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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강신준과 프루동의 긍정의 변증법 – 번외편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에서 강신준은 다음과 같이 쓴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서는 “부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혁의 과제로 내가 얘기했던 성숙의 의미인 것이다 … 그래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건설된다는 것을 강조한 의미인 것이다.

그는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다음 구절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 …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마르크스에게 있어 변증법은 현존 – 자본주의 – 의 부정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부정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본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자본주의를 충분히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성숙한 자본주의의 기준이 무엇인지 애매할 뿐더러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본론 1권 2판 후기의 관련 구절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독일에서는 이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이 유행했는데 이는 그것이 현존하는 것들을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들과 그들의 교의를 대변하는 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성하는 모든 형태를 운동의 흐름으로 파악하며, 따라서 언제나 그것들을 일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 강신준 역 [자본] 1권, p. 61.

우선 “신비화된 형태의 변증법”은 헤겔 우파의 변증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프로이센 제국을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의 최종단계로 보았다. 이렇게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이론이라면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합리적인 형태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신비화된 외피 속에 감추어진 합리적 핵심”이며,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에 대한 이해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긍정이 부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강신준에게서처럼 긍정이 부정의 “모색”을 위한 “토대”인 것은 아니다 (번역에 대해 지적하자면, “그것의 부정과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 대신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필연적인 몰락”이 옳다. “부정”과 “몰락”이 동격이다. 비봉판에는 “그것의 부정[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으로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대상의 “긍정적인 이해 속에 그것의 부정 … 에 대한 이해”가 포함 혹은 간직되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가.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부정적인 이해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라는 대상에 대해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는 긍정적 이해 외에도 자본론 출판 데드라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공언한 것보다 10년이 훨씬 지난 후에 출판된다) 부정적 이해가 가능하다. 여기서 긍정은 좋은 것, 부정은 나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긍정과 부정 사이에는 별다른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는 데드라인을 지키면서도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긍정이 부정을 포함하고 있어 긍정과 부정이 상호 연관되어 있을때, 긍정과 부정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정립과 반정립, 실현과 해소의 대립쌍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헤겔은 대논리학 서론(임석진 번역, 벽호)에서 변증법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의식의 제형태가 각기 저마다의 실현을 이룩하면서도 또 어느덧 자기를 해소시키는 가운데 결국 여기서 얻어지는 그의 결과란 다만 자기자신의 부정일 뿐이니 – 이럼으로써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하게 되는 셈이다. 학적인 진전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명제를 인식하는 데 있으니, 그것은 즉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자기 모순적인 것은 결코 영이나 추상적인 무로 해소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의 특수적인 내용의 부정 속으로 해소됨으로써 또 달리 말하면 결국 그와같은 부정은 전면적, 전칭(全稱)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시 해소되게 마련인 특정한 사상(事象; Sache)의 부정이며 따라서 특정한, 규정적 부정이라는 것이다. (43, 강조 추가)

반대물을 통일성 속에서, 혹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 (47)

변증법에서 대상은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해소하며 이를 통해 좀더 고도의 형태로 이행한다. 실현에 대한 이해(긍정적인 이해)가 바로 해소(와 이행)에 대한 이해(부정적인 이해)에 해당하므로 “부정적인 것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긍정적”이며, 변증법은 “긍정적인 것을 부정적인 것 속에서” 파악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자본주의의 자기실현은 곧 자본주의의 자기해소이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당 선언,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1, p. 412, 박종철 출판사). 대조적으로 강신준의 변증법에서는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우선하고 그것을 “토대”로 부정을 “모색”해야 한다. 긍정(실현)이 부정(해소)과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대신 긍정이 부정의 전제조건으로 기능한다.

강신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긍정적 이해의 핵심은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유기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마련이므로, 자본주의의 이 긍정적이고 좋은 측면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바로 이때 자본주의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나쁜 측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타파가 아니라 성숙의 결과인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좋은 측면에 기반하여 나쁜 측면을 지양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고도로 발달한 생산력이 사회주의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우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 기반하여 그 성숙을 촉진하는 것이 된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풍요롭게 내린다는 식이다. 죄는 죄로서 나쁘지만, 은혜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이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기 위해 죄를 짓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이미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느냐고 강변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긍정)이 바로 그 패망의 법칙(부정)임을 가르쳐준다. 자본주의의 성숙이 곧 그 패망이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더욱 더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패악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것이 일시적인 체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것을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타파하여 이 고통스러운 변증법을 마침내 완성할 것인가.

강신준의 변증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뿌리 깊다. 그것은 좋은 측면은 유지하고 나쁜 측면은 제거해야 한다는 프루동의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변증법을 비판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을 썼다. 하지만 이러한 치열한 학문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루동은 건재했다.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칭하는 둘째 사위 라파르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프루동이 라파르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족관계의 친밀함도, [철학의 빈곤]도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방어하는데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강신준의 [오늘 ‘자본’을 읽다]를 단순히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는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쓴다 (강민철, 김진영 옮김, 아침새책 117-8,  131, 강조는 원문; 맑스 엥겔스 선집 1권에도 수록)


이제 프루동이 헤겔의 변증법을 정치경제학에 응용하면서 어떠한 수정을 가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프루동에게 있어서 모든 경제적 범주들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라는 양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는 소부르조아가 위인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제적 범주를 관찰한다: 나폴레옹은 위인이었다, 그는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동시에 많은 악을 범했다.

프루동이 보기에는 좋은 측면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이 서로 합쳐져서 모든 경제적 범주의 모순을 형성한다.

문제의 해결은 좋은 측면을 유지시키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노예제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범주이다. 따라서 그 역시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노예제의 나쁜 측면은 젖혀두고 좋은 측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우리는 수리남, 브라질, 북미의 남부지역에 있는 직접적 노예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 노예제는 기계, 신용만큼이나 부르조아 산업의 중추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면화를 구할 수 없고, 면화가 없다면 근대 공업이 있을 수 없다. 식민지에 가치를 부여해준 것이 바로 이 노예제이다. 세계무역을 창출해냈던 것은 식민지이며, 대규모 공업의 전제조건이 세계무역이다. 그러하기에 노예제는 가장 중요한 경제범주인 것이다.

노예제가 없다면, 가장 발전된 나라인 북미는 아마도 가부장적 나라로 바뀌었을런지도 모른다. 세계 지도에서 북미를 지워보라. 그러면 남는 것은 근대 문명과 교역의 몰락이라는 무질서뿐일 것이다. 노예제를 사라지게 해보라. 그러면 북미를 세계지도에서 지울 수 있으리라.

노예제는 경제범주인 까닭에 모든 나라에서 항상 존재해왔다. 근대 국가는 자신의 나라 내부에서만큼은 노예제를 위장시켜야만 하지만, 신세계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노골적으로 강요해왔다.

노예제를 수호하기 위해 프루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것이다: 이 경제범주의 좋은 측면을 유지하고 나쁜 측면을 제거하라.

헤겔에게는 정식화할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프루동은 헤겔의 변증법은 전혀 갖지 못한 채 그 언어만을 도용할 뿐이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적 방법은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에 대한 독단적인 구별에 있다.

잠깐 프루동을 범주로서 예를 들어보자. 그의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 장점과 단점을 검토해보자.

프루동은 인류 선을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헤겔에 비해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변증법적 출산의 진통에 의해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는 문제에 있어서는 무기력하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변증법적 운동을 완성하는 것은 두 대립된 측면의 공존, 양자의 투쟁, 새로운 범주에로의 이행이다. 나쁜 측면을 제거한다는 그 문제 설정은 변증법적 운동에는 부족하다. 본래의 모순적 성질에 의해 자신을 정립시키고 대립시켰던 것은 범주가 아니다. 범주의 두 가지 측면 사이에서 흥분하고 당황하고 안달이 났던 것은 바로 프루동이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탈출하기 어려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프루동은 높이 뛰기를 하고는 일약 새로운 범주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이성 속에서의 연속적 계열이, 그가 보기에도 놀랍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손쉬운 것을 손에 넣어 첫번째 범주로 삼고는, 자의적 방법에 의해, 정화되어야 할 범주의 결점을 치유할 수 있는 성질이 거기에 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우리가 프루동을 믿는다면, 조세는 독점의 결점을 치유하고, 교역의 균형은 조세의 결점을 치유하고 대토지 소유는 신용의 결점을 치유해야 한다. 

프루동에 따르면 분업은 일련의 경제적 발전을 전개시킨다.

분업의 좋은 측면 – “본질적인 면에서 고려한다면, 분업은 조건과 지성의 평등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분업의 나쁜 측면 – “분업은 우리에게는 빈곤의 원천이 되어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에 고유하고 자신의 생산성의 주요한 조건인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분할시킴으로써, 노동은 결국에 가서는 스스로의 목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해결되어야할 문제 – “분업의 결점을 일소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유용한 효과를 보존하는 새로운 합성체”를 발견하는 일.

정치경제학? or 경제학? – 다시 한 번 ‘꼼수’에 대하여

경향신문이 사정이 진짜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이런 글까지 다 실어주니까 말이다.

[경제와 세상] ‘경제학’ 용어에 숨겨진 꼼수 (강신준, 2012년 2월 15일)

1. 이 글은 단순한 ‘무개념’뿐 아니라 경제학 교수가 범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관계상의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몇 가지 간단히 지적하겠다.

우선 사실관계를 얘기하자면 후자의 용어[economics]는 알프레드 마셜이란 사람이 1890년에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사실관계’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대담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종류의 용어변천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집단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예컨대 ‘economics라는 표현을 저서의 제목에 처음 쓴 사람은 xxx이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강교수와 같이 ‘xxx가 만들었다’라고 하긴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어떤 기준으로 보든 위 진술은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샬의 1890년 저작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Principles of Economics}일 것이다. 분명 이 책에 ‘economics’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이 책이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로 대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마샬도 아니고, 또 그의 저 1890년 저작에서 그 용어가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일단 ‘economics’라는 용어는 다름아닌 마샬 자신이 그의 부인과 함께 쓴 이전 저작 {The Economics of Industry}(1879)에도 쓰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economics’가 출현한 첫 사례는 아니다. 그 전에 이미 1877년, 1878년에 각각 J. M. Sturtevant 및 H. D. Macleod의 저작의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특히 Macleod는 이에 앞서 187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political economy’를 ‘economics’라고 바꿔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economics를 “교환가능한 양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이미 나 자신이 몇 번 밝혔다. 나는 심지어 강교수가 그에 대해 무려 ‘반론’을 내놓기까지 한 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아는 한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관련논문 중 가장 훌륭한 이헌창 교수의 글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강교수께서 위와 같은 오류를 견지하고 계신다니..)

 

2. 다음으로,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둘의 차이는 단순히 앞에 ‘정치’가 붙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구별하는 것은 ‘꼼수’를 진실과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 경제학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과학이 아니라 단지 ‘진실’과 ‘꼼수’의 차이일 뿐인데 이를 서로 달리 부르는 것은 곧 ‘꼼수’의 의도처럼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 . .] 두 경제학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기본적으로 나는 위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진실’과 ‘꼼수’를 달리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전혀 설득력이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아량을 발휘해 그의 의도를 읽어보면, 대충…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가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나아가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는 마샬을 위시한 경제학자들의 ‘꼼수’의 산물이므로, ‘진실’을 수호하는 우리가 굳이 물러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불편한 용어를 쓸 까닭이 없다]라는 것 같다.

그런데 강교수가 말하는 것과 달리,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는 단순히 앞에 형용사 하나가 더 붙었느냐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전자가 후자로 바뀌면서, 이름만 바뀌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일 것이다. ‘political economy’에서 ‘economics’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름에 대한 게 아니며, 이 과정에서 ‘economics’는 기존의 ‘political economy’에 대해 그 대상과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론 자체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고,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개개인의 의지와는 어느 정도 별도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모든 얘기를 풀어낼 수는 없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특히 두 번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행히도 강교수도 둘의 차이가 단순히 이름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 대목에서 ‘꼼수’ 드립을 치고 있다. 세상에! 그러니까 강교수에 따르면, 마샬은 뻔뻔스러운 ‘꼼수쟁이’가 된 것인데… 세상에…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만 하겠다. 첫째, 마샬은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그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갇혀있긴 해도 그 나름대로 노동이나 산업의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 시야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둘째, 마샬 부부가 그들의 1879년 저작에서 말하듯(p. 2), 그들이 ‘political’을 뺀 데는 그 용어의 의미가 과거와 크게 변화했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정치적인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경제학’ 또는 ‘사회경제학’이라고 해야 원래의 ‘political economy’와 의미상으로는 통하는 게 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교수는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들이 했던 연구, 즉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경제학’은 원래 ‘political economy’의 역어였던 것이다.

이헌창 교수가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서양의 ‘political economy’가 번역될 때 ‘경제학’이 선택되었고, 이에 대응해 이후의 ‘economics’에 대해서는 한때 ‘이재학’과 같은 역어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서양에서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에 압도되는 것에 발맞춰, 점차 ‘economics’도 ‘경제학’으로 일괄 번역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political economy’는 ‘정치경제학’이라는 다소 괴상한(?) 이름으로 번역되게 된 것이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제격인 상황이다.

 

4.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몇몇 학자들이 굳이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를 살려쓰고, 또 (비록 좀 껄끄럽기는 해도)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름으로, 오늘날 그야말로 막나가고 있는 ‘경제학’을 견제하고 나아가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경제학은 상당히 ‘political’해지고 있다. 원래 마샬 등이 ‘political economy’였던 것을 ‘economics’로 바꾸고자 했던 데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순수경제학’인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political economy’는 순수이론과 각종 응용분야들로 나뉘게 되는데, 말하자면 과거에 ‘political economy’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를테면 J. S. Mill 같은 이가 열정적으로 다뤘던 분배의 문제)은 ‘순수이론’이 아닌 ‘응용’분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학이 최소한으로 정의되자마자(‘제약 하에서의 선택에 관한 과학’이라는 식으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반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인간사에서 ‘제약 하에서의 선택’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이리하여 경제학은 그것이 마샬 등에 의해 제안된 ‘협소한 한계’를 넘어, 그리고 과거 ‘political economy’ 시절에 그것을 규정했던 한계도 훌~~쩍 넘어, 경제학이라는 틀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여타 사회과학들의 영역을 마구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한다(관련글).

요컨대 오늘날, 영어로 치면 ‘political economy’, 우리말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제로 우리가 꾀하는 것은, 위와 같은 막나가는 경제학(economics)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경제학 내부로 치면 ‘economics’가 ‘political economy’였던 시절에 가졌던 사회적(the social)이고 물질적(the material)인 관심(바로 이 블로그의 이름이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그러한 ‘political economy’라는 관점을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과 한편으론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론 ‘정치경제학’을 그것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삶의 단면들에 관한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성과들과 결합함으로써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5. 사태가 이러하기에, 사실 마르크스의 주저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를 ‘자본’이라고 할 거냐 ‘자본론’이라고 할 거냐, ‘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정치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등등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을 생각하면, 위 문제, 적어도 ‘정치경제학’이냐 ‘경제학’이냐라는 문제는 중요하기도 한데, 지금까지 대충 밝혀졌듯이, 강교수는 이것이 ‘왜!!’ 중요한지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사태를 ‘꼼수’라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괴테를 차용한 마르크스의 저 구절, ‘개념이 빠진 곳에는 말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꼼수에 대해서 내가 일전에 주장했듯이(‘나꼼수와 마르크스‘), 사태를 (가카의, 또는 경제학자들의) ‘꼼수’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만큼 단순하고도 그릇된 것도 없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 및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그의 주저를 썼다. 강교수는 바로 그 저작, 그것도 독일어 원저작의 한국 최초의 완역자다. 바로 그런 분께서 꼼수 운운하는 것이 딱하고, 그분이 번역한 것을 읽게될 선량한 독자들이 딱하다. 그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인식으로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경제학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희롱 발언이나 일삼는 나꼼수 4인방이 비열한 착취를 철폐하고 새세상을 열 거라고 생각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모르겠다. (끝)

 

돈벌이로서의 자본(론) 강의

강신준 교수께서 “자본” 강의를 하신단다. http://nodong.org/bbs/717017

“강의 대상”을 보니, 딱 나다. ㅎㅎ 장소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대충 맞기만 하면 나도 수강하고 싶다. 질의응답시간으로 할당된 게 30분이니, 강의를 좀 더 풍부하게 만드는 데 나름 기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그런데 문제는 강의료다. 10만원. 총9회로 구성되어 있으니 한번에 1만1천원. 어떻게 보더라도 적은 것은 아니다. 몇 명이나 올까? 그래도 번역자인데다가 여러모로 “명망가”이시니, 나보단 많이 오시겠지? 지난 여름방학 중에 했던 내 강좌에 서른 몇 명이 왔으니 말이다. 이런데도 강의료를 저렇게 많이 잡은 것은 좀 놀랍다. 게다가 약 15만원 하는 책을 “대본”으로 삼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강의료는 (몇몇 부교재까지 합치면) 30만원에 육박!

문득 생각해본다. 저분은 한번 강의해서 얼마를 챙기실까? 강의료+인세… 뭐 좀 웃긴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본(론) 강의”라고 해서 공짜로 제공되어야 한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 내게 그것은 “밥줄”이기도 하기에 더 그렇다. 그러나 저건 좀 아니다. 저 강좌를 여는 주체 입장에서 저 강좌가 무슨 대단한 “수익사업”이 아니라면, 강의료가 10만원이나 될 까닭이 전혀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유연구소 같은 데서 몇십만원씩 받고 강좌를 여는 것은 차라리 이해가 된다. 이런 강좌들은 그들 입장에선 일종의 “수익사업”이기 때문이고, 그들은 거기서 얻은 수익으로 일상적인 “운영”을 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지, 그들의 방식에 동의한다는 건 아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이것(http://blog.jinbo.net/nga_sf/64)도 (강교수의 강좌보다 “단가”가 더 높긴 해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강교수는 대학교수 아닌가? 동아대학교 정교수의 평균연봉이 1억쯤 되던데… 설마 돈이 없으셔서 저렇게 “무리수”를 두시는 건 아닐 거고… 배경이 참으로 궁금하다. 요새 사회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부”, 특히 “재능 기부”가 유행인데, 강교수께서는 이런 세태에는 좀 둔감하신 것 같다.

하여튼… 내겐, “전공이나 학력 등 어떤 예비적인 조건도 요구되지 않음”이라는 저 강좌의 “강의 대상”이 매우 기만적여 보인다. 적어도 “어떠한 조건도”라는 문구를 붙이려면, 강의료를 저렇게 받아선 안 된다.

For the students of Marx…

콧노래로 Judas Priest의 ‘Dreamer Deceiver’를 부르고 있으려니, 옆에서 선배가 뭐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글쎄… 특별히 좋은 일은 없다. 솔직히 ‘Dreamer Deceiver’가 즐거운 노래는 아니지 않나! 말이 나왔으니, 노래를 들으며 글을 읽으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좋은 일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최근에 올해 ‘worst ten’에 꼽힐 만한 나쁜 일이 하나 있긴 했다. 바로 강신준 교수의 글을 읽은 것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블로그에 강신준 교수의 {자본} 번역본 출판에 즈음해서 포스팅을 몇 개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작년 말에 그것들을 정리하고 다듬어 새로 글을 하나 써서 {마르크스주의 연구}라는 학술저널에 발표를 했다(링크). 당연히(?) 강교수는 위 저널 다음호에 내 글에 대한 ‘답변’을 냈다. 그것이 나온 게 3월이고, 그런 글의 존재에 대해 들은 것은 그 전이었다. 나는 그 글을 (얼마간은 ‘일부러’) 읽지 않다가 어제 기어이 읽고 말았다.

애초부터 나는 그의 답변이 있어도 ‘재답변’을 쓰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길 다 했고 또 내가 거기서 제기한 문제들은 별다르게 논쟁의 여지조차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첫째, 만약 강교수가 이런 문제제기를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내가 굳이 ‘재답변’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째, 그가 내 글에 대해 ‘반론’ 성격의 답변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분명 꼴사나운 자기변명이거나 나의 문제제기에 대한 부당한 폄훼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경우에도 나는 ‘재답변’을 하지 않는 것이 학계의 선배인 그를 조금 ‘덜 가련하게’ 만드는 길일 것이다. 따라서 어떤 반응이 나와도, 또는 반응이 나오지 않더라도, 나는 그냥 잠자코 있으려 했단 얘기다.

그런데 막상 그의 글을 읽어보니,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통상적인 ‘견해의 차이’라기보다는 내가 제기한 문제들을 둘러싼 배경에 대한 ‘무지’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내 문제에 대한 ‘오해’로 덕지덕지 얼룩진 그 글에 반응을 하자니 쓸데없이 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한편으론 들고, 다른 한편으론 종전과 마찬가지로 반응을 하지 않고 있자니 이미 그의 글을 읽은 이상 잠자코 있는 것조차 일종의 반응일 수밖에 없어, 결국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반응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진퇴양난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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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글이 정작 내 ‘성질’을 긁은 것은 그 ‘내용’ 때문이라기보다는 거기에서 빤히 보이는 그의 ‘태도’다. 간단히 말하면, ‘교내 학술비’ 지원을 받아서 썼다고 그 스스로 밝혔을 뿐 아니라 ‘고급’ 마르크스주의 전문 학술지를 자처하는 저널에 출판된 그의 매우 ‘학술적인’ 논문에서 그는 나를 자신과 동등한 논쟁의 상대로 대하고 있다기보다는 자신이 한 수 가르쳐줘야 할 손아랫사람 쯤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분나쁨’을 넘어서 ‘서글픔’을 나로 하여금 갖게 만든다. 생각을 거듭해 본 결과, 그 서글픔의 근원은 아마도 우리 학계의 척박함이 아닐까 한다. 얼마나 척박하면, 선배 학자가 후배 학자의 문제제기를 그런 식으로 깔아뭉갠단 말인가. (물론 이건 그가 그랬다는 것이고, 미안하게도 나는 전혀 깔아뭉개졌다고 느끼진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가 나를 동등한 상대로 인정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나를 한번도 후배 또는 후학으로 대한 적이 없는데도 나를 자기 편의대로 그렇게 취급했다는 게 서글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에고… 뭐, 이런 얘기를 이 자리에서 길게 할 까닭은 없다. 필요하다면 공식적으로 강신준 교수에게 대응을 하면 되는 것이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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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와 같은 이야기를 이 자리에 걸맞은 방식으로 못 풀어낼 것도 없다. 적어도, 위에서 ‘척박함’이라고 내가 불렀던 상황이 앞으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이를테면, 최근 슈리님의 논쟁적인 글로부터 비롯되었던 일련의 사태(?)와 관련지어 풀어낼 수도 있겠다. 많은 이들이 슈리님의 글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글에 불만을 표해냈고(이 글은 지금은 슈리님의 블로그에선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링크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불만의 내용은 그것을 갖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실로 다양했다. 어떤 이는 그가 ‘성매매’를 바라보는 방식에 경악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그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의 논의에 활용하는 방식이 싫었을 수도 있으며, 어떤 이는 그의 ‘윤리학’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 입장을 내놓았다(링크).

나로서는 애초 글을 쓸 때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었는데, 그러니까 거기엔 일종의 ‘의무감'(?)—물론 내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유일하거나 대표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슈리님도 내 글에 대한 덧글에서 언급한대로, 나같은 사람 중 누구라도 반응을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작용했지만 사실은 걱정이 가장 앞섰다. 까닭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슈리님을, 어쩌면 그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정도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경우에서와 같이 서로 안면도 없는 거의 익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심코 내뱉는 비난은,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불필요하게 커다란 ‘데미지’를 입힌다. (그렇다고 나는, 그런 비난들이 사려깊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비난에 슈리님이 충분히 건강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거다. 아래를 더 보라.)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는, 아무리 그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잘못에 대한 지적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무너질 때, 당사자가 의지할 것은 오로지 ‘자신의 진심’뿐이다. 여기서 ‘진심’이란 말 그대로 어떤 마음가짐일 수도 있고 상황적인 맥락일 수도 있다. “니 말은 알겠는데, 사실 나에겐 이런 ‘진심’이 있고, 니가 그런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한 너의 비판은 틀려먹은 거다”라는 거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치닫는 한, 이제 더 이상 원래 글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부질없는 것이 된다. 둘 다 틀렸고, 둘 다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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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처음에 내가 진보넷의 한 불로그로부터 슈리님의 글과 그에 대한 반응들을 접했을 때 가질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심경이란 바로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와서는 좀 더 분명해졌듯이, 나의 걱정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내 ‘능력’을 의심하면서도) 내가 가진 한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슈리님이 어느 정도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비판적 코멘트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가급적이면 논쟁을 논쟁답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더구나 나는—일종의 선배(아주 literal한 의미에서)로서—그들의 마르크스, 나아가 정치경제학적인 관심을 좀 더 북돋아주고 싶었고, 또 그런 관심이 비극적인 방식으로 사그러지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아주 단기적으로 보면 내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슈리님은 이곳까지 오셔서 의미있는 덧글을 달아주셨으니까(링크). 그리고 고맙게도 몇몇 블로거들이 나와는 저마다 다른 측면에서 좋은 코멘트들을 해줬던 것 같다(아, 물론 내가 상황을 이렇게 이끌었단 얘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기존의 날 선 비난들도 더욱 크게 증식되었고, 결국 사태는 슈리님이 ‘문제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서 내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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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위의 ‘사태’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 같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그런지 관련 논의들이 적어도 내 시야엔 거의 들어오진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일은 나에게 이렇게 그저 스쳐지나갈 ‘해프닝’이라기보단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할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특히 앞서 말했던 ‘척박함’과 관련해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준-)익명성에 기댄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이지메 같은 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유명 포탈사이트 등에서 연예인 등을 대상으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떠올리면, 이번 것은 ‘이지메’ 축에도 못 낀다. 그리고 이번 논쟁/논란의 와중에 나왔던 수많은 코멘트들이 그런 포탈사이트에 올라오는 수백, 수천 개의 덧글과 ‘동급’으로 취급될 정도로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진짜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애초 슈리님은 그렇게도 헛점 많은 글을 어찌 그리도 의기양양하게 공개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의기양양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도 슈리님은 저리도 약하게 무너져내렸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깊이 음미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슈리님을 포함하는 이른바 ‘잉여’들, 즉 자신들을 둘러싼 ‘세태’를 거스르며 ‘잉문학’ 또는 ‘사회과악’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탐하는 이들을 둘러싼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할 때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단 첫 번째 질문은 쉽다. 슈리님을 포함한 ‘그들’은 자신들을 가르쳐줄 ‘선배’ 또는 ‘선생’이 곁에 없다는 거다. 좀 주제넘게 말하면 이렇다. 만약 슈리님이 그 문제의 글을 공개하기 전에 나한테라도 보여줬더라면 나는 대번에 ‘이봐, 너, 그거 절대 공개하지 마. 우리 좀 더 이야기해보자!’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글이 적어도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공개되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슈리님을 모르고, 슈리님은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나같은’ 사람을 하나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그저 동년배보다는 좀 더 똑똑해 보이는—그 스스로도 그렇겠지만—자기 동료들이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뿐이었을 거다(이런 과정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한 답변이다.

두 번째 질문은 좀 더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친밀한 선배의 지도가 없다는 것이 그들을 약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슈리님 등에겐 자신들을 지도해줄 선배가 ‘곁에’ 없다 뿐이지, 적어도 그들은 이제껏 한국사회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이를테면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마르크스만 해도, 그들은 이전 다른 어떤 세대와도 다르게 {Das Kapital}의 꽤 괜찮은 한글 번역본을 두 종이나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들은 그 수많은 책들을 선생으로 삼아 자신을 벼려나갈 수도 있을 것이며, 만약 그런 ‘훈련’을 충분히 거쳤다면 이번 슈리님의 경우처럼 저리도 쉽게 무너져내리진 않았을 것이란 소리다.

그러니 적어도 그들은 이런 책들, 비록 말은 없지만 예의 그 ‘선배’들이 줄 수 있었을 모든 지식과 사려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말없는 스승’을 차분하게 연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아니, 그들 중 ‘뛰어난’ 몇몇은—좀 더 쉬운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약간의 책을 섭렵한 뒤 스스로 ‘선생’이 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선생’이 없다는 객관적인 한계를, 그들은 선생을 부정함으로써, 나아가 스스로 선생이 됨으로써 극복하고 있다는 거다. 이는 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최근들어 특히 ‘젊은 논객’이 급증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젊은 논객’이 많아지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쁠 건 없고 그들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같이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는 그런 현상이 ‘건전한’ 바람(breeze)이기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잉문학’이나 ‘사회과악’에서만 한정지어 본다면, (이건 좀 조심스런 얘긴데) 그들이 내놓는 논의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이 얘길 길게 하고 싶진 않은데,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난 심지어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밝혀둔다. 나는 그가 20대 초중반에 써갈겨놓은 노트들이—거기에서 드러나는 마르크스가 놀랍도록 명민한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크게 의미는 없다고 보는 편이다. 이건, 당시의 좀 더 성숙한 논자들—하다 못해 맨날 마르크스가 욕하는 Bruno Bauer 같은—이랑 마르크스를 비교해 보면 꽤 분명해진다. (내가 비록 여기서 마르크스 얘길 했지만, 5살도 안 되는 애가 성인이 하는 거랑 별 차이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19세기의 20대와 엄마 치맛자락에서 갖 나온 오늘날 한국의 20대를 비교하는 것은 좀 웃기기도 하다.)

이렇게 얘기를 풀어갈 수 있겠다. ‘젊은 논객’ 또는 그에 준하는 오늘날의 똑똑한 20대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고 그들이 인식하든 말든 그들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지적 성과들을 놓고 보면, 결국 남이 한 얘길 원래보다 훨씬 저열한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이거나 한 십년쯤 시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 후회하고 부정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어쩌면 ‘과분하게’ 허용된 발언권—책, 신문, 잡지, 블로그 등—을 이용해 행하는 발언들은, 결국에 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장난이거나 기껏해야 그들 자신이 성장해 나가는 과도적 계기들—그리하여 끝내는 부정/지양될—을 이룰 뿐임이 드러날 것이다. 물론 이건 ‘매우’ 일반적인 얘기다.

어쨌든 ‘선생’을 부정한다고 해서 실제로 (비록 ‘곁에’는 없지만) 존재하는 선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생을 부정하고 선생에게 검증받지 못한 ‘막글’을 내놓았을 때, 선생은 어디에 숨어있다가든 끝내 나타나고 만다. 이번 경우엔 다양한 덧글들과 블로그 포스트들과 같은, 말하자면 ‘집단 지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래서 내가 결론적으로 하고픈 얘기는—그러나 이건 슈리님을 특정해서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현재 자신들을 둘러싼 조건 때문에 좀 힘들더라도 적절한 선생/선배를 찾아 그로부터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내가 슈리님의 글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단순히 그가 생산적 노동/비생산적 노동을 제대로 이해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얘길 한 적이 거의 없다’, ‘이런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모두가 이 문제를 오해하고 있다’ 등등과 같은 표현을 너무도 쉽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낼 수 있는가! 그런 진술들이 만약 뭔가를 증명해 준다면, 그것은 오직 글쓴이의 무지와 옹졸함일 뿐이다.

*                 *                 *

이제 기말고사 기간이 끝나면 기나긴 방학이다. 혼자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적당한 선생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게 책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으며,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적어도 ‘학문’의 영역에서는) 누가 뭐래도 오늘날 한국과 같은 조건에서 20대는 배우는 기간이지, 남을 가르치거나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엔 이른 시기다. 수명도 연장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ㅎㅎ

마침 슈리님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흥미를 보이셨고 또 나 자신이 거기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간단히 덧붙이자면(그러니까 이건, 슈리님을 포함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얘기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정치경제학에 대해 얘길 하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 또는 {자본}만 읽고서는 부족하다. 나름의 한계가 있지만, 이를테면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정도는 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윤소영 교수의 책은 그다지 좋은 입문서는 아니라 생각한다. 하여간 이런 것도 모르고 {자본론} 제1권 제1장만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모두 이해하겠다고 설치는 것은 누가 봐도 민망한 꼴이다.

책도 좋지만,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다. 내 경우엔 얼마전부터 몇몇 친구들과 ‘젊은 연구자 모임’을 하고 있는데, 월례발표회도 열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내게 연락하면 일단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많은 한계가 있긴 하지만, 기성 ‘학회’는 또 어떤가? 이를테면, 요새는 마르크스 공부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한때) 난다긴다 하는(했던) 정치경제학 논객들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 ‘한국사회경제학회’다. 이번 여름학회가 진주에서 열리는데, 거기에 참석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물론 논의되는 주제들에 기본적인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엔 ‘연구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맨앞의 얘기로 돌아가면… 그러니까 나는, 앞에서 말한 현실의 ‘척박함’을, 그리고 나의 ‘서글픔’을 어떤 식으로든 재생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201012]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제목] Das Kapital의 성격과 그 번역에 대한 몇 가지 이슈 – 새로 완역 출판된 <자본> 서평을 겸하여
[출처]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7권 제4호 (2010년 겨울호)
[원문] 여기를 누르면 연결됩니다!

위와 같은 글을 얼마전 써서 저널에 냈다. 참고로 위 논문이 실린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최근호는 ‘신MEGA 출판의 역사와 의의’라는 주제의 특집으로 꾸며졌다. 내 글도 그 특집의 일환으로 마르크스문헌학(Marxology)에서는 국내 유일의 학자라 할 수 있는 정문길 선생과 MEGA 편집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는 일본의 오무라 이즈미 교수의 글과 함께 실려있고.

내 글의 <초록>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마르크스의 Das Kapital이 최근 우리말로 새롭게 완역 출판된 것을 계기로 Das Kapital의 성격 및 그것의 번역과 관련된 몇 가지 이슈들을 고찰한다. 또한 이는 이 새로운 『자본』(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10)의 서평을 겸한다. 옮긴이에따르면 이번 판본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그것이 ‘원전 번역’이라는 것인데, 실제번역과 관련된 주요한 사항들을 살펴본 뒤 이 글은 이번 판본에서 ‘원전 번역’의묘가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살아나지는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이번 길판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결코 작지 않은 역할을 하는 옮긴이 자신의 ‘해제’를 검토한 뒤, 그것이 독자들의 『자본』이해를 돕기보다는 어떤 점에서는 심각하게방해함을 보일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번역 대본의 선택은 적절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자본』에서 ‘원전’ 또는 ‘정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을 것이다. 이를 통해우리는,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 대한 연구의 최근 성과들로 미뤄봤을 때 Das Kapital을 이해하는 방식이 ― 그 ‘해석’의 다양성과는 별도로 ― 복합적으로 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이 블로그를 통해 공개했던 기존의 글들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그 중 첫 번째 글을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 제1권이 나온) 2008년 상반기에 썼으니, 말하자면 위 논문은 약 2년 반 동안의 잉태기를 거친 셈이다. 그러나 제2-3권의 번역본이 나온 것이 작년 9월 초였고, 당시 내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서, 정작 논문을 쓰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 아쉽게도 몇 가지 세부적인 부분에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런 불만사항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위 글을 쓰면서는 MEGA를 참조하질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 글에서 MEGA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개선되면 좋을 것이다.

끝으로, 내 글과 거의 동시에 위 『자본』의 서평이 다른 매체에 실리기도 했다. 《황해문화》 2010년 겨울호에 실린 이재현 선생의 <자본가의 머리로 던져진 솜방망이>가 그것이다(링크).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글은 이번 강신준 교수의 번역본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이 비판은 나의 비판과는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몇 가지 배울 수 있기도 했다. 관심 있으신 분들께 강력히 일독을 권한다.

강신준 교수의 <자본> 완역출판에 부쳐

0. 여기 두 개의 미디어 기사가 있다.

[1] 왜 오늘 다시 ‘자본’을 들춰야 할까요 (<한겨레>, 2010년 9월 3일)
[2] ‘대박’ 꿈에 취해 벼랑 끝에 선 개미들아, ‘무기’를 들자! (<프레시안>, 2010년 9월 3일)
(이하에서 이 둘은 각각 [1]과 [2]로 부른다.)

두 기사가 넷상에 뜬 것이 9월3일이니, 벌써 2주나 지났다. 기사들이 올라왔을 때는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읽지도 못하고 있다가 며칠 전에서야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정작 나는 기사를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 과거 글들(1 이것, 2 저것)이 강교수의 『자본』 완역과 이에 뒤따른 그의 인터뷰 기사들과 엮여 링크가 되어 많이 읽혔다는 사실이다. 나야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런 글들을 과거에 쓴 이상, 이번 완역 및 인터뷰에 대해서도 간단한 소회를 밝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포스트를 쓴다.

혹,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공식적인 블로그에 뒷담화 식으로 까대지 말고 좀 더 공식적으로 대응해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무 뭐라 마시길. 안 그래도, 조만간에 그럴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좀 더 엄밀하게 작성될 이후 글을 위한 서곡이자 예행연습이기도 하다. :)

1. 강교수의 (심오한) 깨달음

일단 강신준 교수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하지만 이 얘긴, 여기서 그만 둔다. 어차피 나의 이런 ‘뜻’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테니까.

이번 기사와 인터뷰. 한마디로 이건, 무지와 오해, 억측과 아집의 종합선물세트다. 그나마 건질 거라고는, 장장 23년에 걸친 강교수의 “『자본』 번역의 오디세이”라고 할만한 “뒷이야기”뿐이다. 그마저도, 강금실도 한물 간 이제는, 그다지 재밌지도 않다.

위 기사와 인터뷰를 찾기 위해 google로 검색을 해보니 많은 이들이 강교수의 집념과 의지, 진심어린 노력에 감동한 모양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감동”은 극에 달했을 줄로 본다:

초심을 버리지 않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마르크스를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광맥에 닿는다. 내가 그렇다. 20년 동안 동아대학교에서 마르크스를 강의하면서 <자본>을 읽었다. 또 해설서를 펴내느라 꼼꼼히 본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한 15년이 지난 2004~5년에야 <자본>에 대한 깨달음이 오더라. ‘아, 이 책의 구조가 이렇구나.’ 그 때야 어렴풋이 감이 왔다. ([2]에서)

깨달음… 번역만 따져도 23년이고 그 “첫 만남”부터 치면 30년이 넘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깨달음”과 “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오하고 또 뿌리 깊겠는가… 라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와 기사만 보더라도, 그의 “깨달음”과 “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가 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심오함” 등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의 대부분의 내용이 [2]에 더 자세히 나오므로 이제부턴 거의 [2]의 인터뷰만을 참조해서 글을 진행하겠다.)

2. “지금” 『자본』 번역본이 나온 것의 의의

강교수는 1987년에 『자본』 번역에 처음 연루되어 무려 23년만에 그것을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터. 개인적 소회도 소회지만, 그는 이 번역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무엇보다 관심거리다.

그의 인터뷰와 기사의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그가 이번 번역에 부여하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아마도 “원전번역”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자본』과 같은 중요한 저작의 원전 번역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계, 나아가 지식계의 척박함을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강교수, 연세가 몇이신가? 56세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자본』의 완역에 무려 23년을 쏟으셨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그는 이번에 자신의 『자본』 완역을 자랑하고 그에 의기양양해 하실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셔야 한다. 즉 지금까지 대한민국 학계를 척박하게 한 장본인 중 하나가 실은 당신이심을 왜 보지 못하시는가? 이번 번역, 어떤 면에선 23년 걸린 노작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책의 번역을 맡으신 분께서 무려 23년이나 그 책임을 방기하고 계셨다면 이는 상찬보다는 질타의 대상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의 의미를 새삼 되새길 수 있다. 왜 “지금”인가? 인터뷰 내용으로 보건대 아마도 강교수는 “지금이야 말로 『자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는, 우리가 다른 때도 아니고, 즉 지난 23년의 세월 중 다른 그 어느 때도 아니고 바로 “지금”, 2010년에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과연 그 사이에 우리는 『자본』이 특별히 필요로 했던 시기를 겪지 않았던가? 간단히 말해 이런 거다. 왜 강교수는 지난 1997년의 대란이 벌어졌을 때 『자본』을 완역해 내놓지 않았는가? 그때는 “제대로 된 『자본』 번역본”이 (아직은) 필요없었단 말씀이신가? 바로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번 번역이 “23년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23년에 걸친 게으름과 책임방기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여기서 “게으름”이란 강교수가 지난 23년을 게으르게 사셨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자고 다짐하면서 일단 책을 내놓았다”라는 강교수의 언급은, 저자나 역자가 흔히 하는 겸손의 발언이라기보단 그의 무책임함의 발로–그의 의도와 상관없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987년에 첫 번역본을 내놓았을 때나 할 법한 얘길 이렇게 지금까지 되뇌고 있으면 곤란하다.

3. “원전 번역”이라는 “신화”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갖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의의는 그것이 한글로 나온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가장 정확한 번역”도, “가장 충실한 번역”도, “가장 학술적인 번역”도 아니다. 이런 상식과는 정반대로, 강교수는 이 모든 것이 일치한다고 보는 듯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영어 중역”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충실성”과 “학술성”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를테면 그는, “충실성”과 관련,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어 원본과 영어판은 그 자체로 많이 다르다. 게다가 김수행 교수의 <자본>은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독자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전의 화폐 단위를 전부 다 한국식으로 옮겨 놓았다. 독일 사람이 썼는데 ‘근’이 나오고, ‘필’이 나오고. ([2]에서)

이건 정말 쪼잔한 비판이다. 기본적으로 번역에 원문을 어느정도로 살릴 것인지는 늘 논란거리다. 원문을 살리는 것이 좋은 번역일 수도 있고,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하는 게 좋은 번역일 수도 있다. 번역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원문 그대로” 했느냐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그리고 김수행 교수가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꾼 것은, 사실은 노동자들을 포함해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런 판단에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반대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의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난 지금도, 김교수가 일반 독자들을 위해 화폐나 도량단위를 바꿨으며, 또 번역 과정에서 그를 가장 많이 애먹인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변환과정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그 가슴 뭉클함을 간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강교수는 “원전 번역”이라는 것을 “학술성”과 거의 동격으로 보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는 일부, 그것도 기본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크지 않은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이에 대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하여튼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별도의 기준들이 필요할 따름이다.

연구자로서 말하건대, 강교수의 이번 번역의 의의는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는 것이고, 또 그게 전부다. 정확성, 충실성, 학술성 등으로 보자면, 적어도 2년 전에 출판된 제1권만 놓고 본다면 김수행 교수의 기존 번역본(즉 영어 중역본)이 낫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는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둘 다 사실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얘긴 더 길게 할 순 없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아직 이번에 나온 제2권과 제3권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1권에 대한 내 개략적인 평가는 앞서 링크해둔 나의 기존 글들을 참조하면 된다.

4. MEW? MEGA?

강교수의 이번 번역이 “최초의 원전 완역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이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MEW와 MEGA를 구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자. 그는 2년전 출판된 『자본』 제1권의 옮긴이 글에서 전자를 대중용, 후자를 학술용이라고 구분한 바 있고, 이번 인터뷰를 보니 여전히 그런 구분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서 포스트들에 이어 거듭 말하지만, 이런 구분은 틀렸다. 굳이 “대중용”과 “학술용”을 구별하려 한다면, MEW와 MEGA 모두 “학술용”의 범주에 든다고 봐야 한다. 이때 영어로 치면 Penguin판과 같은 각종 문고판들, 그리고 이것과 같은 발췌판들 등이 “대중용”에 대응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중용”과 “학술용” 따위의 구분은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강교수는 자신의 번역을 “대중용”으로 여길 수도 있고 “학술용”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든 상관없이, “번역 그 자체”는 매우 학술적인 행위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번역자라도–특히나 강교수가 그렇게도 그 중요성과 학술적 의의를 강조하는 『자본』과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번역을 할 때에는 원전의 “대중용” 버전과 “학술용” 버전 모두를 참조함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무려 “2010년”에, 즉 MEGA 중에서도 『자본』과 관련된 부(제2부)가 거의 완성된 현재  새삼 번역본을 내면서, 스스로 대중용이라고 칭하는 MEW판만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MEGA판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까지도 서슴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뻔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에게 MEW와 MEGA가 모두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수한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한다. 즉 『자본』의 “원전”이라는 것의 의미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자본』의 진정한 원전은 무엇일까? 제1권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현재 “정본”으로 두루 간주되고 있는 독일어 제4판(1890년)일까? 아니면 마르크스가 직접 출판을 한 제1판(1867년) 또는 제2판(1873년)일까? “원전”이라는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면, 혹시, 번역본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각별하게 손을 봤던 프랑스어판(1872-75년)이나 영어판(1887년)도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제2권과 제3권까지도 고려에 넣는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과연 엥겔스의 손을 거쳐 현재 출판되고 있는 제2권과 제3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마르크스의 수고를 가다듬고 나아가 그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기도 할 때, 그는 마르크스의 취지와 의도를 어느 정도는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르크스 자신이 직접 쓴 수고뿐은 아닐까?

바로 이런 모든 문제들, 질문들은 “원전”이라는 것이 지극히 불안정한 개념임을 암시한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MEGA라는 판본이–이미 MEW라는 전집이 있는데도–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고, 또 사람들은 그것을 아직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정이 이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는, 『자본』의 “새로운” 번역을 낸다고 했을 때, 어떤 태도로 거기에 임하는 것이 옳을까? 인터뷰 등에서 보이는 강신준 교수의 입장은 그런 면에서 얼마나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음미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즉 과연 “그의” 번역은 그가 묘사하는 식대로 “시대”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한 개인이 23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어깨 위에 지고 있었던 짐을 내려놓은 정도의 의미라고 보는 게 좀 더 아귀가 맞는 해석이 아닐까? 사실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한국의 인문사회학계가 가진 한계요, 문제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강교수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을까?

강교수의 번역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원전 번역”이 여전히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신화”로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5.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

강교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를 강조하기도 했다. 보통 “진심”을 강조하는 것은, 그 “진심”이 왜곡된 채 알려져 있을 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진짜 이유”가 어떻게 왜곡된 채 알려져 있다고 보기에, 유독 그것을 강조하는 것일까? 다음 대목을 보자: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 노동자라면 누구나 자본주의 체제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왜 그는 번역을 해보면 3000쪽이나 되는 어렵고 방대한 책을 썼을까? 단지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에서. 나의 강조)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스토리다: (1) 흔히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을 썼다고 알고 있다. (2)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에 등장할 사회, 즉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꾀했던 진정한 기획이었다. (3)  이런 『자본』의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밖에 안 된다. (4)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낮은 것도 그래서다. 대충 위와 같은 생각에 입각해서, 강교수는 크게 “생산”과 “소비”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마르크스가 꿈꿨던 사회”의 개요를 묘사하기도 한다.

글쎄… 위 항목들 중 (2)~(4)에 대해서는 너무 대책없는 얘기들이라서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1)에서 시작해보자. 기본적으로 『자본』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 부제(“정치경제학 비판”)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부르주아적 및 사회주의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실 『자본』의 의의가 “자본주의 현실 비판”에 있느냐 “자본주의 이론 비판”에 있느냐는 하나의 논쟁거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성숙된 논자라면 둘이 어느 선에서는 일치하는 것임을 알아볼 것이다(이를테면 국내에선 곽노완 교수의 글 참조. 다만 나는 그의 논지에 100% 동의하진 않는다).

그것이 “이론 비판”이든 “현실 비판”이든 간에… 강교수에겐 그것이 “단지”라는 수식어를 동반할 정도로 하찮은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마르크스에겐 그렇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의 “비판” 개념이 정확하게 (“현실”이 아닌) “이론”을 겨냥하게 된 것은, 그의 지적 발달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다음의 일이며, 『자본』에서는 거의 일관되게 “이론 비판”으로 의식적으로 쓰이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바로 그 자본주의의 이론 또는 현실을 제대로 “비판”하는 것이 보기보다 쉽지 않고 많은 지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본』이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을 요구했던 까닭이다.

어쨌거나 “자본주의의 이론 비판”을 위한 책에다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들을 적극적으로 그려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그런 모습들이 『자본』에 없다고 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2)번 이후의 이야기들은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마르크스의 “일생일대의 기획”이었다고는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교수에겐 불행하게도, 『자본』은 그런 기획을 직접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저작은 아니다. 따라서 (3), 즉 강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은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한 다섯 명 정도”뿐이라고 해도,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끝으로 (4): 나도 강교수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진보의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보진 않지만, 그 까닭이 적어도 진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펼쳐놓은, 강교수가 이해한 “마르크스의 새로운 사회의 상”에 대해선 별도의 언급을 생략하련다.

6.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오해

이상과 같이 강신준 교수는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의도”에 대해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오해를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해”라기보단 “얕은 이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정도는 정말이지 내가 다 아찔하고 민망할 정도다. 예컨대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그런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 참여해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르크스가 <자본> 3권에서 개별 자본가가 자본가 사이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써놓았다.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가 대자본을 이용해서 버는 돈과 이른바 ‘개미’가 버는 돈은 비교할 수가 없다. ([2]에서. 나의 강조)

위 대목은 강교수의 『자본』 이해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특히 밑줄친 부분을 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제3권에서 위와 같은 진술을 한 적이 없다. 일단 위 밑줄 부분은 말이 안 된다. 강교수가 예로 드는 대로, “개미”와 “소로스”가 경쟁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이며, 더구나 전자가 후자를 그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마르크스는 『자본』 제3권에서는 물론이고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경쟁”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모종의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무슨 대단한 것인 양 풀어놓는지 알 수가 없다. 정녕 오늘날 금융투기판에서 “개미”들의 운명을, 그것도 강교수가 하듯이 매우 비참하게 캐리커처하기 위해 우리가 “굳이” 마르크스에 기대야 하는 걸까?

이번에 제3권을 번역해서인지, 강교수는 특히 거기 등장하는 논의들에 크게 매혹된 듯 싶다. 이를테면:

<자본> 3권을 읽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현대 금융의 특징을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게 ‘레버리지(leverage, 지렛대) 효과’다. 개인이나 기업이 차입금 등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해 이익을 올리려다 결국은 금융 위기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이 레버리지 효과가 <자본> 3권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레버리지 효과가 결국에는 공황을 낳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얼마나 놀라운가? 140년 전의 마르크스가 오늘날 금융 위기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2]에서)

참으로 딱하다. 저렇게 따지면, 18세기 금융투기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인 John Law는 금융사기의 현대적인 첨단기법으로 무장한, 거의 뭐 “Back to the Future”라고 해도 되겠다. 혹시 어떤 독자들은, 대중적인 인터뷰니까 강교수가 좀 오바한 거 아니겠냐며 각별한 아량을 그에게 베풀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과연 그럴까? 다음을 보자.

<자본>은 앞부분이 어렵다. [. . . . . .] 이렇게 1권도 앞이 아니라 뒤부터 읽다 보면 <자본>에 익숙해질 수 있다.

2권은 경제학 공부를 하지 않은 독자라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아까 언급했듯이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고민할 때 자극이 될 만한 부분이 많은 3권은 읽어볼 만하다. 특히 공황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 부분이 중요한데,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권을 읽다 보면 재테크에 눈을 뜰 수도 있다. 나 같으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을 읽을 게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 비밀을 파헤친 <자본>을 읽겠다. ([2]에서)

“재테크” 부분은 농담이라고 치더라도, (제2권이 어려운 반면) 제3권을 두고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제3권에서 “레버리지” 운운이나 하며 그 이상의 얘길 하지 않으니, 그것이 쉽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교수가 직접 밝히고 있는, 제3권이 쉽다고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도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요즘 화폐 금융 쪽에 상식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제3권)은, 바로 그와 같은 주류 경제학이 주입한 “상식”을 뒤엎고 거기 도전하는, 바로 “노동가치이론”에 근거를 둔 전혀 다른 금융이론을 펼치고 있는 저작이다.

그밖에도 강교수는, (1) 맨큐(N. Gregory Mankiw)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생산”을 경시하고 “교환(시장)”을 강조하기 때문에 공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마르크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공황은 생산 영역에서 시작된다”라는 사실과 다른 단정적 언급을 내놓기도 했고, (2) “소비”와 “분배”를 혼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을 읽을 때 같이 보면 좋을 만한 책이 또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엉뚱하게도 “폴 말러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이라고 대답함으로써, “나 지난 23년 동안 『자본』과 관련된 공부 하나도 안 했어요”라는 말을 남다르게 표현하기도 했다.

7. 맺음말

대중미디어를 상대로 한 인터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상에서 지적한 모든 사항들을 조금은 관대하게 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들은 『자본』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대한 강교수의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들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의 징후인지는, 앞으로 좀 더 면밀하게 강교수의 번역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다(이미 제1권에서는 그것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바로 그랬을 때, 이 글의 1절에서 인용한 강교수의 “깨달음” 내지는 “감”이 어떤 것인지도 이 엉성한 포스트에서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나타날 것이고, 더불어 이런 사항들에 대한 판단들이 서로 인정하고 토론해야 할 “견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옳고 그름이 꽤 명백히 갈리는 원문에 대한 “이해”의 문제임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본』을 둘러싼 논의도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자본론 vs 자본

다음은 2008년 12월, 국내에 시판중인 《Das Kapital》의 두 가지 버전, 즉 김수행 번역의 《자본론》과 강신준 번역의 《자본》의 일부분을 재미 삼아 대조해본 뒤에 쓴 글이다. 최근 방명록에서 ‘너구리’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약간 수정/가필해 다시 올린다.




1. 일단 먼저 말해둘 것은, 적어도 《자본(론)》에는 ‘독일어의 심오함’ 따위는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독일어의 심오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본(론)》을 제대로 안 읽어본 사람이거나 또는 힘들여 독일어로 읽은 데 따른 일종의 보상심리를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본(론)》에 특정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이른바 ‘심오함’이 없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단순하게도 마르크스 자신이 그런 성격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은 반대할지도 모르지만, 《자본(론)》은 뭣보다 경제학적 저작이고 그런 의도로 저자에 의해 씌었다. 그래서 예컨대 ‘대상성’(Gegenständlichkeit)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용어조차도 《자본(론)》에서는 이를테면 《경철수고》에서 만큼 커다란 울림을 자아내지 않는다. 또는 그런 울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본(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울림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울림’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자본(론)》을 그릇된 방식으로 이해하기 쉽다.


2. ‘독일어의 심오함’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여는 까닭은, 실제로 그 동안 김수행판이 그런 심오함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번역이라는 식의 주장이 매우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판단에 반대하며, 거기엔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김수행판이 갖는 기본적인 한계는, 매우 당연하게도 그것이 중복번역이라는 데 있다. 원래의 의미들이 그런 과정에서 단순화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엔 현저하게 바뀌기도 했으며, 또 구절 자체가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런 모든 문제들은 대체로 중복번역이라는 데서 오거나, 그저 번역이라는 것 일반이 갖는 문제점 때문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번역자 또는 편집자(출판사)의 서투름 때문이지, 결코 ‘독일어의 심오함’을 살려내지 못한 ‘영어의 경박함’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독일어의 심오함’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모든 각국어로 나온 책들도 독일어로 번역된 것으로 보고, 모든 외국책들의 한글번역도 그 원전의 심오한 독일어 번역판에 기반해서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순화나 변형은 대체로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김수행판이 그다지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면 영어판을 참조한 것, 나아가 독일보다는 영국에 더 익숙한 사람(김수행)이 번역한 것이 여러모로 장점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김수행은 자신이 번역한 《자본론》 제1권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자본론》의 이론적 토대는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현실적 예증은 주로 영국사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며, 번역자 자신이 영국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연구했다는 사실도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글쎄. “영역판이 번역에 훨씬 유리하다”고까지 하는 데는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앞부분은 타당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럼에도, 《자본(론)》은 독일어로 씌었다. 따라서 그 언어를 기반으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유/불리’를 따질 문제가 아닌 것이다.


3. 이렇게 본다면,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되, 영국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파 정치경제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인가? ‘이상’을 따지자면 나는 그런 개인 또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이 얼마나 거기 따라줄지는 의문이다. 이렇게 보면, 아예 몇몇 전문가들의 자문 아래 능력 있는 전문번역가가 나서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이 얘긴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 《자본》과 《자본론》을 함께 보면서, 두 교수들의 학자로서의 자질보다는 번역가로서의 자질에 새삼 의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두 번역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많은 경우 그들의 번역가로서의 자질 부족에서 비롯됨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문제는 번역가 개인의 문제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편집을 책임지는 출판사의 책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김수행 번역판의 경우엔 언어구사가 자연스럽지 못한 대목이 많다. 내가 보기엔 이는 거의 전적으로 출판사의 문제다. 왜 자연스럽게 다듬지 않는가? 내가 알기론 비봉출판사는 거의 사장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로, 《자본론》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의미의 편집 이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결코 ‘번역자를 존중’하는 게 아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조차 오류가 많다면, 그게 과연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반면 강신준판의 경우엔 자연스런 언어구사가 읽는이를 편하게 해준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건 아무래도 출판사에서 나름의 방침을 가지고 정성껏 손을 봤기 때문이리라. (조교 시켜서는 이렇게 나오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신준-도서출판 길’이 환상적인 팀이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실은 그 반대다. 나는 기본적으로 번역서의 질을 볼 때, 그 옮긴이가 인명, 지명, 책제목 등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를 본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리라 짐작한다.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제대로 번역했다는 것은 적어도 번역이 상당한 성실성을 가지고 진행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본(론)》의 경우 이런 것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예컨대 인명의 경우, 인용되는 저자들이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으로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같은 Michael도 경우에 따라 ‘마이클’이라 하거나 ‘미하엘’로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강교수의 번역은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이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책의 번역서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책들을 보면, 영어권 사람의 이름조차도 독일어식/프랑스어식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지 때문인지,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명표기와 관련, 강신준판 《자본》은 강신준 교수의 독일어 구사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도 불러 일으킨다.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이런 거다. 영어에서는 사람이름이 소유격으로 쓰일 때 Michael’s와 같은 식으로 ‘어포스트로피 s’가 붙지만, 독일어에서는 다짜고짜 ‘s’만 붙고는 한다. 그런데 강교수는 설마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그런 이름들을 s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꿀벌의 우화》로 유명한 맨더빌을 ‘Mandevilles’로 표기하는 식이다. (설마 이것이 강교수의 문제일까! 출판사 잘못이 크리라 본다. 하지만 욕은 옮긴이가 주로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밖에도 강교수의 번역엔 저서 등을 표기하는 방식, 옮긴이 주를 다는 맥락 등등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문제들을 품고 있다. 예컨대 〈제2판 후기〉 부분인 56-7쪽을 보자. 56쪽의 각주(4번)에 《Saturday Review》라는 저널이 인용된다. 강교수는 이를 《새터데이 리뷰》라고 해놓고, 아주 친절하게도 “’토요평론’이라는 뜻”이라는 옮긴이 주를 달아놓음으로써 지나친 친절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친절함이 무색하게도 이후 이런 식의 옮긴이 주는 내가 본 범위에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Journal du économistes》라는 저널을 《이코노미스트》라고 옮기고 있다. 여기엔 예의 그 ‘친절한’ 옮긴이 주도 안 달렸을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랑 혼동하기 딱 좋게 번역된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바로 이 《이코노미스트》를 매우 많이 인용한다. 따라서 내가 보기엔 《경제학자 저널》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지금 보고 있는 56-7쪽엔 완전한 오역도 있다. 56쪽에 지베르(Sieber)의 저작이 인용되는데, 그 제목이 잘못 옮겨진 것이다. 《리카도의 가치 및 화폐 이론》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화폐’는 ‘자본’이 되어야 옳다.


4. 이상의 언급들이 지나치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나는 지금 번역의 ‘기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예를 보여주면 충분할 것 같다.

(1) 역시 위와 같은 〈제2판 후기〉의 한 대목이다. 54쪽 윗단락 마지막 부분:

…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심없는 연구 대신 돈벌이를 위한 논쟁이 자리를 잡았고, 편견없는 연구 대신 비양심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변론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장주 코브던(Cobden)과 브라이트(Bright)가 선봉에 섰던 곡물법 반대동맹이 날림으로 만들어 시중에 배포한 조잡한 소책자까지만 해도 토지소유귀족들에 대한 그들의 반론 속에는 비록 전혀 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필 이후의 자유무역입법은 이런 마지막 양념조차도 속류경제학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의 “양념”이라는 단어를 보라. 문맥을 고려했을 때, 과연 그것이 적절한 어휘인가? 위 대목은 그나마 과거엔 경제학이 나름 괜찮았고 비판적인 측면이 조금은 있었는데 계급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점점 더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내용을 품고 있으며, “양념”이란 바로 그 종전까지만 해도 얼마간 남아있었던 바로 그 비판적 요소를 일컫는다. 그러나 “양념”이 뭔가? 그것은 오히려 전체 음식의 맛을 돋워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따라서 여기서 “마지막 양념”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양념”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Stachel인데, 여기엔 “양념” 말고도 “일침(=sting)”이란 뜻도 있다. 이 대목에서는 후자로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실은 바로 이 “일침”에 해당하는 것들, 즉 경제학의 역사 속에서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들을 재구성해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학설사》를 내놓으려고 했다.)

(2) 마음을 조금 관대하게 먹는다면, “일침”을 “양념”으로 쓴대도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까? 엥겔스가 쓴 〈제3판에 부쳐〉의 한 구절을 보자. 69쪽 마지막 부분:

… [마르크스가 인용하는 방식의 특징과 그렇게 하는 까닭을 설명한 뒤] 그래서 독자들은 이제 제2판의 후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마르크스가 거의 전적으로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인용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시 별 생각 없이 읽으면 위 구절도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저 대목에서 깜짝 놀랐는데, ‘과연 강신준 교수는 《자본(론)》을 읽어나 보았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독일의 경제학자들만”, 그것도 “거의 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고?!!! 더 길게 말할 필요 없다. 위 대목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왜 마르크스가 예외적으로만 독일의 경제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는지…” 어쩌다 이런 오역이 나왔을까? 그저 한숨이 나올 따름이다.

이상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오류들이 강교수 번역의 신뢰도를 매우 심각하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맨 처음 트랙백해 둔 글에서 밝혔듯이 〈해제〉와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그의 자신만만한 표현들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두 개의 예는, 강교수의 독일어실력이나 번역가로서의 자질, 또는 출판사의 편집솜씨 등이 아니라, 강교수의 텍스트 이해 자체를, 나아가 그의 경제학자로서의 자질 자체를 의심케 하는 데 충분하리라 본다.

(나중에 발견한 것인데, 강교수의 내용이해가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예가 바로 제1장 제2절에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거기서 헤겔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강교수가 붙여놓은 옮긴이 주를 찾아보시기 바란다.)


5. 내가 지나치게 강교수판에 회의적인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김수행판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김수행판에 대해 말하자면, 강교수판의 등장으로 중복번역이라는 그 기본적인 한계가 이제는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울 정도로 되었지 않느냐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그러나 그런 한계가 곧 강신준판으로 사람들이 몰릴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 위에서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얘기했듯, 강신준판이 ‘원어번역’이라는 이점을 그다지 잘 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두 번역자가 드러낸 학문적 자질 부분에서도, 강교수 쪽이 몇 수 아래인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김교수의 번역엔 적어도 위 (2)와 같은 오역, 핵심적인 내용 이해를 해치는 심각한 오역은 거의 없다. 물론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번역자 자신은 물론 여러 후학들에 의한 교정 덕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결국 장기적으로는, 둘의 공동작업, 또는 제3자에 의한 둘의 ‘비판적 지양’을 통해 사태가 해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체되는 데 따르는 피해는 독자들과 후학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현재 사태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강신준판의 등장으로 김수행판의 한계는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지겠지만 앞으로 한동안 사람들은 그 한계에 맞춰 자신의 인내심을 더 키워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셈이다.


6. 그렇다면 최종적인 질문. 과연 어떤 것을 볼 것인가? 당연한 얘기지만, 독자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내가 보기엔, 기존에 김수행 번역판을 통해 《자본(론)》을 봤던 사람은 굳이 강신준판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익숙함’이라는 미덕을 대체할 만한 확실한 그 무엇을 제공해주기에 강교수판은 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제 막 마르크스의 이 걸작에 입문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강신준 교수의 번역이 ‘표현’ 등의 면에서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자본(론)》에 좀 깊이 있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은? 에, 결국 둘 다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엔, 강교수 번역판을 ‘기본’으로 삼는 것도 (기존 김수행 판의 ‘익숙함’의 미덕을 버리더라도)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영어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의 대부분의 독자들이 독일어보다는 영어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심지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조차도)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큰 장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김수행판은 원래 영어판을 대본으로 삼았으므로, 읽다가 원문을 대조하려면 부득이 독일어 원전을 봐야만 했다. 독일어 못해서 한글로 보는 건데, 내용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독일어를 참조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그러나 강신준판을 보게 되면, 굳이 독일어 원전을 보지 않고 영어판만 봐도 cross-checking이 가능하게 된단 말씀이다. 물론 이것은 강교수의 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치명적인 오역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한테 해당되는 얘기다.

<자본>(강신준 번역)의 재출간을 보며

얼마전 <교수신문>을 보니, 강신준 교수의 번역으로 <자본> 제2권과 제3권이 올해 안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씁쓸하다. 다음 글은 2008년 6월, 위의 그 <자본> 제1권이 나왔을 때 쓴 글이다. 시중에 있는 <자본>과 <자본론> 중 어느 것을 보아야할지 망설이는 이들을 위해 그 글을 다시 걸어둔다. 원글을 조금 고치고 없던 말도 조금 덧붙였다.

오래전부터 떠돌던 이야기, “이론과 실천” 출판사에서 나온 <자본>이 새로 나온다는 얘기가 비로소 실현됐다. 출판사는 “도서출판 길”이고, 이번 번역판에서는 번역자의 이름이 강신준 교수로 바뀌었다. 1987년에 나온 “이론과 실천”판 <자본>도 강교수가 번역했지만 당시 사정상 이름을 숨겨야 했는데,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책값이 엄청 비싸졌다. <자본> 제1권은 두 분책으로 나왔는데, 각각 값이 3만5천원, 3만원이다.)

주로 통용되는 번역, 즉 김수행 교수가 옮긴 “비봉출판사”판 <자본론>이 있는데 왜 또 나오는 거냐고 물을 사람도 있겠다. 이에 대해선 아무래도 번역자의 말을 들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한편 한글 번역본은 현재 국내에 2개가 존재한다. 최초의 번역본에 해당하는 이론과실천의 <자본>과, <자본>에 채워진 족쇄가 풀린 뒤에 출판된 김수행의 <자본론>(‘비봉출판사’판)이 그것이다. 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간 경제대국에서 인류지성사의 거의 최상급 고전 반열에 들어 있는 <자본>의 번역본이 겨우 2개뿐이라는 점도 초라하지만, 전자가 불완전한 익명의 것인데다 그나마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하나만 남아 있는 후자도 영어본을 대본으로 한 중역본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서글픈 문화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게 된다. 이제 늦게나마 MEW판을 대본으로 하는 제대로 된 번역본의 출판에는 개인적으로 오래된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는 홀가분함이 들어 있지만,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옮긴이의 말”, 33쪽)

솔직히 이 대목을 보고서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번역자인 강교수 스스로도, 이번 번역본의 의의를 고작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것에서 찾는단 얘기라서 말이다. 뭐 어쨌든 “적어도” 나쁜 얘기는 아니다.

2. 그렇다. 나는 강교수가 밝힌 위 “재번역의 변”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는 여기서 지나치게 “오버”를 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얘길 해보자.

먼저 그의 “변”이 부족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강교수의 표현을 빌려 단적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낙후성”은 단순히 독일어 원본이 아닌 영어판을 대본으로 한 중역重譯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개선”됐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정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물론 원본 번역본으로 중역본을 대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절실한 과제다. 여기엔 조금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 점에서 강신준 교수의 이번 재번역은 그 자체로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한국사회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연구)는, 적어도 강신준 교수가 처음 <자본>의 번역에 손을 댔을 20여년 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그 중에서도 <자본>을 위시한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이번 “도서출판 길”판의 <자본>에 붙여둔 번역자의 “해제”와 “옮긴이의 말”을 두고 봤을 때, 강신준 교수는 그와 같은 새로운–아니 사실은 그다지 새롭다고 볼 일도 아니다. 그와 같은 연구성과들은 이미 적어도 1970년대부터 체계적으로 쌓여온 것이다–연구성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

가장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현재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 있어 최첨단을 달리는 집단이 바로 마르크스-엥겔스저작집(MEGA)의 편집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거나 MEGA를 통한 성과를 직접 누릴 수 있는 독일어권 학자들이다. 이들의 연구와 논의를 통해 특히 최근들어 제기되고 있는 흥미로운 논점들이 있다. 예컨대 원저자인 마르크스와 동료이자 독자, 서평자이자 유고의 편집자인 엥겔스 사이의 관계 문제가 있고, 또 오랜 기간의 연구를 통해 밝혀지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의 발전의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들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은 데는 여러가지 피치못할 사정도 있지만, 그런 사정들이, 영원히 그런 문제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면죄부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MEGA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에 출판된 <자본>의 다양한 판본들뿐만 아니라 엥겔스의 편집대상이 되었던 또는 편집대상에조차 끼지 못했던 마르크스 자신의 원고들을 출판하는 것 또한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 또는 “훈고학적 집착”이라고 한정짓거나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1. MEGA에 대해선 다음 두 글 참조: 김만수, 〈MEGA란 무엇인가〉, 《진보평론》 7호. 정문길, 《니벨룽의 보물》 (2008).

2. MEGA 연구를 통한 성과의 한 예로는 다음 글 참조: Michael Heinrich, 〈MEGA2 II/15 서평〉, 《Historical Materialism》 15.4 (2007). 같은 저자의 〈현대 자본주의 분석의 장애물로서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양가성〉 (2004).

이런 사정을 고려해 보면, “옮긴이의 말”(32-3쪽)에 나와 있는 강교수의 MEGA에 대한 인식은 아주 실망스럽다. 그는 여기서 MEGA의 의의를 축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그릇된 정보까지 제공하고 있다. 물론 내가 MEW판이 아닌 MEGA판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지만, 오늘 한국의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다만 나는, MEGA의 출간으로 “독일어 원문”이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아주 복잡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정본”으로 여겨졌던 MEW판의 “권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현상황에 대한 강교수의 인식이 지극히 안일하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다. 하기에, 결국 MEW판으로 번역을 하더라도, 이런 사정과 문제들에 대해 정확히 인식을 하고서 번역을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사이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런 문제는 올해 “길”에서 강교수 번역으로 제2권과 제3권이 나오면 더 심각하고 날카롭게 불거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교수는 한참 “오버”도 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옮긴이의 말”에서 그가 쓴 것과는 달리,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삼았다고 해서 그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택함으로써 그저 하나의 관문을 통과했을 따름이며, 그의 번역이 진정으로 “제대로 된” 것인지 여부는 오로지 실제 번역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을 뿐이고, 또 그 판단 또한 결코 그의 몫은 아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독일어 원본”을 대본으로 삼았다는 게 장점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큰 장점이 되지는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이 둘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3. 이번 강신준 번역 <자본>에서 뭣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책의 첫머리에 붙인 “해제”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사족”일 뿐만 아니라 “오버”다. 혹시 “도서출판 길”에서 개정판을 낸다면 이 부분은 그냥 들어내 버리는 게 나을 정도다. 왜 그런가?

이 “해제”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비유로 시작한다. 강교수는 여기서 <자본>을 거대한 놀이동산에 비유하면서, 처음 가보는 복잡한 놀이동산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안내도”가 필요하듯이 난해하기로 이름난 저작인 <자본>을 별다른 낭패없이 보기 위해서는 놀이동산의 안내도와 같은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자신의 “해제”가 그런 길잡이 노릇을 해줄 것이란 얘긴데… 이건 전혀 엉뚱한 유비다. 그래, 강교수 말대로 <자본>을 놀이동산에 비유해 보자. 놀이동산의 “길잡이” 즉 “지도”에 해당하는 것은 강교수의 “해제”가 아니라 <자본>에 달린 “목차”다. 오히려 그의 “해제”는, 이런 비유 속에서는, 이를테면 그 놀이동산을 먼저 가본 사람이 쓴 “관람기”에 해당한다고 하는 게 차라리 옳다.

관람기–그것도 아주 어수룩한 관람기가 바로 강교수의 그것이다. 이 “해제”는, “해제”라는 그 성격에 맞지 않게 독자에게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841년 마르크스는 철학 연구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점>을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1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르크스는 예나Jena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강교수는 위 구절의 바로 앞 대목에서 마르크스가 본Bonn대학에서 베를린Berlin대학으로 옮겼다는 말만 함으로써,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마르크스가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이해할 만한 충분한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실은 마르크스가 베를린에서 학위를 받지 못하고 예나로 가게 된 당시의 사정이야말로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 두 사람은 … ‘서로의 머릿속을 바꾸어 앉아도 될 만큼’ 각자의 분신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쪽)
—이미 위에서도 말한 대로, 적어도 <자본>과 관련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아주 달랐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잘 몰랐으며, 마르크스가 자신의 원고를 엥겔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만 놓고 보더라도(물론 공개하지 않은 까닭은 마르크스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반영할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엥겔스를 무시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가정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이라는 레닌주의적/스탈린주의적 교조가 설 땅은, 적어도 이론의 영역에서는, 이젠 없다.

… 그 무렵 영국은 … 경제학의 본거지였다.” (12쪽)
—마르크스가 <자본>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영국은 “경제학의 본거지”라기보다는 당시 가장 발달한 산업국이었다. 그가 주목한 것도 실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경제학”은 영국뿐만 아니라 16-17세기 유럽 전역에서 각 지역의 색깔을 반영하면서 발생하고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가 바로 이와 같은 “산업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발달한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자신의 직접적인 이론적 개입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위 언급엔 오해의 소지가 작지 않다. 실제 <자본>을 읽다 보면, 또는 <요강>이나 다른 경제학 연구노트들을 읽다보면, 마르크스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학자들도 적지 않게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 및 준사실 관계의 왜곡만큼이나 의심스러운 것은 강교수의 연구자로서의 자질이다. 적어도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학자가, “경제학”을 “돈을 버는 것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문“(17쪽)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 아닌가! 사실 이런 규정은 물신화와 피상성의 극치를 달리는 오늘날의 주류경제학자들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돈을 번다”라는 표현 대신에 그들은 “개별 경제주체의 행위의 효율성 극대화를 꾀한다”라는 식의 표현을 선호할 것인데, 하지만 이게 단순히 표현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이런 표현을, 강교수의 진심어린 생각이라기보다는 (현재의 글이 “입문자들을 위한 관람기”인만큼) 대상을 알기쉽게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세 대목에서 드러나는 쉽게 오해를 살만한 단순화와 뭉뚱그림도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더라도 이것은 글쓴이의 주의 부족(또는 인식 부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강교수의 자질에 대한 의심은, “추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극에 달한다. 그는 추상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무지개를 이해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한다. 실제의 무지개는 서로 다른 무수한 색깔을 갖지만 우리는 흔히 무지개가 7가지 색깔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강교수에 따르면, “무한한 다양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일정한 범위로 국한시켜 단순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상의 존재가 7가지 색깔인 것이다. 이렇게 단순화하는 과정을 추상화라고 하는데, 마르크스는 현실의 경제를 먼저 그런 방법으로 압축하였다. (19쪽)

결국 이 말에 따르면, <추상(화)=상상>이 된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강교수는 무지개는 무한개의 색깔을 갖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7가지 색깔”은 “상상의 존재”라고 말한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무지개는 무한개의 색깔을 가지며, 우리는 그 색깔들을 ‘7가지 색깔’로 단순화시켜 이해한다.” 무지개가 무한개의 색깔을 갖는다고 해서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깔이 상상의 산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지개 속에서 정확히 “빨강”을 찾아낼 수는 없겠지만 분명 “빨강”은 거기에 있다. 우리가 수직선에서 정확히 “1”을 찍을 수는 없지만, 거기에 “1”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은 바로 이렇기 때문에 “무지개”는 “추상”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별 시사점을 주지 못한다. 적어도 강교수가 말하는 방식으로는 말이다. 즉 무지개에 “빨강”이라는 색깔은 분명히 있지만, 예를 들어,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구체적인 “노동들” 중에는 우리가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위와 같은 예를 통해, 그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강교수가 추상에 대해 마르크스가 비판하고 있는 리카도와 유사한 이해방식을 구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건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겠지만, 이 맥락에선 깊이 이야기할 게 못 된다. 그냥 넘어간다.)

위와 같은 설명은 한편으로 보면,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강교수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이 잘못된 비유와 설명은 어려운 것을 더 어렵게 만들기만 할 뿐이다. 아니, 더 나쁘게는, 위와 같은 “쉬운 비유”를 통해 어려운 개념을 이해했다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도 있다. 뭔가를 설명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 특히 조심해야 할 대목이다.

이 짧은 “해제”에서도 문제가 되는 대목은 부지기수이지만, 이제 하나만 더 지적하고 그만 두겠다. 강신준 교수는 “<자본>의 현재성”을 다루는 대목에서, <자본>은 미완성의 저작이기 때문에 “열린” 저작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완결되지 못한 저작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아직도 ‘진행 중’인 저작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이후에 진행되는 모든 변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28쪽)

말은 좋다. 하지만 정말 하나마나한 소리일 뿐만 아니라 얼토당토 않은 정당화다. 어떤 저작이 “완성되지 못했다”라는 건, 기본적으로, 결코 미덕이 아니다. <자본>의 경우 그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자본>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자본>이 열린 저작이라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대로 <자본>이 열린 저작인 것은, 그것이 미완성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완성을 계속해서 늦추면서까지 (이미 그 일반적인 초고는 완성해 놓고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현실적인 발달은 좀 더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그리고 좀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반영하려고, 그리고 기존 버전의 내용을 수정/보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미하엘 크래트케(Michael Kraetke)와 같은 논자들에 의해 단순히 선언적으로가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의 원고를 통해 실증적으로 증명된 바다(예컨대, <요강> 집필 150주년을 기념해 나온 《Karl Marx’s Grundrisse: Foundations of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50 years later》 (edited by Marcello Musto, London: Routledge, 2008)에 실린 그의 논문을 보라).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미뤄보더라도, 강교수의 “해제”는 놀이동산의 “안내도”라기보다는 (좋게 말하더라도) 지극히 주관적인 “관람기”에 지나지 않으며, 이 관람기는 해당 놀이동산을 제대로 즐기는 데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많은, 그런 종류의 것이다. 아… 이런 희한한(?) “해제”와 “옮긴이의 말”을 가진 <자본>의 새판을 읽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번역 자체에 대해서도 글을 써볼까 한다.)

(2008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