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글을 잘 퍼오지 않는데, 이건 (혹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좀 예외로…
두 개의 글을 퍼온다. 하나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에 대한 고 정운영 선생의 서평이고, 다른 하나는 세종대의 박유하 교수가 쓴 이 서평에 대한 반론이다. 정운영 선생께서 혹시 재반론을 하시진 않았나 모르겠다. 이 말도 안 되는 ‘반론’을 접하고 씁쓸해 하셨을 정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정선생의 서평엔 평소 그의 문체가 잘 살아나 있다. 한때는 그게 좀 짜증이 나 일부러 그의 글을 피하기도 했었는데, 선생을 더 이상 뵐 수 없다 생각하니 새삼 그리워진다. 그의 문투는 사실 그의 어투와 크게 차이가 없다. 아래 글이, 그의 그 저음의 차분한 목소리에 실려 전해지는 것 같다.
[1] 현기증 나는 ‘유식’과 구제불능의 ‘무식’
(출판저널, 1999년 7월 20일, 정운영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읽은 나의 소감은 한마디로 저자의 현기증 나는 ‘유식’과, 매우 실례되는 말씀이나 구제 불능의 ‘무식’에 대한 동시 병발의 찬탄이었다. 나의 무식은 그에 비할 바조차 아니므로 그의 무식을 탓하는 나의 태도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우선 유식이다. 그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소양은 읽기조차 어지러울 만큼 넓고 깊은 것 같다. 이를테면 1990년대 들어서야 우리 지식인 사회에 불기 시작한 각종 포스트모던 사조를 저자는 이 책을 쓴 1970년대 초에 벌써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소쉬르의 언어학이다. 일례로 나무가 나무인 까닭은 그것이 꽃도 풀도 아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무의 본질 따위를 캐는 일은 헛수고일 뿐이다. 언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말에 본질 따위는 없으며, 이 말과 저 말의 ‘차이’만 있다는 설명이다.
가라타니는 이 논리를 마르크스 해석에 대입한다. 단절이 아닌 차이와 이동에 대한 관심이 마르크스 자신의 연구는 물론이고, 마르크스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위해서도 올바른 독해라는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가 그렇고,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의 관계가 그렇고, 철학과 경제학의 관계가 그렇고, 보나파르트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가 그렇다는 말씀이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 사이에도 오직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자칫 ‘반공 교재’로 이용당할 위험마저 없지 않다. 이에 대한 시비 판정은 독자의 몫이겠으나, 거기 동원된 저자의 도도한 변설과 화려한 수사는 가히 독자를 압도한다.
그리고 그의 무식이다. 저자는 언어에 본질이 없듯이 가치에도 본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무에도 풀에도 사용가치만 있으며, 기껏해야 그 사용가치 형태의 차이에서 가치가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가치 분석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이며, 가치의 실체―그 크기와 형태까지―를 해명한 책이 <자본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가치의 본질이 분명히 있다는데, 가라타니는 없는 것이 마르크스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니 참 딱한 노릇이다. 여기도 물론 도피로를 뚫어 놓았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가, 작품과 독자의 관계가 다를 수 있다는 발레리의 관찰이 그것이다. 아무튼 마르크스가 무어라고 썼든 그가 그렇게 읽겠다는 데야 우리한테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이 마르크스 독해의 ‘가능성’이라면,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배짱이고, 전대미문의 혼동이다.
가라타니의 관점에서 소쉬르의 문자는 마르크스의 화폐에 해당한다. 화폐는 상품 교환의 수단이고,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화폐가 없으면 교환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가 아닌 한, 형태가 없으면 실체도 없다는 가라타니의 관찰은 옳다. 그렇다고 형태가 실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화폐형태만이 진짜이고, 가치는 의제적 허구라는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 마르크스에 대한 이런 왜곡이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부정적”이라는 그의 고백으로 미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놀랄 일도 있다. 서울에서의 100원짜리 물건을 부산에서 120원에 팔면 20원의 ‘잉여가치’가 나온다거나, 오늘 100원짜리 물건을 내일 80원에 만든다면 역시 20원의 잉여가치가 생긴다는 설명이 그러하다. 무식은 죄가 아니라지만, 잉여가치가 이처럼 공간적 차이나 시간적 차별에서 발생한다는 최첨단 이론에는 정녕 사회과학―마르크스적이든 반마르크스적이든―이 졸도할 지경이다. 학생의 답안이라면 서슴없이 F학점을 매기겠지만, 사계 권위자의 말씀이니 나로서는 채점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다만 본질을 거부하고, 주체를 파괴하며, 중심성을 부정하는 그의 작업이 마르크스를 ‘우롱하는’ 포스트모던 사고와 일맥 상통하는 것은 분명하다.
[2] 가라타니 고진은 ‘무식’한가? 정운영의 ‘가라타니 고진’ 서평을 반박한다
(출판저널, 1999년 8월 20일,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 대한 정운영 교수의 서평(<출판저널> 제262호)은 ‘전공’자로서의 권위의식이 때에 따라 얼마만큼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서평이었다.
정교수는 이 책의 인문학적 “유식”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도 “구제불능의 무식”한 책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가라타니가 “가치에 본질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인 정교수에 의하면 “가치분석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이며, 가치의 실체를 해명한 책이 <자본론>”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분명 “가치”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가치의 실체”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라타니의 작업이 다름 아닌 이런 유의 혼동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교수에 의하면 “무지”와 “왜곡”, “무지막지한 배짱”과 “전대미문의 혼돈”으로 가득 찬 “무식”하고도 “딱한”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교환”이라는 행위에 내재하는 ‘근원적인 패러독스’다. 바꿔 말하자면 “교환”을 둘러싼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 행위를 통해 마르크스 자신도 자각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는 무의식적 사유체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그 과정을 통한 가라타니 자신의 사유체계 자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마르크스의 ‘의도’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자본론>의 표층이 아닌 심층을 분석한 책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작금의 문학비평과 닮아있음은 저자가 문학비평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텍스트의 뒤편을 보려 하는 정신분석적 시도가 그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마르크스가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 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다.
“가치”란 그것이 “교환”됐을 때 비로소 “가치”가 된다. 그것이 설령 보석이라 해도 아무도 그것을 화폐를 주고 “교환”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가치”라는 것이 본질로서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공간 혹은 시간의 ‘차이’)하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는 ‘실체’일 수 없는 ‘허구’다.
어떤 체계건(그것이 역사이건 국가이건) 그것은 원천적으로 존재한 적도 없고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음을 그는 보여주고 있으며, 그 한 예로서 그는 자본제 경제가 “외부”를 필요로 함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가라타니가 언급한 발레리의 예처럼, 문학이라는 예술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학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시대’와 ‘공간’이 그것을 “가치”로 만들 뿐이다. 이른바 ‘예술’은, 근대 이후에 주목받으면서 하나의 “아우라”화한 것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것에는 ‘가치’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정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본질”적인 가치는 아니다.
“본질을 거부하고 주체를 파괴하는 포스트모던 사고”가 정교수에게는 불편한 듯하지만, “본질”이며 “가치”의 ‘허구성’이 당연한 전제가 되고 있는 지성계의 “최첨단” 동향에 혹여 무관심하다면 “무식”한 건 가라타니인가? 아니면, 사회과학을 “졸도”시킨다는 가라타니적 사고를 ‘깨임’으로서 체험한 필자인가? “학생의 답안이라면 F학점을 매기겠”다는 정교수의 서평에 대해, 젊은 날 이미 자신이 전공하는 경제학부 교수의 논문을 영역하다가 여백에 “멍청이!”라고 쓰지 않을 수 없었다던 가라타니가 과연 몇 점을 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