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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혜노믹스’의 밑그림 (5) 우리가 어부지리로(?) 배운 값진 것

12. 지금까지 ‘근혜노믹스’의 특징을 ‘국민 행복’론에 기초를 둔 ‘개체’에의 강조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봤다. 씨리즈의 마지막인 이번엔, 바로 그러한 특성이 사실은 ‘근혜노믹스’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상지도에서는 ‘좌파’라고 흔히 불리는) 범중도파가 가진 ‘노믹스(들)’의 일반적 특징임을 보이겠다. 바로 이 점을 드러냈다는 것이, 박근혜의 당선과 집권이 범중도파를 포함한 (한국적) ‘범좌파’ 진영에 주는 가장 값진 교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범중도파의 ‘노믹스(들)’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를, 때로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으로, 때로는 ‘사회적 경제’나 ‘협동조합’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 어떤 것이라고 본다. 이는 이미 이명박 정부시절부터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운동 진영과 <한겨레> 등의 언론에 의해 적극적으로 옹호되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선전되었다. 즉 보수파들에게 ‘자본주의 4.0’과 ‘국민 행복’론이 있었다면 진보파들에겐 사회자본과 협동조합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치유하고 새로운 ‘상생’의 경제질서를 구축한다고 흔히 광고되곤 하는 사회자본과 협동조합도 현재 한국경제와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 위기의 심연을 가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며, 이런 한계는 좀 더 근본적으로 보면 사회자본론이나 협동조합론 또한 방법론적으로 ‘개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틀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13. ‘사회자본’ 개념이 신자유주의 시기에 그 위상이 추락한 ‘사회적인 것’을 복원하기보다는 주류 경제학이 자신의 방법론(개체주의individualism)을 여타 사회과학, 나아가 현실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는 원대한 기획을 내포한다는 얘기는 이미 나도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풀어낸 바 있다(예컨대 링크).

또한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최근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링크)의 한형식 부소장께서 좋은 논점을 제시해, 그간의 내 ‘심증’을 확증해주기도 했다. 먼저 그는 협동조합을 고정된 그 무엇으로 보는 말하자면 ‘협동조합 물신주의’를 거부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협동조합은 무엇이고, 또 어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옹호되는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한다(링크). 그에 따르면 오늘날 협동조합은 크게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는다. 첫째로, 그것은 한때 마르크스조차도 (제한적으로) 옹호했던 긍정성을 잃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라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는 “기존 협동조합의 실패 원인이 이윤을 사적으로 전유하지 못하게 하는 협동조합의 방식 때문”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반성에 따른 방향설정이다.

현재 옹호되고 있는 협동조합이 위와 같은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그간 막연하게 협동조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특징이 더 유의미하게 와닿는다. 즉 협동조합은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사회적 서비스를 국가와 시장 사이에 있는 시민사회가 제공하는 수단”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한 상황에 대응—‘순응’이라고 읽어야 한다/EM—하는 협동조합의 새로운 형태”로서, 한편으로 그것이 시장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한 그것은 시장을 보완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정부(여기에서는 서유럽 복지국가)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한 그것은 사회복지를 대체(‘정부의 외주화’/한형식)할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정부도 시장도 제 기능을 못하는 곳(예컨대 제3세계)에서는 협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적 형태가 정부와 시장을 동시에 대신할텐데(비근한 예로, 대안화폐가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더 성공적이라는 실증적 결과들을 들 수 있다), 이 경우엔 체제가 발달함에 따라 거꾸로 협동조합 등은 약육강식의 시장이나 권위주의적 정부로 대체될 것이다.

요컨대 어떤 경우에도 협동조합은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거나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제공하기는커녕 그것을 둘러싼 ‘구조’에 의해 규정될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그 ‘구조’의 빈틈을 메워주는 ‘보완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가, 협동조합은 ‘사회’ 내지 ‘구조’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그리하여 그것이 어떻게 ‘공동체’를 강조한다고 해도 방법론적으로는 ‘개체’의 관점에 입각해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해도 결코 그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14. 자, 이제 그럼 협동조합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그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회자본’론은, ‘사회적 경제’론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주도적으로 옹호했던 세력들이 선거에서 패퇴했으므로, 이런 담론들과 시도들도 사라지겠는가?

일단 대통령선거 직후엔 그래 보였던 것도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전열은 정비되었고, 장수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던 <한겨레>도 대선 직후엔 협동조합 기사를 전국기사로는 거의 내보내지 않다가 새해 들어 협동조합을 ‘멘붕 탈출을 위한 첫 걸음’으로 내세우고 있는 형국이다(링크1링크2). <경향신문>은 아예 ‘신년기획’으로 사회적 경제를 다뤘다(링크). 이 기획은 총 4차례에 걸쳐 다뤄졌는데, 그 중 압권은 기획의 최종편을 장식한 박원순과 정태인의 대담에서 “신뢰·네트워크 같은 사회적 자본 축적되면 거래비용이 준다”라는 정태인의 주장이다(링크). 이는, 내가 앞서 Ben Fine을 인용해 했던 치명적인 비판에 대해 그가 전혀 무지함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그러니까 정태인과 같은 이들은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인데(물론 포기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은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위 대담에서 정태인은 “박근혜 당선인은 사회적 경제라는 용어를 써본적이 없습니다”라고 함으로써 박 당선인의 인식이 낮음을 조롱한 뒤 현직 서울시장인 박원순에게 한 수 가르침을 베풀어주라고 점잖게 훈수를 두고 있다. 이러한 훈수가 역겹다 못해 안쓰러워 보이는 까닭은, 다름아닌 사회적 경제 및 협동조합이 향후 박근혜 행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채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국민 행복’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복지제도’의 그럴싸한 보완물로서!

(덧붙이자면, 여기서 ‘보완물’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보통 서유럽/북유럽과 같이 이미 복지제도가 잘 갖춰져있는 곳에서는 협동조합은 기존의 복지제도가 미처 침투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메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복지가 매우 미미한 곳, 그래서 복지제도가 앞으로 발달해야 하는 곳에서는 협동조합은 오히려 복지제도의 발달을 저지할 수 있고 또한 복지제도 발달의 미미함에 대한 변명꺼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 전자와 후자에서 ‘보완물’의 의미가 크게 다름을 주목.)

이 대목에서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이렇게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이 박근혜 정부와 ‘안락한 동거’를 할 때, 이제껏 마치 그것이 세상을 일거에 바꿔낼 것이라는 듯이 그것을 옹호했던 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이다. 당연히 둘 중 하나일 것. 투항하거나 투항하지 않거나.

현재로서는 ‘투항’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띨 것인지조차 분명치는 않지만, 내가 보기엔 어떤 의미에선 투항하지 않는 이들이 장기적으로는 진짜 문제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투항’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진지를 구축하기보다는 기껏해야 박근혜 일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들만의 해방구’를  쌓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회자본/사회적 경제/협동조합론과 ‘국민 행복’론이 상통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간 전자를 열성적으로 옹호하고 선전했던 이들의 뼈저린 반성이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다.

(일단, 끝)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4) ‘국민 행복’론의 한계와 모순

8. 출발은 그랬다. 국민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따뜻한 자본주의. 그러한 기조 아래 복지도 하고, 경제민주화도 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방법론적 개체주의’에 기반을 둔 ‘국민 행복’론과 복지체제/경제민주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임이 드러났다. 이는 선거과정 중에 김종인과 시장주의자들의 갈등으로 외화되기도 했지만, 일정한 내부단속을 통해 극복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거에서 이겼다.

앞서 말한대로, 선거 이후 그들이 한 것은 자신들의 ‘국민 행복’론에 맞는 한도 내에서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선별하고 각색하는 일이었다. 즉 박근혜 등은 자신들의 외연을 넓혀 (애초 자신들의 문제틀로는 포착되지 않는) ‘구조’의 문제를 수용하려고 하기보다는, 반대로 그러한 문제를 외면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듯 하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실용적이진 못해도 일관되긴 하다. 현재 박근혜 쪽의 경제정책 기조는 그들의 본원적인 ‘이념’에 맞게, 좀 더 탄탄하게 세워지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 때와는 달리 그들이 구체적인 거시경제적 목표를 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박근혜 쪽의 ‘국민 행복’론의 본질을 이해 못하고 하는 소리다. 예컨대 다음을 보라.

공약의 대상이 국가에서 철저히 개인으로 바뀌었다. …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박 당선인은 경제성장과 물가 안정 등 역대 정부가 초점을 맞췄던 거시(macro) 정책에서 탈피해 국민 개개인의 행복 증진에 중점을 둘 것”이라며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따뜻한 자본주의, 이른바 ‘자본주의 4.0’이 ‘근혜노믹스(박근혜의 경제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출처)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론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강력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다. 주지하다시피 케인스적 패러다임 아래서 경제학은 두 갈래로 존재했다. 개별 경제주체의 행위를 다루는 미시경제학과 그러한 개체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적 차원을 다루는 거시경제학. 간단히 말해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란 이러한 구분을 거부한다. 그냥 거부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거시경제학을 모조리 미시경제학의 틀 안으로 해소시켜버린다. 이에 따르면, 경제 전체의 모든 정보는 가격에 반영되고 각 개인은 그러한 가격을 보고 합리적 판단을 내리므로, 모든 경제현상은 개별 경제주체의 차원에서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이른바 ‘효율시장가설'[EMH: efficient market hyphthesis]).

아니, 신자유주의를 극복한다면서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니?! 누구든 이런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글에서 강조했듯이, 지금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경제학의 발달사에서 보면 주류경제학의 핵심 기조에 정확히 부합한다. 기이하게도 경제위기가 닥치면 지배블록 내부에서 어떤 투쟁이 벌어지는데, 이는 곧 위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약간의 ‘개혁’을 꾀하려는 쪽과 위기를 계기로 기존의 노선을 좀 더 강경하게 밀어붙이려는 쪽의 갈등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보면 이 투쟁은 백중세를 보이는 중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후자가 거의 압도하고 있는 셈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9.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를 무시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문제를 키우기만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7.4.7 공약이 실패했다고 해서 경제성장에 대한 목표치를 아예 세우지 않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문제는 ‘7% 성장’이라는 약속을 못 지킨 게 아니라 (7%든 4%든) 성장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이 현재 자본주의 경제 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당선자 쪽에서는 아예 거시경제(학)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지배계급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부합하는 것이어서 당연한 반응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서유럽 등에서는 2007년 이후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오히려 거시경제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흐름이 강력하게—지배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그 선봉에 서 있는 학자들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크루그만도 있다).

이론적인 영역에서뿐만이 아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도 현재 서유럽과 북미의 선진 자본주의국들에서는 경제가 (개별 주체의 행위들의 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아래 일정한 ‘개혁’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로만 보면 보잘 것 없는 규모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문의 문제가 미국경제는 물론 유럽경제까지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왜였겠는가? 이러한 사태로부터 교훈을 얻은 서유럽과 미국의 정책당국자들은 경제 전체에 걸친 이른바 ‘시스템적 위험'(systemic risk/crisis)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부처들 간의 구획을 초월하는 전담기구를 디자인하는 데 지난 몇 년을 보내고 있다.

중앙은행 개혁 문제는 또 어떤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하나의 독립된 기관으로서의 중앙은행은 그리 오래된 조직이 아니며, 경제적으로 중요해진 것도 매우 최근의 일이다. 특히 중앙은행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위상이 각별해졌는데, 이때 중앙은행이 부여받은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정책목표는 물가안정이었다. 그러던 중앙은행에, 이번 경제위기 이후 금융체계 전체의 관리라는 역할이 부여되고 있는 중이다(특히 영국이 그러함). 여기에서 나아가 최근 들어서는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물가안정 외에도 경제성장이나 실업문제에도 관여하고 있음은 이미 국내에도 수차례 보도되고 있는 바다(링크). 왜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현재 주요한 것은 인플레이션 위험보다는 디플레이션 위험이기 때문에, 일정한 물가상승을 허용하고서라도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물가안정이나 경제성장, 고용 등이 사실은 종합적인 경제의 움직임 속에서 결정된다는 (암묵적인) 깨달음이 자리한다.

 

10.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일단 이명박 정부는 위와 같은 세계적인 움직임을 전혀 감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때 저축은행 부실화를 중심으로 ‘시스템적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경계가 많이 늦춰져 있다는 느낌이고, 실제로 금융시스템 전반에 걸친 ‘총체적 (위험) 관리’를 전담할 기구조차—그 구체적 방안은 고사하고—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거의 모든 경제전문가들이 올해 한국경제의 ‘뇌관’으로 꼽고 있는 가계부채 문제의 경우, 새로 들어설 박근혜 인수위 쪽에서는 개별 가계의 ‘자력갱생’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부동산에 대한 기대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계부채 문제, 그리고 그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금융시스템 전반의 취약성의 문제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컨대 고용시장의 불안과도 궤를 함께 한다. ‘하우스 푸어’라는 사람들이 결국은 노동자요 동네 자영업자 아니겠는가? 불안정한 고용상황에 처한 노동자가 단순히 고용불안에만 시달리는 게 아니다. 그들은, ‘만약 내가 회사에서 잘리면 우리집은 빚더미에 올라 앉는다’라는 두려움에도 시달리고 있다. 주택 대출금 원리금 상환, 자녀들의 교육에 월급의 절반 이상이 깨지는 게 누구이겠는가? 정권이 기획하고 언론 매체가 동조해 조작된 주식시장 붐에 희생된 것은 또 누구인가? 그리고 그러한 부모 밑에서 어렵게 대학은 갔으나 취업을 못해 몇년째 청년백수로 살고 있는 것은 또 누구이겠는가?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현대자동차 등등의 문제가 어찌 조남호나 정몽구만 악마로 만들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던가? 쌍용차 국정조사가 아니라 청와대 국정조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지배계급들이 이제껏 위와 같은 문제들은 다룰 때 가장 애용하는 단어가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까 ‘니가 그릇된 결정을 한 것이니, 책임도 니가 져야 한다’라는 것. 누가 주제 넘게 비싼 집 사랬냐? 집값 오를 것 예상하고 산 거잖아. 망해도 넌 할 말 없어. 등록금도 제대로 못 내면서 대학은 왜 갔니? 취업 못 한거야 니가 부족해서 그런 거지. 주식대박 좇더니 꼴 좋다…. 어리석은 녀석들! 불행하지?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자, ‘국민 행복’!

그러니까, 박근혜의 ‘국민 행복’은 ‘도덕적 해이’와 논리적 찰떡궁합 관계인 것이다.

 

11. 그러나 이렇게, 박근혜와 그 측근들이 ‘도덕적 해이’와 ‘국민 행복’을 내세우며 사태를 개체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할수록,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며 시스템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이 속속 드러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금융규제법인 도드-프랑크(Dodd-Frank) 법안에 반대하던 공화당 의원들이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있음을 전한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최근 기사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이에 따르면 공화당 상원의원 데이비드 비터(David Vitter)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도드-프랑크 논쟁이 벌어지던] 처음엔 나는 공화당원들이 이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규제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우리가 필요로하는 제대로 된 시스템 개혁(systemic reform)임을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 (출처)

아직까지도 ‘규제완화’ 노래만 부르고 있는 우리나라 보수파들은 언제쯤 위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될까? (대체 규제완화 15년에, 더 완화될 규제가 있더란 말이냐…) 그들이 ‘국민 행복’을 부르짖으며 ‘구조’에 대한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는 동안, 우리가 마침내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의 규모도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 행복’론에 기초한 근혜노믹스의 모순이다. 즉 박근혜 식 ‘국민 행복’은 그것이 추구되면 추구될 수록 그것이 외면하려고 하는 ‘구조’의 존재를 더욱 강력하게 드러낼 것이며, 나아가 ‘국민 행복’이 아니라 ‘국민 절망’, ‘국민 파멸’로 이르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거창한 차원이 아니더라도, ‘국민 행복’을 모토로 한 ‘개체적 접근’은 매우 명확한 한계를 갖는다. 기본적으로 ‘국민 행복’론의 골자는 어려운 국민들에게 구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어려운가? 지금은 일부 부자들을 빼면 누구나 다 어렵다. 99%까지는 아니어도 줄잡아 80%는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라는 외침이 이제 곧 곳곳에서 들려올 것이다. 깡통주택, 깡통전세에 이어, 최근엔 ‘깡통원룸’도 나왔다(링크).

반값등록금만 해도, 박근혜 식의 ‘차등 등록금’제가 실행가능하려면, 그 이전에 이미 대상자들에 대한 가계소득 및 가계자산/부채조사가 완벽하게 이뤄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박근혜 측은 이러한 조사를 실시할 것인가? 내가 보기엔 ‘못한다’가 정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반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박근혜 측은 막대한 조사비용을 핑계로 일정한 한도 안에서 조사의 범위를 결정하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상위 1%의 부자들은 장학금을 받지 못할텐데, 이들은 장학금을 받지 않기 위해(!) 소득/자산/부채조사에 응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에 하나 위와 같은 조사가 충분히 이뤄진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박근혜 측이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즉 현재 한국경제의 온갖 ‘구조적 문제들’을 폭로할 것이다. 이를테면 상당수의 가계들이 겪고 있는 다중채무의 실태가 이를 통해 드러날 것인데, 그것은 현재 한국경제의 금융구조의 실상은 물론 예컨대 가계부채와 청년실업 간의 관계를 보여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예전에는 박근혜의 ‘차등 등록금제’에 반대하면서 ‘보편적인 반값등록금’을 주장하는 것이 ‘범좌파’의 입장이었다면, 앞으로는 ‘차등 등록금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 모든 가계에 대한 소득/자산/부채조사 철저히 시행하라’가 매우 실효성 있는 구호가 될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3) ‘국민 행복’의 현실적 의의

5. 물론 박근혜 당선자 등이 단순히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 또는 ‘지적 한계’ 안에 갇혔기 때문에 자기들도 어쩔 수 없이 ‘국민 행복’을 들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음으로만 친다면야, 그러한 한계보다는 현실의 강제가 더 중요한 요소다. 어쨌든 ‘국민 행복’이 처음엔 그러한 한계의 산물이었는지 몰라도 일정한 임계점을 지나면 그것은 계산된 ‘의도’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된다. 즉 그것은 이른바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위기극복 시도들, 즉 케인스주의나 신자유주의도 겪었던 과정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민 행복’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면, 그러한 조장과 조정의 증거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이와 관련, 우리는 국내의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를 통해 유포되어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자본주의 4.0’이라는 담론을 한번 떠올려봐도 좋겠다. 요새는 (특히 미디어계 안에서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이미 ‘자본주의 4.0’에 대해 잊어버린 분들도 많으시리라. 이분들을 위해 잠시 ‘자본주의 4.0’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자.

‘자본주의 4.0’이란 말 그대로 ‘4세대 자본주의’를 말한다.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산업혁명이라는 용어와 이미지로 기억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제1세대라면, 케인스주의적 정책 패러다임에 입각해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로써 번영을 주도하던 ‘수정 자본주의’가 제2세대다. 그렇다면 제3세대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3.0’은 그 이후에 출현했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기존의 케인스주의적 모형이 봉착한 한계를 ‘금융화’와 ‘작은정부’론으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 그것은 한때 바로 그러한 자신의 ‘성공’을 낳았던 특징들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결국 ‘자본주의 4.0’이란 바로 위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제안된—박근혜의 ‘국민 행복’과 마찬가지로—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그 어떤 장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몇 가지 심각한 결과들, 예를 들어 소득과 부의 양극화, 일자리의 비정규직화/불안정화, 엄청난 규모의 금융시스템적 취약성, 모든 경제주체들(가계, 기업, 정부)에 있어 부채의 급증 등을 낳았다는 데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이견의 여지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자본주의 4.0’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 같이 따뜻한 자본주의여야 할 것이다. 제안된 시기나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박애자본주의’, ‘사회책임경영’ 등도 비슷한 취지를 담고 있다.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한 자본주의’—바로 박근혜 당선자와 ‘자본주의 4.0’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물론 그는 한 번도 (적어도 알려진 한에서는) ‘어머니’였던 적은 없었으며 그런 이미지는 순전히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가 가상적으로 복제함으로써만 그에게 덧씌워질 수 있었다. 하여튼 보수주의자 박근혜 및 그 측근들이 소득 재분배와 복지를 입에 올리고 심지어 상행위의 자유를 일정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인정하고 그것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은 언뜻 봐서는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6. 요컨대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따뜻함’을 복지와 경제민주화로 구체화시켜 궁극적으로 ‘국민 행복’을 이뤄내겠다는 것이 후보시절 박근혜 캠프가 내세웠던 바였다.

그러나 한번 잘 생각해보자. 과연 복지(여기서는 전면적인 복지, 즉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가 ‘국민 행복’이라는 틀로 포괄이 가능한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던 이론적 틀에 입각해 말하면, ‘국민 행복’이란 철저한 ‘개체주의’에 입각해 있는 반면 복지국가나 경제민주화는 누가 뭐래도 하나의 국민경제의 재생산구조의 문제다. 즉 그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이고 ‘구조’에 대한 문제이다. 곧 보수적인 지배계급들이 볼 수 없는 차원, 또는 애써 건들지 않으려는 차원의 문제란 얘기다. 이렇게 보면, ‘경제민주화론자’로 알려진 김종인이 왜 박근혜 캠프 안에서 다른 시장주의자들과 그토록 반목했는지, 왜 김종인이 ‘박근혜 캠프 안에서 경제민주화를 이해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라고 틈만 나면 성토했는지가 감이 잡힐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겪었던 문제의 시발점은, 경제의 구조 전반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론자가 ‘국민행복추진위원회’라는 기이한 모임의 대표 자리를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국민 행복’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복지나 경제민주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먼저,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내세우는 한 그는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 후보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의 핵심으로 공통적으로 강조되었던 두 가지가 바로 대기업 내부의 지배구조 문제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 문제였다. 물론 선거에서 주축을 이뤘던 박근혜-문제인 구도에서 벗어나는 후보들, 특히 김소연, 김순자 등은 진정한 경제민주화란 재벌개혁으로 축소될 수 없음을 역설했지만, 적어도 경제민주화를 재벌개혁 수준에서만 파악하더라도 거기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살아있다고 봐줄만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요즘, 즉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뒤에, 정권인수위원회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거의 발언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재벌개혁은 몇몇 만만한 기업총수를 겁주는 선에서 봉합되고 있는 듯하고(지금까지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한화 김승연과 SK 최태원. 그마저도 김승연은 이제 풀려난 거나 마찬가지다),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구조 문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원활화의 차원으로 축소되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있으나마나한 전경련을 해체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중소기업협회를 방문해 고개를 조아리는 당선자의 제스처. 이 모든 것이 겨냥하는 것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국민 행복’, 즉 이 맥락에서는 ‘중소기업주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이 과정이 대기업에게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만약 문재인이 당선되어서 현재 박근혜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 재벌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재인이 전경련 해체해야 한다고 했었더라면, ‘이것은 재벌에 대한 선전포고다’라는 선언이 벌써 나왔을 것이다. 물론 전경련 해체가 재벌에게 주는 피해는 거의 없다. 어차피 거기 회장,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경련 같은 친목단체에 국가가 나서서 해체해라 마라 하는 것 자체가 웃긴다고 생각한다.)

 

7. 복지는 또 어떤가? 주지하다시피 박근혜 복지의 특징은 선별적이라는 데 있다. 왜 그들은 보편복지 대신 선별복지를 주장하는가?

흔히 선별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비용문제를 거론한다. 즉 보편복지에는 돈이 많이 들고, 아직 우리나라는 그것을 시행할 여력이 없다는 거다. 반대로 보편복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지난번 ‘무상급식’ 논란에서도 나타났듯이) ‘낙인이론’이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보기엔 둘 다 틀렸다. 낙인은 보편복지를 해도 찍히고, 비용으로 치면 (규모의 경제 등을 무시하고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효과가 같으면 비용도 같다. 예컨대 경제수준에 따른 등록금 차등화와 부자증세를 통한 반값등록금제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등록금 차등화의 경우, 오히려 순기능도 있다고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가계소득 및 자산/부채조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는 것인데, 만약 그런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여러가지 쓸모가 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를 크게 능가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 특히 그런 조사는, 지하경제양성화라는 박근혜 측의 기조와도 맞기 때문에 야당이나 시민사회 쪽에서는 강력하게 ‘철저 조사’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는, 이미 지금까지 논의의 진행을 통해 상당히 명확해졌듯이, 전자는 ‘개인’에 초점을 둔 시스템인 반면 후자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 입각한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후자는 이 사회엔 소득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들이 만연해 있으며 그런 문제들은 사회의 전체 메커니즘에 의해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경제/사회시스템 전반에 걸친 리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다. 반대로 ‘선별적 복지’는 위와 같은 병리현상들은 몇몇 개인들이 (부모로부터든, 공동체로부터든)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겪는 불행이라는 생각 위에 서 있다. 이들 몇몇 불행한 이들(레 미제라블!)과는 달리 다른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법률이 정하는 범죄를 그들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들의 이웃이 겪는 불행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따라서 국가가 나서서 불행한 이들을 도와야 하며, 흔히 ‘복지’라고 하는 게 바로 그 수단이다. 요컨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불행한 이들에게 선별적으로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에게 ‘행복’이 뭔지를 알게 해 주자. 이것이 바로 박근혜식 복지다.

그런데 이런 식의 복지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왜냐하면, 만약 복지가 그런 것이라면 이미 우리나라도 복지국가라고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국민을 돌봐주는 국가, 그리고 그 국가의 수반, 국민의 아버지! 박정희! 그의 딸, 박근혜! 권위주의!! 복지 얘기가 많아지니까 ‘복지 경험’이라는 용어도 생겼는데,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보편복지 하에서 복지경험은 사회적 연대의식에 기반해 있고 또 그것을 증진시킬 것이지만, 선별복지 하에서 복지 경험은 ‘국가에 대한 고마움’만을 낳을 것이다. 각하 만세! 박근혜의 복지, 박근혜의 ‘국민 행복’은 그래서 경제민주주의하고는, 나아가 민주주의 일반과는, 그래서 우리 중 몇몇이 건설하고자 하는 ‘복지국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2) ‘국민 행복’의 이론적 의의

3. 근혜노믹스의 핵심을 ‘국민 행복’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사적이거나 향후 상황전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피할 구실을 마련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매우 뿌리깊은 보수파의 ‘입장’이 깃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입장은 경제학에 고질적인 ‘개체주의'(individualism)와 관계가 깊다. 주지하다시피 스미스에 의해 집대성되었고 리카도에 의해 (부르주아적으로) 완성된 고전정치경제학에서 주인공은 ‘개인’이다. 흔히 이 대목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인’과 ‘사회’를 대립시켜, 전자를 강조하면 속류/(신)고전파, 후자를 강조하면 과학/마르크스파라고 여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꼭 그렇진 않다. 마르크스가 비록 ‘사회’를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개인’을 중심으로 한 논의를 싸잡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논의들이 개인을 ‘사회의 산물로서’ 다루지 않고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개인’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했을 뿐이다. 실제로 마르크스 자신 또한 {자본론} 등에 ‘대표적 개인'(representative individual)을 등장시키곤 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강조하는 ‘추상화’의 중요한 기법이다(물론 마르크스의 ‘대표적 개인’은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대표적 개인’이랑은 크게 다르다. 후자는 일반적으로 이성적 능력만을 갖는 텅빈 개인이지만, 전자는 만약 그것이 텅비어있다면 이는 오직 단계적인 추상과정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런 것이며 이후 서술과정을 통해 채워넣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스미스나 리카도를 포함하는 18-19세기 유럽 선진국들의 사회사상가들, 정치경제학자들은 ‘개인’을 다루면서도 위에서와 같은 구별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나중에 정치경제학이 속류화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즉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전파경제학에서는 ‘사회의 산물로서의 개인’이라는 관점과 ‘동떨어진 개인’이라는 관점이 혼재되어 있었던 데 반해 속류경제학에서 개인은 오로지 후자의 측면에서만 고찰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에게 고전정치경제학은 딱 그 만큼 과학적이었던 것이고, 속류정치경제학은 딱 그런 의미에서 일말의 과학성도 담보하지 못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다(링크). 링크된 글에서 말하는 ‘사회’ 관점이 비록 마르크스에 의해 꿋꿋하게 견지되었던 반면 리카도에서 밀(J. S. Mill)을 포함한 경제학의 ‘주류적’ 전통에서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사회’ 관점이 단순한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세계 특유의 물적 현실을 포착하는 것인 한, 속류경제학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류적 전통 내에서도 ‘사회’ 관점은 어떤 식으로든 ‘재발견’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1930년대부터 본격화한 이른바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출현이 그 결과물이었다. 물론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당시의 경제위기 속에서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그렇다고 해서 경제학이 그 특유의 속류성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앞서 박근혜를 포함한 보수파의 뿌리깊은 ‘입장’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속류성, 곧 ‘사회’ 내지는 ‘구조’를 이론적으로 무시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태도는 단순히 ‘이론’의 영역에만 머무는 게 아니고, 박근혜의 각종 정책들로 구체화되어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까지 재현된다. 바로 ‘국민 행복’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서 말이다.

 

4. 위와 같이 보면, 박근혜가 ‘국민 행복’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며, 또 그와 유사한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가장 비근한 예가 이명박의 ‘공정사회’론이고,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보수정권에서 주창된 ‘빅 소사이어티’가 아닐까 한다(다음 글 참조: 링크). 물론 이러한 입장의 직접적 원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게 된 정책 패러다임을 가지고 기존의 ‘케인스주의’의 위기를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했던 쌔처(Margaret Thatcher)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위기를 맞았고, 우리는 그 대안으로 박근혜 버전의 ‘국민 행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우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제기된다: ‘박근혜 등의 “국민 행복”이 쌔처의 “사회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와 판박이라면, 그들은 신자유주의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려 한다는 것인가?’ 겉으로 보기엔 모순 그 자체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단호하게도 ‘그렇다’이다. 무슨 얘기냐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그들이 갇혀 있는 지적 한계 안에서만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고 또 그 해결을 구한다는 점이다.

(계속)

‘근혜노믹스’의 밑그림 (1) 왜 ‘국민 행복’인가?

0. 기가 막히게도, 박근혜가 제18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많은 이들이 허탈했을 테지만, 괜히 유치하게 ‘멘붕-힐링 놀이’따위에 시간을 더이상 허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들은 이미 ‘박근혜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꽤 치밀하게 준비된 비전들을 속속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자, ‘박근혜 시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까? 나는 뭐 경제학을 하는 입장이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그냥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생각을 조금 풀어보겠다.

박근혜 시대 경제정책을 특징짓는 키워드 하나만 꼽아보라면 나는 ‘국민 행복’을 택하겠다. 나는 이 표현 속에 ‘근혜노믹스’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고 감히 단언한다.

 

1. 내가 감지하고 있는 한 시초(beginning)는 아마도 ‘국민행복추진위원회’였던 것 같다. ‘도대체 이 뚱딴지 같은 이름은 뭔가?’ 박근혜 당선자가 김종인이라는 사람을 데려와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라는 야릇한 직함을 맡겼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이다. ‘이런 ㅆㅂ, 사람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어디서 행복타령이냐?’ 이런 생각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행복’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어떤 학자는 “박근혜의 행복 추진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을 하기도 했고(링크), 선거가 끝난 뒤 (특히 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하자) 많은 매체에서는 박근혜의 행복은 곧 국민의 불행이라는 성토가 난무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행복타령’이 먹혀들었고, 박근혜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말하는 ‘국민 행복’의 실체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 박근혜가 말하는 국민행복이란 무엇인가? 무릇 경제학에서는, 국민소득과 같은 ‘경제적 지표’로는 삶의 전반적인 질을 나타낼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행복’에 주의를 돌린다. 인간이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돈을 좀 벌어보니 꼭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더라는… 뭐 그런 스토리다.

그러니까 물질적 풍요는 일정 정도 누리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육신의 배고픔과는 다른 그 어떤 빈곤에 시달리고 있을 때, 즉 버젓한 직업과 단란한 가정이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있을 때, 자살자가 넘쳐나고 온갖 반사회적 범죄가 여전히 횡행할 때…! 비로소 ‘행복’이라는 것이 경제학적으로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법이다. 앞에서 내가 어리둥절했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다. 지금은 ‘행복’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을 확보해야 할 때이니까. 아니, 집값 떨어져서 몰락한 가장에게 빚을 탕감해주면서 ‘행복 자금’이라고 하는 건 좀 웃기지 않은가.

더구나 박근혜 아닌가? 그는 ‘성장주의자’ 박정희의 딸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은 ‘여전히 우리는 분배보다는 성장에 목마르다’라는 고백을 서슴지않는 자들로 넘쳐난다(링크). 이런 자들이 왜 ‘행복’을 입에 담는가? 오히려 그들은, ‘행복이니 복지니 분배니 하는 것들, 그저 복에 겨워서 내뱉는 소리다. 그리스 안 보이나? 우리는 더 성장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해야하지 않느냐는 거다.

하지만 굳이 이해를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아마도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사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간단히 말해,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사람들이 흔히 ‘복지’라고 말하는 것을 그냥 ‘국민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뿐이라는 거다. ‘복지’라는 표현이 흔히 ‘좌파적’ 색채로 덧칠되어 있으니, 그들이 이런 표현에 일정 정도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실제로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복지’가 있어야 할 곳에 ‘국민 행복’만이 난무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경제정책의 기조로서 ‘국민 행복’이 ‘복지’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체하는 것은 단순히 보수파—특히 한국의—가 갖는 ‘복지 알러지’ 때문만은 아니다. ‘복지’ 대신 ‘국민 행복’을 썼을 때 얻을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후자가 전자에 비해 그 실체가 애매모호하고 측정도 어렵다는 점에서 행여 나중에 ‘실패’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가 훨씬 쉽다는 게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캠프는 (애초 의도와 상관없이) 매우 훌륭한 캐치프레이즈를 만든 것이고, 나아가 박근혜 아닌 문재인이라 해도 가능만 하다면야 ‘국민 행복’을 선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속)