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3/끝) 공공요금에서 나타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 썼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어차피 공공요금의 등락—생필품의 가격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은 임금에 100%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든 내리든 노동자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링크).
  2. ‘가치’와 ‘가격’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가치’는 여타의 상품들과 다름없이 결정되지만 그 ‘가격’은 이윤을 포함하지 않는 수준에서(=원가 수준에서) 결정될 수 있다(링크).

이제까지의 내용은 어쩌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별다른 이의도 없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제 위 내용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조금 더 진행해보겠다.

5. 낮은 공공요금이 ‘공공성’인가?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서 시작해보자. 두 번째 글에서 나는 공공요금의 가격은 그 가치에 비해 낮게 설정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경우에 가치와 가격을 구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공공요금은 원가 수준에서 책정된다’라는 정도로만 말할 뿐이다(거듭 밝히지만, 여기서 ‘원가’는 추상적으로 쓴 말이며, 실제로는 공공요금은 원가뿐 아니라 일정한 이윤—인구증가, 시설개선필요 등에 대응해 필요한 일정한 축적을 위한—을 포함한다).

내 개인적 경험과 짧은 독서 등을 바탕으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논리다:

  • 공공요금은 이윤 없이 원가 수준에서 책정되며, 그리하여 공공재화/서비스는 싼값에 대중들에게 공급될 수 있다. —> 이것이 ‘공공부문’이 담보하는 ‘공공성’이다.
  • 위와 같은 이유로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 —> 민영화가 이뤄지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폭등할 것이다.

일단 이제까지의 논의로부터, 공공부문이 민영화되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가 민간 자본에 의해 공급되면 가격이 급등할 것임은 쉽게 도출된다. 이제 가격이 ‘이윤’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재화/서비스가 싼값에 공급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조금 심각하게 말하면, 그러한 논리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에 근거해 있다. 임금이란 고정된 크기가 아니며, 사회적 배경,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양이다. 그저 개별 노동자/자본가 차원에서나 고정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임금을 고정된 크기로, 그리고 ‘분배’ 범주인 임금을 ‘생산’과 같은 경제의 여타 영역과는 무관한 크기로, 그리하여 노동자의 ‘자산’으로 다루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런 태도에 입각해, 많은 이들은 저가격이 노동자에게 이롭다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대로,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이 낮아지면 임금도 낮아진다. 거꾸로 그 가격이 오르면 결국 임금도 오르지 않을 수 없다(즉 가격수준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삶의 수준과 무관한 것이다). 물론 공공요금 인상을 부분적으로만 보전할 정도로만 임금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해당 시기의 노자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는 이를 ‘노동력 가치’ 자체의 저하 증거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6. 공공부문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잉여’의 행방.

낮은 공공요금이 노동자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저물가’ 일반과 관련해 지적했듯이(‘저물가’는 노동자/서민에게 이로운가), 낮은 공공요금은 다름아닌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런데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일반 상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욱 심각한 방식으로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왜 ‘더욱 심각한’ 방식인가? 보통의 경우 저물가, 정확히는 생활필수품목의 저물가는 그런 품목들을 생산하는 부문을 일정하게 희생시켜 여타 자본가들을 이롭게 한다. 물론 이는 생활필수품목을 생산하는 부문 자본가들의 저항을 일정하게 불러올 텐데, 이를 잠재우기 위해 국가는 그들에게 일정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정부의 ‘저물가 정책’은 대체로 비자본부문(농업)이나 해외부문,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영세부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통의 저물가의 효과가 ‘경제 내부의’ 일정한 역학관계 속에서 (+)와 (–)가 교차하면서 관철되는 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그것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했지만 그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은 ‘사회적 잉여’가 자본가계급 전체에게 분산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즉 전자가 일정하게 자본 내부의 갈등(즉 필수품 생산자본 v. 그 외 부문의 자본)을 수반하는 반면 후자에서 자본은 전적으로 단일한 이해관계(즉 ‘무조건’ 낮은 공공요금!)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윗단락에서 말한 ‘사회적 잉여’가 뭐였던가. 그것은 공공부문에서 분명히 생산되었는데, 그 까닭은 공공부문도 타 생산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격의 책정에 있어서는 고려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생산자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의해 추동되는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공부문에서는 타 자본부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저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공공부문의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저가격을 통해서 실제로 이뤄지는 일이란, 공공부문에서 생산되었지만 그 생산물의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았던 ‘사회적 잉여’가 노동자/서민대중이 아닌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즉 ‘낮은 공공요금’이란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핵심 고리인 셈이고, 여기에 있어서 모든 자본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쯤 되면, 흔히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담보되는 공공성이란 결국 ‘자본의 공공성’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7. ‘자본의 공공성’에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정도로 ‘자본의 공공성’이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는 곧 예의 그 ‘사회적 잉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따라오신 분들은,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을 그 ‘가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됨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즉 공공부문에서 생산된 ‘사회적 잉여’를 자본에게 내어주지 말고, 이를 가격에 산입시켜 국가가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때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종전의 원가수준에서 크게 오르지 않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그 ‘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하게 될 것이며, 노동자의 임금 또한 공공요금 인상에 발맞춰 오르지 않을 수 없다(이것이 곧장 노동자의 삶의 수준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끝으로, 국가는 마치 자본이 잉여가치(=이윤)을 획득하듯이 ‘사회적 잉여’를 획득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자본주의 국가가 스스로 나서서 추진할 리도 없지만, 그런 시도가 있을 때 자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그런 일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감행하고, 나아가 자본으로부터 제기되는 엄청난 저항을 이겨낼 수 있으려면, 강력한 대중의 힘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국가가 단순한 ‘자본주의 국가’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사전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어떤 이행기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국가권력 형태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비자본주의적/이행기적/사회주의적 국가’의 중요한 차이점이 구성된다. 이상의 표현을 빌어 쓰면, 전자는 ‘자본의 공공성’을 지키고 후자는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을 지킨다는 것.

그러나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자본에게 흩뿌려질 ‘사회적 잉여’를 공공요금을 높임으로써 국가가 확보해낸다고 해서 저절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그 어떤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자본에 내주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서민대중을 위해, 또는 실질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섣부르게 그러한 잉여로써 ‘복지’를 한다고 나섰다가는 결과적으로 자본을 위한 비용충당책으로 전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는 현재의 박근혜정권이 고려할 법한 사항이다). 이럴 경우엔 임금수준이 하락(복지—>임금하락)하지 못하게 만들 강력하고 실효적인 자본 압박수단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러한 잉여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자본의 활동영역을 장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주요한 기업들과 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

이렇게 보면, 공공기관(이 표현이 어색하다면 ‘공기업’ 또는 ‘국영기업’이라고 해도 좋다)이란 노동자/서민대중이 이행기적인 형태의 국가형태를 통하여 이행의 물적 근거(=‘총알’)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것은 오로지 ‘자본을 위한 공공성’에 복무할 뿐이다. 낮은 공공요금이란 바로 그러한 ‘가짜 공공성’이 관철되는 핵심 통로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기관이 내포한 모순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늘 현실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이 ‘낮은 공공요금’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으니 말이다.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노동자와 서민대중을 위한 ‘진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게 하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가열찬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필요하다.

(끝)

[사족 1] 끝부분에서 국유화 얘길 했는데, 그건 그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위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 내가 위에서 ‘사회적 잉여’라고 부른 것이 공공부문에서 실제로 생산된다는 점, 그리고 (2) 그것의 ‘의식적 처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의식 아래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은 것이고. 다시 말해, ‘사회적 잉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의 문제—국유화, 복지 등등—는 위 글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당연히 누구든 이 대목에서 과거 소비에트 등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고는 곧장 ‘국유화’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낼 필요까지는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역사적 경험 내지는 얄팍한 역사지식을 절대화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니까.

[사족 2]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공공부문, 공공기관, 공공요금 등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참세상’에 나오는 기사들이나(http://newscham.net) ‘사회공공연구소’에서 나오는 보고서 등을 참조하세요(http://ppi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