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가치이론의 한계와 가능성: 왜 가치이론은 늘 승리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가? (A personal note)

어찌어찌해서 제6회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를 하나 했다. 이번 행사는 (몇 개의 전체회의에 더해) 참여하는 각 단체에서 독립적으로 세션을 꾸리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사회경제학회 세션에서 발표를 맡았다(링크).

링크된 페이지에서 보다시피 내 발표의 제목은 ‘가치와 현대자본주의’. 제목만 봐서는 뭘 하려는지 드러나지 않을텐데, 사실 그건 나 스스로 뭘 말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두 개의 발표들이 나도 최근에 쓴 바 있는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것이어서, 나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을까 하고 잠시 생각도 했으나 그냥 접었다. 어쨌든 애초 주어진 제목에 맞게 결국 발표는 했고,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나름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언제고 하고픈 얘기였고, ‘맑스코뮤날레’는 그러기에 적당한 자리였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일 뿐이다.

다음은 발표에 앞서 준비한 메모를, 당일 발표장의 분위기와 토론내용을 참조해 업데이트시킨 것이다.

*                                 *                                 *

1.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문장 자체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가치이론(value theory)이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론으로서, 스미스나 리카도의 이론도 가치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는 그 특유의 방법을 통해 그들 이론의 불충분함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그것이 근거해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드러냈다. 따라서 그는 가치이론의 비판자라고 불리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지극히 ‘속류화’되었으며 주류경제학에서는 누구도 자본주의 경제를 다룸에 있어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에 근거한 경제논의를 ‘가치이론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오히려 현재의 주류경제학 및 그와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하는 비주류경제학들에 대해 자신을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마르크스적 경제이론을 일컫기 위해 ‘가치이론’, ‘가치분석’,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등의 용어를 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라는 문장의 의미다. 그러니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비판하려고 했지, 또 하나의 경제학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것(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조정환, 이진경 등이 있다)은 아무 쓸 데 없는 것으로, 경제학의 그간의 발달사와 현재상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내는, 누워 침 뱉기일 뿐이다.

2.
‘가치이론의 위기’가 회자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최근엔 그것이 디지털화된 현대사회를 다루는 데 무력하다는 측면에서 제기되는 것 같다. 디지털/정보상품을 다루는 데도, 그러한 상품이 만연한 사회에서 성행하는 새로운 노동형태들을 해명하는 데도 무력하다는 거다. ‘인지자본주의론’은 그러한 문제제기 중에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어쨌든 그런 비판, 일견 타당한 면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이론이 새로운 현상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어려움을 들어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고 오직 자신만이 새로운 상황을 설명해낸다고 주장하는 이론들도 언제나 있어 왔고. 그러나 이런 경우,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새로운 주장들은 설익은 채 제출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곤 한다. 실제로 최근 다수의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가치이론은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현상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분석적으로나 비판적으로나 탁월함을 입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탁월함의 매우 중요한 한 근거는, 가치이론이 예의 그 ‘새로운 현상들’을 반성적으로 다룬다는 데서 나온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움’들은 침잠되고 다져져 ‘낡음’ 속으로 젖어들어가고, 동시에 전에는 자각되지 못한 채 잠들어있던 새로움의 싹들이 낡음 속에서 눈을 뜬다. 즉 기존 이론의 막다른 골목으로 여겨졌던 새로운 현상들이 사실은 그러한 이론에 의해 별 문제없이 설명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 동시에 기존의 이론도 일정한 발전을 이룬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상들’이 새로운 것은 대체로 기존의 이론이 포착은 했으나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그 대상의 면모들이기 마련이어서, 이제 그 면모들을 다룸으로써 이론이 더욱 세심해지기 때문이다. (참조: 김공회,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 링크)

이와 같은 ‘이론의 반성’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반성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를테면 이성, 즉 반성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반성을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이론도 그렇다. 반성을 잘 하는 이론, 반성하는 것이 이론 그 자체의 논리에 의식적으로 각인된 이론, 그런 이론이 좋은 이론이다. 마르크스적 가치이론은 바로 그러한 이론이며, 이런 성격은 마르크스 특유의 방법에서 유래한다.

3.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논점이 나타난다. 즉 사정이 위와 같다면, ‘새로운 현상들’과 관련해서 높게 평가돼야 마땅한 가치이론의 힘은, 그것이 몇 가지 올바른 방법론적/원칙론적 기반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고, 그것이 기존의 것들을 충분히 다뤄주고 있을 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원래 있었던 것들, 예를 들면 ‘노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논의(최소한의 ‘컨센서스’)도 갖춰지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동형태를 다루겠다고 나서는 것, 또는 다루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과연 가치이론은 국가, 노동, 소비 등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대한 충분한 이론들을 갖춰놓고 있는가?

이러한 고찰은 왜 이제껏 가치이론에 대한 (조절이론, 네그리/하트의 ‘제국’론, 최근의 인지자본주의론 등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의 발전을 낳는 데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한편으로 그러한 문제제기들은 가치이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론적 수준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치이론 내부엔 그들의 도전을 ‘생산적으로’ 받아안아낼 만한 ‘컨텐츠’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의미에서 인지자본주의론을 노동이 파편화되고 불안정화된 현대의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비록 ‘노동’이나 ‘가치’와 같은 개념들을 그릇되게 이해하고는 있지만—로 볼 수 있을텐데, 가치이론은 그러한 개념들을 적어도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올바르게 견지하고 있지만 이를 막상 인지자본주의론이 주목하는 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포착해내는 데 필요한 구체성 내지는 매개개념들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바로 그래서,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매우 추상적인 개념의 영역에서만 의미있는 논쟁지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고, 반대로 가치이론이 그러한 이론들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그러한 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영역에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싸움의 결과는 언제나 가치이론의 승리—이것이 대다수의 관객에게도 ‘승리’로 받아들여졌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였지만, 그런 싸움들 이후 가치이론은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성벽을 더욱 공고하게 쌓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닌 것이다. 최근 인지자본주의론과의 싸움에서도 가치이론은, 전자가 틀렸음을 입증한 것 외에 어떠한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는가?

처음에 가치이론, 즉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주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를 가치이론은 현실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 초기에 가치이론은 그 발전의 자양분을 현실로부터도 얻었고 이론 세계에서의 논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었단 얘기다. 그러나 글의 서두에 지적한 대로, 오늘날 가치이론은 이론의 세계에서 섬처럼 고립돼 있다. 주류경제학이 가치이론에 말을 걸지도 않지만, 후자도 전자에게 더이상 시비를 걸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둘 사이에 공유되는 이론적 지반의 축소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애석한 일은 가치이론이 현실로부터 자신의 발전 근거를 취하는 데에도 점차 소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파괴적인 결과를 우리는 오늘날 목격하고 있다. 재벌, 비정규직, 복지(국가), 공공부문・요금, 자영업 등에 대한 가치이론의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개념화 없이 어떻게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4.
요컨대, 가치이론은 그 비상한 방법론적 원칙 덕분에 엄청난 이론적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건전한 문제제기’일 수 있는 것들조차 수용해낼 포용력도 가치이론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가치이론이 그러한 포용력을 회복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시킬 수 있을까? 나는 당장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에 나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본다. 물론 이 말이, 가치이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실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동력을 부여받아 이론 발전의 계기들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동안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그간의 (절반은 외부에서 강요됐고 절반은 스스로 자초한) 고립의 필연적 결과다.

한편 이론적 고립의 결과 가치이론은 그 비판적 성격을 상당 정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의 개입적 연구가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가치이론은 오히려 바로 그 현실의 장에서 여타 이론들과의 대결—진검승부(!)—의 기회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애초에 가졌던 비판적 성격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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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thoughts on “오늘, 가치이론의 한계와 가능성: 왜 가치이론은 늘 승리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가? (A personal note)

  1. 선배 안녕하세요 ㅋㅋㅋ 저 아시겠죠?
    [경제위기와 복지국가]도 그러한 시도의 하나로 이해해도 되는건가요?
    세미나 커리로도 잘 썼는데 말이죠 ㅎㅎ

    1. ^^ 방가방가 :) 뭐.. 대충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물론 아직 갈길이 멀지만요. 아.. 날 참 좋네요!

  2. 과거에도 이 블로그에 인지자본주의와 관련된 글이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인지자본주의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다가 별로 관심이 없어서 꼼꼼히 읽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물질노동 또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글을 찾아서 읽어보긴 했습니다. 제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 비물질노동은 가사노동이라는 희한한 용어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가장 커다란 분할은 도시와 농촌의 분리”라고 말합니다. 이미 물질적 노동에 대한 정신적 노동의 우위는 나타나 있었고, 그 토대는 물질적 생산입니다.

    비물질노동은 “노동과정에서 독립된 물질적 생산물이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왜 새로운 것인지 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맑스는 생산적 노동을 자신의 대립물을 산출하는 노동이라고 정의한 것 같습니다. 노동자에게 자신의 대립물은 타인의 부입니다. 그러나 만약 상품교환이 매우 발전한 사회가 아니라면 비물질노동이 어떻게 타인의 부를 창출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등성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친애들에 있어서 비례가 동등성을 산출하고 친애를 보존한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예를 들어 폴리스적 친애에 있어서 제화공은 자신이 만든 신발을 가치에 따라 교환하고, 직조공이나 그 밖에 다른 기술자들 역시 그렇게 한다. 이 경우에 공동의 척도로 도입된 것은 화폐이며, 모든 것은 이것을 준거로 삼고 이것에 의해 가치가 측정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기타라 연주자에게 연주가 훌륭할수록 더 많은 것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연주자에게 즐거움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때 가치를 정하는 것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먼저 주는 사람은 후자에게 그 일[즉 가치를 정하는 일]을 맡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리 돈을 받은 사람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봉사를 먼저 받는 사람이 그 가치를 정하는 것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것 같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테오리아, 프락시스, 포이에시스를 구분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저열한 것이 포이에시스입니다. 포이에시스는 만들다, 제작하다, 창조하다라는 뜻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produce입니다. 포이에시스의 목적이 성과물인 반면, 테오리아의 목적은 앎이고, 프락시스의 목적은 정치적, 윤리적 활동입니다. 맑스는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를 구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프락시스는 인간의 모든 실천적 활동이고, 이 실천적 활동이 축적된 결과 과학이 완성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포이에시스를 저열하게 생각한 것은 오히려 물질적 생산이 삶의 기초이며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를 소유했다고 합시다. 그가 노예의 노동으로 무위도식하려면 노예는 두사람분을 생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노예에게 집안일과 같은 비생산적 활동을 시키려면 그는 우선 무엇보다도 노예를 먹여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출근하는 곳은 대기업이 소유한 식당입니다. 출퇴근시에는 편의점에 들려 간단한 물건들을 구매합니다. 직장에 가면 저와 같은 수많은 서비스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서비스 노동자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은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노동으로 본사는 부를 축적하겠죠. 그 화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국제적 분업의 체계에서 서비스산업이 매우 발전한 선진국들의 국민들이 누구의 노동으로 유지되는지 궁금합니다. 삶의 토대는 물질적 생산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인 이상 변함이 없습니다.

    1. 비물질노동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에 대해 글도 쓰고 했지만 솔직히 그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또한 daydream님은 그것이 “왜 새로운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셨네요. 하지만 본문에서도 시사했듯이, 노동의 비물질적 측면 등등이 비록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 이론적으로 과거엔 (특히 마르크스에 의해서는) 본격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번에 인지자본주의론의 문제제기가 가치이론으로 하여금 그런 측면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좋은 자극을 줬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 얘기를 길게 해주셨는데… 일단 잘 봤고요^^ 어쩌면 daydream님의 말씀을 좀 더 연장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왜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의 인지자본주의론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그의 경제학에서 ‘인지적 측면’을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가?”

      저는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뤄본다면,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금새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봅니다.

      1. 어제 글을 하나 더 썼는데 지워졌네요. 하나도 중요한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

        어제 잉여가치학설사의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 관한 부분을 읽어봤는데, 제가 이 책 번역본이 없어서 상당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읽었는데도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스미스는 생산적 노동을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과 상품에 실현된 노동 사이에서 동요하는 것 같아요. 맑스는 전자만이 생산적 노동이고, 노동이 상품에 물질화되어 있느냐 아니냐는 상관없다고 보는 것 같아요. 자본을 1권 그것도 상권만 읽은 저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맑스는 스미스가 말하는 생산적 노동은 매뉴팩쳐 시대에나 해당되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시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Das Materialisieren etc, der Arbeit ist jedoch nicht so schottisch zu nehmen, wie A. Smith es faßt. Sprechen wir von der Ware als Materiatur der Arbeit – in dem Sinne ihres Tauschwerts –, so ist dies selbst nur eine eingebildete, d.h. bloß soziale Existenzweise der Ware, die mit ihrer körperlichen Realität nichts zu schaffen hat; sie wird vorgestellt als bestimmtes Quantum gesellschaftlicher Arbeit oder Geld.

        이 말에 따르면 상품은 일정한 양의 사회적 노동을 표상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로써 저의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습니다. 저는 가치를 대상성으로 이해한 것 같아요. 그런데 맑스는 가치가 활동의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한 것 같아요. 제가 원문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1.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조만간 한번 글을 쓸 생각입니다. 물론 이론적으로도 좀 더 탄탄하게 다듬는 작업이 필요하겠지요.

          과거 조정환 선생과의 논쟁과정에서 heesang님께서 (이 블로그 및 {마르크스주의 연구} 저널에) 써둔 것도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다른 분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얘기긴 하지만, 좀 더 얘길해도 될까요. 질문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지자본주의가 아니라 비물질노동입니다. 왜냐하면 최근 들어서 “오늘 나는 친구에게 감정노동을 했다”거나 “학생들의 학습노동”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적어도 온라인상에서는, 보기 때문입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비물질노동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 같습니다.

    “ Since the production of services results in no material and durable good, we define the labor involved in this production as immaterial labor — that is, labor that produces an immaterial good, such as a service, a cultural product, knowledge, or communication.” [p. 290]

    제게는 이런 규정이 문제적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비물질노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노동을 포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물질노동의 개념이 문제적이기 때문에, 이 개념은 앞에서 말한 감정노동과 학습노동과 같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맑스는 자본 1권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1.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 [즉 노동 그 자체] 2. 노동대상 3.노동수단이다.”

    재단사와 이발사를 비교해보겠습니다. 둘 다 가위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재단사는 천을 자르고, 이발사는 머리를 자릅니다. 재단사에게 노동대상은 천이지만, 이발사에게 노동대상은 인간의 머리칼입니다. 맑스는 노동력의 사용이 바로 노동이라고 하면서, 노동력의 구매자는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이발사가 독립적으로 일할 때 이발사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은 고객입니다. 맑스는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합되었다. 노동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노동자측에서는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 이제 생산물측에서는 고정된 정지성으로 존재의 형태로 나타난다. 노동자는 방적노동을 한 것이고, 그 생산물은 방적된 것[즉 실]이다.” 이발사의 노동과정에서 대상은 변형되었지만, 생산물은 무엇입니까?

    “이제 일정한 양의 생산물은 오직 일정한 양의 노동[일정한 양의 응고된 노동시간]을 대표할 뿐이다. 그것은 이제 일정한 시간[또는 날]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일 뿐이다.” 이발사의 고객이 일정한 양의 노동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발사의 고객을 생산물이라거나, 사회적 노동의 물적 형태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것은 학생이 교사의 생산물이라거나, 환자가 의사의 생산물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서비스 이용자들은 타인의 노동력의 사용자이지, 진정한 의미의 노동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서비스 이용자들, 또는 화폐 소유자들이 가치형성과정에 참여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비물질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맑스가 자본 1권에서 서술한 노동과정, 따라서 가치형성과정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폐기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저도 사실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비물질노동 중에서도 가치형성과정에 들어가는 노동들이 있는데, 전부 다 하나로 포괄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상당히 문제적으로 보입니다.

  4. 잘 읽었습니다. 고민이 많으신 것 같네요^^

    아래는 글을 읽은 소감 혹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입니다.

    백프로 맞는 이론도 불가능하고, 백프로 틀린 이론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저 맞음과 틀림이 섞여 있을 뿐이고, 하다못해 고장난 시계조차 하루에 두번은 정확한 시각을 가리키듯이 오로지 틀린 이야기로만 이론을 구성하는 것도 어쩌면 신의 영역일겁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이론들에서 맞는 것은 취하고 틀린 것은 버리겠다는 실용적인 자세이겠지요.

    마르크스주의와 주류경제학도 그럴 것 같습니다. 고립된 섬처럼 분리되어 서로를 향해 ‘니들은 모조리 틀렸다’ 며 개무시하는 관계이지만, 이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닐 것 같습니다. 주류경제학의 주장들에서 어떤 것들이 과연 맞는 소리인지 혹은 쓸만한건지를 살펴서 취해야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겠죠. 어쨌든 주류경제학은 역사성을 제거하고 난 횡적인 경제현상에 대해서만은 매우 뛰어나고 정교한 예측력과 설명력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역사성이 제거되어 있으니 니들은 틀렸다! 가 아니라, 횡적인 경제영역에 대한 그들의 예측력과 설명력을 취하면 과연 안되는건가 라는거죠. 저는 그것이 과학적인 방법론에 입각한 올바른 자세인 것 같고, 마르크스주의는 어쨌든 과학이고 싶어하는 이론이니까요.

    비교예시를 해보자면,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자동차(경제)를 설계하는 엔지니어와 같고 주류경제학은 조작에 능숙한 카레이서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엔지니어야 자동차의 역사와 작동원리와 온갖 공학기술까지 총망라해서 알고있어야하지만, 카레이서는 그런거 전혀 필요가 없죠. 그저 자신이 몰고 있는 자동차의 핸들과 악셀과 브레이크 세가지를 어찌하면 능숙하게 조작해서 가능한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목표지점에 도착시킬 수 있는가만 중요한 것이니까요.

    또한 자동차가 출발할 때, 엔지니어의 “가솔린과 공기 혼합물 0.7리터가 1번 실린더 내부에 주입되고 플러그가 점화하자 실린더헤드가 5만큼의 토크로 상승하여 블라블라” 하는 설명과 카레이서가 “악셀레이터를 지긋이 밟았더니 차가 움직였다” 가 과연 다른 말인건지도 궁금하구요. 자동차의 추진력은 분명히 가솔린(노동)에서 나온다는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모든 카레이서들은 아마도 악셀을 밟는 자신의 발목 힘에서 나온다고 이야기 혹은 착각을 할 겁니다. 그 차이가 그렇게 중요한건가… 그러다 자동차가 운행중에 퍼지거나 이상한 소음이 나고 그러면 겸허히 엔지니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거 아닌가… 그렇게 각자 역할분담을 하는건 불가능한건가 그런 생각도 들 때가 가끔 있죠.

    조금 황당한 이야기겠지만, 마르크스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이 통합될 수는 없는건가. 둘 다 과학적 방법론을 따르는 학문이라면, 그게 왜 불가능한건지 이해가 안가기도 하지요. 전혀 분야가 다른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조차 결국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게 사실인데, 분야가 같은 경제학 내부에서 완전히 동떨어진채로 분리되어 서로 과학임을 주장하는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긴 합니다.

    1. 고맙습니다. 곱씹어봐야 할 말씀이군요. 그런데 자동차의 비유는 약간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피노키오님 말씀대로 만약 자동차를 경제에 비유한다면, 주류/비주류를 막론하고 경제학(자들)은 모두 엔지니어에 해당하겠지요. 레이서는 경제를 실제로 운영하는 국가관료집단 정도에 대응될 것이고요. 다시 말해, 주류경제학과 비주류/마르크스경제학은 저마다 자신이 자동차의 구조와 운동메커니즘에 정통하다고 주장하는 셈이지요.

      카레이서(경제관료)는 자동차의 추진력을 줄이기 위해 발목에 힘을 뺄 것이고, 이러한 경험에 바탕해서 ‘자동차의 추진력은 나의 발목에서 나온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차피 실무 차원에서는 이것만으로도 그런대로 괜찮겠지요. 결국 마르크스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의 차이는 바로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차이는 피노키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고요. 다시 말해, 후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발목-->추진력)을 자신의 이론의 근거로 삼고, 전자는 그 (역사적 및 구조적) 심층에 관심을 갖는다는 거죠.

      이렇게, 제가 보기엔, 적어도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의 차이가 ‘관점’의 문제는 아닙니다.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의 문제입니다. 물론 피노키오님 말씀대로 주류경제학이 나아보이는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순전히 그것이 ‘주류’이기 때문에 갖는 advantage라고 봅니다. 주류이기에 많은 ‘똑똑한’ 이들의 손에서 가다듬어질 수 있었고, 주류이기에 현실에 적용돼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불행한 것은, 현실에 적용돼 발달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류경제학이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는 기회가 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발달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진실이란 고작 ‘이론의 발달이 필요한 지점이 어디인가’를 가리키는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주류적인 노동이론/금융이론의 발달은, 우리에게 노동에 대한 이론, 금융에 대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굳이 주류경제학을 참조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현실만 잘 들여다봐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류경제학을 알아야 하고, 또 그와 대결을 벌여야 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주류’이기 때문입니다. 주류이기에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집단들의 의식과 행동을 반영하고 규정하며, 나아가 얼마간은 경제사회구조 자체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형태, 즉 기존의 주류경제학에 대한 이론적 개입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지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5. 추가로 인지자본주의 논쟁에 대해 제 느낌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저는 이 논쟁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이 없으므로, 어쩌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문외한의 맥락없는 헛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편의상 EM님과 같은 입장을 정통파로, 조정환님과 같은 입장을 인지파 이렇게 호칭하겠습니다.

    인지파들의 새로운 도전을 말끔하게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컨텐츠가 부족해서든 그동안 게을러서든 정통파에게 뭔가 부족한 게 있기 때문일거고, 그 부분은 EM님도 인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뭐가 부족할까가 쟁점이겠는데, 저는 사실 가치에 대한 정통파님들의 글을 읽을 때 뭔가 좀 이상하다 싶은 느낌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제가 느끼던 것과 인지자본주의 논쟁이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뭐 그런 헛된 망상을 살짝 해보면서 적어보겠습니다.^^

    뭐냐면 노동을 하는 단위주체가 과연 각각으로 구분된 인간 개인인가 아니면 인간집단인가 하는 것이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사회적 관계는 물론 역사적관계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의 단위주체를 주민번호로 구분되는 인간 개인으로 설정한다면, 오류가 발생하지 않겠는가가 요지입니다. 저는 정통파님들의 설명에서 가끔 그런 면모를 느낄 때까 있거든요.

    가령 비물질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가 아닌가를 논할 때, 그 논의에 전제된 조건이란 해당 비물질노동의 단위 주체가 그것을 표면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자 개인, 즉 홀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개인으로 상정하고 계신거 아닌가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떤 공장에서 두 사람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망치로 못을 만들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머리속으로 몇개의 못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암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망치질을 하는 사람은 암산능력이 없어서, 암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카운트를 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만 해당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조건입니다. 이 때 못을 만드는 사람은 물질노동, 암산을 하는 사람은 비물질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겠지요.

    그럴 때, 못을 만드는 사람은 물질노동이므로 가치를 생산하고 있고, 암산을 하는 사람은 비물질노동이므로 가치를 생산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해당 못을 생산하는 노동의 단위주체는 연결되어 있는 두 사람이고, 해당 가치생산의 단위 주체 역시 두명으로 구성된 집단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라는 것이죠. 즉 해당 노동을 수행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고, 암산을 했던 사람은 집단의 일부이므로 따라서 해당 노동의 일부를 수행한 것으로 봐야하고, 따라서 그 역시 가치를 생산했다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거죠.

    그렇다면, 이제는 최초 암산지식을 만들었던 과거의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문제가 되겠네요. 아마도 그 사람은 몇백년전에 살았던 사람일테고 그저 우연히 발명한 암산지식을 주변에 전하고 죽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떨까요? 그 사람은 오늘 못을 생산하는 노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일까요?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 어떤 공장의 못생산노동도 존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겠죠. 즉 그 사람은 역사를 통하여 공장의 두 사람과 함께 집단을 이루어 집단의 일부로써 못생산노동이라는 가치생산에 참여한 것으로 봐야 하고, 우리는 단지 역사속의 그 사람에게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있고, 지불하는 것도 불가능할 뿐인 거겠죠.

    저는 인지노동이나 비물질노동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지노동 비물질노동이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만약 단독으로 존재한다면 그건 노동이 아니라 외딴 산속에서 명상 혹은 참선을 하는 것과 동일한거겠죠), 물질노동을 하는 사람과 결합하여 집단의 일부로써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겠고, 따라서 그들 역시 가치를 생산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싶습니다.

    아마도 개인이란 이름과 주민번호로 구분되어 임금을 수령할 때 등에만 개인이고, 노동은 그런거 없이 해당 노동에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역사 속의 어떤 개인까지도 호출하여 시공간을 아우르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노동의 단위 주체여야 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즉 아이폰을 생산하는 노동 앞에서 스티브잡스와 팍스콘의 이름모를여공은 아이폰을 생산하는 노동집단의 각각의 일부일 뿐이고, 그들 모두 상호 구분이 불가능한 상태의 집단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아이폰이라는 사용가치를 생산하였다 라고 할 수 있는거 아닌가 뭐 그런 망상스러운 잡설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소득을 개인들에게 분배하는 사회적과정이 노동과정 자체와 무슨 상호 관계가 있는건가 싶기도 하구요.

    참고로, 생물학의 새로운 어떤 견해는 인간 개인이라는 것이 과연 생물학적 실체가 있는개념인가를 의심하고 있다 합니다. 개인 단위로 구분되는 개체가 아니고, 수천억개의 세포들이 유전자 복제를 수행하기 위해 구성된 군체에 불과한 것 아닌가, 단독적 개인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자 착각이 아닌가 그런 이야기인데, 꽤 설득력이 있더라구요.

  6. 원래 위에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피노키오님 글 밑에 다는게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정환씨에 대한 heesang님의 반론을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글이 뒤섞여 있어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조정환씨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원문을 찾아봤습니다. 조정환씨의 글이 모두 네개더군요.

    불행히도 그 글로는 그의 인지자본주의론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론 자체의 결함 때문인지, 아니면 글의 성격상 충분히 자신의 논지를 전개할 수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제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교환될 생산물을 낳지 않는 노동에 의해 사회가 (재)생산된다면, 등가성 자체가 의문에 붙여지게 되고 등가성의 해체는 척도의 해체를 낳고 그렇게 되면 척도로서의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가치론이 직면한 현재의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으로서는, 노동가치론을 지켜야할 이유는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아니라 가치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했습니다. 만약 가치법칙이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새로운 이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역시 조정환씨의 글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피노키오님이 말씀하신 것은 노동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각각의 노동자들이 하는 일의 성격이 서로 다르고, 그들의 총생산물이 하나의 상품이 되는데, 생산과정이라는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바로 이 점에서 조정환씨가 말하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라는 ‘선언’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점 때문에 비물질노동 또는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가 피노키오님의 글을 읽고 아하!했습니다. 저도 이 점이 궁금합니다.

    미국에는 드럭스토어 화장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콤팩트라고 드럭스토어 화장품이 만원이라면, 백화점에 파는 샤넬이나 크리스찬 디오르는 6~7만원 합니다. 그런데 화장품 비평가가 쓴 책을 읽어보니 성분이 거의 똑같다고 합니다. 내용은 거의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은 명품 화장품은 브랜드 이미지 개발, 광고비 등에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두 기업을 비교하면 제조과정은 어쩌면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간혹 특허물질 개발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효과는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후자의 상품의 가치가 더 높은 것은 생산과정에 들어간 요소 중에서 바로 이미지를 만드는 노동자들 때문입니다. 이 노동자들은 예술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호텔 식당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셰프는 절대 주방에서 일하지 않습니다. 그는 한국 요리의 명인으로서 메뉴와 레시피를 개발하는 일을 합니다. 종종 호텔 오너가 식사를 하러 오면 옆에서 시중을 듭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식당은 대기업에서 운영하지만 공장식입니다. 레시피는 본사에서 내려오고 요리란 사실 공장으로 치면 조립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식당도 일반인에게는 꽤 비싼 가격이지만 호텔에 비하면 1/10도 안됩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셰프가 갖고 있는 장인적 성격입니다. 게다가 호텔에서 판매하는 상품 역시 구매자 입장에서는 단지 식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테리어, 서비스, 음식 맛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이들이 구매하는 상품의 성격은 굉장히 복합적입니다.

    화장품의 이미지를 만드는 노동자와 식당의 얼굴인 셰프는 비물질노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단순노동시간의 배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창의적이며 예술적이며 자율적인 노동과 일반적인 서비스 노동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조정환씨는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이를테면 마트 계산원이나 콜센터 직원 등은 사실상 전자가 갖고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도시에서는 생산직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고된 일을 마다않고 하는 것입니다. 손님들에게 치이면서.

    “자본주의는 이 창조적 공동협력을 가치 술어로 환원한 후, 이것을 가치라는 척도에 따라서 필요한 것과 남는 것으로 분할한다. 즉 여러 힘들 사이의 공동협력과 공통되기를 가치 요소들로 분할한다.”

    조정환씨의 이런 주장에 대해 일종의 착잡함을 느낍니다. 스미스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구별 짓는 것처럼 보이는 매우 상이한 재능들은 대부분의 경우 노동분업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합니다. 조정환씨에게는 자본가들의 경쟁으로 인한 파멸적인 결과들이 새로운 세계를 생성하는 힘들로 보이는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7. 늦었지만 이 훌륭하고 흥미로운 글/논쟁에 대한 제 감상을 남깁니다.

    1. 일전에 어떤 선생님께서 저에게 “당신은 세계적으로도 진지하게 가치론을 연구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일거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 전공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죠. 절대적인 연구자 숫자의 부족이 가치론이 항상 승리하면서도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합니다.

    2. 피노키오님의 가치론과 주류경제학의 관계에 대한 의견에 대해서는… 경제학/가치론의 관계를 한의학/서양의학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경제학과 가치론은 누가 더 과학적인지를 따지는 경쟁적인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흔히 얘기하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가치론을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가치론은 왜 경제학이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지요. 그리고 경제학의 예측력과 설명력에 대해서는 저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입니다. 경제학은 경제위기를 단 한번도 제대로 예측해낸적이 없고, 예측이라면 오히려 경제학자들보다는 중앙은행의 관료들이나 금융권의 애널리스트들이 더 낫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의 예측에는 복잡한 수학을 쓰는 경제이론들은 별로 사용되지 않을 겁니다. 선행지수나 통계 수치가 더 중요하지요.

    3. 인지자본주의론은 비유를 사용하자면, 민주주의를 삼권분립과 (잘못) 동일시한 다음에, 삼권분립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사회가 아니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이론입니다.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나. 제대로 반박을 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수준에서의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단편적인 쟁점들로 논의를 한정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청중들의 경우에도 꼭 그런 식의 협소화된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식의 논쟁에서는 삼권분립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민주주의가 어떻게 존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아요.

    4. 가치생산의 주체가 개인이냐 집단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당연하게도 집단 속의 개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자본론 1권의 협업 부분을 보시면 ‘집단적 노동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매뉴팩쳐에 관한 장에는 ‘부분노동자’라는 표현이 있고, 개인은 집단의 기관으로 간주되지요. 관점을 사회전체로 넓혀 보면 사회적 분업의 체계 속에서 모두는 모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세상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분명한 사실로부터 세상 모든 것에 동일한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예를 들어, 모든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인지자본주의론적 주장)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비물질노동이 물질노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서 꼭 가치를 생산해야 하는 것은 아니죠.

  8. heesang님의 코멘트 중 3번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도 될까요. heesang님은 연구자기 때문에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저처럼 비전공자가 인지자본주의론을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인지자본주의론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조정환씨의 견해에 대해서만 한정하겠습니다.

    조정환씨의 블로그에 있는 글 중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맑스의 세 가지 역사적 가정”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조정환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둘째, 맑스가 생산적 노동을 경제적 관계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직접 자본과의 교환이 필수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과 교환되지 않는 노동이 생산적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 교환 없는 잉여가치 창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가령 여성A가 가사노동을 통해 남성B의 노동력 재생산비를 낮추었을 때, 자본은 그 여성A의 노동을 사실상 무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자본과 교환되는 남성B의 노동만이 생산적인 노동으로 간주되었다. 직접적 생산과정에서는 남성B만이 노동하지만 재생산과정, 총생산과정에서 보면 여성A도 가치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즉 자본은 남성B와 여성A의 노동을 남성B의 노동력 재생산비만으로 모두 이용한다. 이것은 남성B가 여성A를 무상으로 봉사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가부장적 혼인관계에 의해 가능해진다. 만약 자본이 직접 고용하지 않은 여성A의 재생산비까지 지불해야 한다면 (나아가 그가 무상으로 이용하는 자연자원의 재생산비까지 지불해야 한다면) 자본의 잉여가치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맑스는 이 관계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 주부의 불불노동을 주장했던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논리와 전혀 다를 바 없으며, 상식적으로도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만약 자본가가 남성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낮추려고 한다면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에게 똑같은 고용기회와 임금을 지불하면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여성 노동자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며, 결혼을 하게 되면 직장과 가족이라는 두 개의 짐만 지게 되는 셈이니, 결혼은 여성 노동자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 됩니다. 반면 남성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임금만 받게 되고, 이 임금으로는 도저히 결혼을 할 능력이 못됩니다. 현실적으로도 남성 노동자에게 한 명분의 재생산 비용만 지급한다면 결코 혼자 직장에 다니는 것으로는 가족의 유지가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게다가 아이를 낳게 되면 돈이 더 듭니다. 현실적으로 남성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노동자 가족의 재생산 비용이며, 이것은 자본에도 나와 있습니다. 현실은 주부가 무급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받는 임금으로 자신을 유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남편의 재생산 비용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자본은 직접 고용하지 않은 여성 A의 재생산비까지 지불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의 잉여가치는 크게 줄어들고 있나요. 그 뒤 조정환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맑스는 “이 봉사의 가치는 어떻게 규정되며 이 가치자체는 임금법칙들에 의하여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것은 여기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관계의 연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것은 임금에 관한 장에서 고찰되어야 한다”(잉1, 452), 그리고 “이러한 봉사의 가격이 어떻게 규정되며 또 그 가격과 본래의 의미의 임금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 가격은 임금법칙에 의해 어느 정도 조절되는가, 그 법칙과 어느 정도 배치되는가--이 모든 문제는 임금에 관한 연구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당면한 연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잉1, 452)고 하면서 가치와 가격 모두에서 봉사에 관한 연구는 임금에 관한 장으로 미루고 있는데, 그 임금에 관한 장은 서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봉사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부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그 여성이 자본에 고용되었을 경우 그 노동력의 가치 정도에 해당하는 임금을 주어야 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봉사의 성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적 봉사, 즉 매춘의 가격을 예를 들어봅시다.

    호주: 아시아 여성 150불, 백인 여성 300불
    프랑스: 최대 4만불
    홍콩: 원룸 40불, 룸살롱 232불
    인도: 처녀 천불, 성인 1불
    일본: 한국여성과 한시간에 125불
    대만: 한국여성과 344불
    한국: 117불
    미국, 평균가격: 50~100불
    미국, 뉴욕의 번화가: 만불

    이처럼 봉사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와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구매자의 구매력과 기호, 취향, 욕구,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봉사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이나 의료처럼 개인의 삶과 사회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봉사는 매우 야만적인 사회가 아니라면 상품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봉사의 가치는 일정하게 상품교환의 법칙과 무관하게 결정될 수도 있고, 이들 봉사자 계급은 임금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 가치와 같은 생계비를 지급받거나 교사, 의사처럼 수련비가 많이 드는 복합노동력의 경우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외에 사치품의 성격을 갖고있는 봉사는 예외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얼마면 되겠니?”

    이런 봉사의 가치의 분석이 중요한 것일 수는 있겠지만, 사실 이런 경우에는 스미스가 노동의 가격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맑스에게 비판당했던, toil and trouble에 대한 보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 안녕하세요. 가사노동에 대해서 지적하신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봉사의 가치’ 혹은 ‘서비스의 가치’에 대해서는

      (1) 일단 봉사 혹은 서비스는 가치를 가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서비스노동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고 가정하죠.) 동일한 노동이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에 의해 수행되면 가치를 생산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예: 자영업) 가치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2) 봉사가 자본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에 의해 수행되어 가치를 갖는다면, 이 봉사의 가치는 이 봉사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봉사의 가치가 노동력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죠. 물론 복잡한 노동력의 경우 단위 시간 당 생산하는 가치량이 상대적으로 높겠지요.

      (3) 봉사가 가치를 갖지 않는 경우에도 가격을 갖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이 경우에 봉사의 가격은 노동의 지속시간에 비례할 것이고, 비슷한 복잡도를 갖는 노동이 동일한 시간에 생산하는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매매는 일반적으로 자본-노동 관계에 의해서 공급되는 상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매매는 서비스이지만,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느냐. (3)을 따르자면, 비슷한 수준의 복잡도를 갖는 노동의 지속시간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성매매의 엄청난 특수성 (예: 사회적 멸시)으로 인해 자본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노동의 동질화 과정이 성매매에 완전히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성매매의 가격에 ‘고통’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죠. 게다가 성매매가 불법인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처벌 위험’ 역시 감안될 것이구요.

      1. 다른 한편으로는 판매자는 구매자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파트너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절약해주죠. 그런데 이런 경우 시간의 절약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화폐의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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