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업이 존재하는가?”: Coase의 100살 생일에 부쳐

‘거래비용’의 관점에서 ‘기업의 본질’에 대해 설명했던 코우즈(Ronald Coase)가 12월29일에 100살이 된다고 한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의 소유자인 이 할아버지는 내년 초에 중국에 대한 책을 하나 낼 예정이시란다. 대단하다. (코우즈에 대해서는 이 [링크]를 참조.)

어찌되었든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있다는 것은 축하해줄 일. 그래서인지 <이코노미스트>도 최근호에서 코우즈의 ‘업적’을 되씹는 방식으로 그의 건강과 장수를 기리고 있다. [Why do firms exist?]

기사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기업을 구성함으로써 거래비용이 엄청나게 낮아지기 때문이라는 것.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가? 난 그냥 웃는다. 에… 덧글 중에서는 ‘D. Sherman’이라는 분의 얘기가 좀 맘에 든다. (에에… 나도 하나 달았다. 아니, 빼먹은 말이 있어서, 연속으로 두 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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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왜 기업이 존재하는가?”: Coase의 100살 생일에 부쳐

  1. D.Sherman이라는 분은 회사 등기랑 법인격 이야기 하시는 것 같은데, 역시나 법학에서 다룰 주제가 아닌지… 진짜 상법 전공해서 어떻게 법사학 쪽으로 빠져버릴까;

    1. 네, 그렇죠. (잘 아시겠지만) 법경제학이라고 해서 나름 요새 뜨는 종목입니다. ㅎㅎ 물론 기원을 따지자면 코우즈의 논문(1931년?)이 나오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겠지만요. Adolf Berle와 Gardiner Means의 {The Modern Corporation and Private Property}(1932)가 거의 경전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 전에도 비슷한 논의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고로, 그쪽으로 공부하시면 제게도 많은 도움을 주실 수 있답니다. ^_^ (물론 뭘 공부하셔도 제겐 도움이 되겠지만;;; 특히 ‘더’ 그렇다는 거죠 뭐;;)

  2. 덧글 다는 김에 하나 더. 그렇다고 내가 ‘거래비용’ 따위에 완전히 흥미가 없는 건 아니다. 그게 나름대로 개별 경제주체 간의 미시적 관계에서는 어느정도 먹혀든다고 본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쓸모를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위 Economist의 기사에 단 덧글도 그런 맥락이다. 첫째로, 기업의 존재이유를 ‘거래비용’ 차원에서 따지는 것 자체가 좀 웃기다는 것이고, 둘째로, “기업이 왜 존재하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웃기다는 거다. 만약 그런 질문이 유효하다면, 코즈 할배는 자신의 존재부터 거래비용 감축의 차원에서 그 정당성을 증명해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난 웃는다.

    1. 부르주아 미시경제학에서 말하는 외부성이라는 개념부터가 다 그런 거 아닐까요? 자유방임 단계, 예컨대 환경 오염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없는 그러한 단계에서는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더 나중 단계에서 경제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외부성이라는 황당한 개념의 도입이 필요했던 거겠지요.
      또,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생산’ 비용 개념 외에 다른 여러가지 비용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그런 비용 개념들로 구성된 경제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려는 거겠지요. 사회적 비용 개념 등도 마찬가지일테구요.
      문제는 현대 맑스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정치)경제학 ‘비판’에 게으르다는 것…학문적 수준에서나 일상적 수준에서.
      하지만 정작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뒤늦은 이론적 정당화와 관계없이 여러가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특히 한국 자본가들은 불법적 영역이나 비공식적 영역에서도 여러가지 비용을 많이 쓰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삼성이 정치권 및 언론과 검찰에 지불하는 소위 떡값에서 보여주듯이요…

      1. 네, 말씀하신 것에서 힌트를 얻어 하나 덧붙이자면, 결국 ‘(거래)비용’의 문제는 기업 존재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기업 존재 이후의 문제라고 보는 게 훨씬 더 타당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비용’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난무하는 것은, 그야말로 용어의 남용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선 ‘(사회)자본’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자본’에서 그렇듯 ‘비용’과 관련해서도, 문제는 쉽게 ‘비용’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비용이라고 부르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이를테면, ‘사람인 내가 너희에겐 비용에 지나지 않겠지만’ 운운)는 게 아니라, ‘너무 단순하다’는 겁니다. 너무 단순해서 과학적이지 않고, 현실을 다루는 데 쓸모가 없다는 것이죠. 다른 개념들과의 유기적 상관관계도 문제고요.

        학자들의 ‘게으름’을 질책하셨는데, 네, 옳으신 지적입니다. 하지만 더불어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다고 올바른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인데요… 가뜩이나 마이너한 ‘마르크스경제학’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더더욱 마이너하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전반적으로 학자들의 수준이 낮아져서, 좋은 문제제기들을 가려낼 안목조차 없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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