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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요금의 정치경제학 (3/끝) 공공요금에서 나타나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 썼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어차피 공공요금의 등락—생필품의 가격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은 임금에 100% 반영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르든 내리든 노동자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링크).
  2. ‘가치’와 ‘가격’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보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가치’는 여타의 상품들과 다름없이 결정되지만 그 ‘가격’은 이윤을 포함하지 않는 수준에서(=원가 수준에서) 결정될 수 있다(링크).

이제까지의 내용은 어쩌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적어도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별다른 이의도 없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제 위 내용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조금 더 진행해보겠다.

5. 낮은 공공요금이 ‘공공성’인가?

위에서 요약한 내용에서 시작해보자. 두 번째 글에서 나는 공공요금의 가격은 그 가치에 비해 낮게 설정된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경우에 가치와 가격을 구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공공요금은 원가 수준에서 책정된다’라는 정도로만 말할 뿐이다(거듭 밝히지만, 여기서 ‘원가’는 추상적으로 쓴 말이며, 실제로는 공공요금은 원가뿐 아니라 일정한 이윤—인구증가, 시설개선필요 등에 대응해 필요한 일정한 축적을 위한—을 포함한다).

내 개인적 경험과 짧은 독서 등을 바탕으로 요약하면 대충 이런 논리다:

  • 공공요금은 이윤 없이 원가 수준에서 책정되며, 그리하여 공공재화/서비스는 싼값에 대중들에게 공급될 수 있다. —> 이것이 ‘공공부문’이 담보하는 ‘공공성’이다.
  • 위와 같은 이유로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 —> 민영화가 이뤄지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폭등할 것이다.

일단 이제까지의 논의로부터, 공공부문이 민영화되어 기존의 공공재화/서비스가 민간 자본에 의해 공급되면 가격이 급등할 것임은 쉽게 도출된다. 이제 가격이 ‘이윤’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재화/서비스가 싼값에 공급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봐도 말이 안 된다. 조금 심각하게 말하면, 그러한 논리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에 근거해 있다. 임금이란 고정된 크기가 아니며, 사회적 배경,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양이다. 그저 개별 노동자/자본가 차원에서나 고정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임금을 고정된 크기로, 그리고 ‘분배’ 범주인 임금을 ‘생산’과 같은 경제의 여타 영역과는 무관한 크기로, 그리하여 노동자의 ‘자산’으로 다루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이런 태도에 입각해, 많은 이들은 저가격이 노동자에게 이롭다는 주장을 펼치곤 한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대로,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이 낮아지면 임금도 낮아진다. 거꾸로 그 가격이 오르면 결국 임금도 오르지 않을 수 없다(즉 가격수준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삶의 수준과 무관한 것이다). 물론 공공요금 인상을 부분적으로만 보전할 정도로만 임금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해당 시기의 노자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는 이를 ‘노동력 가치’ 자체의 저하 증거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6. 공공부문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잉여’의 행방.

낮은 공공요금이 노동자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다른 글에서 ‘저물가’ 일반과 관련해 지적했듯이(‘저물가’는 노동자/서민에게 이로운가), 낮은 공공요금은 다름아닌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런데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일반 상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더욱 심각한 방식으로 자본가에게 이롭다.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왜 ‘더욱 심각한’ 방식인가? 보통의 경우 저물가, 정확히는 생활필수품목의 저물가는 그런 품목들을 생산하는 부문을 일정하게 희생시켜 여타 자본가들을 이롭게 한다. 물론 이는 생활필수품목을 생산하는 부문 자본가들의 저항을 일정하게 불러올 텐데, 이를 잠재우기 위해 국가는 그들에게 일정한 ‘보조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실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정부의 ‘저물가 정책’은 대체로 비자본부문(농업)이나 해외부문,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영세부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통의 저물가의 효과가 ‘경제 내부의’ 일정한 역학관계 속에서 (+)와 (–)가 교차하면서 관철되는 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경우엔 그것의 생산과정에서 발생했지만 그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은 ‘사회적 잉여’가 자본가계급 전체에게 분산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즉 전자가 일정하게 자본 내부의 갈등(즉 필수품 생산자본 v. 그 외 부문의 자본)을 수반하는 반면 후자에서 자본은 전적으로 단일한 이해관계(즉 ‘무조건’ 낮은 공공요금!)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윗단락에서 말한 ‘사회적 잉여’가 뭐였던가. 그것은 공공부문에서 분명히 생산되었는데, 그 까닭은 공공부문도 타 생산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격의 책정에 있어서는 고려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공공재화/서비스의 생산자는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의해 추동되는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공공부문에서는 타 자본부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저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흔히 사람들이 공공부문의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주장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저가격을 통해서 실제로 이뤄지는 일이란, 공공부문에서 생산되었지만 그 생산물의 가격에는 산입되지 않았던 ‘사회적 잉여’가 노동자/서민대중이 아닌 바로 자본가의 주머니를 불리는 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즉 ‘낮은 공공요금’이란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핵심 고리인 셈이고, 여기에 있어서 모든 자본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쯤 되면, 흔히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담보되는 공공성이란 결국 ‘자본의 공공성’이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7. ‘자본의 공공성’에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 정도로 ‘자본의 공공성’이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으로 돌릴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이는 곧 예의 그 ‘사회적 잉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따라오신 분들은,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을 그 ‘가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됨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즉 공공부문에서 생산된 ‘사회적 잉여’를 자본에게 내어주지 말고, 이를 가격에 산입시켜 국가가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때 공공재화/서비스의 가격은 종전의 원가수준에서 크게 오르지 않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그 ‘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하게 될 것이며, 노동자의 임금 또한 공공요금 인상에 발맞춰 오르지 않을 수 없다(이것이 곧장 노동자의 삶의 수준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끝으로, 국가는 마치 자본이 잉여가치(=이윤)을 획득하듯이 ‘사회적 잉여’를 획득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자본주의 국가가 스스로 나서서 추진할 리도 없지만, 그런 시도가 있을 때 자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그런 일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감행하고, 나아가 자본으로부터 제기되는 엄청난 저항을 이겨낼 수 있으려면, 강력한 대중의 힘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국가가 단순한 ‘자본주의 국가’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사전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어떤 이행기적인 형태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서 국가권력 형태의 문제가 제기된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와 ‘비자본주의적/이행기적/사회주의적 국가’의 중요한 차이점이 구성된다. 이상의 표현을 빌어 쓰면, 전자는 ‘자본의 공공성’을 지키고 후자는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을 지킨다는 것.

그러나 낮은 공공요금을 통해 자본에게 흩뿌려질 ‘사회적 잉여’를 공공요금을 높임으로써 국가가 확보해낸다고 해서 저절로 ‘노동자/서민대중의 공공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그 어떤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자본에 내주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서민대중을 위해, 또는 실질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섣부르게 그러한 잉여로써 ‘복지’를 한다고 나섰다가는 결과적으로 자본을 위한 비용충당책으로 전락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는 현재의 박근혜정권이 고려할 법한 사항이다). 이럴 경우엔 임금수준이 하락(복지—>임금하락)하지 못하게 만들 강력하고 실효적인 자본 압박수단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러한 잉여의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자본의 활동영역을 장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주요한 기업들과 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

이렇게 보면, 공공기관(이 표현이 어색하다면 ‘공기업’ 또는 ‘국영기업’이라고 해도 좋다)이란 노동자/서민대중이 이행기적인 형태의 국가형태를 통하여 이행의 물적 근거(=‘총알’)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것은 오로지 ‘자본을 위한 공공성’에 복무할 뿐이다. 낮은 공공요금이란 바로 그러한 ‘가짜 공공성’이 관철되는 핵심 통로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하에서 공공기관이 내포한 모순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늘 현실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이 ‘낮은 공공요금’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으니 말이다.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노동자와 서민대중을 위한 ‘진짜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게 하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가열찬 ‘실천’은 말할 것도 없고—필요하다.

(끝)

[사족 1] 끝부분에서 국유화 얘길 했는데, 그건 그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위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 내가 위에서 ‘사회적 잉여’라고 부른 것이 공공부문에서 실제로 생산된다는 점, 그리고 (2) 그것의 ‘의식적 처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의식 아래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은 것이고. 다시 말해, ‘사회적 잉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분할 것이냐의 문제—국유화, 복지 등등—는 위 글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당연히 누구든 이 대목에서 과거 소비에트 등의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고는 곧장 ‘국유화’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낼 필요까지는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역사적 경험 내지는 얄팍한 역사지식을 절대화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니까.

[사족 2]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공공부문, 공공기관, 공공요금 등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참세상’에 나오는 기사들이나(http://newscham.net) ‘사회공공연구소’에서 나오는 보고서 등을 참조하세요(http://ppip.or.kr/).

“불법 다운로드”의 정치경제학? (2/끝)

4. 여기서 잠시.. “문화발전”이라는 이슈에 대해 한마디. 불법 다운로드를 권장하는 위 링크한 글은 물론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논지의 글들이 공통으로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게 바로 “문화발전”이다. 즉 “문화발전”을 위해 불법 다운로드를 하(지말)자는 것.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화발전”은 별로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 복잡한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거 하나만 내놓자면, 불법 다운로드를 하든 말든 어차피 문화는 발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MB가 대통령이 되고 유인촌이 문화부장관이 되었다고 문화가 발전하지 않는 게 아니다. 우파적인 문화? 돈이 몰리니 당연히 발전하겠지. 그렇다면 좌파적인 문화가 발전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반체제적이고 좌파적인 문화예술인들에게 정부의 지원이 줄었다고 그런 경향의 문화가 발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특정한”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피를 보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저 특정한 “문화예술인들”일 뿐이다. “문화예술”이 아니고 말이다.

5. 다시 앞서의 질문, 즉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과 자본 내부의 동학의 관계”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에 보통 어떤 답변이 던져질 수 있을까? 아마도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은 저간의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피해를 본 음반사들과 영화사들의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런 답변이 얼마나 타당할까?

(1) 기본적으로 다운로드 불법화가 그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본다고 여겨지는 음반사나 영화사(만)의 이익을 반영한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앞서 2와 3에서 지적한 대로, 그런 일부 자본분파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법제를 정비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일부 자본의 손해는 곧 다른 자본의 이익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이 가능성에 대해선 2의 말미에서 지적했다).

다시, “국가가 자본을 대변한다는 것은 자본이 노동/대중에 대립되는 한에서”라는 앞서의 명제를 떠올려보면,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도 그런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점점 디지털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노동자나 소비자로 드러나는 일반 대중들을 억압하고 규율함으로써 자본 일반의 이익에 봉사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좀 더 큰 차원에서의 지적재산권 강화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이런 억압과 규율화는 가장 보편적으로 말하면 “사유재산제도”라는 근대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를 통해 정당화되곤 한다. 즉 “다운로드는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여 보이는 대응은, 저들이 규정하는 “불법 다운로드”라는 것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이런 대응은, 지적재산권 강화 움직임에 저항하는 이들에게서도 흔히 관찰되는 태도다). 그리고 바로 그럼으로써, 현재 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들이 기반하고 있는 사유재산제도와도 제대로 부합하지 못할 정도로 엉터리라는 것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웃을 수 있게 된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앞서 링크한 기사에서 취해지고 있는 논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대응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글쓴이의 의도와 무관하게(!)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고 나아가 옹호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대응이 근대적 사유재산제도를 문제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잘 밝혔듯이, 사유재산제도란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할 지고지선의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적 지배관계–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논리로 봉사해왔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현재의 “불법 다운로드”의 경우에서도, 사적소유제도란 그저 “다른 어떤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채용되고 있을 뿐임을 간파할 수 있다.

(2) 그렇다면 그 “다른 어떤 상황”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본의 이윤추구와 관계가 깊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그것을, 음반/영화 자본의 이윤추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대답이다. 요새 다운로드 불법화에 앞장서고 있는 음반사들을 한번 떠올려보자. 국제적으로 보면 소니(Sony) 같은 회사가 있겠고, 국내에선 SM 엔터테인먼트 같은 회사가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회사들은 음반회사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라는 것이고, 특히 소니의 경우엔 각종 전자기기의 세계적 제조회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거두는 전체 이윤/매출 중에서 음반 등과 같이, 우리가 다운로드 함으로써 유출될 수도 있을 만한 부분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거나 적어도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둘만하다.

이렇게 음반판매로 거두는 이익/매출의 비중이 작아지는 것이, 저들의 주장대로 불법 다운로드 때문인지, 아니면 “불법 다운로드를 그 일부로 하는 어떤 거대한 변화” 때문인지에 대해선 좀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나는 그것이 대체로 후자와 관계가 깊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음반 다운로드를 통해 한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음반 구입에 지출하는 돈의 액수가 줄어들었을 수는 있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봐야 정확히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거의 명백하게 현실과 부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 개인이 일반적으로 말해 “엔터테인먼트”–애인이랑 커피숍 가서 라떼 마시는 따위의 행위들은 빼더라도–에 지출하는 돈의 액수까지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엔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서 집에서 흥얼거리며 듣는 것이 엔터테인먼트의 큰 부분을 차지했즐지 몰라도 이젠 더 이상 아니다. 음악 하나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듣기 위해”서만 소비하지 않는다. 핸드폰 컬러링으로 깔기도 하고,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쓰기도 한다. 물론 음악을 듣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주된” 취미활동도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음악보단 차라리 게임이 더 인기가 좋다. 다른 한편,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자전거 등을 포함한 각종 레저활동,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을 통해 퍼진 사진찍기 등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이들이 음악을 안 듣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 같이 심각하게 듣는 것은 아니며, 결정적으로 이들에겐, 게임기나 자전거 또는 거액의 디카를 사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따라서 이들에겐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이 제격인 것이며, 어떤 의미에선 “불법 다운로드한 음악”은 핸드폰에 딸린 부가기능이나 게임, 자전거나 디카 등을 제대로, 맘껏 즐기기 위한 “보완재”이자 “양념”이다.

이렇게 보면, 음반사나 영화사가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개피를 보고 있다는 주장은, 기껏해야 거대 언터테인먼트 자본의 엄살 섞인 우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을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추가적으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음악이나 영화 정도만 빼면, 이를테면 핸드폰 벨소리용 음악이나 미니홈피 배경용 음악, 아니면 게임용 시디 등등은 점점 더 불법 다운로드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려운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그냥 듣는 용도의 음악도 그렇다. 요새 누가 음악을 앨범 단위로 듣나? 기껏해야 한곡 두곡이고, 실은 앨범 자체가 싱글/미니앨범 위주로 나오고 있다. 이런 환경이라면, 더구나 모바일 환경이 점점 더 제대로 갖춰지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나 같으면 귀찮게 불법다운 받느니 500원 내고 내가 듣고싶은 곡 하나 합법적으로 다운 받겠다. 바로 이렇게, 불법 다운로드에는 이미 자본 스스로 잘 적응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자기들한테 유리한 방향으로–법 같은 거 필요 없이–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무슨 말이냐면, 싱글앨범 위주로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런 한 예다).

6. 그렇다면 자본은 지들 나름대로 잘 하고 있는데 왜 굳이 국가를 통한 “법제화” 즉 “다운로드 불법화”를 추진하는 것일까? 가장 쉽게 답하자면, 걔들은 원래 그러기 때문이다.

그렇다. 걔들은 원래 그런다. 원래 그렇게 욕심이 많다, 걔들은. 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답변할 꺼리들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의 “불법화” 움직임은, 일반적으로는 산업 전체, 특수하게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 격화를 반영한다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왜 굳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이 격화되는 것일까? 그야 사람들이 살만해지니까. 즉 그런 의미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경쟁 격화, 나아가 현재의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은, 현대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양식에 이는 거대한 변화를 반영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7. 이제 글을 끝내야겠다. 지금 며칠째 일을 죽어라 했더니 머릿속이 잘 정리가 안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긴 대충 다 한 것 같다.

끝내는 마당에 하나 더 덧붙일 이야기. 앞서 5-(2)에서 논했듯이… 이미 자본은 “불법 다운로드”와 상관없이, 또는 그에 대응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고, 또 그렇게 세운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척척 나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운로드 불법화”는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본을 위해 앞길을 닦아주기 위한 국가의 노력이기보다는, 이미 자본이 개고생하면서 닦아놓은 길을 국가가 사후 정비하고 확실하게 단도리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법이란 모든 과정을 사후추인해주고 명문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랜 명제를 떠올리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생각이 나는 게…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실천적인 함의도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이번 이슈와 같은 경우) 싸우려면 자본이랑 싸워야지, 국가랑 싸우려고 하면 이미 늦은 거라는? 이제 진짜 끝.

“불법 다운로드”의 정치경제학? (1)

1. 내 경우엔 영화보다는 음악을 미친듯이 다운로드해왔다. 처음엔 주된 소스가 pc통신 동호회였고, 나중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동안 화제였던 Napster 등을 이용하기도 했다. pc통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우누리로 입문해서 나중엔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 다 했다. 하지만 그 중 돈 내고 한 건 나우누리랑 유니텔뿐이고, 다른 둘은 이들이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더이상 유료회원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틈을 타서 (무료로) 조금 했을 뿐이다. 물론 순전히 음악파일 받으려고! (-_-)

요새 이와 같은 다운로드가 “불법”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이 많다. 특히 최근엔 정부와 여당을 중심으로 “불법화” 움직임이 매우 강하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반작용도 만만찮다. 아마도 그 “반작용”의 논리를 가장 재밌게 잘 담고 있는 것이 다음 기사가 아닐까 싶다. 이번 추석엔 ‘불법 다운로드’ 받으세요 (<참세상>, 2010. 9. 17).

하지만 과거 내가 거의 매일밤을 다운로드에 열올리고 있을 땐, 나는 내가 하는 짓이 불법인가 아닌가라는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니까 완전히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거다.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고, 죄책감도 없었으며, 그저 파일 올려주는 사람에게 고마웠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것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영역, 일종의 “무주공산”이 점점 더 국가와 자본의 매커니즘 아래로 편입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위에서 링크한 기사는, 단순하게 말하면, 한편으로는 이런 경향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이런 편입과정에서 국가/자본의 기존 질서와 새로운 영역을 지배하는 데 결부되는 질서 내지는 규칙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기도 함을 보여준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특히 국가는 그 새로운 영역과 관련된 법제를 마련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법제를 그와 모순되지 않게 정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일정한 한도 안에서 재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어떤 면에선 위의 사항보다 더 본질적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이라는 변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와 같은 국가의 재구성은 기본적으로 자본의 요구를 받아안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좀 더 복잡한 문제가 결부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로 이 “자본의 요구”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 둘째, 변화하는 상황에 맞서 자본은 국가에 요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상황에 적응하기도 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말해 자본의 요구가 단순하지 않은 까닭은, 당연하게도 자본–사회적 총자본–이라는 것이 그 내부에 다양한 분파들을 담고 있으며, 그들은 특정 이슈들에 대해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갖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산장수와 밀짚모자장수 사이의 대립을 떠올리면 쉽다. 이럴 경우 정부의 특정 정책은 어느 한 자본에는 (더) 유리하고 다른 자본에는 (더) 불리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두고서, 무조건 “국가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좀 단순한 거다.

둘째로 자본은 그 스스로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기도 한다. 재밌는 예는, 과거 pc통신 중에서 특히 유니텔의 경우 그 운영주체가 삼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나라에서 “자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저 삼성이라는 대재벌이, 한때는–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현재 그들이 정부와 입을 맞춰 “불법 다운로드”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을 단순히 방조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장했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땐, 음악이나 영화 파일을 다운로드 받는 행위를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것보다는 그런 행위를 조장함으로써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더 컸던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다운로드를 감히–또는 자기들도 캥겨서–불법으로 낙인찍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간에, 이는 자본이 상황에 스스로 적응하고 활로를 개척해 나간다는 좋은 예다. (굳이 여기서 하나 상기해볼만한 사실은, 삼성은 그저 대재벌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자신 음반사업과 영상사업도 했다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 국가가 자본을 대변하는 것은, 자본이 노동에,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대중”에 대립되는 한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자본 일반”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자본 내부의 경쟁과 구조조정 등과 관련된 세세한 동학이 국가 그 자체 또는 국가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둘이 서로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결국 무슨 얘기냐면, “자본 내부의 경쟁과 구조조정 등과 관련된 세세한 동학”과 “국가” 사이의 관계는 “자본 일반”과 “국가” 사이의 관계처럼 (대체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전자의 관계는 (대체로) 숨겨져 있으며 “과학”에 의해 파헤쳐지고 규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자본 내부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 문제는 그것보다도 더 복잡한 성격의 것이다. 즉 여기서는, “국가의 특정 정책은 ‘어떤’ 자본에 이롭고 또 ‘어떤’ 자본에 해롭다는 것이냐”라는 질문보다는, “대체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행위가 자본–자본 일반–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이 진정으로 중요하다. 다시 강조하자면, “현재 다운로드 불법화 움직임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자본 내부의 동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답변되어야 할 질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