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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님께] Believe와 Trust

Believe와 Trust (게슴츠레/plebs, 2010년 7월 5일)

(덧글을 달려다가, 길어져서 트랙백을 건다. 따라서 전통에 따라 ‘다정체’로 작성됨.)

제 얘기를 아주 훌륭하게 받아쳐 주셨네요. 기분 좋습니다. ^^

게슴츠레 님의 핵심질문은 결국 “이 Trust는 . . . 어디에 기초할 수 있을까”가 될 것 같군요. 제 생각에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결국 근대사회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성찰을 전제합니다. 기왕에 “trust”와 “believe”를 꺼내들었으니, 이렇게 얘기해 볼 수 있겠습니다. “believe”가 중세적/전근대적인 것이라면 “trust”는 근대적인 것이라고 말이죠. 얼추 말이 되지요? ㅎㅎ

게슴츠레님은 trust의 “근거”에 대해 성찰하면서, “무한소급에 빠져드는 것 같다”라고까지 하셨지만, 실은 현대사회에서 게슴츠레님을 포함하는 우리 모두가 그런 “trust”에 기반해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그런 “trust”가 없이, 어떻게 우리가, 이를테면 저 높은 63빌딩에 생명에의 위협을 느끼지도 않고 오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실은, trust란 우리가 선택하고 자시고 할 문제도 아니고, 현대의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이루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냐면, trust의 문제는, 우리의 ‘주관’의 영역이 아닐 거라는 겁니다. 다만 제가 앞서 trust를 (마치 ‘주관’ 또는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며) 강조한 것은, 63빌딩에 오르는 문제와 축구경기를 보는 문제 사이에 존재하는 무게감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축구경기야 뭐 안 보면 그만이고, 따라서 신문선도 trust하고 자시고 간에 신경 안 쓰면 그만이잖아요.

어쨌든, 이런 조건 아래서,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가 trust하는 (또는 trust ‘해야만 하는’) 다양한 대상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일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죠. 가장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건, 경제학을 공부하는 제가 어떻게 역사가들로부터 유의미한 시사점들을 얻어낼 것이냐 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이게 근데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경제학자들이 역사가들로부터 아무것도 참조하거나 배우려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입니다. 그 반대도 대략 그렇고요.. ㅎㅎ)

그렇다면 저는, 게슴츠레님의 “내가 모든 걸 다 알아야 한다는 강박”은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이며, 결국 게슴츠레님은 기껏해야 앙상한 “부분 지식인”에 만족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하는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부분 지식인”으로 출발해 “모든 것”에 도달하는 길도 있음을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아, 예전에 진보넷 시절에 이에 대해서 써둔 것이 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네요. 하여간, 요점만 말하면, 에, 다시 위에서 말한 경제학자와 역사가의 예로 돌아가보면, 처음부터 경제학도 잘하고 역사도 잘하려고 하지 말고, 경제학 열심히, 정말 제대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역사학과도, 철학과도, 정치학과도, 심지어 생물학이나 화학, 지질학과도 마주칠 수밖에 없단 얘깁니다.

바로 이렇게, 역사학 등등과 만나는 그 대목에서, 우리는, 예의 그 trust의 의미를 새삼 음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게슴츠레님 또는 고진 또는 《진보평론》에 대한 잡담: 결국은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진보평론》의 이번 겨울호에 실렸다는 글을 하나 봤다. 그런데 저자가 좀 낯이 익다. 과거 내 불로그에 종종 덧글을 남겨주셨던 게슴츠레님이었던 것. 그의 (새로운) 블로그를 통해 글을 읽게 되었다.


이지원, 〈가라타니 고진의 『자본』 읽기: 가치형태론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42호, 2009년 겨울.

이 글을 통해 알게된 첫 번째 것은 물론(!) 게슴츠레님의 실명과 소속이었는데, 짐작은 어느정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학 학부생이었다. 뭣보다 글을 읽기도 전부터 나는, 학부생이 《진보평론》의 “일반논문” 코너에 실릴 정도의 글을 썼다는 점에 놀랐고, 또 (난 그 시절에 뭐했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 뜨끔하기도 했다. ㅎㅎ

실제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 뜨끔함도 커졌다. 글도 꽤 잘 씌었고, 뭣보다 (으레 “일반논문” 같은 코너에 실리는 글들에 걸맞게) “길었다”! 이건 결코 폄하나 빈정거림이 아니다. 순전한 칭찬이자 부러움의 표현이다. 지금이야 뭐, 글 길게쓰기 선수라고 해도 되겠지만(하지만 이런 면에서 진정한 고수들은 따로있다), 학부시절 제대로 된 (그러니까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 리포트 하나 못 써본 나로서는 부러울 밖에.

그러나 글을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글쎄… 뭐랄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역시 잘 쓴 학부 리포트” 정도라는 것. 어차피 게슴츠레님은 학부생이니까, 이런 표현이 그에게 결코 누가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문제삼고픈 것은, 《진보평론》의 태도다. 이제 《진보평론》은 학부생 리포트도 실어주는가? 글쎄… 그러면 또 어떠랴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바로 이 학부생 리포트를 “일반논문”이라는 코너에 놓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나는, 만약 이 글이 이를테면 “학부생 논문”과 같은 코너에 실렸다면,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진보평론》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또한 만약 이 글이 비록 학부생이 쓰긴 했지만 그 이상의 출중함을 보여주었다면 “일반논문”에 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둘 다 아니다. 어떤 이는, 학부생 아니라 교수의 논문 중에도 “학부생 리포트 수준도 안 되는” 것이 많다면서 “진짜 학부생 리포트”가 “일반논문” 코너에 실리는 게 무슨 문제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학술잡지도 “학부생 리포트”를 “일반논문” 코너에 싣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학부생이 일반저널에 글을 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외국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겠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분명 저널의 편집진이 “학부생”의 글을 받았을 땐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싣지 않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여기서 굳이 “음모”까지 제기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그의 글을 조목조목 비판할 생각도 여유도 없고, 또 그럴 조건도 갖춰져 있지 않으므로 위와 같은 판단(“그래도 역시 잘 쓴 학부 리포트”)을 하는 까닭만 조금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즉 예를 들어 위 글에는 “리카도와 베일리 – 가치에 관한 두 입장 혹은 화폐에 대한 한 입장”이라는 소절이 있는데, 그래도 버젓한 학술잡지에 실릴 “일반논문” 축에 끼려면 이런 대목에서는 적어도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한 글쓴이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서 “고진의 독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글쓴이는 고진이 이 둘을 이해하고 전유하는 방식만을 제시할 뿐이고, 이런 글쓰기는 대체로 “학부 리포트” 수준에서 행해지는 방식이다. (여기서도 다시, 나는 글쓴이를 비판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버젓한 학술잡지”가 그것을 실은 배경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바로 그 대목은) 그냥 책읽고서 내용정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가지기 어렵다. 이를테면… 글쓴이는 리카도와 베일리를 위와 같이 “정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진이 그들을 이해한 방식을 받아들이고 또 그 위에서 이후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셈인데, 만약 고진의 그런 이해가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내가 여기서 “틀렸다”라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이해의 영역에서 말하는 거다. 어쨌든 “일반논문”의 저자라면, “고진이 이해한”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그냥”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사실은 나는 고진이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초월(론)적”이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성격짓는 것이 못마땅하다. 게슴츠레님이 정리하셨듯 고진은 베일리를 가치에 대한 “관계론적 파악”의 원류로 이해하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베일리를 “양의 문제에 함몰된 학자”라는 식으로 보기도 했다. 즉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일리는 리카도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베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그를 리카도와 대비시켜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맥락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고진에게선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고진의 문제제기는 뜸금없고 탈맥락적이다–그래서 “초월(론)적”이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연구하시는 게슴츠레님을, 그가 학부생이든 뭐든 상관없이, 응원하는 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또는 그와 비슷하게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현대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좀 더 “순수한” 방식으로 거기 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여기서 “순수하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을 있는 그대로 봐주라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하지 말고 말이다. 즉 그것이 고진이 됐든, 레닌이 됐든, 아니면 Backhaus나 Heinrich가 됐든 말이다. 물론 거대한 고전에 다가가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하기도 하고 어느정도는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말하자면 “해석”과 “해설”을 구분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고진은 “해석자”이지 결코 “해설자”는 못 된다. 물론 내가 보기엔 그다지 훌륭한 “해석자”도 아니다. (언젠가 고진에 대한 글을 쓸 날이 올까…)

다시, 《자본》을 “순수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뭘까? 간단히 말해 그것은 《자본》이 다름아닌 “경제학”(political economy) 저작임을 순순히 인정하는 일이다. 오늘날의 “경제학”(그것이 주류이든 비주류이든)을 떠올리면서 이런 말에 진저리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경제학”의 부정이 아니라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반성이다.
※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사회” 관점의 지성사적 의의IIPPE(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