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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 공황, 경제학: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가한 하나의 비판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자들은 공황을 부정한다. 그들은 심지어, ‘공황’이라는 말 자체를 일부러 안 쓰려고 안간힘을 쓰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선 이 블로그에서 한번 지적한 바 있다(링크).

하지만 눈을 가린다고 어지러운 광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말’을 없앤다고 그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자들이 그러듯, 어떤 사태를 미봉적으로 부정하려 하면 할 수록 그 사태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법이다. 그러다가 어떤 국면에 이르면, 누구도 그 사태를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일전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로 세계경제는 적어도 최근 40여 년만 놓고 봐도 끊임없이 공황에 시달려왔지만, 그때마다 이 공황들은 때로는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이기주의의 탓으로, 때로는 중남미 포퓰리즘적 정부들의 방만한 재정운영이나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유교적 잔재의 탓으로 얼버무려지곤 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분야에서 불거진 이번 공황은 마르크스 따위엔 관심도 없던 대중들에게조차 체제 자체의 문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그런데 돌이켜보면, 위와 같은 태도, 그러니까 자본주의 경제의 내재적 모순에서 유래하는 공황을, 즉 한편으로는 공황의 이와 같은 본질적 성격을, (그리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공황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겐 꽤 오래된 습관이다. 다음 구절을 보라.

리카도는 공황에 대해, 즉 생산과정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시장의 일반적 공황에 대해 실제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1800년에서 1815년 사이에 벌어진 공황들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의 결과 시장이 경제적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로 억지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흉작 때문에 일어났다고, 지폐의 감가, 식민지 작물의 감가 등에 의해 일어났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815년 이후의 공황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일부는 흉작 때문에, 그리고 일부는 곡물가격 하락 때문에 벌어졌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잉글랜드가 유럽대륙으로부터 격리되었던 전쟁 동안에 곡물가격에 상승압력을 가했던 앞서의 원인들은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의 공황들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이행이 ‘무역 채널의 갑작스런 변경’을 가져와서 빚어졌다고 설명되기도 했다. 이후에 벌어진 역사적 현상들, 특히 세계시장에서 거의 정기적인 주기를 가지고 일어나는 공황들은, 더이상 리카도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사실을 부정하거나 이를 우연에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 . .] (강조는 EM의 것. 출처: Karl Marx Frederick Engels Collected Works, Vol. 32, pp. 128-29)

그렇다면, 이후 경제학자들이 공황의 주기성, 그것의 본성을 인정하게 되었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를테면 ‘자본의 과다'(plethora of capital)와 ‘과잉생산'(overproduction)의 구별(이 사항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생략)을 도입함으로써, 교묘히 본질적인 물음을 회피해갔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과거 리카도주의 경제학자들이 그랬듯, 오늘날의 경제학자들도 공황의 본질,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적 성격을 인정하는 척, 그럴싸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끝내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말 것이라는 점. (이런 경제학의 성격을 가리켜 Ben Fine은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로의 이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2. 마르크스가 리카도에 대해, 그가 불충분하게나마 19세기 초의 공황들은 설명할 수 있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 매우 시사적이다. 이것은, 크게 보면 마르크스(와 그의 훌륭한 선배였던 아담 스미스나 헤겔)이 파악하고 있던 근대사회의 본질, 좀 더 직접적으로는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곧 근대사회란 그 물질적 차원의 운동이 정치나 자연과 같은 경제외적 요인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사회라는 것, 그리고 정치경제학이란 바로 그러한 경제법칙, 따라서 경제법칙에 의해 규제되는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에 대한 학문이라는 것! 이런 생각에 따른다면, 정의상 경제학은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물적 차원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규정되는) 봉건제 사회에 있어서는 온전하게 성립할 수 없다.

[201110] 경제학, ‘제국적’ 학문?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글을 하나 썼다. 제목은 위와 같다. “시대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기획에서 한꼭지를 차지하는 글이다.

할당된 분량에 맞게 글을 쓰는 것도 기술인데… 아직 그런 데까진 멀었나보다. 줄이느라 혼났다. 덕분에 좀 설명이 조금 불충분한 곳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사람 이름 같은 것은 가급적 원어표현을 함께 써두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중간중간에 소제목도 넣었지만 결국 뺄 수밖에 없었다. 고육지책. 절대로 이것은 {대학원신문}의 잘못이 아니다. 다 내가 모자란 때문이다.

출판본은 맨앞에 링크를 해두기도 했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곳에 초고와 출판본을 참조해 글을 좀 더 가다듬어 올려둔다. 사실은 제목도 “경제학의 ‘원리’엔 ‘경제학’이 없다”였는데, 위와 같이 바뀌었다.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것도 나 스스로 고려했던 것이기도 하고.

경제학의 ‘원리’엔 ‘경제학’이 없다

하버드 경제학자 맨큐(N.G. Mankiw)의 {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Economics)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잘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로, 1997년 이래 지금까지 다섯 번의 개정을 거치며 경제학 교육의 표준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저자가 제목에 ‘원리’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리카도(D. Ricardo), 밀(J.S. Mill), 마샬(A. Marshall)을 관통하는, 물리학의 뉴턴(I. Newton)에 필적하는‘권위’의 상징—그의 {프린키피아}를 떠올리라—이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그 어떠한 주요한 교과서 저자도 쓰기를 주저했던 일종의 ‘금기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맨큐의 ‘오만함’을 꼬집을 필요는 없다. 그가 위 책에서 내놓은 ‘경제학의 열 가지 기본 원리’는 이제 크리스트교의‘십계명’과 같은 권위로 자리를 잡아, 경제학의 신봉자든 비판자든 누구라도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위 책의 한글판 제목 {맨큐의 경제학}은 이런 의의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

경제학의 ‘원리’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도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맨큐의‘원리’는 그의 선배들이 내놓았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리카도나 밀에게 가장 중요한 원리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물질적 부, 즉 가치(value)의 본질/크기 및 생산/분배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경제학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두루 참조해야 했다.

반면 그런 원리들은 맨큐의 십계명엔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대체로 ‘모든 선택엔 대가가 따른다’, ‘교환은 교환당사자들을 이롭게 한다’ 따위의 인간의 사고와 행동 일반에 관한 매우 추상적인 성격의 명제들로 채워져 있다. 과연 이런 것들을 ‘경제학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우리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하다못해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니, 까놓고 말해, 대체 경제학은 무엇인가?

현재 이런 질문들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는 표제 아래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현실의 제국주의와 같이 경제학이 여타 사회과학의 고유영역들을 침범하고 나아가 자신의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경제학은 그 영역을 넓혀나갈 뿐 아니라 사회과학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국’ 건설을 꾀한다.

경제학: ‘제국적’ 학문?

경제학이 처음부터 제국주의적이진 않았다. 원래 그것은 사회의 특정한 성격의 문제들에 집중했다. 그것의 궁극적인 관심은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을 밝히고, 나아가 ‘정치가나 입법자’에게 통치와 관련된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A. Smith, {국부론} 참조). 훌륭한 경제학사가이기도 했던 마르크스(K. Marx)가 근대적인 과학적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았던 페티(W. Petty) 이래 로크(J. Locke), 흄(D. Hume), 스미스, 리카도, 밀 등은 모두 이런 의미에서의 ‘경제학’(political economy)을 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어? 로크가 경제학자야?’라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를 ‘경제학자’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가는 생각해볼 문제겠지만, 그가 꽤 심각한 경제학적 저작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만약 이들 중 몇몇이 경제학자보다는 역사가나 철학자 또는 포괄적 의미의 사상가라는 자격으로 우리에게 더 알려져 있다면, 이는 경제학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경제학은 사회의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면서도, 자신의 대상인 근대 자본주의 경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그것의 역사와 지리적 불균등 발전에 관한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조했고 온갖 사회적 결정인자들을 고려했다. 그러나 경제학이 당시 막 태동하던 여러 사회과학들의 성과를 존중심을 가지고 참조하기는 했어도 다른 사회과학들의 고유영역을 침해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사태를 반전시켜 경제학이 제국주의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일정한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변화의 추이를 최근 파인과 밀로나키스는 그들의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괴짜경제학으로}(B. Fine and D. Milonakis, From Economics Imperialism to Freakonomics, 2009)에서 ‘축소에서 팽창으로’(from reductionism to expansionism)라는 모토로 적절히 요약한 바 있다.

‘축소에서 팽창으로’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경제학이 다룰 문제도 늘어났지만, 다른 한편에선 경제학을 연역적 방법론과 현실의 추상을 통한 모형화에 입각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시키려는 시도도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경제학이 기존의 역사적/사회적 관심을 점차 내려놓는 방향으로 발달한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웠으며, 이런 움직임은 1870년대 ‘한계혁명’(marginal revolution)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제 사회적 생산과 분배에 상이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인간집단들을 칭했던 ‘계급’은 ‘최적화하는 개인’(the optimising individual)으로 대체되고, 여러 역사적/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복잡하게 규정된다고 여겨졌던 ‘경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상반되는 힘으로 구성되는 시장’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런 재편과정은 많은 반대와 유보조항들을 낳기도 했지만, 마침내 1930년대에 이르면 하이에크(F.A. Hayek)의 런던정경대(LSE) 동료 로빈스(L. Robbins)는 “경제학이란 인간행동을 목적과 다양한 용처가 있는 희소한 수단 사이의 관계로서 연구하는 학문이다”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정의 아래, 이제 경제학의 고전적인 주제들은 ‘경제사’, ‘경제철학’, ‘방법론’, ‘산업경제학’ 등의 이름을 갖는 여러 응용분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일단 경제학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리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정의된 이상, 그 응용분야가 경제학의 전통적 영역에 한정될 필요는 없었다. 즉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을 최소한도로 축소시키는 노력으로부터 ‘팽창주의’의 싹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팽창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인물이 베커(G. Becker)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선택’이 있는 곳엔 늘 ‘경제학’이 있으며, 일상의 그 어떤 사소한 행위들도 ‘경제학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경제학의 본령이라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폐허를 걷어내고

결국 맨큐의 십계명은 이와 같은 경제학의 변천사의 산물이다. 그것이 일러주는 대로 만약 경제학이 ‘선택’과 ‘교환’에 관한 학문이라면, 과연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이슈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인간들이 창출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선택’과 ‘교환’의 문제로 환원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사회적 삶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경제학이 사회과학에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회과학을, 우리가 사회과학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 실질적 내용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하게도 경제학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며, 맨큐의 원리들은 그 파괴상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범지구적 경제위기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경제학이 무능한 근원적인 이유다. [사족: 맨큐의 원리, 좀 더 일반적으로는 오늘날의 경제학을 비판할 때, 그것이 가정하는 ‘경제인homo economicus’, ‘합리성rationality‘ 등을 주된 과녁으로 삼곤 한다. 즉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은 그것이 비판하는 경제학만큼이나 자폐적이고 회의적으로 흐르거나(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 또는 그 반대의 극단 즉 지나친 낙관주의 내지는 주의주의로 흐르기 쉽다(인간은 생각보다 이타적이니 인간을 너무 얕보지 말자?). 진화/행동/신경/정보 등등이 붙은 다양한 ‘경제학들’이 그러하다. 하여간 이 얘긴 나중에 따로 한번 ‘제대로’ 해야 한다..]

요새 위와 같은 경제학의 무능 때문에, 나아가 그런 무능에도 불구하고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경제학의 뻔뻔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특히 학계에서조차도 反경제학적인 분위기가 크게 번지고 있는 것 같다. 경제학의 그간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생각하면 이러한 ‘주변부’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제국주의적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중심부의 노동자/민중과의 옹골찬 연대’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게 곧장 드러난다.

다시 말해, 현재 여러 사회과학 영역들에서 경제학의 파괴적인 영향들을 걷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학이 제 구실을 하도록 비판하고 독려하는 일도 긴요하단 얘기다. 즉 경제학은 그것이 응당 품어야 할 ‘진정한’ 원리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끝)

《이코노미스트》가 ‘경제학 제국주의’에 반대를?

만약 《The Economist》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 지금부터는 EI)에 반대한다면, 그건 아주 놀라운 일일 것이다. EI란, 마치 현실의 제국주의에서처럼,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의 사회과학 분야들의 고유의 영역들을 침범하는 것을 말한다.

아래 글은, 요즘 《The Economist》에서 야심차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운영중인 블로그 중 하나에서 옮겨온 것이다(링크).

But I do think that this argument points to an overarching cultural trend, namely an increasing tendency to use the language of economics when talking about any social or political issue whatsoever [인용자: 이게 바로 ‘경제학 제국주의’다]. Over the past 15 years, a number of gifted popularisers of economics have helped show laymen how to think about a lot of disparate subjects using economic tools and styles of thought. Paul Krugman was among the first of these; he has been followed by Stephen Levitt, Charles Wheelan, Tim Harford, and many others. But it seems that when Mr Krugman started writing columns suggesting how to look at political and social issues from an economist’s perspective, he didn’t anticipate that people might decide that economic language and styles of thought are always the best way to think about everything.

와우… 재밌다. 여러모로.

첫째로, 위 구절에서 ‘EI’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의미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게 재밌다. 이는 매우 쉽게 EI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구절이 EI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도 재밌다. 저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바로 그는… EI를 일반화한 ‘주범’ 중 하나인 폴 크루그만(Paul Krugman)의 (매우 애매모호한) ‘진심’을 언급함으로써. 즉 PK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뭣도 모르는 ‘애들’이 PK를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이른바 ‘EI’라는 해괴한 습관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 블로그 포스트를 쓴 기자가 PK 말고 다른 저자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지도 매우 궁금하다. 위에서 언급되고 있는 스티븐 레빗, 팀 하포드, 찰스 휠란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경제학 저자들로, 각각 『괴짜경제학』 씨리즈, 『경제학 콘서트』 씨리즈, 『벌거벗은 경제학』 등을 냈다.

셋째로, EI에 대한 ‘비판’이 《The Economist》에 의해 위와 같이 비록 ‘제한적으로나마’ 나올 수 있다는 것도, 결국은 2007/08년 이후의 범세계적 위기의 결과일 것이라는 점도 재밌다.

원래 위 글은… “환자들은 소비자가 아니다”라는 크루그만의 4월21일자 칼럼에서 비롯된다(링크). 잘 알려져있다시피 크루그만은 미국 의료보험개혁에 매우 헌신적인 경제학자다. 이에 대해 앞서 인용한 《The Economist》 블로그의 한 저자가 논평을 했고(링크), 역시 같은 블로그의 다른 저자가 반론(위 인용부분이 속한 포스트)을 펴는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심심하신 분들은 처음부터 한번 쭈욱 훑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나도 예전에 이 블로그에 경제학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괴짜경제학』을 언급한 바 있다(링크1, 링크2).

[201010]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

한 대학 매체에 글을 하나 썼다. 원래 청탁받은 제목은 ‘경제학 제국주의의 첨병, 사회자본론’이었는데,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않은 사회자본론’이라는 제목이 더 큰 활자체로 덧붙어 있다. 나쁘지 않다.

원래 저쪽에 보낸 파일엔 각 내용단락 앞에 로마자 대문자로 수자를 붙여두었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니 그게 빠져 있다. 어떻게 인쇄되어 나갔는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인터넷에 있는 것은 조금 산만한 느낌이다. 물론 그건 애초에 내 잘못이기도 하다.

이 글은 <중대신문>에서 기획한, ‘사회적인 것’이 현재 사회과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현황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시리즈물 중 하나다. 여튼 사회학자도 아닌 내게 좋은 기회를 허락해 줘서 고맙다.

(참고로, 글 맨마지막에,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 수차례 소개하기도 했던 IIPPE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그냥 슬며시 암시를 주는 것에 그쳤다. 소심했나…)

*                         *                         *

I. 최근 영국에서는 보수당 출신의 데이빗 카메론 총리의 주도로 ‘big society’라는 것이―우리로 치면 ‘공정사회’와 같이―커다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카메론의 같은 당 대선배 마가렛 대처 전총리의 저 유명한 선언, 즉 “사회 따위는 없다”라는 선언과 재밌는 대비를 이룬다. 후자가 줄잡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한다면, 카메론의 최근 기획은 대처의 선언 이후 땅에 떨어졌던 ‘사회’의 권위를 적정 수준에서 바로 세워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위와 유사한 사태 전개를 지성의 영역에서도 볼 수 있다. 대처의 선언과 궤를 같이 해서 사회의 불가능성을 핵심 테제 중 하나로 삼는 포트스모던적 경향이 지성계를 휩쓸고 지나간 뒤,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사회’의 과잉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카메론의 ‘big society’라는 것이 결국은 개인들의 자조(自助)와 이웃 간의 친목 강화 등을 강조하는, 낡은 대처리즘에 새 옷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자본’이라는 개념도 그간 특히 여러 사회과학의 분과들이 경제학화(化)하는 과정에서 실추되었던 ‘사회적인 것’의 의의와 권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바로 그 경제학화의 새로운 방식으로 채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요컨대, 경제학이 그 특유의 방법론을 가지고 여타 사회과학 분과들의 영역을 침범하고 나아가 이를 자신의 발아래 복속시켜 나가는 현상을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고 부른다면,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그 제국주의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사회자본 개념이라는 얘기다.

II. 최근 사회과학은 그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정의되는 사회자본‘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다양한 정의들에서 공통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 자체다. 즉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다.” 더 많은 양질의 인간관계를 맺을수록 당신의 삶은 개선될 것이며, 따라서 이를테면 미국의 백인이 고도비만에 시달리는 것도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것도 모두 사회자본이 부족한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사회자본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마치 모든 사회적 이슈들의 해결책인 듯이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충분히 ‘사회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자본’도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이 개념은 여타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를 표상하지만 충분히 ‘경제(학)적’이지도 않고,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들에 걸쳐있지만 충분히 ‘사회(학)적’이지도 않다. 뿐만 아니라, 사회자본 개념은 특히 연구자들에게 묘한 안락함을 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자본 개념이 지금처럼 많이 쓰이기 전부터 꾸준히 그것을 비판해온 벤 파인(Ben Fine)이 자신의 최근 저작, <사회자본의 이론들>(Theories of Social Capital: Researchers Behaving Badly, 2010)의 부제목을 ‘불량하게 행동하는 연구자들’이라고 지은 까닭이다. 이제 그들은 역사, 계급, 전통, 관습,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적 토대(!)를 참조하지 않고도, 단지 ‘사회자본과 xx’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손쉽게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벤 파인의 이 책은 내년 중에 나의 번역으로 국내에 나올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

결국 만약 우리가 ‘사회적인 것’으로써 단순한 ‘인간관계’보다는 역사, 계급, 구조, 경제적 토대 등을 의미한다면, 사회자본 개념이 사회과학들에서 두루 융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과학이 타락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한 징후로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III. 사회자본은 비록 전통적으로 경제(학)적 의미의 자본이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항들을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소비되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이다. 따라서 그것은 태생적으로 사회과학들의 경제학화에 봉사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실현된 것은, 현대적 사회자본 논의의 원조로 꼽히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보다는 코울만(James Coleman)이나 퍼트남(Robert Putnam) 등을 거치면서였다. 특히 코울만은 원래 경제학에서 발달된 ‘합리적 선택’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던 사회학자, 말하자면 경제학 제국주의의 영역에서 ‘일제의 조선인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원래 경제학 제국주의란 사회과학의 분과체계가 형성되는 과정(1930년대 초)에서부터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현실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그 열렬한 옹호자가 있었는가하면 단호한 반대자도 있었다. 그 옹호논리라는 것도, 경제학 제국주의가 ‘계몽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이는 억제되기보다는 장려되어야 한다는, 현실의 제국주의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이를테면 파슨스(Talcott Parsons) 같은 인물이 있는데, 1930년대 경제학에 대해 사회학의 고유의 영역을 확립하려던 그의 노력을 최근 저프 호지슨(Jeoff Hodgson)은 <어쩌다 경제학은 역사를 잊어버렸는가>(How Economics Forgot History: The Problem of Historical Specificity in Social Science, 2001)에서 ‘경제학 제국주의에 맞선 해방투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학 제국주의가 진정으로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개리 베커(Gary Becker)를 통해서였다. 기본적으로 그는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관한 것으로, 즉 합리적 개인의 효용극대화라는 문제로 변환시켜 경제학에서 적용된 수리적 방법에 따라 그것에 접근한다는 전략을 취했다. 최근 공전의 히트를 친 <괴짜경제학> 저자들의 “그 어떤 주제도 경제학의 범위 너머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도 이런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괴짜경제학>의 무분별한 유행은 경계심을 가지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책이 심지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점은 크게 걱정스럽다. 언젠가 본격적인 비판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와 같은 베커의 경제학 제국주의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우리도 지난 1997-98년에 겪었듯이, 신자유주의란 세계 모든 나라에 시장만능주의적인 단일 모델에 입각한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친 재구조화 프로젝트였음을 떠올려보라.

IV. 그렇다면 경제학 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회자본과 연결되는가? 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장의 실패’ 사례가 빈번해짐에 따라 경제학 제국주의가 자체변모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과 관계가 깊다. 요컨대, 경제학 제국주의가 지금까지는 경제학의 방법으로 여타 사회과학들을 무지막지하게 식민화해왔다면, 이제 그것은 자신의 한계(‘시장 실패’)를 인정하고 그런 한계가 드러나는 곳, 말하자면 시장이나 가격이 아니라 역사, 전통, 관습, 계급, 경제적 토대 등의 고찰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지점들을 ‘사회자본’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채워버렸다는 것이다.

V. 기실 경제학은 그 자신의 편협한 방법론과 시야로 사회과학 전체에 걸친 하나의 제국을 형성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사회자본 개념은 최근 그런 야심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만약 경제학 제국주의와 사회자본이 사회과학 전체를 타락시키고 있다면 이에 대한 저항도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저항이란, 현실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그렇듯 단순히 민족주의에 그쳐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단 하나의 분과학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만약 이 저항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의 복원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들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끝)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2)

III. 경제학의 위기: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정치경제학으로

경제위기라는 것이 실은 그 전부터 장기간 누적되어 온 경제의 모순들의 일시적인 폭발이듯이, 경제위기를 통해 드러나는 경제학의 위기, 그리고 뒤이어 그 위기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되는 경제학 개혁을 위한 청사진들도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된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따라서 IIPPE를 포함한 현재 진행중인 경제학 개혁을 위한 프로젝트들을 볼 때, 이 각각의 입장들이 자신들이 내세우는 개혁을 필연적이게끔 만드는 경제학의 고질적인 병폐로 무엇을 꼽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1. 경제학의 위기에서 사회과학의 위기로: 경제학 제국주의

IIPPE가 현재의 (주류)경제학에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경제학 제국주의’(economics imperialism)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이는 간단히 말해 경제학이 자신이 그 대상을 대하는 특유의 방식을 여타 사회과학들에 퍼뜨림으로써 그들을 ‘식민화’하고 있음을 일컫는 개념으로, 언뜻 봐서는 경제학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닌 것도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경제학의 위기를 그것이 처한 좀 더 폭넓고 역사적인 지적 맥락 안에서 파악하고 그 해결을 구하는 발본적인 성격의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근대 분과학문 체계 안에서 편협하게 정의된 ‘경제’라는 영역―이에 대응해 그만큼 편협하게 정의된 ‘정치’, ‘사회’, ‘역사’ 등과 구별되는―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반영하기도 한다. 즉 경제학 제국주의를 통해 IIPPE는 경제학의 위기를 사회과학 전체의 위기로 파악하는 셈이며, 바로 여기에 경제학의 위기에 대한 다른 대안적 접근들에 비해 IIPPE가 갖는 차별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고전정치경제학’(classical political economy)의 시대엔 (정치)경제학이 어느 정도 학제의 모습을 갖춘 거의 유일한 ‘사회과학’이었다. [흔히 ‘고전정치경제학’이라는 용어를 마르크스가 고안했다고 하는데, 그에 따르면 그것은 스미스(Adam Smith)에 의해 집대성되고 리카도(David Ricardo)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이후 쇠락—마르크스의 용어로는 ‘속류화’—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보다 일반적으로 ‘고전정치경제학’은 대체로 밀(John Stuart Mill)까지를 포괄한다.] 따라서 ‘경제학 제국주의’란 적어도 두 가지 운동을 전제한다고 봐야 한다. 즉 실질적인 ‘식민화’의 과정이 시작될 수 있으려면 먼저 경제학은 여타의 사회과학들과 구분되도록 그 자신을 하나의 특수자로 정립시켜야 한단 얘기다. 바로 이와 같이 시간차를 둔 두 가지 운동이, IIPPE의 주요 멤버인 밀로나키스(Dimitris Milonakis)와 파인이 최근에 공동으로 낸 《정치경제학에서 경제학으로: 경제이론의 발달에서 방법과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의 행방을 중심으로》(From Political Economy to Economics: Method, the Social and the Historical in the Evolution of Economic Theory, 2008) 및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괴짜경제학으로: 경제학과 다른 사회과학들 사이의 경계이동》(From Economics Imperialism to Freakonomics: The Shifting Boundaries between Economics and Other Social Sciences, 2009)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책은 최근 비주류경제학 및 비판적 사회과학 분야의 권위있는 상을 연달아 수상한 바 있다. 즉 전자는 2009년도 군나르 뮈르달 상(Gunnar Myrdal Prize)을, 후자는 같은 연도 아이작/타마라 도이처 상(Isaac and Tamara Deutscher Memorial Prize)을 받았다. 이는 저자들의 개인적인 영광이라기보다는 현재 IIPPE와 같은 기획이 얼마나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지를 방증(傍證)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요컨대 경제학 제국주의가 문제인 것은, 이미 그런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경제학 내부에서는 그 대상이 되는 사태를 바라보는 매우 편협한 안목과 방법론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학문분야로서의 ‘경제학’이 성립되는 과정, 밀로나키스와 파인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이 ‘경제학’으로 변모되는 과정과 일치하는데,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개입된다. 첫째, 그 자체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학일 수밖에 없는 경제학이 ‘사회적인 것’ 및 ‘역사적인 것’과 절연함으로써 자신의 대상을 크게 제한시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제 경제학이 다루는 효용, 초기부존자원(endowments), 투입물, 산출물, 생산함수 등은 시간, 공간, 맥락 등으로부터 유리된 보편적인 범주로 재구성된다. 역설적인 사실은, 이런 축소―“사회적인 것에서 개체적인 것으로, 그리고 인간행위에서 효용극대화로”(Fine, 2000, p. 12)―의 과정에서 경제학은 동시에 ‘보편과학’으로 설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는 것인데, 덕분에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경제학이 응용될 수 있는 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된다. 둘째, 경제학은 이렇게 재정의된 범주들을 다루기에 알맞은 독특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이는 곧 “반증가능성(또는 통계학적 방법을 통한 경험증거와의 근사성), 추상적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공리적 연역, 특수한 종류의 방법론적 개체주의(효용극대화), [다양한 주체/행위들을] 한데 얽는 개념으로서의 균형(과 효율성) 등에 대한 집착”에 다름 아니다(Milonakis and Fine, 2008, p. 5). 결국 어림잡아 1870년대의 ‘한계혁명’(marginalist revolution)에서부터 수학적•통계학적 기법들이 마침내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 제2차세계대전 직후 약 10여 년 동안의 형식주의(formalist) 혁명, 케인스의 《일반이론》 출판(1936년)보다 훨씬 뒤에 이뤄진 케인스주의 혁명,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통화주의 반혁명 등을 거치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앞서 제시한 특징들을 공고히 하면서, 심지어 거의 모든 ‘거시’경제학적 이슈들을 ‘미시’적 기초라는 이름으로 해소시키면서, 경제학은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모습을 차츰 띠어갔다.

이렇게 경제학이 스스로 ‘경제’라고 규정한 매우 협소한 지반 위에서 하나의 보편과학의 면모를 갖춰가는 동안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도 각각 나름의 지적 전통과 자원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경제학 제국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을 따지자면 경제학 제국주의는 193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Swedberg, 1990), 그것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은 잘 알려졌다시피 게리 베커(Gary S. Becker)를 통해서다.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눈으로 교육, 가족, 범죄 등과 같은 전통적으로는 비경제적 문제로 여겨지던 것들을 해석한다.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는 “합리적 선택이 나타나는 곳이라면 경제학 바깥에서도 크게 번성했고, 베커에게 있어 합리적 선택이란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경제적 접근을 의미한다”(파인, 2006[2004], 400쪽). 한편 경제학 제국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옹호로는 Lazear(2000)을 볼 수 있다.] 파인이 ‘낡은’ 제국주의 경제학이라 부르는 이 경향은 그러나 그것이 의도하는 것만큼 큰 재미를 보지는 못한다. 개별 이슈들을 경제학적으로, 즉 효용을 극대화하는 개별주체들의 행위를 통해 균형에 도달한다는 ‘시장 과정’의 결과로 해석하고 의미부여하는 것이 말로야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경제학의 방법과 기법의 낯섦은 그것이 여타 사회과학들이 다루는 문제들―본질적으로 ‘사회적’인―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난점을 해결해준 것이 대체로 20여 년 전부터 본격 등장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다. 물론 이것은 단지 경제학과 여타 사회과학들의 간의 관계에 대한 것만은 아니며, 경제학 내부의, 나아가 경제 자체의 좀 더 본질적인 전환을 반영한다. 파인(Fine, 2000; 2008; 파인, 2006[2004])에 따르면, 과거 경제학 제국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신고전파 경제학이 대체로 완전한 시장 및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철두철미한 믿음에 기반했으며, 때문에 그런 믿음 또는 가정에 부합하지 않는 현상들을 다루는 데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반면, 최근엔 정보 비대칭성과 시장 불완전성을 수용하는 움직임이 경제학 내부에서 서서히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학은 ‘거시적’ 내지는 ‘사회적’ 현상들의 ‘미시적 기초/동기’를 강조하는 태도를 계속해서 견지하면서도 “정보의 비대칭성 및 불완전성을 끌어들임으로써 왜 시장이 때로는 파레토 효율적인 수준에서 청산되는지, 왜 때로는 청산되지 않는지, 나아가 왜 어떤 때는 시장이 아예 형성되지조차 않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Fine, 2000, p. 14).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다. Fine(2010) 참조. (국제)개발(development)이라는 측면에서 스티글리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으로는 Fine and Waeyenberge(2006) 참조.] 결과적으로,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에서는 다루기 어려웠던 제도•관습•문화 등은 이제 “시장 불완정성에 대한 이성적•비시장적 반응, 심지어 집합적 반응”으로 이해되고,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는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보다 한 단계 높은, 그것을 넘어서는 두 가지 과업을 성취해 낸다. 첫째, 그것은 비경제적인 것, 비시장적인 것, 또는 사회적인 것의 특수성을 인정한다. 둘째, 비록 그것이 여전히 방법론적 개인주의(효용 극대화 형태의 합리적 선택)에 의존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사회이론의 언어와 개념을 기꺼이 빌려오고 변용하고자 한다(파인, 2006[2004], 401쪽).

사태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로의 이행은 신자유주의의 첫 번째 국면에서 두 번째 국면으로의 전환을 나타낸다. 그 첫 번째 국면에서 신자유주의란 시장에 대한 맹신을 기반으로 국가가 사적 자본과 시장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체제였고, 그렇게 해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이 바로 금융부문이었다. 범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이런 정책은 주로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의 ‘원조’ 정책을 통해 전세계로 확산되었으며, 그로부터 빚어진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지난 30여 년 동안 목격해왔다. 현재의 범지구적 경제위기는 바로 그 최신의 형태다.

신자유주의의 두 번째 국면이란, 바로 이렇게 그 스스로 만들어낸 파괴적인 결과들을 자체 내에서 교정하고자 하는, 즉 “제3의 길(Third Wayism)이나 사회적 시장 따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반동”을 가리킨다.

첫 번째 국면이 국가가 시장을 통해, 특히 금융시장을 자유화함으로써 특정 이해관계를 북돋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국면에서는 이와 같은 충격요법의 결과 및 그것이 지속될 수 있도록 [국가가] 꾸준히 개입하는 데 따른 결과를 개선시킬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하여 원칙상 강조점은 어떻게 하면 시장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들 것이냐에 두어진다(Fine, 2008, p. 13).

이리하여 신자유주의적 경제 또는 경제학은 전보다 훨씬 더 ‘사회적인’ 색조를 띠게 되고, 그것이 앞서 묘사한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와 겹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시장 및 경제적인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그리하여 비시장적인 것, 비경제적인 것으로써 보완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 어떤 장막이 그 새로운 경제학 제국주의가 본래 합리적 선택 접근에 의존하고 있음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불완전 정보를 일종의 분석적 도구로 인식함으로써 낡은 경제학 제국주의가 제한적으로만 수정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직 이 점만 가지고 보더라도, 합리적으로 결합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범위가 크게 증가한다. …… 비대칭적 정보라는 새로운 어휘는 베커식의 기발함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new) 장(場)을 열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파인, 2006[2004], 401-2쪽).

따라서 최근 경제학이 그 내부에서뿐 아니라 특히 다른 학제와 맞닿은 경계에서, 즉 신성장이론, 신무역이론, 신경제사회학, 신제도경제학, 신복지경제학, 신정치경제학, 신경제지리학, 신개발경제학, 신가계경제학, 신노동경제학, 신금융경제학, 신경제사 등 각종 ‘새로운’ 이름으로 발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양상이야말로 경제학 제국주의가 띠고 있는 현재 형태다.

이 대목에서, 2005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어 2009년 말까지 세계적으로 400만부 이상이 팔렸다는 《괴짜경제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저자들은 “현대 사회의 삶의 표층을 벗겨내어 그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 자기들의 목적이라면서 “그 어떤 주제도 경제학의 범위 너머에 위치할 필요가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한다(레빗•더브너, 2007[2006], 29, 32쪽). 그러나 파인에 따르면 이는 그가 좀비경제학(Zombieeconomics)이라 부르는 것이 띠는 가장 대중적 형태일 뿐이다.

이런 접근은, 결코 도전받지 않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가장 좁아터진 기술적 도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의 역사는 물론 자신의 방법론 및 그에 대한 대안들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대안들을 비과학적이고 엄밀성이 결여되었다며 내치는 것 외에는 그것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 죽은(dead) 것이나 다름 없다. 여기엔 범지구화(globalisation)와 같은 체계(system)에 관한 개념, 권력과 갈등에 관한 개념이 없으며, 경로의존성, 초기조건, 여러 모델들과 균형들 사이의 선택 등을 정의하는 것 외에는 역사적•사회적 특수성에 관련된 분석범주들의 의미를 이해하려고도 않는다(Fine, 2008, p. 14). [그러나 동시에] 그와 경합하는 관계에 있는 패러다임들을 배제하고 흡수함으로써 공격적이고 노골적으로 …… 자신의 영역과 소재를 점취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독성으로] 감염시킴으로써 …… 자신과 같은 성질의 존재로 뒤바꿔버릴 여타 학문분야들의 육체를 끊임없이 갈구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살아있다(alive)(Fine, 2009, p. 888).

좀비―그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죽었으면서도 끊임없이 살아있는 육체에 붙어 그 생명력을 빨아먹는, 그러면서 그것이 손대는 것마다 자기와 마찬가지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 이렇게 좀비와 같은 경제학은 그 스스로 전통적으로 다뤄왔던 대상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것이 새로 받아들인 대상들에 대해서도 무기력하기만 할 뿐이다. (계속)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1)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2)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3)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4)

IIPPE: 경제학을 넘어 사회과학의 재편으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