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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경쟁의 과학적 분석” 對 완전경쟁의 유토피아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이 개별 자본들의 외적 운동에 표현되어 경쟁이 강제하는 법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하여 개별 자본가를 추진시키는 동기로서 그의 의식에 도달하는 방식을 여기에서 고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이 점만은 분명하다. 즉, 경쟁의 과학적 분석은 자본의 내적 본성이 파악된 뒤에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 자본론 1권 12장, 428

마르크스는 경쟁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인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현상형태로 파악한다. 경쟁이 노동일에서 필요노동의 비중을 최소화하려는 자본의 본질적 성격이 현실화하는 형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과학적 분석은 언제나 본질에서 출발하여 그 현상형태를 재구성해내는 것에 있다.

경쟁으로부터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나 이윤율의 저하와 같은 총계수준의 경향을 도출해내는 이론들은 사회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의 총합으로 간주하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방법과는 명백히 다르다. 마르크스는 아마도 이러한 이론들을 경쟁물신주의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각각의 개별적인 경우에 실제로 소요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가 자기의 상품을 12원이라는 사회적 가치에 판매한다면, 그는 그 상품을 개별 가치보다 3원 더 비싸게 판매하는 것으로 되며, 따라서 3원의 특별잉여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 429

이 문단은 대단히 간단하고 직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초등학생도 금새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경쟁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경제학자는 거의 없다. 기업경영에 경제학이 전혀 유용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경쟁은 경쟁우위와 연관되어 있다. 평균적인 수준보다 낮은 비용으로 상품을 만들어내면, 경쟁업체에 비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추가적인 이윤(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특별잉여가치)으로 생산규모를 더 늘릴 수 있고, 신기술을 개발할 수 있으며, 아니면 가격을 낮추어 경쟁자들을 시장에서 몰아낼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혁신은 경쟁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다.

뒤처진 기업들은 선두주자를 따라잡거나 망하는 수밖에 없다.

개선된 생산방식을 채용하는 자본가는 [heesang: 혁신기업가는] 동일한 생산부문의 다른 자본가에 비해 1노동일 중 더 큰 부분을 잉여노동으로 취득한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새로운 생산방식이 일반화되고 그리하여 상품의 개별 가치와 사회적 가치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자마자, 이 특별잉여가치는 소멸한다.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의 법칙은 새로운 생산방법을 채용하는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의 상품을 그 사회적 가치 이하로 판매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리고 또 바로 이 법칙이 경쟁의 강제법칙으로 작용해 그의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산방법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heesang: 모방을 통해 따라잡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경쟁을 혁신과 따라잡기의 멈추지 않는 싸이클로 보았다. 그에게 경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의 무한반복이다. 이 과정에서 독과점이 나타날 수도 있고, 기존의 독과점이 해체될 수도 있으며, 경쟁이 격화될 수도 완화될 수도 있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은 패자가 되기도 하며, 오늘의 패자가 기적적으로 회생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의 사전에 고정이나 정체라는 단어는 없다. 이러한 무한반복 사이클과 맞물려 상품의 가치와 노동력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며, 상대적 잉여가치가 생산된다.

누구나 수긍할만한 얘기다. 모든 훌륭한 기업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상황이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경쟁업체에 비교하여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외부환경의 변화에 비추어 기회요인과 위기요인을 식별해낸다 (SWOT 분석). 위대한 (great) 아이스하키 선수가 “퍽이 있는 곳이 아니라 퍽이 움직일 곳으로 가는” 것처럼 위대한 자본가는 미래의 강점과 미래의 약점에 주목한다.

뭐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이 당연한 현실인식이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모토가 변화와 혁신이라면, 경제학의 모토는 불변과 정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경쟁이 혁신과 따라잡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의 무한반복이라면, 경제학에서는 독점은 영원한 독점, 과점은 영원한 과점, 완전경쟁은 영원한 완전경쟁이다. 경제학의 시간은 정지해있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이 그렇게 신봉하는 완전경쟁은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이어서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경쟁형태다 (아래를 보라).

  1. 시장에는 (무한한) 다수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존재하므로, 개별 생산자와 소비자의 결정이 가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가격은 주어진다.
  2. 이 주어진 가격에서 생산자는 생산능력이 허락하는 만큼의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무한대의 소비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3. 새로운 생산자의 시장진입과 기존 생산자의 퇴거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4. 모든 경제주체는 동일한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엉뚱하다. 이 중에 하나라도 만족되는 시장이 있으면 리터럴리 열 손가락에 장 지진다. 이런 이론적 가정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현기증이 나기까지 한다. 이 네 가지 조건이 결국 의미하는 바는 모든 소비자들은 동일해서 한 명의 소비자로 대표될 수 있고, 모든 생산자들 역시 동일해서 한 명의 생산자로 대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를 분석함에 있어 모든 대학의 모든 학과의 커트라인이 동일하고, 모든 고3 학생들 성적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가정을 토대로 이론을 계발하고 그 결과를 놓고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라. 이보다 기가 막히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경제정책의 영역에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2011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우리나라의 11개 경제관련 국책연구기관이 한미 FTA의 경제효과를 분석해서 연구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미 FTA로 인해 “단기적으로 관세감출에 따른 교역 증대와 자원배분 효율화에 따라 실질 GDP가 0.02% 증가”하며 “장기적으로는 자본축적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5.66%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분석에는 연산가능일반균형(computable general equilibrium: CGE)모형인 미국 퍼듀대학의 GTAP모형을 사용했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CGE 모형은 생산, 소비, 투자, 정부지출 등 경제주체의 상호의존적 개별 부문과 수출입 등 대외부문을 통합한 모형으로 강한 가정과 자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FTA의 경제적 효과추정을 위해 범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모형”이다 (강조 추가). 나는 CGE 모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아래 신범철 교수의 비판을 보자.

표준 GTAP모형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GTAP 모형의 하나로, 흔히 FTA의 거시경제효과를 추계하는데 벤치마크로 활용되고 있다. 이 표준 모형은 기본적으로 상품과 생산요소 시장에서 완전경쟁, 리스크 없는 완전 자본시장, 생산의 규모수익 불변, 생산지 구분에 의한 상품의 구별 등을 가정하고 신고전학파의 일반균형이론을 구현하고 있다.

상품시장은 완전 경쟁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상품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여 균형에 도달하고 상품의 가격은 생산자의 한계비용과 일치하게 되어 모형 내에서 가격-비용 마진(price-cost margin)은 1이 된다. 모든 경제주체자는 가격순응자이고 장기적으로 이윤은 0이 된다. 개별 국가의 소비주체는 단 하나의 대표적인 가계(a single representative)로 나타내고, 가계의 총지출은 국가의 총소득(=가계소비+정부지출+국가저축)의 일정한 비율로 결정된다. 각국의 대표적인 가계는 주어진 지출 내에서 효용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상품을 선택·소비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대표적인 가계의 가정은 경제주체자간의 상호관계를 배제하는 것이고 개별 국가내의 개별 소비자의 소득분포는 원천적으로 고려될 수 없다. – 신범철, “CGE에 의한 한.미 FTA의 거시경제효과 분석: 비판적 검토와 협정문에 따른 추계”, 강조 추가

그러니까 이렇다. 이 세상에 어떤 낙원과 같은 국가가 있어 완전경쟁이 그 국가의 모든 경제부문을 지배한다. 이 낙원의 원리는 절대적 평등이다. 이곳의 모든 시민들은 동일한 정보와 동일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취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명의 시민이 시민 전체를 대표한다. 모든 시민들은 완전히 고용되며, 실업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 삭제되지 오래다. 기업들이 만든 상품은 모두 판매되고, 모든 기업주는 동일한 이윤(실은 이자)을 획득한다. 사업에는 전혀 리크스가 없어 사업 시작과 동시에 이윤의 규모가 확정되며, 파산과 청산절차는 사문화된 법률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 지상낙원이 미국과 FTA를 맺으면, GDP는 (자본축적과 생산성효과를 고려할 때) 5.66% 만큼 증가한다. 참으로 꿈같은 얘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모형의 기저이론이 명백히 비현실적이더라도 추정치와 현실의 수치는 많이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의 통계치를 토대로 모형을 정밀하게 마사지 해왔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를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신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발달해온 국가경제통계, 통계치 사이의 연관관계에 대한 분석, 산업연관표 같은 것들 때문이다.

나는 완전경쟁이라는 어이 없는 이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주류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며 깊이 안도하곤 한다. 나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론에는, 금속을 금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다고 믿는 연금술 같은 경제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불법 다운로드”의 정치경제학? (2/끝)

4. 여기서 잠시.. “문화발전”이라는 이슈에 대해 한마디. 불법 다운로드를 권장하는 위 링크한 글은 물론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논지의 글들이 공통으로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게 바로 “문화발전”이다. 즉 “문화발전”을 위해 불법 다운로드를 하(지말)자는 것.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화발전”은 별로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 복잡한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거 하나만 내놓자면, 불법 다운로드를 하든 말든 어차피 문화는 발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MB가 대통령이 되고 유인촌이 문화부장관이 되었다고 문화가 발전하지 않는 게 아니다. 우파적인 문화? 돈이 몰리니 당연히 발전하겠지. 그렇다면 좌파적인 문화가 발전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반체제적이고 좌파적인 문화예술인들에게 정부의 지원이 줄었다고 그런 경향의 문화가 발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특정한”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피를 보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저 특정한 “문화예술인들”일 뿐이다. “문화예술”이 아니고 말이다.

5. 다시 앞서의 질문, 즉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과 자본 내부의 동학의 관계”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에 보통 어떤 답변이 던져질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은 저간의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피해를 본 음반사들과 영화사들의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런 답변이 얼마나 타당할까?

(1) 기본적으로 다운로드 불법화가 그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본다고 여겨지는 음반사나 영화사(만)의 이익을 반영한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앞서 2와 3에서 지적한 대로, 그런 일부 자본분파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법제를 정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일부 자본의 손해는 곧 다른 자본의 이익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이 가능성에 대해선 2의 말미에서 지적했다).

다시, “국가가 자본을 대변한다는 것은 자본이 노동/대중에 대립되는 한에서”라는 앞서의 명제를 떠올려보면,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도 그런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점점 디지털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노동자나 소비자로 드러나는 일반 대중들을 억압하고 규율함으로써 자본 일반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좀 더 큰 차원에서의 지적재산권 강화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이런 억압과 규율화는 가장 보편적으로 말하면 “사유재산제도”라는 근대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를 통해 정당화되곤 한다. 즉 “다운로드는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여 보이는 대응은, 저들이 규정하는 “불법 다운로드”라는 것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이런 대응은, 지적재산권 강화 움직임에 저항하는 이들에게서도 흔히 관찰되는 태도다). 그리고 바로 그럼으로써, 현재 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들이 기반하고 있는 사유재산제도와도 제대로 부합하지 못할 정도로 엉터리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웃을 수 있게 된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앞서 링크한 기사에서 취해지고 있는 논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대응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글쓴이의 의도와 무관하게(!)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고 나아가 옹호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대응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문제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잘 밝혔듯이, 사유재산제도란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할 지고지선의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적 지배관계–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논리로 봉사해왔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현재의 “불법 다운로드”의 경우에서도, 사적소유제도란 그저 “다른 어떤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채용되고 있을 뿐임을 간파할 수 있다.

(2) 그렇다면 그 “다른 어떤 상황”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본의 이윤추구와 관계가 깊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그것을, 음반/영화 자본의 이윤추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이다. 요새 다운로드 불법화에 앞장서고 있는 음반사들을 한번 떠올려보자. 국제적으로 보면 소니(Sony) 같은 회사가 있겠고, 국내에선 SM 엔터테인먼트 같은 회사가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회사들은 음반회사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라는 것이고, 특히 소니의 경우엔 각종 전자기기의 세계적 제조회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거두는 전체 이윤/매출 중에서 음반 등과 같이, 우리가 다운로드 함으로써 유출될 수도 있을 만한 부분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거나 적어도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둘만하다.

이렇게 음반판매로 거두는 이익/매출의 비중이 작아지는 것이, 저들의 주장대로 불법 다운로드 때문인지, 아니면 “불법 다운로드를 그 일부로 하는 어떤 거대한 변화” 때문인지에 대해선 좀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대체로 후자와 관계가 깊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음반 다운로드를 통해 한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음반 구입에 지출하는 돈의 액수가 줄어들었을 수는 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봐야 정확히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거의 명백하게 현실과 부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 개인이 일반적으로 말해 “엔터테인먼트”–애인이랑 커피숍 가서 라떼 마시는 따위의 행위들은 빼더라도–에 지출하는 돈의 액수까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엔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서 집에서 흥얼거리며 듣는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큰 부분을 차지했즐지 몰라도 이젠 더 이상 아니다. 음악 하나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위해”서만 소비하지 않는다. 핸드폰 컬러링으로 깔기도 하고,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한다. 물론 음악을 듣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주된” 취미활동도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음악보단 차라리 게임이 더 인기가 좋다. 다른 한편,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자전거 등을 포함한 각종 레저활동,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을 통해 퍼진 사진찍기 등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음악을 안 듣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 같이 심각하게 듣는 것은 아니며, 결정적으로 이들에겐, 게임기나 자전거 또는 거액의 디카를 사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따라서 이들에겐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이 제격인 것이며, 어떤 의미에선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은 핸드폰에 딸린 부가기능이나 게임, 자전거나 디카 등을 제대로, 맘껏 즐기기 위한 “보완재”이자 “양념”이다.

이렇게 보면, 음반사나 영화사가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개피를 보고 있다는 주장은, 기껏해야 거대 언터테인먼트 자본의 엄살 섞인 우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을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음악이나 영화 정도만 빼면, 이를테면 핸드폰 벨소리용 음악이나 미니홈피 배경용 음악, 아니면 게임용 시디 등등은 점점 더 불법 다운로드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그냥 듣는 용도의 음악도 그렇다. 요새 누가 음악을 앨범 단위로 듣나? 기껏해야 한곡 두곡이고, 실은 앨범 자체가 싱글/미니앨범 위주로 나오고 있다. 이런 환경이라면, 더구나 모바일 환경이 점점 더 제대로 갖춰지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나 같으면 귀찮게 불법다운 받느니 500원 내고 내가 듣고싶은 곡 하나 합법적으로 다운 받겠다. 바로 이렇게, 불법 다운로드에는 이미 자본 스스로 잘 적응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자기들한테 유리한 방향으로–법 같은 거 필요 없이–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무슨 말이냐면, 싱글앨범 위주로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런 한 예다).

6. 그렇다면 자본은 지들 나름대로 잘 하고 있는데 왜 굳이 국가를 통한 “법제화” 즉 “다운로드 불법화”를 추진하는 것일까? 가장 쉽게 답하자면, 걔들은 원래 그러기 때문이다.

그렇다. 걔들은 원래 그런다. 원래 그렇게 욕심이 많다, 걔들은.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답변할 꺼리들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의 “불법화” 움직임은, 일반적으로는 산업 전체, 특수하게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 격화를 반영한다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왜 굳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이 격화되는 것일까? 그야 사람들이 살만해지니까. 즉 그런 의미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 격화, 나아가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은, 현대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양식에 이는 거대한 변화를 반영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7. 이제 글을 끝내야겠다. 지금 며칠째 일을 죽어라 했더니 머릿속이 잘 정리가 안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긴 대충 다 한 것 같다.

끝내는 마당에 하나 더 덧붙일 이야기. 앞서 5-(2)에서 논했듯이… 이미 자본은 “불법 다운로드”와 상관없이, 또는 그에 대응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고, 또 그렇게 세운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척척 나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운로드 불법화”는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본을 위해 앞길을 닦아주기 위한 국가의 노력이기보다는, 이미 자본이 개고생하면서 닦아놓은 길을 국가가 사후 정비하고 확실하게 단도리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법이란 모든 과정을 사후추인해주고 명문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랜 명제를 떠올리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생각이 나는 게…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실천적인 함의도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 이슈와 같은 경우) 싸우려면 자본이랑 싸워야지, 국가랑 싸우려고 하면 이미 늦은 거라는? 이제 진짜 끝.

“불법 다운로드”의 정치경제학? (1)

1. 내 경우엔 영화보다는 음악을 미친듯이 다운로드해왔다. 처음엔 주된 소스가 pc통신 동호회였고, 나중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동안 화제였던 Napster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pc통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우누리로 입문해서 나중엔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 다 했다. 하지만 그 중 돈 내고 한 건 나우누리랑 유니텔뿐이고, 다른 둘은 이들이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더이상 유료회원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틈을 타서 (무료로) 조금 했을 뿐이다. 물론 순전히 음악파일 받으려고! (-_-)

요새 이와 같은 다운로드가 “불법”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이 많다. 특히 최근엔 정부와 여당을 중심으로 “불법화” 움직임이 매우 강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반작용도 만만찮다. 아마도 그 “반작용”의 논리를 가장 재밌게 잘 담고 있는 것이 다음 기사가 아닐까 싶다. 이번 추석엔 ‘불법 다운로드’ 받으세요 (<참세상>, 2010. 9. 17).

하지만 과거 내가 거의 매일밤을 다운로드에 열올리고 있을 땐, 나는 내가 하는 짓이 불법인가 아닌가라는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니까 완전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다.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죄책감도 없었으며, 그저 파일 올려주는 사람에게 고마웠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것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영역, 일종의 “무주공산”이 점점 더 국가와 자본의 매커니즘 아래로 편입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위에서 링크한 기사는, 단순하게 말하면, 한편으로는 이런 경향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런 편입과정에서 국가/자본의 기존 질서와 새로운 영역을 지배하는 데 결부되는 질서 내지는 규칙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도 함을 보여준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특히 국가는 그 새로운 영역과 관련된 법제를 마련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법제를 그와 모순되지 않게 정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어떤 면에선 위의 사항보다 더 본질적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이라는 변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와 같은 국가의 재구성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요구를 받아안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좀 더 복잡한 문제가 결부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로 이 “자본의 요구”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 둘째, 변화하는 상황에 맞서 자본은 국가에 요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도 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말해 자본의 요구가 단순하지 않은 까닭은, 당연하게도 자본–사회적 총자본–이라는 것이 그 내부에 다양한 분파들을 담고 있으며, 그들은 특정 이슈들에 대해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갖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산장수와 밀짚모자장수 사이의 대립을 떠올리면 쉽다. 이럴 경우 정부의 특정 정책은 어느 한 자본에는 (더) 유리하고 다른 자본에는 (더) 불리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두고서, 무조건 “국가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좀 단순한 거다.

둘째로 자본은 그 스스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기도 한다. 재밌는 예는, 과거 pc통신 중에서 특히 유니텔의 경우 그 운영주체가 삼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나라에서 “자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저 삼성이라는 대재벌이, 한때는–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현재 그들이 정부와 입을 맞춰 “불법 다운로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을 단순히 방조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장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땐, 음악이나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 받는 행위를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것보다는 그런 행위를 조장함으로써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더 컸던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다운로드를 감히–또는 자기들도 캥겨서–불법으로 낙인찍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간에, 이는 자본이 상황에 스스로 적응하고 활로를 개척해 나간다는 좋은 예다. (굳이 여기서 하나 상기해볼만한 사실은, 삼성은 그저 대재벌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자신 음반사업과 영상사업도 했다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 국가가 자본을 대변하는 것은, 자본이 노동에,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대중”에 대립되는 한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자본 일반”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자본 내부의 경쟁과 구조조정 등과 관련된 세세한 동학이 국가 그 자체 또는 국가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둘이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결국 무슨 얘기냐면, “자본 내부의 경쟁과 구조조정 등과 관련된 세세한 동학”과 “국가” 사이의 관계는 “자본 일반”과 “국가” 사이의 관계처럼 (대체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전자의 관계는 (대체로) 숨겨져 있으며 “과학”에 의해 파헤쳐지고 규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자본 내부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 문제는 그것보다도 더 복잡한 성격의 것이다. 즉 여기서는, “국가의 특정 정책은 ‘어떤’ 자본에 이롭고 또 ‘어떤’ 자본에 해롭다는 것이냐”라는 질문보다는, “대체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행위가 자본–자본 일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다시 강조하자면, “현재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자본 내부의 동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답변되어야 할 질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