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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신자유주의와 경제학 (2012년 6월)

‘고래정치학교’라는 곳에서 ‘신자유주의와 경제학’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다음은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쓴 소개글이다(강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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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 소개는 이쯤에서 마치고, 다음으로 우리가 2회에 걸쳐 함께 공부할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신자유주의와 경제학’이라. 제목이 좀 애매모호하죠? 신자유주의도 잘 모르고, 경제학도 잘 모르겠는데, 둘을 조합하니 도무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감이 안 잡히실 것도 같습니다. 자세한 얘기를 벌써부터 내놓으면 재미가 없으니, 지금은 아주 간단한 개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먼저 신자유주의. 흔히 신자유주의를 ‘정책’의 차원에서 이해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자본의 국제적 운동을 자유롭게 허용해주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한때 우리에겐 ‘신성장동력’이라는 이름으로 옹호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2008년 리만브러더스의 파산 이후에, 그리고 최근 그리스와 스페인이 맞고 있는 파국 앞에서 결정적으로 정당성을 잃었습니다. 즉 그것은 ‘종말’을 고한 것이며, 현재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책 패러다임이었던 신자유주의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틀이 한창 고안중에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저는, 신자유주의에 정책적인 차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정책은 그보다 근본적인, 즉 ‘물질적인’(material) 차원에서 벌어지는 어떤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설명하거나 비판할 때, 나아가 그 대안을 모색할 때, 신자유주의라는 정책 패러다임이 한편으론 반영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어느 정도 만들기도 했던 바로 그 ‘물적 차원’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그러한 논의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 바로 그러한 ‘물적 차원’을 우리는 ‘경제’—좀 더 정확히는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물적 차원’ 곧 ‘정치경제’를 이론적으로 다루는 학문이 경제학이고요. 한때 철학자였던 마르크스가 자신의 삶의 황금기를 (정치)경제학 연구에 바친 것도 경제학의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이번 강좌에서 ‘신자유주의’와 ‘경제학’을 함께 다루는 까닭입니다. 즉 경제학이란 현대사회의 물질적 재생산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을 응당 그 과제로 삼아야 하지만,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의 신자유주의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이미 충분히 목격했습니다. 이를테면, 리만브러더스가 몰락하고 얼마 뒤 ‘왜 누구도 파국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라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당연한 질문 앞에서 수많은 존경받는 경제학자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을 때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파국의 원인이 위에서 말한 ‘물적 차원’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러한 차원의 운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셈이며, 이렇게 잘못된 경제학은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정책 패러다임이 고안되고 나아가 옹호되었던 지적 환경을 제공한 것입니다(이를테면 금융시장에서는 모든 정보가 즉각적으로 가격에 반영되어 비효율이나 갑작스런 가격변동은 발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효율시장가설’ 같은 것을 떠올려 보세요!). 나아가 이렇게 엇나간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현실 그 자체에 되먹임질을 해, 애초 그것이 출현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물적 조건’을 일정 정도로 변형하기에 이릅니다(동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강요되었던 정책들이 한국경제 자체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켰는지를 떠올려 보세요!). 요컨대, 오늘날의 파국은 이 모든 것들의 종합적인 결과인 셈입니다.

– 이상의 사항들을 염두에 두면, 오늘 우리 모두가 ‘괴물’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폐기하거나 극복하는 것, 나아가 그 대안을 내놓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임을 금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심사숙고해보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란 동시에 그것과 짝을 이루는 경제학과의 결별이기도 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출판가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새로운 경제학’에 대한 논의들은 명시적이건 암묵적이건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쉽게도, 이상에서 슬쩍슬쩍 건드린 이슈들을 이번 강좌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을 겁니다. 대신 우리는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중심으로, 그러나 각각을 따로따로 보기보다는 상호연관되는 한에서—그러니까 ‘수박겉핥기’ 식으로(!)—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첫째,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둘째,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셋째, 오늘날의 경제학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넷째,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경제에 대한 대안적인 이해들, 또는 대안적인 경제학들은 과연 신자유주의와 충분히 단절을 이루고 있는가 등등. 특히 마지막 사항과 관련해서는,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진화경제학이나 행동경제학, ‘사회자본’론이나 ‘착한경제’론 등이 검토될 것입니다. 자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끝으로, 글 몇 개. 다음 글들을 미리, 여건이 안 된시면 나중에라도 읽어두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몇몇은 이런저런 매체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고, 모든 글들은 제 블로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링크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관점’에 관한 글

경제학에 대한 고민들

각종 대안적 움직임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들

구체적인 사례들

이상입니다!

이론: 단순하고도 복잡한 것

이론이란 단순한 것이기도 하고 복잡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실과의 관계에서 보면 단순할 수밖에 없다. 이론이란 현실에 대한 이론가의 지적 개입의 산물로, 거기에선 현실에 대한 일정한 추상화와 단순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론의 추상성/단순성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며, 이론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원죄’와도 같은 것이다.

다른한편, 당분간 이론 그 자체의 영역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에서 이론은, 그러니까 ‘좋은’ 이론은 복잡해야만 한다. 즉 그것은 ‘진짜 현실’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그러나 ‘진짜 현실’과는 달리 (왜냐하면 이론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실의 ‘지적 재구성’이므로) 체계적인 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요강} 등에서 ‘현실/역사의 순서’와 ‘구조/논리의 순서’를 구별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이러한 복잡성을 갖지 못하는 이론은 필연적으로 ‘환원론’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자신의 단순함 속으로 현실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반대로 복잡한 이론은 현실의 복잡성을 반영하면서 끊임없이 거기에 개입함으로써 끊임없이 발전한다. 그래서 단순하고 환원론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완결성을 주장하지만, 복잡하고 체계적인 이론은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탓한다. 바로 이 부족함의 자기인식이야말로, 이론의 내적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괴물 저작을 거의 완성해놓고도 그 출판을 미룬채, 그리고 죽음의 위협과 사투하면서까지도 자본주의의 작동과 변모에서 주의를 떼지 않은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통상적인 부르주아 이론(경제학을 포함해)이 전자와 같은 환원론인 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바로 이런 후자에 속하는 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해 그것이 환원론(경제로의 환원론, 생산중심주의 등)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이론의 위와 같은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or 경제학? – 다시 한 번 ‘꼼수’에 대하여

경향신문이 사정이 진짜 어렵긴 어려운가보다. 이런 글까지 다 실어주니까 말이다.

[경제와 세상] ‘경제학’ 용어에 숨겨진 꼼수 (강신준, 2012년 2월 15일)

1. 이 글은 단순한 ‘무개념’뿐 아니라 경제학 교수가 범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관계상의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몇 가지 간단히 지적하겠다.

우선 사실관계를 얘기하자면 후자의 용어[economics]는 알프레드 마셜이란 사람이 1890년에 임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사실관계’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대담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종류의 용어변천은 누구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집단적인 과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예컨대 ‘economics라는 표현을 저서의 제목에 처음 쓴 사람은 xxx이다’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강교수와 같이 ‘xxx가 만들었다’라고 하긴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어떤 기준으로 보든 위 진술은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샬의 1890년 저작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Principles of Economics}일 것이다. 분명 이 책에 ‘economics’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 이 책이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로 대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마샬도 아니고, 또 그의 저 1890년 저작에서 그 용어가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일단 ‘economics’라는 용어는 다름아닌 마샬 자신이 그의 부인과 함께 쓴 이전 저작 {The Economics of Industry}(1879)에도 쓰인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economics’가 출현한 첫 사례는 아니다. 그 전에 이미 1877년, 1878년에 각각 J. M. Sturtevant 및 H. D. Macleod의 저작의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특히 Macleod는 이에 앞서 187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political economy’를 ‘economics’라고 바꿔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economics를 “교환가능한 양들 간의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에 대해선 이미 나 자신이 몇 번 밝혔다. 나는 심지어 강교수가 그에 대해 무려 ‘반론’을 내놓기까지 한 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가 아는 한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있는 관련논문 중 가장 훌륭한 이헌창 교수의 글을 소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강교수께서 위와 같은 오류를 견지하고 계신다니..)

 

2. 다음으로,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둘은 같은 것도 아니고, 둘의 차이는 단순히 앞에 ‘정치’가 붙었는가 아닌가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없다. 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을 구별하는 것은 ‘꼼수’를 진실과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두 경제학은 서로 독립적인 별개의 과학이 아니라 단지 ‘진실’과 ‘꼼수’의 차이일 뿐인데 이를 서로 달리 부르는 것은 곧 ‘꼼수’의 의도처럼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 . .] 두 경제학은 서로 다른 것인가?

기본적으로 나는 위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진실’과 ‘꼼수’를 달리 부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전혀 설득력이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아량을 발휘해 그의 의도를 읽어보면, 대충…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가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나아가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는 마샬을 위시한 경제학자들의 ‘꼼수’의 산물이므로, ‘진실’을 수호하는 우리가 굳이 물러서서 ‘정치경제학’이라는 불편한 용어를 쓸 까닭이 없다]라는 것 같다.

그런데 강교수가 말하는 것과 달리, ‘political economy’와 ‘economics’는 단순히 앞에 형용사 하나가 더 붙었느냐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전자가 후자로 바뀌면서, 이름만 바뀌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일 것이다. ‘political economy’에서 ‘economics’로의 변화는, 단순히 이름에 대한 게 아니며, 이 과정에서 ‘economics’는 기존의 ‘political economy’에 대해 그 대상과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론 자체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과정은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고,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개개인의 의지와는 어느 정도 별도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모든 얘기를 풀어낼 수는 없고,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블로그에 있는 나의 글(‘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특히 두 번째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다행히도 강교수도 둘의 차이가 단순히 이름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는 이 대목에서 ‘꼼수’ 드립을 치고 있다. 세상에! 그러니까 강교수에 따르면, 마샬은 뻔뻔스러운 ‘꼼수쟁이’가 된 것인데… 세상에…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만 하겠다. 첫째, 마샬은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그 부르주아적 한계 안에 갇혀있긴 해도 그 나름대로 노동이나 산업의 다양한 문제들을 두루 시야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둘째, 마샬 부부가 그들의 1879년 저작에서 말하듯(p. 2), 그들이 ‘political’을 뺀 데는 그 용어의 의미가 과거와 크게 변화했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정치경제학’이라고 했을 때, 이는 ‘정치적인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경제학’ 또는 ‘사회경제학’이라고 해야 원래의 ‘political economy’와 의미상으로는 통하는 게 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교수는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하나의 중요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이들이 했던 연구, 즉 ‘political economy’를 ‘경제학’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경제학’은 원래 ‘political economy’의 역어였던 것이다.

이헌창 교수가 밝혀주는 바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서양의 ‘political economy’가 번역될 때 ‘경제학’이 선택되었고, 이에 대응해 이후의 ‘economics’에 대해서는 한때 ‘이재학’과 같은 역어가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서양에서 ‘political economy’가 ‘economics’에 압도되는 것에 발맞춰, 점차 ‘economics’도 ‘경제학’으로 일괄 번역되게 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political economy’는 ‘정치경제학’이라는 다소 괴상한(?) 이름으로 번역되게 된 것이다. 주객전도라는 말이 제격인 상황이다.

 

4.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몇몇 학자들이 굳이 ‘political economy’라는 용어를 살려쓰고, 또 (비록 좀 껄끄럽기는 해도) ‘정치경제학’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름으로, 오늘날 그야말로 막나가고 있는 ‘경제학’을 견제하고 나아가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경제학은 상당히 ‘political’해지고 있다. 원래 마샬 등이 ‘political economy’였던 것을 ‘economics’로 바꾸고자 했던 데는, ‘경제학’이라는 것을 매우 좁게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순수경제학’인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political economy’는 순수이론과 각종 응용분야들로 나뉘게 되는데, 말하자면 과거에 ‘political economy’가 관심을 두고 있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를테면 J. S. Mill 같은 이가 열정적으로 다뤘던 분배의 문제)은 ‘순수이론’이 아닌 ‘응용’분야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학이 최소한으로 정의되자마자(‘제약 하에서의 선택에 관한 과학’이라는 식으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일반화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인간사에서 ‘제약 하에서의 선택’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 이리하여 경제학은 그것이 마샬 등에 의해 제안된 ‘협소한 한계’를 넘어, 그리고 과거 ‘political economy’ 시절에 그것을 규정했던 한계도 훌~~쩍 넘어, 경제학이라는 틀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여타 사회과학들의 영역을 마구 짓밟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경제학 제국주의’라고 한다(관련글).

요컨대 오늘날, 영어로 치면 ‘political economy’, 우리말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제로 우리가 꾀하는 것은, 위와 같은 막나가는 경제학(economics)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그럼으로써, 경제학 내부로 치면 ‘economics’가 ‘political economy’였던 시절에 가졌던 사회적(the social)이고 물질적(the material)인 관심(바로 이 블로그의 이름이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그러한 ‘political economy’라는 관점을 다른 사회과학 분과들과 한편으론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한편으론 ‘정치경제학’을 그것이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삶의 단면들에 관한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성과들과 결합함으로써 ‘비판적 사회과학’의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5. 사태가 이러하기에, 사실 마르크스의 주저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를 ‘자본’이라고 할 거냐 ‘자본론’이라고 할 거냐, ‘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정치경제학비판’이라고 할 거냐 등등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을 생각하면, 위 문제, 적어도 ‘정치경제학’이냐 ‘경제학’이냐라는 문제는 중요하기도 한데, 지금까지 대충 밝혀졌듯이, 강교수는 이것이 ‘왜!!’ 중요한지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사태를 ‘꼼수’라는 지극히 애매모호한 ‘말’로 뭉뚱그리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괴테를 차용한 마르크스의 저 구절, ‘개념이 빠진 곳에는 말이 들어선다’라는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꼼수에 대해서 내가 일전에 주장했듯이(‘나꼼수와 마르크스‘), 사태를 (가카의, 또는 경제학자들의) ‘꼼수’라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만큼 단순하고도 그릇된 것도 없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 및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할 목적으로 그의 주저를 썼다. 강교수는 바로 그 저작, 그것도 독일어 원저작의 한국 최초의 완역자다. 바로 그런 분께서 꼼수 운운하는 것이 딱하고, 그분이 번역한 것을 읽게될 선량한 독자들이 딱하다. 그가 보이는 것과 같은 인식으로 (마르크스가 겨냥했던) ‘경제학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희롱 발언이나 일삼는 나꼼수 4인방이 비열한 착취를 철폐하고 새세상을 열 거라고 생각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모르겠다. (끝)

 

[200908] 경제학이 나아갈 길

내친김에… 앞서 글과 같은 매체에 실렸던 글 하나 더. 2009년 8월에 썼다. 아래 글에서 묘사된 <이코노미스트> 지상의 논쟁이 문득 떠오른다. 상당히 치열했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글의 말미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적어도 이때만 해도 여러 논쟁들 중에서 국가의 역할과 위상이 과감하게 인정되는 분위기였는데, 최근들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2008년 9월 이후 엄청난 액수의 돈(물론 그 돈은 모두 국민의 세금에서 조달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이 망가진 금융시스템의 구출에 쓰였고, 또 이를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스템은 국가의 일부다'(당시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의 말)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라. 이를테면 최근 우리나라에 와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크루그만(Paul Krugman)과 나이올 퍼거슨(Niall Ferguson)을 보라. 크루그만이 대체로 케인스주의에 입각해서 국가의 역할을 과감히 인정하고 있는 반면, 퍼거슨은 (속류) 고전파적인 입장–이는 곧 케인스의 정의에 따른 고전파를 의미한다–에서 거의 ‘야경국가론’에 다름 아닌 논조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크루그만과 퍼거슨의 논쟁은 2008년 4월부터 시작되었는데, 논쟁 초기엔 퍼거슨도 국가의 역할에 심각하게 의문을 달지는 않았었다. 그의 입장은 시간이 가면서 묘하게 바뀌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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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나아갈 길

1. 최근 <이코노미스트>가 현재의 범지구적 경제위기와 관련,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문제삼고 나섰다. 이 주간지는 7월 18일자에서 “경제거품 중에서 경제학의 명성에 낀 거품만큼 장관을 연출하며 터진 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일련의 논쟁적인 기사들을 무려 6면 이상에 걸쳐 냈다.

흔히 경제학자를 “세속의(worldly) 철학자”라고 하는데, 이를 비꼰 게 분명한 “다른 세상의(other-worldly) 철학자들”이라는 한 기사의 제목이 보여주듯, 이번 비판은 경제학의 비현실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재밌는 것은 이 기사들이 경제학자들을 “수학적 모형화”와 “효율시장가설”의 맹신자로 묘사하면서,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크루그만(Paul Krugman)이나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같은 또 다른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사들은 곧바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 잡지는 3주 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시카고대 교수의 반론기사를 이례적으로 한 면 가득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같은 호의 “독자편지”란은 3주 전의 기사들과 관련된 의견들로만 채워졌다.

2. 현대경제학의 발상지답다고 해야 할까? 꼭 <이코노미스트>가 아니라도, 영국 종이매체엔 경제학의 잘못을 꾸짖는 기사들이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때 매체들은 단순히 여러 의견들의 전달자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각기 꽤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기사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논의를 이끌고 있다. 특히 문제의 성격상 가장 활발하게 논쟁에 참여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코노미스트> 같은 경제지의 경우, 그 입장의 “배경”도 커다란 흥밋거리다.

<이코노미스트>는 자유무역 옹호, 보호주의 반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1843년에 창간됐다. 그 시작부터 “정치적”이었던 셈인데, 그 당시엔 대기근을 겪던 아일랜드에 식량원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정도로 자유방임 원칙에 충실했다. 1980년대엔 현재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경제・정책이념의 화신인 레이건과 샛처 정부에 호의적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 행적을 놓고 볼 때, 앞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은 언뜻 보면 그 기존입장에 배치되는 것 같다. 과연 이 잡지가 한때 자신이 옹호하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케인스주의자이자 오바마 지지자이며 “복지국가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크루그만 같은 인물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좀 더 폭넓게 말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전국민의료보험체계의 필요성을 대체로 인정하고 영국 국내정치에서는 보수당보다 노동당에 호의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런 입장은 2009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보수당 지지 쪽으로 급선회한다. 그리고 이런 입장변화를 주도한 것이 ‘황색언론’의 대명사 <더 선>(The Sun)이었다는 사실은, 그 입장 변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3. 그 해답은 궁극적으로는 20세기 말에 닥친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재편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현실사회주의 붕괴는 기존의 좌파에 치명적인 타격을 날렸지만, 동시에 이 잡지가 떠받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적·실천적 공간을 넓혀놓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 경제위기를 전후해 제기된 이슈들, 즉 몇몇 거대기업들의 국유화나 중앙은행의 역할, 경제학의 향후 재편방향 등을 둘러싸고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소유구조로 보면 이 둘은 거의 하나나 다름없다―가 내놓는 의견이 전통적으로 노동당 성향인 <가디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금 오래된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자면, 한 번은 <이코노미스트>가 당시 이탈리아 총리후보였던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를 무자격자라고 비판했다가 그로부터 “이코뮤니스트”(Ecommunist)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을 얻기도 했다.

4. 이런 사정을 두루 생각하면, 현재 <이코노미스트>가 제기하는 종류의 것이 경제학 자체에 대한 내재적이고 심도 있는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학문이란 것도 결국엔 현실의 반영이고 그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대립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는 한편 당연한 듯도 싶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이 비현실적이라는 데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것은 “세속의” 학문임을 보였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경제학 비판의 미덕이라고 해도 될까? 나아가 그것이 경제운영에서 국가의 역할을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분위기를 계속해서 끌고가지 못한 것은 좌파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끝)

이론의 발전과 이론사가의 중요성에 대한 잡담

얼마전 헌책방에 가서 [의학의 역사: 한 권으로 읽는 서양의학의 역사](Jacalyn Duffin 씀, 신좌섭 옮김, 2006, 사이언스북스)(원저: History of Medicine: A Scandalously Short Introduction, 1999)라는 책을 사서, 심심할 때 보고 있다.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여러 주제들에 대해 짤막하게, 그러나 매우 감칠맛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옆서 컴퓨터를 켜놓고 호기심 가는 내용들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보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책은 다음과 같은 인용으로 시작된다. 아마도 인류사에서 의학발달의 아주 중요한 특징을 단적으로 잡아내준다고 저자는 판단했던 모양이다.

“의사 선생님, 귀가 아픈데요.”

  • 기원전2000년: 자,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
  • 기원전1000년: 그 뿌리를 먹으면 부정을 타니 이 주문을 외우시오.
  • 1850년: 주문은 미신이오. 이 물약을 드시오.
  • 1930년: 그 물약은 돌팔이 약이오. 이 알약을 드시오.
  • 1970년: 그 알약은 효과가 없소. 이 항생제를 드시오.
  • 2000년: 그 항생제는 인공 합성물이오. 자,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

— 애넌(Anon)의 ‘의학의 역사’ (1997-1998년 인터넷에 떠돌던 글)

위 대목에서 난 두 번 웃었다. 한번은 위 내용 자체가 재밌어서다. 아무리 과학이 어쩌니 해도, 결국 우리 인간이란 게 무슨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여기서 “부처님” 대신, 취향에 따라, “하느님”, “하나님”, “절대정신” 등등을 넣을 수 있겠다).

한번 더 웃은 건 번역 때문이었다. “어, 어디?”라고 당신은 흠칫 놀랐는가? ㅎㅎ 흠… 별로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함 찾아보시길. 정답은 저 아래에… (-_-) (원문대조 따위는 당연히 해보지 않았지만, 내 말이 맞을 것…;;;)

그런데… 다분히 우스겟소리겠지만, 경제학이나 여타 사회과학들의 발전도 대충 위와 같은 식으로 특징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경제이론과 경제이슈라는 게 돌고 돈다. (요새 케인스주의 다시 기어나오는 거 봐…)

흔히 우리는 어떤 “발전”을 묘사할 때 “변증법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름하여 “이론의 변증법적 발전“. 가장 거칠게 말하면 이는 “정-반-합”의 구도를 따라, “기존이론-대항이론-새로운이론”이라는 식의 발전이 반복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터. 하지만 “변증법”이라는 그 말의 의미대로, 만약 이 과정이 진정으로 변증법적이라면 기존에 한번 나온 것이 “똑같이” 반복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것들의 좋은 점은 보존되고 나쁜 점은 걸러진 채 새로운 것이 형성되는 게 변증법이니까.

따라서 설령, 위 예에서와 같이,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라는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처방을 기원전2000년의 의사와 서기2000년의 의사가 내렸다 하더라도, 둘이 품고있는 실제 내용은 엄청나게 다를 것. 말하자면, 2000년의 의사가 내리는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라는 처방에는, 지난 4천년 동안의 의학의 발전 역사가, 그러니까 그 안에서 행해진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경험과 그로부터 얻어진 지혜가 압축된 채로 녹아있을 것이란 얘기다.

에… 하지만 이건 “원칙상”, 또는 “심층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거고… 실제 그 처방을 내리는 의사 개개인들은 대체로 그런 4천년의 의학발전의 역사에 대해선 거의 무지할 가능성이 높다. 즉 서기2000년의 의사에겐 “인공 합성물”인 항생제보다는 “천연물”인 약초 뿌리가 낫다는, 그러니까 바로 그 당대의 문제만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러다가, 이 의사가, 자기보다 무려 4천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도 의사들이 자기가 하는 것과 거의 똑같은 처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쩌다 알게 됐다고 해보자. 이 의사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저 4천년 전의 조상들에게 “무궁한 경외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4천년 세월동안 이뤄진 의학의 발전이란 게 덧없고 하찮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짜 그런가? 진짜 그 4천년의 우회로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저 가련한 의사는, 그걸 모른다. 그것도 모른 채, 그는, 자신의 후대에, 자신의 그 자신감에 찬 처방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가 어떤 알수없는 이유로, “이 주문을 외우시요”라는 현재의 자신이 보기엔 그저 말도 안 되는 처방으로 대체되는 것을 저승에서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의사들이 이렇게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의학의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리하여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처방의 “역사적” 내지는 “의학사적” 의미를 모른다면, 위 인용된 구도에서 의학이란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저 반복되면서, 어떤 의미에선 퇴행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경제학이 처한 사정이 바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된지는 실은 꽤 됐다. 현대 경제학이 정신 못차리고 개죽을 쑤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설명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서기2000년의 의사에게, “이 약초 뿌리를 드시오”라는 그의 처방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또는 “의학사적으로” 놀라운 것인지를 알려줄, 말하자면 “역사가” 내지는 “의학사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있어야만, 서기2000년의 의학은, 지난 4000년의 발전역사를 조망하며 진정으로 획기적인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논리로, “경제사가” 및 “경제사상가”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역할이 방기되었을 때 어떤 파괴적인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음미해야만 한다.

아참, 정답!

“애넌”은 저자이름이 아니다. 이건 “작자미상”을 저자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거랑 같은 오류. Anon. = Anonymous. 재미없나? 쩝… (그래도 이 책, 번역 좋고 전반적으로는 잘 읽힌다. ^^)

[기사] Stiglitz on Keynes

Stiglitz, J., 2010. The Non-Existent Hand. Review of Keynes: The Return of the Master by Skidelsky, R. London Review of Books [Online] vol. 32 no. 8 pp. 17-18. Available from http://www.lrb.co.uk/v32/n08/joseph-stiglitz/the-non-existent-hand [Accessed 19 April 2010].


스티글리츠는 흔히 “정보경제학”의 대가로 알려져 있고 (내 기억엔) 그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그에 대한 기여 덕분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전세계적인 경제대란 속에서, 그리고 특히 그에 대한 처방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종종 “케인스주의자”로 여겨지곤 한다.

위에서 링크한 글은 최근에 한국에도 번역된 케인스 전기의 저자인(스티글리츠가 표현하듯이 “Keynes’s great biographer”인) Robert Skidelsky 경의 최근작 《Keynes: The Return of the Master》(2009)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서평이다. 여기서 그는 (스키델스키의 손을 거친) 케인스에 대해 코멘트하면서, 그와 자신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The present crisis should lay to rest any belief in ‘rational’ markets. The irrationalities evident in mortgage markets, in securitisation, in derivatives and in banking are mind-boggling [. . .] If we are to design policies to prevent crises or to deal with them when they occur, it is essential to understand the critical flaws in the standard paradigm. It is here that Skidelsky goes astray.

오늘날 케인스주의자로 자의든 타의든 규정되는 사람들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그 중 스키델스키는 “케인스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강경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리뷰되고 있는 책에서 그는 (스티글리츠는 언급하지 않지만) 심지어 (케인스가 창안했다고 할 수도 있는) 거시경제학이 (‘미시적 기반micro-foundation’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거시경제에 대한 진정한 안목을 기르기 위해 “거시경제학자에겐 미시경제학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매우 과감한 주장까지 내놓기도 했다.

이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현재의 공황에는 금융적인 측면이 많이 개입되어 있으며 케인스의 기본 문제의식은 실업(과 유효수요)에 있었으므로, 오늘날 문제가 되는 금융시장의 운영이나 규제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반박한다. 대신 그는 케인스 이후 여러 케인스주의자들에 의해 여러 유용한 시각들이 발달했음을 상기시키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스키델스키가 그런 성과에 정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다시 케인스로!”라는 급진적인 모토를 내세운다고 비판하는 셈이다.

그러나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글리츠는 케인스 및 케인스주의가 이룬 업적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임은 물론이다.

Keynes’s great contribution was to save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 if they had had their way, they would have imposed policies that weakened the economy and undermined political support for capitalism. The regulations and reform adopted in the aftermath of the Great Depression worked. Capitalism took on a more human face, and market economies became more stable. But these lessons were forgotten. Thatcher and Reagan ushered in a new era of deregulation, growing inequality and weakening social protection. We are now seeing the consequences, and not just in greater instability. Keynes’s insights are needed now if we’re to save capitalism once again from the capitalists.

위에서도 드러나듯이, 스티글리츠가 힘줘 강조하는 것은, 케인스의 통찰을 이어받아 케인스 이후에 많은 이론적 진전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고 복원해야 할 것은 케인스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경제학을 재편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및 시장이란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늘 품고 있다”라는, 주로 케인스 이후에 지각되고 발전된 사고에 기반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재편은, 스티글리츠를 대표로 하는 이른바 ‘post-Washington consensus’론자들에 의해 특수한 방향으로 실현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좀 더 급진적인 비판도 존재한다. 그런 비판을 내세우는 대표적인 논자인 Ben Fine의 글 중 하나(〈지구화와 발전 개념의 비판적 검토: 정치경제학의 역할은 무엇인가?〉)가 국내에도 번역/소개된 바 있으며, 이런 비판은 ‘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IIPPE)‘라는 이름으로 좀 더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IIPPE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다른 글도 참조할 수 있다.

게슴츠레님 또는 고진 또는 《진보평론》에 대한 잡담: 결국은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진보평론》의 이번 겨울호에 실렸다는 글을 하나 봤다. 그런데 저자가 좀 낯이 익다. 과거 내 불로그에 종종 덧글을 남겨주셨던 게슴츠레님이었던 것. 그의 (새로운) 블로그를 통해 글을 읽게 되었다.


이지원, 〈가라타니 고진의 『자본』 읽기: 가치형태론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42호, 2009년 겨울.

이 글을 통해 알게된 첫 번째 것은 물론(!) 게슴츠레님의 실명과 소속이었는데, 짐작은 어느정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대학 학부생이었다. 뭣보다 글을 읽기도 전부터 나는, 학부생이 《진보평론》의 “일반논문” 코너에 실릴 정도의 글을 썼다는 점에 놀랐고, 또 (난 그 시절에 뭐했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 뜨끔하기도 했다. ㅎㅎ

실제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 뜨끔함도 커졌다. 글도 꽤 잘 씌었고, 뭣보다 (으레 “일반논문” 같은 코너에 실리는 글들에 걸맞게) “길었다”! 이건 결코 폄하나 빈정거림이 아니다. 순전한 칭찬이자 부러움의 표현이다. 지금이야 뭐, 글 길게쓰기 선수라고 해도 되겠지만(하지만 이런 면에서 진정한 고수들은 따로있다), 학부시절 제대로 된 (그러니까 잘쓰고 못쓰고를 떠나) 리포트 하나 못 써본 나로서는 부러울 밖에.

그러나 글을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글쎄… 뭐랄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역시 잘 쓴 학부 리포트” 정도라는 것. 어차피 게슴츠레님은 학부생이니까, 이런 표현이 그에게 결코 누가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문제삼고픈 것은, 《진보평론》의 태도다. 이제 《진보평론》은 학부생 리포트도 실어주는가? 글쎄… 그러면 또 어떠랴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바로 이 학부생 리포트를 “일반논문”이라는 코너에 놓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나는, 만약 이 글이 이를테면 “학부생 논문”과 같은 코너에 실렸다면,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진보평론》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또한 만약 이 글이 비록 학부생이 쓰긴 했지만 그 이상의 출중함을 보여주었다면 “일반논문”에 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는 둘 다 아니다. 어떤 이는, 학부생 아니라 교수의 논문 중에도 “학부생 리포트 수준도 안 되는” 것이 많다면서 “진짜 학부생 리포트”가 “일반논문” 코너에 실리는 게 무슨 문제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어떤 학술잡지도 “학부생 리포트”를 “일반논문” 코너에 싣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학부생이 일반저널에 글을 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외국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겠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분명 저널의 편집진이 “학부생”의 글을 받았을 땐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싣지 않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여기서 굳이 “음모”까지 제기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그의 글을 조목조목 비판할 생각도 여유도 없고, 또 그럴 조건도 갖춰져 있지 않으므로 위와 같은 판단(“그래도 역시 잘 쓴 학부 리포트”)을 하는 까닭만 조금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즉 예를 들어 위 글에는 “리카도와 베일리 – 가치에 관한 두 입장 혹은 화폐에 대한 한 입장”이라는 소절이 있는데, 그래도 버젓한 학술잡지에 실릴 “일반논문” 축에 끼려면 이런 대목에서는 적어도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한 글쓴이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서 “고진의 독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글쓴이는 고진이 이 둘을 이해하고 전유하는 방식만을 제시할 뿐이고, 이런 글쓰기는 대체로 “학부 리포트” 수준에서 행해지는 방식이다. (여기서도 다시, 나는 글쓴이를 비판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버젓한 학술잡지”가 그것을 실은 배경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바로 그 대목은) 그냥 책읽고서 내용정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가지기 어렵다. 이를테면… 글쓴이는 리카도와 베일리를 위와 같이 “정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진이 그들을 이해한 방식을 받아들이고 또 그 위에서 이후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셈인데, 만약 고진의 그런 이해가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내가 여기서 “틀렸다”라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이해의 영역에서 말하는 거다. 어쨌든 “일반논문”의 저자라면, “고진이 이해한”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그냥”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해서도 자기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사실은 나는 고진이 리카도와 베일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가치이론을 “초월(론)적”이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성격짓는 것이 못마땅하다. 게슴츠레님이 정리하셨듯 고진은 베일리를 가치에 대한 “관계론적 파악”의 원류로 이해하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베일리를 “양의 문제에 함몰된 학자”라는 식으로 보기도 했다. 즉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베일리는 리카도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베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그를 리카도와 대비시켜서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맥락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고진에게선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고진의 문제제기는 뜸금없고 탈맥락적이다–그래서 “초월(론)적”이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연구하시는 게슴츠레님을, 그가 학부생이든 뭐든 상관없이, 응원하는 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또는 그와 비슷하게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기반으로 현대사회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좀 더 “순수한” 방식으로 거기 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여기서 “순수하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을 있는 그대로 봐주라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하지 말고 말이다. 즉 그것이 고진이 됐든, 레닌이 됐든, 아니면 Backhaus나 Heinrich가 됐든 말이다. 물론 거대한 고전에 다가가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필요하기도 하고 어느정도는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말하자면 “해석”과 “해설”을 구분할 줄은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고진은 “해석자”이지 결코 “해설자”는 못 된다. 물론 내가 보기엔 그다지 훌륭한 “해석자”도 아니다. (언젠가 고진에 대한 글을 쓸 날이 올까…)

다시, 《자본》을 “순수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뭘까? 간단히 말해 그것은 《자본》이 다름아닌 “경제학”(political economy) 저작임을 순순히 인정하는 일이다. 오늘날의 “경제학”(그것이 주류이든 비주류이든)을 떠올리면서 이런 말에 진저리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경제학”의 부정이 아니라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반성이다.
※ “경제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사회” 관점의 지성사적 의의IIPPE(정치경제학 진흥을 위한 국제 발의)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