und so sie im Dienst der menschlichen Bedüfnisse wirken läßt, als Eigenschaft des Capital fixe gegenüer der lebendigen Arbeit erscheint;
    이렇게 한편으로는 생산과정이 단순한 노동과정에서 (자연의 위력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서, 자연의 위력이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도록 작용하게 하는) 과학적 과정으로 전화하는 것이 산 노동에 맞서는 고정자본의 고유성으로 나타난다면,

    wenn die einzelne Arbeit als solche üerhaupt aufhöt, als produktiv zu erscheinen, vielmehr nur produktiv ist in den gemeinsamen, die Naturgewalten sich unterordnenden Arbeiten und diese Erhebung der unmittelbaren Arbeit in gesellschaftliche als Reduktion der einzelnen Arbeit auf Hilfslosigkeit gegen die im Kapital repräentierte, konzentrierte Gemeinsamkeit erscheint;
    그러한 개별 노동 일체가 생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중지하고, 오히려 자연의 위력을 종속시키는 공동 노동 안에서만 생산적으로 나타나고, 직접적 노동의 사회적 노동으로의 이러한 고양이 자본으로 대표되고, 자본에 집중된 공동성에 대한 무기력으로 축소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so andrerseits erscheint nun als Eigenschaft des Capital circulant das Erhalten der Arbeit in einem Produktionszweig durch co-existing labour2 in einem andren.
    다른 한편으로는 한 생산부문의 노동이 동시에 존재하는 다른 생산부문의 노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유동자본의 고유성으로 나타난다.

    In der kleinen Zirkulation avanciert3 das Kapital dem Arbeiter das Salair, das dieser austauscht gegen zu seiner Konsumtion nöige Produkte.
    소유통에서 자본은 노동자에게 급료를 내놓고, 노동자는 이것을 자신의 소비에 필요한 생산물과 교환한다.

    Das von ihm erhaltne Geld hat nur diese Macht, weil gleichzeitig neben ihm gearbeitet wird; und nur weil das Kapital sich seine Arbeit angeeignet, kann es ihm im Geld Anweisung auf fremde Arbeit geben.
    그가 받은 화폐는 단지 그의 곁에서 동시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힘을 갖는다. 그리고 단지 자본이 그의 노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본은 그에게 타인 노동에 대한 지시를 화폐로 줄 수 있다.

    여기서 Macht가 타인을 지배하는 물리적 폭력이나 사회적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597/ Dieser Austausch der eignen Arbeit mit der fremden erscheint hier nicht durch die gleichzeitige Koexistenz der Arbeit der andren vermittelt und bedingt, sondern durch die Avance4, die das Kapital macht.
    여기에서 자기 노동과 타인의 노동의 교환은 타인 노동과 동시에 공존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이 미리 돈을 주는 것에 의해 매개되고 전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Es erscheint als Eigenschaft des Teils des circulating capital, der an den Arbeiter abgetreten wird, und des circulating capital üerhaupt, daß der Arbeiter wärend der Produktion den zu seiner Konsumtion nöigen Stoffwechsel vornehmen kann.
    노동자가 생산하는 동안 자신의 소비에 필요한 소재변화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 노동자에게 넘겨주는 유동자본의 일부, 그리고 유동자본 일체의 고유성으로 나타난다.

    Es erscheint nicht als Stoffwechsel der gleichzeitigen Arbeitskräte, sondern als Stoffwechsel des Kapitals; dessen, daß circulating capital existiert.
    그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노동력의 소재변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소재변화, 유동자본이 존재하는 것의 소재변화로 나타난다.

    중략.

    Das Kapital setzt sich als Vermittler zwischen den verschiednen labourers5 in der Form des Capital circulant.
    자본은 유동자본의 형태로 상이한 노동자들 사이의 매개자로 정립한다.

    맑스는 자본 3권 제6편 서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식량의 직접적 생산자들의 노동이 그들 자신에 대해서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분할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에 대해서는 식량의 생산에 요구되는 필요노동을 대표한다. 이러한 것은 개별 작업장 안에서의 분업과 구별되는 사회 전체 안에서의 모든 분업에 해당한다. 예컨대 어떤 노동도 특정 물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이며 특정 물품에 대한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노동이다.”

    “개별 상품의 경우에는 그 사용가치는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지만, 사회적 생산물 전체의 경우에는 그 사용가치는 그것이 각종의 생산물에 대한 양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욕망에 일치하게끔 노동이 각종의 생산분야에 분배되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사회적 욕망[즉 사회의 수준에서의 사용가치]은 사회의 총노동시간 중 각각의 생산분야에 할당되는 몫을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가 공부가 부족한 것은 저도 인정하고 또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노동력의 가치는 사회적 수준에서, 사회적 힘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 같아요.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사회적 총생산물 중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보다 더 적게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더 많이 가져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후자는 전자보다 생산에 더 많이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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