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중한 은혜 –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허혁 옮김)에서


은혜를 값싸게 보는 우리의 견해는 교회의 대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은혜를 귀하게 얻으려는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로 팔아 버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억지로 내맡기는 죄의 사유요 위로요 성만찬이다. 무진장한 식료품 창고에서 물품을 내오듯이 생각 없이 교회에서 털어 내는 은혜를 뜻한다. 값도 댓가도 없는 은혜이다. 이것을 은혜의 본질이라 한다. 은혜의 댓가는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라는 것이다. 댓가를 이미 지불한 자를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나 거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불된 댓가가 무한한 때문에 소비와 낭비도 무한한 것이다. 공짜가 아니라면 무엇이 은혜란 말인가? 값싼 은혜라 함은 교훈과 원리와 체계 같은 은혜를 말한다. 죄의 사유는 보편적 진리라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신 이념이라 했다. 이것이 사실임을 시인하는 자는 이미 죄의 사유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론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는 은혜의 흡족한 옳은 교회라 하였다. 세상은 죄를 뉘우칠 필요도, 죄에서 해방되기를 애걸할 필요도 없다. 이 은혜의 교회에서 자신의 죄를 덮어 감출 뚜껑을 얼마든지 싸게 얻을 수 있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산 말씀의 부정이며 하나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값싼 은혜는 죄의 의인(義認)이요 죄인의 의인이 아니라 했다. 은혜는 홀로 무엇이나 원만히 처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옛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 좋다는 것이다. “여하간 우리의 행함이란 헛된 것이라” 하였다. 세상은 이래도 저래도 세상이니, 최선을 다해도 역시 우리는 죄인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세상과 다름 없이 살라. 모든 일을 세상과 똑 같이 처리하고 – 그것이 광신이라도 무관하다 – 은혜를 은혜로 받기 위하여 죄의 생활 이상을 바라지 말라. 은혜를 저버리지 않도록, 거저 주는 큰 은혜에 불만하지 않도록, 부질없이 계명 같은 것을 순종하는 생활에 몰두하여 문자 숭배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하라. 세상은 이미 은혜에 의하여 거저 의로와졌다. 그러므로 – 이 은혜의 참됨을 위하여 비할 데 없는 이 은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하여 – 그리스도인이여, 세상과 다름없이 살라. 비범한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일반 인정이라면 비범한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합하여 드러나지 않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단념과 극기에 힘써 자신의 생활이 세상과 차별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은혜를 은혜답게 지속하여 거저 받은 은혜의 신앙을 세상에서 해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 자신의 세속성에 가해야 할 필요한 제재라는 것이니 세상, 아니, 은혜를 위한 것으로 모든 것을 채우는 유일한 은혜의 소유요 생활의 위로며 안전이라 했다. 잘라 말해서 따라갈 필요 없이 앉은 자리에서 위로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의인을 뜻하는 값없는 은혜일 수는 있어도 죄에서 떠나 돌아와 참회화는 죄인의 의인은 아니다. 죄의 사유가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값없는 은혜는 우리 자신에 근원을 가진 우리 자신의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값없는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기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 은밀한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이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산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은혜가 값없는 은혜라 하겠다.

그러나 귀한 은혜는 밭에 숨은 보물과 같다. 이 보물을 사려는 사람은 집에 돌아가 가진 전 재산을 기쁨을 팔아 댓가로 지불한다. 장사군이 전 재산을 내어줄 수 있는 기쁨으로 팔아 댓가로 지불한다. 장사군이 전 재산을 내어줄 수 있는 귀한 진주, 이것이 귀한 은혜이다. 인간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놀라게 하는 그리스도의 지배권이 귀한 은혜요, 그물을 버리고 즉석에서 따라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이 그것이다.

귀한 은혜는 계속해서 짓궂게 찾아야 할 복음이요, 간곡히 구해야 할 은사요 두드려야 할 문이다.

은혜는 따라오라는 부름인 때문에 비싸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오라는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은혜는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싸고 동시에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비싸다 함은 죄를 저주하는 때문이요, 은혜라 함은 죄인을 의롭게 보는 때문이다. 은혜가 비싼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신의 아들을 댓가로 세운 하나님의 희생 때문이요 – “너희를 비싸게 샀다” – 하나님께 비싼 것이 우리에게 쌀 리 없는 것이다. 이같이 비싼 은혜가 은혜임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아깝다 하지 않고 내어 준 데 있다. 귀한 은혜는 결국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을 뜻한다.

은혜가 귀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신성에 속하는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항상 주의하여 은혜를 개에게 던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은 동시에 산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의 뜻대로 말하도록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를 따라오라는 은혜의 부름은 우리를 감동시키며, 용서한다는 말씀은 불안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은혜가 비싼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멍에를 사람이 지도록 하는 때문이요 그것이 은혜로운 것은 “나의 멍에는 부드럽고 나의 짐은 가볍다”는 말씀이 예수의 말씀인 때문이다.

“나를 따라오라”는 명령이 베드로에게 두 번 내렸다. 그 중에 한 번은 맨 처음에 있었고 다른 한 번은 최후의 말씀이었다 (막 1:17; 요 21:22). 두 번에 걸친 이 부름은 이 제자의 전 생애를 감싸고 있다. 첫번 것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그 때 베드로는 부름을 따라 그물과 직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둘째 번 것도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말씀하셨으나 이번엔 전번 것과는 달리 부활하신 몸으로 옛 직업에 다시 돌아온 베드로를 만나 “나를 따르라”고 다시 다짐한 것이다. 이 두 부름 사이에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한 제자의 전 생애가 들어 있고 이 두 번 부름이 그것을 감싸 주고 있다. 이 두 번 부름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뚜렷이 솟아 있다. 즉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주요 하나님이라는 고백인데 이 고백을 베드로는 세 번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것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는 은혜와 신앙 고백을 통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하는 은혜는 같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은혜는 베도로에게서 세 번이나 달라졌다. 한 은혜가 경우에 따라 세 번 달리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은혜가 그리스도의 것이고 제자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에게 힘을 주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가게 하였으며 온 세상이 신의 모독으로 보았던 신앙고백을 하게 하였고 변덕스로운 그를 순교의 반열에 참여시켜 이것으로 그의 모든 죄를 대신하게 하였던 것이다. 용서와 따름은 베드로의 생애에서 뗄 수 없는 양면이었다. 그렇게 그가 받은 은혜는 비싼 것이었다.

기독교는 널리 전파되고 확대됨에 따라 세속화되고 은혜는 비싼 면을 차차 상실하게 되었다. 세상은 기독교화하고 은혜는 기독교 세례의 통속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싸게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면이 아직 로마 교회에 남아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수도 생활이라는 것이 곧 그것이다. 수도 생활이 교회에서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과 교회 제도가 수도 생활을 아직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은혜가 비싸다는 것과 순종을 함께 포함하여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물론 교회의 한 변두리를 돌고 있음은 사실이나 여하간 모든 소유와 친지를 버리고 예수의 계명을 좇는 엄격한 훈련을 닦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도 생활은 기독교의 세속화와 은혜의 무력화에 대한 모진 항의이기도 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교회는 이 항의를 기뻐하였을 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와의 최후 결렬은 면하였으나 그것을 상대화하게 되어 결국 수도 생활은 기독교 세속화의 일종의 변명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즉 이 수도 생활은 특수 개인의 특수 행위로 인정받았을 뿐 교회 대중의 관심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는 말이다. 예수의 계명의 관철을 특별한 취미의 인간들의 특별한 집단에 한정시킨 것은 숙명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최고의 순종과 최저의 순종으로 나누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의 수도 생활의 가능성을 인정함으로 교회는 세속화에 대한 항의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또 한편 아주 저급한 세속 생활의 가능성도 절대적 변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도 생활에 의하여 로마 교회에 보관되고 있는 것 같은 귀한 은혜의 초대교회적 이해는 자신을 다시 세속화된 교회에 변호하여야 하는 결정적 모순에 떨어지고 말았다. 여하간 수도 생활이 결정적 과오를 초래한 것은 – 예수의 뜻의 내용적 오해는 불구하고라도 – 은혜의 길을 엄격한 따름의 길로 이해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도 생활을 그리스도적인 것에서 멀어지게 한 것은 자기 의사 결정에 따른 소수인의 특별 행위를 인정하고 이에 따른 특수 업적과 공로를 위한 상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데 있다.

하나님이 그의 종 마르틴 루터를 통하여 순수하고 귀한 은혜의 복음을 다시 일으키자 루터는 수도원으로 하나님을 따라 나섰다. 그는 이제 사제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순종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다.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일을 착수한 것이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안 때문에 수도원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순종을 배웠다.

수도원에 따라 들어가는 것은 전 생명의 투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이 길은 하나님에 의하여 좌절당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간격을 두고 예수를 따라감은 개인의 공을 쌓는 어떤 특수 행위가 아니라 전 그리스도인에게서 관철되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그에게 가르친 때문이었다. 수도원 생활의 모방적 겸손한 행동은 성인의 유공 행동이었다. 이것은 결국 모방하는 사람들 자신의 극기요 경건한 자들의 결정적 자기 주장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세상은 다시 사제 생활 중추에 침투하여 위험한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사제의 세계 도피는 아주 교활한 세계애가 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경건한 생활의 최후 가능성이 그에게서 좌절되자 은혜를 붙잡았던 것이다. 수도 세계의 붕괴 속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그리스도 안에 뻗고 있음을 본 것이다. 그가 은혜를 붙는 것은 “우리의 행위는 역시 최선의 것일지라도 허무하다”는 신앙에서 온 것이다. 그가 받은 은혜는 이렇게 비싼 것이었다. 그가 받은 은혜는 그의 전 생명을 꺾은 것이었다. 그는 다시 자신의 믿었던 그물을 버리고 따라가야 했다. 처음 수도원에 들어갈 때 그는 전 소유를 버렸으나 자기 자신 즉 경건한 자아만은 그대로 가지고 갔던 것이다. 이번에는 남은 자신까지도 버려야 했다. 이제는 자신의 공적을 위한 따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너는 범죄하였으나 전부 용서하였으니 네가 있는 곳에 그대로 있으면서 죄사함을 감사만 하라는 말씀이 루터의 받은 것이 아니다. 루터는 오히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세상이 선하고 성스러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과 다름이 없었던 때문이다.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돌이킨 루터의 길은 초대 교회 이래 세상을 꾸짖은 힐책 중 가장 신랄한 공격을 뜻하였다고 본다. 세상에 다시 돌아옴으로 표시된 루터의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는 사제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를 아이들의 장난으로 폭로시킨 것이다. 그의 싸움은 백병전이었다. 예수를 좇는 일을 세속 생활 중심에 세워 놓은 것이다. 특수한 환경 속에서 특수 행위로 알고 아무런 불평도 없이 행할 수 있는 생활 훈련이 이제는 성속의 차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피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다. 예수의 계명을 순종한다는 일은 일상적 직업 생활 사이의 갈등이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깊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몸을 맞대게 되었다. 이것을 백병전이라 한다. 루터의 행적을 순수한 복음적 은혜 발견이라 하여 그것을 예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면제를 세상에 선포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오해라 하겠다. 종교개혁적 선언은 죄 사유에 의한 세상의 의인도 성결도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세속적 직업이 의롭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루터에게 있어서 오직 그 직업에 의한 세상에의 항의가 아주 날카로울 때 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속적 직업을 예수를 따름으로 수행할 때 그것은 복음에 의하여 새 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죄를 의롭다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 하려는 것이 수도원을 나온 루터의 요건이라 하겠다. 비싼 은혜를 루터는 선사 받은 것이다. 메마른 땅의 생수며 공포에 대한 위로요, 스스로 택한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이며 모든 죄의 사유를 뜻하는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은혜는 책임을 불문에 붙이지 않고 오히려 따라오라는 부름을 극도로 날카롭게 하는 때문에 비싼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비싼 점에서 은혜는 은혜요, 은혜라는 점에서 그것은 비싼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복음의 비의요 죄인에 대한 변호의 비의인 것이다.

그런데도 종교개혁사의 승리적 유물은 귀하고 비싼 은혜의 인간의 세속적 종교적 본능에 권리를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되고 은혜는 그로 인하여 차츰 싸게 파악되었다. 이러한 본의 아닌 결과는 극히 적은 잘못된 액센트에 따른 것으로 말하자면 이 적은 과오가 가장 위험하고 저주스러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경건한 생활과 일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는 때문에 루터는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숙명 속에서 루터는 신앙으로 죄의 사유에 의한 자유와 죄의 사유의 무조건성을 파악하였었다. 동시에 루터는 은혜가 생명의 대가라는 것과 아직 날마다 은혜를 위하여 생명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은혜에 의하여 순종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순종이 은혜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었다. 루터의 은혜에 대한 언급 배후에는 언제나 은혜의 힘으로 비로소 그리스도를 충실히 순종할 수 있었던 그의 생활이 밑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것을 ‘행하는 자’는 오직 은혜라 하였다. 자신의 모든 생활 행위 안에서 은혜의 능력을 그는 인식한 것이다. 그의 제자들도 이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시간 경과에 따라 단 하나의 차이가 그들 사이에는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즉 루터에게 가장 자연스러웠던 순종을 후계자들은 빼놓고 만 것이다. 루터는 순종에 관하여 꼬집어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던 은혜의 능력에 의한 순종의 사람이었다. 그의 후계자들의 교리가 루터의 교훈에서 온 것임은 의심할 바 없으나 종교개혁이 지상에 다시 계시된 하나님의 비싼 은혜였다면 이러한 종교개혁의 본의 상실은 이미 루터의 제자들 중에 깃들었다고 볼 것이다. 세상 죄인의 의인이 변하여 세상 자체와 죄의 의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비싼 은혜가 순종 없는 값싼 은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의 행위는 그것이 가장 선할 때에도 헛것이요 그러므로 “죄를 용서하는 은혜와 사랑 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루터는 전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오라는 부름에 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은혜라 함은 자신의 죄의 생활을 결정적으로 끊는 일이지 결코 그 생활의 변명을 뜻할 수는 없다. 은혜는 자아 주장의 생활을 죄 사유의 능력으로 단절하는 최후 선언일 것이므로 은혜 자체 곧 따라오라는 부름의 진지성이라 하겠다. 은혜는 그 때 그 때의 ‘결과’로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후계자들에 의하여 추리의 원리를 위한 전제가 되어 버렸다. 모든 불행은 여기에 있다. 은혜를 그리스도 자신의 선물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결과’로 보았던들 이러한 불행이 초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혜를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로 본 때문에 그것은 세상 생활에서 범하는 죄를 의롭다 하는 나의 기정 소유물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때 내가 이 은혜를 힘입어 범죄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이미 원리적으로 은혜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시민적이며 세속적인 생활에 그대로 머물러 모든 옛 것을 그대로 행하여도 좋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오히려 보호한다는 확신에 이른 것이었다. 이 은혜로 온 세상은 ‘그리스도적’으로 화하고 기독교 자체는 이 은혜 아래서 전대미문의 형태로 세속화하였다. 이렇게 그리스도적 직업 생활과 시민적 세속적 직업 생활간의 갈등은 해소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이란, 세상에서 세상과 같이 살며 세상과의 차이를 어떤 점에서도 두지 않고 – 그렇다 은혜의 본성을 위하여 세상과 구별해서는 안 된다 – 그 때 그 때 교회에 나아가 죄 사유의 확실성만을 되풀이하며 얻으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가장 무서운 순종의 적인 참 순종을 증오하고 멸시하는 값싼 은혜에 의하여 예수를 따라가는 순종에서 해방된 것이다. 가설은 값싼 것이다. 은혜가 한 가설 구실밖에 못할 때 그것은 값싼 것이 되어 버린다. 그 대신 결과로서의 은혜는 무한히 비싼 것이다. 하찮은 표현의 차이가 복음적 교회의 진리를 이렇게 좌우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공할 일이다. 오직 은혜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은 은혜의 결과를 뜻하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이같은 문구의 오용은 그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파괴해 버린다.

파우스트(Faust : Goethe의 시극에 나오는 주인공)가 무엇을 알아 보려고 일생 동안 노력한 끝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였을 때, 이 말은 그의 전생애적 노력의 결과이다. 가령 이 같은 말을 대학 신입생이 이용한다면 그 뜻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결과로서의 이 말은 진리요, 전제일 때 자기 기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실생활에서 얻은 인식을 생활에서 분리할 수 없음을 뜻한다. 전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가는 자만이 오직 은혜에 의하여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오라는 부름 자체를 은혜로, 은혜를 부름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은혜의 혜택으로 오히려 순종을 모면하려는 자는 스스로 속는다.

그러나 은혜를 완전히 전도시킬 위험한 지점에 루터 자신도 빠져 들지 않았던가? pecca fortiter, sed fortius fide et gaude in Christo 즉 “죄를 범하는 데 대담하라. 그러나 보다 더 씩씩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 루터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는 이미 죄인이므로 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사제가 되든 속인으로 있든 경건을 원하든 악을 원하든 세상의 올가미에서 벗어 나오기는 틀렸으며, 이렇든 저렇든 너는 죄를 행할 것이니 죄를 행할 바에는 차라리 – 이미 이룬 은혜에 따라 – 용감하게 행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은혜는 값이 싸지고 면죄부(免罪符)가 되고 순종의 해체를 뜻할 것이다. 은혜는 이 때 범죄하는 데 용기를 주는 근원이 되지 않는가?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삼아 범죄하는 것보다 더 악마적인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이것을 성령에 거스르는 죄로 보려는 천주 교회의 태도는 옳은 견해가 아닐까?

옳게 이해하는 관건은 결과와 전제의 차이를 뚜렷하게 하는 데 있다. 루터의 이 말이 소위 은혜 신학의 전제가 되면 값싼 은혜의 논리가 선포된다. 그러나 처음이 아니라 끝으로, 결과로, 마지막 돌로, 최후의 말로 보면 루터의 이 말은 옳게 이해된다. 전제가 될 때, “죄를 범하는 데 대담하라”는 윤리적 원리가 되고 은혜의 본질은 이 윤리적 원리와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의인이다. 루터의 글은 이 때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린다. “죄를 범하는 데 대담하라!” 이 말은 루터의 최후적 탈출구였으며 따라가는 생활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될 수는 없음을 안 그가 죄 앞에 무서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는 자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루터의 이 말은 불순종하는 자신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의 복음이므로 그 앞에 우리는 항상 죄인이요 복음은 우리를 죄인으로 발견하고 의롭다고 변명한다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는 데 과감하라. 죄에서 도망하지 말고 “믿는 데는 더 용감하라” 죄인은 너다. 그러므로 오늘도 너는 죄인으로 지금의 너 이상 다른 것이 되려고 하지 말라. 그렇다. 날마다 다시 죄인이 되고 죄에서 용감하라. 그러나 누구에게 이런 말이 해당할 것인가? 이 말이야말로 충실히 죄와 항상 싸우고 예수를 따라가는 데 지장이 되는 모든 방해물에 날마다 항의하는데도 사라지지 않는 불충실과 죄로 불안해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신앙의 위태함을 느끼지 않으면서 누가 감히 이 말을 들어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말이 주는 위로를 통하여 다시금 기운을 얻고 예수를 따르는 출발을 새로 다짐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루터의 이 문구를 이렇게 결과로 이해할 때에만 은혜만으로라는 말씀은 귀한 은혜가 될 것이다.

장을 달리하여, 은혜에 공허를 느끼고 고민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사실을 다시 되풀이하겠거니와 특히 값싼 은혜로 그리스도의 따름을 잃고 그리스도의 따름에 의한 귀한 은혜의 이해까지도 잃어버린 것을 고백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 사실을 성실히 그리고 솔직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여기에 우선 요약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바로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은혜의 순수한 교리를 가진 잘못되지 않은 교회의 한 지체이기는 하나, 순종하는 교회의 지체는 아닌 것을 부인할 수 없는 때문에, 은혜와 순종의 상호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노력을 다시 해보자는 이 과제는 오늘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교회의 고민이 우리에게 점점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생활에 대한 자세의 문제이다.

우리 자신의 길 마지막에 서서 사실 파악할 수 없는 것 즉 은혜는 순수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때문에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따라가 은혜로 자신을 극복하고 겸손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 은혜를 인식하고 세상 생활에서 이 인식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하늘나라가 확실하여져서 세상 생활에 사실 자유한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이 은혜의 힘에 의한 생활이니 은혜는 따라가는 것임을 아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은혜의 말씀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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