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1)

다음은 IIPPE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이다. 몇 번에 걸쳐 나눠 올릴 예정이다.

I. 머리말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International Initiative for Promoting Political Economy, 이하 IIPPE로 부름)는 일종의 진보적인 연구자들의 국제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학(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경제학과 교수로 있는 벤 파인(Ben Fine)의 주도로 2006년에 설립되어 2010년 5월 현재 전세계에 걸쳐 6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 포괄범위와 영향력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키우고 있다. IIPPE에 대한 가장 간략한 설명으로는 다음과 같은 그 홈페이지에 있는 소개가 적당할 것 같다.

IIPPE는 정치경제학을, 그 자체로서는 물론이고, 주류경제학•그에 대한 비주류적 대안들•학문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제반 실천활동—진보적 정책을 내는 것에서부터 각종 진보적 운동을 지원하는 것에 이르는—등에 비판적이고 건설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장려할 목적으로 2006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지적 활동의 내용과 방향의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는, 우리가 주류경제학을 억누르고 비판한다고, 반대로 여기 대응해 정치경제학 내부에서 대안들을 모색한다고,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밝히고 그에 대응하는 정책 및 기타 이슈들을 제기한다고, 여타 사회과학 분야들에서 정치경제학의 존재 및 ‘경제학 제국주의’ 비판의 존재를 적극 인정하고 거기 기여한다고 스스로 인식한다. 비록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 IIPPE 안에서 크게 자리하고 나아가 참여자들이 거기에 심각하게 개입할 것을 기대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IIPPE는 모든 종류의 진보적인 정치경제학이 환영받는 다원적인 공론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이론적•경험적•실천적 이슈들을 가로지르는 보다 건설적인 지적 개입을 희생하는 대가로 상아탑에 갇힌 공론(空論)을 되풀이하는 데는 반대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라는 양극단으로부터의 지적 후퇴 및 그와 같은 의제설정 프레임으로부터의 후퇴는, 여러 사회과학들을 가로지르는 진보적 전망들이 지난 오랜 기간에 비해 훨씬 더 열려있음을 뜻한다. 여러 사회과학들을 가로지르는 학계 내부에서는 물론 그보다 훨씬 넓은 바깥에서 정치경제학을 조화롭게 증진시킴으로써, 우리는 지속적이고 의미심장한 파급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IIPPE 홈페이지]

이 글은 바로 이 IIPPE의 내용과 활동을 소개하고, 나아가 한국의 연구자들이 거기에 능동적으로 결합하도록 장려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실은 위 인용된 단락에 IIPPE의 핵심이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뜻에서 이 글은 위 소개글에 대한 긴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다음 절부터는 IIPPE의 출현을 둘러싼 몇 가지 직•간접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뒤에 현재 IIPPE의 구성과 활동, 전망에 대해 서술해 보겠다.

II. 경제의 위기에서 경제학의 위기로

IIPPE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현재 세계경제를 감싸고 있는 ‘위기’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경제의 위기(economic crisis)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특히 (경제)학자들에겐 지적 위기(intellectual crisis)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IIPPE와 같은 기획이 최근 심상치 않은 주목을 받는 것도 바로 그런 배경에서이기 때문이다.

“왜 누구도 그것이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가?” 이것은 2008년 11월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 LSE)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던진 질문이다. 여기서 ‘그것’이란 물론 당시 본격화하기 시작한 범지구적 경제위기를 일컫는다. 이후 이 위기는 주요국 정부들의 발빠른 대응으로 차츰 잦아드는가 싶더니 2010년 5월 현재 그리스를 선두로 한 남부유럽 국가들이 잇따라 파산의 위기로 몰리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추세다. 비록 지금 당장은 세계경제의 가장 취약한 곳에서 위기가 터지고 있지만,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쉽게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실 위 질문은 엘리자베스 여왕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경제위기로 직간접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지구상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공유할 법한 것이다. 경제학자의 눈에는 대책 없이 단순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현재와 같은 스펙터클한 위기만 아니었다면 쉽게 무시해버리고 말았을 위 질문에, 그 나라의 ‘최고’ 경제학자들이 다소 구차한―모든 사람이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는 식의―답변을 내놓기까지는 무려 8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에 신문•방송•인터넷 등 각종 매체는 위기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제학(자)에 대한 성토장이 되었고, 어떻게 경제학을 개선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도 곧 뒤따랐다. 전문 학술지들은 이와 관련된 특집호를 냈고, 세계 각지에서 세미나와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런 흐름이 경제학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것인가? 아직 그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기엔 이르지만, 경제학이 좀 더 ‘포용적인’ 모습을 취하게 될 가능성은 커 보인다. 여러 변화의 양상 중에서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것은 198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 시대에 ‘죽은 개’ 취급을 받던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다시 불려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특히 서유럽에서―마르크스(Karl Marx)의 《자본론》(Das Kapital) 읽기 선풍이 불고 있으며, 민스키(Hyman P. Minsky) 같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인물이 ‘(재)발견’되기도 했다. 좀 더 미시적 차원에서는, 기존의 주류경제학을 보완할 구원투수로 진화생물학이나 신경과학, 심리학 등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경제학이 주목을 끌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입장에 선 경제학자들이―굳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더라도―이번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자본주의 경제가 갖는 내재적인 불안정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대한 규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껏 (주류) 경제학이 그런 문제에 대해 취했던 옹졸한 태도를 떠올리면 매우 커다란 변화다.

사실 돌이켜보면,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언제나 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내지는 이론을 낳았다. 1930년대의 대공황이 이른바 ‘거시경제학’을 낳았다면 1970년대를 괴롭힌 장기불황은 오늘날 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낳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현실경제의 위기를 통해 경제학의 위기를 감지하고 나아가 경제학을 혁신한다는 비전을 내놓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19세기 중반의 마르크스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늘 자신의 이론을 ‘비판’(Kritik; critique)이라고 불렀다. 그는 철학을, 정치학을, 나아가 경제학을 ‘비판’했다. 그가 진정 의도했던 ‘비판’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은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비판’(critique)이 ‘위기’(crisis)와 어원적으로 같은 뿌리(κρίσις)를 가지고 있음에 주목할 수 있다. ‘κρίσις’(크리시스)란 고대 그리스에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에 의해 쓰였을 때 ‘병세의 전환점’―생사의 갈림길―을 뜻했다. 물론 이 표현은 환자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의사의) ‘판단’을, 나아가 그런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합리적 추론’과 ‘설명’을 전제한다. 곧 ‘κρίσις’란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품는 개념이었다. 이후 ‘crisis’가 다분히 의학적인 뉘앙스를 갖는―“이 환자는 critical한 상태에 있다”와 같은 예에서처럼―애초의 의미를 보존한 채 발전했던 반면 ‘판단’, ‘설명’, ‘추론’ 등의 의미는 critique로 독립되어, 후자는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명쾌하게 보여주는 대로 마침내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면 “합리적 사고를 통해 [대상에 대한] 적절한 통찰 및 결론에 이르는 기술”(Koselleck 1988[1959]: 108)을 일컬을 정도로 그 의미폭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결코 마르크스가 놓쳤을 리 없는 이와 같은 고려를 염두에 둔다면,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기획이 경제의 위기―곧 이미 당시에도 주기적으로 반복되던 공황―에서 경제학의 위기를 읽어내고 나아가 그 위기의 내용과 전후맥락을 면밀히 파악하여 진정한 경제학을 세우는 것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경제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경제학의 위기를 반추케 하고 나아가 경제학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전개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론이란 것이 일차적으로는 현실의 반영이고 나아가서는 그 모태가 되는 현실을 어느 정도는 만들어가는 힘도 있다는 상식적인 사항을 떠올리면, 경제위기가 곧장 경제학의 위기로 전화하는 것은 필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경제학의 위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계속)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1)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2)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3)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4)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5)

Print Friendly, PDF & Email
SNS로 공유하기!

11 thoughts on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1)

  1. 안녕하세염..백만년만에 덧글을 남깁니다-_-;; 제가 읽기에 이 글에서, ‘비판’과 ‘경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되고 있는데요. ‘비판’에 대한 접근이 ‘의미론적’이면서 거기에 합리성에 대한 근대적 시각조정의 내용이 ‘결합’하는 것으로 나타난 반면, ‘경제 및 경제학’에 대한 접근은 근대 사회 및 사회과학 형성과 관련된 역사적 ‘경제’ / 항존하는 영역으로서 존재론적인 ‘경제’ 사이의 ‘분리’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맑스가 의도한 ‘진정한’ 경제학 내에도 이런 애매성이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만일 그렇다면 이 애매성이 사회적인 것임을 어떻게 보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 음음, 그와 같은 사연(?)으로 덧글을 남기게 됐네요..ㅎ

    1. 간만에 반갑습니다, 순이님. 얼마전 책분양을 하셨던데… 저도 몇 권 탐나는 것이 있었으나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다 놓쳐버렸네요. ㅎㅎ

      에… 저는 근데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첫째, ‘비판’과 ‘경제’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되고 있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 ‘다름’의 내용이 무엇인지, 또 만약 정말로 다르다면 그것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둘째, 구분해서 제시해주신 두 가지 ‘경제’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감이 안 잡힙니다. 그런 구분의 가능성/적절성 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구분에 기대 주장하신 그 ‘애매성’이라는 것은 도무지… (-_-) 제가 감히 짐작하기엔 하인리히-곽노완의 경로를 거쳐서 말씀하시는 개념일 것 같은데요, 저는 애초 하인리히가 말하는 마르크스의 ‘애매성’ 내지는 ‘양가성’에 대해 좀 유보적인 입장이거든요. 그러니까 마르크스에게 그런 애매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의 문제제기/문제설정의 적절성에 대한 것이죠. 언젠가 이런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풀어내보고 싶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순이님께서 선빵을 (꼭 이 포스트와 관련해서가 아니더라도) 하나 날려주신다면, 제게도 생각을 벼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

  2. -_- 하인리히 맨날 말만 들었지 그 사람이 다루는 애매성을 저는 공부해보지 못했고요, 알튀세르의 과학-현상학의 과학이라는 쌍을 생각해보다가 퐁티가 변증법을 애매성의 차원에 남기려고 한다는 것이 그런 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저도 그저 막 떠올라서 그게 말이 되는 건지 잘 몰라요-_- 그냥 ‘비판’에 대해서는 그리스까지 소급해서 어원과 의미 변화 식으로 들어가는데 ‘경제(학)’는 근대적인 것으로 전제해서 접근하게 되면, 두 쪽이 다 뭔가 미진해지는 부분이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인간 이해와 관련된 부분에서요… 아,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고 적겠습니다. 지금 학원이라서-_-;; 글고 저로 인해 벼리실 것 별로 없으실 듯 해요.. 깊이 있게 뭘 한게 아니라서;; 암튼 이 포스팅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해요…

    1. 퐁티를 잘 모르니 제가 뭐라 더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

      근데 ‘비판’에 대해서는… 실은 보시다시피 고대 그리스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그건 말그대로 ‘어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일 뿐이죠.. 그리고 굳이 그 어원까지 들먹인 것은, ‘비판’이라는 말이, 적어도 마르크스가 쓴 맥락에서 보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요. (그런데 다시 ‘어원’에 대해 말하자면… ‘경제(학)’도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로 소급됩니다. 이 얘긴 세 번째 편에 나옵니다.)

      뭐 암튼간에..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앞으로 더 양질의 도움을 주고받도록 해요 ㅎㅎ

  3. 답변 감사합니다. 정돈안된 생각인 데다가 지엽적인 부분인 듯 해서 좀 그렇지만, 애초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좀 정리된 것을 써두겠습니다. 저는 Em님이 경제 어원을 설명하실 때 nomos와 관련된 잡다한 해석들을 끌어오지는 않았던 것에 대해서 ‘접근의 차이’가 있다…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맑스의 경제 비판이 경제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닌 구제적인 비판이라고 이해할 때, 저는 그런 ‘비판’의 맥락이 본래적인 ‘경제(학)’ 개념 안에 이미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실 줄 알았습니다-_-;; 음음.. 더 공부해봐야 겠네요;;;

    1. 뭐 글의 목적이 어원을 캐거나 ‘의미’라는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아니라서요… 그런 문제를 좀 더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또 있겠죠 ^^; 어쨌든 순이님의 ‘정리된 것’이 기대되네요. 서둘러주세요! ㅎㅎ

  4. 두 분 논의가 설익은 객설과 오해 정도로 정리되는 것 같아 조금 아쉽네요…
    물론 그 일원인은 순이님의 오해와 사변적 관념성(그 중에서도 특히 해리박약한 연상과 직관에 크게 의지하는)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나, 사고의 착안경로와 방향은 꽤 흥미롭고,
    그 직관의 결론은 예언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순이님의 논의가 이 두 점에서 매우 가치있고, 이 방향으로 생산적 고민이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방법론으로서의 인식론적,과학철학적 성찰
    2)(Marx주의)정치경제학을 포함한 대안경제학들의 운명을 규정하는 (비주류적) 내인들과 한계들의 지속

    1)항에서 순이님은 (아직까진) 특히 상기의 오류들이 집중되어 그 경로 또는 방향을 제외하곤 거의 완전히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습니다.
    ([정~~말 사족!!]
    예를 들어 {a.(항존=탈역사적)경제(이데아)/b.역사적 구제로서의 (근대)경제(현실,제도)/c.(근대)경제학}의 “분리” 등…
    --여기서 a/b의 “분리”는 사실상 순이님에 의해서,순이님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족을 굳이 적시하는 이유는, 이 “분리”와 이에 대한 순이님의 주목 또는 고착이 논의를 매우 소모적 객설로 인도한 최대의 주범이고 상기 오류를 대표하는 일례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무리 많이, ‘비판’에 대해선 “결합”을 하고, 비판대상에 대해선”분리”를 해도 그 방법(론) 자체가 비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EM님이 순이님 말씀처럼 그런 “분리”를 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때의 분리는 많이 하면 할수록 표적자체가 구체화되고 명확해져 정밀타격을 가능하게 할 뿐입니다.)

    참,자본강독 참여 고려중입니다. 근데 첫 모임이 김수행 교수님 공황론 연강 중 핵심강 일정과 정확히 겹치네요…

    1. 반갑습니다, nodex님. 일단은, 순이님께서 뭔가를 풀어놓으신다고 하셨으니, 너무 아쉬워하진 마세요. ^^ 저도 좀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선수를 칠 처지가 못 되어서..;;; 하지만 님께서 좋은 말씀으로 거들어주셨으니, 제게도 그렇고 순이님께도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겁니다.

      (이참에 앞서 덧글에서 빠진 내용을 좀 덧붙이면… 앞서 제가 순이님의 ‘애매성’을 보고 하인리히 얘길 꺼냈는데요, 실은 하인리히도 이 대목에서 알튀세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게 메를로 퐁티와도 어떤 연관이 있는지까지는 저는 잘 모르지만요..)

      어쨌든 nodex님의 말씀이, 제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제 생각을 어느정도 대변해주신 것 같아 저로서는 특히 반갑습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순이님께서 범하셨다고 하는) a와 b의 분리에 대해 조금 덧붙이자면…

      일단은 ‘이데아-현실’이라는 식의 도식이 순이님께는 자칫 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순이님의 실제 의도와 상관없이 대충은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 짐작에 순이님께서는 고대그리스의 경제에 대한 논의(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같은 것을 떠올리셨을 법도 한데… 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제란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식의 논의가 있었던 게 사실이죠. 그리고 또, 이를테면 E.P. Thompson의 ‘moral economy’와 ‘political economy’ 구분논의에서 보듯이, ‘근대경제’와는 구별되는 어떤 ‘다른 차원의 경제'(순이님 식으로 말하면 “항존하는 영역으로서 존재론적인 ‘경제'”?)라는 것이 (심지어 ‘근대경제’ 안에서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고요.

      그러나 적어도 마르크스에겐, 이와 같은 ‘구별’ 내지는 (그에 기반한) ‘분리’라는 문제의식이 그다지 주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 점은 제가 순이님에 대한 첫 번째 덧글에서 다소 애매모호하게 밝히기도 했군요. 물론 마르크스는 ‘근대경제’가 갖는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죠. 그러나 이때 그에게 주된 것은, 근대경제가 다른 역사적 경제들, 이를테면 봉건제 하에서의 경제와 갖는 차이들입니다. ‘이데아’로서의 경제 또는 ‘항존하는 영역’으로서의 경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순이님께서 마지막 덧글에서 제기하신 문제, 즉 “그런 ‘비판’의 맥락이 본래적인 ‘경제(학)’ 개념 안에 이미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하실 줄 알았습니다”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는 답변을 제공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나 톰슨이 보여주듯이) 고전적인 ‘경제에 대한 논의’는 물론 심지어 ‘경제’ 자체가 일정한 ‘비판적’ 성격을 그 안에 이미 포함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 비판이, 마르크스의 비판, 즉 ‘파괴’는 물론 ‘(그 파괴된 것이 내포하고 있었던 복잡성을 그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보존하는) 체계적 재구성’까지도 포괄하는 비판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사실은 이런 점에서 저는, 비판이란 기본적으로 ‘이론비판’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앞에서 언급한 하인리히(와 그를 잇는 곽노완)는 ‘이론비판’과 ‘현실비판’의 일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많은 이들이 그러하죠), 즉 마르크스의 비판개념 자체가 그러하다고 말하는데, 저는 엄밀히 말하면 여기에 반대합니다(그러나 마르크스의 비판이 ‘현실비판’으로 나아갈 여지와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은 당연히 인정합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착취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죠. 착취를 착취라고 부르지 않고 또 그렇게 개념화하지 않는 경제학을 나쁘다고 합니다. 흔히 “착취란 나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비판’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건 마르크스의 ‘비판’과는 무관합니다. 어쩌면 순이님께서는 이상의 덧글들에서, 비판의 이와 같은 이미지를 어느정도 가지고 계신 채 말씀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순에 가득찬 ‘근대경제’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순이님께서 말씀하신 ‘항존하는 영역’으로서의 경제나 (nodex님이 표현하신) ‘이데아’로서의 경제가 그런 ‘이상’에 대한 논의의 기반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관심대상은 아니었다, 나아가, 그가 말하는 ‘비판’의 필연적인 포괄영역은 아니었다…라는 것이 제 잠정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초기사상까지 생각한다면, 이런 말하자면 ‘유토피아적 계기’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경제학 비판’ 안에서는… 흠…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2. 아… nodex님 말씀이 재밌어서 신나게 덧글을 달고보니, 강독에 대해선 말씀을 못 드렸네요;;; 네, 참여하신다면 환영입니다! 첫 모임은… 네, 저도 좀 아쉽긴 한데요, 그렇다고 시간을 옮기기도 좀 애매해서… 오전에 모이는 방법도 있는데… 함 생각해 보죠. ^^

  5. 아, 죄송합니다. 바쁜 일때문에 확인이 좀 늦었네요…

    음…몇자 더 적고 싶지만 일단 지금은 더 이상의 개입을 유보하고 순이님의 정리된 생각을 믿고 기다려 보는 것이 최선의 행동이라고 생각됩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현 단계에서의 그런 개입은 자칫 논의와 순이님의 원착상에 대한 과잉결정으로 귀결되기 쉽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1.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순이님께 부담 드리려는 것은 아니고요 ^^;;

      근데 자본 강독은 어찌하시는 건가요?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감이 있긴 하지만… 함께 하신다면 환영입니다. :)

Leave a Reply to nodex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