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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3/끝) 공공요금에서 나타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 썼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어차피 공공요금의 등락—생필품의 가격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은 임금에 100%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든 내리든 노동자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링크).
  2. ‘가치’와 ‘가격’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가치’는 여타의 상품들과 다름없이 결정되지만 그 ‘가격’은 이윤을 포함하지 않는 수준에서(=원가 수준에서) 결정될 수 있다(링크).

이제까지의 내용은 어쩌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별다른 이의도 없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제 위 내용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조금 더 진행해보겠다.

5. 낮은 공공요금이 ‘공공성’인가?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서 시작해보자. 두 번째 글에서 나는 공공요금의 가격은 그 가치에 비해 낮게 설정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경우에 가치와 가격을 구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공공요금은 원가 수준에서 책정된다’라는 정도로만 말할 뿐이다(거듭 밝히지만, 여기서 ‘원가’는 추상적으로 쓴 말이며, 실제로는 공공요금은 원가뿐 아니라 일정한 이윤—인구증가, 시설개선필요 등에 대응해 필요한 일정한 축적을 위한—을 포함한다).

내 개인적 경험과 짧은 독서 등을 바탕으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논리다:

  • 공공요금은 이윤 없이 원가 수준에서 책정되며, 그리하여 공공재화/서비스는 싼값에 대중들에게 공급될 수 있다. —> 이것이 ‘공공부문’이 담보하는 ‘공공성’이다.
  • 위와 같은 이유로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 —> 민영화가 이뤄지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폭등할 것이다.

일단 이제까지의 논의로부터, 공공부문이 민영화되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가 민간 자본에 의해 공급되면 가격이 급등할 것임은 쉽게 도출된다. 이제 가격이 ‘이윤’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재화/서비스가 싼값에 공급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조금 심각하게 말하면, 그러한 논리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에 근거해 있다. 임금이란 고정된 크기가 아니며, 사회적 배경,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양이다. 그저 개별 노동자/자본가 차원에서나 고정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임금을 고정된 크기로, 그리고 ‘분배’ 범주인 임금을 ‘생산’과 같은 경제의 여타 영역과는 무관한 크기로, 그리하여 노동자의 ‘자산’으로 다루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런 태도에 입각해, 많은 이들은 저가격이 노동자에게 이롭다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대로,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이 낮아지면 임금도 낮아진다. 거꾸로 그 가격이 오르면 결국 임금도 오르지 않을 수 없다(즉 가격수준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삶의 수준과 무관한 것이다). 물론 공공요금 인상을 부분적으로만 보전할 정도로만 임금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해당 시기의 노자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는 이를 ‘노동력 가치’ 자체의 저하 증거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6. 공공부문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잉여’의 행방.

낮은 공공요금이 노동자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저물가’ 일반과 관련해 지적했듯이(‘저물가’는 노동자/서민에게 이로운가), 낮은 공공요금은 다름아닌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런데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일반 상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욱 심각한 방식으로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왜 ‘더욱 심각한’ 방식인가? 보통의 경우 저물가, 정확히는 생활필수품목의 저물가는 그런 품목들을 생산하는 부문을 일정하게 희생시켜 여타 자본가들을 이롭게 한다. 물론 이는 생활필수품목을 생산하는 부문 자본가들의 저항을 일정하게 불러올 텐데, 이를 잠재우기 위해 국가는 그들에게 일정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정부의 ‘저물가 정책’은 대체로 비자본부문(농업)이나 해외부문,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영세부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통의 저물가의 효과가 ‘경제 내부의’ 일정한 역학관계 속에서 (+)와 (–)가 교차하면서 관철되는 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그것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했지만 그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은 ‘사회적 잉여’가 자본가계급 전체에게 분산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즉 전자가 일정하게 자본 내부의 갈등(즉 필수품 생산자본 v. 그 외 부문의 자본)을 수반하는 반면 후자에서 자본은 전적으로 단일한 이해관계(즉 ‘무조건’ 낮은 공공요금!)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윗단락에서 말한 ‘사회적 잉여’가 뭐였던가. 그것은 공공부문에서 분명히 생산되었는데, 그 까닭은 공공부문도 타 생산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격의 책정에 있어서는 고려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생산자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의해 추동되는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공부문에서는 타 자본부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저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공공부문의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저가격을 통해서 실제로 이뤄지는 일이란, 공공부문에서 생산되었지만 그 생산물의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았던 ‘사회적 잉여’가 노동자/서민대중이 아닌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즉 ‘낮은 공공요금’이란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핵심 고리인 셈이고, 여기에 있어서 모든 자본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쯤 되면, 흔히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담보되는 공공성이란 결국 ‘자본의 공공성’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7. ‘자본의 공공성’에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정도로 ‘자본의 공공성’이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는 곧 예의 그 ‘사회적 잉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따라오신 분들은,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을 그 ‘가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됨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즉 공공부문에서 생산된 ‘사회적 잉여’를 자본에게 내어주지 말고, 이를 가격에 산입시켜 국가가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때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종전의 원가수준에서 크게 오르지 않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그 ‘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하게 될 것이며, 노동자의 임금 또한 공공요금 인상에 발맞춰 오르지 않을 수 없다(이것이 곧장 노동자의 삶의 수준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끝으로, 국가는 마치 자본이 잉여가치(=이윤)을 획득하듯이 ‘사회적 잉여’를 획득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자본주의 국가가 스스로 나서서 추진할 리도 없지만, 그런 시도가 있을 때 자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그런 일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감행하고, 나아가 자본으로부터 제기되는 엄청난 저항을 이겨낼 수 있으려면, 강력한 대중의 힘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국가가 단순한 ‘자본주의 국가’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사전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어떤 이행기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국가권력 형태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비자본주의적/이행기적/사회주의적 국가’의 중요한 차이점이 구성된다. 이상의 표현을 빌어 쓰면, 전자는 ‘자본의 공공성’을 지키고 후자는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을 지킨다는 것.

그러나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자본에게 흩뿌려질 ‘사회적 잉여’를 공공요금을 높임으로써 국가가 확보해낸다고 해서 저절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그 어떤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자본에 내주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서민대중을 위해, 또는 실질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섣부르게 그러한 잉여로써 ‘복지’를 한다고 나섰다가는 결과적으로 자본을 위한 비용충당책으로 전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는 현재의 박근혜정권이 고려할 법한 사항이다). 이럴 경우엔 임금수준이 하락(복지—>임금하락)하지 못하게 만들 강력하고 실효적인 자본 압박수단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러한 잉여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자본의 활동영역을 장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주요한 기업들과 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

이렇게 보면, 공공기관(이 표현이 어색하다면 ‘공기업’ 또는 ‘국영기업’이라고 해도 좋다)이란 노동자/서민대중이 이행기적인 형태의 국가형태를 통하여 이행의 물적 근거(=‘총알’)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것은 오로지 ‘자본을 위한 공공성’에 복무할 뿐이다. 낮은 공공요금이란 바로 그러한 ‘가짜 공공성’이 관철되는 핵심 통로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기관이 내포한 모순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늘 현실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이 ‘낮은 공공요금’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으니 말이다.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노동자와 서민대중을 위한 ‘진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게 하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가열찬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필요하다.

(끝)

[사족 1] 끝부분에서 국유화 얘길 했는데, 그건 그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위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 내가 위에서 ‘사회적 잉여’라고 부른 것이 공공부문에서 실제로 생산된다는 점, 그리고 (2) 그것의 ‘의식적 처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의식 아래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은 것이고. 다시 말해, ‘사회적 잉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의 문제—국유화, 복지 등등—는 위 글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당연히 누구든 이 대목에서 과거 소비에트 등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고는 곧장 ‘국유화’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낼 필요까지는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역사적 경험 내지는 얄팍한 역사지식을 절대화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니까.

[사족 2]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공공부문, 공공기관, 공공요금 등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참세상’에 나오는 기사들이나(http://newscham.net) ‘사회공공연구소’에서 나오는 보고서 등을 참조하세요(http://ppip.or.kr/).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2) 공공요금의 ‘가격’으로서의 특수성

시간이 없어 다 못 썼는데, 앞의 글의 논지는 저번에 썼던 물가에 관한 글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공공요금’에 대한 것. 그래서 일반적인 상품(가격)의 경우와는 상이한 분석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계속한다.

(혹시 헷깔리는 분들을 위해 쓰면… 내가 여기서 공공요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도요금이나 전기요금, 버스요금 등을 말한다. 이렇게 수도/전기/가스/대중교통 등의 공공재화/서비스는 ‘공공기관’에 의해 공급된다. 흔히 ‘공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공기관의 일종이며,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여 개의 공공기관이 지정되어 있다. ‘공공기관’과 각종 관공서, 정부기관들을 합쳐 ‘공공부문’이라고 한다.)

3. 상품의 가치: 공공재화/서비스의 특수성.

3-1. 보통 상품의 가격은 ‘원가+이윤’으로 이뤄진다. 고전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 한 상품의 가치 = 불변자본 + 가변자본 + 잉여가치

라는 공식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가치’와 ‘가격’ 간의 불일치는 무시하자. 여기서 불변자본이란 상품 생산에 필요한 각종 원료와 반제품, 기계와 설비 등의 가격 총합이고, 가변자본은 곧 임금이다. 결국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원가’라고 하는 것이 곧 ‘불변자본 + 가변자본’인 셈이다. 그렇다면 ‘잉여가치’가 곧 ‘이윤’인데, 보통 경제학에서는 ‘이윤’이 자본가의 수고에 대한 대가 등으로 이해되는 반면,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잉여가치’란 노동자가 행한 노동 중에서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부분, 즉 ‘잉여노동’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잉여가치의 존재가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들과 구별시켜주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잉여가치의 발생 가능성은,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시간’과 ‘거기에서 소비된 노동력의 회복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데서 이미 주어진다. 다시 말해, 내가 책상을 만들기 위해 8시간을 일했다 해서, 책상제작에 쓰인 노동력의 회복(=재생산)에 필요한 샌드위치를 생산하는 데 8시간이 들어갈 필요는 없단 얘기다. 샌드위치 만드는 데는 기껏해야 4시간(곡물의 재배시간을 평균적으로 고려해서) 이상이 들진 않을 것. 따라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해 8시간을 부려먹은 뒤, 4시간짜리 샌드위치 하나만 던져줘도 이 세상이 돌아가는 데는 아무런 차질이 생기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둘 사이의 차액인 4시간을 자본가는 ‘공짜로’ 먹게 된다. 그게 ‘잉여가치’이고, 이는 ‘이윤’의 원천이다. 물론 노동자 쪽에서는 샌드위치는 4시간이면 만든다는 걸 알기에 자본가를 위해서 4시간 이상은 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조건—모든 생산수단이 자본가에게 집중되어 있다는—때문에 그는 자본가를 떠나서는 어떠한 생산활동도 할 수 없고, 따라서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자본가의 ‘부당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하루 노동시간(8시간) 중에서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시간(4시간)을 ‘필요노동시간’,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시간(4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루 노동시간 및 그것의 분할(필요+잉여)이 사회적으로 결정되어,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시점에는 하나의 ‘사회적 상수(constant)’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자본가와 이를 저지하려는 노동자 간의 투쟁(=계급투쟁)을 통해 하룻동안의 ‘표준노동시간’이 정해졌고, 그 분할비율 또한 이 투쟁의 결과로 사회 차원에서 시시각각 결정된다.

* 이와 같은 ‘사회적 상수’의 존재가 마르크스경제학을 ‘과학’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거들 중 하나다. 최근 Kenneth Rogoff와 Carmen Reinhart의 ‘실수’를 둘러싸고 말이 많은데(링크),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Samuel Brittan은 이와 관련, “경제학에는 ‘상수’로 취급될만한 ‘매직넘버’가 없다”라는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푸념을 인용하면서 ‘경제학의 비애’를 대변하기도 했다(링크). 그러나 마르크스에겐 그러한 ‘상수’가 분명 있으며, 그것은 물리학 등 자연과학에서의 상수와는 성격이 다르다.

3-2. 보통 상품의 가치(=가격)는 이상과 같은 원리로 결정된다. 하지만 국가나 각종 공공기관이 공급하는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도 그러할까?

여기서 우리가 고려할 점은, 일반적인 상품과는 달리 공공재화/서비스들은 통상적인 자본-임노동 관계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사실이다. 물론 공무원들이나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준공무원들도 일반적인 임금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받고, 그들과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시간동안 노동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거기엔 ‘자본가’가 없다. 그것이 중요한 차이다.

앞에서 책상의 예를 들었으니, 이를 계속 가지고 가 보자. 그리고 이번엔 그것이 자본이 아닌 국가에 의해 생산된다고 가정해보자. 생산의 조직자가 자본가에서 국가로 바뀐다고 해서 책상 하나를 생산하는 데 드는 원료/반제품/설비/기계 등의 양이나 종류가 달라질 리는 없다. 노동도 전과 같이 필요할 것이다. 필요노동시간이 4시간이라는 점도 바뀔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잉여노동시간은? 잉여가치는? 그렇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데, 왜냐하면 국가는 자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아니기에 국가는 잉여가치 획득을 목적으로 생산을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이 아니라 국가가 생산을 조직할 경우, 노동자는 잉여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가? 원칙상 그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원칙상으로는 노동시간도 4시간으로 줄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종전과 같은 양의 불변자본을 가동해서 종전과 같은 양의 사용가치를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8시간의 추가노동시간이 필요할 것이므로, 이제 책상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 두 사람의 노동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일반기업에서는 노동자들이 8시간 일하는데 공기업에서는 4시간만 일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이 자본주의 경제가 제대로 유지되겠는가? 공기업 노동자들도 일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8시간 일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책상 하나 만드는 데 1명이면 족하다. 물론 그는 일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8시간 일하고 4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샌드위치)만을 받을 것이다. 이럴 경우 문제는 보통의 경우라면 ‘잉여노동(시간)’이라고 불렸을 4시간의 행방이다. 일단, 공기업 노동자가 8시간 동안 일하고도 4시간분에 해당하는 가치액만을 임금으로 받았다면 분명 4시간의 ‘잉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자본가가 아니므로 그러한 잉여를 스스로 취해 개인적 치부에 쓰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잉여의 일부는 생산에 재투자돼 ‘확대재생산’의 재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종의) 축적은 국영기업에서도 필요할 것이지만, 국영기업의 목적은 잉여가치 획득이나 축적 그 자체가 아니고 대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므로 (예컨대 인구감소 등에 따라) 그러한 필요가 증가하지 않으면 투자를 늘릴 이유도 없다.

4. 공공요금의 결정원리.

결국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가치’는, 적어도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반적인 상품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즉 국가에 의해 생산된 책상이나 자본에 의해 생산된 책상이나 같은 크기의 가치를 갖는다.

  • 자본에 의해 생산된 책상 = 원료/설비 + 8시간 = 불변자본 + 가변자본(4시간) + 잉여가치(4시간)
  • 국가에 의해 생산된 책상 = 원료/설비 + 8시간 = 원료/설비 + 임금(4시간) + 4시간

그렇다면 가격은? 보통은 위에서 결정된 가치에 준해서 가격도 결정되겠지만,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원가’ 수준에서 가격이 결정될 수도 있다(즉 원료/설비 + 임금). 즉 자본이라면 생산의 목적일 잉여가치 획득이 국가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가격에 산입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종종 공공요금이 ‘원가’에도 못 미치는 일도 있겠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로 보자. 아니, 사실은 공기업에서도 기존설비의 보전이나 최소한의 재투자 등은 도외시할 수는 없으므로 가격이 원가보다는 조금 높은 게 보통이겠다. 이런 모든 사정들을 염두에 두면서도,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우리는 ‘공공요금=원가’라고 하자.

  • 국가에 의해 생산된 책상의 가격 = 원료/설비 + 임금(4시간)

한편 사정이 이렇다면, 공공요금도 일반적인 물가상승에 발맞춰 오르는 게 정상일 것이다. 앞의 글에서 살펴본 대로, 물가상승은 곧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상승이므로 이는 임금상승으로 반영되지 않을 수 없으며, 공공요금의 한 구성부분인 임금이 오르면 공공요금 자체도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석유 등의 원재료 가격상승도 공공요금 인상을 낳는 요인이다. (계속)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1) 공공요금, 과연 낮은 것이 좋은가?

저번에 ‘저물가정책은 곧 저임금정책’이라는 취지의 글을 하나 썼다(링크). 이 글은 그 후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좀 더 크고 일반적인 주제도 부분적으로 건드릴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글은, ‘공공요금’에 대한 것이다.

1. 공공요금, 낮게 유지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높이는 것이 좋은가?

정초부터 곳곳에서 공공요금 올린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공공기관(한전, 수자원공사, 철도공사 등)의 엄청난 부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낮은 공공요금이 이를 일으킨 주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보통 진보진영에서는 공공요금 인상에 부정적이지만, 이번엔 그것이 공공기관 부채 문제와 엮이면서, ‘공공요금 현실화(=인상)’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어쨌든 진보진영은 공공요금을 낮게 유지하는 것을 대체로 옹호해 왔고, 이는 그들의 ‘反 물가인상’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물가가 오르면 서민들의 삶이 고달파진다는 게 그 논리다.

반면 우리나라 공공요금이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비판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그러한 낮은 요금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전기나 물을 마구 사용한다는 얘기도 심심치않게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내 경험에 비춰봐도 우리나라에서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이 낮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공공요금, 올려야 하나, 내려야 하나?

2. 공공요금이 높으냐 낮으냐는 노동자에게 아무 상관 없다.

공공요금이 뭔가? 수도요금, 전기세, 버스/지하철 등의 대중교통 요금 등을 말한다. 즉 누구나 삶을 살면서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필수적인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다. 필수품인 만큼, 그러한 재화나 서비스의 소비에 필요한 재원은 임금(=노동력 가치)의 일부를 이룬다. 따라서 (앞에서 물가 일반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공공요금이 높으냐 낮으냐는 노동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컨대 집에서 일터로 가기 위해선 버스를 타야만 하는 노동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일반적인 정의대로, 노동력 재생산비용에 해당하는 금액을 임금으로 받고 있다. 즉 이 금액에 단 1원이라도 못 미치는 금액을 받으면 곧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해져 정상적인 노동을 수행할 수 없단 뜻이다. 물론 그는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금액(=버스요금*승차회수)이 그의 임금엔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 버스요금이 두 배로 올랐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에 상응해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출근을 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출근을 하기 위해 다른 소비재원에서 자금을 끌어와 교통비로 쓰면 그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상적인 노동력 재생산, 생산활동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버스요금 상승분은 정확히 임금에 반영되어야 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간단히 중간결론을 내려 보면… 어차피 공공요금의 등락은 임금에 100%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든 내리든 노동자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가 되겠다(물론 지금 우리는 매우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이 공공요금 인상론이 대두될 때, 진보진영이 대개 그러듯이 이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고 굳이 주장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공공요금을 올려야 한다고 애써 주장할 이유도 없다(하지만 이후 논의에서 이런 당연해 보이는 명제 또한 반박될 것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는, 공공요금을 낮게 유지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위와 같이 정상적인 임금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이 사회에 만연해 있고, 그마저도 많은 실업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러니 정부로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원가보전도 못하는 낮은 수준에서 공공요금을 책정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당분간 우리는 논의를 추상화/단순화하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