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3)

2. 정치경제학을 통한 ‘사회적인 것’의 복원

결국 IIPPE의 경제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고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내적으로 봤을 때 경제학은 점점 더 편협해지고 있다. 둘째, 외적으로 봤을 때 경제학은 그 편협하고 파괴적인 성격으로 다른 사회과학들을 물들이고 있다. 특히 이 두 번째 사항을 통해 경제학에 대한 문제제기는 곧 사회과학 전체를 시야에 두고 그것을 재편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따라서 경제학의 개혁은 경제학 안팎의 다양한 비판들이 건설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비록 불가피하게도 벤 파인을 비롯한 몇몇 소수에 의해 체계화되었지만, 그것은 IIPPE 안팎에서의 토론은 물론이고 IIPPE가 생기기도 훨씬 이전부터 경제학 내부와 기타 사회과학들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다양한 비판과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하버드 대학교에 사회학과가 신설되어 그 첫 강사로 부임했을 무렵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는 경제학 제국주의를 두고, “이웃한 ‘나라들’을 부유하게 할 수도 있지만 …… 그들을 그들이 가진 조건들에는 맞지 않는 ‘경제적’ 범주들이라는 구속복(strait jacket)을 입히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며 경계하기도 했다(Parsons, 1934, p. 512). 이는 경제학 제국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구절엔 당시 막 형성되고 있던 사회학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숨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판과 불만은, 경제학의 내부와 외부에서 공히 ‘정치경제학’이라고 불리면서 제기되고 발달해왔다. 바로 이것이 IIPPE가 ‘정치경제학 진흥’이라는 명목으로 그런 비판과 불만들을 북돋고 체계적으로 결집시키려는 까닭이다.

먼저 경제학 내부에서 보면, 앞서 소개한 밀로나키스와 파인의 책 제목에서도 내비쳐지듯이, 정치경제학이란 경제학이 필연적으로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갖기 마련인 그 대상에, 이 대상의 그런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론을 가지고 개입하려던 시절에 불리던 이름이다. 따라서 위에서 묘사한 경제학의―특히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는―역사적 발전양상을 참조하면, 이러한 ‘정치경제학’의 정신과 접근법을 복원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복원을 꽉막힌 원칙론, 또는 과거로의 회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는 정치경제학이란 근대사회 고유의 문제에 관계되는 특수한 학문임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고대 그리스에서 ‘경제’란 말이 처음 생겨났을 때 그것이 ‘가계의 관리’를 일컬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여기서 가계란 오늘날의 핵가족이 아니라 가족과 더불어 거기 부속된 노예 등까지 포함하는, 말하자면 하나의 생산 공동체이자 단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가계의 관리’란 곧 ‘공공문제의 관리’와 유사성을 띤다. [크세노폰(Xenophon)이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개인 업무의 경영과 공공 임무의 처리는 다만 양에 있어서 다를 뿐 그 외의 점에서는 비슷한 것이라네”(크세노폰, 2002[1923], 122쪽). Roncaglia(2005), p. 25n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런 유비관계는 서유럽으로 치면 대체로 절대왕정과 거의 나란히 근대사회가 떠오름에 따라 더 이상 충분치 않은 것으로 판명난다. 하나의 단위로 묶일 수 있는 공동체의 규모 자체가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 운영도 이제는 가계의 운영만 참조해가지고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한, 즉 그 정도와 범위에 있어 엄청나게 심화되고 확장된 분업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동반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기존의 ‘경제’라는 용어로는 더이상 공동체가 직면한 ‘경제적’ 이슈들을 만족스럽게 포착하고 개념화하며 그로부터 떠오르는 질문들에 답변을 구하기가 어렵게 된 상황을 반영해서, ‘공동체의 경제’를 일컫기 위해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라는 새로운 용어와 그와 결부된 일련의 개념들이 필요하게 되었단 얘기다. 바로 이런 변화를 포착하여,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이 나오기 약 10년 앞서 스튜어트(Sir James Steuart)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로 자신의 《정치경제학 원리 탐구》(An Inquiry into 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를 연다. “일반적으로 경제란 한 가계의 모든 결핍을 분별있고 검소하게 채워주는 기술이다. …… 경제가 가족에 대한 것이라면 정치경제는 국가에 대한 것이다”(Steuart, 1805[1767], pp. 1, 2). [물론 ‘정치경제’라는 용어의 기원은 이보다 훨씬 앞선다. 대체로 17세기 초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약간의 시차를 두고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King(1948) 참조.]

결국, 고전파에 의해 발전된 정치경제학이란 ‘(근대) 사회’ 자체에 대한 학문, 좀 더 정확히는 사회 전체를 총체적으로 시야에 넣고서 그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한 계급들 사이에서 물적 부가 어떻게 생산되고 교환되는지, 어떻게 분배되고 소비되는지를 체계적으로 좇으며 근대시민사회의 운동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시민사회의 해부학”(마르크스, 1988[1859], 6쪽)이라고, 즉 근대사회에 고유한 과학이면서도 동시에 그 물적 근간을 다루는 본원적인 과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앞서 밀로나키스와 파인의 공동저작을 언급하면서 밝혔듯이, 바로 이와 같은 정치경제학은 만약 그것이 제대로 행해질 경우, 자신이 그 대상―즉 사회―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문제에 필연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또 그 자체가 근대시민사회라는 하나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체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대상의 역사성이나 사회성에 대해 사려깊을 것이다.

‘경제학’의 성립, 곧 정치경제학에서 경제학으로의 전환은, 바로 정치경제학이 근대사회라는 특수한 역사적 체제 안에서 할당받은 위와 같은 역할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정치)경제학의 본질적인 과제들은 일부는 경제학 내부의 변두리에서, 또 일부는 경제학 바깥에서 이러저러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곤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경제학 내부에서는 그런 ‘비주류’(heterodox) 접근들이 주변화되고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고있는 실정이지만, 경제학 외부의 다른 사회과학들에서는 그런 접근들이 꽤 강하게 유지되었고 특히 최근 들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실은 바로 이것이, ‘정치경제학’을 장려함으로써 경제학을 개혁할 때 우리가 경제학 외의 학문분야들에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까닭이다.

이 자리에서 경제학 내부의 참담한 상황을 새삼 상론할 필요는 없겠고, [한동안 비주류 경제학의 산실이었던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주류 경제학이 사라지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그런 전통의 한 주역이었던 저프 하코트(Geoffrey C. Harcourt)는 한 인터뷰에서 내비치고 있다(Mongiovi, 2001). 크게 영국과 미국에서 비주류 경제학의 발달에 대한 좀 더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서술로는 Lee(2009)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회과학분야들에서 정치경제학이 현재 호황이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파인(2006[2004]; Fine, 2010)은 이를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과잉상태로부터의 ‘후퇴’(retreat)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 즉 1970년대 말 이후 사회과학 전반에 팽배했던 이와 같은 두 극단적 형태의 지적 지향이 1990년대 초반 들어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 말하자면, “사회과학 전반이 해체와 기호학에 사로잡혀 있다가, 이제 오늘날 자본주의의 본질을 권력과 갈등, 가난과 불평등, 환경파괴 등등의 체계로서 이해하는 쪽으로”(파인, 2006[2004], 392쪽) 점차 지적 관심이 이동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위와 같은 지적 지향의 변화는 앞서 신자유주의의 제1국면에서 제2국면으로의 이동과 대체로 겹친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비록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지적 차원에서는 분명 비판적 사회과학에 좀 더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은 했다. [이런 이중의 후퇴가 지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는, ‘범지구화’(globalisation)와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이 다뤄지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파인(2006[2004]), 404-13쪽 참조.]

이와 같이 지적으로 이완된 상황을 배경으로, 그러나 동시에 경제학 내부에서는 비판적 목소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축되어있는 상황 속에서, 비판적 사회과학들은 오늘날의 범지구적 자본주의가 처한 물적 현실의 다양한 면모들을 풍부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이번 범지구적 차원의 경제위기는 크게 봐서 바로 이와 같은 지적 배경 위에서 터진 것이다. 경제학의 각별한 분발이 요구되는 게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제학의 ‘자체정화’ 노력이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기치 아래 다양한 분야들에서 나오는 비판들을 증진시키고 체계화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도 같은 까닭에서다. (계속)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1)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2)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3)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4)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5)

Print Friendly, PDF & Email
SNS로 공유하기!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