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혁신적 이론이 혁신적 복지국가를 만든다'(프레시안)

<프레시안>에 오늘 아침에 난 기사, ‘복지국가SOCIETY’에서 낸 ‘혁신적 이론이 혁신적 복지국가를 만든다’를 읽었다[기사 링크]. 몇 가지 감상.

1. 워낙에 잘 모르는 내용들이 있어서, 일단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많이 배웠다.

2. 글쓴이의 성향은 무엇인가? 언뜻 봐서는 ‘사회민주주의자’인 것 같지만 잘 보면 유독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에만 호의적인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글쓴이는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 이를 구공산주의하고만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카우츠키가 이끌던 독일식 모델과도 대비시킨다. 구공산주의야 망했다 쳐도, 독일이 망했는가? 이런 대비가 대체 무슨 소용인가.

3. 구공산주의에 비판적이라면 당연히 그 뿌리인 레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어야 할텐데, 기사의 제목은 또 레닌 스타일이다. 실제로 글도 레닌의 언급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게 뭔가? 뭐 그래봐야 일부이겠지만…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빨갱이’는 싫어하면서도 ‘레닌’은 숭배하는 이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이들이 ‘굳이’ 자신의 분열상을 드러내는 것은 재밌다.

4. 내가 하는 일이 하는 일인지라, 글쓴이의 마르크스에 대한 언급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다음 언급은 좀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왜 지금과 같은 글에 이런 언급이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글쓴이 나름 뭔가 ‘심오함’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 같은데, 내겐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해빠진 잘못된 해석들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칼레비의 마르크스 해석은 현대적으로 해석할 때, 탁월한 분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의 주저 <자본>은 상품 ⇒ 화폐 ⇒ 자본의 순서로 전개되는데 이에 대해 각각 상품관계, 화폐관계, 자본관계로 표현된다. 상품관계와 화폐관계는 ‘아직’ 자본이 아닌 것이다. 자본관계의 개념적 성립은 ‘노동력의 구매’가 이뤄지는 시점인데, 이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상품과 화폐가 아닌, ‘지배관계’를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5. 글쓴이는 때에 따라서는 정당들 사이의 연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스웨덴’에서 그렇게 해서 성공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연합 자체가 아니라 그런 연합이 이뤄지는 ‘배경’ 아닐까? 단적으로 말해, 스웨덴에서도 정당들이 현재의 우리나라에서처럼 계급 대표성이 없었는가? 뒤집어 말해, 현재의 우리나라 정당들–특히 민주당–과 같이 대표성 없는 정당(민주당은 이제 ‘지역’ 대표성도 매우 약해 보인다)과의 연합이란 그저 정치권력 획득을 위한 ‘야합’에 다름 아닌 게 아닐까?

6.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머리 아프게 잘 알지도 못하는 ‘모델’만 자꾸 가져오지 말고, 그냥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복지가 필요하면 복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나아가 어떻게 그 복지를 실현할지를 말하면 그만이다. 남의 나라 경험은 참조만 해도 그만이다. 아, 하지만 이 말은 이 글에 대해 하는 비판이 아니라, 전체적인 논의 지형을 두고 하는 말이다.

7. 과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다시 말해, 특히 위 사항과 관련해서, 어느 특정한 나라의 복지국가 경험을 도그마화한 ‘모델’들을 여기저기서 강조하는데, 정작 우리는 ‘복지’가 뭔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가 뭔지, 그것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짜여져 있는지, 그리고 그런 것들이 현대사회에서 취하는 ‘특수성’이 무엇이며, 그 안에서 그런 것들이 제기하는 ‘특수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등등에 관한 ‘근본적인’ 사고를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8. 하여간에 (독일식이든 스웨덴식이든) ‘사회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대비시킬 때는, 단순히 그 둘이 오늘날 어떻게 귀결되었는지만 봐서는 안 된다. 더구나 전자의 ‘성공’을 후자의 ‘실패’와 대비시키는 것은 정말 저열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아니, 이는 저열할 뿐만 아니라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은 ‘공산주의’의 실패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글쓴이가 강조하는 바와 같은 ‘연합’의 성공 이면에는, 그들이 연합을 통해 왕따시킬 성가신 ‘공통의 적’ 즉 ‘공산주의’가 있었다는 사정이 있다.

저 부르주아 돼지들의 온갖 공격을 ‘공산주의’가 받아내지 않았다면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공산주의가 사라진 다음에야, 즉 시기적으로는 1990년대 이후에야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즉 ‘1990년대 이후의 사회민주주의’란, ‘공산주의’의 (‘폐허’는 물론) 온갖 ‘성과들’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을 무시한 채 행해지는 ‘사회민주주의’ 찬양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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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코멘트] ‘혁신적 이론이 혁신적 복지국가를 만든다'(프레시안)

  1.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민주의 구상의 주체들은, (1) 과거의 ‘공산주의’와 같은 역할을 해줄 일종의 ‘보호막’ 내지는 ‘유력한 공공의 적’을 찾아내거나, 또는 (2) 그런 보호막 없이도 자생이 가능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2. 사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최대의,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제국주의론 내지 세계체제론의 전망에서 생겨나는 고민이 없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잘못 하면, 일국 내에서의 이념적 지형(국내 수준의 좌우로부터의 압박)에 매몰되거나
    기껏 해야, 유럽중심주의적 지형(유럽 수준의 좌우로부터의 압박)에서 논의하는 것일 뿐.
    그 그릇된 결과가 공산주의에 대한 패닉에 가까운 비난으로 나타나는 거겠죠.

    —————————————————————
    예컨대 베른슈타인을 높이 평가하는 경우로
    이미 일본 좌파 아카데미 안에서도
    타이라코 토모나가(平子友長, 1951 -- )의 책 “사회주의와 현대세계(社会主義と現代世界, 1991)” 같은 게 이미 나름대로 이론사적으로 잘 정리해 놓고 있어요.

    타이라코는 동유럽과 구소련이 몰락할 때 현장에서 연구 중이었고
    지금은 일본에서 두번째 메가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는 그룹의 한 사람예요.

    한국의 답답한 논자들과는 달리
    타이라코는 나름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세계체제론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입장 정리를 해나갔다고 하네요.

    타이라코는 지금은,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일본에서의 고질적인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네이션-스테이트로서의 일본에 대한 비판이 그의 관심사인 거죠.

    물론 저는 타이라코의 맑스 이해와 베른슈타인을 인정하는 논의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적어도 그의 시야가 일국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어요.
    타이라코는 제국주의론적 관점의 결여가 베른슈타인의 한계라는 것을 잘 지적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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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사민주의 내지는 ‘복지 국가’에 대한 물음은

    1. 복지의 경제적 기초의 문제,
    즉, 일국 수준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배분될 경제 잉여의 출처와 관련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 한국 자본주의를 어떻게 보고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

    2. 그러한 체제 내지는 정책을 실현시키는 정치 단위 내지는 영역으로서 ‘국가 일반’ 및 남한의 국가(및 정치 제도 및 이데올로기 등)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는 공염불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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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야를 동북아에만 제한한다고 하더라도,
    남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취가능하다고들 떠드는 복지라는 것은
    대체 북한 인민과는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되는 걸까요?
    혹은 중국의 신세대 농민공(新生代 農民工)과는요?
    혹은 일본의 프리터 및 소위 후기 고령자들과는요?

    특히 스웨덴 등의 북유럽 모델 얘기하는 사람들(요즘 장하준을 포함해서) 얘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 짜증나지요.

    물론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한 예로서 거론하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북유럽 국가들이 모델이 될 수는 없거든요.

    반면에, 최근 들어 북유럽을 포함해서 유럽 전체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슬람계 이민자들을 포함한 아시아, 아프리카계 이민자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공격은
    자기네 복지 체계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포에서 유래하는 듯 보여요.

    암튼 북유럽 모델을 떠들어대는 친구들에게는 입 닥치고
    일단 가까이 있는 싱가포르나 일본으로부터 배우라고 해주고 싶네요.

    근데, 정작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라서 배울 게 없고,
    또 일본의 복지 체제도 고이즈미 집권 이래로 이미 무너져 버리기 시작했거든요.

    달리,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도 크게 보면
    이런 문제와 같은 성격을 갖는 거겠지요.

    1. 답이 늦었네요. 죄송해요;;; 덧글 달아주신 건 진즉에 봤지만, 한동안 좀 산만하게 지내서 늦었어요 ^^a

      무엇보다 먼저, 좋은 덧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있는 이 블로그툴엔 회원가입해서 contributor가 되는 기능이 있는데요, 아예 한자리 차지하시고 종종 (덧글 말고) 글을 써주셔도 좋겠습니다. ^^ (혹시 원하시면 말씀하세요!)

      특히 平子友長라는 분에 대해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워낙 독서와 식견이 짧아서.. 앞으로도 그런 말씀 많이 해주시길 바라고요… 말이 나왔으니 말씀인데요, ‘이론’의 영역에서 보더라도, Leo Panitch나 Negri/Hardt 같은 사람이 대표적일텐데요,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 같은 인물이 1990년대 후반 및 2000년대 초반부터 크게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인기가 10년도 못 간 것 같습니다만…

      하여간 Panitch나 Negri/Hardt 모두 “국제적” 시각에 대해서라면 내로라할만한 분들이니, 요즘엔 “국제적” 시각을 갖는 것은 차라리 상식이고, “어떤” 국제적 시각이냐가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사민주의 주창자들은 지나치게 일국적 틀 안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식”으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데… 그마저도 우리랑은 별 상관도 없고 유사점도 희박한 북유럽 나라를 끌어다가 “모델”이랍시고 내놓는 것을 보면, 그 일국적 시각이 “현실”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한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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