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Ben Fine 교수 연속강연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오랜만인 만큼, 좋은 소식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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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파인(Ben Fine) 선생께서 한국에 오십니다.

<현대 정치경제학 입문(Rereading Capital)>, <마르크스의 자본론(Marx’s Capital)> 같은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가 누구인지 잘 알려져있지는 않습니다. 연구자들도 의외로 잘 모릅니다. 7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황금기에 떠오른 서양의 여러 남성 경제학자 중 하나.. 특히 알튀세르주의적 경향이 다소 두드러진 경제학자 정도?

아마도 벤 파인 선생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우리말 설명은 <마르크스의 가치론>(Alfredo Saad-Filho 저)의 옮긴이 후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텐데요, 저와 함께 런던에서 벤 파인 선생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밟은 전희상 선생께서 벤 파인의 학문적 궤적/업적을 상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알프레도 선생의 책에 벤 파인 선생이 소개된 이유는, 알프레도도 벤의 제자이고 둘이 공동작업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벤 파인이 어떤 인물인가? 저에게 묻는다면, 주저없이 두 가지 대답을 할 겁니다. 첫째, 이제껏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을 현대화하고 또 그것으로써 현대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둘째, 경제학의 현 상태를 비판하고 그것이 사회과학 전반에 미친 해악을 파헤침으로써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에 흩어져 있는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을 규합하고자 하는 사람. 저도 참여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IIPPE)가 바로 그러한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번에 벤 파인 선생께서 방한하시는 동안, 총 3회의 강연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선’은 했지만, 여러 기관의 도움 덕분에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세 개의 강연, 주제가 모두 다릅니다. 다르면서도, 묘하게 서로 보완적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 세 번의 강연에 모두 참여하신다면, 벤 파인이라는 사람이 어떤 연구자인지, 그리고 그가 경제학과 (그 대안으로서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느정도는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3회의 강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강연은 모두 무료로 진행되고, 누구나 참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보시다시피 두 번은 대학에서 열리는데, 이는 대체로 연구자(교수, 대학원생 등)를 염두에 두고 준비될 것입니다. 하지만 벤 파인 선생은 비교적 친절하신 편이므로, 누구라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다른 한번은 위 두번보다는 캐주얼한 분위기로 열릴 겁니다. 그래서 장소도 홍대앞으로 잡아봤습니다. 학생이나 활동가들을 주로 염두에 두고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강연 이후에 음료(?)와 다과를 함께할 수 있도록, 선생께 양해를 구해 두었습니다. 유럽에 가지 않고도 유럽에 간 것 같은 시간, 벤 파인 선생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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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강연>

제목: Economics and Interdisciplinarity: One Step Forward, N Steps Back?
일시: 7월 16일 화요일 오후2시
장소: 서울대학교 사회대 16동 국제회의실(3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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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년 경제위기를 통해 경제학의 무능과 다양한 문제점이 다시금 드러났고, 그 반작용으로 경제학의 변방, 그리고 경제학 바깥에서 경제학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다양한 흐름들이 주목받았다. 이런 흐름들을 당분간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고 이름 붙여보자. 그렇다면 이 정치경제학은 간학문적 성격을 띠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간 계속적으로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으로 발전해 온 것은 주류 경제학(mainstream economics)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를, 경제학이 내학문적(intradisciplinary) 성격, 그러니까 여타 학문분야들과 구별되는 그 고유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경제학뿐 아니라 그 어떤 학문분야라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을 법한 태도와 단절하고 있는 신호로 해석해도 좋을까? 언뜻 보아서는, 주류 경제학의 간학문적 성격은 그간 경제학에 제기되어 온 주요한 비판들–이를테면 리얼리즘의 결여, 방법론 무시, 주류 이외의 대안적 경제사상 및 경제사상사에 대한 무시 등–을 불식시키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러한가?

이번 강연에서 벤 파인은 주류 경제학의 매우 특징적인 어떤 측면, 곧 그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르는 것을 추적함으로써 위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모색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학 제국주의는 크게 세 단계에 걸쳐 발달해왔는데, 이러한 단계들을 특징지으면서 파인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역사적 논리’를 새삼 강조한다. 또한 그럼으로써, 처음엔 그저 시장에서의 수요-공급 문제에 한정되었던 경제학 제국주의가 어떻게 나중 단계에 와서는 세상만사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논리적 틀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파인에 따르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결과, 여러 분야나 방법 가운데서도 미시경제학(과 계량경제학)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정도와 수용성이 그야말로 엄청나서, 미시경제학(과 계량경제학)의 원리들은 파인이 ‘suspension’(‘보류’라고 옮길 수 있을 법한 표현)이라고 이름붙인 과정을 통하여 여타의 학문분야와 영역에 적용되게 되었다–아무리 그것이 비일관적이고 마구잡이 식이라 해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주류 경제학의 (점증하는) 간학문적 성격의 실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두 번째 강연>

제목: Marx’s Political Economy, Prospects 150 Years after Capital
일시: 7월 16일 화요일 오후7시
장소: 공중캠프(홍대 산울림소극장 근처. http://dmaps.kr/4323o)

“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50년쯤 전에 영어로 처음 읽기 시작했습니다. (…) 저의 독서는 오늘날의 워드프로세서나 전자파일 버전이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이루어졌지요. 당시 막 경제학, 그리고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던 저는 손으로 일일이 노트를 한 페이지씩 채워나갔는데, 그것을 몇 번이고 복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뿐인가요. <자본론> 본문의 중요 페이지들을 고르고, 이를 잘라내서 붙인 뒤 나중에 참조하기 좋게 가치, 비생산적 노동, 공황, 지대, 기술변화 같이 여러 범주들로 분류해 철해두고는 했지요. 저는 그렇게 만든 결과물로 캐비넷 하나를 가득 채웠습니다. 덕분에 저는 무언가에 대해 쓰거나 그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찾아보고 싶을 때, 비교적 쉽게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 <자본론>은 제게 성경과도 같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자본론>은 그간 여러 상이한 해석과 응용에 열려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자본론>을 성경에 빗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저는 <자본론>을 태피스트리에 빗대고 싶은데요, 그 규모로 보나 범위로 보나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 정도는 되겠죠. 마르크스의 작업 전체로 보면, <자본론>의 1권은 그의 정치경제학—그 자체가 마르크스의 작업에서 일부죠—의 중요하기는 해도 일부분일 뿐이고, 그는 2권과 3권, 그리고 훗날 세 권으로 출간된 <잉여가치학설사>도 썼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 태피스트리를 한올한올 풀어헤쳐 자세히 뜯어볼 수도 있겠고, 특히 오늘날의 학적인 배경에서 재검토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태피스트리를 풀어헤치거나 특정 실오라기를 골라 이를 따라가보기 보다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태피스트리를 전체적으로 한번 바로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아참, 저는 이 작업을 행하면서 11개의 테제—네, 11개요!—를 내놓으려고 합니다!”

(런던의 마르크스기념도서관(MML)에서 <자본론> 출간 150주년 기념해 마련된 강연에서 한 이야기를 약간 재구성)

 

<세 번째 강연>

제목: From Financialisation to Neoliberalism
일시: 7월 18일 목요일 오후2시
장소: 고려대학교 정경관 502호

(강연 개요 설명은 조만간 업데이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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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휴수당, 없애는 게 지키는 것이다

주휴수당은 실제론 일을 하지 않았는데 했다고 치고 주는 돈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1주일 꼬박 일한 노동자에게 하루치 임금을 더 줘야 한다. 고용주로선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특히 최저임금이 빠르게 오르는 요즘, 주휴수당이 더 야속할 것이다. 1953년 제정될 때부터 근로기준법에 의해 보장된 주휴수당을 없애자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언뜻 보면 이상한 주휴수당, 왜 줘야하는 걸까? 임금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여러 임금이론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비다. 먹고 살아야 일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 할 순 없다. 하느님도 6일간 세상을 창조하고 하루를 쉬지 않았나. 신께서 하루를 쉬며 뭘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은 쉴 때도 힘이 든다. 먹어야 하고, 때론 즐겨야 하며, 그래서 더 먹어야 한다. 그러니 6일간 성실히 노동의 의무를 다한 이에게 하루치 주휴수당을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의 도구나 마찬가지다. 주휴일은 그 도구가 다음주에 제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수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거기 드는 비용을 자본가가 대는 것, 당연하다.

이렇게 보면 주휴수당은 하루가 아니라 이틀치를 주는 게 옳다. 폐지할 게 아니라 늘려야 한다. 주5일제 때문이다. 현재 근로기준법 상의 주휴제도는 주6일제 시대의 산물이다. 주5일제가 되었으면 법도 바뀌었어야 옳다.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한국의 노동자들은 5일 일하고 6일치 받아서 7일을 산다. 이 불합리를 일부 힘있는 노조들은 회사와 개별적으로 협상해 해소한다. ‘각자도생’. 법정 주휴일에 더해 약정휴일까지 주 2일의 유급휴일을 갖는다. 당연한 일인데도, 이것조차 한국 사회에선 ‘정규직의 특권’으로 나타난다.

상황이 이러니 주휴수당을 늘리는 게 마땅함에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미 법적으로 보장된 주휴수당조차도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빠른 최저임금 인상 분위기 속에서 자본가들은 주휴수당을 아예 없애려고 혈안이 된 듯하다. 어찌해야 할까?

나는 주휴수당을 없애자고 제안한다. 단, 주휴수당만큼 기본시급을 올리자. 올해 최저시급이 8350원이다. 주휴일은 1주일(=5일) 일했을 때 하루 주는 것이므로, 주휴수당은 기본시급의 20%다. 8350원의 20%는 1670원이다. 그러므로 내 제안은 주휴수당을 없애는 대신 기본시급을 8350+1670=1만20원으로 올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도 대다수의 노동자에게 달라질 건 없다. 예컨대 현행 제도 하에서 하루 8시간, 주 5일 일하는 노동자는 한달에 174시간쯤 일한다. 하지만 주휴시간을 포함하면 그는 209시간 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의 월급은 8350원*209시간=174만5150원이다. 한편 주휴수당을 없앤 대신 기본시급을 높일 경우 월급은 1만20원*174시간=174만5150원으로, 기존 제도에서의 월급여와 같다(사소한 계산상 오차는 무시).

달라질 게 없는데, 뭣하러 굳이 주휴수당을 없애자는 것인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무리 법에 명시돼 있다고 해도 주휴수당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 몰라서 안 주고, 몰라서 못 받는다. 물론 알고도 안 주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주휴수당을 없애고 기본시급 인상하면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그와 관련된 불필요한 사회적·행정적 비용도 줄어든다.

둘째, 주휴수당을 ‘합법적으로’ 못 받는 노동자도 있기 때문이다. 주휴수당을 받기 위해선 1주일에 15시간 이상 일을 해야 한다. 하루 2.5시간씩, 주 12.5시간만 고용된 노동자는 주휴수당을 받을 수 없다. 이 노동자가 비슷한 조건으로 3곳에서 도합 주 40시간을 일해도 그는 주휴수당을 한푼도 못 받는다. 그러나 이런 노동자도 주휴수당이라는 개념에 들어있는 ‘휴식’이라는 걸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휴식에 필요한 돈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휴수당에 해당되는 금액을 기본시급에 잘게 쪼개넣으면 이런 단시간 노동자에게도 일정한 휴식수당을 지급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현행 주휴수당의 위와 같은 성격 때문에 일부 고용주들은 노동자를 이를테면 14.5시간만 고용하는 등으로 주휴수당 지급을 ‘합법적으로’ 피해 왔다. 이를 ‘고용 쪼개기’라고 한다. 하지만 고용이 단시간화하는 것은 오늘날 경제의 거스르기 어려운 추세이기도 하다. 나의 제안은 일부 고용주들의 ‘꼼수’를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도 부합한다.

이상에서 주휴수당의 의의를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인 여건상 그것을 없애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주휴수당을 어떻게 하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 특히 저임금 노동자들이 삶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계수단을 어떻게 획득하게 해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요즘 청년층을 포함한 많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고용은 ‘시간(hour)’ 단위로 이루어진다. 임금도 ‘시급’으로 받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사이클은 결코 ‘시간’을 단위로 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및 사회적 여건상 적어도 ‘달’ 정도를 삶의 최소 단위로 보는 게 적절하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한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은 얼마인가? 올해를 기준으로 보면, 우리 사회에선 최저시급의 월환산액, 그러니까 적어도 한달에 175만원쯤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첫째, 이 액수가 충분한가? 앞에서 주휴수당이 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액수는 충분치 않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로 주장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적대하는 이해관계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잠정적으로만 내려질 수 있다. 둘째, 정해진 그 액수를 노동자들이 어떻게 확보하게 할 것인가? 현행 제도는 한달동안 주로 한 곳에 고용되어 성실히 일한 사람에 한해 실제 일한 데 대한 보수에 일정액(주휴수당)을 추가로 얹어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보면 주휴수당이란 실질적으로는 ‘휴식’과는 별 상관이 없고, 노동자에게 임금 또는 생계비(의 일부)를 확보시켜주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일부 노동자는 아무리 열심히, 오래 일을 해도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얻지 못한다. ‘합법적으로’ 말이다. 노동자가 생계비 일부를 주휴수당이라는 형태로 확보하게 하는 것은 오늘날 특히 청년들의 고용 현실에선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 얹어주는 것을 없애고 기본시급을 높이자. 이들에게 주휴수당에 해당하는 임금몫을 확보시켜주는 방법은 현재의 주휴수당을 없애는 것뿐이다. 물론 주휴수당에 해당하는 액수가 기본시급에 흡수된다고 해서 불안정한 노동자들에게 휴식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이들의 임금을 높여줄 뿐이다.

현재의 주휴수당은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이들에게만 실질적으로 보장된다. 그 자체가 임금체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론 불안정한 지위의 노동자를 차별하는 기제가 된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의 휴식권 보장을 위해 주휴수당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참조). 그러나 ‘주휴수당’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휴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주휴수당을 받지 못하는 불안정 노동자는 주휴수당 때문에 더 일을 해야 한다. 단순계산 해보면, 주휴수당을 못 받으면 한주에 8시간, 한달에 35시간(209시간 빼기 174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어떤 노동자에겐, 휴식을 방해하는 게 주휴수당이다. 주휴수당에 대한 자본가의 공격은 노동자의 휴식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임금을 삭감하려는 것이다. 주휴수당, 없애는 게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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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역사와 지성의 역사: 역사 탐구의 한 가지 의의와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는 여럿이 있겠지만, 내 경우에 특히 와닿는 이유는, 인간의 지각 내지는 지력이라는 게 믿을 게 못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생각해보자. 흔히 이 문제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출현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돌이켜보면 비정규직 문제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국경제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오늘날 ‘비정규직의 역사’를 쓴다면, 그 시작점은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외환위기 이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다(아주 안 쓰인 것은 아니다). 내용적으로 ‘비정규직’을 가리키는 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오늘날과 같이 ‘비정규직’(정규직에 대비되는 비정규직, 또는 파견/시간제/기간제 등을 포괄하는 비정규직)이라는 보통명사 내지는 대명사로 공공연히 칭하면서 사회적으로 문제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1997년에 대하여, 이 해는 (A)비정규직이 생긴 해는 아닐지라도, (B)비정규직이라는 것의 존재와 그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자각된 해라는 식의 의미부여는 여전히 가능할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다. 역사에 대한 탐구가 없다면, (A) 같은 직관적인 의식에서 (B)와 같은 고양되고 반성된 의식으로 나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역사적 탐구를 통해) 비정규직은 1997년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보면서 (B)와 같은 의미부여에 동의한다면, 비정규직을 다루지 않았던 1997년 이전의 노동 관련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 교정도 할 수 있으리라(실제로 1997년 이전에 노동 관련 논의들 중에 비정규직을 핵심적으로 문제삼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현실 역사에 대한 탐구는 필연적으로 지성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이끌어내며, 궁극적으로는 ‘지성사’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실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비판’이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그의 비판에서 역사적 탐구는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궁극적으로 ‘(비판적) 이론사’로 이어지는 것은 (그리하여 이를테면 ‘잉여가치학설사’가 <자본론>의 제4권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이론 비판이 아니고 현실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뭘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P.S. 그런데 ‘(비판적) 이론사’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논자들이 틀렸음을 보이는 게 아니고(그런데 많은 언필칭 ‘비판’들은 여기서 그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비정규직의 의의를 온전히 음미하지 못하게 만들었는가,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논의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때론 눈부시게 발전하기도 하고 때론 허망하게 무시되기도 하는) 비정규직에 대한 인식의 고갱이는 무엇인가 등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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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유착인가 (경제)범죄인가: (‘해결책’을 찾기에 앞서) 괴물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기

수개월 전부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진상이 점차 드러나고,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확산되면서 ‘정경유착’이 화두로 부상 중이다. 이에 따라 정경유착의 원인과 처방에 대한 논의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거의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논의도 별다른 성과 없이 잦아드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한다. 왜 정경유착 논의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헛되게 반복되는가?1 혹시 지금까지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이 어떤 잘못된 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정경유착’이라는 문제설정

말 그대로 풀면 정경유착(政經癒着)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간의 결합을 일컫는데, 우리나라 같은 후발국 고유의 문제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정경유착은 자원배분을 왜곡하고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등의 이유로 척결 대상이 되며, 만약 그것이 ‘척결’되면 좀 더 선진적이고 완전한 자본주의가 실현되리라고 여겨진다. 적어도 전근대적인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후발국에서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수립은 곧 ‘근대화’의 정점으로서 그 자체로 ‘진보성’을 담지하고 있기에, 정경유착 근절을 통한 더 나은 자본주의 건설이라는 테제는 우리나라 진보진영에서도 일종의 ‘(최대)공약수’로서 널리 공유되는 입장이다.

정경유착이 주로 후발국에서 문제시된다는 점 때문에, 후발국 고유의 특성들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곤 한다. 이를테면 한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나라들은 1997년 외환금융위기 당시, 이 지역 특유의 유교적 전통에 기인한 ‘연줄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때문에 자본주의 발달이 왜곡되었고 결과적으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진단에 따르면, 과거의 잔재와 결별한 선진적인 제도의 도입만이 ‘제2의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방에 따라, 김대중․노무현 정권기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그 처방의 핵심 주체는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등이었다(‘워싱턴 컨센서스’).

정경유착은 후발국 고유의 문제?

정경유착을 후발국의 문제, 좀 더 일반적으로는 자본주의 미발달의 결과로 한정짓는 것은 정경유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첫 번째 걸림돌이다. 사실 정경유착은 그렇게 엄밀한 개념도 아니다. 이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도 불명확하다. 좀 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이를 부패(corruption)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정경유착이란 부패의 한 유형, 특히 후발국에서 주로 발생하지만 꼭 그렇게만 한정지을 수도 없는 유형임이 단박에 드러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패는 차라리 ‘정상적인’ 것이며,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까지도 부패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부패는 각 경제주체들 간에 물질적 이해관계의 대립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부패의 형태나 유형은 나라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정도에 따라 다르다. 한국과 같은 후발국에서 부패가 특히 ‘정경유착’의 형태로 벌어지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자원의 배분, 나아가 경제발전 자체를 국가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한국은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룬 자본주의국으로서, 경제는 이미 국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못할 정도로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성숙했다. 여기서 독점대자본은,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단련’된 덕분에, 비록 내부 지배구조에 후진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현대화되고 근대적 합리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집단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독점대기업이 정경유착에 연루된다면, 그것은 대체로 부패하고 구태의연한 정치권력의 탓, 후진적인 정치문화의 탓으로 돌려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럴 경우 독점대기업이 그 자체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자행하는 다른 부패행위들을 시야에서 놓치거나 이런 행위들이 예의 그 ‘정경유착’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길 위험이 발생한다.

그간 정경유착이 제기된 맥락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정경유착이 경제와 사회, 나아가 정치제도 전반의 발전을 가로막는 핵심 문제로 부각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 대목에서, ‘정경유착’이라는 용어가 확립되고 일반적으로 쓰인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구축한 전자도서관이나 과거 일간지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보면, 정경유착이 별다른 통제 없이 횡행했던 1980년대 이전에는 놀랍게도 그런 용어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2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구축된 뉴스라이브러리(1920~99년치 <동아일보> 등 4개 일간지 원문수록)에 따르면, ‘정경유착’은 1980년 9월 4일자 <매일경제신문>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운 전두환 등 신군부에 의해,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정당성을 갖지 못한 공직사회를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을 통제할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육성된 화두였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화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검색화면

하지만 정경유착이 대유행을 탄 것은 뭐니 뭐니 해도 1997년 외환금융위기 국면에서였다. 당시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이른바 ‘내인론’과 ‘외인론’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한 국제통화기금 등 서구세계의 주된 입장은 한마디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신흥국들의 역사적․문화적 DNA에 각인된 후진성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내인론). 이러한 후진성의 결과가 정경유착이었고, 정경유착은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해이를 일으켜 이들이 사전적․사후적으로 위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동안 한국 등 저발전국들의 ‘부패한’ 정치권력을 대상으로 ‘차관장사’, ‘원조장사’를 해온 것이 다름 아닌 선진 자본주의 정부들이었음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지적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줄잡아 1980년대 이래 정경유착, 좀 더 일반적으로는 부패에 대한 문제제기가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정당화하는 구실로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실증적으로 뒷받침되기도 어려운 다양한 논리들이 동원되었다. 부패는 ‘큰 정부’에서 비롯된다거나 경제성장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3 이러한 주장에 따라 많은 나라에서 기존의 복지시스템이 축소되었고, 특히 우리나라 같은 후발국에선 일련의 ‘자유화’를 위한 ‘구조조정’이 이뤄졌지만, 결과는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극심한 불평등과 (상당 정도로 그 결과로서의) 성장동력의 고갈이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일당이 개입된 ‘정경유착’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시각의 확장: 정경유착, 뭐라고 불러줄까?

위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이후 ‘정경유착’이 화두로 떠오른 데는 내적․외적으로 매우 특수한 맥락들이 있었고, 그러한 맥락들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타당하다고 하기 어렵다. 이에 덧붙여, 그동안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역사적․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한 정치권력일수록 ‘정경유착’을 문제 삼는 데 열정적이었음을 다시금 강조해야겠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정치나 행정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자극해 맹목적인 포퓰리즘으로 활활 타오르곤 했다. 공직기강 확립과 (공직사회의) ‘적폐해소’를 그간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나 강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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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 척결을 강조하는 최순실(JTBC 화면 캡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경유착’이라는 화두가 제기하는 현실의 문제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제들을 제기하기 위한 보다 적확한 ‘틀’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우리 사회는 정경유착이라는 특수한 형태보다는 부패 일반을 문제삼지 않으면 안될만큼 성숙했다. ‘정경유착’만 해소한다고 끝도 아니고, 비대해진 경제권력이 정치권력하고만 유착하는 것도 아니다. 재벌을 비롯한 경제권력이 언론과 ‘유착’하는 것은 이미 일상사가 되었고, 이들은 자신이 필요하기만 하면 심지어 시민사회의 단체들과도 ‘유착’한다. 얼마 전 해외투기자본의 횡포를 고발하는 데 앞장서온 시민단체의 한 인사가 이 단체가 문제삼던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던 것이 밝혀져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이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좀 더 만연되지 않을까?

‘정경유착’ 문제제기에서는 정치권력이 우위에 서고 경제권력이 뒤따른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구호가 이를 잘 요약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기만 할까? 이미 10여년 전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일갈했지만, 이 탄식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잊힌 듯하다. 어쩌면 권위주의적 성격의 세력들이 잇따라 집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야를 세계로 돌려보면, 지금 문제는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윽박질러 ‘거래’를 하는 것보다는, 경제권력이 자신의 이해관계 실현의 과정에서 정치권력을 이용한다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번에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가 백악관과 행정부 요직에 이미 4명의 골드만삭스 ‘동창생’을 내정한 상태며,4 유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금융위기 이후 골드만삭스의 유럽 점령도? (출처: The Independent, 2011년 11월 18일자)
금융위기 이후 골드만삭스의 유럽 점령도? (출처: The Independent, 2011년 11월 18일자)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지금 진정으로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경제권력이 ‘종범’이 되는 정경유착보다는 그것이 ‘주범’으로 나서 저지르는 각종 경제범죄가 아닐까 한다. 실제로 지난 2007~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로 기가 막힌 (유사-)경제범죄들이 주목받고 폭로되지 않았는가. 엔론 같은 대기업들의 회계부정,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나라간 세제 차이를 악용한) 조세포탈, 글로벌 신용평가기관들과 금융기관들의 조작사건(LIBOR금리 조작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경제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선진국들에서 벌어진 이러한 경제범죄들이 ‘정경유착’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범죄들이 ‘해이한 공직기강’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운 판단인가?

맺음말: 재벌은 ‘주범’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재벌은 주범이다. 지난해 12월 국조특위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보였던 ‘꺼벙이’ 같은 표정으로 재벌이 당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각을 굳건히 했을 때, 대기업-중소기업 관계의 왜곡, 만연한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강요된 자영업의 성행과 가계부채 폭증, 나아가 정부의 재정정책상의 소극성과 경제의 전반적인 침체까지, 현재 우리 경제의 난맥이 풀린다.

‘정경유착’이라는 문제제기는 ‘정’의 문제도 ‘경’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그것이 가리키는 현상의 ‘거대함’을 적절히 환기할 수 없다. 공직사회의 문제는 그것대로 푸는 게 옳다. 거대한 권력이 된 독점자본의 잘못된 행태들을 ‘범죄’로서 명확하게 지정하고, 문제가 될 경우엔 엄정하게 처벌하는 것—그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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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떤 면에선, 예전의 문제제기가 더 선명하고 근본적여 보이기도 한다: “이제 우리나라도 對財閥政策, 더 나아가 分配와 生産, 所有와 雇傭을 둘러싼 經濟體制의 문제를 문제의식으로 삼고 政府가 검토해야 할 때가 왔다.” 이것은 1960년대 중반 대표적인 정경유착 사례인 한국비료 사태 이후 <동아일보>(1966년 11월 18일자) 1면에 게재된 기획기사의 일부다.

  2. 물론 각주 1)의 인용구가 보여주듯, 오늘날 우리가 ‘정경유착’이라고 일컫는 사태에 대한 자각은 이전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정경유착’이라는 용어의 용례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유착’이라는 용어도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 기사에서도, ‘유착’과 함께 ‘정치권력의 [경제과정에의] 개입’, ‘밀착’, ‘기착’(寄着) 등이 쓰이고 있다.

  3. 예컨대 후자의 경우, 그것이 경제학이 즐겨 상정하는 매우 제한된 조건 아래서는 타당하다고 해도 역사적으로는 쉽게 지지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들에 있어 성장률이 가장 빨랐던 시기는 가장 부패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국의 경제당국은 국제기구 등에 의해 ‘부패’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당시 중국의 경제성장이 경제과정이 투명했더라면 더 빨랐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이 부패가 좋다는 뜻은 아니다.

  4.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지명자, 게리 콘 백악관 국민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지명자, 스티븐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 내정자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 인수위원회는 12일 골드만삭스 재단 이사장인 디나 파월을 백악관 경제담당 선임 고문으로 지명했다.

[201612] 촛불정국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과제

지난해 12월 13일에 국회의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 발표한 뒤 시간이 꽤 흘렀고 급히 써서 좀 성기지만, 아직 봐줄만은 한듯. ㅎㅎ (앞서 여기에 내놓은 포스팅을 발전시킨 것임.)

이 글에서 내 나름대로 반박(?)하고자 했던 해석은, 이번 촛불정국이 그간 사회경제적 모순(불평등, 비정규직, 세월호 등)이 누적됨에 따라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 물론 이러한 모순들이 이번 촛불정국의 중요한 배경은 되지만, 과연 그것을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그런 모순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는 할 수 있을까? 글쎄.. 그렇게도 보긴 어렵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위와 같은 모순이나 민중의 분노의 의의를 경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이런 사태를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변수는 ‘자본축적’이어야 한다는 얘기. 불평등 심화든 비정규직 확산이든.. 바로 그 자본축적이라는 핵심 동학의 결과로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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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우롱하는 ‘2017년 경제정책방향’: 유일호/황교안은 물러나야

다소 뒷북이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한번 쓴다. 우리 정부는 매년 12월 말경에 다음연도 경제정책 방향을 내놓는다. 이른바 ‘경방’이다. 이 보고서에서 정부는 당해연도 경제운용에 대해 평가하고 다음연도 경제정책방향을 천명한다.

이러한 보고서는 매년 나오는 것이므로, 이를테면 지난 12월 29일에 나온 {2017년 경제정책방향}에 있는 ‘2016년 경제운용 평가’는 전연도에 나온 {2016년 경제정책방향}에서 제시된 것에 의거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이를 살펴보자.

(아래 그림은 각연도 ‘경제정책방향’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된 pdf 파일에서 발췌한 것이다.)

*                     *                     *

1. 2015년 12월 {2016년 경제정책방향}에 나온 2016년 경제정책 기본방향

경방2016

>> 다 좋은 얘기. 여기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과 ‘4대개혁’이라는 키워드를 기억해 두자. 다른 얘기는 그냥 하나마나한 얘기, 정부의 일상적인 경제정책에 가깝다.

참고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2014년 초에 내놓은 계획으로, 고용률 70% 달성, 가계부채비율 5%포인트 감축 등을 포함하는.. 가히 박근혜 정부의 경제 마스터플랜이라고 할만하다.

 

2. 2016년 12월 {2017년 경제정책방향}에 나온 2016년 경제운용 평가

경방2017_1

>> 에.. 이게 끝이냐고? 그렇다. 이게 끝이다. 위 두 항목 각각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이라고 쓰고 ‘변명’이라고 읽는다)이 붙어있지만, 다 합쳐서 글자크기 14~15포인트로 1쪽이다. 저게 평가냐? (그래도 지난해엔 2쪽이었다..;;)

짧은 것은 괜찮다. 정말 문제는, 1년 전에 세워 놓았던 목표에 대한 평가가 전혀 없다는 거다. 특히,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2016년부로 종료되는데도, 그에 대한 평가가 단 한줄도 없다! 정부의 경방에서 재벌개혁 의지와 계획까지 보는 건 꿈도 안 꾼다. 하지만 적어도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들여 스스로 마련한 정책.. 그것도 개별정책이 아니라 한 정권의 사활이 걸린 정책패키지에 대한 평가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실제 성과는? 가장 중요한 것 두 개만 보자: 고용률은 제자리걸음, 줄인다던 가계부채는 사상최고속 증가. 요거 두 개만 기억해두자. 지난달 있었던 대정부질문에서 유일호 부총리는 경제수장임에도 불구하고, 가계부채 비율이 얼마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고 말았다.

 

3. {2017년 경제정책방향}에 나온 2017년 경제정책 기본방향

경방2017_2

>> 일단 좋은 얘기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4대개혁’이다. 지난 연도 계획에서 정부는 이미 4대개혁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후속조치’까지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별다른 평가도 생략한 채 정부는 또 다시 올해 경제정책 목표로 ‘4대개혁’을 입에 올리고 있다. 이것은 그냥 후안무치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현재 촛불민심이 4대개혁 폐기를 원하고 있음에 비춰보면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재밌는 것은, 지난해 완수하겠다던 4대개혁은 다시금 정책목표에 올리고 있으면서도, 청년/여성고용률 제고와 가계부채 감축 등을 골자로 한 3개년 계획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인가?

 

(결론) 이상과 같은 경제정책의 감출 수 없는 실패의 책임을 지고 유일호 경제부총리, 그리고 황교안 국무총리는 당장 물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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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청년수당, 청년배당 — 정부가 더 유능해지는 게 중요

1. 나는 주부나 학생에게 임금 또는 그 어떤 사회적 수당을 줘야 한다는 생각—요샌 이게 ‘기본소득론’이다—이 그 자체로는 딱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금이 노동자의 생계비이고, 그것이 직접 자본에 고용되지 않은 가족들(주부, 자녀 등)의 생계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직접적으로 명시되지만 않았을 뿐 애초 임금 개념에 주부나 자녀에 대한 수당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동안 ‘비공식 영역’에 대한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 아니다.1 (물론 주부 등의 기여를 ‘직접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식한다’라는 점에서 일정한 진보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의의는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크다고 보진 않는다.)

2. 그런데도 요즘 특히나 그와 같은 수당들이 강조되는 까닭은, 한마디로 고용이 불안해지고 임금이 줄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임금 저하는 국가의 기능 확대에 의해 일정 정도 보완되거나 심지어 상쇄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른바 ‘신자유주의’ 기간에 국가 기능이 퇴보하면서, 세계화 진전에 따라 인구구성이 다변화하면서,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질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자본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가계들의 재생산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3.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임금을 전처럼 올리자고 할 수도 있고, 국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그런 여러 해법들 중 하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 같이 발전의 여지가 아직 많은 나라에 있어서는 임시방편 성격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해법(미봉책)일 뿐이다. 성남시가 하는 ‘청년배당’이 그 예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그것은, ‘얘들아 미안하다. 국가가 무능한데 지방정부 차원에선 어쩔 수가 없구나. 이거라도 받고 기죽지 말고 다니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4. 이렇게 보면,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정말 이상한(?) 정책이다. 겉보기엔 청년배당과 거의 같지만, 그 취지가 완전히 다르다. 서울시에 따르면 청년수당은 고용정책의 일환이다. 즉 ‘부모님 임금도 줄고, 국가가 해주는 것도 없으니, 이거라도 받아서 생계에 보태쓰라’는 돈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연구용역비 같은 것이다. (실제로 활동계획서를 내고 심사를 통과해야 받을 수 있다.) 국가 입장에선 ‘소득이전’이 아니라 ‘비용지출’이다. 연구용역비로 빵 사먹으면 안 된다. 사 먹으려면 그것이 연구의 일환(이를테면 회의)임을 증빙해야 한다.

그러면 이런 돈을 왜 청년에게 주나. 일자리창출, 노동시장 효율화, 고용주 지원 등 기존의 고용정책들이 다 망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등에서는 이런저런 기존의 일자리정책들을 살펴보니 효과가 별로 없으므로 차라리 애들한테 돈을 주는 게 낫겠다는 것이다. 글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 같이 발전의 여지가 많은 나라에선, 궁극적인 해법이 아니다. 정부가 더 유능해지는 게 훨씬 중요하다.

5(곁다리). 언젠가 박원순 시장은 청년수당 받아서 술도 사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연 박시장다운 인간미 넘치는 발언이지만, 이것은 위 4에 엄밀히 따르면 경솔한 표현이다. 그걸로 별일없이 술이나 사마셔? 그랬다간 비용회수에 들어가야 하는거다. 기업이 고용지원금으로 그랬다면 어쩔건가? 그러나 나는 박시장의 표현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청년수당을 고용정책으로 밀어붙이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본다. 물론 현실적으로야 중앙정부(복지부)와의 다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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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만약 누군가가, 주부에 대한 임금 비지불을 주부에 대한 착취와 동일시하면서, 후자의 문제를 들어 주부임금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나는 주부에 대한 임금 지불이 이뤄져도 여전히 착취는 발생한다고 대답하겠다.

재벌과 야당과 촛불 앞에 놓인 ‘선택’들

이번주 야권의 탄핵시도가 불발에 그치면 지금 광장에 모인 200만 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분노의 물결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이에 대해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대로, 희미해지는 촛불과 함께 군중의 규모도 줄어들고 우리는 다시 전과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가길 강요받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나는 설령 야권의 탄핵시도가 불발에 그치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은 끝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시기도 4월까지 늦춰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사태가 그저 대통령을 포함한 정권의 ‘추악한 민낯’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껏 사태는 보통사람으로선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련의 사실들과 그에 대한 대중의 이례적으로 격렬한 반응에 의해 압도적으로 추동되어 왔다. 이러한 쓰나미 같은 충격에 밀려 박근혜 대통령이 재빠른 자진사퇴를 선택하거나 국회를 통해 탄핵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현실을 우리는 지난 한달여간 경험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자진사퇴나 국회의 탄핵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지금 한국의 경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현재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허용하지 못할 정도로 절박하다. 바로 이것이, 정권 차원의 스캔들과 관련된 ‘거품’이 걷혔을 때 드러나게 될 ‘바닥’이다.

현재 한국경제의 상황은 ‘자본’의 위기, 특히 ‘재벌’의 위기라고 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물론 이런 위기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간 재벌은 국가권력과 결탁해 근로대중을 희생시키며 솜씨좋게 위기를 넘어 왔다. 그래서 그동안은 ‘자본’의 위기가 사회양극화, 고용불안정, 비정규직 확산 등의 형태로 위장되어 왔던 것이며, 결과적으로 자본은 나름대로 경제성장의 과실을 따먹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권력과 자원을 총동원해 재벌의 뒤를 봐줬다. 하지만 세계경제의 침체로 인한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심화하는 소득(및 자산)양극화와 고용불안정 등으로 이제 더 이상 대중은 양보할 게 없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와중에 불거진 박-최 스캔들은 그간 재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조금도 남김없이 없애버렸다. 이제 자본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그야말로 ‘맨몸으로’ 맞닥뜨려야 할 처지에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은 그러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것이다. 행여 그것을 겪더라도 그 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데 우리나라의 독점자본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본다. 물론 ‘질서있는 퇴진’론도 말은 된다. 여당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4월에 임기단축 형식으로 퇴진하고 이후 조기 대통령선거를 통해 새 정부로 이행하자고 주장한다. 재벌로서는 자신의 기존 파트너들이 내놓는 이 시나리오가 잘 작동하기만 한다면 거기에 동조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그리 녹록치가 않다. 새누리당의 ‘4월퇴진’ 시나리오는 재벌이 현재의 국정공백 상황을 최소한 6개월, 아마도 9개월 정도를 더 감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 사이에 삼성전자는 폭발로 인한 갤럭시 노트7 단종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낼 새 모델도 출시해야 하고, 현대자동차 또한 비슷한 처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두 기업이 그렇단 얘기다. 다른 많은 수출기업들도 제대로 영업을 해나가려면 정부의 보증이 필요한데, 만약 그 사이에 미국의 금리인상에 이어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1 안 그래도 세계적으로 보호주의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는데, 과연 우리 기업들이 그 파고를 정부의 도움 없이(또는 매우 약한 도움) 넘을 수 있을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삼성이 갤럭시 노트8 또는 갤럭시 s8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까? 혹시 미국이나 다른 어디에서 적대적인 소송이나 당하지 않을까?

중기대출

방금 국가신용등급을 언급했는데, 그와 더불어 향후 우리 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 국제기구들의 경제성장 전망치 하향조정이다. 이미 OECD가 그러한 조정을 했고(3.0% @ 2016년 6월 —> 2.6% @ 2016년 11월), 내년 1월에 전망치를 내놓을 IMF도 이미 해외매체를 통해 지난 10월에 3.0%였던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출 것임을 시사했다.2 과연 얼마나 내릴까? 지금도 벌써 많은 이들이 벌벌 떨고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경제위기’론은 정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금 ‘위기론’을 확산시키며 일부 보수매체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지금 시점에서 한국의 독점자본의 선택은 이미 꽤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것도 장담할 수는 없다. 향후 사태의 추이에 따라 재벌은 좀 더 자신들에게 친숙한 파트너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이것이, 어떤 일이 있어도 박근혜가 끌어내려지는 그 시간까지 촛불이 꺼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한 선택이 지금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현재 재벌이 박-최 무리와 ‘공범’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하나 갖춰지고—나는 대내적 조건보다는 대외적 조건이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 본다—상황이 점점 ‘임계점’에 다가감에 따라 재벌의 선택이 겉으로 드러날 시점이 올 것이다. 바로 그러한 순간이 왔을 때, 그들은 타협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타협의 대상은 야권이다.

사태진행의 주요한 무대가 정치권인 지금, 200만 촛불을 배경으로 가진 야권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일부 여권과 ‘타협’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간간히 감지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움직임은 일단 적발되기만 하면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재벌의 선택’이 가시화되고 무대가 정치권을 넘어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확장될 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야권의 여당 정치세력과의 타협이 아니라 바로 저 재벌과의 타협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박근혜의 조기퇴진과 야권을 중심으로 가급적 빠른 정권안정을 전제로 할 것이다.

자, 이러한 갈림길 앞에서 현재의 야당의 선택은 무엇일까? 작금의 사태의 공범인 재벌과 타협하면서 좀 더 안전하지만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결연히 선을 긋고 조금은 더 힘들지만 정의로운 길을 갈 것인가? ‘재벌도 공범이다’라고 외치는 200만 촛불과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악마와 손을 잡을 것인가?

또한 200만 촛불의 선택은 또 어떠할 것인가? 박근혜가 끌어내려지는 데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재벌을 포함한 모든 공범들이 처단될 때까지 촛불을 밝힐 것인가? 물론 이런 선택이란 게 모 아니면 도 식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타협점은 어디쯤에서 만들어질 것인가? 이 경우에도, 앞서 올린 글의 말미에 내놓은 질문이 여전히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현재의 열기 속에서 박근혜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한국경제에서 비정규직의 위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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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장관 긴급소집.. 무디스·S&P·피치에 “경제 이상없다” 전화 (조선일보, 2016.12.10.)

  2. 지난 4월 영국의 내년도(2017년) 경제성장률을 2.4%로 전망했던 IMF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인 10월에는 그 수치를 1.2%로 반토막냈다.

평화시위의 한계에 관한 하나의 시각: ‘평화시위 회의론’이 보지 못하는 것

요즘 ‘평화시위’라는 방식을 두고 얘기가 많다. 한쪽에선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시위문화도 선진화해야 한다며 평화시위를 옹호하고, 다른 한쪽에선 평화시위가 가져다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은 이미 2008년 광우병 집회를 하면서 보지 안았으냐며 답답해 한다. 나는 이 후자를 ‘평화시위 회의론’이라고 부른다. 이 입장에 따르면, 평화시위로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가 없고 광장에 모인 군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별 성과 없이 흩어지기 쉽다.

그런데 ‘평화시위 회의론’이 2008년의 실패를 상기시킬 때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2008년엔 평화시위 프레임이 실패했지만, 지금의 촛불 정국에서는 평화시위의 위력이 막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한달반 정도의 기간을 돌이켜보면, 광장에 모인 군중의 ‘평화’ 기조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반면, 군중의 규모와 위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그리고 그에 이은 야권의 분열과 ‘질서있는 퇴진론’의 등장 이후에도,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촛불은 더 크게 불타올랐다(12월 3일 집회). 분명 이것은, ‘평화시위 한계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잠정적으로) 마련한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사안 자체에 내재된 선과 악, 참과 거짓의 구별이 2008년 광우병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박-최 게이트’에서는 명확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확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다양한 요소들이 ‘박-최 게이트’에는 내재해 있다. 더구나 이미 최순실은 물론 박근혜도 검찰에 의해 (사실상) 피의자로 지목된 상태다. 이렇게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명확한 우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대중운동이 굳이 폭력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평화’로 일관했을 때, 운동의 효과는 극대화될 수도 있다. 실제로 평화적인 방식으로 현재 광장은 200만 넘는 사람들을 모아내었고, 이 ‘규모’ 자체가 엄청난 ‘힘'(force)이 되고 있다. 즉 현재의 시위가 만약 성공(?)한다면, 그것은 이번 시위가 평화로워서가 아니라 강해서다.

이에 비해 2008년 광우병 파동에서 제기된 문제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할 것인가, 수입한다면 어떤 조건으로 할 것인가, 협상과정은 충분히 투명하고 공정했는가, 장기적으로 국민의 먹거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문제들은 훨씬 더 모호하고 비결정적이다.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2008년에 평화시위 프레임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저런 비결정적인, ‘정답’이 정해지지 않고 사회세력간 이해관계 대립이 첨예한 사안에서는, ‘평화적으로’ 대중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오직 ‘힘’만이 사태를 해결한다.

또 이런 측면도 있다. 여태까지 평화시위라는 것은 청와대/대통령한테 뭘 좀 해달라는, 애원하는 식이었다. 그런 평화시위라는 게 먹힐리가 없다. 하지만 이번엔 바로 그 대통령이 물러나라는 게 주제다. 즉 현재의 시위에서 핵심은 ‘평화’가 아니라 ‘박근혜 퇴진’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기존의 평화시위에서와는 전혀 다른 요구다. 과거엔.. 이를테면 세월호 때를 돌이켜봐도, ‘부디 대통령께서 살펴주시라’는 식이었고, ‘박근혜 퇴진하라’,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구호는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고찰은, 올해 ‘박-최 스캔들’이 오직 ‘평화시위’에만 의존해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가리키는 반면, 그러한 ‘승리’가 내포하는 내용적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암시도 동시에 준다. 박-최 스캔들은 2016년 말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유일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진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독점재벌의 횡포, 비정규직 일반화, 남녀차별, 청년실업, 노년노동… 한마디로 경제와 사회 전체에 퍼진 비민주성을 척결(최소한 개선)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는 안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이해와 해법은, 박-최 스캔들만큼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다. 앞서 광우병 파동과 관련된 문제들처럼, 그것들은 지극히 비결정적인, ‘정답’이 없는 문제다. 각각의 사안을 둘러싼 물질적 이해관계, 사회 세력들 간의 대립 속에서, 즉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에 대한) 상당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오직 잠정적으로만 ‘타협점’이 형성될 것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비정규직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면, 얼마나 줄여야 하는가? 소득의 재분배는 어느 정도까지 정당화될 것인가? 여성에 대한 차별은 어느 선까지 교정될 것인가? 과연, 이런 문제들이 지금과 같은 ‘평화시위’로 근로대중의 바람에 부합하는 정도로까지 해소되겠는가?

지난 한달 반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평화시위는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힘을 가졌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 성공할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성취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 이후, 우리가 위에서 말한 한국사회의 기저를 이루는 ‘진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평화시위의 무력함을 다시금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 평화시위의 이중적 성격이며, 흔한 ‘평화시위 회의론’이 보지 못하는 측면이다. 그리하여 중요한 질문은, 이를테면, 현재의 열기 속에서 박근혜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졌을 때 한국경제에서 비정규직의 위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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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울프,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 (2004) 서문

마틴 울프(Martin Wolf)는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칼럼니스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에서 일하기 시작해 지금은 수석 경제 칼럼니스트(chief economics commentator)다. 이분은 단행본도 몇 냈는데, 지금 소개하는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 범지구적 시장경제 옹호⟫(Why Globalization Works: The Case for the Global Market Economy, 2004)도 그 중 하나다. 국내에는 ⟪금융공황의 시대⟫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이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보시길.)

이하는 ⟪왜 세계화는 작동하는가⟫에 실린 자전적 성격의 서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사상은 중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짤막한 글에서 그는, 자기가 가진 자유주의(liberalism) 사상의 우월성과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진정 열심히 달려 왔기에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지식인답게,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자기가 살아온 길을 꽤 소상하게, 그리고 상당히 ‘솔직하게’ 서술한다. 그러나 이 글의 진정한 특징은, 그런 서술의 과정에서, 평소 그의 신문 칼럼에서는 보기 어려운 온갖 비논리적이고 억지스러운 진술들이 난무한다는 거다. 특히 그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등등에 대한 혐오는 정말 입이 벌어질 정도다. 아아… 그의 빛나는 신문칼럼 뒤에는 정녕 이런 일그러진 ‘사상’이 있었단 말인가! (아, 물론 이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그런 판단에 영향을 줄 마음은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의 결론적인 생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저정도면 좋다’라고 인정하는 편이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왼쪽)와 함께. 런던에 있을 때 마틴 울프를 몇 번 보았는데, 이분, 좀 '펭귄맨' 닮으셨다. 글을 많이 읽다보니, 친근해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ㅎㅎ
야니스 바루파키스(왼쪽)와 함께. 런던에 있을 때 마틴 울프를 몇 번 보았는데, 이분, 좀 ‘펭귄맨’ 닮으셨다. 글을 많이 읽다보니, 친근해져서 더 그런 것 같기도.. ㅎㅎ

더군다나, 이 책이 나오고 나서 몇년 뒤 ‘선진국발’ 세계경제공황이 났고, 그로부터 8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세계경제는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세계화는 끝났다’라는 말을 질리도록 듣고 있다! 적어도 울프가 이 책에서 했던 말들의 상당 정도는 좀 더 신중하게 재고되어야만 할 것이다.

어쨌거나 아래의 ‘서문’은 그 자체로 꽤 재밌는 글이다. 이 글은 비단 마틴 울프 자신만이 아니라 그 세대의 영국의 (또는 유럽의) 한때는 좌파 사상에 매력을 느꼈으나 지금은 거기에서 멀어진, 그러나 여전히 이 사회의 진보를 믿는다고 스스로 자임하는 중도 자유주의자들이 으레 살아왔을 법한 모습을 담고 있다고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원래 이 번역문은 2008년 8월에 내 과거 블로그에 올려뒀던 것이다.


Martin Wolf, Why Globalization Works: The Case for the Global Market Economy, New Haven: Yale Nota Bene, 2004, pp. x-xviii.
(원문에 달린 미주는 번역하지 않음.)

서문―왜 나는 이 책을 썼는가

정부가 인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은총의 하나인
자유무역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인기가 없다.
— 토머스 맥콜리(Thomas Macaulay), 1824

사상(ideas)은 중요하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내 아버지 고 에드먼드 울프(Edmund Wolf)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그는 히틀러로부터 도망 온 오스트리아 유태인 난민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영국으로 건너왔다. 극작가이자 열정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미치광이 사상과 그것과 거의 같은 정도로 미치광이 사상인 공산주의자들의 그것이 과연 어떻게 세계의 커다란 부분에서 문명화한 삶을 파괴했는지, 그리고 파괴하고 있는지를 내게 가르쳐줬다.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에 태어났으므로, 이와 같은 위험이 그다지 오랜 얘기가 아니었다. 독일은 내가 태어나기 겨우 일 년 전에 패망했다. 내가 외부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사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컨대 나는 내 양친이 무장한 사상을 피해 달아난 난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내 친가와 외가 직계가족들은 유럽을 떠남으로써 살아남긴 했지만, 그들의 대부분의 친척들은 오늘날 홀로코스트라 불리게 된 것―나는 이를 그 히브리어 이름, 쇼아(Shoah, 파괴)라고 부른다―에서 사라져갔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네덜란드 유태인 집안 출신인 내 어머니는 그녀의 아저씨, 아주머니, 사촌들 중 거의 서른 명이 나치 치하에서 죽었다는 얘길 우리에게 해 줬다. 나는 또한 공산주의 독재정권들이 유럽을 분할해 놓고도 내가 자라난 나라의 자유와 평온까지도 위협하고 있음을 곧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자 작가였으므로, 그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추측에 의거하기보단 사실에 바탕을 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수많은 그의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결코 공산주의에 매료되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며 비난했는데, 그 위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무된 폭군들이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고문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었고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당시는 많은 지식인들이 반(反)공산주의를 꽤 부끄러운 일로 여겼지만, 그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그래도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랬듯, 그는 사회주의―온건하고 신중한 종류의 것이긴 했지만―에는 끌렸었다. 사회민주주의가 당시 그의 천성에 맞는 지적 거처였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토니 블레어(Tony Blair)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의 정치는 좋아했을 것이다. 언론인이자 방송인 및 작가로서의 긴 경력을 거치며(다른 뭣보다도 그는 1950년대에 BBC의 독일어 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자였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런던 통신원이자 나중엔 칼럼니스트였으며, 독일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 감독 겸 극작가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는 했다. 이 당시는 많은 독일 지식인들이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종들에 놀아나던 때였다는 게 중요하다.

내 아버지는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아버지보다 덜할 것 없이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담백한 인간적 품위가 갖는 영속적인 가치를 배웠다. 나는 내 부모님의 가치관에 저항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민주주의자 즉 ‘사회적 자유주의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자(classical liberal)―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통틀어 ‘자유주의자’라 했을 때 의미하는 바다―로 바뀌어 갔다. 나는 자유(freedom), 민주정부, 무관심적 진리추구와 같은 계몽주의적 이상들은 한없이 귀중하지만 동시에 끔찍스러우리만치 취약하다는 것을 배웠다. 또 나는 이런 가치들에는 수많은 적들이 있으며, 그 중 몇몇은 공개돼 있지만 다른 몇몇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은,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이 제공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 혜택을 보면서도 그것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지식인들이다. 이들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공격했던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었음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매 세대마다 되돌아오며, 순진한 젊은이들을 망쳐놓고는 한다.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었던 피리 부는 사나이(pied piper)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였다. 좀 더 최근에 그것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였지 않나 한다.

1965년 10월, 나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에 입학해서 고전학(classics)을 공부했다. 내 세대를 휩쓸었던 저항의 파도가 휩쓸기 직전이었다. 그런 저항들 중 몇몇―특히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 같은―은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정당해 보인다. 개인의 해방을 위한 요구에 나는 공감했다. 비록 지금은 혁명들이 다들 그렇듯 그것 또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고 여기지만 말이다. 그러나 많은 저항들이 나는 이미 그로부터 면역되어 있었던 유치한 좌익급진주의의 형태를 띠었다. 나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아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듯했다. 나는, 별 볼일 없는 두 시인의 장점들을 구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즉 해충과 벼룩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따져볼 필요는 없다는 거다. 어차피 나는 모든 종류의 마르크스주의들이 사악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유―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에 대한 적대는 혐오스러웠다. 그 이후 역사는 내가 내 부모님으로부터 일찌감치 배운 나의 태도를 승인해 마지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옥스퍼드에서 좀 더 긍정적인 것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1967년 고전학에서 정치학/철학/경제학(PPE)으로 전공을 바꾼 뒤였다. [그 때 배운 것으로서] 이 책과 관련된 주요한 교훈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일단의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제국주의, 군사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마침내 파시즘―의 공격으로 자유주의가 무너짐에 따라 빚어진 폐해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좋은 경제정책―당시 많은 수의 옥스퍼드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현명한 케인스주의 정도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긴 하지만―이 자유로운 사회와 경제를 그런 공격들로부터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것도 배웠다. 1930년대에처럼 경제가 실패하면 정치의 안정과 사회의 조화는 커다란 위험에 처한다. 번영이 비록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경제학은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에 관여한다. 경제학은 우리가 문명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려 할 때에도 중요하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물론 그들 자녀들을 위한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동의에 기반을 둔 사회는 주저앉는다.

내가 옥스퍼드로 갔을 때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자―그 당시 죽은 지 얼마 안 됐던 노동당수 휴 개츠켈(Hugh Gaitskell) 성향의―였다. 나는 16살 때부터 노동당의 ‘젊은 사회주의자들’(Young Socialists) 그룹에서 철두철미한 반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다. 옥스퍼드에서 나는 ‘노동당 클럽’(Labour Club)에 가입했다. 첫 번째 학기가 끝날 무렵, 해롤드 윌슨(Harold Wilson) 당시 노동당 정부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존 ‘노동당 클럽’을 장악하자 나는 ‘옥스퍼드대 민주 노동당 클럽’(Oxford University Democratic Labour Club)이라는 이탈조직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1967년 나는 1966년 초에 우리가 세웠던 ‘민주 노동당 클럽’의 의장이 되었다. 나는 1970년대 초까지 노동당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1969년, 나는 옥스퍼드의 너필드 대학(Nuffield College)로 가서 지금은 경제학 석사(Master of Philosophy)라고 부르는 것을 했다. 거기서 나는 주로 세 명의 스승―이안 리틀(Ian Little), 모리스 스콧(Maurice Scott), 맥스 코든(Max Corden)―에게서 번영, 특히 제3세계의 번영을 위해 국제무역이 중요함을 배웠다. 맥스 코든은 당시 실효적 보호에 대한 중요한 저작을 끝마쳤고, (나처럼) 수학에 자신 있는 학생들에게 특히 유의미한 방식으로 무역이론을 가르쳤다. 다른 둘은 (예일대의 티보 스키토프스키Tibor Scitovsky와 함께) 이전 반 세기동안의 경제발전에 대해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저작의 하나인 ⟪몇몇 개발도상국에서 산업과 무역⟫(Industry and Trade in Some Developing Countries)을 1970년에 펴냈다. 우리 시대의 ⟪국부론⟫이라 할 만한 이 훌륭한 책은 여러 나라의 무역정책과 경제발전에 대한 연구로서, 리틀 교수가 OECD의 ‘발전센터’(Development Centre)에서 행한 것이다. 그것은 수입대체가 아닌 외향적 무역 체제(regime)의 중요성을, 그리고 통제경제정책(dirigisme)이 아닌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하나의 반혁명 선언(counterrevolutionary manifesto)이었다. 나중에 이런 접근은 일반적인 상식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나쁜 인습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책은 내가 시장경제가 그에 대한 다른 어떤 대체물보다도 뛰어나다는 믿음으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민주주의에 대해 했던 기막힌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시장경제]은 이제껏 시도되었던 모든 형태의 것들만 빼면 가장 형편없는 경제시스템이다.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는 영국의 주택정책에 대한 짤막한 논문을 쓰면서 굳어졌다. 이 과정에서 나는 지대에 대한 통제와 공공임대주택의 증가가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알았다. 당시 너필드 대학에 있다가 나중에 런던정경대(LSE)로 옮겨간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내가 이 주제로 ‘젊은 페이비안들’(Young Fabians)을 위해 짧은 팸플릿을 쓰도록 설득했다. 이 팸플릿은 익명의 심사자로부터 즉각 거부되었고, 나중에 나는 그가 그 바로 전에 장관을 지냈던 리처드 크로스만(Richard Crossman)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런 일을 통해 나는 노동당이 낡고 작동 불가능한 국가주의(statism)와 결합한 채 지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믿게끔 되었다. 이런 확신은, 영국의 재앙적인 주택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 말에 [크로스만보다] 훨씬 더 지적인 앤써니 크로슬랜드(Anthony Crosland)마저도 설득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더 굳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의 작품들, 특히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과 ⟪자유헌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을 통해 나는 시장경제는 안정되고 내구성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이기도 함을 확신하게 됐다. 시장경제는 그와 같은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조건이기는 한데, 계획경제에 내재된 권력의 집중은 아래로부터의 압력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장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인적 선택을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 시장은 자유의 차원(dimension)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신념들은 나를 사회민주주의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로 돌려세워 놓았다. 지금도 여전히 난 자유주의자인데, 그것은 내가 개인의 자유에 최상의 가치를 두기 때문만이 아니라 주제넘게 나서는 정부(intrusive government)의 지력과 능력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내가 사회민주주의자들(미국에서라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사회주의의 소멸이 건전한 이들의 계획경제와 국가소유에 대한 믿음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광신자, 반(反)계몽주의자, 극단적 환경론자, 파시스트, 마르크스주의자, 그리고 오늘날의 반(反)지구화론자와의 전투에서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온건한 보수주의자는 같은 편에 있다. 이 책은 이와 같은 폭넓은 범주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며, 바라건대 그들이 범지구적 시장경제가 매우 바람직한 것임을 믿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그것 자체라기보단 이 범지구적 시장경제를 어떻게 운영(govern)하고 규제할 것이냐다.

너필드 대학에서의 마지막 해에 나는 세계은행(World Bank)에 젊은 전문가(young professional)로 지원했다. 당시 은행의 경제국 수장이었던 데이빗 헨더슨(David Henderson)이 나의 이런 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와 함께 얼마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은행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에는 OECD의 수석 경제학자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만났던 또 다른 자유주의 대의의 전사로, 당시 [너필드] 대학의 연구원이었던 디팍 랄(Deepak Lal)이 있다.

1971년 세계은행에서 내 경력은 훌륭한 영국인 경제학자 스탠리 플리즈(Stanley Please)가 이끌던 부서에서 시작됐다. 그런 선택을 한 까닭은, 그것이 매력적이고 보람 있는 기회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소득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현대적 과업이라고 당시에―그리고 지금도―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최고의 훈련이었음이 드러났다. 많은 평생의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 중 몇몇은 그들의 모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서 했다. 그 초창기 동료들 중에는 나중에 인도의 개혁적인 재무 비서관이 되는 몬텍 싱 알루왈리아(Montek Singh Ahluwalia), 나중에 인도의 수석 경제자문관이 되는 샹카 아카리야(Shankar Acharya)가 있었는데, 이 둘은 1990년대 인도의 시장 지향적 개혁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72-74년에는 동아프리카, 1974-77년에는 인도를 담당하는 경제학자로 일하면서 나는 국가가 통제하고(dirigiste) 내향적인 경제정책이 행하는 폐해를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이는 기괴한 비효율성 때문만이 아니고, 그것이 낳는 부패라는 돌림병 때문이기도 하다. 은행에서의 10년에 걸쳐 나는 주로 시장 메커니즘과 무역에 더 많이 의존할 것을 주장했다.

세계은행에서 내가 쓴 첫 번째 주요 보고서는 케냐의 민간부문에 대한 것이었다. 얼마 뒤 나는 잠비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정책들의 반(反)농업적 편향에 대해 연구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무척 기가 꺾였는데, 이 두 나라가 세계은행의 꽤 열정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서도 경제적 낭떠러지 위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에서 내가 가장 오랜 기간 매달린 것은 인도의 터무니없이 반무역적이고 개입주의적인 정책에 대한 연구였다. 인도가 큰 나라라는 이유로, 세계은행의 지원은 비록 작게나마 계속 유지되었다. 기업들에 어떤 기술과 투입물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를 명령하도록 고안된 면허제도가 빚어낸 결과들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 작업은 인도의 수출에 대한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인도에 대해 연구하는 동안 수많은 친구들을 사귈 기회를 가졌다. 그들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이가 만모한 싱(Mannohan Singh)이었다. 당시 그는 인도정부의 수석 경제자문역이었고 나중에는 개혁적인 재무장관이 되었다.

세계은행에서 나는 1978년에 출판된 첫 번째 ‘세계개발보고서’(World Development Report) 작성을 위한 팀원으로 일 년 간 일한 적도 있다. 이는 당시 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가장 창의력 있는 기획의 하나였으며, 당시 은행의 사업부문 수장으로 막 뽑혀서 나중에 그 자리를 약 20년 지켰던 어네스트 스턴(Ernest Stern)이 지휘했다. 여기서도 나는 무역에 초점을 맞췄다. 은행에 있는 동안 내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이젠 고인이 된 벨라 발라사(Bela Balassa)가 있다.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와 세계은행에 소속되어 있었고, 수출지향적 무역정책을 장려하기 위해 끈기 있게 일했다. 다른 중요한 지적 영향을 끼친 인물로 당시엔 MIT에 있었고 지금은 콜럼비아 대학교에 있는 자그디쉬 바그와티(Jagdish Bhagwati)와 당시엔 미네소타 대학교에 있었고 지금은 IMF 부총재인 앤 크루거(Ann Krueger)가 있다. 이 두 학자 모두 외국무역체제 및 경제발전에 대한 고전적 연구의 개론서를 1970년대에 낸 바 있다.

1970년대 말에 이르자 나는, 세계은행은 그 직원들의 훌륭한 의도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기관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의 실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것이 돈을 빌려주는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는 거의 무관심한 채로 대부에 매달리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불가피한 단점인데, 왜냐하면 세계은행은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것―돈―이 종종 [그 돈을 받는 나라에] 별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점은 과거 미 국방장관을 지냈고 1967년부터 1981년까지 은행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성격 때문에 더 증폭됐다. 맥나마라는 무지막지한 의지의 사나이로, 빈곤경감에 개인적인 사활을 걸었으며 끔찍하리만치 상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본성상 그는 계획자이자 수량화에 능했다. 그의 수석 경제자문관이었던 고(故) 홀리스 치너리(Hollis Chenery)의 보좌 아래 그는 스탈린식 발전관을 실행시켰다. 즉 (1) 빠른 성장이 투자증대와 이용 가능한 외환의 증가에 뒤따를 것이다, (2) 이 둘은 외부로부터 추가적인 자원을 필요로 한다, (3) 이런 자원의 상당 부분은 세계은행에서 나오게 된다. 그의 관리 아래 은행과 은행의 대부는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모든 부서는 프로젝트의 질이나 수혜국의 발전 프로그램에 사실상 상관 않고 돈을 더 많이 대출하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이는 은행 직원들의 전문성을 훼손시켰고, 돈을 빌리는 쪽으로 하여금 뻔한 결과를 무시하고 부채를 쌓아 나가도록 부추겼다. 이런 상황은 계속될 수 없었고 실제로 그랬다. 몬텍 알루왈리아가 언젠가 내게 말했듯, 세계은행은 죽어가는 산업의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그 성장의 한계에 다다를 것은 뻔했고, 맥나마라가 은행을 떠난 뒤 곧 그렇게 됐다.

이런 일에 질색이 날 때쯤, 나는 부서의 선임 경제학자로서 인도를 대상으로 3년째 일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은행과 관련한 내 주요한 기능은 엄청난 양의 원조제공을 정당화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 돈이 인도정부로 하여금 그들에게 절실한 정책전환을 보류할 수 있게 해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 정책전환은 거의 20년을 낭비한 끝에 1991년 외환위기의 깊은 수렁 속에서 단행되었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만모한 싱이 이 전환의 책임자였고, 몬텍 알루왈리아가 경제비서관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재무비서관으로 그를 도왔다. 이와 같은 경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확인시켜줬다. (1) 정책전환은 경제성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2) 그런 정책전환은 똑똑하고 의욕있으며 규율이 잘 잡힌 비교적 소수의 팀에 의해서도 실행될 수 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3) 그런 정책전환은 바깥에서 부과될 수는 없다.

불행히도 세계은행의 잘못은 과도한 대부만이 아니었다. 은행은 또한 정부들에도 대부를 해줘야만 했다. 이는 두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1) 은행은 정부가 해당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가정해야만 했다, (2) 은행은 부당하게도 그 국가이익에 대한 집단주의적 견해를 강화시켰다. 은행의 대부는 부패하고 종종 사악한 정부들이 그들 국민들의 이해관계와 바람을 무시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은행을 그만둘 무렵 나는 은행의 대부자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1)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부자, (2) 도움을 이용하지 않으려 하는 대부자, (3)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대부자. 세계은행은 그 구조상 통상 매우 작은 그룹인 이 세 번째 범주의 대부자들에게 그것의 역량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그 결과 그것이 행하는 노력들은 불필요하거나 소모적이었다. 따라서 나는 고(故) 피터 바우어(Peter Bauer) 경이 오래 전에 원조에 대해 했던 비판의 대부분에 동의하게 되었다.

성공적인 발전을 위해 통합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세계경제의 몇 가지 측면들을 감시하도록 디자인된 기관들이 실패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오늘날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자유로운 세계경제를 수호하는 것이 IMF, 세계은행, WTO와 같은 특정 기관을 수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관들은 그들 자체로서 판단되어야―그리하여 개혁되거나 폐기되거나 해야―한다. 이 단계에서 이런 깨달음을 통해 나는 은행의 보호막을 나와 비교적 불확실한 민간연구소(think tank)의 세계로 들어갔다. 1981년 9월, 나는 런던에 있는 무역정책연구센터(Trade Policy Research Centre)에 연구국장으로 들어갔다. 이 자리는 전후(戰後) 국제무역이론의 거성인 고(故) 해리 존슨(Harry Johnson)이 차지했던 것이기도 하다. 정력적인 소장 휴 코벳의 지휘 아래 센터는 무역자유화와 다자간무역체계에 대한 연구로 그에 합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나는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던 마지막 두 해에 센터와 처음 접촉했다. 동료 도널드 키싱(Donald Keesing)과 함께 나는 개발도상국의 섬유/의류 수출품에 대해 선진국들이 행하고 있던 수입할당제도에 대한 건실한 연구보고서를 썼다. 그것은 빈국의 비교우위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반응에 들어있는 위선에 대한, 그리고 몇몇 무역정책기조의 복잡성과 불합리성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제공했다.

나는 센터에서 6년간 연구국장을 지냈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작업은 다자간무역협상의 여덟 번째 라운드를 열 것을 촉구하는 일이었다. 이는 나중에 우루과이 라운드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결국 1986년에 시작됐다. 센터는 서비스에 관한 무역협상을 위한 의제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내가 한 가장 중요한 기여는 무역체계에서 개발도상국의 역할에 대한 연구들을 기획한 것이다. 이 연구들의 목적은 개발도상국이 호혜적인 방식으로 무역협상에 나서기를 꺼리는 오랜 관행에 의문을 제기하고, ‘특례 및 우대 조치’(special and differential treatment)를 옹호하기 위함이었다.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연구는 저명한 국제무역법 학자이자 당시엔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던 로버트 휴덱(Robert E. Hudec)에 의해 수행되었다.

아아, 적어도 영국에서 민간연구소의 재정은 고질적으로 취약하다. 1986년에 이르자 센터는 문을 닫아야 할 것임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었고, 머지않아 그렇게 됐다. 새로운 일을 찾고 있는데 1987년, 나는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편집인이던 저프리 오웬(Geoffrey Owen)으로부터 거기의 수석 경제학 필자가 되어 달라는 초청을 뜬금없이 받았다. 이것은 그로서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내가 그 신문에 몇 번 글을 낸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언론인은 아니었고 그렇게 될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도전이었고, 결국 나는 1987년 9월에 ⟪파이낸셜 타임스⟫에 들어갔다.

이 무렵 경제정책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은 수차례의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주어진 현실의 결과들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를 미세조정할 수 있다는 순진한 케인스주의적 신념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깨져버린 바 있다. 그것은 화폐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되어, 물가안정(inflation targetting)―나는 이 개념을 1970년대 모리스 스콧으로부터 처음 들었다―이라는 목표가 널리 채택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통제경제정책과 보호주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인기가 시들해졌다. 영국에서 환율통제는 1979년 쌔처(Thatcher)정부에 의해 폐기됐다. 민영화가 1980년대 초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세계를 휩쓸었다. 1980년대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영국 경제학자 존 윌리암슨(John Williamson)이 만든 용어―는 경제발전에 있어 건전한 재정/통화정책과 적극적인 시장의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게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았던 것은, 내향적 무역정책의 실패 및 무역자유화의 뛰어남이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로 개발도상국들은 과거 무역라운드에서보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더 큰 역할을 실제로 했다. 이는 1995년 1월에 세계무역기구(WTO)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시장관계를 기반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경제라는 아이디어가 한동안의 집산주의적 휴지기 뒤에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1989년-91년 사이 소비에트제국(Soviet empire)의 붕괴―내 생애 가장 즐거웠던 깜짝쇼―는 정치와 경제정책에서의 범지구적 변환을 확정짓는 것만 같았다. 사회주의는 죽었다. 미국 분석가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심지어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이런 시각은 그것을 부당하게 희화화한 자들에 의해 경멸받았다. 후쿠야마가 주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앞선 경제와 사회를 운영하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거였다. 이 점에서 그는 옳았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적들은 그것의 생존을 여전히 위협할 수 있고, 역사가들이 거의 확정적으로 황금시대라고 보는 것을 끝장낼 수도 있다. 이 명제가, 대부분의 인류역사를 훼손시키는 어리석은 짓과 범죄가 앞으로 이런 저런 형태로 다시는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뜻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무질서가 다시금 세계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 만약 역사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또는 더 나쁜 세상을―고를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단 설득을 위한 것이다. 이 책은, 시장을 통해 통합된 세계는 인류 대다수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거라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시장은 생활수준을 높임에 있어 지금까지 발명된 그 무엇보다 더 강력한 제도(institution)다. 사실 그에 필적할 상대는 없다. 그러나 국가가 시장을 필요로 하듯 시장은 국가를 필요로 한다. 이 둘이 잘 결합했을 때 우리는 한 사회를 운영하는 데 가장 훌륭한 방식인 현대 자유민주주의를 갖게 된다. 그것의 혜택은 더 널리 퍼져나가야 한다. 오늘날의 문제는 너무 많은 범지구화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더 많은 자유시장과 더 많은 협력적 세계운영(co-operative global governance)을 잘 조합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나는 국가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국가가 협력적 세계경제질서에서 그들의 장기적 이익에 대해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명제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첫 번째 자유주의적 질서의 붕괴는 30년 동안의 대재앙을 낳았고, 내 부모세대는 그것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수백만의 생명들이 그런 실책 때문에 사그라져갔다. 이제 우리 모두는―또는 거의 모두는―철이 들었다.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신념에 흠집을 내는 사상들은 잘못됐다. 사회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실수였을 뿐만 아니라 범죄였다. 제국주의는 일종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군사주의와 민족주의는 유럽문명을 파괴했다. 이제 우리는―분별력 덕분일 뿐 아니라 요행수로―전보다 나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다시 창조했다. 이는 기회를 세계 전체로 확장한다.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내던져버리지 않는 것은 우리 후손에 대한 우리의 의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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