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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치이론의 한계와 가능성: 왜 가치이론은 늘 승리하면서도 변화하지 않는가? (A personal note)

어찌어찌해서 제6회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를 하나 했다. 이번 행사는 (몇 개의 전체회의에 더해) 참여하는 각 단체에서 독립적으로 세션을 꾸리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사회경제학회 세션에서 발표를 맡았다(링크).

링크된 페이지에서 보다시피 내 발표의 제목은 ‘가치와 현대자본주의’. 제목만 봐서는 뭘 하려는지 드러나지 않을텐데, 사실 그건 나 스스로 뭘 말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두 개의 발표들이 나도 최근에 쓴 바 있는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것이어서, 나도 거기에 숟가락을 얹을까 하고 잠시 생각도 했으나 그냥 접었다. 어쨌든 애초 주어진 제목에 맞게 결국 발표는 했고,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나름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언제고 하고픈 얘기였고, ‘맑스코뮤날레’는 그러기에 적당한 자리였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일 뿐이다.

다음은 발표에 앞서 준비한 메모를, 당일 발표장의 분위기와 토론내용을 참조해 업데이트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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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문장 자체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가치이론(value theory)이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이론으로서, 스미스나 리카도의 이론도 가치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는 그 특유의 방법을 통해 그들 이론의 불충분함을 밝혀냈고, 이를 통해 그것이 근거해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드러냈다. 따라서 그는 가치이론의 비판자라고 불리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지극히 ‘속류화’되었으며 주류경제학에서는 누구도 자본주의 경제를 다룸에 있어 ‘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에 근거한 경제논의를 ‘가치이론 비판’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오히려 현재의 주류경제학 및 그와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하는 비주류경제학들에 대해 자신을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마르크스적 경제이론을 일컫기 위해 ‘가치이론’, ‘가치분석’,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등의 용어를 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가치이론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라는 문장의 의미다. 그러니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경제(학)을 비판하려고 했지, 또 하나의 경제학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것(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조정환, 이진경 등이 있다)은 아무 쓸 데 없는 것으로, 경제학의 그간의 발달사와 현재상태에 대해 완전히 무지함을 드러내는, 누워 침 뱉기일 뿐이다.

2.
‘가치이론의 위기’가 회자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최근엔 그것이 디지털화된 현대사회를 다루는 데 무력하다는 측면에서 제기되는 것 같다. 디지털/정보상품을 다루는 데도, 그러한 상품이 만연한 사회에서 성행하는 새로운 노동형태들을 해명하는 데도 무력하다는 거다. ‘인지자본주의론’은 그러한 문제제기 중에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유력한 대안이다. 어쨌든 그런 비판, 일견 타당한 면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이론이 새로운 현상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어려움을 들어 기존의 이론을 비판하고 오직 자신만이 새로운 상황을 설명해낸다고 주장하는 이론들도 언제나 있어 왔고. 그러나 이런 경우, 논의가 진행되다 보면, 새로운 주장들은 설익은 채 제출된 것이었음이 드러나곤 한다. 실제로 최근 다수의 연구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가치이론은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현상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분석적으로나 비판적으로나 탁월함을 입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탁월함의 매우 중요한 한 근거는, 가치이론이 예의 그 ‘새로운 현상들’을 반성적으로 다룬다는 데서 나온다. 그런 과정에서 ‘새로움’들은 침잠되고 다져져 ‘낡음’ 속으로 젖어들어가고, 동시에 전에는 자각되지 못한 채 잠들어있던 새로움의 싹들이 낡음 속에서 눈을 뜬다. 즉 기존 이론의 막다른 골목으로 여겨졌던 새로운 현상들이 사실은 그러한 이론에 의해 별 문제없이 설명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이때 동시에 기존의 이론도 일정한 발전을 이룬다. 왜냐하면 ‘새로운 현상들’이 새로운 것은 대체로 기존의 이론이 포착은 했으나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그 대상의 면모들이기 마련이어서, 이제 그 면모들을 다룸으로써 이론이 더욱 세심해지기 때문이다. (참조: 김공회,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 링크)

이와 같은 ‘이론의 반성’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행하는 반성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를테면 이성, 즉 반성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반성을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이론도 그렇다. 반성을 잘 하는 이론, 반성하는 것이 이론 그 자체의 논리에 의식적으로 각인된 이론, 그런 이론이 좋은 이론이다. 마르크스적 가치이론은 바로 그러한 이론이며, 이런 성격은 마르크스 특유의 방법에서 유래한다.

3.
여기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논점이 나타난다. 즉 사정이 위와 같다면, ‘새로운 현상들’과 관련해서 높게 평가돼야 마땅한 가치이론의 힘은, 그것이 몇 가지 올바른 방법론적/원칙론적 기반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고, 그것이 기존의 것들을 충분히 다뤄주고 있을 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원래 있었던 것들, 예를 들면 ‘노동’에 대한 만족스러운 논의(최소한의 ‘컨센서스’)도 갖춰지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동형태를 다루겠다고 나서는 것, 또는 다루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과연 가치이론은 국가, 노동, 소비 등과 같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범주들에 대한 충분한 이론들을 갖춰놓고 있는가?

이러한 고찰은 왜 이제껏 가치이론에 대한 (조절이론, 네그리/하트의 ‘제국’론, 최근의 인지자본주의론 등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의 발전을 낳는 데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한편으로 그러한 문제제기들은 가치이론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론적 수준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치이론 내부엔 그들의 도전을 ‘생산적으로’ 받아안아낼 만한 ‘컨텐츠’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의미에서 인지자본주의론을 노동이 파편화되고 불안정화된 현대의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비록 ‘노동’이나 ‘가치’와 같은 개념들을 그릇되게 이해하고는 있지만—로 볼 수 있을텐데, 가치이론은 그러한 개념들을 적어도 추상적인 차원에서는 올바르게 견지하고 있지만 이를 막상 인지자본주의론이 주목하는 현대의 특수한 상황에서 포착해내는 데 필요한 구체성 내지는 매개개념들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바로 그래서,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들이 가치이론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매우 추상적인 개념의 영역에서만 의미있는 논쟁지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고, 반대로 가치이론이 그러한 이론들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그러한 극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영역에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싸움의 결과는 언제나 가치이론의 승리—이것이 대다수의 관객에게도 ‘승리’로 받아들여졌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였지만, 그런 싸움들 이후 가치이론은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성벽을 더욱 공고하게 쌓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닌 것이다. 최근 인지자본주의론과의 싸움에서도 가치이론은, 전자가 틀렸음을 입증한 것 외에 어떠한 성과를 스스로 거두었는가?

처음에 가치이론, 즉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주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를 가치이론은 현실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 초기에 가치이론은 그 발전의 자양분을 현실로부터도 얻었고 이론 세계에서의 논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었단 얘기다. 그러나 글의 서두에 지적한 대로, 오늘날 가치이론은 이론의 세계에서 섬처럼 고립돼 있다. 주류경제학이 가치이론에 말을 걸지도 않지만, 후자도 전자에게 더이상 시비를 걸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둘 사이에 공유되는 이론적 지반의 축소에 따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애석한 일은 가치이론이 현실로부터 자신의 발전 근거를 취하는 데에도 점차 소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파괴적인 결과를 우리는 오늘날 목격하고 있다. 재벌, 비정규직, 복지(국가), 공공부문・요금, 자영업 등에 대한 가치이론의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개념화 없이 어떻게 한국의 신자유주의를,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4.
요컨대, 가치이론은 그 비상한 방법론적 원칙 덕분에 엄청난 이론적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건전한 문제제기’일 수 있는 것들조차 수용해낼 포용력도 가치이론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가치이론이 그러한 포용력을 회복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시킬 수 있을까? 나는 당장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에 나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본다. 물론 이 말이, 가치이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실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인지자본주의론과 같은 문제제기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으로부터 동력을 부여받아 이론 발전의 계기들을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동안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그간의 (절반은 외부에서 강요됐고 절반은 스스로 자초한) 고립의 필연적 결과다.

한편 이론적 고립의 결과 가치이론은 그 비판적 성격을 상당 정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의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의 개입적 연구가 어느 정도 쌓이고 나면, 가치이론은 오히려 바로 그 현실의 장에서 여타 이론들과의 대결—진검승부(!)—의 기회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애초에 가졌던 비판적 성격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끝)

[자캠 강좌] 정치경제학의 방법론

이번에 자유인문캠프에서 2개의 강의를 한다. 하나는 나 혼자 하는 거고(자본론 읽기. 기본적으로 지난 겨울에 했던 것과 거의 같지만, 좀 더 시간안배 등에 힘써서 3장까지 끝낼 거다!!), 다른 하나는 다른 선생님들이랑 팀으로 한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주제들). 그런데 두 번째 강의는, 수강생이 별로 없어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므로(아직 결정되지 않은듯), 강의시작이 3일 앞으로 다가온만큼, 일단 간단한 강의계획을 올려본다.

*                         *                         *

[. . .] 제가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를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는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흔히 범해지고 있는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고 “교정”하는 것까지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강의에서 다루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요, 아쉬운 대로 다음과 같이 구성을 해봤습니다.

1. 첫 번째 강의(7월 25일 수요일 오후 7~10시)

흔히 마르크스의 “방법”이라고 하면, 그의 “변증법적 서술 방법”을 가리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인식이 과연 올바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과연 변증법이란 마르크스에게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해볼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초기에서부터 자본론 또는 그 이후의 저작들 속에서 “변증법” 및 “방법”이라는 것을 마르크스가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추적해볼 것입니다.

2. 두 번째 강의(7월 27일 금요일 오후 7~10시)

이번 강의는 앞서 강의와는 어느 정도 별개로 꾸며질 것인 한편, 자본론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다름 아닌 자본론이 탐구대상으로 삼는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에서,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것이 형성될 수 있는 역사적 조건들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좀 멋지게(?) 만들면, “왜 마르크스는 이 대상을 다루기 위해, 앞서 강의에서 살펴봤던 것과 같은 방법을 필요로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면, “투하노동 vs 가치형태”와 같은 전통적인 주제는 물론, “물질노동 vs 비물질/인지노동”과 같은 보다 최근의 주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견해를 가지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의 강의에 이어, 류동민 선생님께서 가치이론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인 전형문제를 다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유철규 선생님의 금융에 대한 강의가 있습니다. 두 분 모두 각각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서, 특히 각 주제들을 현대적인 맥락에 맞게 풀어내어 주실 거라 기대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호응 바랍니다! (끝)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2)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2012년 봄)에, 나의 논문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가 실렸었다. 앞서 밝혔듯, 이번에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이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했는데, 다음과 같다(한글초록 및 기타 추가적 정보는 여기를 참조하시길).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먼저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인지자본주의론의 현재
2. 소극적 비판: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인식에 대하여
_(1)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비판의 개요
_(2) 인지자본주의론이 보는 가치이론: 모호하거나 단순하거나
3. 적극적 비판: ‘비물질노동’을 가치이론적으로 다루기 위한 메모
_(1) ‘비물질성’, 노동의 특정 유형의 성격인가 노동 자체의 성격인가
_(2) 단순 비교 대 역사적 형성
_(3) 가치이론의 기반: 측정가능성 대 비교/동등화
4. 맺음말

보시다시피 이 글에서 핵심은 2절과 3절이다. 따라서 아래 요약은 이 두 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1절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언뜻 보면 1절은 그냥 구색 맞추기 위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조정환이 어떤 종류의 연구자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왜냐?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자신이 마치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집대성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고 있다는 듯이 묘사하지만, 실상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제껏 관련 논의를 국내에 소개해온 선구자들을 단한번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이건 적어도 ‘예의’의 문제다), 관련된 세계적 논의들을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았다(이건 적어도 ‘성실성’의 문제다). 이러한 행태로부터 드러나는 조정환의 ‘의지’는 무엇인가? 자신을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로 내세움으로써 자신이 가진 기존의 지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추악한 의지, 자신의 책을 팔아줄 독자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가련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로써 나는, 조정환이 어떤 글에서 전희상에 대해 했던 부당하고 모욕적인 표현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더구나 특히 이 후자의 경우엔, 조정환이 그리도 혐오하는, ‘경제적’ 내지는 ‘가치이론적’ 고려(!)가 개입되었으리라(자, 이렇게 경제학 또는 가치이론은 여러분들의 실생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부디 두려워 말길). 따라서 나의 비판은, 조정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조정환이 아주 작은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는 ‘인지자본주의론’ 일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조정환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지자본주의론의 전부도 아니고 대표주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의 (현실적 또는 이론적) 특수성을 상당히 반영한 논의를 내놓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그가 인지자본주의론을 어떤 면에선 왜곡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인지자본주의론과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다. 이건 그러니까… 김수행 교수가 공황론을 주로 소개했다고 해서 김교수의 입장이 공황론의 전부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당연하지 않은가? 실제로 과거엔 김교수가 공황론의 대표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내가 알기론 김교수 자신도 그렇게 자신을 내세운 적은 없다. 그런데 요샌 조정환이 인지자본주의론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사람들이 그만큼 게을러졌거나, 조정환의 간이 배밖으로 나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비판을 보자. 애초 나의 주장은 두 부분으로 나눠어 있었지만, 다음에서는 이 둘을 뭉뚱그려 모두 네 개의 주장으로 요약했다.

1. 가치이론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오해. 이것은 마치 {자본론} 제1권 제1장을 읽으면서, “터무니없이 높은 명품가격”을 반박근거로 내놓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여기서 상품가치는 매우 단순하게도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데, 이른바 명품의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은 이런 원칙을 거스르는 것 같기 때문. 이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반응은, “제3권까지 한번 가봐라”라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자본론}에서 제시된 이론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특히 가장 단순하고 추상적인 최소한의 규정에서 출발해서 점차 복잡하고 구체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해 가치와 가격의 괴리 문제는 계속해서 구체적 규정들이 덧붙여짐에 따라 점진적으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기각은 마르크스의 가치개념/규정을 제1권 제1장 수준, 즉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파악한 채로 이뤄진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이 기각의 근거로 삼는 현상들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부당할 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그렇다면 가치이론의 기각이 왜 포드주의 시대(=노동과 자본 간의 “협약”에 기초해 종전보다 현저히 높은 임금수준이 실현된 시대)에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난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2. 비물질성의 지위.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비물질노동을 노동의 새로운 유형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비물질성은 노동의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이제까지 가치이론에서는 그런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 밝혔듯 가치이론은 단순/추상에서 복잡/구체로 나아가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물질성 문제도 논의의 어떤 단계들에서 차차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항에 주의를 기울일 계기를 줬다는 점에서 인지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3. 그렇다면 노동의 비물질성, 나아가 그러한 비물질성이 특히 두드러져 보이는 노동유형들을 가치이론적으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 인지자본주의론에서는 예컨대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의 노동과 전통적으로 상정되는 이미지를 가진 노동, 이를테면 볼트와 너트를 맞춰 조이는 기계공의 노동을 대비시키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전자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함(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 병치/비교는 마르크스의 방법과 배치된다. 즉 특정 노동들의 병치/비교보다는 “역사적 형성”을 보는 것이 더 유의미한 파악법이다.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을 기계공과 대비시키면 누구라도 그 “인지적 아우라”에 취하기 쉽겠지만, 역사적 형성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종사자나 간병인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기계공의 모습에 가깝다(즉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는 것). 이로부터 제기되는 이론적 문제는, 특히 현대자본주의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과학기술노동의 그와 같은 역사적 형성—즉 자본주의화—이 현대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근거로 기존 이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4. 마지막으로,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측정” 자체에 대해. 인지자본주의론은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여러 환경의 변화 때문에 상품의 생산에 드는 사회적평균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함을 근거로 가치이론의 기반이 사라졌다고 본다. 두 측면에서 반론이 가능하다.

(1) 마르크스 자신도 오늘날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측정의 어려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노동일’을 다루는 {자본론} 제8장(불어/영어판 제10장)을 보면, 정해진 노동시간을 야금야금 늘리려는 자본가들의 작태들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이를 마르크스는 “분 뜯어내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작태들은 한 상품에 들어간 노동시간이 얼마인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신이 방금 전에(=즉 제1장에서) 내놓은 “직접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 명제를 철회하는 근거로 삼지 않았는데, 이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상상하듯 그러한 행태들이 마르크스 시대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아서가 아니라(실제로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게 “노동일” 장에서 마르크스의 요지다), 자신의 가치이론의 체계상(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의 ‘개방성’을 떠올릴 것!) 그것은 고려되더라도 뒤에 가서야 고려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초과착취”가 매우 일반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자본론} 제1권(부터 제3권까지)에서는 “정상착취”만 전제되는 것과 같은 이치.

(2) 측정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적, 정치적, 특히 기술적 사정과 복잡하게 얽혀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시간에 대한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노동일”이라는 표현 하나만 봐도 금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이를 “하루 동안의 노동시간”이라는 의미로 쓰지만, 원래 노동일(working day)이란 노동하는 날, 그러니까 “휴일”의 반대말이었다(참조). 즉 노동의 단위가 “하루”였던 시대로부터 “시간”으로 바뀌어가는 사정을 “노동일”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반영하는 것인데, 물론 이러한 변화가 기술적 뒷받침 없이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노동일”이 아니라 “노동시간”이라는 개념이 유의미하려면 실제로 그것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손목시계의 광범위한 생산을 전제한다(물론 “(자동장치로서의) 시계”의 출현의 의의는 단순히 노동시간의 측정 이상이지만).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시간”이 19세기의 시계, 또는 시간관념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할지 몰라도, 오늘날의 정밀화된 시계, 시간관념으로는 측정 가능하고, 또 끊임없이 측정되고 있다.

다른 한편, 인지자본주의론은 직접적인 노동시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교류작용들도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측정 불가능성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물론 오늘날 예컨대 블로그를 통한 광고가 상품가치 형성에 커다란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언제나 있어 왔다. 마르크스가 그것을 몰랐을까? 그가 살았던 중기 빅토리아 시대는 그야말로 “유행과 평판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런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의 미완결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상품의 평판을 측정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구글 애드센스의 등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날엔 상품가치 형성에 평판이 주되게 참여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드디어 “평판”이라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등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비로소, 말하자면 “평판의 정치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은 “측정”이 갖는 이러한 가변적인 성격 때문에 De Angelis and Harvie는 “측정이란 정치적 범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측정 문제의 본질은, 그것의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상이한 노동들이 끊임없이 비교되고 또 그럼으로써 동등화된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사실 아담 스미스나 헤겔, 마르크스가 공통적으로 주목했던 근대사회의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5. 맺음말. 나의 글이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론이 기존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노동시간의 ‘측정 불가능성’을 주요 근거 중 하나로 해서 세워져있는 만큼, 이상의 비판이 인지자본주의론에 일정한 타격은 가하리라 본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가치이론적으로 좀 더 유의미한 방식으로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개입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끝)

[※ 추가(2014년 2월 12일): 원하는 분이 있어서… 전문링크]

[후기/토론회]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주체’의 문제

계간지 {문화/과학}에서 주최하는, “제1회 문화과학 ‘북 클럽’ 논쟁: 인지자본주의에서 ‘가치’와 ‘주체’의 문제”라는 제목의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했다. 토론자는 나와 조정환 선생, 심광현 선생, 이렇게 셋이었다. (웹자보)

그러니까 애초 기획은, 조정환의 책 {인지자본주의}에 대해 나와 심광현이 ‘가치’와 ‘주체’라는 두 측면에 각각 주목해서 토론을 펼치는 것이었고,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 책을 대상으로 두 명의 토론자가 주로 ‘공격’을 하고 저자인 조정환이 ‘방어’를 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일단, 심광현 선생께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토론회에 못 나오시는 ‘사고’가 났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나와 조정환, 이렇게 양자구도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그곳이 ‘토론회장’이었다기보다는 조정환의 ‘정견발표장’ 같다는 거였다. 물론 그렇게 된 데는, 토론자인 내 책임도 일정하게 있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다음은 나의 간단한 후기다. (물론, 매우 주관적일 수 있는 후기이며,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다.)

*                      *                      *

예전에 무슨 토론회 자리(아마도 ‘맑스 꼬뮤날레’였던 것 같다)에서 한번인가 본 것 빼고는 조정환 선생이 말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그에겐 관심도 별로 없었고, 내가 그에 대해 가진거라곤 몇몇 이미지뿐이었다. 그 이미지, 그러니까 조정환 하면 평소에 떠오르던 이미지는 이런 거였다. 뻔뻔스러움, 무지, 무시, 열등감, 그리고—이게 백미인데—이상의 모든 악덕들을 커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 어떤 ‘영성적’ 아우라. (특히 이 마지막 것은 토론회에 왔던 누군가도 얘기했던 것이기도.)

이번 토론회를 거치면서 나는 위 이미지들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겐, 이번 이벤트가 (지루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lots of fun’이었다. 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나의 문제제기에 단 하나의 제대로 된 답변도 내놓질 않고, 이리저리 피해다니길 일삼았을 뿐이다. 아니, 그는 자신의 답변을, 지금 자신이 집필중이라는 책에서 길게 내놓을 것이라는, 상당히 ‘민망한’ 책광고로 대신했을 뿐이다. 물론 나는 이 답변을 그다지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이번 토론 덕분에 더더욱.

하여튼 이번 이벤트는 결코 ‘논쟁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게 조정환 선생의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는다(그는 그냥 ‘그’였을 따름이다). 다름아닌 행사를 주최한 {문화/과학}쪽의 문제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토론회’로 만드는 데 완전히 실패했고, 특히 내겐 엉뚱한 질문을 내놓기도 했다(도대체 조정환이 말하는 ‘명령(가치)’가 뭐냐는 설명을 왜 나한테 요구하냐고! 저도 사실은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엉엉). 그들은 조정환 선생의 지루하기 그지없는 하나마나한 발언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5시에 마치기로 예정되었던 토론회는 토론자 중 한 명이 빠진 데다가 ‘토론자들 간의 토론’이 거의 없었는데도 무려 6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났다. 덕분에 난 오줌보 터지는 줄 알았고. ㅎㅎ 그밖에 개인적으로 상당히 기분나쁜 일이 있었는데, 당시엔 바쁜일이 있어 그냥 나왔지만 이에 대해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예정이다.

청중은 어땠는가? 사실 이번 토론회에 나선 유일한 이유는 바로 청중 때문이었다. 즉 그 자리에 직접 와주신 좁은 의미의 청중은 물론이고, 나중에 다른 어떤 형태로 그 토론회를 간접경험할 넓은 의미의 청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플로어에서 나오는 질문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질문들을 내놓은 이들이 ‘가치’보다는 ‘주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가치’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는 ‘경제’나 ‘경제학’에 대해 매우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다(예컨대, 조정환은 현재의 부동산거품을 ‘인지적 요소’에 따른 고평가라고 불렀다ㅋ). 이건 그러니까, ‘나는 경제(학)에 대해 관심이 없다’라는 정도가 아니라(이건 괜찮다), ‘경제(학)이란 게 결국 이렇지 않냐’라는, 경제학에 대한, 그리고 현재 전개되고 있는 세계경제/한국경제의 상태에 대한 매우 ‘강력한 판단’이었던 거다. 결국 마무리 발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저로서는, 몇 안 되는 여러분들 앞에서조차 철학이니 정치니 하는,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발언하는 게 정말 부담스러운데, 여러분들은 경제에 대해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시는군요.” 물론 모든 청중이 다 이랬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랬다.

끝으로, 조정환이 내 질문에 답변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밝혀야겠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는 두 가지 답변을 했다. 답변의 적절성에 대해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판단해주시리라 믿는다.

(1)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은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이 갖는 복합적인 성격, 복잡한 구조를 오해하고, ‘가치’의 문제를 모조리 {자본론} 제1권 제1장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부당하게 기각한다는 내 질문에 대해: “나 {자본론} 열심히 읽었다. 옛날에 도망다니면서 얼마나 열심히 읽었나 모른다. 아마 내가 웬만한 경제학자들보다 {자본론}에 대해 잘 알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고요 ㅠㅠ 물론 이 얘길 그는 어려웠던 지난날의 감상에 젖어 매우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2) 인지자본주의론이 내놓는 인지/삶정치/비물질/정동 등의 노동들은, 처음엔 그저 고도로 복잡한 과학기술노동 정도를, 그러니까 ‘지식노동’을 의미했을 뿐이지만 점차 간병인, 가사도우미, 전화교환원 등도 포괄할 수 있도록 의미확장을 했다. 이와 같은 확장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이론적 무리수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통해 예컨대 ‘대졸/남성/20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중졸/여성/50대 간병인’을 하나의 범주로 두는 것이 경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한 정치적/주체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간병인’을 (무슨 꼭두각시 내세우듯이) ‘이론적 주체’로 만드는 게 아니라 ‘현실적 주체’로 만드는 일이지 않은가? 라는 내 질문에 대해: “무슨 소리냐! 나는 결코 간병인이 프로그래머보다 못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게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분들이 더 훌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논점흐리기! 졸지에 난, 근20년간 청소부, 가사도우미였던 내 어머니, 현재 간병인 일을 하시며 간밤에 환자들 똥오줌 치우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어머니의 잠재력을 깔본 패악무도한 놈이 되었다ㅎㅎ)

이 정도면 코미디감도 못 된다. 요새 ‘개콘’, ‘코미디 빅리그’가 얼마나 재밌는데! (끝)

p.s. 내가 올초에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 논문을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냈기 때문에, 내가 이번 토론회에 불려나간 것이다. 이번 토론회 때문에 그 글을 간단히 정리해봤는데, 조만간 그걸 여기 올릴까 한다..

[201203]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제목] 인지자본주의론의 가치이론 이해 비판: ‘비물질노동’의 개념화와 측정을 중심으로
[실린 곳]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9권 제1호 (2012년 봄) (링크)

드디어 저널이 출간됐다. 개인적으론 편집자를 좀 많이 괴롭혀서 그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글을 보기좋게 뽑아주어 정말 고맙다. 다음은 위 글의 한글초록이다.

이 글은 인지자본주의론이 제기하는 가치이론 비판을 검토함으로써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를 가치이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흡수할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성격을 갖는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의 가치이론 이해가 단순함을 들어 가치이론을 소극적으로 방어한 다음, 좀 더 적극적으로 가치이론이 그들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지를 논하겠다. 여기서 핵심 주장은, 인지자본주의론자들이 ‘비물질노동’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노동은 그 역사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에만 가치이론적으로 유의미하게 포착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측정’ 또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미결정된 채로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가능-불가능의 차원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요 용어] 인지자본주의, 비물질노동, 가치이론, 가치법칙, 역사적 형성, 측정.

마음 같아서는 원문을 여기에 올려놓고 싶지만, ‘도의상’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암튼, 위 글과 함께 이번 저널에 실린 다른 논문들(이번호는 ‘인지자본주의론의 쟁점’이라는 특집으로 꾸며졌다)을 통해 논의가 한층 고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고고씽! ㅋ

(참고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이번호엔 H님의 글도 함께 실려있다.)

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이번호는 상당히 기념비적인 성격을 갖는다. 물론 이런 성격이 당장부터 두드러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왜 그러냐?! 특집을 채운 논자들의 면면을 보면 금새 그 까닭이 드러난다. 일반논문이나 서평 외에, ‘특집’ 꼭지에 총6개의 논문이 실려있고, 조정환 자신의 논문을 빼면 모두 다섯 명의 논자가 인지자본주의론을 비평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다섯 명 중에서 자그마치 세 명(나와 H님을 포함해)이, 그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연구자라는 거다!

적어도 지난 20년 정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연구동향을 떠올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연구분야 정도만 빼면, 내 생각엔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연구가 대개 이렇다. 한마디로 말해, 그간 이 동네는 대가 끊겨있었던 셈인데… 이번에,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언뜻 생각하기론 약15년만에 거의 처음으로 ‘우리 여기 살아있다고!’라고, 그것도 ‘집단적으로’ 외친 것이다!!

물론 그간에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몇몇 개인의 산발적인 연구였고(나 자신도 좀 뒤늦게 합류하긴 했지만 그 중 하나였다), 그렇다 보니 그런 연구들이 어떤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정도까지는 못 되었다. 아니, ‘바람’을 일으키기는커녕 기존의 선배 연구자들의 정당한 주목 내지는 건전한 개입을 받지 못한 채 잊혔던 게 아니었나 싶다(물론 어느정도는 ‘함량미달’이어서도 그랬겠지만ㅋ).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특집호에서 ‘젊은’ 연구자 셋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정환 선생께서도 지금까지처럼 무슨 ‘선지자’처럼 굴지 마시고 이번엔 비판에 귀 좀 기울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가 이제껏 상대해야 했던 ‘논적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와 ‘구원'(舊怨)도 없고, (그가 맨날 욕하는) ‘스탈린주의’도 모른다. ‘낡은’ 틀로, 거기에 잘 들어맞지도 않는 우리를 재단하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구린내 풍기는 ‘꼰대’일 뿐이다(실은 이미 어느정도는 그러고 있다).

암튼, 기분 좋다. ㅎㅎ

[논문] 디지털 정보상품의 가치와 가격

강성윤, 〈디지털 정보상품의 가치와 가격: ‘버전 단위의 가치’는 성립가능한가?〉, 《사회경제평론》 제32호, 2009년 5월, 269-98쪽.


1990년대 초중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논쟁이 ‘가치이론 논쟁’이었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정보재 가치 논쟁’을 꼽을 수 있겠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전자의 논쟁이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벌어진, 대체로 197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계를 이미 휩쓸고 간 논쟁의 재판(再版)이라면, 후자는 전례가 거의 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논쟁이라는 사실이다.

이 논쟁은 2000년 강남훈 교수의 논문에서 시작되었는데(실은 이 논문의 전신이랄 수 있는 이전 버전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여기서 그의 기본적인 의도는 상품의 가격이란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주의 가치법칙에 입각해서 이른바 ‘정보재’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로 되는 까닭은, 보통 정보재(쉽게 MS사에서 나오는 Windows를 떠올리면 된다)라는 것이 처음 개발할 땐 엄청난 노력이 들지만 그것을 복제할 때는 비용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최초 1단위의 생산에는 엄청난 노동이 들어가는 반면, 그 다음 단위부터는 거의 노동이 들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가치가 거의 0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강교수는 바로 이런 가치와 가격 사이의 괴리현상을 마르크스주의 가치이론에 입각해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강남훈 교수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개별카피(copy)가 아니라 버전(version)을 상품의 단위로 보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는 것. 즉 윈도우즈xp라는 하나의 버전을 만드는 데 100의 노동이 들고(즉 가치가 100이고) 그것이 100개 팔린다면, 한 개(copy)의 가치=가격은 1이 된다는 것. 여기에 강교수는 ‘정보재’의 가격에는 특별잉여가치, 지대, 독점이윤 등도 일부 포함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와 같은 강남훈 교수의 주장은 이후 《사회경제평론》, 《진보평론》, 《마르크스주의 연구》 등의 지면을 통해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일부가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다(《정보재 가치 논쟁》). 해당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 강성윤이 저자인 이 논문은, 현재로서는 같은 저자의 최근글과 함께 이 논쟁의 최신 업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주장대로, 강교수의 문제제기 이후 논쟁의 진영은 크게 둘로 나눠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상품단위로서의 버전’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싸고서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논쟁에 속한 대부분의 논자들이 결국은 ‘인정’ 진영에 속하는 반면, 자신과 (그가 속한 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한) 채만수만이 ‘불인정’ 진영에 서서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 매우 단호하게 저자는, 상품의 단위는 마르크스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듯 ‘카피'(책 한 권, 볼펜 한 개 등)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연구개발노동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도 중요한 논점으로 떠올랐다. 논쟁의 초기엔 이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느냐 않느냐를 두고 논란이 많았는데, 대체로 ‘생산적이다’라는 쪽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다만 이채언 교수 정도만이 꿋꿋하게 ‘비생산적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하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독특한(?)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의 구분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음을 덧붙여둘만하다. 논문의 저자의 경우엔, 특이하게도 자신의 박사논문에서는 ‘비생산적’ 테제를 주장하다가 ‘생산적’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밖에, 역시 최근에 입장을 공개한 전희상의 경우엔, 연구개발노동은 그 자체로는 생산적이지는 않지만 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잉여가치 생산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갖는다고 본다.

요컨대 이 논문의 저자 강성윤은, (1) ‘정보재'(저자는 이를 ‘디지털 정보상품’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의 가치는 버전이 아닌 카피 단위로 고찰해야 하고, (2) 그것의 생산에 결부되는 엄청난 비용을 수반하는 연구개발노동은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럴 경우 저자는 크게 두 가지 ‘괴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첫 번째 단위 상품의 경우 ‘(연구개발노동을 포함하는) 엄청나게 높은 가치’와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 사이의 괴리, 둘째, 두 번째 단위 이후부터 발생하는 ‘0에 가까운 가치’와 ‘엄청나게 높은 가격’ 사이의 괴리.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자면, 저자는 이 두 문제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보자. 두 번째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저자는 채만수 소장과 마찬가지로 ‘독점가격’ 범주를 끌어들임으로써 이 괴리를 메운다(독점가격에 대한 마르크스의 독특한 개념규정에 대해선 생략). 즉 마땅히 0에 가까운 가격을 가져야 하는 상품이 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갖는 것은 국가권력 등의 강제에 의해 유지되는 어떤 메커니즘(지적재산권 등)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데 이와 같은 독점가격의 관철은, 첫 번째의 괴리문제도 해결해준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 같다. 즉 가치가 거의 0인 두 번째 단위 이후의 상품들이 일정액의 가격을 갖게 되면, 결과적으로 엄청난 연구개발비용이 상품 개별단위의 가격을 통해 분산회수되는 효과가 발생하므로, 거꾸로 (엄청나게 큰 가치를 갖는) 첫 번째 단위의 가격을 ‘정가’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는 것.

‘정보재 가치 논쟁’에서는 흔히 두 번째 문제(zero 가치 ☞ positive 가격)가 쟁점으로 떠오르지만, 내가 보기엔, 특히 강성윤의 경우엔 그가 ‘연구개발노동’을 생산적이라고 한 이상 첫 번째 문제(huge 가치 ☞ modest 가격)를 해결하는 게 핵심이다. 위 문단에서 제시된 그의 해법이란 것도, 독점가격 범주 도입을 통한 두 번째 문제의 해법은 그런대로 수긍할만하지만 초기개발비용의 개별단위에의 배분이라는 첫 번째 문제의 해법은, 이를테면 그가 비판하는 이채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다. 물론 그 나름대로는 ‘독점(력)’의 인정/존재 여부를 중요한 차이로 부각시키지만, 내가 보기엔 그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