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론: 그 계급적 성격 명확히 해야 현실성도 있다

강의 때문이기도하고 또 어떤 토론회에 토론자로 초청되기도 해서, 기본소득론에 대해 좀 살펴봤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가능만 하다면 한번 해볼만도 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난 이게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일시적인 사회분위기에 밀려 설사 진짜로 실행된다고 해도 지지부진하다가 그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던 차에… 이번주에 나온 주간지 {한겨레21}의 ‘1000호 기념 특대호'(2014.3.3 제1000호)에서 기본소득이 커버스토리로 다뤄지고 있는 걸 보았다. 기본소득론이 이 정도였나? 내친김에 기본소득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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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론에 대해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배당이나 이자, 증권양도소득 등에 과세하고, 탄소세 등 환경세와 토지세를 걷으며,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무려 180조 원이 넘는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엔 ‘어떻게?’가 없다. 그리고 이 ‘어떻게?’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첫째, 가장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방식의 재원마련은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배당, 이자, 증권양도소득, 토지보유 등에 과세를 한다는 것은 곧 이 사회의 고액자산가들과 자본가들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 3개 상장 계열사로부터 총 1천79억원의 배당금을 2013회계연도에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링크). 그밖에 그의 자산은 한해에 3~4조 원씩 불어나니(링크), 결국 위와 같은 과세체계가 실행될 경우 그는 한해에 이래저래 1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세금으로 더 내야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이건희씨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 자본가, 전체 대자산가에 대한 문제다. 이것을 어떻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한 실효성 있는 실행방안이 없는 한, 기본소득론은 한 마디로 공염불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한에서, ‘기본소득은 이건희에게도 주자는 것이므로 보편적이다’라는 주장은 하나마나한 것이다. 뭐가 보편적인가? 1조 원 뜯어가고 360만 원 주는 건데..]

둘째, 위 사항은 기본소득 문제란 결국 계급이슈임을 드러내준다. 이건희씨에게 1조원을 내도록 만약 강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즉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써 강제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각종 사회세력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양념으로 필요할 것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노동자 세력이 약화돼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노동자 중심성’, ‘노자관계 중심성’이라는 말의 경제적 의미도 바로 이거다. 적-녹-보 연대, 물론 중요하지만, ‘녹’이나 ‘보’에서는 ‘돈’이 안 나온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계급이슈라는 것은, 이를 위한 재원마련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 정도 함의를 준다. 즉 현재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재원마련을 다양한 세목을 신설해서 하기보다는 (근로)소득세를 더 걷어서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말이 된다는 얘기다. 물론 이를 위해선 임금인상이 선행되어야 하며, 오로지 그럴 때에만 소득세 인상이, 그리고 나아가 기본소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이번 {한겨레21}에 나온 재원마련안을 보니 기본소득론자들도 종합소득세(근로소득 포함)에 50%의 기본소득세를 부과해 27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 이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임금인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리고 그러한 임금인상을 위한 계급투쟁의 당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이러한 증세 문제를 계급이슈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기본소득론이 얼마나 현재 운동진영의 퇴행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가가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기본소득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복지국가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의들이 그렇다. 그들은 오로지 ‘시민의 자발성’만을 바라볼 뿐이며, 그러한 시민들이 한데모여 소리지르면 자본가들이 알아서 돈을 내줄 줄 안다.]

셋째, 현재와 같은 기본소득 재원마련안은 경제학과 세제에 대한 심대한 몰이해에 기반해 있다. 기본적으로 없던 세금이 부과되면 비용이 증가하거나 가격이 높아져, 기존과 같은 물량보다 적게 생산되거나 소비된다. 나는 이 문제를 ‘지하경제 양성화’와 관련해 풀어낸 적이 있다(링크). 요컨대, 지하경제 양성화란 이를테면 ‘현금가 임플란트’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에 따라 임플란트 가격이 모두 ‘카드가’로 되어 임플란트 소비량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러한 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지하경제 양성화의 세수효과’는 크게 과장된 거란 말씀이며, 또한 여기서도 임금인상 없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치과의사에게만 해로운 게 아니라 일반 소비자(=노동자)에게도 해로우며, 그런 의미에서 지하경제 양성화조차도 계급이슈란 말씀이다.

뿐만 아니다. 기본소득론자들은 이를테면 환경세를 대대적으로 걷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세’적인 성격의 세금을 걷어서 환경이 아닌 ‘기본소득’에 쓰겠다? 이것은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가 기초노령연금을 국민연금에 연계시키자, 나아가 국민연금 기금을 기초노령연금 재원으로 삼자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탄소세 등 환경세를 걷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점점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오고 있다. 다만 그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럴까? 다름아니라 시민들의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자본이 점점 ‘환경산업’에 관심을 보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현재의 추세가 지속돼 환경세를 실제로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이는 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우려가 그만큼 커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환경보호를 명목으로 거둬들인 돈 30~40조 원을 환경보호가 아닌 다른 곳에 쓰기가 매우 어려우리란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이 가만 있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렇게 소중한 가치로 인정받고 자본도 따라서 산업재편 노력을 한다면, 환경세로 거둔 재원은 환경보호에 앞장 선 자본에 대한 ‘상금’으로 쓰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쓰일 것인지는—즉 ‘자본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 ‘대중을 위한 환경’에 쓰일지는—실제 현실에서 각종 투쟁과 갈등의 결과로서만 결정될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심지어 환경세를 걷는 문제조차도 계급이슈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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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한데도, 기본소득론의 곳곳에는 그것이 계급이슈임을 애써 감추려는 의지가, 심지어 ‘계급’에 대한 적대까지도 뭍어있다. 이를테면 이들은 ‘소득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라면서(그런데 이 말은 마르크스식 정치경제학의 견지에서 봐도 맞는 말이긴 하다. 소득/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비용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하거나 개인의 자아실현과 관련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증진하는 데 기본소득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임노동이 그만큼 덜 발달했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인디음악인이나 평론가, 각종 ‘예술행위’ 종사자들이 기본소득의 주된 수혜자들로 광고되지만, 실상 이들 중 상당수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선 ‘버젓한 직업인’으로 존재한다. 한국에서 그들이 먹고살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임노동화’되지 않아서이거나 자본이 그들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본이 그들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지 않는 것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자본의 관점은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위장돼 일반 대중의 의식을 규정한다. 즉 ‘대중은 평론가란 쓸데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거다!

결국 (기본소득론과 같이 현체제를 인정하는 한) 평론가들의 사회적 유용성이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길은, 그들이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함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없다. 물론 그들은 이미 지금도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자본으로 하여금 이를 ‘인정’하고 그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한 재원을 내놓도록 하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강제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 외에 그런 수단이 있는가? 단순히 말하면, [임금인상→잉여소득의 소비처 필요→평론 소비→평론가 고용시장 발달→평론가 임금지급 정례화]같은 식이다. 이렇게 평론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직종이 되며, 만약 이랬는데도 제대로 먹고살기 어려운 평론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기본소득(이 됐든 실업수당이 됐든)을 주면 된다. [이번 {한겨레21} 기사에서도 나타나듯, 기본소득론자들과 (보편적)복지론자들은 서로 싸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기본소득의 ‘잔여적’인 성격이 명확해지면 둘의 차이는 그야말로 별 게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기본소득도 위의 임금인상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위 연쇄의 ‘임금인상’ 자리에 ‘기본소득 지급’만 넣으면 된다. 이것은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론자들은 평론가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만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즉 평론이 임노동의 영역에 매우 불완전하게 편입되고 있는 한국에서와 같은 미발달한 자본주의 하에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가일층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도 한다. 이를테면 이번 {한겨레21} 특집에서도, 기본소득이 ‘배짱이’만 늘릴 거라는 추측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언급한다.

실제로도 배짱이는 늘지 않았다. 2008~2009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한 가난한 마을에서 주민 930명에게 월 100나미비아달러(약 1만5천원)를 아무 조건 없이 지급했더니, 실업률이 1년 새 15%포인트 떨어졌다. (44쪽)

무엇보다 장소가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라 후발국인 나미비아라는 것이 중요하다. 위 사례는 ‘기본소득이 배짱이를 늘리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그런데 나는 이것이 왜 기본소득론자 입장에서 ‘장점’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은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삼고있는데,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가 인정하지 않는 ‘배짱이’를 증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진전을 촉진함’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좀 더 일반적으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라는 의의도 크게 퇴색되지 않을 수 없다.

핵심은 ‘권리’다. 부양의무자, 자산 등을 심사할 필요 없이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은, 선별적 복지에서 전면적인 보편복지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뜻한다. 또 기본소득은 노동과 소득을 분리시킨다. 소득은 더 이상 노동의 대가가 아니게 된다. (44쪽)

여기서 보듯, 기본소득의 ‘대안적 성격’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음미되고 있다. 노동-소득연계의 분리 문제는 위에서 다뤘으니 생략하고[앞서 평론가의 예에서 보듯, 기본소득론이 노동-소득 연계를 초월한다는 그 옹호자들의 주장은 별 근거없는 것이다], ‘무조건성’에 대해 마저 보자. 이것은 의외로 기본소득론자들이 기본소득의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해 즐겨쓰는 근거인데, 내가 보기엔 정말 너무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 지급단계에서 ‘무심사’, ‘무조건성’은 그 이전단계에서 부양의무자 존재여부, 자산정도, 소득수준 등에 대한 면밀한 정보의 수집과 심사를 반드시 전제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건희에게도 기본소득을’, ‘이건희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을’이라는 슬로건은 오로지 ‘이건희에게서 1조 원의 세금을’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게 뭔 소리냐고?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연봉1억원 의사와 연봉5백만원 활동가에게 동등한 기본소득을’은, ‘전자에게 세금 5천만원, 후자에겐 세금 0원을’ 위에서만 가능하단 말씀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성’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내세울 만한 장점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세상사가 그리 간단친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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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 기본소득론의 매력은 그것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그야말로 ‘한 큐에’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본소득론이 현재와 같이 좌파운동진영이 파편화된 상황에서는 다양한 세력들을 모아내고 좀 더 활발한 논의의 장을 여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도 바로 그러한 ‘보편성’에서 나온다. 우리가 정말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면, 기본소득론이란 비현실적이거나 퇴행적인 것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보다 우리에겐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좀 더 깊이 천착하는 대안이 필요하다. 현재 그러한 대안은 그 무엇보다 노동–자본 간의 계급모순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만 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임금인상’을 가져올 계급투쟁의 전면화와 첨예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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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thoughts on “기본소득론: 그 계급적 성격 명확히 해야 현실성도 있다

  1. (추기) 나는 마르크스경제학 하는 사람이니, 좀 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비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위 글에 그런 추상적인 측면도 없진 않기도 하거니와) 기본소득론자들이 구체성과 현실성을 자신들의 입장의 장점으로 삼으니, 나도 구체성과 현실성 차원에서 비판을 해본 것이다.

    현재 보수정권조차도 ‘복지’를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문제가 ‘당위성’을 넘어 ‘비용’의 차원으로까지 구체화되었다. 이에 발맞춰, 그 ‘당위’보다는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대안을 내놓자는 것이 기본소득론인 셈이다.

    그런데도 실상은 그러한 기본소득론조차도 충분히 구체성과 현실성에 천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위 글은 그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여전히 ‘당위’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즉 여기서 기본소득론자들 및 기타 ‘복지’론자들은 다시 문제를 세분해,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를 나누어 전자의 ‘당위’를 선전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도 하나의 정치적 구호로서 그 자체론 나쁘지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대안’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1. 방가방가^^ 일단 한 꼭지 채운 셈인데.. 다른 여러 차원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더 지혜를 모아봐야지요. :)

  2. 페이스북에 담아갑니다. 벌써 두번째! ㅋㅋㅋ
    기본소득공동행동대에 들어와달란 말을 이런식의 분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거절했는데 뭔가 더 찐한 이유를 찾고 싶었거든요. ^^

    1. 어흑… 님의 덧글이 스팸덧글함에 들어있더군요 -_-;; 죄송하고요.. 뒤늦게나마 살려드렸네요 ^^;;; 좋은 코멘트 많이 부탁드립니다! :)

  3. 헉. 현재 484 Likes의 위엄. 500 넘어가면 한턱 쏘시나요? :)

    읽고 나니 왠지 기본소득보다 사회주의가 좀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1. 그러게 말입니다. 사회주의가 차라리 더 쉽겠어요ㅋ 그런데 그 사이에 500이 넘어갔네요ㅎㅎㅎ 한턱을 쏘는 것도 좋은데… 아.. 진심으로 쏘고 싶은데!!! 누구한테 어떻게 쏘면 될까요? :)

  4. 아 정말 벌써 500이 넘었네요! 알쏭달쏭에 과자 쏘시죠 ㅋ 그나저나 이 정도면 기본소득 주장하는 쪽에서 반론이 나올만도 한데…

    1. 반론으로 항간에 재원마련의 현실성에 딴지를 거는 작자가 있던데 유럽만큼 고소득층 세율을 높이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EM은 과자조차 쏘지 않았고 과자를 먹을 줄 알고 빈속으로 왔던 뎡야핑은, 과자가 많을 줄 알고 쥬스만 잔뜩 사온 저를 만나 물배만 채웠다는…..-_-

      1. 흥. 과자는 아니지만 과자보다 더 좋은 “일반적 등가물”을 쐈잖소?!!! ㅋㅋ 그리고 과자에 빈속을 채웠다면 필시 탈이 났을 것이고, 과자가 없던 덕분에 쥬스가 더 빛이 났다고.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지.. 😛

        (그리고 세율에 대해선… “늬들 세율 안높이곤 고소득층 세율 못높일게다”라고 말해주고픔.)

      2. 괜찮습니다. 곧 있으면 600을 넘어설 것 같아요 (현재 599). 곧 퇴장되어 있던 일반적 등가물이 유통에 투입될 거에요…

  5. 180조를 5천만 X 12로 나누면 한 달에 30만원..
    거창하게 기본소득이라 이름 붙인 것 치고는 액수가 너무 짜네요. 적어도 매달 100만원은 받아야죠. 재원은 600조 정도 필요하겠네요ㅎ

  6. 우연히 다음과 같은 “반론”을 봤다. http://interojh.blog.me/150186777778

    솔직히 나는 저 내용에 거의 100% 동의한다. 그럼에도 내가 본문과 같은 글을 쓴 것은 일정한 “(논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저 글쓴분은 “기본소득 주장 자체가 계급투쟁이다”라고 역설하는데, 누가 아니래냐? 문제는 이 점을 부정한 사람들이 바로 기본소득론자라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노동운동은 끝났다”라는 식으로 주장한 게 누구였더라? “새로운 계급” 운운했던 게 누구였더라? 이러한 명제를 자신의 주장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게 누구였더라? (다른 사항들에 대해선 굳이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떠한 논의에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맥락”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아무 소리나 내뱉으면 발전이 없다. 개인들 간의 사소한 대화도 마찬가지다. 대화 흐름에 따라 계속 말을 바꾸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대화/언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될 수 있어도, 서로간에 발전을 도모하는 길은 못 된다.

    에… 이상은 “반론”에 대한 나의 formal한 반응이고… 지금부턴 넉두리.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 계급투쟁… 한때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이런 것들이 오늘 처한 “동네북” 같은 운명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심지어 (기본소득론) 같은 진보진영의 담론/운동들도 이런 것들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가? 그래놓고 이제와서 “우리가 하려는 게 계급투쟁이야”라니…

  7. 참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공유하겠습니다.

    핵심적인 주장에는 동의합니다만
    기본소득에.대한 비판의 상당부분은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에도 타당한 것 같습니다.
    계급적 단결과 역량의.강화. 전면적인.임금 인상….
    이런 것들이 어려워지면서 기본소득에.대한 주장이 확산된 거 아닌가요?
    그런데. 그것 또한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과제….현재로선 ‘당위’에 그치고 있는게 아닌지…
    기본소득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이론의.문제가 아니라 현실의.문제.같은데…..

    1. 오 고맙습니다 ^^

      저는 기본소득에 비판적인 분들이 그 자체로 칭찬받을 만한 (경제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고, 그들에겐 그에 맞는 다양한 비판들이 가해져야 할 거라고 봅니다. 즉 각자에 “적합한” 비판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고요…

      “계급적 단결과 역량의.강화. 전면적인.임금 인상….이런 것들이 어려워지면서 기본소득에.대한 주장이 확산된 거 아닌가요?”라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이 최근 최저임금을 둘러싼 투쟁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기본소득과 최저임금,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는 (근본이 뭔지도 불분명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전제로 하는) “소득”이고요, 다른 하나는 (임노동관계를 전제로 한, 역시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만 핵심적으로는 자본을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임금”입니다. 저는 당연히 후자가 더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1. 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저는 학생이라 잘은 모르지만,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의 발달로 많은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한다는 전망을 봤습니다. 그때되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거라고도 하지만, 노동-임금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다면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에 대한 대비로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가요? 합리적일까요?

        1. 이렇게 좋은 덧글이 무슨 일인지 스팸함으로 가서 답이 늦었습니다. ^^;;

          당연한 문제제기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거라는 점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해 인간이 할일이 없어지리라는 것은 자본주의 출현 이후 계속 들어오던 주장이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봐오던 현실은 과거엔 상상하지 못했던 일자리들이 계속해서, 대량으로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이라는 범주의 의의가 쉽게 축소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위와 같은 사정을 십분 인정하더라도.. 뭔가 “변화”가 벌어지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변화에 대응해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1) 그런 의미의 기본소득이라면 이미 이런저런 방식으로 시행중이고, (2) 이러한 기본소득은 기본소득론자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의 특장점을 (대체로) 갖지 않으며, (3) 이 경우에도 위 본문의 비판은 여전히 적용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기본소득과 같은 성격의 각종 사회적 급부의 확대/강화에 적극 찬성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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